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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內系外系

김해김씨 경파 (김녕군파, 처가계보)

by 연송 김환수 2010. 4. 9.

 

 

  김해김씨 (金海金氏)

 

김해김씨(金海金氏)는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제12대손 유신(庾信)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대소 98파로 나뉘는데, 그 가운데 유신의 직계종파(直系宗派)는 고려의 목경(牧卿)을 중시조로 하는 경파(京派)와 그의 아우 익경(益卿)을 중시조로 하는 사군파(四君派), 관(管)을 중시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金克一·金馹孫·金大有)이다.

 

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양왕(讓王:仇衡)의 증손으로, 그의 조부는 신라의 장군이며 각간(角干)인 무력(武力)이고, 그의 부친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장인이며 당대의 이름난 장군인 서현(舒玄), 그의 어머니는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김해김씨는 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하여 많은 문무명신(文武名臣)을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에 속하며, 고려시대에만도 정승급 15명을 비롯하여, 명신·공신 10여 명과 장군 8명, 제학(提學) 11명 등 숱한 인물을 배출하여 위세를 떨쳤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부진을 면치 못하여 역대 정승 가운데도 숙종 때의 우항(宇杭)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한말 이후 김해김씨는 으뜸가는 성씨 인구에 걸맞게 수없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주요인물을 살펴보면, 삼현파의 파조(派祖)인 관은 고려 때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지냈고, 그 5세손인 극일(克一)은 학자로 명망이 높았으며, 그의 차자(次子) 맹(孟)의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 등 세 아들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나 ‘김씨삼주(金氏三珠)’라 하였다.

 

이밖에 이조참판·시문가(詩文家) 현성(玄成), 사군파 파조(派祖) 익경(益卿), 예조판서 조, 고려의 좌시중(左侍中) 보(普), 조선시대의 무장(武將) 경서(景瑞)·완(完), 학자로는 자정(自貞)·덕승(德承), 화가로는 홍도(弘道)·양기(良驥) 부자 등이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29만 5080가구에 412만 493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본관별 인구순위에서도 1위였다.

 

 

 김수로왕과 허왕후 영정

 

김해김씨 사이트  :  

http://www.garakkim.net/

 

 

8817

 

 

수로왕릉 입구 홍살문

 

 

 

  

 

 

 

성씨의 역사

 

김해김씨 시조 김수로(金首露)에 관한 설화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나타나 있다.

 

“서기 42년 3월 가락국(駕洛國)의 아도(我刀), 오도(五刀), 피도(彼刀), 여도(汝刀), 오천(五天), 신귀(神鬼), 유수(留水), 유천(留天), 신천(神天) 등 아홉 촌장이 구지봉(龜旨峰) 산정에 모여 나라를 통솔할 군장(君長)을 얻기 위해 하늘을 향해 의식을 올리자 하늘에서 한줄기 붉은 빛이 내려와 함께 달려가 보니 금합(金盒)에 여섯 개의 알[卵]이 담겨 있었다.

 

이튿날 알 속에서 여섯 동자(童子)가 나왔는데 그중 맨 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首露)라고 이름 짓고 금합에서 태어났다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로 하니 그가 바로 김해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이다.”

 

김해김씨는 11세손 김무력 대에 이르러 크게 번창하였는데 그는 신라 때 각간(角干)을 지냈고 뛰어남 무장(武將)이었다. 그의 아들 김서현(金舒玄)은 진흥왕의 아우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부인(萬明夫人)과 혼인하여 각간에 올랐고 대양주도독(大梁州都督)을 지냈다.

 

그의 아들 김유신(金庾信)은 태종무열왕의 딸과 결혼하였고 무열왕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여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공헌하여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이르렀고, 죽은 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기도 하였다.

 

그 후 후손들이 김수로를 시조로, 김유신을 중시조로 삼고 옛 가락국이었던 김해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김해김씨는 신라 김씨의 알지계(閼智系: 경주김씨)와 함께 우리 나라 김씨의 양대산맥을 이루어 명문거족으로 번성하여 왔다.

 

분적종 및 분파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중시조 김유신의 후대에서 가세가 크게 번창해짐에 따라 148여 개 파(派)로 분파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김목경(金牧卿)을 중조로 하는 경파(京派)와 아우 김익경(金益卿)을 중조로 하는 사군파(四君派), 김관(金管)을 중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이다.

