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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연원(淵源)/안산의 유래, 市史

안산의 고려시대

by 연송 김환수 2009. 5. 9.

 

 

제3절 고려 시대

 

1. 고려의 건국과 안산

 

(1) 후삼국의 통일과 안산


통일신라 말기에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각 지방에서는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이들 불만 농민들을 거느린 농민반란군의 두목들이 각지에 등장하게 되었다. 상주(尙州) 지방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를 필두로 하여 북원(北原;원주)의 양길(梁吉), 그의 부하인 궁예(弓裔), 죽주(竹州;죽산)의 기훤(箕萱), 완산(完山)의 견훤(甄萱)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견훤과 궁예는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나라를 세우기까지 하여 마침내 후삼국(後三國)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견훤은 상주 지방의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군인이 되어 군공을 세움으로써 입신출세의 길을 찾았던 사람으로서, 그는 완산주(전주)를 근거로 삼아 후백제를 건국하였다(진성여왕 6년, 892년).
한편 궁예는 신라의 왕자로서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지방으로 밀려나 있던 사람이었는데, 처음에는 기훤에게 투신했으나(진성여왕 5년, 891년) 뒤에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 그는 양길의 일부 군사를 거느리고 강원도·경기도·황해도 일대를 성공적으로 공략한 뒤, 양길을 타도하고 송악(松嶽;개성)을 근거지로 삼아 후고구려를 세웠다(효공왕<孝恭王> 5년, 901년). 그 뒤 그는 나라 이름을 마진(摩震)으로 고치고 서울을 철원으로 옮겼으며, 다시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궁예를 무력으로 제거하고 왕위를 이은 사람이 왕건(王建)이었다. 그는 송악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서, 패강진(浿江鎭)·혈구진(穴口鎭) 등 신라의 변방에 설치된 군진(軍鎭)의 무력을 배경으로 성장하였으며, 궁예의 부하가 되어 많은 무공을 세웠다. 특히 그가 나주·진도 지역을 점령한 것은 후백제에게 커다란 부담을 주었다. 후백제로서는 남쪽에 수비해야 할 또 하나의 전선을 유지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일본과의 통로가 막혀 버리는 등의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왕건은 이러한 무공으로 하여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나 마침내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를 차지하였다(경명왕<景明王> 2년, 918년).


왕건은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수도를 송악(개성)으로 옮겼다. 그곳에는 그의 토착 세력이 있어서 그를 굳건히 뒷받침해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본격적으로 후삼국의 통일 전쟁에 나섰다. 기운이 쇠잔해 버린 신라를 둘러싸고 고려와 후백제와의 투쟁이 불가피했던 것이 당시의 사정이었다.


왕건은 궁예와는 달리 신라에 대하여 친선정책을 추구하는 한편, 후백제와는 기본적으로 무력대결을 추구하였다. 고려와 후백제와의 싸움은 주로 낙동강 서부의 고창(안동)에서 상주를 거쳐 강주(진주)를 잇는 지역에서 벌어졌다. 두 강자의 싸움의 성격은 무엇보다 신라를 취하는 데 있음이 이로써 드러난 셈이었다. 낙동강 서부에 형성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 좀처럼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가 고창 전투에서 크게 이김으로써 이 균형은 깨지고 말았다(태조 13년, 930년).


고려는 신라의 외각에 형성된 전선에서 후백제의 후퇴를 강요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고, 후백제의 정면에서도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운주(홍선)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여(태조 17년, 934년) 충남 지방을 평정함으로써 후백제에 대한 고려의 군사적 우위는 매우 확고해졌다.


고려는 군사적 측면뿐만 아니라 국내 정세에 있어서도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후백제는 운주 싸움에서 진 이듬해(935년)에 정권 장악을 둘러싸고 정치적 내분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견훤이 맏아들 신검(神劍)에 의하여 금산사(김제)에 유폐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견훤이 넷째아들인 금강을 사랑하여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자, 신검이 이에 반발해 정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신검파가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금강파를 제거한 사건이 견훤의 금산사 유폐 사건이었다. 그후 견훤은 끝내 금산사를 탈출하여 숙적인 왕건에게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후백제는 이러한 상황의 악화로 인해 더 이상 고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역사의 대세가 이렇게 급변하자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 오던 신라로서도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은 군신회의를 열어 고려에의 항복을 결정하고, 드디어 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으로 와 왕건에게 투항하였다(태조 18년, 935년).
이리하여 왕건은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이듬해, 즉 태조 19년(936년)에 마침내 무력으로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이것은 곧 왕건이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여 통일에 성공하였음을 뜻하는 일이었다.


이상에서 후삼국의 혼란기를 거쳐 왕건이 통일의 대업을 이루기까지의 상황을 대충 설명하였다. 이제부터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안산 지역의 상태는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점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의 사료를 참고하기로 한다.

 

⑴ 궁예가 저시·생천 2군을 공격하여 취하고, 또 한주 관내의 부약·철원 등 10여 군·현을 파하였다.42)
⑵ 궁예가 패서도 및 한산주 관내 30여 성을 취하고 드디어 송악군에 도읍하였다.43)
⑶ 국원(충주)·청주·괴양(괴산)의 적수 청길·신훤 등이 성을 들어 궁예에게 투항하였다.44)
⑷ 궁예는 <중략> 건영……4년(897년)에……공암·금포(김포)·혈구(강화) 등의 성을 공격하였다. 그때 양길은 아직도 북원에 있다가 국원 등 30여 성을 취하여 가졌다. (그는) 30여 성의 정예한 군사로써 (궁예를) 습격하고자 했지만, 선종(궁예)이 몰래 알고 먼저 공격하여 그를 패배시켰다. 광화 원년(898년) 무오 봄 2월에……우리 태조(왕건)를 정기대감으로 삼고, 양주·견주를 토벌하였다.……(광화) 3년(900년) 경신에 또 태조(왕건)에게 명하여 광주·충주·당성(남양)·청주·괴양 등을 모두 평정하게 하였다.45)

 

안산 지역의 장구군은 한주 관내에 있었는데, 위의 기록들을 두루 살펴보면 늦어도 효공왕 4년(900년)까지는 이 지역이 모두 궁예 휘하로 넘어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한주가 궁예의 공격을 받아 그 일부가 그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 진성여왕 9년(895년)이었다(사료 ⑴ 참조). 그리고 897년, 즉 효공왕 원년에 안산에 인접해 있는 공암·김포·강화가 궁예에 복속하였다(사료 ⑷ 참조). 궁예가 한산주의 관내 30여 성을 취하였다고 한 것이 효공왕 2년(898년)이었는데(사료 ⑵ 참조), 이때 안산 지역의 장구군이 완전히 궁예 치하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이 해에 한강의 북안에 있던 양주·견주가 궁예의 부장 왕건에게 정복당하였다는 사실도 이와 관련하여 참고가 된다(사료 ⑷ 참조). 설사 효공왕 2년, 즉 989년이 꼭 아니었다고 해도 충주·청주·괴산 및 광주·남양이 궁예의 치하로 넘어온 것이 900년, 즉 효공왕 4년이었으므로(사료 ⑶, ⑷ 참조) 늦어도 이때까지는 안산 지역이 궁예의 태봉국(泰封國)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보아도 잘못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면서 이 지역은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2) 호족연합정책과 안산


통일신라 말의 혼란기에 각 지방에서는 실질적인 지배권을 대를 이어가며 행사하는 세력가들이 허다하게 등장하였다. 그들은 성을 쌓고 그 주인으로 자처했으며 성주(城主) 혹은 장군(將軍)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을 일반적으로 호족(豪族)이라고 지칭한다.
호족 가운데는 본래 중앙 귀족이었으나 지방으로 몰락해 가서 그곳에서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앙 귀족 가운데는 진골(眞骨) 출신도 있었지만 6두품(六頭品) 출신도 있었다. 한편 오랫동안 지방에서 살아 온 토착 촌주(村主) 출신의 호족들도 있었다. 이들은 지방의 행정 조직 밑에서 촌락민(村落民)을 통제하는 구실을 담당해 왔으나, 점차 그 중 강력한 촌주가 주위의 여러 촌주들을 통괄해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역사상 두각을 나타내 보인 호족들로서는 상주의 아자개, 하지현의 원봉, 명주의 왕순식, 진보의 홍술, 명지성의 성달, 벽진군의 양문, 고울부의 능문, 그리고 강주의 왕봉 등이었다.
호족들은 자기 세력 안에 있는 촌락들에 대하여 경제적인 지배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촌락민에게 일정한 조세(租稅)와 요역을 부과하였는데, 촌락민에 대한 호족의 경제적 지배는 결국 중앙정부의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틀대는 신라를 딛고 서서 한 나라의 정치를 실질적으로 움직여 간 세력들이 바로 이들 호족들이었다. 그러므로 견훤이나 왕건을 막론하고, 이 시대의 통일 군주(君主)를 원하는 자는 결국 예하에 촌락들을 거느리고 있는 호족들을 규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호족을 규합하는 일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견훤보다는 왕건 쪽이 더 유리하였다. 견훤이 본래 상주의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군인이 되어 갑자기 실력자로 부상한 인물임에 비하여, 왕건 자신은 애초부터 전형적인 호족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왕건은 송악(개성) 지방에 그의 지지 기반으로서의 토착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왕건의 선조인 성골 장군 호경(虎景)은 신라 하대에 개성 지방의 토호였으며, 그의 아들 강충(康忠)은 예성강 하구에 있는 영안촌의 부잣집 딸과 혼인하여 마아갑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풍수지리설에 따라 군을 부소산 남쪽으로 옮겨 솔을 심고 송악군으로 이름하였으며, 그는 군의 상사찬(上沙粲)이 되어 그 밑에 촌주들을 거느렸다고 전해진다.


