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활정보방/오늘의 소사

[스크랩] 오늘의 소사 (10/15) 스크랩 게재를 중단합니다.

by 연송 김환수 2010. 10. 15.

 

----------------------- 오 늘 의 관 심 뉴 스 ----------------------------------------

칠레 인간드라마 '주역' 마지막 구출자


(AP) "매몰광부가 무사히 구조됐습니다!""매몰광부가 무사히 구조됐습니다!" (AP=연합뉴스)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가운데)이 영부인 세실리아 모렐 여사(왼쪽), 라우렌세 골본 칠레 광업부 장관과 함께 13일 코피아포 산 호세 광산의 33명의 매몰광부 중 첫 번째로 플로렌시오 아발로스가 구조된 후 기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Chile's President Sebastian Pinera, center, first lady Cecilia Morel, left, and Mining Minister Laurence Goldburn, right, talk to the press after the rescue of the first of 33 trapped miners at the San Jose Mine near Copiapo, Chile Wednesday, Oct. 13, 2010.(AP Photo/Jorge Saenz)

칠레대통령 "당신도, 칠레도 달라졌다"

(서울=연합뉴스) 박용주 기자 = 33명의 광부 중 마지막으로 구출된 작업반장 루이스 우르수아(54)는 69일간에 걸친 비극을 희극으로 바꿔놓은 주인공 중에서도 주연이었다.

우르수아는 생과 사를 가르는 공간에서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로 괴로워하는 동료들을 때로는 유머와 위트로, 따로는 단호한 지도력으로 다잡은 지도자였다.

추가 붕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지하 약 700m 갱도에서 다른 동료들이 모두 떠난 자리를 지키는 막대한 스트레스도 견뎌냄으로써 전 세계가 시청한 인간 승리의 인간 드라마에 마침표를 찍었다.

13일 9시50분께(현지시간) 작업반장이었던 우르수아가 지상으로 올라오자 구조현장에는 환희가 가득했다.

지하 약 700m 아래 매몰된 광부 33명 전원이 69일간에 걸친 지하생활을 이겨내고 생환할 것이라는 꿈이 실현된 순간이었다.

AFP.AP.dpa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마지막 구출자 우르수아는 캡슐에서 나온 직후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에게 "우리가 열심히 싸운 약 70일이 헛되지 않았다"면서 "전 세계가 기다린 일을 우리가 해냈다"고 말했다.

우르수아는 "우리는 힘과 정신력을 갖고 있었고 싸우길 원했다. 가족을 위해 싸웠다"면서 "이는 위대한 일이었다"고 덧붙였다.

피녜라 칠레 대통령은 "당신도, 우리나라도 옛날의 모습이 아니다"면서 "당신이 내게 영감을 줬다"고 이날의 환희를 표현했다.

우르수아 곁에 선 피녜라 대통령은 구조현장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칠레 국가를 부르면서 감동을 함께했다.

우르수아의 지도력은 자칫 비극이 될 가능성이 컸던 매몰 사고를 희극으로 바꿔놓은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우르수아는 매몰사고 이후 광부들 간 질서를 유지하고 각자에게 임무를 할당하는 한편, 지하 갱도의 지도까지 만드는 등 리더역을 충실히 수행한 인물이다.

특히 세상과 단절된 최초 매몰 이후 17일간은 그의 지도력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쉽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구조작업에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는 가정하에 광부들이 48시간마다 한 번씩 스푼 2개 분량의 참치와 쿠키 반 조각, 우유 반 컵으로 버티도록 했다.

그는 광부들의 헬멧에 달린 전등의 사용도 엄격히 제한했다.

몇 대의 장비를 갖고 있었지만 식수를 확보하기 위해 불도저를 사용한 것으로 제외하곤 장비도 쓰지 않았다.

장비를 사용하는 것이 부족한 산소를 고갈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광부들이 절망적인 분위기로 빠져들면 농담을 건네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유도할만큼 전술도 능수능란했다.

