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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연원(淵源)/안산의 유래, 市史

안산의 일제강점기

by 연송 김환수 2009. 5. 9.

 

 

 

제5절 일제 강점기

 

1. 헌병경찰정치

 

(1) 초기의 무단통치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병합하는 강제 조약을 체결하고 통감부(統監府)를 확장·개조하여 식민지 최고통치기구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설립하였다. 이것은 조선 민중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제국주의 열강의 동조 아래 조선 지배층과의 흥정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책임자로 조선총독(朝鮮總督)을 임명하였는데, 총독은 일본 천황(天皇)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는 절대권력을 갖고 행정·사법·입법 및 군대의 통수권을 장악한 식민지 통치의 최고통치자로 일본의 현역 육·해군 대장 가운데서 임명하였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조선 민중의 반일 저항을 신속히 진압하기 위하여 총독이 임의로 제령(制令)을 먼저 발표하고 뒤에 일본 천황의 재가를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118) 따라서 총독은 전제왕권과 같은 권력을 가지고 총독 자의로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였다. 이어 미숙한 일본 자본주의의 자본 축적 기반을 강권적으로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통치책을 실시하였다.


헌병경찰제를 수립하여 총독부 직속 기관으로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를 두고 헌병이 경찰 업무를 장악하였다. 또한 조선인 헌병보조원과 순사보(巡査補)를 채용하여 조선인을 감시하였다. 헌병경찰은 식민지 통치에 저해되는 요소를 없앨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첩보의 수집, 의병의 토벌, 민사쟁송(民事爭訟)의 처결, 일본어 보급, 농사 개량, 징세(徵稅), 산림·위생 감독 등 민중생활을 제어할 수 있는 여러 권리를 가졌으며, 특히 재판 없이 벌금·태형·구류 등의 처벌을 가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하여 1912년에는 이미 폐지되었던 태형제도를 부활하였다. 또한 친일파 인사들로 하여금 총독부의 자문 역할을 하도록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하였으나 3·1운동 때까지 단 한 번도 소집되지 않았다.


한편 관리는 물론 교원들도 제복에 칼을 차게 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1911년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과 사립학교 규칙을 공포하여 사립학교 경영 일체를 통제하였다. 또한 지방행정체계를 군 단위에서 면 단위로 개편하여 경찰서·행정관서 등을 설치하고 식민지 통치망을 구성하였다.

 

이는 조선 지배의 기초적 작업의 일환으로 말단 기층사회(基層社會)의 전통적 공동체 조직을 분해시켜 조선인의 저항을 막으려는 목적에서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1914년 3월부터 부·군·면의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종래의 안산군(安山郡) 군내면(郡內面)·인화면(仁化面)·초산면(草山面)을 합하여 시흥군(始興郡) 수암면(秀岩面)으로, 마유면(馬遊面)·대월면(大月面)·와리면(瓦里面)을 시흥군 군자면(君子面)으로, 성곶면(聲串面)·북방면(北方面)·월곡면(月谷面)을 수원군(水原郡) 반월면(半月面)으로, 남양군(南陽郡) 대부면(大阜面)을 부천군(富川郡) 대부면으로 개편하였다.119) 각 면별 개편 상황은 표 1-14와 같다.


그리고 이 지방 행정조직에는 한국인을 많이 등용하였는데, 이는 일제가 한국인을 회유하여 보다 효과적인 식민지 지배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물론 한국인 관리 밑에는 반드시 일본인 관리가 배치되어 실질적 지배를 하였다. 이후 우리 민족의 정치적 자유를 말살하기 위하여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신문지법(新聞紙法)·출판법(出版法) 등을 확대·적용하여 각종 단체를 해산하고 어용신문을 발간하였다. 이어 일제의 한국 병합 이전부터 애국계몽운동과 해외독립운동기지 설립을 추진해 오던 신민회(新民會)의 회원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이른바 데라우치(寺內)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이라는 105인사건을 조작하여 수많은 민족지도자들을 체포·구금하였다.


또한 우리의 민풍(民風) 개선 정책으로 풍속을 폐풍악습(弊風惡習)과 미풍양속으로 나누고 효도·상부상조 및 상하 귀천의 구별을 미풍으로 보존할 것과, 충군·애국심의 고취, 시간 절약, 납세의무의 이행 등을 새로운 민풍으로 장려하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총독부의 한국 지배를 한국민이 순종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유생(儒生)들에 대한 정책도 이와 관련하여 그들의 반발 무마를 위해 일본 귀족의 작위(爵位)를 수여하고 천황의 ‘임시은사금(臨時恩賜金)’을 지급하였으며, 1911년에는 성균관(成均館)을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하여 설립하였다. 총독부는 경학원을 중심으로 유생들로 하여금 유교의 ‘인의충효(仁義忠孝)’로써 한국민을 교화하여 일본에 대한 충성심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지배정책이었다.

 

(2) 일본의 경제적 침탈


조선총독부는 합법을 가장한 토지의 강탈 작업으로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을 실시하였다. 토지 소유자가 일정한 기간 내에 소정의 절차를 밟아 소유권을 인정받는 제도였으나 신고 절차가 복잡하고 홍보도 하지 않아 40%의 토지가 총독부 소유로 되었다. 특히 궁장토(宮庄土)·역둔토(驛屯土)와 같은 경우는 소유권 귀속이 불분명한 것이 많아 모두 국유지로 간주되어 분쟁을 유발하였다. 또한 지주에 대한 일방적인 소유 권리만을 인정하고 경작권(耕作權), 도지권(賭地權) 등 여러 권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지주의 토지는 점차 확대되고 고율의 소작료(小作料)를 적용하여 거둔 쌀을 일본에 판매하였다.

표 1-14 안산군의 행정구역 개편 상황120)

1914년 이전의 안산군(安山郡) 지역명
개편된 지역명
안산군
군내면
(郡內面)
수암리(秀岩里), 서정리(西亭里)
장상리(章上里), 동곡리(東谷里)
부곡리(釜谷里), 신리(新里)
양상리(楊上里), 양하리(楊下里)
성포리(聲浦里), 점성리(占星里)
장하리(章下里)
시흥군
수암면
(秀岩面)
수암리
장상리
부곡리
양상리
성포리
장하리
능곡리
화정리
와리
고잔리
월피리
조남리
목감리
물왕리
산현리
하상리
광석리
논곡리
하중리
안산군
인화면
(仁化面)
북곡리(北谷里), 능곡리(陵谷里)
광곡리(廣谷里), 화정리(花井里)
와상리(瓦上里), 와하리(瓦下里)
고잔리(古棧里)
월입피(月入陂)
안산군
초산면
(草山面)
조남리(鳥南里), 제청리(祭廳里)
목감리(木甘里), 율포리(栗浦里)
물왕리(物旺里), 상직리(上職里)
산현리(山峴里), 궤곡리(潰谷里)
중직리(中職里), 하상리(下上里)
광석리(廣石里), 하하리(下下里)
논곡리(論谷里)
하중리(下中里)
안산군
마유면
(馬遊面)
조현리(鳥峴里), 장상리(長上里)
장하리(長下里), 조촌리(鳥村里), 응곡리(鷹谷里)
월동리(月東里), 월서리(月西里)
정왕리(正往里), 조이리(鳥耳里)
죽률리(竹栗里)
구정리(九井里), 산북리(山北里)
시흥군
군자면
(君子面)
장현리
장곡리
월곶리
정왕리
주률리
군자리
거모리
선부리
초지리
원곡리
신길리
성곡리
목내(木內)리
원시리
안산군
대월면(大月面)
거모포(去毛浦), 석곡동(石谷洞)
선부동(仙府洞), 달산리(達山里)
안산군
와리면
(瓦理面)
원당포(元堂浦), 초지동(草芝洞)
모곡리(茅谷里), 원상리(元上里)
선곡(船谷), 신각(新角), 성내(城內), 적길리(赤吉里)
무곡동(茂谷洞), 성두리(城頭里)
이목동(梨木洞), 능산리(陵山里)
원하리(元下里), 시우동(時雨洞)
안산군
월곡면
(月谷面)
사사리(沙士里)
오룡동(五龍洞), 당수리(棠樹里)
상초평(上草坪), 하초평(下草坪)
월암동(月岩洞), 일리동(一里洞), 대대리(大垈里)
입북리(笠北里)
수원군
반월면
(半月面)
사사리
당수리
초평리
월암리
입북리
대야미리
속달리
둔대리
도마교리
건건리
팔곡1리
팔곡2리
일리
이리
사리
본오리
안산군
북방면
(北方面)
대야미(大夜味), 속달(速達) 1리
속달 2리, 속달 3리
둔대동(屯垈洞)
도마교(渡馬橋)
건건리(乾乾里)
팔곡(八谷) 1리
팔곡 2리
안산군
성곶면
(聲串面)
일리(一里)
이리(二里)
삼리(三里), 사리(四里)
본오리(本五里), 분오리(分五里)
남양군
대부면
(大阜面)
산감동(仙甘洞 ; 仙甘島)
풍도일원(豊島一圓)
영전동(營田洞), 하동(下洞) 일부
용곶동(龍串洞), 상동(上洞) 일부
진현동(鎭縣洞), 상동ㆍ하동 일부
부천군
대부면
(大阜面)
선감리
퐁도리
동리(東理)
남리(南里)
북리(北里)


