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 사 방/고구려,백제,신라

문무왕릉 비 상단부를 보며 하늘을 바로 볼 수 없었다.

by 연송 김환수 2009. 9. 5.

이번에 발견된 문무왕릉 비의 상단부를 바라보는 나는 참담함을 느끼며 하늘을 바로 볼 수 없었다. 한국인이라는 것이 이렇게 부끄러울수가.....

 

있을수 없는 일들이 현실에서는 종종 발생하지만 이것은 아니다.

누구를 탓할 필요도 없다.  굳이 경주시민을 원망할 필요도 없다.

우리 모두의 역사의식이 부족한 결과물인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평범한 시민의 눈으로 보아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내가 사학을 공부하였다면 평생 마음 아파하며 살게되었을지도 모를일이다.

 

이것이 발견되고 모 경주시민께서 경주사람인것이 자랑스럽다고 하시던데 과연그럴까 생각해 봅니다.

 

경주 사시는 분들은 생활터전과 논밭에 등산로 등에 좀더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문무왕릉비 원형의 복원 모습



아무리 세상이 어렵고 빨래가 힘들더라도 빨래판으로 사용한 돌에 글자가 보이지 않는가 ?

글을 모른다고 치자, 천년고도 경주에 살면서 글자 형태는 알 것이 아닌가 ?


나는 이곳 빨래터를 사용한 분들이 신라 임금님과 무슨 섭한일이 많아서 방치하고 소중한 기록물인 문화유산을 파괴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단지 부끄럽고 화가나는 것은 우리문화에 대한 관심과 역사의식 너무 없다는 것이지요. 

 

 

빨래돌 표면에 쓰여진 글자가 한자라는 것은 까막눈이라도 알 것인데...

중요해 보이지 않아서 그냥 넘어갔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찌하면 저렇게 무관심하고 무식한 일이 있겠는가 ? 

 

 국립경주박물관의 문무왕릉비 하단석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1796년(정조 20년)에 발견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1961년 문무왕릉비 하단부가 경주시 동부동에서 발견돼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번에 발견된 것은 그 윗부분이다.

"이번에 비석 윗부분이 발견된 장소는 아랫부분이 있던 지점에서 불과 120m 떨어진 곳"이라 더욱 충격적이다.

아무리 힘든 시절이었지만 찾는 노력도 하지 않았을 터 반상회나 회보를 한번만 근처 주민에게 홍보하였다면 결과는 ? 참 할말을 잊었다. 

 

 이 비편들의 탁본이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1793~1853)에게 전해져 그의

'해동금석원'에 비문이 실렸다.

 

 문무왕릉비 판독문

 

문무왕릉비 []

신라 문무왕의 능비


최대 높이 52cm. 너비 64cm. 두께 24cm. 682년(신문왕 2) 건립.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1796년(정조 20) 비석 조각 2개가 처음 발견되었다가 분실되었는데,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에서 그 가운데 1개가 다시 발견되었다.

 

그런데 청나라의 유희해()는 1796년에 발견된 비석 조각의 탁본 네 장을 입수하여 《해동금석원()》에 실었으므로 그 내용이 전해지게 되었다. 글자는 적갈색 화성암()의 앞뒷면에 가로 3.2cm, 세로 3.3cm의 크기로 네모칸[]을 긋고 그 안에 2cm 정도의 크기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국학() 소경(:차관)인 김□□(□□는 마멸되어 안 보이는 글자)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고, 글씨는 대사() 한눌유()가 구양순체의 해서로 썼다.

 

비가 깨어지고 마멸된 부분이 많아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 왕실 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문무왕의 업적, 신라의 백제 평정 사실이, 뒷면에는 문무왕의 죽음과 유언, 문무왕에 대한 찬미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특히 김씨의 시조를 성한왕()이라 하고 문무왕의 15대조라고 함으로써, 당시 신라 왕실 계보와 조상에 대한 인식을 살필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비의 성격을 왕릉에 세운 능비로 보지만,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무덤을 쓰지 않고 화장하여 그 재를 동해에 뿌렸다는 사실과 어긋나는 점이 있다.

