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고려 시대
1. 고려의 건국과 안산
(1) 후삼국의 통일과 안산
통일신라 말기에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각 지방에서는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이들 불만 농민들을 거느린 농민반란군의 두목들이 각지에 등장하게 되었다. 상주(尙州) 지방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를 필두로 하여 북원(北原;원주)의 양길(梁吉), 그의 부하인 궁예(弓裔), 죽주(竹州;죽산)의 기훤(箕萱), 완산(完山)의 견훤(甄萱)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견훤과 궁예는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나라를 세우기까지 하여 마침내 후삼국(後三國)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견훤은 상주 지방의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군인이 되어 군공을 세움으로써 입신출세의 길을 찾았던 사람으로서, 그는 완산주(전주)를 근거로 삼아 후백제를 건국하였다(진성여왕 6년, 892년).
한편 궁예는 신라의 왕자로서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지방으로 밀려나 있던 사람이었는데, 처음에는 기훤에게 투신했으나(진성여왕 5년, 891년) 뒤에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 그는 양길의 일부 군사를 거느리고 강원도·경기도·황해도 일대를 성공적으로 공략한 뒤, 양길을 타도하고 송악(松嶽;개성)을 근거지로 삼아 후고구려를 세웠다(효공왕<孝恭王> 5년, 901년). 그 뒤 그는 나라 이름을 마진(摩震)으로 고치고 서울을 철원으로 옮겼으며, 다시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궁예를 무력으로 제거하고 왕위를 이은 사람이 왕건(王建)이었다. 그는 송악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서, 패강진(浿江鎭)·혈구진(穴口鎭) 등 신라의 변방에 설치된 군진(軍鎭)의 무력을 배경으로 성장하였으며, 궁예의 부하가 되어 많은 무공을 세웠다. 특히 그가 나주·진도 지역을 점령한 것은 후백제에게 커다란 부담을 주었다. 후백제로서는 남쪽에 수비해야 할 또 하나의 전선을 유지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일본과의 통로가 막혀 버리는 등의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왕건은 이러한 무공으로 하여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나 마침내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를 차지하였다(경명왕<景明王> 2년, 918년).
왕건은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수도를 송악(개성)으로 옮겼다. 그곳에는 그의 토착 세력이 있어서 그를 굳건히 뒷받침해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본격적으로 후삼국의 통일 전쟁에 나섰다. 기운이 쇠잔해 버린 신라를 둘러싸고 고려와 후백제와의 투쟁이 불가피했던 것이 당시의 사정이었다.
왕건은 궁예와는 달리 신라에 대하여 친선정책을 추구하는 한편, 후백제와는 기본적으로 무력대결을 추구하였다. 고려와 후백제와의 싸움은 주로 낙동강 서부의 고창(안동)에서 상주를 거쳐 강주(진주)를 잇는 지역에서 벌어졌다. 두 강자의 싸움의 성격은 무엇보다 신라를 취하는 데 있음이 이로써 드러난 셈이었다. 낙동강 서부에 형성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 좀처럼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가 고창 전투에서 크게 이김으로써 이 균형은 깨지고 말았다(태조 13년, 930년).
고려는 신라의 외각에 형성된 전선에서 후백제의 후퇴를 강요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고, 후백제의 정면에서도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운주(홍선)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여(태조 17년, 934년) 충남 지방을 평정함으로써 후백제에 대한 고려의 군사적 우위는 매우 확고해졌다.
고려는 군사적 측면뿐만 아니라 국내 정세에 있어서도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후백제는 운주 싸움에서 진 이듬해(935년)에 정권 장악을 둘러싸고 정치적 내분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견훤이 맏아들 신검(神劍)에 의하여 금산사(김제)에 유폐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견훤이 넷째아들인 금강을 사랑하여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자, 신검이 이에 반발해 정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신검파가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금강파를 제거한 사건이 견훤의 금산사 유폐 사건이었다. 그후 견훤은 끝내 금산사를 탈출하여 숙적인 왕건에게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후백제는 이러한 상황의 악화로 인해 더 이상 고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역사의 대세가 이렇게 급변하자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 오던 신라로서도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은 군신회의를 열어 고려에의 항복을 결정하고, 드디어 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으로 와 왕건에게 투항하였다(태조 18년, 935년).