광부들의 리더 역할을 한 그가 마지막 구출자로 자원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라우렌세 골보르네 광업장관은 "광부들이 이번 사태에 대처하는 방법이 모두 그렇듯이 식량을 배분한 방법도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된다"고 치하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오-늘-의--소-사---------------------------------

 

1865년 화폐속의 인물 베요 세상떠남

 


베요(Andres Bello)칠레:20,000Pesos

베네수엘라 태생 칠레의 시인·학자. 1781. 11. 29 ∼1865. 10. 15

어려서부터 고전,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을 탐독했는데, 이것은 그의 문체와 문학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카라카스의 베네수엘라대학에서 철학·법률·의학을 공부했다.

독일의 자연학자이자 여행가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사귀어 지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해 후기 작품에서는 지리에 관한 글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베요는 남아메리카 해방운동가 시몬 볼리바르의 친구이자 선생이었으며, 그와 함께 베네수엘라 혁명위원회를 대표해 정치적 임무를 띠고 런던에 파견되기도 했다.

19년간 런던에서 칠레와 콜롬비아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일했고 남은 시간을 이용해 연구·저작·언론 활동을 했다.

베요의 문학적 위치는 영국에서 쓴 2편의 시 〈아메리카의 시 Silvas americanas〉로 확립되었는데, 그는 이 작품에서 남아메리카의 풍경에 대한 숭고한 감명을 표현하고 있다.

런던에서 출판된(1826~27) 이 작품들은 원래는 긴 미완성 서사시 〈아메리카 America〉의 일부로 계획되었던 것인데, 이 가운데 2번째 시 〈열대지방의 농업에 부치는 시 Silva a la agricultura de la zona torrida〉는 아메리카 열대지방의 산물들을 시적으로 묘사했으며 베르길리우스를 생각나게 하는 기법으로 시골생활을 찬미한 작품이다. 그것은 19세기 아메리카인이 스페인어로 쓴 글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들 중 하나이다.

1829년 칠레 외무부의 한 직책을 맡아 산티아고에 정착했으며, 이 도시의 지적·정치적 분야에서 뛰어난 역할을 했다. 칠레 시민이 되고 상원의원에 임명되었으며 1843년에는 칠레대학교를 설립하여 죽을 때까지 총장을 지냈다.

1855년에 공표된 칠레 민법의 제정에도 참여했는데, 이 법은 콜롬비아와 에콰도르에서도 채택되었으며 유럽의 나폴레옹 법전처럼 남아메리카 전역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산문 작품들은 법·철학·문학평론·언어학에 걸쳐 폭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스페인어 문법( Gramatica de la lengua castellana)(1847)은 이 분야에서 오랫동안 최고의 권위를 지켜온 책이다

 

---------------------

1934년 중국공산당 대장정 시작

 

1934년 10월 15일 새벽 중국 남부 강서성 서금 소비에트(공산당 점령지역). 아직 걷히지 않은 어둠을 뚫고 8만명의 중국 홍군(공산당 군)이 군수품과 온갖 물자를 등에 지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탈출은, 장개석이 1년 전부터 70만여명의 대군으로 소비에트 주위에 철조망과 시멘트 요새를 설치,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치면서부터 예고됐다. 국민당 군의 압박으로 소비에트 지역이 점점 생활필수품과 의약품 등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게 되자, 공산당 지도부는 마침내 중국 남부의 강서와 복건성 일대의 근거지를 버리고 중국 서북부의 오지인 섬서성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포위망이 가장 약한 서남쪽을 돌파한 홍군은 추격해 오는 국민당 군과 각 지역의 적대적인 군벌 군대를 뿌리치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뒤에는 가족 대부분과 병들거나 부상입은 2만명을 포함한 2만8000명의 홍군이 남겨졌다.

주은래와 주덕, 임표, 팽덕회 등이 이끄는 홍군이 1935년 10월 연안에 도착해 자리를 잡기까지 행군한 거리는 무려 9600km. 당초 출발자 중에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인원은 불과 7000명 뿐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 창립 이후 15년 동안 중국 남부와 동부에서 이룩했던 혁명의 성과를 모두 잃어버리고 첩첩산중에 움츠리게 된 것이다.

