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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內系外系

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 선생

by 연송 김환수 2011. 6. 21.

전주이씨 백헌 이경석 선생의

가계를 찾아 보니 우리집안과

많은 인연이 있네요..

 

백헌 이경석 선생 가계도

 

제2대 정종定宗 서4녀 고성옹주(高城翁主 ?~?) : 모후 미상

1. 별칭 : 고성군주(高城郡主), 고성옹주(高城翁主)

2. 부마 : 안산 김씨 호평공 김한(胡平公 金澣 1409~1485) 하가

             안산김씨(安山金氏) 안산군(연성군) 김정경(金定卿)의 아들

             지중추부사 대호군 호평공(胡平公) 김한(金澣)에게 하가

             소생 3남 3녀

 

 

성종 184권, 16년(1485 을사 / 명 성화(成化) 21년) 10월 15일(임진) 6번째기사

지중추부사 김한(兄김개)의 졸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한(金澣)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부의(賻儀)를

내려 주고 조제(弔祭)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김한은 안산인(安山人)이며, 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의 아들이다.

 

공정 대왕(恭靖大王)의 딸인 고성 군주(高城君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자헌 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러 졸(卒)하니,

향년이 77세이다.

 

시호는 호평(胡平)인데, 오래도록 장수(長壽)한 것이 호(胡)이고, 다스려 재앙이

없는 것이 평(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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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김필(金珌 : 별시 문과장원) 가족관계

 

부(父) : 김맹강(金孟鋼)

조부(祖父) : 김개(金漑)

증조부(曾祖父) : 김정경(金定卿)

외조부(外祖父) : 강희안(姜希顔)

처부(妻父) : 오원군 이보정(五原君 李寶貞) = 신종군의 5남

처조부(妻祖父) : 신종군 이효백(新宗君 李孝伯)

처증조부(妻曾祖父) :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

처고조부(妻曾祖父) : 정종 공정대왕(定宗 恭靖大王)

형(兄) : 김위(金瑋)

 

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 아들

완성군 귀정 (莞城君 貴丁), 신곡수 부정 (薪谷守 富丁), 소성수 순정 (召城守 順丁)

학성군 연정 (鶴城君 連丁), 오원군 보정 (五原君 寶丁), 장연령 은동 (長淵令 銀同)

장흥령 은손 (長興令 銀孫), 상산군 말손 (商山君 末孫), 회진군 경손 (會津君 敬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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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 백헌 이경석 선생 종중

http://www.baekheon.com/

 

 

                             백헌 이경석 (白軒 李景奭)

 

이경석 (李景奭. 1595~1671) ... 본관은 전주, 字는 상보(尙輔), 號는 백헌(白軒), 諡號는 문충(文忠)으로 정종의 손자인 신종군 이효백(神宗君 李孝佰)의 5대손이다.

 

 

백헌 이경석은 형, 이경직(李景稷)으로 부터 글과 역사를 배웠고, 김장생(金長生)의 門人이다.

 

이경석이 13세 때, 부친의 임지인 개성에 따라 갔을 때,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이 공부하는 이경석을 보고 " 후에 우리같은 사람은 따르지 못하게 출세할 것이고, 인격이 출중하리라 "고 칭찬하였으니, 훗날 이경석은 영의정이 되었고, 김상헌은 좌의정이 되었다.

 

1617년 이경석은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北人이 주도하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론(廢妃論)에 반대하다가 과거 급제는 취소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른다.

 

이괄의 난(李适의 亂)으로 仁祖가 公州로 피신할 때, 조정의 백관이 모두 흩어져 버리고, 인조를 호종하는 신하는 이경석과 승지 한효중 그리고 內侍 2명뿐이었다.그 후 핵심관직을 두루 거치며 1632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비로소 재상의 대열에 오른다.                                 

                                         

                                    두 개의 神道碑 

 

 

 

묘소 입구에 두 개의 신도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옛 신도비는 누군가에 의하여 땅에 묻혀 버려진 것을 후손들이 찾아 다시 세웠다.

 

비문의 글씨는 마모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그저 항복문서를 썼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것... 그러나 그가 쓴 삼전도비(三田渡碑)의 운명은 더욱 기구하였다.

 

 

                                       병자호란

 

병자호란은 예견된 전쟁이었다. 明나라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세력을 잃고 몰락해 가고 있었다. 그 틈을 타고 1616년에 누르하치는 後金을 세우고, 흩어진 여진족 부족과  몽골까지 복속시켜 만주 전역을 통일하였다.

 

 

                                                               누르하치

 

그리고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의 전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明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빠르게 세력을 확장시킨 後金은 1636년에 국호를 청(淸)으로 고친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명을 대신하여 천하의 주인임을 선포하고, 조선에 대하여 군신의 관계(君臣之義)를 맺을 것을 강요하였다. 군신관계이냐? 아니면 전쟁이냐?의 최후통첩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새로운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왕을 비롯한 조정의 여론은 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전쟁까지 불사해야 한다는 斥和論이 팽배하였다.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는 자들은 모두 척화파이었고, 감히 주화(主和)를 내세우기란 쉽지 않았다.

 

척화파는 청과의 외교 단절을 요구하며 청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使臣이 도망가자 이를 통쾌하게 생각했다는 기록도 있다.