이리하여 왕건은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이듬해, 즉 태조 19년(936년)에 마침내 무력으로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이것은 곧 왕건이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여 통일에 성공하였음을 뜻하는 일이었다.
이상에서 후삼국의 혼란기를 거쳐 왕건이 통일의 대업을 이루기까지의 상황을 대충 설명하였다. 이제부터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안산 지역의 상태는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점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의 사료를 참고하기로 한다.
⑴ 궁예가 저시·생천 2군을 공격하여 취하고, 또 한주 관내의 부약·철원 등 10여 군·현을 파하였다.42)
⑵ 궁예가 패서도 및 한산주 관내 30여 성을 취하고 드디어 송악군에 도읍하였다.43)
⑶ 국원(충주)·청주·괴양(괴산)의 적수 청길·신훤 등이 성을 들어 궁예에게 투항하였다.44)
⑷ 궁예는 <중략> 건영……4년(897년)에……공암·금포(김포)·혈구(강화) 등의 성을 공격하였다. 그때 양길은 아직도 북원에 있다가 국원 등 30여 성을 취하여 가졌다. (그는) 30여 성의 정예한 군사로써 (궁예를) 습격하고자 했지만, 선종(궁예)이 몰래 알고 먼저 공격하여 그를 패배시켰다. 광화 원년(898년) 무오 봄 2월에……우리 태조(왕건)를 정기대감으로 삼고, 양주·견주를 토벌하였다.……(광화) 3년(900년) 경신에 또 태조(왕건)에게 명하여 광주·충주·당성(남양)·청주·괴양 등을 모두 평정하게 하였다.45)
안산 지역의 장구군은 한주 관내에 있었는데, 위의 기록들을 두루 살펴보면 늦어도 효공왕 4년(900년)까지는 이 지역이 모두 궁예 휘하로 넘어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한주가 궁예의 공격을 받아 그 일부가 그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 진성여왕 9년(895년)이었다(사료 ⑴ 참조). 그리고 897년, 즉 효공왕 원년에 안산에 인접해 있는 공암·김포·강화가 궁예에 복속하였다(사료 ⑷ 참조). 궁예가 한산주의 관내 30여 성을 취하였다고 한 것이 효공왕 2년(898년)이었는데(사료 ⑵ 참조), 이때 안산 지역의 장구군이 완전히 궁예 치하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이 해에 한강의 북안에 있던 양주·견주가 궁예의 부장 왕건에게 정복당하였다는 사실도 이와 관련하여 참고가 된다(사료 ⑷ 참조). 설사 효공왕 2년, 즉 989년이 꼭 아니었다고 해도 충주·청주·괴산 및 광주·남양이 궁예의 치하로 넘어온 것이 900년, 즉 효공왕 4년이었으므로(사료 ⑶, ⑷ 참조) 늦어도 이때까지는 안산 지역이 궁예의 태봉국(泰封國)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보아도 잘못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면서 이 지역은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2) 호족연합정책과 안산
통일신라 말의 혼란기에 각 지방에서는 실질적인 지배권을 대를 이어가며 행사하는 세력가들이 허다하게 등장하였다. 그들은 성을 쌓고 그 주인으로 자처했으며 성주(城主) 혹은 장군(將軍)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을 일반적으로 호족(豪族)이라고 지칭한다.
호족 가운데는 본래 중앙 귀족이었으나 지방으로 몰락해 가서 그곳에서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앙 귀족 가운데는 진골(眞骨) 출신도 있었지만 6두품(六頭品) 출신도 있었다. 한편 오랫동안 지방에서 살아 온 토착 촌주(村主) 출신의 호족들도 있었다. 이들은 지방의 행정 조직 밑에서 촌락민(村落民)을 통제하는 구실을 담당해 왔으나, 점차 그 중 강력한 촌주가 주위의 여러 촌주들을 통괄해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역사상 두각을 나타내 보인 호족들로서는 상주의 아자개, 하지현의 원봉, 명주의 왕순식, 진보의 홍술, 명지성의 성달, 벽진군의 양문, 고울부의 능문, 그리고 강주의 왕봉 등이었다.