장개석이나 다른 관측자들의 눈에는 이들이 마침내 뿌리가 뽑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정은 중국 공산당사에서 패배가 아니라 승리, 그것도 역사를 바꾼 대승리로 기록됐다. 홍군은 장정을 통해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다는 '신화'를 만들어냈고 사회주의 혁명의 이념을 도처에 전파했던 것이다.

 

--------------------------------------------------------------------

1917년  전설의 미녀 스파이, 마타하리 총살


마타 하리(Mata Hari)의 본명은 마르가레타 게르트루드 첼레(Margarete Gertrude Zelle)이다. 1876년 8월 7일 네덜란드 레바르덴에서 출생한 그녀는 19살이 되던 해 당시 네델란드령 동인도제도에 속해있던 인도네시아에서 네델란드 상인과 결혼해 자녀를 두었다. 그녀는 인도네시아 체류 기간 중 에로틱한 전통 사원 춤을 익힌 다음 파리로 건너가 인도네시아 어로 '여명의 눈동자(Eye of dawn)' 즉 태양이란 뜻의 '마타 하리'란 예명의 무희로 활동을 시작했다.


파리로 건너 오기 전 이혼을 했던 마타 하리는 여러 유럽 도시들을 순회하며, 무희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의 인기가 시들기 시작할 무렵에 1차 대전이 발생했고, 대전 발발 2년 후인 1916년 마타 하리는 '스파이'의 삶을 시작했다. 마타 하리의 스파이 생활은 '불신'에서 비롯된다. 1차 대전 직후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을 때, 그녀는 독일에 체류 중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정부는 그녀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프랑스 입국을 계속 거부했다. 불신 속에서 싹튼 마타 하리의 비극적 종말은 20살 연하의 러시아 청년과의 열애에서 시작된다. 1916년 부상당한 러시아군 연인을 만나기 위해 그녀는 위해 '프랑스를 위해 일하는 첩자'의 신분을 강요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마타 하리가 독일측으로부터 동일한 요구를 받은 이후였다. 결국 마타 하리는 이런 연유로 인해 1917년 프랑스 당국에 체포된 뒤, 동년 10월 15일 '이중 스파이' 혐의로 처형당하게 된다.

1999년에 일부 공개된 영국 첩보 기관 'M15'의 비밀문서에 따르면, 마타 하리가 독일 스파이가 아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마타 하리가 'H21'이라는 암호 명의 독일 정보원이라는 프랑스 측의 주장과 상반된 것이다.

어떻튼 비운의 미녀 무희 마타 하리는 1917년 10월 15일 처형장에서 눈 가리개를 거부한 채 12명의 병사가 쏜 총 가운데 11발을 맞고 사망했으며, 그녀의 머리에 마지막 확인 사살 과정이 이어졌다.

 

-------------------------

0070(BC)  버질(Virgil), 로마 시인출생


1581년  카트린 데 메디치(Catherine de' Medici)의 요청으로 파리 궁전에서 최초의 대규모 발레가 공연됨


1582년  그레고리안 달력(Gregorian calendar)이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에서 채택됨. 이에 따라 10월 5일이 10월 15일로 바뀜.


1608년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Evangelista Torricelli), 이탈리아 물리학자 출생


1730년  앙트완 드 라 모데 캐딜락(Antoine de la Mothe Cadillac), 프랑스 탐험가 세상떠남


1815년  나폴레옹, St. Helena 섬으로 유형.

1844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독일 철학자 출생

1881년  P. G. 우드하우스(P G Wodehouse), 미국 소설가 출생

1897년 소련 작가 일리야 일프 출생


1905년  C.P. 스노우(C P Snow), 미국 과학자, 소설가 출생

1905년 일진회, 한일보호조약 촉구 성명


1907년 대한국민체육회 설립

1910년 인천에 상수도 개설

1915년  1차 세계대전 중 불가리아가 중앙 유럽 세력과 동맹을 ?k음


1917년  네덜란드의 스파이인 마타 하리(Mata Hari)가 독일에 스파이 활동을 한 죄로 파리에서 총살됨


1920년  마리오 푸조(Mario Puzo), 미국 소설가 출생


1925년  서울역사 준공 

1925년 서울운동장 개장

1925년 조선일보의 정간해제와 집단해고 사건


1926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 출생


1928년  독일의 비행선 '그라프 제펠린(Graf Zeppelin)'이 휴고 에케너(Hugo Eckener)를 선장으로 하여 최초의 대서양횡단 비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함