한편 1911년 삼림령(森林令)과 1916년의 임야조사사업을 통하여 전체 삼림 가운데 60% 이상을 국유림(國有林)으로 하였고, 국유림에서는 가축 방목이나 땔감의 채취 등을 금지하였다. 또한 1911년 어업령(漁業令)을 공포하여 한국의 어업권을 부인하고 어장을 일본인 중심으로 재편성하였고, 그 밖에도 1910년에는 회사령(會社令)을 통하여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만 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하여 민족자본의 발달을 억제하였다. 이는 식민지 수탈에 필요한 일본 자본의 진출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영향으로 1910년대 한국인들의 자본은 주로 염직업(染織業)·제지업(製紙業) 등 영세한 공업에 투자되었으며, 그 공장들은 제조공장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15년에는 광업령(鑛業令)을 통하여 한국인의 광산 경영을 억제하고 일본인들의 독점권을 강화하여, 일본인이 전체 광산의 75% 이상을 점유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전면적인 지하자원 조사에 착수하였다. 금융 부문에서도 농공은행(뒤에 조선 식산은행)·금융조합 등을 세워 일본인 상공업자를 지원하였으며,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비용은 식민지에서 조달한다는 명목 아래 지세(地稅)·연초세(煙草稅)·주세령(酒稅令) 등을 신설 또는 개정하여 각종 잡세를 거둬들여 조세를 통한 수탈을 강화하였다.


토지조사사업에 반대하는 실제적 투쟁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농민층은 토지조사사업에 대하여 생존권 수호 차원에서 항쟁하였다. 특히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 소유권을 박탈당한 경우가 늘어나면서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빈발하였고, 또한 농민적 토지 소유로 발전되고 있던 농민의 여러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반대하였다.


농민들은 도처에서 토지조사국이 토지 측량을 위하여 설치한 삼각점이나 표석(標石) 등을 훼손하는 등 기술적으로 작업 진행을 방해하였다. 농민들의 반대 투쟁은 더욱 높은 형태로 나타나 ‘험악한 행동으로 측량원을 협박하는 일이 비일비재였고’ 나아가 폭동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물론 농민들의 항쟁은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생존권을 유지하기 위한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고, 전근대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발생적·지역분산적인 형태를 띤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농민층은 자연스럽게 봉건적인 토지 소유의 재편이라는 측면에서는 지주층에 대한 계급적인 의식을, 그리고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는 일제의 식민 지배 구조 속에서 연유한다는 점에서는 민족의식을 깨닫기 시작하였다.121)


고등법원 검사장이며 총독부 사법부장관도 “토지조사에 대한 반항도 많았다. 큰 사건은 말하자면 폭도의 봉기였으며 이것은 각 도에 상당히 많았다. 이것은 일종의 독립운동이었다.”라고 하여, ‘소요’나 ‘폭도의 봉기’ 형태를 띤 토지조사사업 반대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일제가 부과한 각종 조세 반대 투쟁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시장세(市場稅) 반대 폭동과 지세 징수 반대 투쟁, 또 국유 소작지의 소작료 인하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생존권을 수호하고 일제의 침략적 경제정책에 반대해 나선 농민들은 1910년대 전 시기에 걸쳐 계속적으로 투쟁을 하였다. 특히 농민들은 삼림령에 의한 임야 조사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보았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이용하던 산림·임야가 국유화되면서 농민들의 이른바 입회권(入會權)·공동이용권(共同利用權)이 박탈되자 농민들은 이에 대해 대규모의 항쟁을 벌였다. 이러한 계속된 농민들의 항쟁은 1910년대 말엽에는 투쟁 형태가 고도화하여 폭동적 양상으로 발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농민들이 3·1운동의 주력(主力)으로 활동하게 되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마련되어 갔다.122)


1910년대 우리 나라 농촌 거주 인구 가운데 약 3% 정도는 지주였다. 지주는 1918년에 8만여 호에 달하였고, 이 숫자 안에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토지를 소작인에게 주는 기생지주(寄生地主)와 자신의 토지 일부는 소작인에게 주고 일부는 직접 자영하는 경영지주(經營地主)도 있었다. 1918년의 경우, 기생지주는 전체 지주의 20%였고, 경영지주는 약 80%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경지 총면적 가운데 소작지가 점하는 비율은 약 50% 정도였다.
이와 같이 1910년대에는 농촌 거주 총 호수 가운데 3%를 점하는 지주계급이 전체 경지면적의 약 50%를 소작을 줌으로써 농가 총 호수의 77%에 달하는 농민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지주들 중에는 일본인 지주가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고, 토지 소유 규모가 크면 클수록 일본인의 비율이 정비례하였다. 1918년 현재 10정보 이상의 토지 소유 지주 중 일본인은 7.1%에 불과하지만 100정보 이상의 경우 일본인 지주가 61%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본인 지주들의 조선 진출은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조선이 일제의 독점적 식민지로 전락한 때부터 본격화되었다.


토지조사사업 결과 대다수 농민이 토지를 상실, 소작농·화전민·임금노동자가 되었다.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총독부는 이를 헐값에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에 넘겨 일본인 지주들이 탄생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914년에는 지세령(地稅令)을 공포하여 식민지 지배의 재정을 뒷받침하였다. 또한 1918년 개정된 지세령에서는 결부제(結負制)를 폐지하고 지가(地價)에 따른 지세의 납부로 바꾸어 과세지 한 필지의 지세액인 지가의 1.3%를 1년 세액으로 책정하였다. 물론 일본의 3%보다는 낮은 비율이었는데, 이는 급격한 세액의 증가를 막아 보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겨진 조치였다. 이로써 지세액은 1911년 보다 1.6배나 증가하였다. 지세는 원칙적으로 지주의 부담이었으나 모두 소작농에게 전가되면서 소작료의 인상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안산 지역에서는 3·1운동 이전에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농민의 반대 시위는 보이지 않고 있으나, 뒷날 3·1운동 때 수암면 비석거리 시위의 주동자의 한 사람인 홍순칠(洪淳七)이 “우리가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된다.”고 농민들을 만세 시위에 참가하도록 설득하였다. 이로써 볼 때 농민들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의 중심 과제였던 국유지 창출 과정에서 제일 큰 피해자였으며, 이에 따라 소작농으로 전락한 열악한 처지에 대한 반발이 매우 컸음을 말해 준다.

 

(3) 식민지 교육


일제는 식민체제에 순응하는 국민으로 만들고자 우민화(愚民化) 정책을 폈고, 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음으로써 민족의식의 성장을 막는 것을 기본 정책으로 하여 1911년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을 공포하였다. 이 교육령은 천황에게 충량(忠良)한 신민(臣民)을 양성하며, 일본 국민다운 품성을 함양하고 일본어를 보급하는 데 가장 큰 목표를 두고 있었으며 민도에 맞는 보통교육, 특히 실업교육에 치중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에 안산에서도 1912년 4월에 안산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였다. 1915년에는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민족교육이 이루어지자 사립학교규칙을 제정하여 사립학교의 설립은 물론 교원 채용, 교과 과정, 교과서, 수업 내용 등을 통제하였다. 이에 따라 1908년에 전국적으로 2천여 개였던 사립학교는 1919년에는 700여 개로 줄어들었다. 안산에서도 이민선(李敏善)이 1906년 안산군 와리면에 초지보통학교를 세워 운영하였으며, 3년이 지난 1909년 6월 15일에 제3회 기념 예식을 거행하였는데, ‘학생 수가 90여 명에 달하고 관광(觀光)이 600~700명에 이를 정도’로 상당히 발전하였으나123)

 

우리 나라가 일본에 강점 당한 뒤에는 많은 제재를 받았다. 사립학교 설립이 규제당하자 각 지역에 수많은 서당이 설립되었고 이를 통하여 민족교육이 이루어지자 1918년 서당규칙을 정하여 서당과 강습소, 야학(夜學) 등 민간교육기관도 통제하였다. 1917년 당시 안산 지역을 포함한 시흥군에는 학생수 727명인 1개의 사립학교와 63개의 서당에 2029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교육을 제약하여 식민주의사학을 성립시켰고, 고등교육을 억제하고 실업교육과 기술교육에 치중하였다. 또한 민족소설이나 교과서 등을 불태우고 판매를 금지시켰으며, 「조선반도사」와 같은 책을 펴내어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여 교육하였다.