호족들은 자기 세력 안에 있는 촌락들에 대하여 경제적인 지배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촌락민에게 일정한 조세(租稅)와 요역을 부과하였는데, 촌락민에 대한 호족의 경제적 지배는 결국 중앙정부의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틀대는 신라를 딛고 서서 한 나라의 정치를 실질적으로 움직여 간 세력들이 바로 이들 호족들이었다. 그러므로 견훤이나 왕건을 막론하고, 이 시대의 통일 군주(君主)를 원하는 자는 결국 예하에 촌락들을 거느리고 있는 호족들을 규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호족을 규합하는 일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견훤보다는 왕건 쪽이 더 유리하였다. 견훤이 본래 상주의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군인이 되어 갑자기 실력자로 부상한 인물임에 비하여, 왕건 자신은 애초부터 전형적인 호족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왕건은 송악(개성) 지방에 그의 지지 기반으로서의 토착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왕건의 선조인 성골 장군 호경(虎景)은 신라 하대에 개성 지방의 토호였으며, 그의 아들 강충(康忠)은 예성강 하구에 있는 영안촌의 부잣집 딸과 혼인하여 마아갑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풍수지리설에 따라 군을 부소산 남쪽으로 옮겨 솔을 심고 송악군으로 이름하였으며, 그는 군의 상사찬(上沙粲)이 되어 그 밑에 촌주들을 거느렸다고 전해진다.
왕건의 가문은 그의 조부인 작제건(作帝建) 때부터 이미 상당한 세력을 이루었다. 그는 개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주위의 여러 지역, 예컨대 정주·염주· 백주·강화·교동·하음 등지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왕건의 조모인 용녀(설화에서는 서해 용왕의 딸로 전하고 있지만)도 본시 평주(평산) 지방 호족의 딸이었다. 한편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태봉을 세웠을 때 송악군의 사찬(沙粲)으로 그곳의 호족이었다. 왕건은 선대 이래의 이와 같은 집안의 지위를 그대로 물려받아 성장한 대표적인 호족이었다.
왕건은 호족이었기 때문에 견훤에 비해 확고한 세력 기반을 지닐 수 있었고, 또한 여러 호족들과의 연결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가 견훤을 누르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인식하에 호족들을 회유해 자신의 세력으로 결집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왕건에 의한 통일은 호족의 연합된 힘에 의지해 이룩된 것이었다.
그러나 통일이 된 이후에도 각지의 호족들은 여전히 반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했다. 중앙으로부터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왕건과 전쟁터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호족 출신의 장수들도 사병(私兵)을 거느린 채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태조는 통일을 이룬 뒤에도 그 전과 마찬가지로 호족들과의 타협과 연합 속에서 정권을 유지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호족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결혼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정주(貞州)의 유씨(柳氏), 평산의 유씨(庾氏)나 박씨, 광주의 왕씨 등 전국의 20여 호족들과 혼인을 하였다. 그리고 사성(賜姓) 정책도 추진해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주어 의제가족적(擬制家族的)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들과의 연합을 굳건히 했다.
시대의 여건이 이러했으므로 안산 지방에도 호족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단지 기록적으로 그것을 뒷받침해 줄 만한 자료가 전해지지 않고 있어 유감이다.
2. 귀족사회의 전개
(1) 문벌귀족사회의 성립
쉽게 꺾이지 않았다. 국왕은 계속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였지만 호족들의 견제와 반발에 부딪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오히려 호족들의 세력이 왕권을 압도하는 형국이 지속되었다.
기세를 잘 드러낸 것이었다. 왕규는 광주의 호족 출신으로 왕실의 외척이 되어 득세한 사람이었다. 그의 두 딸은 이미 태조의 제15비(妃), 제16비로 들어가 그 사이에서 광주원군(廣州院君)을 낳은 바 있었다. 그런데 왕규는 다시 딸 하나를 혜종에게 출가시키고 광주원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기 위해 마침내 혜종을 죽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혜종은 항상 갑사(甲士)로써 신변을 호위해야만 하는 불안한 생활 속에서 죽었다. 이는 호족의 그늘 아래 숨을 죽이고 있는 국왕의 초라한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러한 왕규의 난을 진압하고 즉위한 것이 정종이었다. 그러나 그의 왕권도 미약하기는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개경의 개국공신들의 포위망을 뚫기 위하여 서경(西京) 천도를 강력히 추진하기도 하였다.
