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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익재공후 청호공파 세거지 고백당, 족보 -- 2탄

by 연송 김환수 2009. 6. 20.

고백당 (孤栢堂)

주소 : 영동군 황간면 금계리 11-2

 

지정문화재 : 향토유적 제62호

 

 

 

16세기 초엽 기묘사화로 인해 중종때 벼슬을 버리고, 이곳 백화산 기슭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지도하였으니, 이름은 이우인(李友仁), 자는 사중(士中), 호는 농헌으로 본관은 경주 이씨이다.

그는 이곳에서 후학을 지도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그곳을 고백당이라 하고 현판은 미수 허목(許穆)이 지었다. 건물은 3칸의 팔작 기와집이다.

 

16세기 초엽의 인물로 이름은 이우인 자는 사중(士中), 호는 농헌, 본관은 경주이씨이며  중종14년(1519) 기묘사화때 지평(持平) 집의(執義)의 벼슬을 버리고 이곳 백화산 밑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지도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했는데 그곳을 고백당이라 하고 현판은 미수 허목이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 5량 팔작기와 홑처마이다.

 

 경주이씨 분파도

 

 

익재공파(이제현) 에서 분파된 청호공파 세계

 

 익재 이제현(청호공의 고조부) - 운와 이달존(증조부) - 이학림(조부) - 이담(부)    -   이희(청호공 파조)

   계림부원군(1287-1387)                   임해군                     소부윤       밀직사대언    경상도관찰사 

                                                                                                                          증 이조판서,대제학   

  호공 셋째 아들 제학공 문환 -  -  농헌 우 - 이유 - 형운,형욱 - 진남  -  - 

 

 

고백당 중수전 모습  (벽면 벽화 있음)

 

 정문이 동쪽에 있음 (현재는 남쪽으로 이전)  (벽면 벽화 있음)

 

   

     제 기억으로 1970년대 까지는 재실 벽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지금은 없으니 아쉽네요.

 

 

  고백당 최근 모습 (예전과 비교하면 정문이 동쪽에서 남쪽으로 이동되고 세거비, 공적비가 생겼음)

   * 정문 옮겨진 이유는 제생각으로는 도로 확장과 연관이 있을 것 같네요

   * 담장은 흑벽돌담에 기와를 얹은 모습에서 시멘트 블록담에 기와를 얹었다가 현재 모습으로 예전모습을

      찾았네요. 석회석으로 겉모습을 감싼것 빼고는요. (위의 옛날 사진을 보고 아쉬움을 달래봅니다)

 

 

 고백당 앞에는 물레방아간(서씨집안 소유)이 있었어요. 없어진지 30년은 지난 것 같군요.

 지금은 앞쪽에 물레방아 형태만 만들어 보존하고 있네요.

 담장 및 건물을 보수하긴 했어도 예전 모습은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익재(益齋) 이제현

 

1287(충렬왕 14)∼1367(공민왕 16). 고려 후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예이지만, 아버지 진(瑱)이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가문이 비로소 떨치기 시작했는데, 진은 검교시중(檢校侍中)에까지 올랐다.       

익재 영정

 

 

                       

 

고려말에 원(元)나라의 화가인 진감여가 그린 이제현 초상화.                       익재난고  목판

비단바탕에 채색. 축. 세로 177.3㎝, 가로 93㎝.

국보 제11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암서원 강진군 유형문화재 제189호                 익재의 필체

[생애]

어려서부터 남달리 숙성해, 글을 짓는 데 이미 작자기(作者氣)를 지니고 있었다.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 해에 당시 대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보(權溥)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다음해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1311년(충선왕 3)에는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에 나아가고, 다음해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선발되었다. 1314년(충숙왕 1) 상왕인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 됨으로써 그의 재원(在元) 생애가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기며,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했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頫) 등 한족(漢族) 출신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그의 재원 생애와 관련해 특기할 것은 세 번에 걸쳐 중국 내륙까지 먼 여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하기 위해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에 강향(降香)하기 위해 행차하는 데 시종하였다. 마지막으로 1323년(충숙왕 10)에는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해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이 세 번에 걸친 여행은 그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320년(충숙왕 7)은 그의 생애를 통해 또 하나의 분기점을 이룬다. 주로 만권당에 머물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해, 성균좨주(成均祭酒)·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였다.

 

이 해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다. 그런데, 겨울에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유배됨으로써 자연히 그의 재원 생애도 6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충선왕의 유배로 인한 정세변화는 고려의 정치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뒤이어 고려의 국가적 독립성을 말살시키고 원나라의 내지와 같은 성(省)을 세울 것을 주장하는 입성책동(立省策動)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또한 충숙왕을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심왕 고(瀋王暠)와 그 일파의 준동이 격화되었다.