 

이 때문에 문무왕과 사천왕사()의 밀접한 관계를 들어 절 안에 능비만 세웠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비문 내용상 죽은 이의 덕을 기리고 있고 명()이 있는 점 등을 들어 묘지()로 보기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신라 문무대왕비 상단부 찾았다. 2009. 9. 3

경주 주택 수돗가서 200여년만에 표면 훼손됐지만 내용 판독은 가능

 

조선시대 때 발견됐다가 다시 사라졌던 신라 제30대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의 한 부분이 200여년 만에 다시 발견됐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지난 2일 경북 경주시 동부동의 한 주택 수돗가에서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신라 문무왕릉비의 윗부분을 확인했다고 3일 밝혔다.

 

이 비석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여성 수도검침원이다. 지난 1일 저녁 이 여성은 야학에서 김윤근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의 수업을 듣고 있었다. 김 부회장이 "최근 포항 중성리에서 '신라 최고(最古) 비석'이 발견됐다"며 "여러분 주변에 중요한 비석이 널려 있을지 모르니 잘 살펴보라"고 했다. 순간, 번쩍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지난번 검침했던 집 수돗가에 박힌 돌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는 곧바로 김 부회장에게 알렸고 김씨의 제보를 받은 국립경주박물관이 현지조사를 했다. 박물관은 "비편(碑片)은 높이 66㎝, 너비 40㎝ 크기로, 앞면에만 200여자의 글자가 확인된다"고 밝혔다.

조선시대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洪良浩·1724~1802)의 《이계집(耳溪集)》은 682년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문무왕릉비의 조각들을 1796년(정조 20년)에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의 탁본은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1793~1853)에게 전해져 그가 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비문 내용이 실렸다.

그러나 비석의 실물은 그 이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가 1961년 아랫부분이 경주시 동부동에서 발견돼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번에 발견된 것은 그 윗부분이다. 오영찬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이번에 비석 윗부분이 발견된 장소는 아랫부분이 있던 지점에서 불과 120m 떨어진 곳"이라며 "애초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비석이 경주 관아로 옮겨졌다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문무왕릉비 윗부분은 표면이 훼손되고 가장자리 등 일부가 심하게 마모됐지만, 비문의 전체 내용을 읽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고 박물관측은 덧붙였다. 박물관은 "《해동금석원》에서 제대로 밝히지 못한 일부 글자도 실제 비석과 비교하면 추가로 판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현재 마당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비석의 뒷면에 새겨진 비문의 상태도 주목된다"고 말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이 비편을 안전하게 박물관으로 옮겨 보존처리를 진행할 계획이다.   

----------------------------------------------------------------------------------------

 

김알지 후손인 신라 문무왕은 비문에 흉노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다

 

「□侯 祭天之胤傳七葉(□후 제천지윤 전칠엽)이라는 기록이 나왔는데 이들은 「侯(투후)」 즉 김일제가 문무왕의 옛 조상이었음을 기록한 증거> 흉노의 휴도왕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휴도왕의 아들 김알제는 한나라에 잡혀간 황태자인데, 한나라 왕실의 말을 키우는 마부로 전락하게 되었다. .흉노의 왕중 가장끝까지 용맹하게 저항한 사람이 휴도왕이다.

 

김알지 조상에 대해 언급하자면, 한나라 의 최대 고민은 북서쪽의 흉노였다. 기마민족인 흉노는 농경민족인 한족의 가을걷이가 끝나면 마치 세금이라도 걷듯이 쳐들어 와서 애써 농사지은 곡물을 빼앗아 갔던 것이다.

 

기원전 14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무제는 흉노 정벌을 결심하는 데, 무제의 외조카이기도 했던 곽거병은 18세의 어린 나이로 이 전쟁에 나 섰던 인물이다. 곽거병은 무릉박물관에 말을 타고 흉노를 짓밟는 석상이 있 을 정도로 흉노 정벌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흉노에 대한 두려움을 씻어준 최초의 인물이기에 무릉박물관을 그의 묘자리에 세운 것이다.