 

그리고 김수로왕을 1세로 하여 56세손 김유공(金維公)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 51세손 김지서(金之瑞)를 파조로 하는 승사랑공파, 김평(金平)을 파조로 하는 양의공파가 있다.

 

이후의 파로는 40세손에서 김명택(金明澤)의 후손 판전공파, 김불비(金不比)의 후손 판서공파, 김만희(金萬希)의 후손 좌정승공파, 김종정(金宗貞)의 후손 숭정공파,

 

김천익(金天翼)의 후손 부호군파, 김을동(金乙棟)의 후손 판결사공파, 김문(金汶)의 후손 진사공파, 김이장(金以章)의 후손 충정공파가 있으며,

 

51세손 김운(金芸)의 후손 유수공파, 57세손 김대진(金大震)의 후손 운은공파, 54세손에서 김탁(金琢)의 후손 문경공파, 김근(金瑾)의 후손 부사공파,

 

김관(金{王+寬})의 후손 한림공파, 김구(金球)의 후손 충정공파, 김련(金璉)의 후손 도사공파, 김현(金現)의 후손 숭정공파, 김호(金琥)의 후손 휴은공파,

 

김선(金璇)의 후손 장사공파와 56세손 김인서(金麟瑞)의 후손 참봉공파,

 

51세손 김득하(金得河)의 후손 대제학공파, 50세손 김경신(金敬臣)의 후손 도총관공파, 22세손 김천려(金天與)의 후손 중 김덕휴(金德休)로 이어지는 첨정공파 등으로 나뉘어졌다.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김해김씨는 1,295,080가구 총 4,124,934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납릉정문

 

수로왕릉

 

 

 

 

 

중건신도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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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황후 [, 33~89] 릉 

 

 

이름은 허황옥()이며 김해허씨()의 시조이다. 본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이다. 아유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인도, 태국, 중국, 일본 등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인도 아요디아라고 알려진 것이 가장 유력하다. 

 
그 연유는 수로왕릉 정문 대들보에 새겨진 두마리의 물고기가 인도 아요디아 지방의 건축양식에서 볼 수 있는 문양이기 때문이다. 서기 48년(유리왕 25) 7월 27일 배를 타고 가야에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 이듬해 태자 거등공()을 낳았다.
 
뒤에 가야국에 상륙한 곳은 주포촌()이고, 비단 바지를 벗어 산령()에게 제사했던 곳은 능현()이며, 붉은 기를 꽂고 들어온 바닷가는 기출변()으로 불렸다.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장자인 거등() 왕통을 잇게하였고 2명에게 어머니의 성() 허()를 주었다고 한다. 나머지 7명의 아들은 불가에 귀의했다.
 
가야가 몰락하게 되자 허씨의 자손들은 흩어졌는데 김해에 남은 김해 허씨, 하양으로 이주한 하양 허씨, 양천 허씨, 태인 허씨 등이 있으며 태인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 이씨가 있다. 김해시에 허황후의 묘가 있으며 그녀가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전하는 파사석탑이 남아있다.

   

 

파사각

 

 

 파사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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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 김녕군파(경파) 계보

김해김씨의 중시조는 수로왕의 12세손인 김유신(金庾信)장군이다. 김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자이며 무열왕의 딸 지소 부인(智炤夫人)과 혼인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신라의 장군이자 각간(角干)인 김무력(金武力, 구형왕의 막내 아들)이고, 아버지는 당대의 이름난 장군인 김서현(金舒玄), 어머니는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입니다.

 

 

통일전 김유신 영정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 묘

 

십이지신상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 묘

 

김유신 장군상

 

통일전 태대각간 김유신 사적비

 

 

통일전 사적비(무열왕,문무왕,김유신장군) : 삼국통일기념비

 

김해 김씨 경파의 파조인 김목경(金牧卿)은 고려의 문관이셨고, 고려 충선왕때 문과에 급제하시었고, 품계는 三重大匡에 이르셨다.

 

이후 충혜왕때 이르러 조적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평정하시어 그 공을 치하하시어 왕으로부터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며, 당시 혼란한 국정을 개탄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과 함께 누차 왕에게 상소 했으나 듣지 않자 속리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여생을 마쳤습니다.

 

김목경의 맏아들 김보(金普)는 공민왕이 세자 때 국가의 사절로서 중국의 북경에 갈 때 시종(侍從)한 공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호(號)를 받았습니다.