 

그는 1321년 아버지의 상을 치른 다음 1323년 원에 들어가 입성반대상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어서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어 있는 충선왕의 방환운동도 벌였다. 오래지 않아 입성책동이 저지되고 충선왕이 타사마로 이배된 데에는 그가 벌인 활동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1324년 밀직사를 거쳐 1325년 첨의평리(僉議評理)·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전임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 뒤 충숙왕과 충혜왕 부자가 중조(重祚)하는 어지러운 때를 당해 그의 활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1339년 조적(曹왅)의 난이 일어난 끝에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가자 그를 좇아 원나라에 가서 사태를 수습해 왕이 복위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간 조적의 여당(餘黨)에 눌려 두문불출했는데, 그 동안 ≪역옹패설 櫟翁稗說≫을 저술하였다.

 

그가 다시 정치의 표면에 나타나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은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문란해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해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王祺 : 뒤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해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 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1356년(공민왕 5)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하고 관직에서 아주 물러났다.

 

그 뒤에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는 자문에 응했으며,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에는 남쪽으로 달려가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호종(扈從)하였다.

 

[활동]

정치가로서의 그는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광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원과 고려를 넘나들면서 활약해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이 없었다.

학자로서의 그는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頤正)의 제자였고 ≪사서집주 四書集註≫를 간행해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다. 또한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이색의 부자였다는 학통(學統)으로 보아 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학자가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중국의 성리학에 직접 접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에만 경도되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문학부문에서 그는 대가를 이루었다.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가 특징을 이룬다. 또한, 사(詞)의 장르에서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시키면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편, 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 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만년에 ≪국사 國史≫를 편찬했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해 백문보(白文寶이달충(李達衷)과 함께 일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저술]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 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이라 한다. 그는 이색이 그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고,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1376년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허목[許穆, 선조 28년(1595)∼숙종 8년(1682)

 
본관 양천. 자 문보()·화보(). 호 미수(叟). 시호 문정(). 현감 허 교()의 아들이며 이원익()의 손녀사위이다. 경기도 연천의 향리이고 서울에서 성장하였지만 영남 남인의 거두 정구()에게 학문을 배웠다. 1626년(인조 4) 유생으로서 동학()의 재임()을 맡고 있을 때, 생부 정원대원군()을 왕으로 추숭해 나가려는 인조의 뜻을 지지한 박지계()에게 그 이름을 유생 명부에서 지우는 벌을 가했다가 과거 응시를 금지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과거와 벼슬에 뜻을 끊고 광주 자봉산()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여러 곳을 이주한 끝에 1646년 연천에 돌아왔다. 1650년(효종 1) 이후 정릉참봉·내시교관·조지서별좌·공조좌랑·용궁현감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거나 곧 사직하였다. 1657년 공조정랑·사복시주부를 거쳐 1659년에 장령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 송시열(송준길() 등의 정책에 반대하는 등 중앙 정부에서의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659년에 현종이 즉위한 후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다시 장령이 되었다.

이때 효종에 대한 인조 계비 조대비()의 복상 기간을 서인 송시열 등이 주도하여 1년으로 한 것은 잘못이므로 3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송()논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삼척부사로 축출되었다.

 

1674년 효종비가 죽었을 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제를 송시열 등이 주장한 9개월복 대신 기년복으로 늘려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승리하고 남인이 집권함에 따라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75년(숙종 1)에 산림직인 성균관제주()를 비롯하여 이조참판·우참찬·이조판서 등을 거치고 우의정에 임명됨으로써 과거를 거치지 않고 진출한 산림()중에서 정승까지 승진한 흔하지 않은 인물이 되었다.

 

이때 왕통을 문란하게 했다는 송시열의 죄를 엄하게 다스릴 것을 주장하여, 온건론자인 허적()이 이끄는 탁남()에 대비되는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1676년에 사직하고, 특명으로 기로소에 들어간 후로는 허적의 전횡을 비판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을 뿐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할 때 관작을 삭탈당하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죽은 후 1688년에 관작이 회복되고 경기도 마전에 있는 미강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사상적으로 이황()·정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다. 사서()나 주희()의 저술보다는 시·서·역·춘추·예의 오경() 속에 담겨 있는 원시 유학의 세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중국 진한() 이전의 문물에 대한 탐구는 문자에도 적용되어 특히 전서()에 독보적 경지를 이루었다. 그러한 사상은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니고 당시의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활로의 개척을 의미하였다.