 

 

우리에게 곽거병은 ‘한서’ ‘곽거병전’에 나오는대로 “휴도왕이 하늘 에 제사 지내는 금인(金人)을 몰수(收休屠祭天金人)”하고 휴도왕의 태자 김 일제를 한나라로 끌고온 인물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한나라와 결사항전을 주 장하던 휴도왕은 항복을 꿈꾸던 혼사왕에게 살해당하고, 김일제는 어머니 알 씨(閼氏), 동생 윤(倫)과 함께 한나라로 끌려왔다. 김일제는 흉노의 태자에 서 한나라 왕실의 말을 키우는 마부로 전락하게 되었다.

 

 

 

 

 

방치되다시피 잡초가 우거진 김일제의 묘 입구는 배나무밭이 가로막고 있었다. 울창한 나무들에 가려서 묘비가 보이지 않기에 배나무를 조심스레 제치며 들어가니 ‘전국문물중점보호단위’ ‘무릉배장묘(茂陵陪葬墓 )’란 금색 글자 아래 ‘김일제(金日제) 묘’란 검은색 글자가 선명했다.

 

흉노 임금 휴도왕의 장자이자 김알지의 조상인 김일제가 이 머나먼 이역땅 에 누워 안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머나먼 하서주랑의 언지산 근처에서 체포되어 마부가 되었다가, 무제를 암살에서 구한 공로로 투후( 侯)로 봉해 졌던 굴곡심했던 그의 무덤은 ‘전국문물중점보호단위’라는 금빛 표석이 무색할 정도로 방치되어 있었다.

 

김일제와 신라 김씨의 관계는 조선 정조 20년(1796) 경주에서 밭을 갈 던 한 농부가 문무왕 비문을 발견함으로써 단서가 열렸다. 비문은 발견 당 시 이미 글자의 반수 이상이 마모되어 있었으나 ‘투후지윤( 侯之胤)’, 즉 “문무왕은 투후의 자손이다”라는 귀중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다행히 경 주부윤이던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비문을 탁본함으로써 우리는 오늘날 그 내용의 일부나마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일제와 신라 김씨를 연결시켜 생각한 최초의 인물은 실학자 유득공(柳得 恭)인데, 그는 ‘고예당필기(古藝堂筆記)’ 권6에서 “김일제의 김(金)이 계림 (鷄林)의 김인가”라고 질문하면서도 “전문을 볼 수 없으므로 감히 증거하지 못하겠다”라고 신중을 기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금석문의 대가라는 추 사 김정희는 이 탁본을 베이징까지 가져갔으나 그의 ‘금석과안록(金石過眼 錄)’에는 정작 이 비문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최고의 금석문 학자에게까지 버림받은 문무왕비문은 잡석처럼 굴러다니다 가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에서 그 일부가 동강난 채로 발견되어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일제의 후손들이 한반도 남부까지 흘러들어온 것은 서기 8년 왕망(王 莽:C 45∼AD 23)이 전한(前漢)을 멸하고 신나라를 세운 사건과 관련이 있 다. ‘한서’ ‘김일제전’은 “김당의 어머니는 남인데, 곧 망의 어머니이 다(當母南 卽莽母)”라고 적고 있는데, 김당은 김일제의 차남 건의 손자로서 투후의 지위를 이은 인물이다. ‘한서’의 이 기록에 따르면 김당과 왕망 은 동복형제가 된다. 이 때문에 사학자 문정창(文定昌)은 왕망의 성이 왕씨 가 아니라 김씨라면서 한서의 저자 반고(班固)가 왕망이 흉노 후예라는 사 실을 감추기 위해 그 출자(出自)와 계보를 달리 적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왕망에 대한 ‘한서’의 기록은 일관성이 부족하고 앞뒤 내용도 서로 모순된다.‘한서’에 따르면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김당과 동복형제 도 되고, 당(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 남편으로, 당의 이모 부도 되는 등 의문투성이인 것이다.

 

왕망이 실제 김씨인지 왕씨인지는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지만 왕망의 신제국때 김씨들이 중추권력을 잡고 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러나 왕망의 신제국이 14년만에 후한 광무제 유수(劉秀)에게 멸망하면서 왕 씨는 물론 김씨들도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후한 광무제를 비롯한 유씨들 이 왕망과 그 지지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정치 보복에 나섰기 때문이다.

