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방묘지명(崔繼芳墓誌銘) 해석문
고려국(高麗國)의 수사공 좌복야 참지정사(守司空 左僕射 叅知政事)인 화순 최공(和順 崔公) 묘지명 및 서문
등사랑 상서호부랑중 지제고 겸 태자사경(登仕郞 尙書戶部郞中 知制誥 兼 太子司經)이며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한충(韓沖)이 짓다.
「홍범(洪範)」의 오복(五福)이란 장수[壽], 부(富), 건강[康寧], 덕을 좋아함[攸好德], 천명을 누리고 죽음[考終命]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으로 이 다섯 가지 복을 갖추고도 귀하게 된 이는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금자광록대부 검교사도 수사공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삼사사 주국(金紫光祿大夫 檢校司徒 守司空 尙書左僕射 叅知政事 判三司事 柱國) 최공(崔公)에서 그것을 본다. 공은 향년이 72세이니, 어찌 수를 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세록(世祿)이 많으니, 어찌 부유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원기[大和]를 잘 보존하여 ▨ 질▨(疾病?)이 없었으니, 어찌 건강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본성이 좋아하는 것은 오직 도(道)와 덕이니, 어찌 덕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가고 물러남을 알아 능히 하늘이 내려준 역할[天期]를 마쳤으되 일찍 죽지 않았으니, 어찌 천수를 누린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공은 대사(大師) 사위(士威)의 증손이다. 옛날 목종대(穆宗代)에 간신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장차 사직이 이성(異姓)에게 돌아갈 뻔하였다.
그러나 성조 현종(顯宗)이 태조 이래의 왕위를 계승하여 정통을 만세에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대사가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한(三韓) 이래의 공신 중 누가 능히 이에 비할 수 있겠는가. 『한서(漢書)』의 이른바 복받은 집안의 후예[慶流後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은 중희(重熙)14년 을유년(정종 11, 1045)에 태어났다. 처음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그를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태사의 빛나는 이름[芳]을 이을 것이오”고 하여 이름을 계방(繼芳)이라고 지었다. 성년이 되자 관상장이 유량(柳亮)이 그가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이 사람은 지금은 비록 관직이 없지만 뒤에 반드시 크게 귀하게 될 것입니다”고 하였다.
공의 이름은 계방(繼芳)이고, 자는 복시(復時)이며, 성은 최씨(崔氏)인데, 선조는 수주(水州) 출신으로 삼한의 대족(大族)이다.
증조 사위(士威)는 삼중대광 추충동덕진랑위주광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내사령 한남군 개국후 식읍 1,500호(三重大匡 推忠同德盡郞衛主匡國功臣 開府儀同三司 守太師 內史令 漢南郡 開國侯 食邑 一千五百戶)이고 정숙(貞肅)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 조부 충공(忠恭)은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되고,
아버지 유서(惟恕)는 시상서공부원외랑(試尙書工部員外郞)으로 호부상서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김씨는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으로 봉해졌는데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 김원황(金元晃)의 딸로서, 명의태후(明懿太后)의 어머니의 언니이며, 선조는 신라(新羅) 사람이다.
동생이 세 명 있는데, 첫째 상지(尙之)는 출가하여 자은종(慈恩宗)의 승통(僧統)이 되고, 다음 지(贄)는 지금 공부상서 삼사사(工部尙書 三司使)이고, 다음 유(愈)는 대부시주부(大府寺主簿)가 되었으나 일찍 죽었다. 누이는 한 명으로 호부상서 겸 태자첨사(戶部尙書 兼 太子詹事) 김항(金沆)에게 시집갔다.
공은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어서 자주 뛰어난 행동을 하였다. 성균시(成均試)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으나, 마침 순종(順宗)이 태자가 되자 동궁에 들어가 여러 해 동안 모시면서 호위하였다. 태강(太康) 계해년(순종 1, 1083)에 순종이 즉위하자 그 공으로 옮겨 내신(內臣)이 되고, 선종(宣宗)과 헌종(獻宗) 두 임금 아래에서도 역시 근직(近職)을 떠나지 않았다.
수창(壽昌) 원년 을해년(헌종 1, 1095)에 성고(聖考) 숙종이 왕위를 물려 받아 즉위했는데, 공이 황후의 인척이므로 더욱 총애하여 무릇 모든 공진(供進)과 선식(膳食)을 특별히 공에게 살펴보게 하였다. 임금이 좌우에게 “짐이 아무개의 충성됨을 알고 있는 까닭에, 그로 하여금 짐이 먹는 것을 관리하게 하는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황후가 안에서 공을 불러, “임금께서 명한 것이니 공은 신중하시오. 나도 역시 공의 충▨됨을 믿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중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니 ▨ 하루에 아홉 번 관직을 옮기는 것처럼 빠르게 승진하였다.