 

1636년 12월 18일, 청나라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진격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불과 엿새만에 도성에 육박하였다. 12월24일 仁祖는 황급히 숭례문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이미 청군이 포위한 상태이었다.

 

다급해진 인조는 시체를 내다버리는 수구문(水口門 .. 광희문)을 통해 탈출하여야 했다. "연려실기술"은... "동궁이 손수 말고삐를 잡고 채찍질하며 수구문을 나갔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한다.

 

그날 밤 仁祖는 나무꾼의 등에 업힌 채 남한산성에 도착하였다. 신료들은 모두 도망치고 仁祖의 일행을 수행하는 신하는 5~6명에 불과하였다.

 

남한산성 안의 군사는 문관까지 포함해도 12,000명. 반면에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군사는 조선군보다 10배나 많은 128,000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은 講和뿐이었다. 그러나 강화교섭은 척화파의 반발에 부딪쳐 결렬되었다. 남한산성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했다. 그해의 겨울을 유난히 추웠고, 식량도 한 달치 밖에 없었다.

 

                                                

                          삼전도비문 (三田渡碑文)의  작성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경석은 仁祖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역부족하여 조선이 드디어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하여 남한산성을 출성(出城)하는 날, 흐르는 눈물을 그치지 못하고 통곡하는 이경석을 바라 보며, 仁祖는 이를 민망히 여겨 수행하지 말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의 儀式을 마친 후, 淸나라의 사신은 조선에게 공덕비를 세워 청나라 황제를 찬양하고, 明나라와의 단절을 강력히 요구한다.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이른바 삼전도비이다.  

 

 

비문(碑文)을 작성하여 청나라 조정의 허락을 받을 것을 독촉하는 청나라 사신의 압력에 드디어 인조는 4명의 신하에게 비문(碑文)의 찬술(撰述)을 명령하지만  그 누구도 그 命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 

 

名分으로 사는 조선의 선비에게 항복문서의 작성은 個人과 家門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후대에 까지 오명을 뒤집어 쓰는 일이었다.  결국 이경석이 항복문서를 작성하게 된다. 이경석은 왜? 무엇을 위하여?

 

                               삼전도비문 (三田渡碑文)의 작성을 둘러싸고....

  

仁祖는 당대의 문장가인 4명의 신하에게 碑文의 작성을 명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선비에게 글이란 목숨과도 같은 것.....

 

 

이경전(李慶全)은 병을 핑계로 자리에 누워 버렸고, 조희일(趙希逸)은 일부러 거칠게 글을 작성하여 채택되지 않도록 미리 잔머리를 움직였다.

 

결국 李景奭과 장유(張維) ... 두 사람의 글을 淸나라에 보내지만 청나라의 심한 질책과 함께 되돌아 온다. 張維의 글은 잘못된 인용문을 사용하였고, 이경석의 글은 너무 간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仁祖는 이경석을 불러 간곡히 부탁한다.  이경석은 나라를 위하여 개인의 명예를 희생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거절할 것인가? 조선을 뒤흔드는 名分과 現實 사이의 갈등이었다.

 

 

 연려실기술(燃濾室記述)에 의하면 ... 仁祖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경석에게 간절하게 부탁한다.

  

 

" 卿이 수치스러운 항복 碑文의 작성을 피하는 충성심은 충분히 이해한다.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항복한 內心을 헤아리고자 함이니, 단지 碑文으로 의심한다면 나라가 위험하다.

 

사소한 문구에 구애됨이 없이 비문을 그들의 뜻에 맞추어 주고 後日을 기약할 것이다. 卿, 一身의 명예나 利害를 생각하지 말고 나라를 구하라..

 

 

월(越)나라 구천(句踐)은 회계산(會稽山)에서 오(吳)나라의 신첩(臣妾) 노릇을 하였지만 끝내는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이루었다.

 

훗날 나라가 일어서는것은 오직 나에게 달려 있는데, 오늘 할 일은 다만 文字로서 그들의 마음을 맞추어 사세가 더욱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 "

 

  

왕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이경석은 비문의 일부를 改撰하고는 자신에게 공부를 가르켜 준 형,이경직(李景稷)에게 편지를 보내어 " 글 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恨이 됩니다 "라고 썼다.

 

수치스러운 마음을 등에 업고 백길이나 되는 어계강(語溪江)에 몸을 던지고 싶다...라는 그의 詩는 그의 고통을 잘 말 해주고 있다.

 

그러나 훗날 이경석은 비문의 찬술(撰述)로 인하여 송시열(宋時烈)과 그 제자들로부터 수 많은 공격과 수모를 당하였으니, 그야말로 소절(小節)이 대의(大義)를 꾸짖는 격이었다.

 

                                    

                           삼전도비 (三田渡碑)와 그 기구한 운명

 

 

 

 수난의 역사

  

1937년 ... 처음, 한강의 높은 언덕 위에 누각을 짓고, 계단을 쌓은 단(壇) 위에 세웠다.

  

 

                   (겸재 정선의 그림 ..화살표 부분이 삼전도비)

  

1895년 ... 조선말기, 高宗은 치욕의 산물인 이 碑를 한강물로

넘어 뜨린다.