 

김보의 6세손 김영견(金永堅 : 동지중추부사), 김영서(金永瑞 : 현감), 김영정(金永貞 : 성종 때 대사헌), 김영순(金永純 : 한성판관) 4형제가 빼어났으며, 숙종때 명신 김우항(金宇杭)은 김영정(金永貞)의 후손으로 1713년(숙종 39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습니다.

 

경파에 속한 후손 파

참판공파, 횡성공파, 안경공파, 석성공파, 호참공파, 참찬공파, 봉상공파,

밀직사공파, 문간공파, 밀직공파, 평장사공파 (큰집 자손 순)

 

김해김씨 김녕군파(경파) 석성공파 종친회 : http://gyeongpa.com.ne.kr/main.html  

김해김씨 경파(문간공파) 종친회 : http://gpa.hometer.com/

 

김해김씨 경파(김녕군파) 항렬표

 * 67世는 수로왕 부터,  17世는 중시조 목경의 경파(김녕군파)

67세
(17세)
68세
(18세)
69세
(19세)
70세
(20세)
71세
(21세)
72세
(22세)
73세
(23세)
O 鉉 濟 O O 植 顯 O O 培 鍾 O
錫 O
O 泰
O 洙
솥귀현 건널제 심을식 나타날현 복돋을배 쇠북종
주석석
클태
물가수

 

 

74세
(24세)
75세
(25세)
76세
(26세)
77세
(27세)
78세
(28세)
79세
(29세)
80세
(30세)
榮 O O 謙
O 燮
載 O
在 O
O 鎭 浩 O O 根 O
O
O 性
영화영 겸손할겸
불꽃섭
실을재
있을재
진압할진 클호 뿌리근 더할익
밝을병
성품성

 

 

 

81세
(31세)
82세
(32세)
83세
(33세)
84세
(34세)
85세
(35세)
86세
(36세)
87세
(37세)
88세
(38세)
89세
(39세)
O
O
O
O
O 淳 東 O O 烈
O 煥
重 O O 善
O 鎔
洛 O O 相
쓸용
땅곤
주석석
호경호
순박할순 열, 환 선, 용

 

 

 

 

 

 

 

 출처 : 가락왕손 총람

김해김씨 경파 처가 계보

 

시조 70世, 중시조 목경의 20世  顯O 항렬
 
                             
金琪洙 - 李奇榮   
시조 71世, 중시조 목경의 21世  ○培 항렬


                 金光鎬(浩) - 金特順 {慶州(月城)金氏}



시조 72世, 중시조 목경의 22世  鍾○ 항렬 
金河乭 (鍾勳) 金河晶 朴斗國(壻)- 金姬子(女) 金河億 金煥洙(壻)- 金順子(女) 金河生
   ↓     ↓       ↓         ↓         ↓         ↓


시조 73世, 중시조 목경의 23世  ○泰 항렬
현준, 선영 - 박원복, 원진 태형, 태우 김용채, 선화 도현, 창현

 

 

 

 

장인(丈人)어른 김광호 묘, 우측은 장모(丈母 )님 신후지지 (身後之地)

 

(소재지 : 부산시 기장군 철마면 고촌리 실로암 공원 묘원)

 

 

 

 

 

 

 

 

 

 

              

 

 

 

       

 

 

 

 

실로암 공원묘원 :  http://www.siloami.com/

                          부산시 기장군 철마면 고촌리 356

 

 

2021.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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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우록김씨 友鹿 金氏 (김해김씨) 

 

김해 김씨(김충선)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항왜인 김충선(金忠善)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다른 김해 김씨와 구별하여, 김충선계 김해 김씨, 사성 김해 김씨 또는 그 집성촌이었던 우록동(현 가창면 우록리)의 이름을 따서 우록 김씨(友鹿 金氏)라고도 부른다.

 

김해(金海)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고대국가(古代國家)인 6가야(六伽倻) 중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중심지였으나 서기 532년에 신라(新羅)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 또는 금관소경(金官小京) 이라 불리우다가 680년(문무왕 20)에 김해(金海)로 개칭하여 소경(小京)을 두었다.

 

우리나라 귀화성씨(歸化姓氏) 가운데 괴산 점씨(槐山占氏)와 함께 일본(日本)에서 계출(系出)된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수로왕(首露王) 계통의 김해 김씨와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우록 김씨(友鹿金氏)로 칭관(稱貫)하기도 하였다.