 

그의 예설은 정치적으로 왕권강화와 벌열 세력 억제를 통하여 왕조 질서를 확립하고 일반 사대부의 기회 균등을 찾으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서인들이 왕실에 대해서 유교적 예를 보편적으로 적용하여 상대적으로 집권 사대부의 권위를 높이려는 움직임에 대립되었다. 또한 막강한 권위를 지닌 북벌론에 대해서도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허구임을 비판하였다. 한편 당시의 국정에 많은 의견을 개진하였으나 호포제()를 반대하고 중세 신분제의 수호에 나타나듯 보수적인 입장에 선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저서에 편집한 문집 《기언()》, 역사서인 《동사()》를 비롯하여 예서()인 《경례유찬()》 《방국왕조례()》 《정체전중설()》, 삼척 읍지인 《척주지()》 등이 있다. 

 

 

 

    승용차 : 서울 - 대전 - 영동 IC에서 10분 - 금계리 도착  

    승용차 : 부산 - 김천 - 추풍령 - 황간IC에서 15분 - 금계리 도착

   네비게이션 검색에는 고백당이 아닌 묘백당으로 잘못 나타남 (참고하시기 바람)

 

 

고백당 항공사진 (붉은색 원)  

 

고백당 위치 : 왼쪽 상단 금계리 황간IC 15분거리 (901번 지방도 이용)

 

 

 

 

 예전(1970년대)에는 집성촌으로 인근 몇개 마을에 30 내지 40가구 정도 살았는데 지금은 젊은 세대가 모두

 객지로 떠나고 연세 많으신 분들만 고향을 지키고 계시다가 이분들이 세상을 떠나시면 가구수가 줄어 들고

 해서 많이 살고 있지는 않아요.

 

 

 

  

 경주이씨 항렬표(行列表)

세(世)
35
36
37
38
39
40
41
42
43
자(字)
○영(榮)
규(圭)○
종(鍾)○
○우(雨)
상(相)○
○형(炯)
○희(熙)
재(在)○
○건(鍵)
○호(鎬)
준(濬)○
제(濟)○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동(東)
심(心)○
병(丙)○
○세(世)
○교(敎)
진(鎭)○
○구(求)
근(根)○
○섭(燮)
준(埈)○
○선(善)
태(泰)○

 

 

54
55
56
57
58
59
60
○모(模)
현(炫)○
○균(均)
용(鎔)○
○순(淳)
병(秉)○
○걸(杰)

 

 

 

 1년 후배 상도 아버님 공적비네요. 조합장을 역임하셨고 우리 아버님하고는 친하신 분이셨어요.

 작고하신지 벌써 10년은 되셨을텐데 아주머니는 건강하신지 궁금합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우(雨)자 항렬의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고 아래 상(相) 자 항렬도 40대, 50대가

 되었습니다.

 

 

 

 

 

 

 

 

 

 

 

 

 

 

 

 

 

 

 

  정면(동쪽) 여닫이 문을 열면 아침해(태양) 정기를 받을 수 있습니다.

 

 

 

 

 

 

 

 

 

 

 

 

 

 

 

 

 

 

 

 

 

 

 

 

 

 

  벽면의 일부가 훼손 되었네요.

  

 

 

 

    

 

 

 경주이씨 본관 연혁

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65년(신라 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 시조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다. 935년(고려 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고 식읍을 주었고, 그를 사심관으로 삼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경주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유수(留守)를 두어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하였다. 1008년(목종 11) 때 낙랑군(樂浪郡)이라 별칭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편하였다.

1202년(신종 5) 경주 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고종 6)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로 개칭한 이후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으로 이전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 독립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면 폐합으로 경주군이 되었고,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했으며, 경주군은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에는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55년에는 경주군과 통합하여 시로 승격하였다.

성씨의 역사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는 이알평(李謁平)으로 신라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었다. 경주이씨 대종보(大宗譜) 상계편에 박혁거세(朴赫居世) 때 아찬(阿粲)에 올랐고, 32년(유리왕 9) 양산촌(楊山村) 이씨(李氏)로 사성(賜姓) 받았다고 한다. 536년(법흥왕 23)에 문선공(文宣公)으로 시호(諡號)를 받았고 656년(무열왕 3)에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대(繼代)를 실전하여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원대손(遠代孫)인, 신라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세계를 적은 것이 연유가 되어 그가 중조(中祖)가 되었다.

우리나라 이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몇몇을 제외하면 거의 경주이씨 이알평의 후손에서 분관한 것이다. 이알평의 후손에서 이개(李開)의 합천이씨(陜川李氏)와 이위(李渭)의 차성이씨(車城李氏)가 갈라졌다. 중조인 이거명의 후손에서는 증손 이윤장(李潤張)의 후손이 평창이씨(平昌李氏)로, 아우인 이윤원(李潤遠)의 후손이 가평이씨(加平李氏)로, 5세손 이주좌(李周佐)의 후손이 아산이씨(牙山李氏)로, 6세손 이우칭(李禹偁)의 후손이 재령이씨(載寧李氏)로, 이양식(李陽植)이 우계이씨(羽溪李氏)로, 17세손 이영행(李永倖)이 진주이씨(晉州李氏)로, 22세손 이반계(李攀桂)의 후손이 원주이씨(原州李氏)로 나뉘었다.