  

 

  

1913년 ... 일제 치하, 일본은 이를 찾아 다시 세운다.

1916년 ... 일제는 이 삼전도비를 보물로 지정한다. 조선은 원래 중국의

               속국(屬國)이었음을 강조하여,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합리화

               하려는 그들 다운 잔꾀이었다.

1945년 ... 광복이 되자, 지역주민들이 부끄럽다고 하여 땅 속에 파묻어

               버린다.

1963년 ... 큰 홍수로 인하여 땅에 묻혀있던 삼전도비가 드러난다.

               당시 정부는 치욕의 역사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역사 인식

              으로 다시 세우고 보물을 해제, 사적 101호로 등록하고

              그 이름을 " 대청황제공덕비 "에서 삼전도비로 바꾼다.

  

 

 

 

                                       

                           청나라의 인질(人質)과 구금(拘禁)

 

  

병자호란이 끝나고 1641년 이경석은 이사(貳師)가 되어 淸나라의 인질로 잡혀 간 소현세자(소현세자)를 보필하게 된다.

 

당시 심양(瀋陽)에는 高官의 자제들, 大臣들, 世子 등 다수가 인질로 억류되어 있었는데, 이경석은 이들의 석방을 위하여 노력한 결과 김상헌(金尙憲), 박연(朴演), 조한영(曺漢英)의 귀국을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이경석은 평안도 선천(宣川)에 明나라 선박이 왕래한다는 전말을 사실대로 밝히라는 淸나라 황제의 명령을 어겼다고 하여 봉황성에 구금된다.

 

이 때 大臣 이하 구금된 사람이 많았으나, 다른 사람은 모두 풀려나 귀국하고, 이경석만 홀로 남아 8개월동안 구금되었다.

 

 

그 후 영원히 등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어 귀국한 이경석은 1645년(인조 23)에 영의정에 오른다.

 

이 해에  귀국한 소현세자가 죽고 (아버지 仁祖가 죽임?), 은둔인사이었던 송시열, 송준길 등의 인재를 추천하여 등용하였다.

 

그 후 송시열과의 사이가 나빠져 마침내는 명분을 앞세우는 송시열 등 인물들에 의하여 강력한 비판과 모욕을 당하며, 후일 이경석의 신도비가 훼손 당하는 고통을 당하고 말았다.

 

 

이경석, 39세에 쓴 글씨.. 易地思之

 

                

                                         反淸, 북벌정책의 주도

  

1650년 仁祖가 죽고 孝宗이 즉위한다. 김자점(金自點)의 밀고로 조선의 반청(反淸), 북벌정책(北伐政策)이 청나라에 알려지게 되었고, 청나라는 6명의 조사관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즉시 어전회의를 열었는데, 이경석은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자진하므로 왕이 말렸으나

" 소신 한 몸이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살신성인하여 나라를 구하겠습니다 " 말하고 義州까지 가서 청나라 사신들을 영접하였다.

 

이 때 청천강을 건너며 詩를 남긴다.

 

 

                                        청천탄야도   晴川灘夜渡

 

 

       장 하 월 흑사사  長 河 月 黑絲絲   청천강의 밤은 칠흑같고,

                                                    비는 쉴새없이 내리는데

       인어탄성공활시  人語灘聲共闊時   민심은 흉흉하고 물소리도 요란

                                                    하다

       반야직장충신섭  半夜直將忠信涉   구국의 일념으로 야밤에 이 강을

                                                    건너가네

       차심유직귀신지  此心惟直鬼神知   이 마음 오직 귀신만이 알 것이네

 

  

청나라 사신들이 서울에 도착하여 남별궁(南別宮 ..지금의 조선호텔)에서 반청의 책임을 효종에게 물으며 위협하였으나 , 이경석은 왕은 모르는 일이고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고 태연하게 주장하였다.

 

이 사건으로 당시 조정은 흉흉하기만 하였지만, 청 사신의 위협과 협박에도 이경석은 시종일관 태연한 태도로 자신의 책임임을 주장,설득하니, 청나라 사신도 " 東國에는 홀로 백헌 이경석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라고 말하며 감탄하였다.

 

 

 

효종 또한 譯官 정명수에게 千金을 주어 청 사신을 달래게 하는 등 극력 주선으로 이경석은 극형을 면하게 되고, 의주 백마산성의 가시 울타리에 안치(安置) 당하는 것으로 이 사건은 종료된다.

 

백마산성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몇차례 처형당할 위험이 있었으나 항상 태연하였다.

 

그 해 12월 앞으로 영원히 벼슬에 등용하지 않고(永不敍用)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보내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77세로 죽고, 사후녹봉(死後祿俸)의 효시

  

 

석방된 후 이경석은 광주(廣州)에 은거하며, 금강산을 유람하는 등 정사에서는 한발 떨어져 있었으나 효종이 자문하면 정성껏 응하였다.

 

1655년에 청나라 사신이 이경석이 서울에 있는 것을 질책하자 아들의 임지인 안협(安峽)으로 피해있다가 철원으로 이사하는 등 시골을 전전하였지만, 孝宗은 그의 건의는무조건 수용하는 등 그를 높였다. 