 

2. 3·1운동

 

(1) 3·1운동 이전의 항일독립운동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맺어지자 전국적으로 의병(義兵)이 일어나고, 1907년에는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 이후 군대마저 해산되자 의병항쟁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경기도 지역에서도 많은 의병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는데, 안산 지역에서는 경기도 서남 해안 지역, 특히 대부도를 중심으로 한 섬 지역에서 지리적인 특수성을 이용하여 이른 바 ‘수적(水賊)’이라 칭하는 의병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 지역이 활동 거점이 된 것은 서울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남부 지방에서 생산된 쌀이 올라오는 길목이기도 하였고, 인천항을 통하여 각종 물자들이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항일투쟁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24)


이 지역에서는 1907년 9월 사강(沙江)에 사는 박선명(朴善明)이 동료 10여 명과 함께 대부도(大阜島)와 화령도(華靈島)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이듬해에는 세력을 더 규합하여 충청도 당진 지역의 도서(島嶼) 지방까지 세력 범위를 넓혔다.125) 이들은 주로 배를 타고 다니면서 일본 상인의 배를 공격하거나 미곡의 일본 유출을 막으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군 수원수비대(水原守備隊)에서는 의병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1908년 3월 중순 대부도와 노흥도(露興島)·풍도(豊島) 등지를 수색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 이후에도 서해안 섬을 중심으로 한 의병활동이 계속되었다. 1908년 후반에는 일본군이 수뢰정(水雷艇)까지 동원하여 의병활동을 탄압하자 1908년 말에 이르러 활동이 거의 소멸되기에 이르렀다.126)


또한 1907년 10월 12일 수원의 일본 수비대 척후대와 의병 20여 명이 안산에서 두 시간여 동안 격전을 벌였고, 이튿날에는 정시촌에서 다시 교전이 있었는데,127) 의병활동에 놀란 군수 이석재(李奭宰)는 소요를 피하여 서울로 피신하기에 이르렀다.128) 또 11월 7일에는 의병 30여 명이 안산군 월입촌(月入村) 무곡리(無谷里)에 들어와 군수의 소재 여부를 탐문한 뒤 관아로 들어가 군수를 결박한 다음 “우리가 지금 인천항으로 가려고 하는데 군비가 모자라니 안산 관내 부호(富戶)의 성명을 대라.”하였고129), 12월 초에는 의병 수십 명이 안산 군내에 들어와 총으로 군수를 위협하고 분파소(分派所)를 부수고 무기를 탈취해 갔다.130) 또한 1909년 4월 하순에는 의병 10여 명이 안산군 인화면 능곡리의 이장집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의병들이 동리 이장집을 공격한 것은 대체적으로 세금 걷는 일을 대신하였던 이장들이 “세금을 정부에 내지 말고 의병에게 내라.”는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131)


의병들이 항일투쟁활동을 하면서 각 지역에서 일제의 앞잡이 단체인 일진회(一進會) 회원들을 처단하자, 일진회는 자위단을 조직하여 파견하기도 하였다. 1907년 11월 중순 안산에도 윤시병(尹始炳)·원세기(元世基)·이원식(李元植) 등 10여 명이 파견되어 순시하고 돌아가기도 하였다.

 

(2) 3·1운동 이전의 농촌


1910년대의 조선에서 농민은 전체 인구의 약 85%로 사회 구성원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일제의 강압적인 무단통치와 봉건적인 수탈, 고율의 소작료, 내외의 부르주아적 계급에 의한 이중삼중의 압박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소작 농가는 약 100만 호로 전체 농가의 38%에 달하였고, 자소작(自小作) 농가는 104만여 호로 약 39%였다. 따라서 소작에 묶여 있는 전체 농가는 우리 나라 총 농가의 77%에 이르렀다.


당시 소작료 형태는 정조(定租)·잡조(雜租)·타조(打租)의 방법이 있었는데, 어느 것이나 수확량의 50~80%를 현물로 바치는 고율의 지대(地代)였다. 소작농들은 고율 현물 소작료 외에도 지세(地稅)와 수세(水稅), 비료대까지 부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여기에 마름[舍音]에 의한 중간 수탈까지 당해야 했다. 또한 농민들이 예로부터 소유해 오던 여러 가지 권리인 도지권(賭地權)·입회권(入會權)·영소작권(永小作權) 등을 상실하였으며, 이로 인해 농민들의 토지 상실과 토지로부터의 이탈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무단적인 식민지 농업정책은 농민들의 농업경영을 악화시키는 중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각종 조세 부담이 농민 경영을 곤란케 하였는데, 당시 농민들에게 부과된 조세는 지세(地稅)·호세(戶稅)·부가세(附加稅)·시장세(市場稅)·연초세(煙草稅)·주세(酒稅) 및 기타 각종 조합비 등이었다. 이 결과 1915년 농가 1호당 조세 부담액이 6.082원이던 것이 1920년에는 13.364원으로 급증하였다.132)


또한 농민들은 자본주의 상품의 농촌 침투로 고통을 받았으며, 농산물과 토지가 상품화되며 자본의 토지 수탈이 진행되어 생활의 압박이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현상은 전국적인 것으로서 안산 지역의 농민들도 거의 비슷한 처지였다. 이와 같이 지주, 일제의 식민통치, 그리고 자본가들로부터 누증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농민은 반일민족독립운동에 대하여 절실한 이해관계를 지닌 계층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각기 그 사회적 처지와 생활 상태에 따라 그 지향하는 바가 서로 틀렸다. 부농층(富農層)의 경우 일부의 토지를 소작 줌으로써 소작료 착취를 겸하거나 고리대 착취를 겸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중농층(中農層)은 자가(自家)의 노동력만으로 농업을 영위하지만, 일제의 농촌 지배와 식민지 지주제의 압박으로 인하여 소생산자로서의 자신의 독립성을 끊임없이 위협받았으므로 식민지적·봉건적 수탈에서 벗어나려고 부단히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농민의 70~80%를 점하고 있던 빈농층은 근근이 생활을 유지했으며, 끊임없이 노동자로 전화(轉化)하거나 유리걸식하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1910년대의 쌀 생산과 수출에 대하여 살펴보면, 쌀의 국내 총생산량 중 외국으로 나가는 분량은 1914년을 분기점으로 하여 급격히 늘어났다. 그 이전에는 대체로 5% 안팎이었던 것이 그 이후에는 매년 10% 이상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외국으로 나가는 미곡 가운데 80% 이상이 일본으로의 수출이었다. 또한 1910년대에는 쌀값의 상승률이 매우 높았는데, 1910년의 미곡가 지수(指數)를 100으로 하였을 때, 1919년의 가격은 464에 달할 정도로 상승하였다. 또한 미곡가는 국내 시장보다는 일본 시장의 상태에 따라 좌우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인 지주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쌀의 수출에 참여토록 이끌었으며, 따라서 1910년대 조선인 지주들은 일본제국주의와 이해를 같이하였다. 즉 조선인 지주들은 쌀 수출 과정을 통하여 일제의 매판적(買辦的) 동조자가 되었다. 또한 지주들은 쌀의 상품화 과정에 자신들이 유리하도록 소작인들에 대한 지배를 더욱 강화하였다. 지주들은 쌀의 상품화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경작지의 확장과 개선, 품종 개량, 밭벼 재배의 개량, 못자리 개량, 피뽑기, 해충 방제, 건조 및 조제 방법의 개량 등 모든 생산 과정에 걸쳐 소작인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1910년대의 조선인 지주들 가운데 일부는 일제의 농촌 지배에 대하여 모순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식민지 지주제가 형성되는 과정 중이었고, 미곡 상품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던 일부 지주들은 적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토지조사사업’과 1914년의 ‘지세령’으로 인해 지세가 부과되는 토지의 면적이 80%나 늘어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지주의 부담이 늘어났고, 도로 및 철도의 부설로 자신들의 토지를 수용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이 시기에 있어서 일부 지주들로 하여금 민족항일운동에 어떠한 형태로든 참가하도록 유도하였다. 그 밖에도 기부금의 납부, 양반의 부역 동원 등에 따른 불만 등이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시켰다.133)

 

(3) 3·1운동


1910년대 후반에 이르러, 대외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레닌이 자국 내 소수민족에 대한 민족자결 원칙을 선언한 소식이 국내에 전해졌다. 그리하여 대내적으로는 일제의 정치·경제·사회적 억압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강화되면서 학생 및 종교단체가 중심이 되어 독립만세시위의 준비가 계속 진행되었고, 고종이 승하(昇遐)하자 독살설이 널리 퍼져 민중들을 분노케 하였다.


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준비한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뒤 일경(日警)에 자수하였다. 이어 파고다 공원에서는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3월 하순부터는 각 지방으로 내려간 학생들과 고종 인산(因山)에 참여했다 귀향한 농민들이 각 지방의 중소 도시와 농촌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후 5월까지 전국적으로 2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하여 1500여 회의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는 학생뿐 아니라 지식인·청년·농민·노동자 및 중소 상인 등이 폭넓게 참여하였다. 학생은 동맹휴학, 노동자는 파업투쟁, 상인은 철시투쟁(撤市鬪爭) 등으로 독립 의지를 표현하였다.