왕건의 가문은 그의 조부인 작제건(作帝建) 때부터 이미 상당한 세력을 이루었다. 그는 개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주위의 여러 지역, 예컨대 정주·염주· 백주·강화·교동·하음 등지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왕건의 조모인 용녀(설화에서는 서해 용왕의 딸로 전하고 있지만)도 본시 평주(평산) 지방 호족의 딸이었다. 한편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태봉을 세웠을 때 송악군의 사찬(沙粲)으로 그곳의 호족이었다. 왕건은 선대 이래의 이와 같은 집안의 지위를 그대로 물려받아 성장한 대표적인 호족이었다.


왕건은 호족이었기 때문에 견훤에 비해 확고한 세력 기반을 지닐 수 있었고, 또한 여러 호족들과의 연결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가 견훤을 누르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인식하에 호족들을 회유해 자신의 세력으로 결집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왕건에 의한 통일은 호족의 연합된 힘에 의지해 이룩된 것이었다.


그러나 통일이 된 이후에도 각지의 호족들은 여전히 반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했다. 중앙으로부터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왕건과 전쟁터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호족 출신의 장수들도 사병(私兵)을 거느린 채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태조는 통일을 이룬 뒤에도 그 전과 마찬가지로 호족들과의 타협과 연합 속에서 정권을 유지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호족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결혼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정주(貞州)의 유씨(柳氏), 평산의 유씨(庾氏)나 박씨, 광주의 왕씨 등 전국의 20여 호족들과 혼인을 하였다. 그리고 사성(賜姓) 정책도 추진해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주어 의제가족적(擬制家族的)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들과의 연합을 굳건히 했다.
시대의 여건이 이러했으므로 안산 지방에도 호족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단지 기록적으로 그것을 뒷받침해 줄 만한 자료가 전해지지 않고 있어 유감이다.

2. 귀족사회의 전개

 

(1) 문벌귀족사회의 성립


고려의 건국은 호족들의 연합된 힘에 의지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통일 뒤에도 호족이나 그 출신들의 세력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국왕은 계속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였지만 호족들의 견제와 반발에 부딪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오히려 호족들의 세력이 왕권을 압도하는 형국이 지속되었다.


태조에 이어 혜종(惠宗)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일어난 ‘왕규(王規)의 난’은 당시 왕권을 능멸하는 호족들의

기세를 잘 드러낸 것이었다. 왕규는 광주의 호족 출신으로 왕실의 외척이 되어 득세한 사람이었다. 그의

두 딸은 이미 태조의 제15비(妃), 제16비로 들어가 그 사이에서 광주원군(廣州院君)을 낳은 바 있었다. 그런데

 왕규는 다시 딸 하나를 혜종에게 출가시키고 광주원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기 위해 마침내 혜종을

죽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혜종은 항상 갑사(甲士)로써 신변을 호위해야만 하는 불안한 생활 속에서 죽었다.

이는 호족의 그늘 아래 숨을 죽이고 있는 국왕의 초라한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러한 왕규의

난을 진압하고 즉위한 것이 정종이었다. 그러나 그의 왕권도 미약하기는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개경의 개국공신들의 포위망을 뚫기 위하여 서경(西京) 천도를 강력히 추진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왕권은 정종을 이은 광종(光宗) 시대에 와서야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는 노비의 안검법

(按檢法)을 시행하여 호족 출신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와해시키고자 했으며, 나아가 과거제도(科擧制度)를

실시하여 호족 출신의 관계 진출을 봉쇄하고 학문을 익힌 새로운 문신들을 등용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왕권

강화 정책에 호족 출신 무장들이 반발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광종은 반발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그 결과 태조를 도와서 고려 건국과 통일 전쟁에 공을 세운 호족 출신들의 기세는 크게 꺾이고, 대신 왕권은

매우 강화되었다.


성종(成宗) 시대에 이르러 지방에 중앙관이 파견되기 시작했다. 지방 호족들에 대한 국왕의 본격적인 지배가

시작된 것이다. 성종은 향직 개편을 실시해 지방 호족들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한편, 호족들을 가급적 중앙

관료로 흡수코자 호족 자제들의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그리하여 지방의 호족들은 향리(鄕吏)로 지위가

바뀌었고, 중앙에서의 호족은 관료로 위치가 바뀌어 갔다. 한 마디로 지방에서든 중앙에서든 호족들에 대한

국왕의 지배는 명실상부해져 갔다.

 
그러나 중앙에서 호족을 대신하여 새로운 관료층으로 발돋움한 계층에 대한 국왕의 절대적 지배권은 확립되지

 않았다. 새로운 관료층이라고 해도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특권을 허용받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귀족이었다. 아무리 국왕일지라도 이 귀족들의 공동의 권익은 누를 수 없었다. 이 새로운 귀족층이 고려를

 실질적으로 주도해 나가는 지배계층이 되었다.


지배계층으로서의 이 새로운 귀족들은 신라의 진골 귀족들과는 성격이 달랐다. 신라의 진골 귀족과는 달리

고려에서는 성(姓)을 달리하는 여러 귀족들이 동시에 정치에 참여하였다. 즉 고려 시대에는 신라와는 달리

이성귀족(異姓貴族)들에 의한 정치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 이성귀족들은 호족이었던 시절의 자신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칭하였고, 이 본관들은 그들의 세력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문벌이라는 것이 중시

되었고 호적마저도 평민과는 별도로 작성되었다. 이처럼 문벌을 중시했으므로 고려의 새로운 이성귀족들을

일반적으로 문벌귀족(門閥貴族)이라고 부르며, 이들 문벌귀족들이 국정을 주도해 나갔으므로 고려를 문벌

귀족사회라고 일컫는다.


문벌귀족의 중심지는 이제 지방이 아니라 개경(開京)이었다. 이들은 모두 개경에 거주하는 개경인이었다.

다만 죄를 지어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자들만 귀향을 하였다. 개경에 굳건한 토대를 구축하게 된 이들 문벌

귀족들은 가문의 세력을 확장시켜 문벌을 드높이기 위하여 혼인 정책을 펴 나갔는데, 통혼(通婚)의 대상이

되는 가문이 사회적으로 유력하면 할수록 명예로운 일이었다. 또 이들과의 통혼은 곧바로 출세를 위한

지름길이 되었다. 따라서 고려 최고의 귀족인 왕실과의 통혼을 가장 원했다. 이는 가문으로서의 최고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권력에의 접근을 가능케 해 주는 확실한 방도였다. 그리하여 왕실의 외척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는 명문세족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이들이야말로 문벌귀족의 대표적인 존재들이었다. 안산 김씨와 인주

 이씨는 그러한 귀족들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했다.

 

(2) 문벌귀족으로서의 안산 김씨


안산 출신으로서 이곳에 본관을 둔 김은부(金殷傅)는 그의 세 딸을 현종의 비로 들인 이후 일약 고려 최고의

문벌귀족으로 발돋움하였다. 즉 안산 김씨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안산 김씨는 그 뒤 문종(文宗) 시대까지

4대 50여 년 간에 걸쳐 왕실의 외척으로서 정권을 독차지하였다.
우선 「고려사」와 금석문을 두루 참고하여 김은부의 가계를 그림 1-1과 같이만들어 참고해 보면 유익할

것이다.46)

   그림 1-1 김은부의 가계도.

 

「고려사」 및 금석문에서 전하는 관련 기록들을 통해 김은부의 가문을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가 있다.

사료에 의하면, 김은부가 출세하게 된 것은 그가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로 있을 때 거란군의 침입을 피하여

이곳에 온 현종을 극진히 떠받든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공주에서 그의 장녀를 현종에게 비(妃)로 들이고,

이어 차녀·삼녀까지 현종비로 들였다. 이렇게 해서 그의 집안은 왕실의 막강한 외척이 되었고, 김은부는 절도사

에서 형부시랑(刑部侍郞)을 거쳐 중추사(中樞使)·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김은부의 부 김긍필은 상서(尙書)·좌복야(左僕射)였지만 그것은 그 손녀들이 왕후가 되었기 때문에 받게 된

사후(死後)의 증직(贈職)이었다. 그는 안산 김씨의 시조에 해당하지만 중앙의 벼슬은 하지 못하였다.

사서(史書)에 그의 선대에 관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대단한 가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김긍필과 그의 선대는 보통의 농민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선 그가 이허겸

(李許謙)과 사돈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허겸은 안산 김씨에 이어 권세를 떨치게 되는 인주 이씨의 시조로서, 유명한 이자연(李子淵)이 그의 손자였고,

 이자연의 손자가 이자겸(李資謙)이었다. 그의 선대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고 있다.47) 즉 그의 선대는 본시

신라의 대관(大官)으로서 당(唐)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으며, 당의 천자(天子)에게서 이씨(李氏) 성을

사여받기도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그의 선대는 신라의 귀족이었음이 분명하며, 귀족으로서의 지위는

 진골이 아니면 6두품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당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의 자손이 거주지를 소성현(邵城縣),

즉 인주(지금의 인천)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후예가 바로 이허겸이라는 것이다.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이허겸의 선대는 대대로 인천 지방에서 살면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해 왔으며, 인천

지역의 호족으로 행세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다만 이허겸대에 이르러 그 위세가 어느 정도 줄어들어 중앙의

관리는 되지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기록으로는 그가 소성백·소성현후 등의 지위에 있었다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그의 외손녀들이 왕후가 되었기 때문에 사후에 주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먼 선대는

대대로 호족이었지만, 이허겸의 가까운 선대에 와서는 개경으로 진출하지 못했으며, 그 뒤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지면서 향리로 지위가 격하되었을 것이다. 인주 이씨가 개성의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이허겸의

 아들대에 와서의 일이었다.