 

 

 1653년 이경석은 퇴임관리를 위한 경로당 비슷한 기관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갔으며, 왕의 특별한 존경과 신임을 받아 현종이 온천에 갈 때에는 서울에 머물러 임금의 대신하여 정무를 맡아보는 유도대신(留都大臣)을 네 차례 맡기도 하였다.

  

 

                                  금강예찬  金剛禮讚

  

 

         몽상평생재영동  夢想平生在嶺東  꿈에 그려온 금강산에 오르니

                                                    소원을 풀었으나

         홍진공작백두옹  紅塵空作白頭翁  풍진세상 헛되이 보내니 어느덧

                                                     백발노인 되었네

         어금시득심진경  於今始得尋眞景  이제야 참 경치를 찾았으니

         환공자행시몽중  還恐慈行是夢中  이 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꿈 깰까

                                                     두렵구나

  

 

74세 되던 현종 9년에 임금이 궤장을 하사하였는데, 이경석은 누차 사양하였으나 삼공육판서(三公六判書)  전원이 수행하고, 궁중 악대와 연회음식 일체를 하사하니 이경석은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었다. 

 

76세에 노환이 심해서 임금이 어의를 보내고 약을 하사하였으나 이듬 해 세상을 떠난다.

 

당시 영의정 정태화가 이경석의 생전에 가정이 빈한했던 것을 왕에게 아뢰어, 이경석에게 3년치의 녹봉(祿俸)을 내렸으니, 大臣의 死後에 녹봉을 주는 일의 효시가 되었다.

 

  

 

 

                                    궤장 및 사궤장연회도첩 ... 보물 930호

 

  

조선시대에는 70세가 넘는 신하에게 공경의 뜻으로 나라에서 지팡이(杖)와 의자(궤) 그리고 가마(輦) 등을 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에 따라 왕이 내린 물품이다.

 

1668년(현종 9)11월 왕이 당시 원로대신이었던 이경석에게 내린 궤 1점과 그리고 이를 받는 장면을 그린 그림 1점 등 총6점이다.

  

궤장이란 공이 높고 나이 일흔을 넘긴 신하에게 왕이 직접 내리는의자와 지팡이로, 궤장을 받는다는것은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이었다. 궤장을 받는 신하가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요즘 시대에 훈장을 받는 것보다 훨씬 영광스러운 상징물이었다고 하다.

 

  

 

궤 (의자) ... 높이 93cm, 폭 77.4cm로 앉을 때에만 펴고, 평상시에는 접어 둘 수 있게 만든 의자이다.

 

앉는 곳에는 단단한 노끈을 X자형으로 엮어 접어두기 편하게 만들었다. 뒤에 몸을 기대는 부분은 괴목으로, 가운데에 구멍을 뚫었고, 등받이 표면을 자작나무의 껍질로 싼점이 특색이다.

 

 

 

사궤장연회도첩 (賜괘杖演會圖牒) ... 궤장을 내릴 때에는 반드시 잔치를 열었는데, 의정부(議政府)의 문무관을 비롯한 대신들을 참석하게 하고, 예문관이 작성한 교서를 낭독하게 하였다.

 

이 그림은 바로 이 장면을 3부분으로 나누어 그린 것이다.

 

  

 

 

 

 

"지영궤장도(祗迎궤杖圖)"는 임금이 내리는 궤장을 맞아 들이는 장면,

"선독교서도(宣讀敎書圖)"는 임금이 내리는 교서를 낭독하는 장면,

"내외선온도(內外宣縕圖)"는 궁중에서 보낸 악사(樂士)와 무희들이 

                                연주하고 춤을 추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지팡이 (杖) ... 길이 189.5cm의 새머리가 조각되어 있는 지팡이와 길이 149.5cm의 칼이 들어있는 지팡이 그리고  길이가 141cm인 삽 모양의 지팡이 2점 등 총 4점이다.

 

먼저 조두형(鳥頭形) 지팡이 끝부분에는 오리로 생각되는 새의 머리를

조각해 끼웠고,  칼이 들어 있는 지팡이의 겉모습은 지팡이이지만 안에는 칼이 부착되어 있어 손잡이 부분을 빼면 칼날 길이 60cm, 손잡이 포함하면 80cm의 칼이 된다. 

 

 

 

 

 

 

시호교지     諡號敎旨

 

                                

백헌 이경석의 死後 37년 뒤인 1708년(숙종 34), 이경석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추증하면서 내린 시호교지(諡號敎至)이다.

 

시호(諡號)란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의 행적을 조사하여 사후에 하사하는 호이다.

 

 

 

 

숙종(肅宗)이 지은 詩 

  

숙종(肅宗)이 이경석의 문집을 읽고 친필로 그 느낌을 적은 시부(詩賦)로, 이경석의 후손들에게 하사하였던것이다. 후손들은 참죽나무 필갑에 넣어

보관하고 있으며, 뚜껑에는 숙종성제보묵(肅宗聖製寶墨)이라고 전각(篆刻)

하였다.

