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대사전에서는
세적(世蹟)이란 단어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외래어는 사전에 등재를 잘 하면서
조상의 숨결이 느껴지는 세적이란
단어가 국어 사전에 없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적(世蹟) 이란 단어의 정의를 내려 봅니다.
세적이란 역사적으로 조상이 남긴 발자취에 대한 기록물과 시설의
자취를 수록한 책(冊)을 말합니다.
세적은 집안의 사적(史蹟), 교지, 유허(遺墟), 유물, 전적(典籍;책),
문집, 간찰, 유훈, 행장, 신도비명, 비문, 제문 등 가문의 주요 흔적
(痕跡)을 기록한 사문서 입니다.
따라서 세적이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후학에게 제공하는 귀중한
역사자료입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계보 연구가님의 몫으로 남겨 둡니다.
안산김씨 세적(世蹟) 목록(目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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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욕제집(寡慾齌集) : 과욕제는 김양심(金養心)의 호임
진헌집(眞軒集) : 진헌은 김처암(金處岩)의 호임
김양심(金養心) 1725(영조 1) - 1777(정조 1)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경인(敬仁). 호는 과욕제(寡慾齌). 본관은 안산(安山). 상성(相星)의 자(子), 화양사(華陽寺)에서 수학하였다. 1748년(영조 24) 무진(戊辰) 춘당정시(春塘庭試) 문과에 급제하여 바로 승정원 가주서(假注書)로 임명되었고 이어서 승정원 부정자(副正字)가 되었으며 그 후 휘릉별검(徽陵別檢)에 임명되었다.
1750년(영조26년) 의정부 사록(議政府 司祿)을 제수 받았고 1755년(영조31년) 성균관 전적(典籍), 8월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을 1756년(영조32년) 춘추관 의사관(議事官)이 되었다가 낙안군수(樂安郡守)로 나갔다. 1760년(영조36년) 4월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으로 임명되었고 이어서 통례원 상례(通禮院 相禮)가 되었다.
1762년 (영조38년) 사헌부 장령(掌令)에 승진하였다. 1763년(영조39년) 영해부사(寧海副使) 1769년(영조45년) 종부시정(宗簿侍正)을 제수 받고 춘추관 편수관(春秋館 編修官)이 되고 1773년(영조 49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겸 해운판관(海運判官)을 역임하였다.
1774년(영조50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이 되었고, 11월에는 증광회시(增廣會試)에서 감사관(監査官)이 되었다가 왕의 특명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고 1775년(영조51년) 승정원 우승지(承政院 右丞旨)에 임명되었다. 1777년(정조1년) 병졸하니 53세였고 포천시 일동면에 묘가 있다.
이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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