이허겸과 그의 선대의 사회적 지위를 이상과 같이 이해할 수가 있다면, 그와 같은 맥락으로 김긍필의 경우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김긍필이 이허겸과 사돈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둘 사이의 사회적 지위가

비슷했음을 시사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김긍필의 선대는 이허겸의 선대의 경우처럼 호족과 같은

유력한 세력가는 못 되었다. 그러나 몇 개의 촌락 정도는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집안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김긍필 당대에 이르러 이허겸과 비슷한 정도의 사회적 지위까지 성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김긍필이 향리가 되었거나 또는 이에 버금가는 안산의 유력자로 부상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아들의 결혼 상대를 안산이 아니라 그와 인접해 있는 소성에서 구했다는 사실로써도 이 같은 견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안산 김씨는 김긍필의 아들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중앙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즉 김은부가

성종 시대에 벼슬자리에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과거를 거쳤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떻게 해서

등용되었는지는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그후 김은부는 앞서 설명했듯이 딸 셋을 현종의 비로 들이는 것이

계기가 되어 일약 최고의 문벌로 등장하였다.


김은부의 맏딸은 원성왕후였는데, 그의 소생으로는 9대 덕종(德宗;1032~ 1034년), 10대 정종(靖宗;1035~

1046년)이 있고, 문종의 비가 된 인평왕후와 경숙공주가 있었다. 둘째딸은 원혜왕후였는데, 그의 소생으로는

11대 문종(文宗;1047~1083년)과 평양공(平壤公) 기(基), 그리고 덕종의 비가 된 효사왕후가 있었다.

셋째딸은 원평왕후로서 효경공주를 낳았다. 김은부는 현종에 이어 차례대로 즉위한 9대 덕종, 10대 정종,

11대 문종 등 3명의 임금을 외손자로 두었던 셈이다. 그리고 문종의 비 인평왕후와 덕종의 비 효사왕후 등

두 명의 왕비를 외손녀로 두었던 것이다. 외손자들이 왕위에 올라 있었던 기간만 계산해도 1032~1083년에

이르는 51년이었다.


김은부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은 김충찬(金忠贊)이었는데 병부상서(兵部尙書)까지 나아갔다.

작은아들 난원은 화엄종(華嚴宗) 승려로서 국사(國師)에 봉해졌으며,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스승으로도

유명했다. 큰아들은 세속의 정치계에서, 작은아들은 불교계에서 각기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3. 통치조직과 안산

 

(1) 중앙의 행정기구


고려의 정치기구는 성종 2년(983년)에 새로 정비되기 시작하여 문종 30년(1076년)에 완비되었다. 고

려의 관제는 중서성·문하성·상서성의 3성(三省)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었다. 3성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중서성과 문하성이었는데, 이를 합쳐 중서문하성이라고 불렀으며 때로는 재부(宰府)라고도 불렀다.


중서문하성의 관직은 2품 이상의 재신(宰臣)과 3품 이하의 낭사(郎舍)로 구분되었는데, 재신은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고 낭사는 정책을 건의하고 그 잘못을 간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이에 대하여 상서성은 정책의

 시행을 맡았는데, 상서성에 소속되어 실무를 담당한 것이 이부·병부·호부·형부·예부·공부 등 6부였다.

위의 3성과 나란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 중추원(中樞院;추밀원<樞密院>)이었다. 일명 추부(樞府)라고도

불리는 중추원은 성종 때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는데, 맡은 바 임무는 왕명의 출납과 군기의 장악이었다.


위의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은 양부(兩府) 또는 재추(宰樞)라고도 칭하였으며, 양부의 고관, 즉 재신과 추신이

함께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회의하고 결정짓는 것을 재추회의 또는 도당(都堂)이라고 하였다.
양부 이외의 중요한 관부로는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고 관리의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맡은 어사대

(御史臺)가 있었다. 어사대와 중서문하성 소속의 낭사를 합하여 대성(臺省)이라고도 불렀는데, 관리의

임명이나 법의 개폐 등에 서경(署經)하는 권한이 있어서 왕권의 전제적 행사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였다.

 

(2) 지방제도의 성립과 안산


1) 고려 초기의 안산


고려의 지방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성종 시대부터였다. 성종 이전에는 지방에 중앙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태조 시대부터 성종이 외관(外官)을 파견하기 전까지의 지방 통치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또한 안산 지방의 경우는 어떠하였을까.


안산 지방에는 본래 장구군이 있어 왔다.
“안산현은 본래 고구려의 장항구현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고쳐서 장구군으로 하였다.`고려 초에 고쳐서

안산군으로 하였다.`현종 9년에 와서 속했다.48)
고려 초에 이르러 장구군이 안산군으로 변하였다. 장구군이 안산군으로 바뀐 것은 명칭만 바뀐 것일 뿐

군으로서의 지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종래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 당시 무슨

각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지위가 군(郡)이든 현(縣)이든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가장 큰 변화로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중앙관이 파견되지 않게 된 변화, 바로 그것이었다. 중앙관이 파견되지 않는 상황하에서의 안산군 통치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그 통치는 지방의 토착 세력들에게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지방 세력에 속하는 토착

세력가는 이직자(吏職者)로서 아래와 같은 일정한 체계의 직제를 가지고 있었다.49) 즉 이직(吏職)의

 체계는 당대등(堂大等)·대등(大等)을 수석·차석으로 하여, 그 아래에 호부(戶部)·병부(兵部)·창부(倉部)의 예하

기구를 거느리고 있었다. 여기에 모인 이직자들이 지방행정을 주도하였는데, 중앙의 외관이 임명되지 않은

여건하에서 이들이 지방행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직자들의 권한과 영향력이 무제한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금유(今有)·조장(租藏)과 전운사

(轉運使)가 비록 상주관은 아니었지만 필요할 때는 파견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들의 임무는 지방에서 경제적인

수취를 행하고 이것을 중앙으로 운반하는 일을 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한편 정치적인 면에서 보아도 이직자들이 지방통치에 전적인 책임을 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앙관리로서 지방에 연고가 있는 사람이 그 지방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되어 부호장(副戶長),

즉 대등 이하의 이직자들을 주관하도록 위임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앙정부는 정치적인 통제와

경제적인 수취에 직접 관여코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이직자들의 영향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지방관이 파견되었던

통일신라의 경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음이 분명했다. 안산현 지방에도 커다란 영향력과 위세와 권한을 가진

이직자들이 실질적인 행정을 꾸려 나갔을 것이다.

 

2) 성종 시대의 지방제도 정비와 안산


고려의 건국 이후 지방제도가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성종 시대부터였다. 지방제도의 정비에

즈음하여 안산 지역은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되었을지가 궁금해진다.
“비로소 12목(牧)을 두었다.50)
“처음으로 12목에 처자를 거느리고 임지로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51)


성종 2년 2월에 전국에 12목을 두고 중앙관을 지방의 장관으로 파견하였는데, 가족을 거느리고 임지로 가게

했다는 점만으로도 그들이 상주관이었음이 확실하다. 12목이 설치된 곳은 양주·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

전주·나주·승주·해주·황주 등 12주였으며, 이곳들은 당시의 지방행정 거점으로 부각되었다. 당시의 안산현은

양주목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후 성종 14년에 이르러 10도(道) 제도가 채택되었는데, 10도는 관내·중원·하남·강남·영남·영동·산남·해양·삭방·

패서 등이었다. 당시의 안산 지역은 관내도에 예속되었다.


“양광도(楊廣道)는 본래 고구려·백제의 땅이었다. 성종 14년에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로 하였는데, 양주·광주

 등의 주·현을 관내도(關內道)에 속하게 하였다.52)
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양주에 소속되어 있는 주·현은 관내도에 예속되었다. 따라서 양주목에 예속되어 있던

 안산현은 당연히 관내도의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다. 10도제는 당의 제도를 모방하여 설치된 것으로서, 일정한

감찰 순찰 구획을 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각 도에는 관찰사(觀察使)가 임명되었는데, 관찰사는

상주관은 아니었다. 그는 일정 기간 동안 해당 도의 구역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의 일을 보살폈다.


10도제의 실시와 동시에 절도사(節度使) 체제가 등장하였다. 이것도 당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성종 2년에 설치한 바 있는 전국의 12목에 절도사를 두고, 주·현에 그 중요성에 따라 차등을 두어 7도단련사

(都團練使)·11단련사(團練使)·21방어사(防禦使)·15자사(刺使)를 두었다. 그러나 안산현에는 이러한 직책의

관리가 파견되지는 않았다.

절도사 체제가 성립된 것은 지방통치가 민정체제에서 군정체제로 변하였음을 시사한다.

단련사를 포함한 절도사 체제하의 여러 외관(外官)들은 군사적인 색채가 짙었던 것이었다. 지방에 아직도

온존해 있던 세력가들을 통치하는 데는 군정체제의 유지가 보다 적절했던 것이다.