(按檢法)을 시행하여 호족 출신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와해시키고자 했으며, 나아가 과거제도(科擧制度)를 실시하여 호족 출신의 관계 진출을 봉쇄하고 학문을 익힌 새로운 문신들을 등용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왕권 강화 정책에 호족 출신 무장들이 반발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광종은 반발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그 결과 태조를 도와서 고려 건국과 통일 전쟁에 공을 세운 호족 출신들의 기세는 크게 꺾이고, 대신 왕권은 매우 강화되었다.
시작된 것이다. 성종은 향직 개편을 실시해 지방 호족들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한편, 호족들을 가급적 중앙 관료로 흡수코자 호족 자제들의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그리하여 지방의 호족들은 향리(鄕吏)로 지위가 바뀌었고, 중앙에서의 호족은 관료로 위치가 바뀌어 갔다. 한 마디로 지방에서든 중앙에서든 호족들에 대한 국왕의 지배는 명실상부해져 갔다. 않았다. 새로운 관료층이라고 해도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특권을 허용받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귀족이었다. 아무리 국왕일지라도 이 귀족들의 공동의 권익은 누를 수 없었다. 이 새로운 귀족층이 고려를 실질적으로 주도해 나가는 지배계층이 되었다.
고려에서는 성(姓)을 달리하는 여러 귀족들이 동시에 정치에 참여하였다. 즉 고려 시대에는 신라와는 달리 이성귀족(異姓貴族)들에 의한 정치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 이성귀족들은 호족이었던 시절의 자신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칭하였고, 이 본관들은 그들의 세력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문벌이라는 것이 중시 되었고 호적마저도 평민과는 별도로 작성되었다. 이처럼 문벌을 중시했으므로 고려의 새로운 이성귀족들을 일반적으로 문벌귀족(門閥貴族)이라고 부르며, 이들 문벌귀족들이 국정을 주도해 나갔으므로 고려를 문벌 귀족사회라고 일컫는다.
다만 죄를 지어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자들만 귀향을 하였다. 개경에 굳건한 토대를 구축하게 된 이들 문벌 귀족들은 가문의 세력을 확장시켜 문벌을 드높이기 위하여 혼인 정책을 펴 나갔는데, 통혼(通婚)의 대상이 되는 가문이 사회적으로 유력하면 할수록 명예로운 일이었다. 또 이들과의 통혼은 곧바로 출세를 위한 지름길이 되었다. 따라서 고려 최고의 귀족인 왕실과의 통혼을 가장 원했다. 이는 가문으로서의 최고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권력에의 접근을 가능케 해 주는 확실한 방도였다. 그리하여 왕실의 외척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는 명문세족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이들이야말로 문벌귀족의 대표적인 존재들이었다. 안산 김씨와 인주 이씨는 그러한 귀족들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했다.
(2) 문벌귀족으로서의 안산 김씨
문벌귀족으로 발돋움하였다. 즉 안산 김씨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안산 김씨는 그 뒤 문종(文宗) 시대까지 4대 50여 년 간에 걸쳐 왕실의 외척으로서 정권을 독차지하였다. 것이다.46) 그림 1-1 김은부의 가계도.
「고려사」 및 금석문에서 전하는 관련 기록들을 통해 김은부의 가문을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가 있다. 사료에 의하면, 김은부가 출세하게 된 것은 그가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로 있을 때 거란군의 침입을 피하여 이곳에 온 현종을 극진히 떠받든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공주에서 그의 장녀를 현종에게 비(妃)로 들이고, 이어 차녀·삼녀까지 현종비로 들였다. 이렇게 해서 그의 집안은 왕실의 막강한 외척이 되었고, 김은부는 절도사 에서 형부시랑(刑部侍郞)을 거쳐 중추사(中樞使)·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사후(死後)의 증직(贈職)이었다. 그는 안산 김씨의 시조에 해당하지만 중앙의 벼슬은 하지 못하였다. 사서(史書)에 그의 선대에 관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대단한 가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김긍필과 그의 선대는 보통의 농민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선 그가 이허겸 (李許謙)과 사돈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자연의 손자가 이자겸(李資謙)이었다. 그의 선대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고 있다.47) 즉 그의 선대는 본시 신라의 대관(大官)으로서 당(唐)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으며, 당의 천자(天子)에게서 이씨(李氏) 성을 사여받기도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그의 선대는 신라의 귀족이었음이 분명하며, 귀족으로서의 지위는 진골이 아니면 6두품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당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의 자손이 거주지를 소성현(邵城縣), 즉 인주(지금의 인천)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후예가 바로 이허겸이라는 것이다.