분적종 및 분파

평리공파(評理公派): 16세손 이인정(李仁珽)
이암공파(怡庵公派): 17세손 이관(李琯)
익재공파(益齋公派): 17세손 이제현(李齊賢)
호군공파(護軍公派): 17세손 이지정(李之正)
국당공파(菊堂公派): 17세손 이천(李蒨)
부정공파(副正公派): 17세손 이매(李邁)
상서공파(尙書公派): 17세손 이과(李薖)
사인공파(舍人公派): 17세손 이수(李蓚)
판전공파(判典公派): 15세손 이강(李{康+羽})
월성군파(月城君派): 21세손 이지수(李之秀)
직장공파(直長公派): 19세손 이양오(李養吾)
석탄공파(石灘公派): 19세손 이존오(李存吾)
진사공파(進士公派): 19세손 이양중(李養中)
교감공파(校勘公派): 19세손 이존사(李存斯)

주요 세거지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4백여년 전 세거)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면 성덕리
경상북도 포항시 일원
경상북도 경주시 일원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오룡동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동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면 일원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관하동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고수동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일원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소전리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문곡리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풍계리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원북리
충청남도 서산시 남면 달산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경주이씨는 446,598가구 총 1,424,866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경주이씨 익재공파(益齋公派)청호공(淸湖公)이희(李暿)할아버지의 묘(墓).익재공의 현손. 벼슬은 이조참의,...

이희

 慶尙道觀察使贈吏曹判書淸湖公墓碣銘

 경상도관찰사증이조판서청호공묘갈명

 府君(부군)의 諱(휘)는 희요, 字는 明仲(명중)이요, 호는 淸湖(청호)요, 성은 李氏요, 경주가 本貫(본관)이니, 新羅 佐命功臣(신라 좌명공신) 휘 謁平(알평)은 시조이다.

 高麗(고려)말에 휘 齊賢(제현)이 있으니, 호는 益齋(익재)요 鷄林府院君(계림부원군)으로 시호는 文忠(문충)이니, 公에게 高祖(고조)이다. 당조의 휘는 達尊(달존)이요 호는 雲窩(운와)니, 臨海君(임해군)에 追封(추봉)되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學林(학림)이니,小府尹, 아버지의 휘는 擔(담)이니 密直司代言(밀직사대언)이요, 어머니는 英陽南氏(영양남씨)니 典書 若生(전서 약생)의 따님인데,太宗 甲申(태종 갑신) (1404년)에 公이 出生했다.

 公이 본래學文을 좋아하고 예문을 익히며 誠孝(성효)에 극진했다. 성품이 또 강직하여壹閣(司憲府 弘文館)의 풍토가 있었다. 公이 일찍이 生員(생원),進士(진사) 두 試驗(시험)에 合格(합격)하여 南壹(남일)에 추천되어 吏曹慘議 弘文館 副提學(이조참의 홍문관 부제학)을 지내고, 외직으로 慶尙道 觀察使兼黜陟使(경상도 관찰사 겸출척사)로 安東(안동)에 순찰 왔다가 客館(객관)에서 돌아 가셨으며, 遺命(유명)으로 安東府(안동부)남족 駝駱山 魯林村(타락산 로림촌)뒤 乙坐(을좌)에 장사 지냈으며, 뒤에 吏曹判書(이조판서) 知經筵義禁府事兼 弘文館 大提學 藝文館 大提學(지경연의금부사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에 증직 되었다.

배위는 貞夫人(정부인) 竹山安氏(죽산안씨)니 判書(판서) 貞景公(정경공) 騰의 따님이다.

묘소는 高陽 元堂里(고양 원당리)에 있다. 나머지는 궐한다.

 아 !  府君이 五百年前에 出生하여, 文章과 節行(절행)이 족히 世上에 전할 만한  보물이 있었을 것이나 文獻이 고증이 없으니 子孫의 개탄이 끝이 있겠는가? 銘(명)에 이르기를 益齋(익재)로 할아버지를 삼고 訥軒(눌헌)으로 孫子(손자)를 삼았네, 이어감이 있고 걱정은 없으니,淵源(연원)을 떨어뜨리지 않았네!

臺省(대성)에 出入하면서 곧은 말이 분분하였고, 召車(周나라 召公의 수례라는 뜻)가 남으로 내려감에 백성들이 노래 부르고 읊조리었네,  왕께서 吏曹에게 명하시어 吏曹判書(이조판서)를 증직 하였다.