만세시위는 초기에는 평화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점차 폭력적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에 대하여 일제의 잔인한 탄압이 가해졌다. 무차별 총격으로 7500여 명이 사망하고 16,000여 명이 부상하였으며, 47,000여 명이 체포되었다. 특히 안산 지역에서 멀지 않은 제암리(堤岩里)의 경우, 교회당 안에 가두고 집단학살을 자행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1일부터 약 2개월여에 걸쳐 격렬하게 전개된 3·1운동은 민족독립운동사상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운동을 거치면서 민중은 민족독립운동의 주도 세력, 그리고 새로운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자기 위치를 확고히 다져 나가기 시작했다. 3·1운동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이를 계기로 민중의 민족적·계급적 자각이 일어났으며, 민중이 모든 영역에 걸쳐 주동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민중은 근대적 변혁 운동을 성공시킬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민중들의 한계는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과 그 이후의 의병활동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3·1운동은 많은 수의 민중이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적 민족운동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즉 당시 민중은 민주주의 변혁 운동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만큼 역량이 성숙되지 못하였다. 3·1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민중이 주력군(主力軍)의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이 부르주아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이다.134)

 

안산 지역의 경우 당시 행정 구역상 시흥군에 속하였는데, 시흥군에서는 당시 경기도 지역 중 가장 많은 횟수의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안산 지역도 도시로부터 점차 농촌 지역으로 파급되며 3월 하순부터 농민이 그 시위의 주역을 이루었다. 또한 이곳의 시위 주동자들도 어떤 특정한 지도 사상이나 정치결사체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지도된 운동이 아니라, 각 계층의 민중이 스스로의 사상과 투쟁 방법을 통하여 일으킨 만세운동이었다.


1919년 3월 27일 포목 행상을 하던 이영래(李永來)가 일동리(一洞里)의 백기화(白基和)의 집에 들렀다가, 그 집에 모여 짚신을 삼고 있던 이종교(李鍾敎) 등 여러 사람에게 “다른 동네에서는 독립만세를 크게 부르며 기세를 올리고 있는데 당신들은 한가하게 짚신만 삼고 있느냐!”며 이들을 설득해, 동네 주민들과 함께 그날 밤 8시 일동리 서쪽 언덕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135)


수암면(秀岩面)에서는 3월 30일 오전 10시 비석거리[碑立洞]에 18개 이(里)에서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미 전날 읍내의 비석거리로 모이라는 통문을 각 고을의 이장에게 돌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었다. 윤병소(尹秉昭)는 29일 화정리(花井里)에서 이봉구(李鳳九)로부터 비석거리에서 만세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 동네 사람 3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대열에 참여하였으며, 월피리(月陂里)의 유익수(柳益秀)는 수암면 성포리(聲浦里) 주민 30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하여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따라가, 윤병소와 함께 선두에 서서 이들을 지휘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부르며 읍내의 향교와 면사무소·보통학교를 돌면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한편 와리(瓦里)에 사는 홍순칠(洪淳七)은 유익렬(柳益烈)의 하인 임학신(林學信)에게서 비석거리 집회 소식을 듣고 허치선(許致善)의 집에 30여 명이 모이자 이를 인솔하여 참가하였다. 홍순칠은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되니 함께 만세를 불러야 한다.”고 소작농민들을 설득하였다. 또한 윤동욱(尹東旭)은 능곡리(陵谷里)의 농민으로부터 집회 소식을 듣고 참여하였는데, 보통학교 앞에 이르러 만세시위대열을 막는 조선인 순사 임건호(任健鎬)에게 “당신도 조선인이니 만세를 부르라. 관리가 부르면 군중들이 따라갈 것이다.”라고 요구하였으나 순사는 불응하였다.

 

화정리(花井里)의 김병권(金秉權)도 동리 주민 30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수암리(秀岩里)의 이봉문(李奉文)은 자기 마을 앞에서 진행된 만세시위에 솔선하여 참여한 뒤 이날 밤 시위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구장 집에 다른 주민들과 같이 몰려가 항의하기도 하였다. 특히 유익수는 만세시위가 폭력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군중들을 설득하기도 하였으며, 이튿날도 인근 수원군(水原郡) 반월면(半月面)으로 가서 만세시위가 폭력화되지 않도록 주민들을 설득하는 등 비폭력 시위에 노력하였다.136)


3월 31일 대부면(大阜面) 신남리(新南里)에 사는 김윤규(金允圭)·노병상(盧秉相)·홍원표(洪元杓) 등은 영전리(營田里) 사격장에서 만나 만세시위를 거행할 것을 약속하고 이날 밤 11시에 김윤규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이튿날 새벽 주민들과 함께 마을의 권도일(權道一)의 집앞에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137) 그리고 4월 1일 반월면에서는 장터에 600여 명이 집결하여 평화적인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각기 북쪽으로는 군포장(軍浦場)과 남쪽으로는 반월리(半月里)·본오리(本五里)·범실·들묵 쪽으로 시위 행진을 벌이다 경찰과 면장의 간곡한 설득으로 해산하기도 하였다.138)


또한 군자면(君子面) 거모리(去毛里)에서는 4월 4일 면사무소가 있는 거모리에서 원곡리(元谷里)에 사는 강은식(姜殷植)이 수백 명 모인 군중 속으로 들어가 태극기를 휘두르며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같은 날 죽률리(竹栗里)에 사는 김천복(金千福)도 동네 사람들을 설득하여 이장집에 모이게 한 다음, 이들 30여 명을 이끌고 거모리의 면사무소로 향하던 중 총소리가 나자 일부 주민이 흩어졌으나 김천복과 몇몇 사람들은 만세시위에 합세하였다. 선부리(仙俯里)에서도 3월 31일 다수의 군중이 모여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장현리(長峴里)의 서당 생도 권희(權憘)와 장곡리(長谷里)의 농민 장수산(張壽山) 등은 4월 6일 권희의 집에서 ‘비밀통고’라는 제목 아래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 간의 학정에서 벗어나자!”라는 격문을 쓰고 7일 면내의 구(舊)시장 터로 태극기 하나씩을 갖고 모이라는 사발통문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각 동리에서 차례로 회람할 수 있도록 그림으로 표시한 뒤 이를 동리 구장의 조카 이종영(李鍾榮)의 집앞에 놓아두어 많은 사람이 회람하도록 하였다. 또한 장곡리 구장 이덕증(李德增)은 이를 회람한 뒤 월곶리(月串里) 구장에게 전달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위 모의가 일경에 발각되고 주모자들은 체포되었다.139)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행렬은 약화되었다. 이는 서울 지역의 소요에 당황한 일경(日警)이 정보 수집을 철저히 하고 군청과의 연락을 긴밀히 하여 군중이 모이려 하면 항상 경찰과 군대를 급파하여 기선을 제압해 집회를 저지하였기 때문이다. 농촌 지역으로 파급되면서 나타나는 특징은 시위 참여에 동리 이장이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암면 비석거리 시위나 군자면 거모리 시위의 경우에 보이듯 각 동리의 구장(이장)은 30~40명씩의 동리 주민을 직접 인솔하거나 통문을 돌려 주민을 모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당시의 향촌사회가 전통적인 면리제(面里制)의 전통하에 일정한 지식과 소양을 갖춘 이장이 말단 실무를 관장하며 마을의 여론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장들은 동리 유식자나 청년들과 협의하고 시위운동 계획을 동리 주민에게 알리거나 격문을 붙여 주민의 참여를 유도하였다. 따라서 통일적인 지도 핵심이 없이도 각 동네마다 자연발생적으로 시위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140)


시위가 진행될수록 주체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는 농민들의 의식구조를 보면, 수암면 비석거리 시위의 주동자의 한 사람인 홍순칠(洪淳七)은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된다.”라며 농민들을 설득하여 참여시키고 있다. 농민들은 여기에서 보여지듯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의 중심 과제였던 국유지 창출 과정에서 제일 큰 피해자였으며, 이에 따라 소작농으로 전락한 열악한 처지에 대한 반발이 매우 컸음을 말해 준다. 이들은 독립이 이루어지면 토지 분배라고 하는 농민적 이해에 기초한 독립국가 건설을 어렴풋이나마 기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3·1운동도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안산 지역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사람들도 대부분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獄苦)를 치렀다.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원인은 전국민을 조직하고 역량(力量)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도할 조직체가 없었고, 민족대표가 구체적 목표나 전술을 정확히 제시하지 못하여 운동이 유기적으로 지속되지 못하였으며, 민족대표들이 제국주의적 국제질서에 대하여 정확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낙관적으로만 보아 청원주의적(請願主義的) 방식을 택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국민이 참여하여 민족의 저력을 과시하였고, 이를 통하여 전통사회의 전근대적 요소가 일소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여러 갈래로 진행되던 독립운동을 하나로 결집시킨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다는 점에서는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국제사회에 일제의 비인도적 처사를 폭로하였고, 중국을 비롯한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형식적이긴 하지만 일제로 하여금 식민통치 방법을 전환케 하였다.