을유년(예종 즉위, 1105) 10월 임금이 등극하자 은총이 날로 두터워졌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 재상에 이르렀다. ‘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후세에까지 복을 받으니, 공후(公侯)의 자손이 처음과 같이 이를 되풀이한다’라는 말은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공은 사람됨이 ▨▨ 부드럽고 부지런하며, 검소하고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웠는데 입는 옷이나 신는 신발은 가난한 선비보다도 못하였다. 어머니를 지극하게 섬겨 노래(老萊, 老子)의 유풍이 있었다.
관직에 임하여 일을 수행할 때는 능히 ▨ 마음을 다하고, 어렵거나 쉽다고 하여 ▨ 그 절의를 바꾸지 않았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온화하고 공손하면서도 예의가 있었다. 그 자신에 대하여서는 검소하여 법도가 있었고, 이해와 욕심에 연연하지 않았으니 실로 가히 맑고 어진 군자라고 할 만하다.
천경(天慶)3년 계사년(예종 8, 1113)에 나이가 69세가 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기를 청하여, 집으로 물러가 편안히 지냈다. 병신년(예종 11, 1116) 여름 6월 을축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궁궐의 동쪽 보통사(普通寺)에 빈소를 마련하였다. 임금이 듣고 애통해 하여 조회를 멈추고 부의를 후하게 하고, 시호를 내려 화순(和順)이라 하였다. 이어 임신일에 임시로 성의 동쪽 장봉산(長峯山)에 장례지냈다가, 다음해 봄 2월 갑신일에 그 아들들이 다시 길한 곳을 점쳐 성의 서면(西面) 서쪽 방향 산허리의 왼쪽 기슭에 이장하였다. 아, 효성스럽도다.
공은 민씨(閔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구성군부인(龜城郡夫人)에 봉해졌다. 시합문지후(試閤門祗候) 영(寧)의 딸로서 그 선조는 강주(剛州)사람이다. 자녀로 아들은 두 명이다. 첫째 함(諴)은 어려서 문음(門蔭)으로 관리가 되었으나 학문[文學]에 뜻을 두어 글[表]을 올려 과거시험을 보기를 청하였다. 천경(天慶) 4년(예종 9, 1114 ) 전시(殿試)에서 을과(乙科)로 합격한 뒤 불려 들어가 근신(近臣)이 되었다가, 지금은 사경원판관(寫經院判官)으로 있다. 다음 관오(觀奧)는 출가하였다.
딸은 한 명인데 감찰어사(監察御使) 최▨▨에게 시집갔다.
▨▨▨▨ 사람인데 공의 행적을 아주 자세히 알고 있으니, 감히 세보(世譜)와 여러 행적과 ▨일을 적어 행장을 만들고, 또 줄여서 묘지명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현종 사직의 대사(大師) 공신이
후손을 나라에 남기니 공이 바로 그 분이다.
처음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보고 말하였다.
“이 아이는 반드시 귀하게 되어 능히 가문을 이을 것이오.”
이에 이름을 지으니 참으로 좋고도 아름다워서
관상장이도 음성을 듣자 ▨▨▨ 지위에 오를 것이라고 하였다.
처음 태자부[震邸]에 참여하여 호위하며 공훈을 세우고
임금을 수행한 덕으로 벼슬하여 구중(九重)에서 친히 모셨다.
숙종이 선양(禪讓)을 받아 왕실을 중흥시키니
공은 왕후의 친척이 되어 더욱 더 표창을 받고 발탁되었다.
좋은 직책에 뛰어오르니 견줄 바가 없고
지금의 임금이 바야흐로 등극하니 자신의 몸처럼 가까이 여겼다.
여유가 있고 마음이 넓으니 삼가 추기(樞機)를 담당하고
이어서 재상이 되니 섭리에 어긋남이 없었다.
명성을 이루고 드디어 물러나 본성을 기르며 스스로 즐기니
「기범(箕範, 洪範)」의 오복(五福)은 오직 공만이 얻었다.
대사의 문벌을 다시 우뚝 열었으니
자손 만대로 현달하고 이어지리라.