 

후한과 맞서 싸우던 김씨들은 불리해지자 장안을 떠나 도주할 수밖에 없었 다. 그중 일부가 한반도 남단까지 이동해 경주 김씨와 가락 김씨를 세운다 는 것이 일부 학자들의 견해이다. 왕망 때 사용했던 오수전(五銖錢)과 화천 (貨泉)이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그리고 평양 등 한반도의 서북부와 한반도 남단 김해 및 제주도, 그리고 일본 규슈 일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 하게 출토되는 것은 이런 이주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문무왕 비문에 나오는 성한왕(星漢王)이 누구인지도 주목된다. 金當(김당) 이 이은 김일제의 투후 지위는 당의 아들 金星(김성)이 잇는데, 마지막 투 후였던 星(성)이 바로 성한왕이고, 그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김알지라는 견해가 있다.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는 바로 성한왕, 즉 김일제의 5 세손인 김성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서(漢書)’에 “금인(金人)으로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구절이 등장할 만큼 금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흉노의 관습과 유독 금을 좋아했던 신 라 왕실, 그리고 중국 역사상 유일했던 투후라는 봉호와 문무왕비문의 투후 지윤( 侯之胤)이라는 구절, 그리고 ‘한서’의 김성(金星)과 문무왕비문의 성 한왕(星漢王)은 이 무릉에 배장되어 있는 김일제가 한반도의 김씨들과 떼려 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경주에서 발굴된 천마총 등 이 흉노족의 무덤 양식인 적석목곽분으로, 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주는 중요한 고고학 유물이다.

 

김일제 묘에서 서쪽으로 1Km쯤 떨어진 곳에 산처럼 솟은 무제릉, 고조 선을 멸망시켰던 한 무제는 이래저래 우리 민족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이 머나먼 시안의 한 교외에서 필자는 고조선을 멸망시켰던 한 무제와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일제 사이에서 질긴 인연의 끈을 느꼈다. 불교신자 라면 미생전(未生前)에 맺어진 인연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 

 

신라문무대왕릉비(新羅文武大王陵碑)

 

 

시대

통일신라

연대

681년(신문왕1년) / 682년(신문왕2년)

유형/재질

비문 / 화성암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높이 55cm, 너비 94cm, 두께 28cm

출토지

경상북도 경주시 동부동

소재지

(한국)국립경주박물관-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76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김□□(金□□) / 한눌유(韓訥儒) / 미상


 

 

 

판독문

(앞 면)
國新羅文武王陵之碑   及飱國學少卿臣金▨▨奉 敎撰」
通三▨兵殊▨▨▨匡▨配天統物畵野經積德  匡時濟難應神     靈命」
派鯨津氏映三山之東拒開梧之境南鄰▨桂之  接黃龍駕朱蒙    承白武仰」
問盡善其能名實兩濟德位兼隆地跨八夤勲超三  巍蕩蕩不可得而稱者   我新」
君靈源自敻繼昌基於火官之后峻構方隆由是克  枝載生英異侯祭天之胤傳七葉以」
焉  十五代祖星漢王降質圓穹誕靈仙岳肇臨  以對玉欄始蔭祥林如觀石紐坐金輿而」
大王思術深長風姿英拔量同江海威若雷霆▨地   方卷跡停烽罷候萬里澄氣克勤開」
 簡▨之德內平外成光大之風邇安遠肅▨功盛   於將來疊粹凝貞垂裕於後裔」
 ▨▨舍誨乃聖哲之奇容恩以憮人寬以御物    知其際承德者咸識其隣聲溢閒河」
 ▨▨▨峯而▨幹契半千而誕命居得一以      照惟幾於丹府義符性興洞精鑒」
  恬▨輔質情源湛湛呑納▨於襟▨         握話言成範容止加觀學綜古」
  詩禮之訓姬室拜橋梓之             大唐太宗文武聖皇帝應鴻社」
                            宮車晏駕遏密在辰以」
                         舜海而霑有截懸堯景以燭無垠」
                          著▨▨▨而光九列掌天府以」
                          感通天使息其眚蘋安然利涉」
                          ▨違鄰好頻行首鼠之謀外信」
                          熊津道行軍大總管以 君王」
                           列陣黃山蝟聚張欲申距」
                           至賊都元惡泥首轅門佐吏」
                            三年而已至龍朔元年」
                            所寶惟賢爲善最樂▨仁」
                            朝野懽娛縱以無爲▨」
                             貺更興秦伯之基德」
                             之風北接挹婁蜂▨」
                               詔君王使持節」
                               軍落於天上旌」
                               之謀出如反手巧」