 

3. 소위 문화정치

 

(1) 문화정치


1919년 3·1운동을 통하여 한민족의 거족적 저항에 부딪힌 일제는 통치 방법의 전환을 모색하였다.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이는 민족 기만 정책으로서, 식민지 지배를 약화하는 듯하였으나 실제로는 더욱 강화시킨 고등술책이었다.
그 한 예로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변경하였으나 조직과 인원이 종전의 3배 가량 대폭적으로 증원되었고 경찰 예산도 대폭적으로 증액되었으며, 감시와 억압이 더욱 심하였다. 1 군(郡) 1경찰서(警察署), 1 면(面) 1 주재소(駐在所) 제도를 확립하였고, 1925년에는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하였다.
또한 교육 문호를 소규모 확장시켰으나 이는 식민지 교육정책을 추진하는 것에 불과하였으며, 1922년 신교육령 이후 식민통치의 하급 실무자를 양성하는 소학교(小學校)와 실업교육기관만을 증설하였다. 따라서 안산에도 1923년 5월에 반월공립보통학교가, 12월에는 군자공립보통학교가 신설되었다. 그리고 한글로 된 신문과 잡지의 발행이 허용되었지만 일제 식민지 지배의 인정과 극심한 언론통제 속에서 발간되었다. 또한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민족 분열 정책을 조장하여 조선민족이 열등하다는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를 강요하였고, 민족개조론 등을 주장하여 민족주의 상층부를 식민지배체제 안으로 끌어들여 민족 분열을 꾀하였다.
이에 안산 지역에도 면 단위로 주재소가 설치되고, 1919년 8월 지방제도의 개정을 통하여 면협의회·부협의회 등을 설치하였다.


(2) 산미증식계획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공업화정책에 따른 식량 부족을 한국 내에서 충족시켜 공업화에 따른 저임금 정책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에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세워 1920년부터 15개년 계획으로 실시하였다.
수리조합(水利組合)의 건설과 수세 징세, 농사 개량을 빌미로 한 비료대, 개량 농구대 등 농민 부담의 증가로 농민이 영세 소작농·화전민으로 전락하였다.

 

고율의 소작료로 인해 소작 쟁의가 빈발했는데, 이는 시간이 갈수록 항일민족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소작농은 5할이 넘는 소작료에다 본래 지주가 부담하는 비료·농기구 구입 비용 및 각종 세금 등 수확량의 70~80%나 되는 부담을 짊어져 삶이 더욱 열악해졌다. 농촌의 환경이 이렇게 열악해지자 1920년대에 고향을 등지고 일본으로 이주한 농민이 130여만 명이나 되었고, 만주 간도 등지로 이주한 사람도 36만여 명에 이르렀다. 안산을 비롯한 시흥 지역에서도 1920년대 후반에 80%에 가까운 고율의 소작료에 견디다 못하여 이농하는 현상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1926년 1월 조선농회령(朝鮮農會令)을 발표하고 각종 단체를 통합·정리하여 지주들의 주도 아래 조선농회(朝鮮農會)의 설립을 보았다. 안산 지역에서도 1926년 3월 25일 시흥군농회(始興郡農會)가 설립되었는데, 이는 농사 개량의 저리 자금 알선, 융자 사무 등을 농회가 장악하여 토지 투자, 지주 경영을 통하여 지주의 토지 집적(集積)을 급속히 진전시켜 소작농의 착취를 극대화하려는 시책이었다.
이에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농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지주들은 토지 개량이나 농사 개량에 자본을 투입하는 것보다 토지를 매입하여 경영하는 것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계획에 소극적이었고 오히려 토지의 겸병(兼倂)만 촉진시켰다.


한편 산미증식계획은 ‘농민의 소득을 증대시켜 생활을 안정시킨다’는 목표와는 달리 일본인 지주와 일부 조선인 친일지주의 이익만을 보장하였기 때문에 많은 조선 농민은 화전민·세궁민(細窮民)·걸인이 되었으며, 탈농화(脫農化) 현상이 가속되어 농촌의 빈민은 도시로 가 토막민(土幕民)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나마의 계획도 일본 내의 농업공황으로 말미암아 1933년에 중단되었다. 결과적으로 증산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수탈 목표량은 수행되어 농민의 생활만 더욱 열악해졌다.


일본 내에 농업공황이 나타나고 농민운동이 본격화되자, 일제는 1931~33년에 궁민구제(窮民救濟) 토목공사를 실시하며 회유하였고, 1932년부터는 농촌의 빈곤은 농민 탓이라고 하여 이른바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른바 자작농지설정사업(自作農地設定事業)은 일제 시책에 호응하는 극소수의 자소작(自小作) 농민에게 장기저리자금을 융자해 평균 6단보의 농지를 마련케 한다는 선전효과만을 노린 것이었다.


또한 1933년 조선소작조정령(朝鮮小作調整令)과 이듬해 조선농지령(朝鮮農地令)을 통하여 소작지 관리자의 중간 수탈을 억제하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으며, 소작 기간을 3년·7년 등으로 규정한 법령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는 소작료의 제한 규정이 없고, 소작쟁의가 발생하는 경우에 부·군·도의 소작위원회의 판결에 의존케 하는 것이었으므로 지주 본위 정책에 불과하였다.


또한 남면북마(南綿北麻)·남면북양(南綿北羊) 정책이라 하여 섬유공업의 원료를 확보하려는 일종의 자급자족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이 역시 식민지 조선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의 전작(田作) 생산 형태를 단순화하고 획일적인 재배 계획을 확대하여 조선 농민의 일본 방적 자본에로의 예속을 가속화하는 조치에 불과하였다.

 

(3) 사회운동


1) 농민운동


농민운동 측면에서 불 때 경기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라고 볼 수 있었다. 경기 지역에서는 1930년 3월 수원군과 진위군(振威郡)을 중심으로 조직된 수진농민조합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만한 조직이 거의 없을 정도로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그 이유는 “지리상으로 산악이 많고 경지 면적이 적으며, 자본주의 발달 정도가 심히 저미(抵微)한 점 등으로 농민생활에 아직 봉건적 인습이 만일하고 전체가 모두 보수적이며 온미적”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었다.141)


경기 지방은 합법적 농민조합운동과 마찬가지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도 부진하였다. 1930년대에 전개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도별 분포 비율을 보면 함남 81%, 함북 46%, 경북 44%, 전남 41%, 전북 36%, 경남 32%, 강원 29%, 충남 14%, 경기 10%, 충북 10% 등이었다. 이로써 다른 지역에 비해 경기도의 운동이 부진했음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2) 노동운동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조선의 풍부한 원료와 값싼 노동력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1920년에는 회사령(會社令)을 철폐하였다. 이는 일본의 자본주의가 급속히 성장하는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어 전쟁 중의 과대한 생산시설 확대로 인한 과잉생산 공황이 일어나고 있었고 이로 인한 유휴자본의 출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는 일본의 독점자본이 자유롭게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모든 제한을 철폐하고 조선과 일본 사이에 관세도 철폐하였다.


1910년대 말부터 20년대까지는 주로 제사(製絲)·면방직·식료품 등 경공업 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조선인 자본은 주로 양조업·정미업·요업·직물업 등 전통적 부분과 고무신 공업, 양말 공업, 생선 기름 제조업 등에 진출하였으나 일본 독점자본에 밀렸다.


노동운동의 경우도 안산 지역은 당시 공장지대가 아니었던 까닭에 노동자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고, 서해 연안을 중심으로 발달한 염전의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다. 이들도 일제의 착취에 항거하는 운동을 때때로 전개하였는데, 1935년 5월 4일 군자면의 군자염전에서 채염(採鹽) 운반 인부 40여 명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전개한 것이 대표적 예였다.142)

 

3) 청년·소년 계몽운동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정치의 실시로 한글 신문과 잡지의 보급이 이루어지면서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사회단체가 생겨났다. 그 중 두드러진 것이 청년단체였다. 1922년에 청년단체는 종교단체를 포함하여 760여 개에 이르렀는데, 1920년대에 경기도 지역에서 조직된 단체만도 200여 개나 되었다. 당시 시흥군 지역에도 많은 청년회가 조직되었는데, 안산 지역에 조직된 청년회의 기록은 뚜렷하게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주요 활동에 속하는 야학활동에 관한 기록은 보인다.


1926년 8월 수암면 수암리의 엄이섭(嚴履燮)과 정상시(鄭常時)가 동네 유지인 성희경(成喜敬)과 안산공립보통학교 교장 임호장(林虎藏)의 협조로 안산청년야학을 개설하였다. 무산아동(無産兒童) 30여 명을 모집하여 아무 보수 없이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교실은 보통학교 교실을 빌렸고, 선생은 주로 이 학교 교사들이었다.143)


또한 같은 시기에 군자면 죽률리에서는 동네의 여러 유지들이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한 노동야학을 설치하여, 나이가 학령기를 넘었거나 무산자들을 농한기인 가을에서 봄까지 교육하였다. 처음에는 동리의 교회당을 이용하였으나 학생 수가 늘어나자, 1927년 9월 문창영(文昌永)의 집에서 동네 유지들이 모임을 갖고 의연금을 모아 새로운 교사(校舍)를 마련하기로 하였다. 안희택(安熙澤)이 대지 150평을 기부하고, 문창영·천형식(千亨植)·안희신(安熙臣)·김성현(金成賢)·박교문(朴敎文)·김규흥(金奎興)·민병목(閔丙穆)·김덕현(金德賢) 등 80여 명의 유지들이 의연금을 내어 1928년 6월 10일 초가 13칸의 교사를 준공하였다.144)


그러나 이 해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학교 문을 닫게 될 지경에 이르자, 1929년 1월 유지들을 중심으로 야학운영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금주단연(禁酒斷煙) 운동을 벌이고 군자면민들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벌여, 금주단연과 야학 운영이라는 이중의 효과를 얻기도 하였다.