 

 

관백헌집유감부시 觀白軒集有感賦詩  백헌집을 읽고 느낌이 있어 적다

 

  

   다년구멱득하지   多年求覓得何遲   오래도록 그대의 詩를 찾았다가,

                                                 이제야 구해 놓았더니

   종일피간불자피   終日披看不自疲   온 종일 책장 넘기며 읽어도 피곤을

                                                 모르네

   충관애군장진견   衷款愛君章秦見   임금 사랑하는 깊은 마음은  글 곳곳

                                                 에 보이고

   성순체국귀신지   誠純體國鬼神知   나라를 내 몸처럼 아끼는 마음은 귀

                                                 신도 알았네

   선조사장융은례   先祖賜杖隆恩禮   선왕(현종)께서 궤장을 내리시어 큰

                                                 은덕을 베푸셨고

   성조반감하총사   聖祖頒柑荷寵私   仁祖께서 감귤을 내리셨다니 남다른

                                                 총애를 입었구나.

   덕협태사현재상   德協台司賢宰相   덕으로 삼공(三公)을 화합시킨 어진

                                                 재상이었으니

   송시문정가방지   宋時文靖可方之   송나라 문정공(文靖公)에게 견줄 만

                                                 하네.

 

 

 

                             이경석에 대한 평가

  

병자호란이 조선의 치욕으로 끝나고 이경석은 도승지, 이조참판, 이조판서에 오르면서 난세를 헤쳐나갔다. 전쟁의 후유증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병자호란 후, 다수의 척화파들은 조정을 떠나 낙향을 선택하였다.

 

불사오군(不事汚君) .. 즉 더러운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명분론자들이 볼 때 임금이 오랑케에게 항복한 것은 대의를 잃어버린 행동

이었다.

  

이러한 명분 이외에 고위관직에 오를 경우 자식들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야 하는 위험과 청국의 사신을 접대해야 하는 일 등이 현실적인 이유이었다.

 

국론은 분열되고, 척화파를 비난하는 여론이 조정에 들끓었다. 인조의 배신감도 커져갔다, 인조에게 이들은 나라의 존망보다는 자신의 명예만을 좇는 무리이었다.

 

이들은 나라의 存亡은 도외시하고,

명예만을 차지하려 하였으니 매우 가증스럽다 . 인조실록

 

그러나 이경석은 주화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척화파를 끌어 안을 것을 주청했다. 戰後의 수습이 시급한 시절.. 옳고 그름을 떠나 척화파와 함께 주화파가 함께 힘을 모아야 했기 때문이다.

 

벼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용기가 필요하였던 시절에 이조판서에 오른 이경석이 특히 힘을 기울인 것은 인재의 발탁이었다.

 

숨은 인재들의 이름을 " 인대(人垈) "라는 인재 추천용 메모장에 적어두었다가 당파에 관계없이 등용하였다. 우리가 기억하는 조선시대의 인물들은주로 이념에 투철한 학자형 정치가들이었다.

 

그러나 이경석은 주의주장보다는 현실을 먼저 생각하고 닥쳐온 현실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직분을 수행한 실무형 관료 이었다.

 

                                이경석과 송시열

  

실제로 이경석은 宋時烈을 비롯하여 많은 재상과 판서를 등용하였다. 당대 이경석에 대한 평가는 삼조, 곧 인조, 효종, 현종에 걸쳐 공식적으로 충신이었다.

 

그러나 명분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경석은 결코 용서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특히 송시열은 이경석의 태도를 " 수이강(壽而康) "에 비유하였다. 한마디로 " 잘 먹고, 잘 살았다 "는 뜻으로 송나라의 손적이 흠종(欽宗)을 따라 金나라에 잡혀간 뒤 오랑케에게 아부하여 말년에 부귀를 누렸다는 고사(故事)이다.

 

송시열은 이경석을 손적과 같은 배신자라고 비방한것이다.

 

 

만일 경인년 봄의 한가지 일(이경석이 백마산성에 구금된 일)이 아니었다면,  개도 그가  남긴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 송자대전(宋子大典)

 

송시열은 원래 이경석이 추천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왜 이렇게 혹독하게 이경석을 폄하 하였을까 ?

 

송시열과 같은 의리론자,명분론자들에게 名分과 義理는 정치적 상징성,정체성을 갖는 것으로 그 문제를 제기해야만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넓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시열은 북벌을 주장하며 명분론을 내세웠던 노론세력의 영수이었다.

 

그는 이경석을 " 겉으로는 덕이 있는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으나 실제 행실은 그렇치 않은 소인배 "라는 의미의 향원(鄕愿)이라고도 폄하하였다.

 

삼전도 비문의 작성으로 개인적 뱃속을 채운 소인배라는 것이다. 

 

이러한 時流속에 이경석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이 불태워지고 신도비의 글자는 깎여 땅에 묻히게 된 것이다.

 

현실의 모순을 타개하려던 주화론자들이 수세에 몰리고 명분론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이 淑宗代 이후 다시 세력을 얻게 되고, 조선 후기 내내 이경석과 같은 인물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 이어지면서 그의 공적인 역할도 묻히게 되었다.

 

 

 

백헌집 (白軒集) .. 이경석의 글을 후손들이 모아 편찬한 책이다.

 

총 49권 21책으로 되어 있는데, 1책부터 20책까지 48권은 이경석의 각종 저술, 비문 등이 실려있고, 나머지 1책은 이경석의 개인연보와 詩, 賦가 실려 있다.