문장도 능숙하고 搏識(박식)도 있으니, 좋은 벼슬을 역임하여 先祖(선조)를 빛내고 後孫(후손)을 감싸 주었으니, 문호가 밝게 빛이 났네. 저기 花山(화산)을 바라보니 芳草(방초)가 자리같이 깔리었고  땅을 살펴봄이 징험 있으니, 이 이치가 하늘에 관계되었지. 좋은 비석에 새기어 千萬年(천만년)에 드리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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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의 딸, 안등 외손녀 정부인 이씨 묘갈명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 묘갈명(墓碣銘)
 

 


계림 이씨(鷄林李氏)는 고려 제현(齊賢)으로부터 현달하기 시작하였으니, 삼중대광(三重大匡)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이었다. 그의 아들 달존(達尊)은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이었고, 이분이 소부윤(少府尹) 휘 학림(學林)을 낳았다. 소부윤은 승정원 우부대언(承政院右副代言) 휘 담(擔)을 낳았고, 우부대언은 경상도 관찰출척사(慶尙道觀察黜陟使) 휘 희(暿)를 낳았다. 관찰출척사는 모현(某縣)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형조 판서 안등(安騰)의 따님으로, 이분이 부인을 낳아 이공(李公)에게 출가시켰다.
철성 이씨(鐵城李氏)는 고려 존비(尊庇)로부터 현달하기 시작하였으니, 판밀직사사 세자원빈(判密直司事世子元賓)이었다. 그의 아들 우(瑀)는 철성군(鐵城君)이고, 철성군이 문하시중(門下侍中) 휘 아무개를 낳았고, 문하시중은 집현전 제학 휘 강(岡)을 낳았고, 제학은 의정부 우의정 휘 원(原)을 낳았다. 우의정은 모현(某縣) 최씨(崔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군부총랑(軍簿摠郞) 최정지(崔丁智)의 따님으로, 이분이 이공을 낳아 부인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이러고 보면 대대로 명망이 있는 두 큰 집안끼리 서로 혼인한 것이니, 나라에서 망족(望族)을 일컫는 자들은 반드시 이 두 집안을 꼽는다.
부인은 아기 적부터 유순하고 단아(端雅)하였으며 자라서는 예의가 발랐다. 어릴 때 조모 남씨(南氏)의 손에 길러졌는데 조모의 뜻을 받들어 색양(色養)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부친인 관찰사 부군이 기뻐서 “내가 일 때문에 혼정신성(昏定晨省)을 어기면 무릇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바치는 일을 내 딸이 든든히 맡아서 한다.” 하였다. 관찰사 부군이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조모를 더욱 지성껏 봉양하여 조모 남씨가 부인을 좋은 아들처럼 의지하였고, 종족과 향당(鄕黨)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더욱 정숙하고 종들을 부림에 법도가 있었으며, 의방(義方)에 따라 움직여 터럭만 한 어긋남도 없었다. 공이 일찍이 진해(鎭海)와 영산(靈山) 두 고을의 현감으로 간 적이 있었는데, 부인은 늘 “대저 관직에 있으면서 더러운 이름을 얻는 것은 모두 부인(婦人) 때문이었다. 내 어찌 나의 지아비께 누를 끼치리요.” 하고, 이로써 더욱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였다. 그리하여 집안의 말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 밖의 말은 집안으로 들이지 않았으니, 두 고을의 백성들이 공의 청렴하고 공평함에 탄복하고 아울러 부인의 덕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공이 병으로 사직하고 안동(安東)의 별서(別墅)에 살면서 날마다 향리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낙(樂)을 삼고 집안 형편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은 남편의 뜻을 미리 알아서 잘 받들고 힘써 손님상을 잘 차려내어 집안에 자주 양식이 궁핍했어도 공이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늘 마음이 편안하고 부인은 남편의 뜻을 어김이 없었으니, 향리에서 그 덕을 칭찬하였다.
공이 불행히도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남은 자식들을 잘 교육시켜 선대의 유업을 실추하지 않도록 하여, 자손들이 명성과 지위가 현달하였고 이씨(李氏)의 가문이 이로써 더욱 커졌다.
공의 휘는 아무개인데 조정이 공의 차자(次子) 아무개의 작위(爵位)가 이품(二品)이라 하여 공을 이조 참판에 추증하였다. 지금 상국(相國)인 진천(晉川) 강공 혼(姜公渾)이 공의 묘갈명을 썼다. 부인은 과부로 30년을 살다가 정덕(正德) 기사년 2월 모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88세이다. 이해 12월 정해(丁亥)에 남편인 참판공의 묘소 우측 묘좌 경향(卯坐庚向)의 기슭에 안장하였다. 이 고을은 임하현(臨河縣)이고 산은 수다산(水多山)이다.
부인은 4남 2녀를 낳았고, 내외손(內外孫)은 모두 약간 명이니,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상국의 글에 실려 있다. 장남 여(膂)는 경오년의 과거에 장원으로 뽑혀 지금 홍문관 수찬으로 있으니, 사람들이 이로써 이씨(李氏) 집안의 여경(餘慶)이 끝없이 뻗어갈 것임을 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어느 집안이 덕문인고 / 孰爲德門
이씨의 선조로다 / 李氏之先
그 향기를 퍼뜨려서 / 載播厥芬
더욱 드러나서 이어졌어라 / 益顯以延
어찌 그 뿌리가 두터우면서 / 孰厚其根
열매가 많이 맺지 않으리요 / 而實不蕃
이 부인으로 말하자면 / 至于夫人
여덕이 더욱 새로웠나니 / 女德彌新
좋은 배필을 얻으매 / 配得其良
마치 한 쌍의 봉황이 우는 듯 / 鳳凰鏘鏘
혁혁히 높은 벼슬이 / 象笏朱軒
자손들에까지 미치었으니 / 曁子若孫
가도가 융성하매 / 家道之肥
문벌이 이로써 빛났도다 / 門閥以煇
장수하고 강녕하시어 / 壽考康寧
그 영화를 다 누리셨어라 / 以盡其榮
내 글로써 명을 지어 / 我文以銘
이 비석에 새기노니 / 維石之貞
이 글에 부끄러움 없기에 / 不愧于辭
이로써 보여 무너뜨리지 않게 하노라 / 用示無隳