또한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장차 이 나라의 기둥이 될 소년들에게 민족 의식과 독립 의지를 불어넣어 주자는 소년 운동이 널리 보급되었다. 이에 안산에서도 1927년 6월 이전에 능곡(陵谷) 소년회가 조직되어 있었고,145) 12월에는 군자면 죽률리(竹栗里)에서 유지 김규영 등의 주선으로 죽률리 소년회가 창설되었다.146) 이들은 지역을 중심으로 토론회를 벌이고 야학을 운영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30년대부터는 농촌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언론기관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브나로드운동’과 ‘문자보급운동’이 전개되었고, 조선어학회의 주관으로 조선어 강습회가 열렸다. 이 운동을 담당한 계층은 주로 학생들로서 방학을 이용한 귀농운동(歸農運動)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32년 8월 하순에는 군자면, 이듬해 8월 하순에는 수암면, 1934년에는 군자면 거모리에서 학생들의 계몽운동 활동이 있었음이 기록으로 보이고 있다.


한편 세계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는 YWCA에서는 1931년 최용신(崔容信)을 안산의 샘골에 파견하여 농촌야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지역의 유지들과 YWCA의 지원으로 건물을 신축하고 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지원금의 부족으로 고난을 겪다가 최용신의 사망으로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심훈은 소설 「상록수」로 소개하였는데, 천곡교회와 ‘상록수’라는 이름은 오늘날까지 안산에 남아 있다.

 

4. 병참기지화 정책과 민족 말살 정책

 

(1) 병참기지화 정책


1930년 일제는 명목뿐인 자문기구들을 설치하고 지방자치제를 도입하였다. 친일파 및 민족개량주의자들을 참정권을 준다는 구실로 끌어들여 식민지 지배에 이용하였다. 이들은 지방자치제에 참여하면서 일제가 부여하는 특권을 누리며 점차 친일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일제는 1929년에 시작된 세계공황과 농업공황으로 경제가 파탄에 이르자 팽창정책과 식민정책 강화를 통하여 그 돌파구를 찾으려 하였다. 일본 자본의 지배력과 병참기지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조선의 독립 의지를 말살하여 일본의 침략전쟁에 충량한 신민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 기본 목표였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는 일본의 독점자본을 만족시키고 민중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한 방편으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일제는 1931년 만주 침략을 개시하면서 조선을 침략전쟁의 전진기지로 삼고 독점자본의 안정적 수탈을 보장하고자 파쇼적 지배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주둔군을 2개 사단에서 5개 사단으로 늘려 반항에 대한 무력 탄압을 강화시킨 다음, 민족 말살 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1932년부터 ‘자력갱생(自力更生)’이란 미명하에 농어촌진흥운동을 개시하였고, 북한 지역을 중심으로 군수공업시설을 갖추어 한국을 병참기지화하여 군수공업체제로 전환하여 갔다.


또한 1938년에는 지원병제도를 도입하였고, 1943년에는 학도지원병제도, 1944년에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청년 인력을 수탈하였다. 물론 초기에는 모집 형식을 띤 노무동원계획을 실시하였으나 성과가 없자 징용·보국대·근로동원·정신대 등을 통하여 노동력을 강제로 수탈하였다. 그리고 1938년에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고, 1939년에는 국민징용령을 제정하여 청장년을 강제로 연행해 가는 등 광복 때까지 146만여 명의 인력을 수탈하였다. 특히 1944년에는 여자정신대 근무령을 세워 수십만 명의 여성을 군수공장과 군대위안부로 동원하였다.


한편 1940년에는 신조선 미곡증식계획을 실시하여 전국 각 도와 부락 및 개인에게까지 생산 목표를 할당하였다. 이어 임시미곡배급규칙·미곡관리규칙을 실시하였고, 조선식량영단(朝鮮食糧營團)을 설치하여 미곡공출제를 실시하였다.

 

(2) 선감학원


일본은 1923년 감화령(感化令)을 발표하고 감화원(感化院)으로 함경남도 영흥에 조선총독부 직속의 영흥학교(永興學校)를 설치하여 이듬해 10월 1일에 개교를 하였다.147) 이 학교의 설립 목적은 ‘8세에서 18세의 소년으로 불량행위를 하거나, 불량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자’를 감화시킨다는 것이었다. 물론 불량행위에는 가벼운 절도행위도 포함되어 있지만, 일본의 입장에서의 불량행위란 독립운동도 포함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일반 학교와 마찬가지로 교과수업을 함과 동시에, 식민지지배정책에 순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교육을 하였다.


이후 일제의 수탈로 몰락하는 농민이 점차 늘어나고 이들이 도시의 빈민·토막민으로 전락하면서 일제에 대한 항쟁이 더욱 거세어졌으며, 거리에서 유리걸식하는 아이들의 숫자가 점차 늘어만 갔다. 이에 일제는 1938년 10월에 전라도 목포의 고하도(古下島)에도 목포학원(木浦學園)이라는 감화원을 추가로 설치하였으며, 1942년 감화령을 보다 강화시킨 조선소년령(朝鮮少年令)을 발표하면서 안산의 선감도에도 선감학원(仙甘學園)이라는 감화원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이미 1923년 5월 개성에, 1936년 7월에는 인천에 소년범들만을 수용하는 소년형무소를 특별히 설치하였다. 그런데 감화원의 수용 대상자는 ‘불량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육지와 격리된 외딴 섬에 수용하여 중범자 취급을 하였다. 이러한 행태 자체는 이미 본래의 설치 목적과는 다른 뜻을 지닌 것이며, 일제의 고등술책이 담겨져 있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었다.


1942년 조선총독부는 선감도에 원래 거주하던 주민들의 대부분인 400여 명을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선감학원 운영에 보조할 인원으로 16가구의 70여 명만을 남겨 놓았다. 물론 강제로 퇴거당한 주민은 약간의 보상비만 지급받았을 뿐이었다. 1943년 6월, 131명의 소년이 처음 여기에 수용되었는데, 그 중에는 상해사건으로 징역형을 받았던 23세의 조소국(趙小國)이라는 청년도 끼어 있었다.148)


이때에는 이미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해 가는 시기로서, 감화의 단계를 벗어나 군사를 양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1942년 7월 ‘조선총독부 소년계 판검사회의 서류철’에 의하면, 선감학원 등 감화원의 목적은 “사회 반역아 등을 보호·육성하여 대동아전쟁의 전사로 일사순국(一死殉國)할 인적 자원을 늘리자.”149)는 취지로 변모되어 있었다.

 

 이들은 황국 신민화 교육은 물론 군사 교련까지 받고 있었으며, 장차 소년병으로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내보낼 계획이었다. 이들의 수용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고, 외부와의 접촉이 불가능한 섬 지역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많은 인권유린 사태가 일어났다. 자급자족이라는 미명하에 어린 소년들에게 무제한적인 노동을 강요하였으며, 육지로의 탈출을 막기 위하여 갖가지 비열한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1943년 당시 초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 교장인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서 2년 여 동안 생활하였던 이시하라(井原宏光) 씨는 최근의 회고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당시 섬에서 육지는 눈으로 보기에 불과 300여 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소년들이 탈출을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워낙 물살이 빨라 대부분이 익사하거나, 육지에 닿았다 하더라도 곧 잡혀 왔습니다. 물론 잡혀 와서는 지하실에 감금되어 잔혹한 체벌을 받았습니다. 학원에서는 탈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아이들 가슴에 선감도의 ‘仙’자를 쓴 작업복을 입히고, 저녁에는 교관들이 이를 모두 벗게 하여 인원 파악을 하고, 탈출을 못하도록 모두 벌거벗긴 채로 재웠습니다.”150)


결국 소년들을 감화시킨다는 목적에서 출발한 선감학원은 실제적으로는 어린 소년들의 조선독립 의지를 말살시키고, 나아가 전쟁의 소모품으로 이용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소년들은 이러한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탈출을 기도하다가 죽거나, 구타로 인하여 또 영양실조로 수없이 죽어 갔다. 또한 굶주림을 참다 못하여 초근목피를 씹다가 독버섯류를 잘못 먹어 죽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이처럼 어린 소년들은 무참히 희생되었고, 이들의 주검은 그대로 섬의 한 구석에 방치되듯 매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감학원은 광복 다음해인 1946년 2월 1일 경기도로 이관되었으며, 1954년 새 건물을 짓고 부랑아(浮浪兒)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이용하였으나, 1970년대 말 문을 닫았다.151)

 

(3) 민족말살정책


일제는 해외 독립운동과의 연결을 차단하기 위하여 국경경비를 강화하고 군사력과 경찰력을 증강하는 한편, 사상의 통제를 위하여 1936년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내려 7개소에 보호관찰소를 설치하고, 이듬해 조선중앙정보 위원회를 설치하여 지식인에 대한 개인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1938년에는 사상 전향자들의 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戰線思想報國聯盟)을 세우고, 1941년에는 비전향자들의 격리 수용을 위하여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朝鮮思想犯豫防拘禁令)을 공포하였다.


