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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족보

족보를 황토색 표지에 붉은끈으로 묶은 이유 ?

by 연송 김환수 2011. 6. 6.

 

 

가계(家系)에 대한 관심은 어느 민족에게나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족보에 대한 마음은 정말로 남다르다.

 

6·25 사변 피난길을 나설 때에도 제일 먼저 챙긴 것이 족보였다지

않은가.

 

중국도 왕족만이 족보를 기록할 뿐, 우리처럼 각 가정마다 족보를

만들어 수백 년씩 전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왜 우리 민족은 이토록 족보에 연연하는 것일까?

족보의 색깔은 황토색이고 그 묶는 끈은 붉은색이다.

 

황토는 인간이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가다는 뜻이고,

붉은 끈은 바로 핏줄을 말한다.

 

족보란 바로 삶과 죽음을 거슬러 현재 자신이 왜,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는지를 확인해 주는 유일한 통로인 것이다.

 

족보를 단순히, 조상들의 벼슬이나 관직 여부를 확인하며 상놈이냐

양반이냐 계급을 구분 짓는 가문의 신분증 정도로 여긴다면,

이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꽃도 이름을 알고 나면 더 특별해지는 법이다.

 

족보를 통한 뿌리찾기란 내 이름 석 자에 담긴 뜻을 제대로 알려는

노력인 셈이다.

 

지금도 국립중앙도서관 계보학 자료실에는 죽음을 눈앞에 둔 어르신

들이 하루에도 1, 2백 명씩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열람을 신청하

신다고 한다.

 

집안 어른들의 족적을 살펴, 자신이 어디에 와서 어디로 돌아가는지 확인하고 싶은신게다.


윤영무,「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中

 

 안산김씨 1776년 족보

 

 

간행인 김양심(金養心)  약력

 

【전자】   통덕(通德)

【 자 】    경이(敬以)

【생년】   을사(乙巳, 1725)

【 부 】  김상성(金相星)

【 조 】  김석보(金錫保)

【 증 】  김성대(金聲大)

【외조】   유익명(柳益明) (全州)

【처부】 이성린(李聖麟) (全州)

【직력】 대사간(大司諫)

【본관】   안산(安山)

【거주】 경(京)

 

김양심(金養心) : 영조 1년(1725)~정조 1년(177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이며 상성의 아들이다. 자는 경이, 호는 과욕재이다.

 

영조 24년(174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장령·헌납을 역임

 

하였고 사간원 대사간, 첨지중추부사, 승정원 우승지에 이르렀다.

 

사간원(司諫院)은 조선 시대 왕에 대한 간쟁(諫諍)·논박(論駁)을 임무로 하는 기관이다.

품계

관직

정원

비고

정3품

대사간(大司諫)

1명

 

종3품

사간(司諫)

1명

 

정5품

헌납(獻納)

1명

 

정6품

정언(正言)

2명

 

대사간 : 조선 시대에 둔, 사간원의 으뜸 벼슬. 품계는 정삼품으로,

임금에게 정사의 잘못을 간(諫)하는 일을 맡았다.

 

 

김양심(金養心) 1725(영조 1) - 1777(정조 1)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경인(敬仁). 호는 과욕제(寡慾齌). 본관은 안산(安山). 상성(相星)의 자(子), 화양사(華陽寺)에서 수학하였다.

 

1748년(영조 24) 무진(戊辰) 춘당정시(春塘庭試) 문과에 급제하여 바로 승정원 가주서(假注書)로 임명되었고 이어서 승정원 부정자(副正字)가 되었으며 그 후 휘릉별검(徽陵別檢)에 임명되었다.

 

1750년(영조26년) 의정부 사록(議政府 司祿)을 제수 받았고 1755년(영조31년) 성균관 전적(典籍), 8월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을 1756년(영조32년) 춘추관 의사관(議事官)이 되었다가 낙안군수(樂安郡守)로 나갔다.

 

1760년(영조36년) 4월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으로 임명되었고 이어서 통례원 상례(通禮院 相禮)가 되었다.

 

1762년 (영조38년) 사헌부 장령(掌令)에 승진하였다. 1763년(영조39년) 영해부사(寧海副使) 1769년(영조45년) 종부시정(宗簿侍正)을 제수 받고 춘추관 편수관(春秋館 編修官)이 되고 1773년(영조 49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겸 해운판관(海運判官)을 역임하였다.

 

1774년(영조50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이 되었고, 과거장에서 선비들이 시간을 꾸짓고 낭관(郎官)을 때리는 사건이 일어나자 왕에게 상소하니 가납하고 시정하라 하였다. 11월에는 증광회시(增廣會試)에서 감사관(監査官)이 되었다가 왕의 특명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고 1775년(영조51년) 승정원 우승지(承政院 右丞旨)에 임명되었다.

 

1777년(정조1년) 병졸하니 53세였고 포천시 일동면에 묘가 있다.

 

 

 

 

 

윤영무 선생의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 

책 200 페이지에 있는 글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