 

(뒷 면)
                              丸山有紀功之將以」
                              直九合一匡東征西」
                             ▨宮前寢時年五十六」
                             牧哥其上狐ꟙ穴其傍」
                             燒葬卽以其月十日火」
                              妣   天皇大帝」
                              王禮也 君王局量」
                             國之方勤恤同於八政」
                            實歸乃百代之賢王寔千」
                            淸徽如士不假三言識駿」
                           而開沼髣髴濠梁延錦石以」
                          之聆嘉聲而霧集爲是朝多」
                          卽入昴忘歸射熊莫返太子雞」
                          丹靑洽於麟閣竹帛毀於芸臺」
                         餘下拜之碣迺爲銘曰」
  侍星精                    域千枝延照三山表色盛德遙傳」
  道德棲梧                  允武允文多才多藝憂入呑蛭尊」
  九伐親命三軍                ▨威恩赫奕茫茫沮穢聿來充役蠢」
  欽風丹甑屢出黃▨鎭空            雄赤烏呈灾黃熊表崇俄隨風燭忽」
 命凝眞貴道賤身欽味釋典葬以積薪        滅粉骨鯨津嗣王允恭因心孝友冈」
鴻名與天長兮地久」
卄五日景辰建碑    大舍臣韓訥儒奉」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1992)]

 

 

 

해석문 

[前面]

<1행> … 국 신라 문무왕릉의 비이다. 급찬(及飱)인 국학소경(國學少卿) 김▨▨(金▨▨)가 교(敎)를 받들어 찬하다.

<2행> … 하늘을 짝하여 사물을 잘 다스리고, 땅의 경계를 구분하며, 덕을 쌓아 …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신에 응하여 …

<3행> … 경진씨(鯨津氏)를 파견하여, 삼산(三山)의 궐(闕)을 비추고, 동으로는 개오(開梧)의 지경을 막고, 남으로는 ▨계(▨桂)의 ▨과 이웃하고, (북으로는) 황룡을 맞아 주몽(朱蒙)을 태우고, … 백무(白武)를 이어 받아 …을 우러르며 …

<4행> … 그 능한 바를 다 잘하여 이름과 실제가 다 이루어지고, 덕과 지위가 겸하여 융성해지니, 땅은 8방(八方) 먼 곳까지 걸쳐 있고, 그 훈공은 삼(한)(三(韓))에 뛰어나, 그 높고 넓음을 다 일컬을 수가 없는 분이 우리 신(라) …

<5행> …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枝)가 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 하였다.

<6행> …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을 개창하여 옥란(玉欄)을 대하니, 비로소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처럼 많아 석뉴(石紐)를 보고 금여(金輿)에 앉아 … 하는 것 같았다. …

<7행> … 대왕은 생각하심이 깊고 멀었으며, 풍채가 뛰어났고, 도량은 하해와 같았으며 위엄은 우뢰와 같았다. … ▨은 바야흐로 자취를 거두고 봉화는 멎고 척후는 파해지니, 만리의 맑은 기운은 부지런히 … 를 열었다. …

<8행> … 간▨(簡▨)의 덕에 내외가 평화로워지고, 광대한 기풍에 원근이 편안하고 깨끗해지니, ▨공(▨功) 성▨(盛▨)은 장래에 … 하고, 쌓이고 뭉친 순수함과 곧음은 후예들에게 넉넉함을 드리워 주었다. …

<9행> … ▨▨사회(▨▨舍誨)는 곧 성철(聖哲)의 뛰어난 모습이라, 은혜로써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너그러움으로써 사물을 다스리니, … 한 자는 그 시기를 알고, 덕을 이어받은 사람은 모두 그 이웃을 알아보니, 그 명성이 한하(閒河)에까지 넘쳤다. …