하지만 절도사 체제는 그다지 오랫동안 유지되지는 못하였다. 이 체제가 성립된 지 불과 10년 만인 목종(穆宗)

8년에 그 붕괴의 조짐이 나타났다. 즉 성종 14년에 설치한 관찰사·도단련사·단련사·자사가 모두 혁파되고

다만 12절도사와 4도호(都護), 동서양계(東西兩界)의 방어진사(防禦鎭使)·현령(縣令)·진장(鎭將)만이 남게

되었다.

즉 남도의 일반 행정지역에는 12절도사와 4도호만이 남은 셈이었다. 그리고 절도사조차도 현종 3년에 이르러

없어지게 되었다. 이는 지방통치가 군정체제에서 민정체제로 복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 현종 시대의 지방관제 개편과 안산


현종(顯宗) 3년에 12주의 절도사가 없어지면서 절도사 체제가 사라지게 되었음은 위에서 지적한 바가 있는데,

절도사를 대신하여 나타난 것이 75도안무사(道安撫使)였다. 그러나 75도의 안무사는 제정된 뒤 6년 만인 현종

 9년에 없어지게 되었다.
“여러 도의 안무사를 파하고 4도호(都護)·8목(牧)·56지주군사(知州郡事)· 28진장(鎭將)·20현령(縣令)을 설치

하였다.53)
이와 같은 현종 9년의 지방제도의 개편은 고려의 지방제도사에 있어서 하나의 획을 그을 만큼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고려 지방제도의 완비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려의 지방제도는 기능 면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던 것이 4도호·8목이었다. 4도호·8목을 중심으로 하여 그 밑에 중앙 관리가

전임으로 파견·상주하는 주·부·군·현·진이 있었다. 4도호부는 안동대도호부(경주)·안서도호부(해주)·

안변도호부(안변)·안북대도호부(안주)였고, 8목은 광주·충주·청주·진주·상주·전주·나주·황주 등이었다.


중앙에서 외관이 파견되는 곳은 주목(主牧)·영군(領郡)·주현(主縣)이었고, 반면에 속군(屬郡)·속현(屬縣)은

중앙관이 임명되지 않아서 다른 고을에 예속되었다. 이 시대에 지방관이 파견된 행정단위는 146개소였으며,

외관을 갖지 못한 곳은 361개소나 되었다.


“수주(水州)는 ……성종 14년에 도단련사를 두었지만, 목종 8년에 이를 파하였다. 현종 9년에 복구하여

지주사(知州事)로 하였다. <중략> 속현은 7이었다.
안산현은 ……고려 초에 안산현으로 하였다. 현종 9년에 와서 속하였다. 후에 감무를 두었다.”54)


안산은 현종 9년에 군에서 현으로 지위가 떨어졌고, 역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으로 남아서

수주(오늘날 수원)에 예속되었다. 현종 9년 당시에 수주에는 지주사가 파견되었는데, 안산현은 수주가

거느리고 있던 7개의 속현 가운데 하나였다. 이렇게 보면, 현종 9년이 되어서야 안산현은 수주를 거쳐서

중앙정부에 통할 수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중앙정부의 지시나 명령을 받을 때에도 경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문종 23년 이후부터는 뒤에 설명하겠지만 안산현은 경기(京畿)에 예속됨으로써 여기에 장관으로

임명된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안산현이 개성부를 거쳐서 중앙정부와

연결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지방관이 파견되었든 아니되었든 지방의 실제 행정을 맡고 있는 것은 향리였다. 안산현처럼 중앙관이

임명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는 지방행정에서 차지하는 향리의 비중이 매우 컸다. 이 경우 향리는 실질적인

 통치자의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종 2년 전국에 12목을 두고 중앙관을 지방에 파견하게

됨으로써 향리들의 직제도 정리되기에 이르렀다. 중앙관이 지방으로 가기 시작한 성종 2년 그 해에 이직

(吏職)이 개편되었다. 개편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직의 개편은 명칭의 변화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같은 해에 이루어진 외관의 파견과 함께

 지방 향리들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조치의 일환이었다. 이직은 그 뒤에 계속적으로 분화·첨가되었지만,

호장(戶長)-부호장(副戶長)을 축으로 하고 그 아래 사호(司戶)·사병(司兵)·사창(司倉)의 3사로 이루어진

이직체계의 골격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현종 시대의 규정을 보면 이직에는 정원이 있었는데, 매 이직의

정원은 복수였다. 예컨대 천 정 이상의 대읍에는 호장 8인 부호장 4인, 오백 정 이상이면 호장 7인 부호장 2인,

삼백 정 이상이면 호장 5인 부호장 2인이 있었다.
안산현의 크기는 알 수가 없지만 속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대읍일 수는 없고, 오히려 비교적 작은

고을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안산에는 각기 5명의 호장과 2명의 부호장이 있어서 이 지역의

행정사무를 총괄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그런데 향리의 수에 비해서는 아무리 작은 고을이라도 그들이 담당해야 하는 행정구획의 영역은 대체로 컸다.

 이 같은 필요에서 군현제(郡縣制)를 보완하여 존재한 것이 촌제(村制)였으며, 촌의 우두머리로서 촌장(村長)·

촌정(村正)이 있었다. 이들은 일반 백성들과 곧바로 부대끼며 그들을 직접 통솔하였다. 촌에는 자연촌락을

연상시키는 자연촌과 몇 개의 자연촌을 하나의 단위로 묶은, 이를테면 지역촌이 있었을 것이다. 이 경우

촌장은 지역촌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안산의 경우도 그 행정조직의 말단 부분은 몇 개인가의 지역촌

으로 나뉘어 있었을 것이고, 촌장·촌정이 해당 지역촌을 통솔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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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방 세력의 군사적 통제와 안산

 

고려 초기만 해도 지방의 호족들이 거의 반독립적인 입장에서 지방을 통치하고 있었으므로, 군사력을 동원하는

것도 그들의 뜻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개국 이전, 태조가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 중에서도 지방의 호족

들은 독자적으로 군대를 동원했었다.
통일이 일단 마무리된 뒤에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집권적인 체제를 이루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호족들이 지방에 유지하고 있던 군사적 기반은 좀처럼 와해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 군사력을 와해

시키는 것이 중앙 정부의 커다란 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 첫 조치가 광군(光軍)의 조직이었다. 광군은 지방 호족들에 의하여 징집되고 그들에 의하여 지휘되는

농민예비군으로, 광군사(光軍司)라고 하는 통수부를 중앙에 두고 있는 군사조직이었다. 중앙정부는 광군사를

통하여 이 광군을 통수하였는데, 이는 건국 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이 광군은 현종 3년(1012년)에서 현종 9년

(1018년)에 이르는 사이에 주현군(州縣軍)의 일품군(一品軍)으로 개편되었으며, 주·현·군에는 보승(保勝)·

정용(精勇)·일품군 및 이품군(二品軍)·삼품군(三品軍)이 있었다. 이 가운데 보승·정용은 주현군의 지방군

가운데서는 가장 군대다운 군대로서 중앙의 직접적인 군사적 지휘 아래 놓여 있었다. 즉 경군(京軍)의 중앙군과

 직결되는 중앙 지휘하의 전투부대적 성격을 띤 병농일치(兵農一致)의 군대였다.


그러나 일품군은 중앙의 명에 의하여 동원되는 부대이기는 했지만, 보승·정용과는 달리 전투나 방위가 아니라

 공역(工役)을 위하여 동원되었다. 또한 이품군·삼품군은 노동부대였다는 점에서 일품군과 같지만, 중앙의

직접적인 통제 밖에 놓여 있었다는 점에서는 일품군에 미치지 못하였다.
주현군 가운데 보승·정용·일품은 경·부·군·현 및 속군·속현에, 그리고 이품군·삼품군은 촌에 그 부대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일품군은 향리가 지휘를 맡았으며, 토착적 성격이 농후한 군대였다. 이품군·삼품군은 지방관도

 향리도 아닌, 촌의 촌장·촌정의 지휘를 받았다.


주현군의 정예부대라고 할 수 있는 보승·정용이 외관에 의하여 직접 통솔되고 지휘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

하다. 이렇게 됨으로써 지방 세력의 군사적 기반의 토대는 완전히 와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주현군의

성립은 고려의 중앙집권화 정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안산 지역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안산의 상황이 다른 지역과 별 차이가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안산의 유력자

들도 처음에는 거의 독자적으로 군사력을 배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것이 뒤에 광군으로 편성되면서

중앙으로부터의 제약을 받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광군이 다시 주현군 체제 속으로 재편성됨에 따라 유력자

들이 안산 지역에서 누리고 있던 군사적인 기반은 대부분 붕괴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지휘할 수 있는 부대로서 일품군 정도가 있었겠지만 일품군의 성격은 공역부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공역부대라고 해도 무장을 갖출 수 있는 잠재성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들 위에는 전투부대인 정용·보승을

거느리고 있는 외관이 있었다. 한편 각 촌에는 이품군·삼품군이 촌장·촌정의 지휘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품군·삼품군은 말이 군대이지 실제로는 일반 농민 바로 그것이었다.

4. 지방 세력의 군사적 통제와 안산

 

고려 초기만 해도 지방의 호족들이 거의 반독립적인 입장에서 지방을 통치하고 있었으므로, 군사력을 동원하는

 것도 그들의 뜻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개국 이전, 태조가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 중에서도 지방의

호족들은 독자적으로 군대를 동원했었다.