지역의 호족으로 행세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다만 이허겸대에 이르러 그 위세가 어느 정도 줄어들어 중앙의 관리는 되지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기록으로는 그가 소성백·소성현후 등의 지위에 있었다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그의 외손녀들이 왕후가 되었기 때문에 사후에 주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먼 선대는 대대로 호족이었지만, 이허겸의 가까운 선대에 와서는 개경으로 진출하지 못했으며, 그 뒤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지면서 향리로 지위가 격하되었을 것이다. 인주 이씨가 개성의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이허겸의 아들대에 와서의 일이었다.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김긍필이 이허겸과 사돈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둘 사이의 사회적 지위가 비슷했음을 시사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김긍필의 선대는 이허겸의 선대의 경우처럼 호족과 같은 유력한 세력가는 못 되었다. 그러나 몇 개의 촌락 정도는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집안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김긍필 당대에 이르러 이허겸과 비슷한 정도의 사회적 지위까지 성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김긍필이 향리가 되었거나 또는 이에 버금가는 안산의 유력자로 부상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아들의 결혼 상대를 안산이 아니라 그와 인접해 있는 소성에서 구했다는 사실로써도 이 같은 견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성종 시대에 벼슬자리에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과거를 거쳤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떻게 해서 등용되었는지는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그후 김은부는 앞서 설명했듯이 딸 셋을 현종의 비로 들이는 것이 계기가 되어 일약 최고의 문벌로 등장하였다.
1046년)이 있고, 문종의 비가 된 인평왕후와 경숙공주가 있었다. 둘째딸은 원혜왕후였는데, 그의 소생으로는 11대 문종(文宗;1047~1083년)과 평양공(平壤公) 기(基), 그리고 덕종의 비가 된 효사왕후가 있었다. 셋째딸은 원평왕후로서 효경공주를 낳았다. 김은부는 현종에 이어 차례대로 즉위한 9대 덕종, 10대 정종, 11대 문종 등 3명의 임금을 외손자로 두었던 셈이다. 그리고 문종의 비 인평왕후와 덕종의 비 효사왕후 등 두 명의 왕비를 외손녀로 두었던 것이다. 외손자들이 왕위에 올라 있었던 기간만 계산해도 1032~1083년에 이르는 51년이었다.
작은아들 난원은 화엄종(華嚴宗) 승려로서 국사(國師)에 봉해졌으며,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스승으로도 유명했다. 큰아들은 세속의 정치계에서, 작은아들은 불교계에서 각기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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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방 세력의 군사적 통제와 안산
고려 초기만 해도 지방의 호족들이 거의 반독립적인 입장에서 지방을 통치하고 있었으므로, 군사력을 동원하는 것도 그들의 뜻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개국 이전, 태조가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 중에서도 지방의 호족 들은 독자적으로 군대를 동원했었다. 그러나 호족들이 지방에 유지하고 있던 군사적 기반은 좀처럼 와해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 군사력을 와해 시키는 것이 중앙 정부의 커다란 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농민예비군으로, 광군사(光軍司)라고 하는 통수부를 중앙에 두고 있는 군사조직이었다. 중앙정부는 광군사를 통하여 이 광군을 통수하였는데, 이는 건국 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이 광군은 현종 3년(1012년)에서 현종 9년 (1018년)에 이르는 사이에 주현군(州縣軍)의 일품군(一品軍)으로 개편되었으며, 주·현·군에는 보승(保勝)· 정용(精勇)·일품군 및 이품군(二品軍)·삼품군(三品軍)이 있었다. 이 가운데 보승·정용은 주현군의 지방군 가운데서는 가장 군대다운 군대로서 중앙의 직접적인 군사적 지휘 아래 놓여 있었다. 즉 경군(京軍)의 중앙군과 직결되는 중앙 지휘하의 전투부대적 성격을 띤 병농일치(兵農一致)의 군대였다.