또한 국민의 생활 통제를 위하여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을 도·부·군·읍·면·리·동의 지방연맹과 각 직장연맹으로 조직하였으며 10호 단위로 애국반을 조직하고 정기반상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천황 배례, 신사참배,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일어 사용 등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황민화 교육을 위해 국체명징(國體明徵)·내선일체(內鮮一體)·인고단련(忍苦鍛鍊)의 3대강령을 내걸고 교육을 통제하였으며, 1938년 조선교육령을 개정하고 획일적 교육을 통하여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꾀하였다. 또한 소위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추진하여 1937년부터 한국인의 성명을 말살하고자 일본식 이름을 짓도록 강요하였고, 1939년에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하여 ‘창씨개명’을 본격적으로 강행하였다.


그리고 민족 분할 통치 정책을 강화하여 비합법적 운동을 철저히 통제하고 민족개량주의 단체의 활동은 허용하였다. 또 지방자치제의 실시, 「매일신보」의 민간 이양, 궁민 구제의 토목사업 시행 등을 통하여 항일운동의 열기를 약화시키려 하였다. 정신적인 정책으로는 식민사관을 통하여 정체성론(停滯性論)·타율성론(他律性論)·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등에 기초한 「조선사(朝鮮史)」가 집필되고 교육되었으며, 국어·국사 교육을 금지시켜 1942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회원을 체포·구금하여 우리말을 말살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나마 통제 속에서 한글로 간행되던 신문과 잡지마저도 폐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 제국주의의 파쇼적인 정책에 대항하는 우리 민중의 저항은 더욱 높아만 갔다. 임시정부는 김구의 지도 아래 의열활동(義烈活動)을 벌이면서 1940년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하였으며, 만주를 비롯하여 화북지방(華北地方)에서도 군사력을 갖춘 독립운동 세력이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물론 이들의 대일 항전이 직접적으로 일제를 패망시키지는 못했지만, 일제 강점하에 민족 해방을 목표로 끝까지 무력으로 대항하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한편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은 서로 이념은 달랐지만 그들이 광복 이후에 세우려 하였던 국가의 체제는 비슷하게 나타났다. 정치 면에서는 민주공화체제를, 사회·경제 면에서는 모든 국민의 평등을 보장하는 사회주의체제를 구상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두 계열은 공통적 요소를 합치시키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일정한 준비 없이 해방을 맞게 되었다. 여운형(呂運亨)의 경우 극히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건국동맹(建國同盟)을 조직하여 해방에 대한 준비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지만, 각각의 독립운동 세력들은 기존의 입장과 조직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해방을 맞게 되었다.

정진각(편찬위원)

 

  

[다시 보는 韓國人] 일제강점기 ‘자전차 대왕’ 엄복동

기사입력 2009-04-14 09:51

 

 

1923년 전조선자전차대회에서 우승한 엄복동 선수의 모습.
고물 자전거로 첫 출전부터 우승! 우승!

일제 울린 조선 최고 스포츠 스타

‘하늘엔 안창남, 땅엔 엄복동’ 노래 불리며 민족 희망으로

일본, 최고선수 긴급공수 자존심 대결… 경기 무효 소동도


1920년 5월 2일 서울 경복궁. 일제(日帝)는 조선 임금이 살던 왕궁에서 대중을 상대로 하는 ‘경성시민대운동회’를 개최했다. 조선의 정신을 꺾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일제의 계획은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바로 엄복동(嚴福童·1892~1951) 때문이었다.

“뭐야, 엄복동? 대체 엄복동이가 뭐하는 자이기에 조선인들이 이 난리인가.”

일제는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 체결 이후 우민정책(愚民政策)을 실시하며, 조선의 문화를 말살하고 민족의식의 성장을 억누르는 데 총력을 기울여 왔던 터였다. 하지만 조선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반도 전역에서 의병(義兵)활동이 끊이지 않았고 애국계몽운동이 봇물처럼 번져갔다. 여기에 1919년 3·1운동이 펼쳐지자 일제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거기에 엄복동이 있었다.

“그게. 저…, 자전거 선수입니다. 변변한 자전거 하나 없어서, 항상 낡아빠진 중고 자전거를 타고 나오는 선수인데…. 그게 희한하게도 대회에 나오기만 하면 매번 일본 선수들을 제치고 일등을 하는 바람에 조선인들이 영웅으로 떠받드는 선수입니다.”

“뭐야? 그러면 대책을 세워야 할 것 아닌가. 빨리 대책을 세우시오, 대책을.” 일제는 조급했다. 조바심을 내며 경성시민대운동회를 준비하던 일제는 엄복동을 꺾고, 그것을 통해 조선의 정신을 꺾기 위한 흉계를 마련했다.

대회는 1920년 5월 2일 열렸다. 날씨는 화창했다. 출전 선수는 8명. 일본은 엄복동을 꺾기 위해 ‘당대 최고수’로 꼽혔던 모리 다카히로 선수를 일본 열도에서 긴급 공수했다.

엄복동은 쟁쟁한 일본 선수들 틈에 끼어 스타트를 끊어야 했다. 하지만 외롭진 않았다. 영국 라지(Large)사가 동양 지역 판촉을 위해 보내준 2대의 자전거 중 한 대가 그와 함께 달리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로 된 림에 고정식 기어가 달려있고 브레이크는 장착돼 있지 않은 이 경주용 자전거는 훗날 창원경륜공단 자전거문화센터 개장 기념으로 2008년 9월 5일 열린 ‘바이크 쇼’에 전시돼 1억원을 호가하는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조선의 자존심이 걸린 이날 대회는 운동장을 40번 도는 이른바 ‘사십회 자전거 경주’. 8명의 주자는 신호와 함께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윤곽은 경기 중반에 이르면서 확실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엄복동이 안장 위로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면서 쏜살같이 앞으로 치고 나간 것이다. “올라간다!” 관중들은 환호했다. ‘엄복동이 엉덩이를 들었다’는 말은 당시의 유행어로, 이는 곧 조선이 일본을 제치고 앞으로 나감을 의미했다. 그가 엉덩이를 들면 관중들은 “올라간다”고 소리지르며 응원했다. 과연 엄복동의 엉덩이는 조선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바람처럼 앞을 가르고 치고 나간 엄복동은 2위로 달리던 일본 선수를 무려 5바퀴 차로 앞서며 완벽하게 따돌렸다. 운동회장은 ‘흥분의 도가니’로 돌변했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3일자(3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여덜사람이 용긔를 다하야 주위를 돌새, 다른 선수들은 불행히 중도에서 다 너머 뒤로 떨어지고, 오즉 선수 엄복동(嚴福童)군과 다른 일본 선수 한 사람만 그나마 승부를 질하게 되엿난대, 그것도 엄복동군은 삼십여회를 돌고, 다른 일본 사람이 엄군보다 댓회를 뒤떠러져, 명예의 일등은 의심업시 엄군의 엇개에 떠러지게 되엿는대….’

“엄복동, 엄복동!” 관중들은 경복궁이 떠나갈 듯 ‘엄복동’을 외쳤다. 그런데 갑자기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심판석에서 느닷없이 ‘경기 중지’를 선언한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진 관중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었던 엄복동이 분을 이기지 못했다. 흥분한 엄복동은 단상 위로 뛰어올라가 우승기를 잡아 뽑아서는 그대로 부러뜨려 버렸다. 당시 상황에 대해 동아일보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엇지된 일인지 심판석에서는 벼알간 중지를 명령함에 엄군은 분함을 이의지 못하야 “이것은 꼭 협잡으로 나를 일등을 안이 주려고 하난 교활한 수단이라!” 부르지즈며 우승긔 잇는 곳으로 달려드려 “이까진 우승긔를 두엇다 무엇하느냐”고 우승긔대를 잡아꺾으매….’

엄복동은 단번에 우승기를 꺾어 부러뜨렸다. 그러자 일본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일시에 몰려들어 엄복동을 마구 두드려팼다. 엄복동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이번엔 조선인들이 가만 있지 않았다. “엄복동이 일본인들에게 매를 맞는다”며 일제히 가세해 경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신문은 패싸움이 벌어진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엽헤 잇든 일본 사람들이 일시예 몰녀들어 엄군을 구타하야 엄군은 마참내 목에 상처를 내고 피까지 흘니게 되매, 일반 군중들은 소리를 치며 엄복동이가 마저 죽는다고 운동장 안으로 물결가치 달녀드러 욕하는 자, 돌 던지는 자, 꾸짓는 자 등 분개한 행동은 자못 위험한 지경에 이르럿스나, 다행히 경관의 진력으로 군중은 헤치고, 회는 마침내 중지가 되고 마럿는대, 자세한 뎐말은 추후 보도하겟스나 우선 이것만 보도하노라.’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 엄복동은 조선 민족의 희망이었다. 고국의 하늘을 최초로 비행한 안창남(安昌男·1900~1930)이 ‘하늘의 영웅’이었다면, 고국의 도로를 페달로 질주한 엄복동은 ‘땅의 영웅’이었다. 이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해 당시 퍼졌던 노랫가락이 ‘하늘엔 안창남, 땅엔 엄복동’이란 구절이다. 당시 유행했던 ‘이팔청춘’이란 노래에 맞춰 애창되던 ‘엄복동 노래’는 다음과 같다.