송(大宋) 정화(政和) 7년 정유년(예종 12, 1117) 2월 일 석린(石麟)이 쓰고 손으로 새기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최계방 벼슬 요약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내신이 되어 순종·선종·헌종을 섬기고, 숙종·예종 때는 중신으로 어사대부·호부상서 겸 삼사사·동지추밀원사·수사공 병부상서 참지정사 등을 역임하였다.
본관 수원(水原)
별칭 자 복시(復時), 시호 화순(和順)
국적 한국
활동분야 정치
본문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자는 복시(復時)이고, 시호는 화순(和順)이다. 성균시를 보았으나 낙방하였다. 그러나 순종이 태자로 있을 때 태자부(太子府)에서 줄곧 보좌하였으므로, 순종이 왕에 오른 뒤 내신(內臣)으로 등용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해에 죽은 뒤에도 내신으로 선종·헌종을 계속 섬겼다.
1103년(숙종 8) 요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1109년(예종 4)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재직하였다. 어사대부로 재직할 때 간의(諫議) 이재(李載) 등과 함께 길주성(吉州城)을 포위한 여진을 치다가 실패하고 화친을 맺은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 등을 탄핵하였다. 또한 그해 왕이 참석한 연회에서 춤을 추었는데, 북쪽의 여진족 때문에 백성이 편치 않은데 대신이라는 자가 춤을 춤으로써 체모를 잃었다는 비난을 들었다.
1111년 호부상서 겸 삼사사(戶部尙書兼三司使)에 오른 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검교사공추밀원사(檢校司空樞密院使)·수사공 병부상서 참지정사(守司空兵部尙書參知政事) 등을 거쳐 상서좌복야 판삼사사 주국(尙書左僕射判三司事柱國)에 이르러 치사하였다.
판독문
高麗國守司空左僕射叅知政事和順崔公墓誌銘幷序」 登仕郎尙書戶部郎中知 制誥兼太子司經 賜緋魚袋韓 沖 撰」洪範五福曰壽曰富曰康寧曰攸好德曰考終命人而有此五福而貴者未甞見之」矣今於金紫光祿大夫檢校司徒守司空尙書左僕射參知政事判二司事柱國崔」公目之矣公饗年七十二歲豈不壽乎世祿有重豈不富乎善保大和▨無疾▨豈」不康寧乎性所好者唯道與德豈不攸好德乎知進知退能終天期而無夭豈不考」終命乎公大師諱士威之曾孫也昔在 穆宗之世姧臣擅權將以社稷歸于異姓」而 聖祖顯宗得繼 大祖之位而傳正統於萬世者大師之所衛也故三韓已來」之功臣孰能與於此乎漢書所謂慶流後裔者也公生於重熙十四乙酉年厥初生」也父視之曰此兒必繼大師之芳故名之曰繼芳及其壯也相者柳公亮聞其語聲」曰此人今雖無位後必大貴矣公諱繼芳字復時姓崔氏其先出於水州三韓之大」族也曾祖諱士威三重大匡推忠同德盡郎衛主匡國功臣開府儀同三司守大師」內史令漢南郡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贈諡貞肅祖諱忠恭御史中丞追贈尙書」右僕射考諱惟恕試尙書工部員外郎追贈戶部尙書妣金氏封樂浪郡大夫人中」樞使兵部尙書元晃之女 明懿大后母之姉也其先新羅人也有弟三人一曰尙」之出家爲慈恩宗僧統次曰贄今爲工部尙書三司使次曰愈爲大府寺主簿早卒」有一妹適戶部尙書兼大子詹事金沆公少有大志而數奇故就成均之試而不得」中會 順宗爲太子入侍於東宮翼衛多年至於大康癸亥年 順宗卽位以其功」▨爲內臣至於 宣獻兩朝亦不離於近職壽昌元年乙亥 聖考肅宗▨受卽位」公以 皇后之戚尤蒙寵眷凡諸供進膳食特命公監之 上謂左右曰朕知某之」忠故使監朕之所食 皇后自內召公曰 上之所公命公其愼之吾亦恃公之忠▨」厥後歷官中外▨於日九之遷越乙酉年冬十月 上▨登極▨寵益厚不數年▨」至於宰輔夫是之謂積善之家必有餘慶公侯之孫必復其始者矣公之爲人▨▨」柔勤儉忠孝而被服操履甚於寒儒故事母至孝有老萊之遺風蒞官行事能盡▨」心不以▨▨▨其節其待人也溫恭而有禮其於己也儉而有法不營營於利欲實」可謂淑人君子也天慶三年癸巳歲年當六十九乞骸得請退安于家越丙申年▨」六月乙丑以疾而薨殯于
고려국(高麗國)의 수사공 좌복야 참지정사(守司空 左僕射 叅知政事)인 화순 최공(和順 崔公) 묘지명 및 서문등사랑 상서호부랑중 지제고 겸 태자사경(登仕郞 尙書戶部郞中 知制誥 兼 太子司經)이며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한충(韓沖)이 짓다.「홍범(洪範)」의 오복(五福)이란 장수[壽], 부(富), 건강[康寧], 덕을 좋아함[攸好德], 천명을 누리고 죽음[考終命]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으로 이 다섯 가지 복을 갖추고도 귀하게 된 이는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금자광록대부 검교사도 수사공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삼사사 주국(金紫光祿大夫 檢校司徒 守司空 尙書左僕射 叅知政事 判三司事 柱國) 최공(崔公)에서 그것을 본다. 