 

[주D-001]색양(色養) : 온화한 얼굴빛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부모의 얼굴빛을 보고 그 뜻을 잘 받드는 것이라고 한다. 자하(子夏)가 효(孝)를 묻자, 공자가 “얼굴빛을 온화하게 가짐이 어렵다.[色難]” 하였다. 《論語 爲政》

 

 

청호공 이희(李暿) 따님 안산김씨 사재정 맹전 배(숙인)

기록 (1776년 족보)  

경주이씨 청호공 이희 사위 김맹전 묘

 

 통훈대부(정3품) 사재감정 김맹전 지묘 (사재정공 휘 맹전 지묘)  * 묘소 : 안산시 선부동 석수골

   * 숙인 경주이씨 묘소 : 광주(廣州) 현천리(玄川里) = 하남시 감북동(위정공 묘소 우측 안장) 

   * 숙인 선산김씨 묘소 사재정공 맹전 합장

 

 아래사진은 숙인 경주이씨 묘 :  경주이씨 청호공대종회 명우 회장님 

 

 숙인 경주이씨 묘소 : 광주(廣州) 현천리(玄川里) = 하남시 감북동(위정공 묘소 우측 안장) 

 

 

 중앙 오른쪽 붉은 원이 숙인 경주이씨 묘 : 연성군 손자 맹전 배(부인)

 

1. 세종 83, 20(1438 무오 / 명 정통(正統) 3) 10 10(신유) 1번째기사

    이희·김유·조욱생 등을 논핵하게 하고 춥고 얼고 한 사람들을 구제하게 하다

임진(臨津) 통제원(通濟院) 서평(西平)에 머물렀다. 이날에 큰 바람이 불고 비와 눈이 오는데 건널목이 좁아서 짐[輜重]을 건너지 못하였고, 인마(人馬)가 섞여 서로 밀고 밟고 하면서 해가 저문데도 아직 다 건너지 못하였다. 장막이 모두 풍우에 찢어지고 날려서 인마가 편히 쉬지 못하였고, 혹은 종자(從者)와 서로 잃고서 서서 날을 새운 자도 있었다. 의금부에 명령하여 사재 판사(司宰判事) 이희(李暿)
와 수참 판관(水站判官) 김유(金攸) · 조욱생(趙旭生) 등을 논핵하게 하였으니, 군사들을 보호하여 건너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땔나무를 많이 쌓아 놓고 불을 놓아 비에 젖어서 춥고 얼고 한 사람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6 83 3 B

 

【영인본】 4 167

 

【분류】 *왕실-행행(行幸) / *과학-천기(天氣) / *사법(司法)

 

2. 세종 90, 22(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 7 20(경신) 2번째기사

   오도리 오랑캐를 위로케 하다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이희(李暿)
에게 교서(敎書) 10[], 선온(宣醞) 60, 청·홍목면(靑紅木綿) 1백 필을 주어, 함길도 에 가서 오도리(吾都里) 오랑개(吾郞介) 를 위로하도록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9 90 14 B

 

【영인본】 4 305

 

【분류】 *외교-() /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3. 세종 90, 22(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 8 6(을해) 3번째기사
   김종서·이희 등이 교서에 골간 종족의 누락 사실을 승정원에 보고하다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이희(李暿)
등이 승정원에 글을 보내기를,