통일이 일단 마무리된 뒤에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집권적인 체제를 이루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호족들이 지방에 유지하고 있던 군사적 기반은 좀처럼 와해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 군사력을 와해

시키는 것이 중앙 정부의 커다란 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 첫 조치가 광군(光軍)의 조직이었다. 광군은 지방 호족들에 의하여 징집되고 그들에 의하여 지휘되는

농민예비군으로, 광군사(光軍司)라고 하는 통수부를 중앙에 두고 있는 군사조직이었다. 중앙정부는 광군사를

통하여 이 광군을 통수하였는데, 이는 건국 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이 광군은 현종 3년(1012년)에서 현종 9년

(1018년)에 이르는 사이에 주현군(州縣軍)의 일품군(一品軍)으로 개편되었으며, 주·현·군에는 보승(保勝)·정용

(精勇)·일품군 및 이품군(二品軍)·삼품군(三品軍)이 있었다. 이 가운데 보승·정용은 주현군의 지방군

가운데서는 가장 군대다운 군대로서 중앙의 직접적인 군사적 지휘 아래 놓여 있었다. 즉 경군(京軍)의

중앙군과 직결되는 중앙 지휘하의 전투부대적 성격을 띤 병농일치(兵農一致)의 군대였다.


그러나 일품군은 중앙의 명에 의하여 동원되는 부대이기는 했지만, 보승·정용과는 달리 전투나 방위가 아니라

공역(工役)을 위하여 동원되었다. 또한 이품군·삼품군은 노동부대였다는 점에서 일품군과 같지만, 중앙의

직접적인 통제 밖에 놓여 있었다는 점에서는 일품군에 미치지 못하였다.
주현군 가운데 보승·정용·일품은 경·부·군·현 및 속군·속현에, 그리고 이품군·삼품군은 촌에 그 부대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일품군은 향리가 지휘를 맡았으며, 토착적 성격이 농후한 군대였다. 이품군·삼품군은 지방관도

 향리도 아닌, 촌의 촌장·촌정의 지휘를 받았다.


주현군의 정예부대라고 할 수 있는 보승·정용이 외관에 의하여 직접 통솔되고 지휘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

하다. 이렇게 됨으로써 지방 세력의 군사적 기반의 토대는 완전히 와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주현군의 성립은

 고려의 중앙집권화 정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안산 지역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안산의 상황이 다른 지역과 별 차이가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안산의 유력자

들도 처음에는 거의 독자적으로 군사력을 배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것이 뒤에 광군으로 편성

되면서 중앙으로부터의 제약을 받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광군이 다시 주현군 체제 속으로 재편성됨에

따라 유력자들이 안산 지역에서 누리고 있던 군사적인 기반은 대부분 붕괴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지휘할 수

있는 부대로서 일품군 정도가 있었겠지만 일품군의 성격은 공역부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공역부대

라고 해도 무장을 갖출 수 있는 잠재성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들 위에는 전투부대인 정용·보승을 거느리고 있는

외관이 있었다. 한편 각 촌에는 이품군·삼품군이 촌장·촌정의 지휘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품군·삼품군은

말이 군대이지 실제로는 일반 농민 바로 그것이었다.

 

5. 안산 농민의 부담과 안산의 재정

 

고려 시대의 농민들은 토지를 갈아 먹고 그 가운데 일부를 세금으로 냈는데, 자기 소유지를 경작할 때에는

수확물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를 국가에 세(稅)로 바쳤고, 남의 소유지를 빌려서 전작(佃作)할 경우

에는 2분의 1의 조(租)를 물어야 했다.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 사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게는 ‘10분의

1세’를 받아들였고, 국가 소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게는 ‘2분의 1조’를 받았다는 말이 되는데, 이 조세(租稅)

야말로 국가 재정의 기초가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걷어들이는 조세를 공전조(公田租)라고 불렀다. 국가에 세금을 무는 토지를 당시에서는

공전(公田)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반면에,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고 개인으로 하여금 그 세금을 걷어 갖도록

위임한 토지는 사전(私田)이라고 불렀다. 이 사전은 국가에 특정한 직역(職役)을 바치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가령 관리들이나 향리·군인들처럼 국가를 위하여 일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사전을 주어

거기에서 나오는 조세로써 생계를 유지하게 하였다.


한편 사전이든 공전이든 그 경작자는 일반 농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일반 농민 가운데는 공전을 갈아

먹고 조세를 무는 사람도 있었고, 사전을 갈아 먹고 조세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공전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사전의 경우라도 조세는 국가에 냈다. 그러면 국가에서 공전세는 국가재정에 포함시키고,

사전조는 그것을 지급받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농민들에게는 토지를 갈아 먹고 내는 조세 이외에 공부(貢賦)라 일컫는 특산물 납부의 부담이 있었다.

공부에는 별공(別貢)과 예공(例貢)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예공은 한 해에 부담해야 하는 액수가 이미

정해져 있는 공부이고, 별공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정해지는 별도의 공부였다. 공부의 부담은 집집마다

일정한 액수로 정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농민들은 조세와 공부 이외에 역(役)의 부담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요역은 국가권력이 국민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수취하는 것으로, 일반 농민은 이 의무를 피할 수가 없었다. 요역의 부담을 지는 사람들의 연령층은

정(丁)이라고 불렀는데, 정은 만 16세부터 59세까지의 사람을 포함하였다. 농민들의 요역은 궁궐·사찰·관아

 따위를 짓는다든가, 도로를 건설하거나 제방을 쌓는다든가 하는 토목공사를 위하여 동원되는 것이 보통

이었다.


지금까지 고려 농민들의 부담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이는 안산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농민들에게도

사정은 같았을 것이다. 즉 안산 농민들도 토지를 갈아 먹으면서 조세를 물었을 것이고, 특산물을 공부로서

부담하였을 것이다. 아울러 그들은 국가가 필요로 할 때에는 토목공사 등에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지방재정의 실제에 대해서도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시의 지방재정은 오늘날과 같이 예산

제도에 따라 세입을 책정하고 세출을 맞추는 식으로 전문화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세입과 세출의 기본적인

골격은 이때에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가령 인건비, 공공기관의 유지비, 기타 공식행사의 추진·집행에 소요

되는 경비 등이 전혀 준비 없이 이루어졌으리라고는 볼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이 가는 것이 공해전시

이다. 다음 기록들을 잠시 참고해 보기로 하자.


⑴ “주·부·군·현·관·역의 전(田)을 정하였다. 1000정(丁) 이상의 주·현은 공수전(公須田) 300결, 500정 이상은

공수전 150결과 지전(紙田) 15결 및 장전(長田) 5결, 200정 이상은 <결락>, 100정 이상은 공수전 70결과 지전

10결, 100정 이하는 공수전 60결과 장전 4결, 60정 이상은 공수전 40결, 30정 이상은 공수전 20결, 20정 이하는

공수전 10결과 지전 7결 및 장전 3결로 하였다. 향·부곡(鄕·部曲)으로 1000정 이상은 공수전 20결, 100정

이상은 공수전 15결, 50정 이하는 공수전 10결과 지전 3결 및 장전 2결로 하였다.”55)
⑵ “여러 주·부·군·현·역(驛)·노(路)에 공수시지(公須柴地)를 지급하였다. 1000정 이상은 80결, 500정 이상은

60결, 500정 이하는 40결, 100정 이하는 20결로 하고, 12목은 정의 많고 적음을 논하지 않고 100결로 하고,

지주사(知州事)는 비록 100정 이하라도 60결로 하였다.”56)


주·부·군·현과 향·부곡으로 나뉘어 지방에 공해전시가 지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속군·속현도 ‘주·부·군·현’의

범위에 넣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아닐 것이다. “12목은 정의 많고 적음을 논하지 않고 100결로 하고,

지주사는 비록 100정 이하라고 하더라도 60결로 하였다(위의 기록 ⑵ 참조).”는 사실은 ‘주·부·군·현’에 외관이

파견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향·부곡이 똑같은 1000정이라도 주·부·군·현과 300결 대 20결의 현격한 차이가 있었던 것(위의 사료 ⑴

참조)은 양자의 지위의 차이라기보다는 외관이 파견되었는지의 여부에 의한 것으로 믿어진다. 지방의 재정이

지위에 따라서 정해질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또한 행정단위의 지위로 따진다면 역의

지위는 향·소·부곡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향·부곡과 같은 때에 정해진 지급 토지의 크기는 대로역(大路驛)

공수전 60결과 지전 5결 및 장전 2결이라고 있듯이, 1000정 이상의 향·부곡보다 월등히 많다. 그 이유는

역(驛)의 씀씀이가 컸기 때문이다. 반대로 향·부곡의 씀씀이는 적었던 것이다. 씀씀이가 적었다는 것은 역시

외관의 파견에 수반하는 갖가지 비용이 들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말해 준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속군과

속현은 외관이 파견된 ‘주·부·군·현’이 아니고, 외관이 없는 ‘향·부곡’에 준하는 공해전시를 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안산현은 속현이었으므로 향·부곡의 경우에 준하여 공해전시가 주어졌을 것이다. 향·부곡의 경우,

50정 이하의 가장 작은 규모라도 공수전 10결과 지전 3결 및 장전 2결이 지급되었으므로(위의 사료 ⑴ 참조)

안산현도 그러하였거나, 많아야 조금 더한 정도였을 것이다.


아무튼 공해전시는 지방재정의 기초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아무래도 세입의 주요 원천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세입은 어떠한 항목으로 지출되고 경리되었을까. 위의 사료에서 나타나는

공수전·지전·장전이라는 표현이 그대로 지출 항목을 말해 주고 있다. 이 가운데 장전은 향리의 인건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설정된 토지였고, 지전은 문자 그대로 사무용 종이를 조달하기 위하여 지급된 토지였다.