 

 

의정부 녹양동에 있는 엄복동 동상. / photo 이경호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이겨라 이겨라/ 엄복동 선수 이겨라/ 와 이겼다/ 일본놈들을 물리치고 이겼다/ 만세다 엄복동 최고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

독일 사람 드라이스(Drais K.B. von)가 1818년 목마의 바퀴를 개량해서 만들었다는 자전거가 국내에 소개된 것은 1884년경이다. 고 이규태 전 조선일보 고문은 “미국 공사관 무관을 지낸 해군장교 포크가 1884년 제물포(인천)~서울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1886년 미국 선교사 다리지엘 벙커가 자전거를 탔다는 기록도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자전거는 일명 ‘자행거(自行車)’라고 불렸던 부유층의 교통수단이었다. ‘가마꾼 없이 스스로 가는 수레’라고 해서 ‘자행거’라 불렀다 한다.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보이다가도 이내 씽씽 달리는 ‘자행거’를 당시 사람들은 일종의 서커스 곡예처럼 여기며 신기해 했다.

기묘한 탈거리였던 ‘자행거’를 보고 신기해 하기는 고종(高宗·1852~1919) 황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고 이규태 전 조선일보 고문은 생전에 에비슨의 회고록을 인용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세브란스 의과대학 설립자이자 선교사인 의사 올리버 에비슨은 궁궐에 자주 출입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 공사였던 호레이스 알렌의 주선으로 옻이 오른 고종 황제를 치료한 것이 계기였다고 전한다. 어느날 황제가 에비슨에게 ‘궁궐에 올 때 말을 타고 오느냐, 가마를 타고 오느냐’고 물었다. 에비슨은 ‘더러 걷기도 하고 인력거를 타기도 하는데,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왔다’고 답했다. 그러자 황제는 ‘자전거가 어떻게 굴러가며, 어떻게 생겼기에 넘어지지 않느냐’고 꼼꼼히 물었다. 황제는 에비슨의 답을 듣고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지, 시종에게 ‘자전거를 볼 수 있도록 가져오라’고 명했다. 황제는 대령한 자전거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나더니 ‘어떻게 해서 넘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가’라고 재차 물었다. 에비슨이 ‘처음에는 균형잡기가 어렵지만 오래 타면 넘어지지 않는다’고 답했지만, 황제는 잘 가늠이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에비슨이 코트 자락을 접고 안장에 앉아 궁궐 내정을 빙글빙글 돌며 타는 모습을 보여주자 황제가 웃으며 매우 즐거워했다. 에비슨은 황제가 행여 타보자고 할까봐 마음 졸였다고 한다.”

패망한 나라, 주인 잃은 조선 국민에게 희망과 위안을 준 엄복동은 1892년 서울에서 아버지 엄선양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0대 때 평택의 ‘일미상회’라는 자전거포에서 점원으로 일하다 자전거를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엔 서울~평택을 오가던 자전거 행상이 있었는데 엄복동 역시 그들처럼 서울~평택을 자전거로 오가며 실력을 키웠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자출족(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이었던 셈이다.

아마추어로 시작한 그가 선수로서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1913년 4월의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였다.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사가 서울 용산 연병장에서 개최한 이 대회는 서울(용산), 인천, 평양의 3곳에서 벌어진 전국 규모의 대회로, 당시로선 경이적인 규모인 10만명의 관객이 운집했다고 한다.

엄복동은 이 대회에 중고 자전거를 몰고 처녀 출전, 우승을 차지하는 이변을 낳았다. 당시엔 자전거 선수를 일류(一流), 이류(二流), 삼류(三流)로 구분해 등급을 매겼는데 정상급을 뜻하는 일류 선수는 운동장 40바퀴를 돌았고 2류는 30바퀴를 도는 방식으로 경기가 진행됐다. 최고 실력자들이 모인 이 대회에서 ‘느닷없이’ 우승을 차지한 엄복동은 일약 조선 민족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후 자전거 경기는 한·일 두 나라 사이의 민족전 양상을 띠게 됐는데 여기서 그의 진가는 유감없이 발휘된다. 1922년 5월 장충단 자전차경주대회 우승, 1923년 마산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 우승, 1925년 상주 조선팔도자전거대회 우승, 1928년 전국운수조합대회 우승 등 엄복동은 이후 벌어진 자전거 대회에서 거의 예외없이 1등을 차지하면서 조선의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동아일보 1925년 6월 9일자(3면)는 단평(短評) 코너에서 이렇게 비꼬았다.

“일본 상인들은 목전 자전차 경주에서 조선인에게 일등을 빼앗겨서 분하다 하야, 일본에 잇는 선수들을 전부 초치(招致)하야 자전차경주회를 연다고. 또 지면 분사(憤死)나 할는지.”

조선 대중에게 자전거가 어느 정도 보급된 시기는 1900년대 초로 보인다. 1905년 12월 제정된 ‘가로관리규칙(街路管理規則)’에 “야간 등화 없이 자전거 타는 것을 금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미뤄 이 시기 이미 밤중에 자전거를 타는 인구가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독특한 기동성을 가진 자전거는 특유의 기능을 인정 받아 정부에서도 사용됐다. 1908년 11월 13일자 황성신문엔 ‘군부(軍部)가 1908년 긴급한 공사에 사용하기 위해 자전거 2대를 구입했는데 이는 영위관(領尉官) 및 고원대청직(雇員待廳職)이라도 급한 공사가 있으면 사용할 수 있다’는 기사가 실려 있어 이 시기 관청에서 공무로 자전거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자전거 상인들은 자전거를 홍보하고 이용 인구를 늘리기 위해 거액의 상금이 걸린 대회를 자주 열었다. 국내 첫 대회는 1906년 4월 22일 지금의 을지로 7가 동대문운동장(서울운동장) 동쪽에 있던 훈련원에서 개최됐다. 이곳은 조선의 신식군대였던 ‘별기군(別技軍)’이 한때 훈련을 받았던 곳이다. 대한매일신보 1906년 4월 7일자엔 이 대회 상금이 100원(圓)이었으며 외국인도 참가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다. 그 당시 쌀 한 가마의 평균 가격이 5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100원이란 당시 상금은 적지 않은 액수임을 알 수 있다. 이 대회에서 육군 참위(參尉=소위)였던 조선인 권원식(權元植)은 일본인 요시가와(吉川)와 우승을 다퉜지만 아쉽게도 우승을 차지하진 못했다.

이듬해인 1907년엔 한·일 자전거 상점이 주최한 자전거 대회가 열렸고 1908년엔 외국인이 참가한 가운데 자전거 대회가 개최됐으며 1909년에도 일일신문사(日日新聞社) 주최로 훈련원에서 자전거 대회가 열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전거 대회는 관계자들끼리 즐기는 친목회 성격이 강했다. 그랬던 것이 ‘무명’ 엄복동의 1913년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 우승을 계기로 한·일 민족전 양상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민족의 영웅’ 엄복동은 나이와 체력 저하를 이유로 1929년 경기장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은 그 이후에 빛이 난다. 1932년 4월 20일 열린 ‘전조선남녀자전거대회’ 1만미터 경주에 41세의 고령으로 참석한 것이다. 결과는 우승이었다. 수년간의 훈련 공백과 40대의 나이도 그 앞에선 무색했다. ‘엄복동 선수 노익장’ 소식을 접한 조선 반도는 또 한번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하지만 그 이후 엄복동의 대회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영웅의 말년은 비참했다. 젊어서 번 돈을 모두 탕진한 뒤 광복을 전후해 경기도 동두천과 연천 부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는 한국전쟁 당시 동두천 부근의 한 야산에서 비행기 폭격을 맞고 횡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 엄복동 선수가 타던 자전거. 영국 라지사가 제작했다. / photo 연합


서서히 잊혀져 가던 자전거 영웅이 되살아난 것은 27년 후인 1977년. 대한사이클연맹이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드높인 그를 기리기 위해 1977년부터 매년 자전거 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하지만 비용 부담과 사이클에 대한 낮은 관심으로 인해 1999년 22회 대회를 끝으로 엄복동 자전거 대회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의정부시는 대한사이클연맹의 건의를 받아들여 1986년 녹양동 벨로드롬 경기장 입구에 현재 엄복동 선수를 기리는 동상을 세웠다. 하지만 마라톤 영웅 손기정에 비견될 만한 자전거 영웅 엄복동은 이후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서서히 잊혀지고 말았다. ▒

/ 이범진 기자 bomb@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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