1934년  레이몽 니콜라스 랭드리 푸앵카레(Raymond Nicolas Landry Poincare), 프랑스 정치가 세상떠남

1934년 중국공산당 대장정 시작 


1940년 인도 간디, 불복종운동 개시

1944년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 히틀러 암살미수사건과 관련 자살


1946년  헤르만 괴링(Hermann Goering), 나치 지도자 세상떠남

1946년 좌익우파, 사회노동당으로 통합


1949년  육군경리학교를 일부 분리, 병참학교로 개편

1949년 한일통상협정 조인


1950년  트루먼-맥아더, Wake도에서 회담. 맥아더, 중공군 불개입 장담.

1950년 대동강 철교 폭파


1958년  무장간첩선 나포.

1960년 독립운동가 문익상 사망

1961년  인권 단쳬인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가 런던에서 창설됨


1962년  국방부직속 지방병무청 설치(10개 지구)

1962년 케네디, 알제리아 벨라 수상과 회담


1963년  제 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당선되다 


1964년  콜 포터(Cole Porter), 미국 작곡가, 작사가 세상떠남

1964년 소련 수상 겸 제1서기 흐루시초프 해임. 새 수상에 코시긴, 제1서기 브레즈네프 임명


1966년  조계종 종정 효봉선사 입적 


1968년  육군 제2사관학교, 제3사관학교 창설

1968년  육군종합행정학교 창설

1968년  한·미 작전기획참모단 조직


1969년 태백선(정선~나전) 개통

1971년 서울 일원에 위수령, 10개 대학에 군대진주 


1973년  소양강 다목적 댐 준공.

1973년  영국와 아이슬랜드가 '대구 전쟁(Cod War)'를 끝내고 어획권에 대한 조약을 맺음


1976년 덴마크, 북한공관원 전원을 마약 등 밀수혐의로 추방

1979년 도서 '해방전후사의 인식' 1권 출간

1981년 정부조직축소개편, 531개 직위 감축

1982년 농수산부, 초지개발 10개년 계획 발표

1985년 서울시, 서울시내 택시요금체계를 거리· 시간병산제로 전환


1988년 서울장애자올림픽 개막. 65개국 4,361명 참가

1989년 노태우 대통령 미국 방문,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20일)

1993년 청와대, 일제때의 총독관저건물인 舊본관의 철거 시작


1994년  미국으로 망명했던 아이티의 대통령 아리스티드(Aristide), 3년간의 망명을 끝내고 아이티로 귀국함


1996년  UN 안보리 의장, 대북한 성명발표. 잠수함 침투우려와 정전협정 준수 촉구.

2000년 김주진 아남반도체 회장, 한국인으로 첫 미 100대 부호에 선정 


2001년  서울에어쇼 2001 개막식

2001년  제30대 합참의장(이남신) 취임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방한

2001년 KTF-LGT 품질향상 합의서 체결


2002년 IBMㆍ히타치ㆍ선 등, 스토리지 기술 ‘블루핀’ 표준 자원 결의

-----------------------------

행복하세요!

 

출처 : 화폐수집-여행과 자유 (화여자)
글쓴이 : 노가다귀족/평택 원글보기
메모 :

오늘의 소사는 2010.10.16부터 게재 중단합니다.

 

계속 보실분들을 위해서 관련 사이트 주소를 아래에 소개합니다.

 

그동안 관심 갖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고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계보관련 소식과 역사자료 수집에 더욱 충실하기 위해서 부득이

게재를 중단하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화여자(화폐수집 여행과 자유) 카페에 접속하시면 오늘의 소사를

계속 보실수 있습니다.  

 

화여자 주소 : http://cafe.daum.net/song96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