공은 향년이 72세이니, 어찌 수를 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세록(世祿)이 많으니, 어찌 부유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원기[大和]를 잘 보존하여 ▨ 질▨(疾病?)이 없었으니, 어찌 건강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본성이 좋아하는 것은 오직 도(道)와 덕이니, 어찌 덕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가고 물러남을 알아 능히 하늘이 내려준 역할[天期]를 마쳤으되 일찍 죽지 않았으니, 어찌 천수를 누린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공은 대사(大師) 사위(士威)의 증손이다. 옛날 목종대(穆宗代)에 간신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장차 사직이 이성(異姓)에게 돌아갈 뻔하였다.그러나 성조 현종(顯宗)이 태조 이래의 왕위를 계승하여 정통을 만세에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대사가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한(三韓) 이래의 공신 중 누가 능히 이에 비할 수 있겠는가. 『한서(漢書)』의 이른바 복받은 집안의 후예[慶流後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공은 중희(重熙)14년 을유년(정종 11, 1045)에 태어났다. 처음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그를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태사의 빛나는 이름[芳]을 이을 것이오”고 하여 이름을 계방(繼芳)이라고 지었다. 성년이 되자 관상장이 유량(柳亮)이 그가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이 사람은 지금은 비록 관직이 없지만 뒤에 반드시 크게 귀하게 될 것입니다”고 하였다.공의 이름은 계방(繼芳)이고, 자는 복시(復時)이며, 성은 최씨(崔氏)인데, 선조는 수주(水州) 출신으로 삼한의 대족(大族)이다. 증조 사위(士威)는 삼중대광 추충동덕진랑위주광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내사령 한남군 개국후 식읍 1,500호(三重大匡 推忠同德盡郞衛主匡國功臣 開府儀同三司 守太師 內史令 漢南郡 開國侯 食邑 一千五百戶)이고 정숙(貞肅)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 조부 충공(忠恭)은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되고, 아버지 유서(惟恕)는 시상서공부원외랑(試尙書工部員外郞)으로 호부상서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김씨는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으로 봉해졌는데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 김원황(金元晃)의 딸로서, 명의태후(明懿太后)의 어머니의 언니이며, 선조는 신라(新羅) 사람이다. 동생이 세 명 있는데, 첫째 상지(尙之)는 출가하여 자은종(慈恩宗)의 승통(僧統)이 되고, 다음 지(贄)는 지금 공부상서 삼사사(工部尙書 三司使)이고, 다음 유(愈)는 대부시주부(大府寺主簿)가 되었으나 일찍 죽었다. 누이는 한 명으로 호부상서 겸 태자첨사(戶部尙書 兼 太子詹事) 김항(金沆)에게 시집갔다.공은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어서 자주 뛰어난 행동을 하였다. 성균시(成均試)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으나, 마침 순종(順宗)이 태자가 되자 동궁에 들어가 여러 해 동안 모시면서 호위하였다. 태강(太康) 계해년(순종 1, 1083)에 순종이 즉위하자 그 공으로 옮겨 내신(內臣)이 되고, 선종(宣宗)과 헌종(獻宗) 두 임금 아래에서도 역시 근직(近職)을 떠나지 않았다.수창(壽昌) 원년 을해년(헌종 1, 1095)에 성고(聖考) 숙종이 왕위를 물려 받아 즉위했는데, 공이 황후의 인척이므로 더욱 총애하여 무릇 모든 공진(供進)과 선식(膳食)을 특별히 공에게 살펴보게 하였다. 