<10행> … ▨봉(▨峯)을 ▨하여 ▨간(▨幹)하고, 5백년을 기약하여 큰 명을 내려주니, 거하면 모두 … 함을 얻었고, … 비춤은 단부(丹府)에 거의 가까웠다. 의(義)는 성(性)에 부합하여 일어나고, 깊은 정은 … 을 살펴 …

<11행> … 바탕을 돕고, 정(情)의 근원은 맑디맑아, 삼키어 받아들임은 금▨(襟▨)에 ▨하였다. … 하시는 말씀은 규범을 이루고, 용모와 행동은 가히 볼 만하였으며, 학문은 고(금)을 두루 통하였다. …

<12행> … 시(詩)와 예(禮)의 가르침에 … (하고), 주나라는 교재(橋梓)의 ▨에 경의를 표하였다. … 당나라 태종문무성황제(太宗文武聖皇帝)가 사직의 ▨에 응하여 …

<13행> … 임금이 돌아가시고 풍악은 멎었다. 무진 이후에 …

<14행> … 순(舜)임금은 바다와 같이 덕을 내려도 절현(截懸)이 있었고, 요(堯)임금은 해와 같이 밝게 비추어도 은▨(垠▨)이 없었다. …

<15행> … 빛나고, 구렬(九列)은 천부(天府)를 관장하여 …

<16행> … 천사(天使)도 감통(感通)시켜 그 재앙을 그치게 하니, 편안하고 쉽게 건너 …

<17행> … 이웃나라와의 우호를 어기고 자주 이쪽 저쪽으로 붙으려 하면서, 겉으로는 …을 믿는 척하니 …

<18행> … (소정방을) 웅진도행군대총관(熊津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군왕(君王)을 …

<19행> … 황산(黃山)에 군진을 펼치니, 적들이 고슴도치와 올빼미처럼 모여들어 (진군을) 가로막고자 하였다. …

<20행> … 적의 수도(首都)에 이르자 그 우두머리가 군문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고, 그 좌리(佐吏)들도 …

<21행> … 삼년이었다. 용삭(龍朔) 원년(元年)에 이르러 …

<22행> … 보배로 여기는 바는 오직 어진 사람이니, 선(善)을 행함을 가장 즐거워하고, 인(仁)을 ▨함을 …

<23행> … 조야(朝野)가 모두 즐거워하니, 굳이 애써 행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

<24행> … 진백(秦伯)의 터전를 다시 일으켰다. …

<25행> … 교화가 북으로 읍루(挹婁)에까지 접하니, 벌떼처럼 …

<26행> … 군왕에게 조서를 내려, 사지절(使持節) … 으로 봉하였다. …

<27행> … 군(軍)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니, 깃발이 …

<28행> … 꾀는 손을 뒤집는 일처럼 쉽게 나왔는데, 절묘하기가 …

 

[後面]

<1행> … 환산(丸山)에 공(功)을 기(紀)한 장수가 있어 …

<2행> … 곧바로9주를 일광(一匡)하고 동정서벌(東征西伐)하여 …

<3행> … 궁 앞채에서 돌아가시니, 그 때 나이는 56세였다. …

<4행> … 땔나무군이나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 부르고, 여우가 그 옆에 굴을 뚫을 것이니 …

<5행> … 화장(火葬)을 하라 하니, 그달 초열흘에 화장하여 …

<6행> … 천황대제(天皇大帝)께서 …

<7행> … 왕례(王禮)에 맞았다. 군왕(君王)은 국량(局量)이 …

<8행> … 나라를 … 하는 방법에 (부합하였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심은 8정(八政)의 ▨과 같았다. …

<9행> … 돌아가시니, 참으로 백대(百代)의 현왕(賢王)이시요, 실로 천(千)(古의 성스러운 임금이셨다.) …

<10행> … 맑고 아름답기 선비 같으시고, 삼언(三言)을 빌지 않아도 준▨(駿▨)을 알았다. …

<11행> … 못을 여니 호량(濠梁)을 방불하였고, 비단과 돌을 펼쳐 …

<12행> … 손님이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안개처럼 모여 들니, 이를 말하여 아침에 많고 …

<13행> … 묘(昴)에 들어가서는 돌아감을 잊으시고, 웅(熊)을 맞추시고도 돌아가지 않으셨다. 태자 계(雞) …

<14행> … 단청(丹靑)은 기린각(麒麟閣)에 흡족하고, 서책은 운대(芸臺)에서 닳고 헤어졌다.