공역(工役)을 위하여 동원되었다. 또한 이품군·삼품군은 노동부대였다는 점에서 일품군과 같지만, 중앙의 직접적인 통제 밖에 놓여 있었다는 점에서는 일품군에 미치지 못하였다. 가지고 있었다. 일품군은 향리가 지휘를 맡았으며, 토착적 성격이 농후한 군대였다. 이품군·삼품군은 지방관도 향리도 아닌, 촌의 촌장·촌정의 지휘를 받았다.
하다. 이렇게 됨으로써 지방 세력의 군사적 기반의 토대는 완전히 와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주현군의 성립은 고려의 중앙집권화 정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들도 처음에는 거의 독자적으로 군사력을 배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것이 뒤에 광군으로 편성되면서 중앙으로부터의 제약을 받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광군이 다시 주현군 체제 속으로 재편성됨에 따라 유력자 들이 안산 지역에서 누리고 있던 군사적인 기반은 대부분 붕괴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지휘할 수 있는 부대로서 일품군 정도가 있었겠지만 일품군의 성격은 공역부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공역부대라고 해도 무장을 갖출 수 있는 잠재성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들 위에는 전투부대인 정용·보승을 거느리고 있는 외관이 있었다. 한편 각 촌에는 이품군·삼품군이 촌장·촌정의 지휘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품군·삼품군은 말이 군대이지 실제로는 일반 농민 바로 그것이었다. 4. 지방 세력의 군사적 통제와 안산
고려 초기만 해도 지방의 호족들이 거의 반독립적인 입장에서 지방을 통치하고 있었으므로, 군사력을 동원하는 것도 그들의 뜻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개국 이전, 태조가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 중에서도 지방의 호족들은 독자적으로 군대를 동원했었다.
그러나 호족들이 지방에 유지하고 있던 군사적 기반은 좀처럼 와해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 군사력을 와해 시키는 것이 중앙 정부의 커다란 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농민예비군으로, 광군사(光軍司)라고 하는 통수부를 중앙에 두고 있는 군사조직이었다. 중앙정부는 광군사를 통하여 이 광군을 통수하였는데, 이는 건국 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이 광군은 현종 3년(1012년)에서 현종 9년 (1018년)에 이르는 사이에 주현군(州縣軍)의 일품군(一品軍)으로 개편되었으며, 주·현·군에는 보승(保勝)·정용 (精勇)·일품군 및 이품군(二品軍)·삼품군(三品軍)이 있었다. 이 가운데 보승·정용은 주현군의 지방군 가운데서는 가장 군대다운 군대로서 중앙의 직접적인 군사적 지휘 아래 놓여 있었다. 즉 경군(京軍)의 중앙군과 직결되는 중앙 지휘하의 전투부대적 성격을 띤 병농일치(兵農一致)의 군대였다.
공역(工役)을 위하여 동원되었다. 또한 이품군·삼품군은 노동부대였다는 점에서 일품군과 같지만, 중앙의 직접적인 통제 밖에 놓여 있었다는 점에서는 일품군에 미치지 못하였다. 가지고 있었다. 일품군은 향리가 지휘를 맡았으며, 토착적 성격이 농후한 군대였다. 이품군·삼품군은 지방관도 향리도 아닌, 촌의 촌장·촌정의 지휘를 받았다.
하다. 이렇게 됨으로써 지방 세력의 군사적 기반의 토대는 완전히 와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주현군의 성립은 고려의 중앙집권화 정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들도 처음에는 거의 독자적으로 군사력을 배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것이 뒤에 광군으로 편성 되면서 중앙으로부터의 제약을 받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광군이 다시 주현군 체제 속으로 재편성됨에 따라 유력자들이 안산 지역에서 누리고 있던 군사적인 기반은 대부분 붕괴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지휘할 수 있는 부대로서 일품군 정도가 있었겠지만 일품군의 성격은 공역부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공역부대 라고 해도 무장을 갖출 수 있는 잠재성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들 위에는 전투부대인 정용·보승을 거느리고 있는 외관이 있었다. 한편 각 촌에는 이품군·삼품군이 촌장·촌정의 지휘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품군·삼품군은 말이 군대이지 실제로는 일반 농민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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