실제에 있어서는 종이뿐만이 아니라 행정사무를 처리하는 데 소요되는 문방구의 경비는 모두 여기에서

염출되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다음으로 공수전의 용도는 공해, 즉 공공기관(관아 포함)의 유지에

소요되는 기본 경비를 위하여 설정되었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농민들의 공과(公課)·공역(公役) 가운데서 지방재정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역시 공수전으로부터 거두어

지는 조세의 수입이고, 다음으로는 무상으로 수취되는 요역이었을 것이다. 요역의 일부는 중앙으로 수취

되기도 하였지만 지방에 있어서의 부담이 좀더 많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요역은 그 자체가 재화(財貨)일 수는

 없지만, 요역의 실질적인 내용인 노동력은 재화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조세와 공부는

원칙적으로 모두가 중앙으로 조달되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지방재정의 궁핍 정도에 따라 어느 정도는 지방

재정으로 돌려졌을 가능성도 있다.

 
이와 같은 지방재정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일반론에 입각한 것이기는 하지만, 안산현의 경우도 당시의 지방

재정이 보여 주고 있는 보편적인 면모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를 통해 헤아려 보아도 별 착오는

없을 것이다.

 

6. 역참제와 안산

 

고려는 일찍이 역참제(驛站制)의 실시를 통하여 거의 전국적인 도로망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정치·군사·

경제상 요로에 설치된 역에 의하여 서로 연결되는 역로(驛路)이기도 하였다. 교량이 없는 하천에는 진(津)이

있어서 도선(渡船)의 임무를 맡고 있었고, 진에는 진척(津尺)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전체적인

도로망의 연결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역에 거주하면서 참역(站役)이라고 하는 특정한 부담을 지고 있던 사람들을 흔히 역민(驛民)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법제적으로는 역호(驛戶)로 파악되었으며, 이 역호에는 역리(驛吏)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일반

역민과 마찬가지로 참역의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역민과 역리가 맡는 참역의 형태는 각기 달랐다. 역리는

노역의 직접 담당자는 아니었다. 역리는 일반 역민의 우두머리로서 이들에 대한 노역의 분배·수취·감독 따위의

일을 주관하였다. 매 역에 배치되는 역리의 수는 역의 크기에 따라서 2~3명 정도였다.


역민이 지고 있는 참역이란 요역의 한 형태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국가의 명령을 전달하거나

국가의 중대사, 특히 군사적 긴급 상황을 보고하는 따위의 일이었다. 이 밖에도 생산물의 운반이 중요한 업무

였다. 역은 교통량의 크기, 군사·경제의 중요성에 따라서 대·중·소의 3등급으로 구분되었다. 이에 따라 공수전·

지전·장전이 차등 있게 지급되었다.


각 역에는 일정한 수의 관마(官馬)가 준비되어 역의 기능을 가능케 하였다. 예를 들면 관원이 공무로 지방에

가는 경우, 일정한 수의 말을 빌려 타고 갑역에서 을역으로, 다시 을역의 말을 타고 병역까지 가는 식으로

목적지를 찾아갔다. 「고려사」 82 병지 2 참역에는 참역의 계통이 모두 기재되어 있는데, 여기에 실린 역로의

간선은 모두 22도(道)이고 참역의 총수는 525개소에 달하였다.


그런데 안산 지역의 역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 시대가 되면, 안산에 석곡역이 있었지만 그러한 역이 「고려사」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료에 그 기록이 누락될 수도 있고, 또 아예 역이 안산 지방에는 없었을 수도

있다. 아마 후자가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비록 이곳에 역은 없었지만 안산이 인근의 큰 고을에 있는

역을 통하여 전국의 도로망과 연결되었을 것이다.

 

7. 침략에 대한 고려인의 항쟁

 

(1) 대외관계와 외래족의 침입


고려에 대한 외래족의 침입은 고려의 대외관계라고 하는 좀더 넓은 시야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외관계가 순조롭지 못할 때에 외래족의 침략이 있어 왔기 때문이다. 고려의 대외관계는 시기적으로 보아

무신란(武臣亂) 이전의 전기와 그 이후의 후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전기의 대외관계는 상대 국가(민족)에 따라서, 첫째 거란(契丹)과 여진(女眞)과의 관계가 있고, 둘째 송(宋)

과의 관계가 있다. 먼저 거란 및 여진과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들과의 관계는 고려가 건국 초기

부터 북진정책을 써서 영토를 확장코자 했던 사실을 돌려놓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태조는 후백제·신라를 통일·통합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의 야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태조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태조의 북진정책이 처음으로 구체화된 것은 서경경영

(西京經營)에서부터였다. 그는 즉위 원년에 황주·봉주·해주 등 황해도 지방의 백성을 평양에 옮겨 살게 하여

이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삼고 사촌동생 왕식렴(王式廉)을 보내어 관할케 하는 한편, 뒤이어 서경으로

승격시켜 자주 순행하면서 성곽을 수축하였다. 이 서경을 중심으로 서북 지역을 개척하고 계속 북진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고려의 영토가 대체로 청천강 유역까지 확대될 수 있었다.

태조는 서경으로 천도하고자 마음먹은 일조차 있었을 정도였다. 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겠다는

태조의 강인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태조의 북진정책은 그가 발해유민(渤海遺民)에 대하여 포용하는 자세를 취하였다는 것과도 깊은 관계를

갖는다. 발해는 거란에게 멸망되었는데, 그 유민들이 대거 고려에 와서 귀순하였다. 태조 때만 해도 발해의

세자 대광현 이하 수만의 무리가 고려에 망명하여 왔다. 이들에 대한 태조의 대우는 극진하였다. 대광현의

경우만 보더라도 태조는 그에게 왕계(王繼)라는 성명을 사하여 종실의 호적에 편입시켜 주었고 높은 관직도

주었다.


그런데 태조의 북진정책은 그렇게 순조롭게만 진행될 수는 없었다. 거란이 점차 강력한 세력으로 북방에서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란은 고려보다 2년 앞서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 의하여 건국되었는데,

점차 이웃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면서 세력을 확대하여 갔다. 거의 동시에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는 두

왕조는 처음에는 서로의 대외관계에서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 양국의 관계는 그런대로 사신의

교빙이 이루어지는 등 제법 원만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관계는 잠시뿐이었다.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어느 정도의 여력이 생기자 거란과의 국교를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렸다. 표면적인 명분은 발해를

까닭없이 멸하였다는 것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북방정책의 수행에 방해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태조 25년에

거란이 사신(使臣)을 보내오자, 사신 30명을 유배 보내고, 낙타를 굶어죽게 한 일은 유명하다.


태조는 국교 단절에 머물지 않고 거란을 아예 징벌할 계획까지 갖고 있었다. 그의 북진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일전도 불사한다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후진(後晋)과의 거란 협공을 생각했지만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태조의 거란에 대한

적대의식은 대단했다. 죽을 때에도 10훈요(訓要) 가운데 제4조에 ‘거란은 금수의 나라’라고 규정하여 언어·

제도를 본받지 말도록 일러 둘 정도였다.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해야 한다는 정신에서 북진정책이 채택되었고, 이 같은 정신과 정책은 태조를 이은 여러

왕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의 추진에서 맞닥뜨린 나라가 거란이었다. 거란과의 긴장

상태는 태조 이래로 계속되었으며, 그 긴장 상태는 마침내 거란의 선제공격에 의하여 전쟁 상태로 변하였다.


거란은 전후 세 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하였는데, 그때마다 내침의 명분이 제시되기는 하였지만, 따지고 보면

양국의 전쟁은 고려의 집요한 북진정책의 추진과, 그것이 필연적으로 야기한 거란의 위기의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고려는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무난히 격퇴하였다. 그것은 고려의 치열한 항쟁을 통한

결과였다. 이 항쟁의 기록이 우리 민족사에서 빛나는 대외투쟁사의 한 대목이 되고 있음은 모두가 주지하는

사실이다.


한편 고려의 북진 길목에서 고려와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던 민족이 여진이었다. 여진은 거란에 비하면 그렇게

신경을 건드리는 세력은 되지 못하였다. 여진은 북방의 여기저기에 산재해 국가도 형성하지 못한 채로 고려를

문명국가로 높이 받들었고, 고려는 이들을 주로 회유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회유정책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

었다. 때에 따라서는 무력으로 응징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진이 금(金)을 건국하자 고려와 금의 관계는 고려와

거란 사이에서 볼 수 있었던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양국 사이에 긴장 상태가 시작된 것이다. 다만 금과의

사이에서는 이렇다 할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거란·여진과의 관계보다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할 나라는 송이었다. 송과 고려는 각기 일정한

기간의 혼란을 수습한 새로운 왕조로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발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송은

오랜 문화적 전통을 이어받은 선진문명국이었으므로 그에 대응하는 고려의 태도는 남달랐다. 고려는

조공(朝貢)이라는 특유의 방식으로 송과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그 관계가 비교적 평화적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으며, 송은 또한 고려의 문화적 욕구를 적절히 충족시켜 주었다.


후기에 접어들면서 고려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이웃에 두게 되었다. 북방의 몽고족(蒙古族)이 흥기하여

세계적인 대제국 원(元)을 건설했던 것이다. 몽고족과 고려는 강동성(江東城)에 있는 거란군을 공통으로

토벌하면서 첫 접촉을 하였으며, 이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양국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런데 몽고가 고려를 속국으로 생각하여 갖가지 힘겨운 공물(貢物)을 요구해 오자 고려는 이에 반발했으며,

둘 사이에는 불화와 긴장이 시작되었다.