임금이 좌우에게 “짐이 아무개의 충성됨을 알고 있는 까닭에, 그로 하여금 짐이 먹는 것을 관리하게 하는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황후가 안에서 공을 불러, “임금께서 명한 것이니 공은 신중하시오. 나도 역시 공의 충▨됨을 믿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중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니 ▨ 하루에 아홉 번 관직을 옮기는 것처럼 빠르게 승진하였다.을유년(예종 즉위, 1105) 10월 임금이 등극하자 은총이 날로 두터워졌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 재상에 이르렀다. ‘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후세에까지 복을 받으니, 공후(公侯)의 자손이 처음과 같이 이를 되풀이한다’라는 말은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공은 사람됨이 ▨▨ 부드럽고 부지런하며, 검소하고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웠는데 입는 옷이나 신는 신발은 가난한 선비보다도 못하였다. 어머니를 지극하게 섬겨 노래(老萊, 老子)의 유풍이 있었다. 관직에 임하여 일을 수행할 때는 능히 ▨ 마음을 다하고, 어렵거나 쉽다고 하여 ▨ 그 절의를 바꾸지 않았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온화하고 공손하면서도 예의가 있었다. 그 자신에 대하여서는 검소하여 법도가 있었고, 이해와 욕심에 연연하지 않았으니 실로 가히 맑고 어진 군자라고 할 만하다.천경(天慶)3년 계사년(예종 8, 1113)에 나이가 69세가 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기를 청하여, 집으로 물러가 편안히 지냈다. 병신년(예종 11, 1116) 여름 6월 을축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궁궐의 동쪽 보통사(普通寺)에 빈소를 마련하였다. 임금이 듣고 애통해 하여 조회를 멈추고 부의를 후하게 하고, 시호를 내려 화순(和順)이라 하였다. 이어 임신일에 임시로 성의 동쪽 장봉산(長峯山)에 장례지냈다가, 다음해 봄 2월 갑신일에 그 아들들이 다시 길한 곳을 점쳐 성의 서면(西面) 서쪽 방향 산허리의 왼쪽 기슭에 이장하였다. 아, 효성스럽도다.공은 민씨(閔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구성군부인(龜城郡夫人)에 봉해졌다. 시합문지후(試閤門祗候) 영(寧)의 딸로서 그 선조는 강주(剛州)사람이다. 자녀로 아들은 두 명이다. 첫째 함(諴)은 어려서 문음(門蔭)으로 관리가 되었으나 학문[文學]에 뜻을 두어 글[表]을 올려 과거시험을 보기를 청하였다. 천경(天慶) 4년(예종 9, 1114 ) 전시(殿試)에서 을과(乙科)로 합격한 뒤 불려 들어가 근신(近臣)이 되었다가, 지금은 사경원판관(寫經院判官)으로 있다. 다음 관오(觀奧)는 출가하였다. 딸은 한 명인데 감찰어사(監察御使) 최▨▨에게 시집갔다. ▨▨▨▨ 사람인데 공의 행적을 아주 자세히 알고 있으니, 감히 세보(世譜)와 여러 행적과 ▨일을 적어 행장을 만들고, 또 줄여서 묘지명을 짓는다.명(銘)하여 이른다.현종 사직의 대사(大師) 공신이후손을 나라에 남기니 공이 바로 그 분이다.처음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보고 말하였다.“이 아이는 반드시 귀하게 되어 능히 가문을 이을 것이오.”이에 이름을 지으니 참으로 좋고도 아름다워서관상장이도 음성을 듣자 ▨▨▨ 지위에 오를 것이라고 하였다.처음 태자부[震邸]에 참여하여 호위하며 공훈을 세우고임금을 수행한 덕으로 벼슬하여 구중(九重)에서 친히 모셨다.숙종이 선양(禪讓)을 받아 왕실을 중흥시키니공은 왕후의 친척이 되어 더욱 더 표창을 받고 발탁되었다.좋은 직책에 뛰어오르니 견줄 바가 없고지금의 임금이 바야흐로 등극하니 자신의 몸처럼 가까이 여겼다.여유가 있고 마음이 넓으니 삼가 추기(樞機)를 담당하고이어서 재상이 되니 섭리에 어긋남이 없었다.명성을 이루고 드디어 물러나 본성을 기르며 스스로 즐기니「기범(箕範, 洪範)」의 오복(五福)은 오직 공만이 얻었다.대사의 문벌을 다시 우뚝 열었으니자손 만대로 현달하고 이어지리라.송(大宋) 정화(政和) 7년 정유년(예종 12, 1117) 2월 일 석린(石麟)이 쓰고 손으로 새기다.[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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