 

시조(始祖) 김충선(金忠善)은 본명(本名)이 사야가(沙也可)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左先鋒將)이 되어 3천의 병력을 이끌고 내침했으나 조선의 문물(文物)이 뛰어남에 감화되어 경상 좌우 병마절도사(慶尙左右兵馬節度使) 박 진(朴 晋)과 김응서(金應瑞)에게 귀화(歸化)의 뜻을 밝혀 조선(朝鮮)의 장수(將守)로 울산(蔚山)과 경주(慶州)·영천(永川) 등지의 전투에서 공(功)을 세웠다.

 

특히 그는 조선에 화포(火砲)와 조총(鳥銃)을 만드는 법과 사용술을 보급하였고, 18개 지역의 왜적(倭賊)의 성(城)을 탈환하는 등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박진(朴晋)이 이 사실을 나라에 알리자 그의 충정과 무훈을 가상히 여겨 선조(宣祖) 임금은 친히 그를 불러(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고 하며, 김씨(金氏)로 사성(賜姓)하고 정2품 관계(官階)인 자헌대부(資憲大夫)를 제수(除授)하였다.

 

그후 북방을 침범한 여진족(女眞族)의 토벌에 자청하여 10년간이나 임방소(仍防所)를 지켰으며, 1624년(인조 2) 이 괄(李 适)의 반란 때는 모반군의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의 목을 베는 등 평정(平定) 에 공(功)을 세웠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는 의병(義兵)을 모아 경기도(京畿道) 광주(廣州)의 쌍령(雙嶺)에서 매복작전으로 대승을 거두어 무훈을 떨쳤으며, 벼슬은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는 서른살이 되던 해 진주 목사(晋州牧使) 장춘점(張春點)의 딸을 아내로 맞아 경북(慶北) 달성군(達城郡) 가창면(嘉昌面) 우록동(友鹿洞)에 뿌리를 내리고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풍(家風)으로 살다가 1642년(인조 20) 72세로 세상을 마쳐 팔조령(八鳥嶺) 삼정산(三頂山) 기슭에 묻혔으며, 가창(嘉昌)골에 세워진 녹동서원(鹿洞書院)에 배향되었다.

 

 그는 슬하에 아들 5형제를두었는데 장남 경원(敬元)이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둘째 경신(敬信)은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각각 추증되었고, 셋째 우상(右祥)은 상호군(上護軍)을, 넷째 계인(繼仁)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으며, 막내 경인(敬仁)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어 가문(家門)을 크게 일으켰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경원(敬元)의 둘째 아들 진영(振英)이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참찬관(參贊官)을 역임했고, 여삼(汝三)은 노모(老母)가 죽자 삼성산(三聖山)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간이나 시묘(侍墓)를 극진히 하여 [효행록(孝行錄)]에 실렸으며, 용하(龍河)는 부모(父母)의 봉양을 위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풍을 지켰다.

 

지금 그의 후손들은 경북 달성군(達城郡) 가창면(嘉昌面)에 많이 살고 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우록김씨는 143가구 총 468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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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김씨 後金 (金寧金氏)

 

김녕김씨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으로 경상북도 의성(義城)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인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며, 명종 때에는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식읍을 하사받고 금주군(金州君)에 봉해졌다.

 

이 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김녕(金寧)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고려 말에 지명이 김해(金海)로 개칭되자 김해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로왕(首露王) 계통의 김해김씨와 혼돈됨에 따라 김해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김녕김씨는 후김(後金)으로 칭하였다.

 

이후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명성이 크게 알려진 뒤 타인들이 김문기의 후손임을 자칭하고 나서는 등 종통을 어지럽히는 일이 많아 1849년(헌종 15) 경상도 유생 김주성(金周聲), 김근학(金根學), 김성현(金成鉉), 김치수(金致秀), 김홍환(金鴻煥) 등이 선조의 사실목록에 진정서를 첨부하여 예조에 상소하여 본래 김녕을 본관으로 확정지었다고 한다.

 

 

분적종 및 분파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영돈령공준파(領敦寧公遵派), 진주목사공형파(晉州牧使公형派), 충정공준영파(忠貞公俊榮派), 충경공경세파(忠敬公景世派), 송암공질파(松菴公秩派), 만은공길상파(晩隱公吉祥派), 충의공문기파(忠毅公文起派), 대사성공지파(大司成公智派), 도순찰사공문제파(都巡察使公文齊派), 상서공문희파(尙書公文熙派)로 나뉘어졌다.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김녕김씨는 162,204가구 총 513,015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