압록강변에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가는 몽고의 사신이 피살되면서 양국 사이의 국교가 단절되고,

뒤이어 몽고의 고려에 대한 기나긴 침략의 막이 올랐다. 고려는 몽고의 침략에 단호히 항전을 결의하고,

강화에로의 이도(移都)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였으나, 끝내 고려는 몽고에게 복속해야 했다.


항전의 반세기는 외래민족의 침입에 대한 민족의 끈질긴 저항을 유감없이 보여 준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인적·물적 희생을 무릅쓴 것이었다. 몽고에 복속된 뒤 고려는 몽고의 정치적 간섭을 받아야만 했지만,

양국의 관계는 대체로 평화공존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고려는 말엽으로 치닫는 어간에서 또 다른 민족의 침입 앞에 당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홍건적(紅巾賊) 및

왜구(倭寇)의 침입이 그것이다. 특히 왜구의 침입은 고려의 멸망에까지 일정한 영향을 줄 만큼 막대한 피해를

강요하였다. 왜구는 일본의 중앙정부에 의해 파견된 군대가 아니라 한낱 해적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침략이 야기한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혼란은 매우 커서 고려의 최후를 재촉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려의 대외관계는 전기에서는 거란·여진 및 송과의 관계였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몽고·왜구와의 관계가 두드러졌다. 이 가운데 송과의 관계를 제외하면 고려는 다른 나라들과 대체로 긴장

관계를 지속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거란·몽고 및 왜구와의 관계는 피나는 투쟁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투쟁의 역사는 한결같이 거란·몽고·왜구 등의 외래족이 침입해 옴으로써 단초가 열렸다.

 

(2) 몽고의 침략과 안산민의 저항


몽고군은 세계 정복전의 일환으로 고려에 침입하였다. 몽고는 전후 여섯 차례에 걸쳐 침입해 왔지만

고려는 이에 항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우(崔瑀)의 무인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결사적인 항전을

꾀하였다. 무인정권의 이러한 강인한 의지도 중요했지만, 전 계층이 합심하여 침략자를 격퇴하였다.


안산 지역에도 침략자의 발길이 비켜갔을 리 없고, 이 지역 사람들이 싸움을 마다했을 리도 없다.

그러나 관련 자료가 없어 그러한 상황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다만 몽고와 화친관계가 이루어져

개성 환도가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는 ‘삼별초의 난’에 호응하여 궐기한 대부도민의 사례가 있을 뿐이다.


원종 11년 조정이 몽고와 결탁해 개경 환도를 결정하자, 삼별초는 이에 반대하여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배중손을 중심으로 왕족 왕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새로운 관부(官府)를 세웠다. 삼별초는 곧 강화도를 떠나

진도를 새로운 거점으로 삼아 몽고군과 정부군에 맞섰으며, 진도 이외에 제주도를 포함한 남해안 일대에

세력을 뻗쳤다. 삼별초가 남부 지역에서 독자적 세력을 뻗치자 내륙 지역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농민·천민들의

집단적 움직임이 일어났다. 원종 12년에는 경상도 밀양에서 박경순 등이 군민을 불러모아 밀양 등지의 수령의

목을 베고 경상도 지역을 점거하면서 삼별초에 내응하였다. 밀양인들의 봉기에 뒤이어 개경에서는 관노인

숭겸(崇謙) 등이 무리를 모아 몽고에서 파견된 다루가치와 개경 조정의 고위 관직자를 살해하고 진도 관부에

투항하고자 하였다.


개경에서의 봉기 소식이 전해지자 대부도 주민들도 궐기하여 몽고인 6명을 살해하였다. 물론 대부도민들도

진도의 삼별초 관부에 합세하고자 하였다. 끝내 진도 관부는 몽고군과 정부군의 토벌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안산 지역 대부도민들의 봉기는 침략군에 대한 저항으로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57)

 

8. 고려의 불교와 안산

 

(1) 화엄종과 경덕국사


신라 말 국가의 불교 통제가 무너지고 후삼국을 거치면서 다원적인 불교 세력이 형성되었다. 태조는 당시의

불교계를 적극 보호한다는 이념을 내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하였으나, “신라의 불교사원에 대한 통제가 무너지고

귀족과 토호들이 원당(願堂)이란 명목으로 사원을 무질서하게 창건함으로써 나라가 망하였다.”고 훈요(訓要)

로써 다음 왕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는 건국과 더불어 불교계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베풀어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태조는 훈요의 둘째 조에서 사원은 각각의 종파를 고수하고 이들 간에 서로 바꾸거나 빼앗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였다.


태조는 다원적인 종파의 존재를 인정하고, 종파는 고유성을 가지고 소속된 사원은 같은 종파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불교계는 물론 국가에 유익하다는 방향을 제시한 셈이다. 태조가 다종파를 인정한 것은 국가의

불교계에 대한 통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였다고 추측된다. 그 결과 고려에서는 여러 개의 종파가

현실적으로 존재하였다. 화엄종(華嚴宗)·유가종(瑜伽宗)·천태종(天台宗)·선종(禪宗;조계종<曹溪宗>) 등이

그러한 예였다. 그리고 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우세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화엄종이었다.


고려의 화엄종은 의상(義湘)과 원효(元曉)에 의하여 완성된 교학불교(敎學佛敎)에 기원하였다. 통일신라

시대의 학파 시대를 지나, 신라 말에 의상과 그의 계승자에 의하여 창건된 지방 사원을 중심으로 수도인 경주의

통제를 벗어나 종파로서의 독립성을 지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는 하나의 종파로서

화엄종을 인정하였다.


고려의 화엄종은 법왕사(法王寺)와 귀법사(歸法寺)와 같은 중앙사원을 중심으로 광종 때 왕권 강화에 크게

기여하면서 가장 우세한 종파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균여(均如)와 탄문(坦文)은 고려 초기 화엄학의

대가였으며, 왕권의 강화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여 준 대표적 화엄 승려이기도 했다.

 

그후에도 화엄종에서는 안산 출신인 김은부(金殷傅)의 아들인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爛圓)과 같은 여러

왕사·국사를 배출하였는데, 특히 고려 중기에는 왕자나 종실에서 출가한 고승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외척 문벌

세력에 의하여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왕자로서 화엄종에 입문한 대표적인 이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었다. 의천은 화엄종의 승려로서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의 가르침을 받고

활약하였지만, 그는 그 뒤 천태종을 개창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였다.


무신란 이후 화엄종은 무신정권에 저항하는 문벌의 후예들과 연결되어 여러 차례 도전하다가 종세가 크게

약화되었고, 지방에 기반을 둔 사원과 고승에 의하여 겨우 종세를 유지해 왔으나 공민왕(恭愍王) 집권기에

이르러서는 종세가 더욱 침체하였다. 이렇게 보면 고려의 화엄종은 주로 고려 전기에 크게 떨쳤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고려 전기에 화엄종은 왕권을 중심으로 국민의 단합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 화엄종에서 안산에 본관을 둔 김은부의 아들인 김난원이 한때 그 종파를 대표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는 것은 안산 지역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김난원58)은 앞서 이미 이야기

한 바 있듯이 김은부의 둘째아들로, 목종 2년(999년)에 태어나 문종 20년(1066년)에 죽었다.

 

그는 문종 19년(1065년)에 왕사에 임명되어 문종의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죽은 뒤에는

승려의 지위로서는 가장 높은 국사(國師)에 추봉(追封)되었고 경덕(景德)의 시호를 받았다. 그는 화엄종의

인맥으로 보아도 고려 초기 화엄의 대가였던 균여와 탄문에 이어 특히 문종 치세에 화엄종 최고봉의 지위와

권위를 누렸다. 그리고 그는 휘하에 많은 제자를 두었다. 원경왕사와 의천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2) 천태종과 대각국사


고려에서는 여러 종파를 모두 인정하였지만 실제로는 교종(敎宗), 특히 화엄종에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족적 기반 위에서 성장한 고려에서 선종(禪宗)도 여전히 만만치 않은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려의 불교계는 교종과 선종이 양립하는 형세에 놓여 있었으며, 그들의 편집에서 오는

분열과 대립이 있었다. 이러한 분열과 대립을 정리하여 불교계를 혁신하려고 한 데에서 천태종이 성립되었다.


천태종은 원래 광종(949~975년) 때 「천태4교의(天台四敎儀)」를 지은 체관(諦觀) 등에 의해서 주창되었다.59)

그러나 그들은 고려에서보다 중국에서 주로 활약하였으므로 고려에서 종파를 세우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독립된 종파로서 천태종을 성립시킨 사람이 바로 의천이었다.

 

의천은 그의 자(字)이고 본명은 왕후(王煦)였는데, 문종 9년(1055년)에 문종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숙종 6년

(1101년)에 죽었으며 대각은 그의 시호였다. 문종이 김은부의 외손자였으므로 의천은 김은부의 외증손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출가하여 선생으로 모신 김난원, 즉 경덕국사와도 혈연 관계에 있었다. 의천 쪽에서 보면

김난원은 아버지(문종)의 외삼촌이 되는 사람이었다.


이렇듯 의천의 출생도 안산 김씨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는 문종 19년(1065년) 당시 왕사였던 화엄학의

거장 김난원에 의하여 정식 승려가 되고 그에게서 불교(특히 화엄학)를 배웠다. 그러므로 그의 불교의 바탕은

화엄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천의 특성은 화엄에 그치지 않고 그 밖의 여러 분야에 걸쳐 불교를 두루

섭렵하였다는 데 있다. 그는 심지어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에 이르기까지도 깊이 공부한 바 있었다.