<15행> … 삼가 절을 드리고, 이만 그치며 명(銘)을 쓴다.

<16행> … 천 갈래의 가지가 되어, 삼산에까지 뻗어 비치네. 아름답고 성한 덕은 멀리 …에 전해져 …

<17행> … 진실로 무용(武勇)하시고 진실로 대덕(大德) 있으시고, 다재다예(多才多藝) 하였네. 아랫사람을 생각하여 거머리마저 삼키시고, …

<18행> … 아홉 번 정벌하고, 친히 삼군을 통솔하시어 … 위엄과 은혜는 혁혁히 빛나, 저 아득히 먼 옥저(沃沮)와 예(濊)까지 찾아와 역(役)을 청하였네. 잠동하던 …

<19행> … 풍교를 흠모하여, 단증(丹甑)이 여러 번 나오고, 황▨(黃▨)이 하늘을 진호하였도다. … 적오(赤烏)가 재앙을 나타내고, 황웅(黃熊)이 우러름을 표시하니, 갑자기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홀연히 …

<20행> … 참됨으로 응집하게 하시고, 도(道)는 귀하게 몸은 천하게 여기셨네.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니 … 경진(鯨津)에 뼈가루를 날리셨네. 대를 이은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여, 마음에서 우러난 효성과 우애가 …

<21행> … 크나큰 이름, 하늘과 더불어 길고 땅과 더불어 오래리 …

<22행> … 25일에 대사(大舍) 신(臣) 한눌유(韓訥儒)가 임금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쓰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1992)]


 문무왕릉비 원형의 복원 모습


  

 

 문무대왕 능비 기단으로 추정되는 사천왕사지 귀부     

 

경주박물관에 있는 사천왕사지 귀부 머리부분                    비석 하단부 (1961년 발견)

 

비석 상단부 (2009. 9. 3 발견)

  

좀 더 관심이 있으신 분은 본 블로그 "문무왕 비문의 비밀" 아래 주소를 클릭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yescheers/8597599

 

===================================================== 

 

재당신라인 대당고김씨부인묘명

 

新羅 王族인 金氏의 祖上을 匈奴 出身인 김일제(BC 134 - BC 86)라고 기록한 在唐 新羅人의 墓地名(墓地에 기록한 글)이 나왔다.


864年 唐에서 사망한 신라 여성의 묘지명인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서 이 같은 내용을 찾았다.


김일제는 흉노 휴도왕의 아들로 西漢(前漢)에 투항한 뒤에 황제의 고문인 侍中에 올랐으며 제후인 투정후가 됐다.


이 묘지명은 또 또 신라 김씨의 始祖가 中國 古代 傳說 속의 帝王인 소호씨 김천(少昊氏 金天)이라고 적었다.


이 묘지명은 1954년 중국 산시성 시안시에서 출토돼 시안시 비림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

재당신라인 대당고김씨부인묘명 ↘ 전문 2009.4.22 >


김태식 기자 =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가 찾아낸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신라 김씨, 그것도 신라에서 당으로 넘어가 그곳에 정착한 지 4대 가량이나 지난 재당 신라인이 여전히 그 가문 뿌리를 흉노에서 찾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자료다.

김씨는 흉노 김일제 후손 (서울=연합뉴스) 신라김씨인들 스스로 그 뿌리를 흉노에서 찾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9세기 재당(在唐) 신라인의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 1954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동쪽 교외 곽가탄(郭家灘)에서 출토된 이 묘지명에서 신라김씨는 소호금천씨에서 비롯되어 한 무제 때 투항한 흉노 왕자 김일제로 혈통이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2009.4.22 << 문화부 기사참조, 권덕영 부산외대 교수 제공 >>

 

 
권 교수가 번역한 이 묘지명 전체는 다음과 같다.