 

“지금 교서(敎書)와 사목(事目)을 보니, 아울러 골간(骨看) 의 종족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골간 이 비록 오도리(吾都里) 와 이웃하지는 아니하였으나, 여러 대로 경흥(慶興) 에 거주하여 그 무리가 매우 많으며, 전후(前後)에 난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지금 잔치를 베풀어 주고 물품을 하사하며, 또 교서를 반사(頒賜)하여 특별한 은덕을 베풀었으나, 오도리 를 위해서 골간 을 들었을 뿐이니, 어찌 그 까닭을 알겠습니까. 저들이 ‘오직 우리만을 박대한다. ’고 하여, 반드시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흔단(釁端)이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오직 오랑개(吾郞介) 에게 반사한 교서 안에 오도리 와 이웃하였다는 등의 말만으로는 골간 에게는 통하지 않을 듯하며, 또 내전(內傳)과 사목(事目)에도 모두 언급하지 않았으니, 신 등이 감히 함부로 시행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9 90 24 B

 

【영인본】 4 310

 

【분류】 *외교-() / *왕실-의식(儀式)

 

4. 세종 90, 22(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 9 10(기유) 2번째기사
    원창명·이사검·박연 등에게 말을 하사하다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원창명(元昌命) ·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이사검(李思儉) ·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박연(朴堧) ·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 이양직(李良直) · 판제용감사(判濟用監事) 권순(權循) · 상호군(上護軍) 안종렴(安從廉) ·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이희(李暿)
에게 말 한 필씩을 하사하였으니, 기도하여서 비가 내렸기 때문이었다.

 

【태백산사고본】 29 90 37 A

 

【영인본】 4 316

 

【분류】 *왕실-사급(賜給)

 

5. 세종 99, 25(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 2 6(임진) 1번째기사
   김익생·이희·우계번·권극화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익생(金益生) 으로써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 이희(李暿)
로 형조 참의(刑曹參議) , 우계번(禹繼蕃) 으로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 , 권극화(權克和) 로 경주 부윤(慶州府尹) 을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32 99 12 B

 

【영인본】 4 460

 

【분류】 *인사-임면(任免)

 

6. 세종 99, 25(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 2 21(정미) 3번째기사

   조극관·조수량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극관(趙克寬) 으로써 공조 참판 을, 조수량(趙遂良) 으로 형조 참의 를, 이희(李暿)
로 공조 참의 , 김조(金銚) 로 우승지 를, 강석덕(姜碩德) 으로 좌부승지 를, 성봉조(成奉祖) 로 우부승지 를, 유의손(柳義孫) 으로 동부승지 를 이사철(李思哲) 로 지중추원사 겸 종학 박사 를, 장아(張莪) 로 우헌납 겸 종학 박사 를, 김윤수(金允壽) 로 경원 절제사 를, 이인화(李仁和) 로 회령 절제사 를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32 99 19 A

 

【영인본】 4 463

 

【분류】 *인사-임면(任免)

 

7. 세종 100, 25(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 6 22(을사) 1번째기사
   성염조와 이희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성염조(成念祖) 를 경창부 윤(慶昌府尹) 으로, 이희(李暿)
를 경상도 관찰사 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32 100 35 A

 

【영인본】 4 485

 

【분류】 *인사-임면(任免)

8. 세종 102, 25(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 11 3(갑인) 4번째기사
   양전을 고치는 일·전품을 나누는 방식을 유시하려 하삼도 관찰사를 부르다

처음에 임금이 양전(量田)을 고치는 일과 전품(田品)을 나누는 방식을 면접하여 유시(諭示)하려 하여, 전라도 도관찰사 이맹진(李孟畛) · 경상도 관찰사 이희(李暿)
· 충청도 관찰사 김조(金銚) 를 역마(驛馬)로 불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왔다.

 

【태백산사고본】 33 102 18 A

 

【영인본】 4 521

 

【분류】 *농업-전제(田制) / *농업-양전(量田)

 

9. 세종 102, 25(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 12 29(기유) 1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이희에게 절물(節物) 외에는 진상하지 말 것을 이르다

경상도 관찰사 이희(李暿)
에게 이르기를,

 

“전자에 하지(下旨)하기를, ‘보름 전 보름 후에 새로 나는 물건 외에는 아울러 진상(進上)하지 말라.’ 하였는데, 지금 연속하여 진상하니 실로 불가하다. 이미 온 물건은 도로 보내는 것이 폐단이 있으니, 모두 예빈시(禮賓寺)에 붙일 것이나, 이제부터는 절물(節物) 외에는 아울러 진상하지 말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3 102 42 A