 

 

 

백헌필적 (白軒筆跡) ... 이경석이 1615년, 병조판서를 지내다 타계한 현계(玄溪)을 위하여 지은 제문(祭文)으로 "현계제문(玄溪祭文)"이라는 표제가 붙어있다. 이를 후손들이 백헌필적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만들었다.

 

 

                         

                대청황제공덕비  大淸皇帝功德碑의 全文 .. 이경석

 

 

大淸 崇德 元年 겨울 12월에 寬溫仁聖皇帝께서 우리가 먼저 和約을 깬 까닭에 처음으로 진노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오셨다.

 

곧바로 동쪽으로 공격하여 오니 아무도 감히 항거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우리 임금은 남한산성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두려워하기를 마치 봄날 얼음을 밟고 햇빛을 기다리는 듯 하였다.

 

거의 50일이 지나자 동남쪽 여러 지방의 군사들은 서로 연달아 무너지고, 서북쪽의 장수들은 골짜기에 머무른 채 한걸음도 나오지 못하니, 

城 안의 양식도 거의 떨어지게 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많은 병사들이 성을 공격하기를 마치 서리바람이 가을풀을 말듯하고 화롯불에 깃털을 태우듯이 하였으나, 황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을 武藝의 근본으로 삼고, 德을 펼치는 것을 우선으로 하셔서 항복하라는 칙령으로 달래어 말하기를 " 항복하여 내게 오면 너희가 모두 온전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屠戮할 것이다 "고 하였다.

  

英馬와 같은 여러 대장들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서로 길을 오가니 이에 우리 임금이 文武의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 내가 큰나라에 의탁하여 화친을 맺은지 10여년이 되었는데, 나의 어리석고 迷惑됨으로 말미암아 윗 나라 군대의 토벌을 自招하여 만백성이 도륙을 당하게 되었으니 죄는 나 한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황제께서는 오히려 차마 이들을 도륙하지 못 하시고 이와같이 타이르시니 내 어찌 감히 그 말을 받들어 위로는 우리의 宗廟와 社稷을 보전하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대신들도 모두 찬성하였다.

  

드디어 수십騎를 이끌고 군영 앞으로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예로서 대접하고 은혜로 어루만지며, 한 번 보고는 心腹으로 인정하여 재물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온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곧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려 보내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군대를 불러들여 서쪽으로 물러났다. 백성들을 위로하여 농사에 힘쓰게 하고, 遠近에 도망친 백성들을 모두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게 하시니 커다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작은 나라가 上國에 죄를 얻은 지 오래 되었다. 기미(己未. 1619년 광해군12)의 軍役에 都元首  姜弘立이 군대를 이끌고 明나라를 돕다가 패하여 사로 잡혔을 때, 太祖武皇帝께서는 강홍립을 비롯한 몇 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 보내주셨으니 그 은혜가 막대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작은 나라가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니, 정묘년(인조 5.1627)에 지금의 황제가 장군들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우리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임금과 신하가 섬으로 피난하고는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니

황제께서는 이를 허락하고 형제의 나라로 간주하니, 강토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고 강홍립장군도 돌아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예우가 한결같고 관리들이 서로 오갔는데, 불행하게도 뜬 소문이 생겨나 퍼져가면서 작은 나라가 어지러워지니, 거듭 변방의 신하를 바로 잡고자 하였으나 언어가 불손하였다.

 

그래도 황제께서는 오히려 너그럽게 대하시어 곧바로 군대를 내보내지 않고, 먼저 詔書를 보내어 군대를 보낼 시기로써 거듭 깨우치기를 마치 귀를 잡고 끌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듯 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 말을 듣지 않았으니 작은 나라의 여러 신하들의 罪가 더욱 무거워졌던 것이다.  

  

황제께서 이미 大兵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는, 또 한 무리의 군대에게 명하여 강화도를 함락시켜 宮嬪과 王子 및 여러 신하들의 가족들을 모두 포로로 붙잡았는데, 황제께서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해를 입히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시종하는 관리와 내시들로 하여금 간호하게 하였다.

 

이윽고 크게 은전을 베풀어 작은 나라의 임금과 신하 및 그 사로 잡혔던 卷屬들이 모두 옛 장소로 돌아가게 하시니, 서리와 눈이 변하여 봄 햇볕이 되고, 가뭄이 단비가 된 듯 나라가 거의 망했다가 다시 살아나고 宗社가 거의 끊어졌다가 도로 이어지게 되었다.

 

모든 동쪽의 땅 수천리가 모두 살려주는 은택을 입었으니 이는 실로 예로부터 드물게 보는 일이라 하겠다, 아아! 훌륭하도다.

 

 

 

 

 

 

                                              이어서...........

 

한강의 상류 三田渡의 남쪽은 황제께서 머무시던 곳으로 제단이 있다. 우리 임금이 수부(工曺)에 명하여 壇을 더 쌓아 높고 크게 만들고 또 돌을 잘라서 碑를 세우게 하였다.

 

황제의 공덕이 天地의 조화와 같이 흘러 갈 것임을 후세에 길이 顯彰함이니, 어찌 우리 작은 나라만이 대대로 힘을 입을 뿐이겠는가. 또한 큰 나라의 인자한 聲門과 올바른 武威에 멀리서도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음이 모두 여기에 근본하고 있는 것이다.

