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 사 방/고구려,백제,신라

수촌리! 그곳에서 백제인을 만나다

by 연송 김환수 2009. 12. 13.

문화재사랑]

수촌리! 그곳에서 백제인을 만나다, 공주 수촌리 무덤 유적

 

                                                                      글·사진 이 훈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역사문화연구실장

 

 

 

 

다양한 묘제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산2-1번지 일대에 위치한 사적 제460호 수촌리유적은 원래 공주시에서 2005년까지 농공단지로 조성할 예정부지였다. 사실 지표 및 시굴조사 과정에서도 그곳에 백제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중요한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발굴이 끝나는 마지막에서야 고분 속에 영원히 숨어 있을 것만 같았던 백제인을 만나게 되었다.

 

 

고분군이 위치한 수촌리는 해발 360m의 천태산을 등지고 서쪽 정면으로는 넓은 정안들이 펼쳐져 있는 해발 56m 내외의 완만한 구릉지이다. 수촌리유적에서 확인된 5기의 고분 중 1·2호분 2기는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 3호분은 횡구식 석곽묘橫口式 石槨墓, 그리고 4·5호분은 횡혈식 석실분橫穴式 石室墳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고분 중에서 이렇게 한 장소에 다양한 묘제의 고분이 모여 있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 한 가지 내지는 두 가지 형식의 고분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수촌리고분군은 수량면에서는 적은 편이지만, 좁은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다양한 묘제가 발견됨으로써 역사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1500년을 넘어 온 화려한 유물


개성 넘치는 고분의 형태와 더불어 내부에는 화려했던 백제인의 삶을 조명해볼 수 있는 유물들이 확인되면서 세상 밖으로 제 모습을 드러냈다. 1·2호분은 토광목곽묘로, 지하로 묘광을 파고 그 안에 목곽과 목관을 안치한 방식이다. 먼저 1호분의 목관을 살펴보면 피장자가 착용하고 있던 금동관모金銅冠帽, 금동식리金銅飾履, 금제이식金製耳飾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허리에는 용문龍紋이 은상감銀象嵌 된 환두대도環頭大刀를 차고 있었으며, 발치에는 중국제 청자유개사이호靑瓷有蓋四耳壺 1점이 놓여 있었다. 허리에 금동제 허리띠를 차고 있었던 것을 보면 생전에 이 백제인이 대단히 큰 지위를 누리고 살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2호분은 1호분과 약 4.5m의 거리 내에 위치한다. 2호분의 특징은 1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모·금동식리·환두대도 등의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과, 대신 금제이식과 청색의 구슬·관옥管玉·곡옥曲玉 등 각종 옥으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시신의 머리가 놓여 있던 곳에서는 눈으로 확인하기도 쉽지 않은 작은 호박색 구슬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와 같이 1호분이 금동관모·신발·환두대도 등을 무장한 남성을 상징한다면, 2호분은 화려한 머리장식 구슬과 목걸이가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여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특히 1·2호분은 거리상으로도 대단히 가까울 뿐 아니라 토광목곽묘라는 동일 무덤양식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도 부부묘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바람을 가로지르는 백제인


3호분 석곽묘는 지하로 묘광을 파고 그 안에 할석으로 묘실을 구축한 횡구식 석곽묘이다. 천정석이 이미 완전히 유실된 다음에 조사되었지만, 석실안에는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금동식리, 철제대도鐵製大刀·철모鐵帽·화살촉 등의 철기류, 광구장경호廣口長頸壺·직구호直口壺·단경호短頸壺 등의 다양한 토기류가 발견되었다.  


 

특히 이 무덤에서 눈여겨 볼 점은 지금까지 출토사례가 적었던, 말을 탈 때 사용하는 발걸이의 일종인 호등壺이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유물의 출현은 조사단에게 3호분이 조영되기 전부터 이미 호등을 사용했을 백제인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를 마련하였다.  


백제인의 영원한 사랑


4·5호분은 횡혈식 석실분으로, 지하로 토광을 파고 그 안에 석실을 축조한 방식이다. 4호분은 규모도 크지만 5기 가운데 부장품이 가장 화려했다. 금동제 관모와 신발이 있고, 역시나 허리에는 은장식대도를 차고 있어, 한 지역을 대표하는 수장층이 갖고 있어야 할 필수품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거기다 흑유계수호黑釉鷄首壺를 비롯한 4점의 중국제 자기, 살포와 함께 등자·재갈 등의 마구馬具, 철모,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고분의 크기로 보나 출토유물로 보아 조사된 무덤 중 최고의 지위에 있었던 사람임에 분명하였다.


 

5호분은 4호분보다 약간 경사면 아래쪽에 위치하며, 수촌리 고분들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지녔기에 조사단의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1쌍의 금제이식, 관옥, 그리고 등자와 재갈·철모 등의 철기류, 삼족기三足器를 비롯한 다양한 토기류가 주를 이루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점은 두 고분의 시신 머리가 위치한 부분에서 부러진 관옥이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부러진 두 부분이 서로 합치되는 것으로 보아 관옥을 의도적으로 분절한 후 각각 한 도막씩을 부장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4·5호분의 관계가 서로 부부였거나 그에 상당한 친연관계親緣關係였음을 말해준다. 나아가 1·2호분 역시 친연관계라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수촌리 고분군은 한 가계를 이루는 집안이 여러 세대에 걸쳐 묘를썼던 가족묘일 가능성이 높다.


수촌리 고분이 남긴 것


수촌리 고분군은 토광묘·석곽묘·석실분 등의 다양한 묘제가 일정한 시차를 두고 한 자리에 조성되어 있다. 그동안 백제 고분군으로 알려진 다른 고분군과 비교해 볼 때 특이한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마한사회의 전통묘제인 토광묘의 발견은 마한의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세력추정과 웅진천도의 배경을 밝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수촌리 유적은 백제고분의 변천과정을 파악하는 자료를 제공하는 한편 출토유물을 통해서도 그 사회상을 가늠할 수 있다. 특히 1·4호분에서는 금동관모, 금동식리, 환두대도 등 한결같이 당시 최고의 유물들을 부장하고 있다. 이는 당시 지방 수장층이 지닐 수 있는 최고의 위세품으로, 지역사회 내 피장자의 정치적 위상과 나아가 백제 중앙과 지방과의 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백제사 복원의 근거자료로 활용된다.


발견된 분묘는 몇 기 되지 않지만 그 안에서 출토된 유물은 현재까지 조사된 백제의 그 어느 고분군과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다채롭고 화려하다. 그 중에서도 청자유개사이호·흑유계수호 등의 중국제 자기는 지금까지 확인된 분포 위치를 감안해 볼 때, 중국-백제, 그리고 백제-일본열도로 연결되는 당시의 문물교류 네트워크를 상정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따라서 수촌리고분의 발견은 앞으로 남겨진 백제사 연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입력 : 2009.12.11 10:23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