『전 지계양감이자 장사랑이며 시어사와 내봉공인 이구의 부인인 경조 김씨 묘지명과 그 서문.

향공진사 최희고가 비문을 짓고 한림대조 승봉랑이자 수건주장사인 동함이 묘지문과 전액을 쓰다.

태상천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 투정후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에 숨어 살게 되었다.

문선왕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 모습을 했으나 그 도를 역시 행하니,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이시니 황실에서 공부상서에 추증되셨고, 할아버지는 성함이 충의시니 한림대조 검교좌산기상시 소부감 내중상사라는 벼슬을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함이 공량이시니 한림대조 장작감승 충내작판관을 역임하셨다.

조부께서는 문무의 예리함에 여유가 있어 평자를 궁구하여 관상의 규모를 관찰하셨고, 공수자를 궁리하여 신과 같은 기술을 갖추셨다. 이에 기예로 천거받아 금문에 들어가 여섯 조정을 섬겨 봉록과 직위를 갖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삶을 살다 아름답게 마치셨다.


김씨는 흉노 김일제 후손 (서울=연합뉴스) 신라김씨인들 스스로 그 뿌리를 흉노에서 찾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9세기 재당(在唐) 신라인의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의 덮개돌. 1954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동쪽 교외 곽가탄(郭家灘)에서 출토된 이 묘지명에서 신라김씨는 소호금천씨에서 비롯되어 한 무제 때 투항한 흉노 왕자 김일제로 혈통이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2009.4.22 << 문화부 기사참조, 권덕영 부산외대 교수 제공 >>

 

(이구의) 전 부인은 농서 이씨로 대대로 벼슬한 든든한 집안 출신이다. 그리고 부인은 판관의 둘째 따님으로 유순하고 곧은 마음은 날 때부터 스스로 그러한 품성이었고, 여성으로서의 일솜씨와 부녀자의 도리는 옛날 일로부터 스스로 힘써 부지런히 배운 바다.

이씨 집안에 시집감에 이르러 중외 친척들이 모두 현명한 부인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부인에게는 뒤를 이을 자식이 없어 전 부인이 낳은 세 아들을 기르고 훈육하니 친자식보다 더했다. 장차 선행을 쌓아 넉넉한 보답을 받으려고 기약했으나, 어찌 천명을 일일이 헤아려 길고 짧음의 운명을 정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연이어 병을 앓아 무당과 편작 같은 의원도 병을 다스리지 못하다가 함통 5년 5월29일 영표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32세다. 단공은 지난날의 평생을 추모하여 신체를 그대로 보전하여 산을 넘고 강 건너기를 마치 평평한 땅과 작은 개울 건너듯 하며 어렵고 험함을 피하지 않고 굳은 마음으로 영구를 마주 대하며 마침내 대대로 살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맏아들 경현과 둘째 아들 경모, 그리고 다음 아들 경원은 모두 슬퍼하며 몸과 얼굴이 바짝 여위고, 멀리서 영구를 모시고 따르며 한없이 슬피 울부짖었다.

경현 등이 남은 수명을 겨우 부지하며 삼가 예문을 갖추어 함통 5년 12월7일에 영구를 만년현 산천현 상부촌으로 옮겨 대대의 선영 묘역에 안장했다.

부인의 숙부는 한림대조로 앞서 소왕부를 지냈고 친형은 수우청도솔병병조참군이니 연이어 나란히 조정에 벼슬하며 가문의 업을 이었다.

나 최희고는 부인의 형과 오랜 친구 사이로 죽은 이의 지난 일을 슬퍼하는 글을 짓고 명문을 청하므로 이에 다음과 같이 명한다.

하늘과 땅이 인자하지 못하여 도균보다 먼저 돌아가시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소원함도 없고 친함도 없도다. 쌓은 선행 누리지 못하고 대명은 영원하지 않으니, 어찌 그 훌륭함이 오직 뛰어난 성인만이겠는가? 이 짧은 세월을 만나 태산에 노닐고 진령을 건너 다녔도다. 대도는 오로지 만물의 변화를 좇아 함께 할 뿐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