 

【영인본】 4 533

 

【분류】 *재정-진상(進上)

 

10. 세종 103, 26(1444 갑자 / 명 정통(正統) 9) 2 22(임인) 1번째기사
     최숙손·한전·이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최숙손(崔淑孫) 으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 한전(
) 으로 형조 참의(刑曹參議) , 이희(李暿)
첨지중추원사 , 조변(趙抃) 으로 사헌 지평(司憲持平) , 성봉조(成奉祖) 로 경상도 관찰사 를, 김유양(金有讓) 으로 전라도 안무 처치사(按撫處置使) 를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33 103 23 A

 

【영인본】 4 544

 

【분류】 *인사-임면(任免)

 

 

 

  근래 우리집안과 경주이씨 집안과의 관계

외가쪽으로 가깝다고 만 알고 있었는데 정말 이네요

   경주이씨 증조 할머니 기록(상) 및 산소(하)

 

  

 

   경주이씨 할머니 기록(상) 및 산소(하)

 

 

 

 

    아래는 향사 등 각종행사 사진임    

 

 

    2009  동암공 휘 진, 익재공 휘 제현 향사        

  하늘에서 본 설단 자리 조감

(경기도 용인 백암면 근삼리 /동경 120˚21`북위 37˚08`)

 

   맨 왼쪽 원형 모양안에 16세(世)이신 동암공 할아버지와 그 아드님이신 17세(世) 익재공 할아버지의 비를 설단하여 모셨다.

 

원래 두분은 고려조의 문신이며 학자들이시어서, 두분의봉분이 개성 가까이에 있는 북한 주소로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동에 모셔져있다.

 

남북 분단의 고통은 우리 문중에도 있어, 조상님들의 성묘가 여의치 않으니 비로 설단하여 모시고 매년 5월 5일 향례를 올리고 있는 것임

 

  사진 맨 왼쪽 맨 위 모퉁이에는 18세(世) 휘 달존 운와공 할아버지와 그 분의  큰 아드님이신 19세(世) 휘 덕림어른을 모신 모습이 보이고 있다.

 

 

참례길에 기념사진 (청호공 종중 명우회장님과 일행)

 

 

 

 

 

 

 

 

 

 산신제를 올리고 음복하는 중앙화수회 상억 사무처장 

 

 산신제를 올리고 음복하는 중앙화수회 상억 사무처장과 청호공 종중 진우 감사

 

 

제물 진설중

 

 

 조율시이, 홍동백서의 진설

 

 

 좌포우혜, 어동육서의 진설

 

 동두서미의 진설 

 

 헌관들의 도열

 

 

향사후 헌관과 집사들의 기념 촬영

 

 

 

 

 

경주이씨시조발상지

 

 

 

 

 

시조휘 알평(始祖諱 謁平) : 기원전 117년 한무제 원수6년 갑자에 하늘로부터 진한 땅의 표암봉인 밝바위로 처음 내려오셨고 양산 촌장으로서 부족들을 다스리며 혁거세를 양육시켰고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시는데 6부 촌장의 의장으로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화백회의제도를 시행하셔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를 구현시키신 선구자였음을 호언 할 수 있다.

 

 

 

표암봉밝바위자리를간직한광임대

 

 

 

표암재(瓢巖齋)

 

 

 

 

 

 

 

 

 

 

 

 

 

 

 

향례집사(享禮執事) 분정단자(分定單子)

 

 

 

향사에 참례할 제관들이  표암재 대청 상현당(尙賢堂)에서

향례(享禮 )집사 분정(分定)을 받고 향례를 올리고자

표암재에서 악강묘(嶽降廟)로 이동하고 있다.

 

 

※ ① 악강(嶽降) : 산신(山神)의 기(氣)로 귀인을 땅에 내려 놓음

② 악(嶽 : 큰산 악 - 태산 꼭대기에 자리한 장인봉(丈人峯)

 

 

 

 

악강묘(嶽降廟)

 

 

 

 

 

 

 

 

 

 

 

 

 축문(祝文)소지(燒紙)

 

 

경주이씨 족보

1841년 경주이씨세보(慶州李氏世譜) 

 

 

 

 

 

 

 

 

 

 

 

 

1875년(木活字)에 간행된 경주이씨세보(慶州李氏世譜) 

 

 

 

 

 

 

 

 

 

 

 

 

 1910년간행 경주이씨파보

 

 

 

 

 

 

 

 

 

 

 

 

경주이씨 익재공파 수사랑 족보.hwp

 

 

경주이씨 청호공 따님(김맹전 숙인)

http://blog.daum.net/yescheers/7220160

 

 

 
경주이씨 익재공파 수사랑 족보.hwp
0.11MB
 
백만송이 장미.EXE
0.8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