 

커다란 천지를 베껴내고 밝은 日月을 그리자니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기에 부족하나, 삼가 그 대략을 기록하는 바이다. 銘에 이르기를....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고 기르는데

                     오직 황제께서 이를 본받아 위엄과 덕을 함께 펴시네.

                     황제께서 동쪽으로 정벌하심에 그 군사는 10만이요

 

                     은은한 수레소리 호랑이 같고 표범 같네

                     서쪽 변방의 터럭 하나 없는 벌판과 북쪽 부락의

                     사람들에 이르기 까지

                     창 들고 앞서 진격하니 그 위세 혁혁하도다

 

                     황제께서 크게 인자하심으로 은혜로운 말씀을 내리시니

                     10줄의 밝은 화답 엄하고도 따듯하였네

 

                     처음에는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근심을 끼쳤지만

                     황제의 밝은 명령이 있어 비로소 깨달았네

 

                     우리 임금 이에 복종하고 함께 이끌고 귀복하니

                     단지 위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덕에 의지함일세

 

                     황제께서 이를 嘉納하시어 恩澤과 예우가 넉넉하니

                     얼굴 빛 고치고 웃으며 병장기를 거두었네

 

                     무엇을 주셨던고, 駿馬와 가벼운 갓옷

                     도회의 남녀들이 노래하고 칭송하네

                     우리 임금이 서울로 돌아 가신 것은 황제의 선물이요

                     황제께서 군사를 돌이키니 백성들이 살아났네

 

                     유랑하고 헤어진 이를 불쌍히 여겨 농사에 힘쓰게 하고

                     금구의 제도 옛날과 같고 비취빛 제단은 더욱 새로우니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언 풀뿌리에 봄이 돌아 온 듯

                     하네

 

                     커다란 강가에 솟은 碑 우뚝하니

                     만년토록 三韓은 황제의 덕을 이어가리

 

  

嘉善大夫, 禮曺參判兼 同知義禁府事 臣 여이징(呂爾澄)이 왕명을 받들어 篆額을 씀. 資憲大夫,漢城府判尹 臣 오준(吳竣)이 왕명을 받들어 씀. 資憲大夫,吏曺判書 兼 弘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 臣 李景奭이 왕명을 받들어 지음... 

 

  

 

 

                                                                          출처 : http://blog.daum.net/0118983530/843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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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선생의 묘 

 

경기도 기념물 제84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산 16-18

 

 
묘소 입구의 해설판

 

묘소 입구 신도비

 

 

묘소에 이르는 좌측 입구에는 두 개의 신도비가 서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하나는

새것이고, 하나는 글귀가 깎 여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땅에 묻혀있던 구신도비를 발굴하여 세우고 옆에다 후손들이 새로운 신도비를 다시

세운 것이다.

 

생전에는 나라의 추앙을 받던 이경석. 그러나 사후엔 비조차 땅에 묻힌 이유가 무엇

일까?

 

숙종 28년(1702)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이 이경석의 신도비를 쓰면서 이경석을

옹호하고 송시열을 비판한 것을 계기로 논란이 재연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노론은 아직 발표도 되지 않은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에 주희와

다른 경전 해석이 있다면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삭탈관작(=삭탈관직)했다.

 

이 때문에 이경석의 신도비는 50여 년 뒤인 영조 30년(1754)에야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받아 겨우 세워졌으나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은 신도비를 갈아서 없애버렸다.

 

불편부당과 무비방(無誹謗)을 신조로 삼은 이경석도 노론의 당심(黨心)을 비켜가지는

못했던 것이다.

 

구 신도비와 새로 세운 신도비가 나란히 서있다.

 

74세 되던 해, 현종에게 궤장을 받은 백헌 이경석. 궤장은 나라에 공을 많이 세운 신하에게 하사하는 것으로, 당시 50년 만에 이경석이 받은 것이었다.

 

3대에 걸쳐 임금을 모신 충신으로서 임금과 백성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신하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 평가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궤장수여식을 기념해 바친 글에서 이경석을 ‘절의 없는 사람’, ‘삼전도비문을 지어 아첨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소인배’로 비하시켰다.

 

청을 배격하고 명을 숭배한 존명배청론자의 대표인 송시열은 이경석의 삼전도비문

작성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경석은 어떤 이였을까?

 

박세당이 지은 신도비명을 보면...

 "3조(인조.효종.현종)의 원로(元老)이고 한 시대의 진실한 신하(忱臣)이다. 나라 위해 가문을 잊고 임금위해 일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붉은 정성 해와 같이 밝혔고 타고난 절개는 서릿발을 넘어 섰다. 험하고 어려운 일을 이미 다 겪었다. 참으로 의지할 믿음이 끝간데가 없으니 짐승과 물고기까지 감동시킨다. 온전한 덕과 높은 행실이 여러 글에 붉은 빛으로 씌여졌다."  

 

청음 김상헌도 이경석을 사문의 홍장(斯文鴻匠)이라 높혔고, 현종도 이경석의 제문에 '백관의 모범으로 상서로운 봉황과 상서로운 기린(麒麟)이다'라고 칭예하였다.

 

뒷날 이경석을 ‘만고역적’이라고 비판한 ‘성리학 근본주의자’ 송시열에 대해 '칼의

노래' 저자 김태훈은 이렇게 말했다.

 

“명분으로 ‘과거사’를 말하긴 쉽지만, 과거란 단순하지 않아요. 역사란 복잡다단한

현실이고, 총체적으로 봐야 하지 않겠어요?”

 

'‘삼전도비’의 문장을 지은 문장가였어요. 주화(主和)론자였고. 침략자의 송덕비문을 써야 했던 것, 저는 그것이 한 국가가 살기 위한 생존의 몸짓이었을 뿐, 굴욕도 영광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인조가 무릎을 꿇어 국토와 민족, 언어를 보존한 걸 훌륭하다고 할 순 없어요. 하지만 그 굴욕 안엔 현실을 극복하려는 장엄함이 있어요.”

 

조선 후기에 송시열을 추종하는 노론세력이 집권하면서 현재까지 이경석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승자의 시각으로 기록되고 전해지는 역사...

 

그러나 실리와 현실을 추구한 이경석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세대를 초월하여 가장

필요한 인물이었다.

 

이경석은 현종 12년(1671) 취현동(聚賢洞) 자택에서 사망했다.

 

“집안에서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는 청렴 검소하였다.

 

아래 관리에게도 겸공(謙恭)하였고 옛 친구들에게 돈독하였다. …수상으로서 앞장서서 일을 맡아 먼 변방에 유배되었으므로 사론(士論)이 대단하게 여겼다”라는 졸기가 그의 일생을 대변한다. (현종개수실록 24권 12년 9월23일)

 

구 신도비는 박세당이 찬하고 전과 서는 명필 이광사가 썼다.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 1629~1703))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일찍 문명을 날리고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나 당쟁에 염증을 느껴 40세 전후부터  초야에 묻혀 후진 양성에 전념한 강직한 학자로 칭송된다.

 

특히 반 주자학적 면모를 보인 '사변록(思辨錄)'과 실사구시의 '색경(穡經)'도 저술

하였다.

 

그가 작고하기 전년인 1702년 이경석의 신도비명을 절필로 남기면서 다음과 같이 이경석과 송시열을 비교 논박하였다.

 

"제멋대로 꾸미고 방자하게 속이는 문인이 있다. 올빼미는 봉황새와 성질이 달라서

제멋대로 성내고 제멋대로 꾸짖는 것이다.

 

불선자가 미워하는 것이니 군자가 무엇을 염려하리오," 이경석을 군자의 상징인

'봉황'에다 송시열을 불선자의 상징인 '올빼미'에다 비교 한것이다.

 

후손에 의해 새로 세워진 신도비

 

지리산에 올라 지은시 '청학동'

 

묘소 입구를 가르키는 표석.                                             

 

           문화재 구역을 알리는 표석

 

묘소로 올라가는 진입로

 

문충공 백헌 이선생 사적비 '전면'        

       

      

       문충공 백헌 이선생 사적비 '후면' 

 

백헌 이경석 시비

 

묘소전경

 

묘표' 명필인 방손 이광사 글씨'

 

문인석           

 

            망주석

 

 

묘소후경

 

이경석 [李景奭, 1595~1671] 

 

본관 전주(全州), 자 상보(尙輔), 호 백헌(白軒), 시호 문충(文忠)이다. 정종의 후예

이며 김장생(金長生)에게 배웠다.

 

1613년(광해군 5) 진사시, 1617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북인이 주도하는 인목대비

(仁穆大妃) 폐비론에 반대하다 취소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에 들어갔다.

 

그후 예문관 검열·봉교 등으로 진출하여 핵심 관직을 두루 거쳤고, 1632년 가선대부에

올라 재신(宰臣)에 들었다.

 

병자호란 끝에 인조가 척화신들을 배격하는 상황에서 도승지를 맡아 국왕을 모셨다. 이때 예문관제학을 겸하여 청나라의 승전을 기념하는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썼다.

 

1637년 예문관과 홍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 이조판서를 거쳐 1641년 이사(貳師)가

되어 청나라로 가서 소현세자를 보필하였다.

 

이때 평안도에 명나라의 배가 왕래한 전말을 사실대로 밝히라는 청제(淸帝)의 명령을

어겼다 하여 청나라에 의해 등용이 금지되었다.

 

1644년(인조 22)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1650년(효종 1) 조선의 반청정책이 알려져 청나라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국왕과 백관

을 협박하는 상황에서 영의정으로서 목숨을 걸고 책임을 전담하여 위기를 넘겼다.

 

국왕의 간청으로 처형은 면했으나 의주 백마산성에 감금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53년 이후 중추부영사에 올랐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국왕의 특별한 존경과 신임의 표시인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청나라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에서 국가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송시열(宋時烈) 등 명분을 앞세우는 인물들에 의해 삼전도 비문 작성과 같은 현실적인 자세가 비판받기도 했다.

 

이념과 정책은 숙종대의 소론으로 연결된다. 문집에 《백헌집》이 있으며 글씨에 능하였다. 남원의 방산서원(方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