의천은 마침내 송나라에 유학해서 불교를 계속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 특히 화엄과 천태를 열심히 배우고

귀국하였으며, 교종(특히 화엄종)과 선종이 대립하여 있는 불교계의 혁신을 도모하였다. 즉 그는 교종과 선종의

일치를 주장하였고, 잡념을 멈추고 마음을 집중시켜 바른 지(智)로써 사물을 관조하여 그 본체를 밝히는 지관

(止觀)을 중요시하는 천태종을 폈다. 이에 이르러 고려의 불교는 비로소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의천은 천태종을 열면서 선종 9산의 뛰어난 인재를 모집하였는데, 이것이 선종을 자극하여 선종 종래의 9산을

해체하고 조계종을 성립시키게 되었다.
여하튼 의천에 의하여 성립된 천태종은 그 세를 크게 떨쳐 나갔다. 의천이 거느린 문도(門徒)만도 덕린·익종·

경란·연묘 등 3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문도들이 의천 이후의 천태종을 이끌고 나갔음은 말할 것도 없다.


후기에 이르러 천태종은 중앙보다는 지방에서 더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실천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이다. 전남에 있었던 만덕산의 백련사(白蓮寺;만덕사<萬德寺>)는 천태종의 대표적

사찰이었는데, 고려 후기에 민중을 교화하는 실천종교로서의 천태종을 상징해 주던 사찰이기도 하였다.60)

그러나 고려 후기의 천태종이 민중과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천태종은 중앙의 귀족들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귀족들의 세속적 이익 추구의 염원을 당시의 천태종은 외면하지 않았던 것이다.

 

(3) 유가종과 수리사


유가종(瑜伽宗)의 중심 경전은 「금광명경(金光明經)」·「심해밀경(深海密經)」 등이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유가종이 중시한 것은 유가론(瑜伽論)과 유식론(唯識論)이었다. 이 점에서 중국의 자은종(慈恩宗)과

 같았다. 또한 유가종은 고려 시대에는 일명 자은종(慈恩宗)이라고도 불리었다.


유가종은 신라의 원효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뒤 경흥·태현·진표로 계승되어 고려로 넘어왔으며, 고려에 와서

비로소 종파로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가종의 세력은 고려 초기에는 크게 떨치지 못하다가 현종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크게 융성하기에 이르렀으며, 현종 이후 당대의 문벌 안산 김씨와 인주 이씨의 비호와 후원을

받아 발전하였다.

 

더욱이 안산 김씨와 인주 이씨는 모두 왕실의 외척으로서 국왕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유가종은 문벌귀족

뿐만 아니라 왕실의 각별한 배려 속에 크게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현종은 진전사원(眞殿寺院)으로

지목하여 현화사(玄化寺)를 창건했는데, 이 현화사가 유가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그러나 인종 중기 이후에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나면서 인주 이씨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유가종도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그 뒤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비록 종파로서의 위치는 잃지 않았지만 그 세력을 떨치지는 못하였다.


유가종과 관련해 고려 시대에 가장 중요한 사찰은 현화사였다. 현화사는 앞서 언급했듯이 진전사원으로 현종이

창건한 절이었다. 현종은 아버지 안종의 묘를 경상도 사천에서 개경의 영취사 아래로 옮겼으며, 아버지를 위하여

가까운 곳에 진전사원으로서 유가종 사원인 현화사를 개창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종이 현화사를 얼마나

중시했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 이후 현화사는 유가종의 중심 도량이 되었으며, 유가종의 고승들은 대부분 만년에 현화사의 주지를 역임하는

것이 상례처럼 되었다. 물론 그렇게 안 되었다 하더라도 유가종의 고승들은 생애에 적어도 한 번쯤은 이곳

주지를 맡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만큼 현화사는 유가종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찰이었다.61)


현화사 이외에 유가종 사원으로 중요한 것은 해안사·천흥사·수다사·삼천사·월악사·수리사·법천사·금산사

 등이었다. 이 중 수리사(修理寺)는 안산의 수리산에 있었다. 수리사는 고려 중기 유가종의 고승

관오(1096~1158년)가 주지한 적이 있었던 사찰이었다. 이 수리사가 고려 중기에 어떻게 유가종의 유력한

사찰이 될 수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현화사가 현종의 각별한 배려를 받아 유가종의

중심 도량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현종은 어째서 유가종에 관심이 많았을까. 그는 즉위 전 위태로울 때 유가종 사원에서 보호를 받은

적이 있었다. 즉 그는 쫓기는 입장에서 오늘날 서울 근교에 있는 삼각산의 유가종 사원인 장의사·신혈사 등에서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원들이 인주 이씨와 안산 김씨와 일찍이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인주 이씨가 그러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인주 이씨는 대대로 유가종 승려를 배출해 온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삼각산은 인주나 안산이나 어느 쪽으로 보아도 이웃해 있던 근접 지역이었다.


그렇다면 수리사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수리사는 아예 안산에 있었으므로 특히 안산 김씨와 전부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안산 김씨와 왕실이 밀착되면서 유가종의 수리사는

 더욱 커다란 후원 세력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9. 고려 후기의 안산

 

안산현은 현종 9년 이후 중앙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안산현은 수주(水州)에 예속된 속현의 지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종 때에 이르러 이러한 예속 관계에 변화가 오게 되었다. 안산 지역이 경기

(京畿)에 편입되면서 개성부(開城府)의 관할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하여

다음 기록을 참고해 보기로 하자.


“문종 16년에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를 부활시켜 도성(都城)에서 관장하고 있던 11현을 여기에 예속케

하였다. 또 ……우봉군을 이에 예속시켰다. 충렬왕 34년에 부윤(府尹) 이하의 관리를 두어 도성 안을 관장케

하고 따로 개성현(開城縣)을 두어 성밖을 관장케 하였다. ……공양왕 2년에 경기를 나누어 좌·우도로 하고,

장단·임강·토산·임진·송림·마전·적성·파평으로써 좌도를 삼고, 개성·강음·해풍·덕수·우봉으로써 우도를 삼았다.

또 문종의 옛 제도에 의거하여 문종 23년 정월에 양광도의…… 과주·인주·안산·금주…… 등의 주·현을 경기에

속하게 하였다. 양광도의 ……안산·교하·양천·금주·과주 ……를 좌도에 속하게 하고,

양광도의 부평·강화 ……를 우도에 속하게 하고 각각에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두었다.”62)


위의 사료를 보면 문종 23년 1월에 안산이 경기에 속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경기는 문종 16년에

지사를 장관으로 하는 개성부가 부활되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개성부의 관할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충렬왕 34년에 이르러 개성부는 도성 안만 관장하게 되고, 성밖의 경기를 위해서는 별도로 개성현을

설치하였다. 그러니까 문종 16년 이래 개성부의 지휘를 받던 경기가 충렬왕 34년 이후에는 따로 설치된

개성현의 관할로 넘어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는 경기를 좌도와 우도로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처음으로 좌도·우도로 나누어진 경기를 보면, 여기에 안산이 빠져 있다. 물론 안산만이

빠진 것이 아니라 문종 23년에 경기에 포함된 지역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해당 지역 대부분은 애초부터

경기에 속해 있던 곳이었다. 물론 이들 처음부터의 경기를 좌도·우도로 나누고, 이어서 안산 등 문종 23년에

편입된 지역도 좌도·우도로 나누어 이에 속하게 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경기를 나눌 때, 본래의 경기 지역과 문종 23년에 그곳에 편입된 지역을 구별하여 취급하였다는 점,

특히 후자의 경우를 문종의 옛 제도에 따라서 처리한다고 한 점, 이 사실을 협주를 사용하여 따로 기록하고

있는 점 등 모두 우연한 일일 수는 없다. 그것은 안산이 문종 23년에 경기에 편입되었다가 어느 때인가 그것이

해체되었고, 그 상태가 공양왕 2년의 조치 때까지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요컨대 안산은 문종 23년 1월에 경기에 편입되었지만, 그 뒤 언제쯤인가 그 편입이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그 시기를 갑자기 알아낼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공양왕 2년이 되어 안산은 다시

경기에 편입되었고, 경기 가운데에서도 좌도에 속하여 이곳의 장관인 도관찰출척사의 지휘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중앙과 연결될 수 있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지금까지는 안산의 상하 예속 관계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어떻게 변천하였는가 하는 점을 보아 왔다. 이제 남은 문제는 시대가 변하여 후기가

되면서 이 지역의 지위가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자.


“안산현은 ……현종 9년에 와서 속하였다. 뒤에 감무를 두었다. 충렬왕 34년에 문종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에

올려 지군사(知郡事)로 하였다.”63)
위 사료는 우선 현종 9년에 안산현이 수주(수원)에 속현으로 예속되었음을 일러 준다. 속현의 지위에 있는 한

중앙관이 장관으로 부임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 뒤 안산현에 충렬왕 34년 이전 언제인가에

감무가 임명되었다. 감무는 “예종 3년에 여러 작은 현에 감무를 두었다.”64) 고 한 점으로 보아, 예종(睿宗) 3년

이후에 두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안산현은 예종 3년에서 충렬왕 사이의 어느 때인가에 두었다는 말이 된다. 감무는 작은 규모의 현에

두는 것이라고 하였다. 안산현은 작은 현으로 간주되어 처음으로 감무가 부임되어 오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 지위를 올려 주는 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안산현은 감무가 두어진 뒤에 다시 한 번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되었다. 즉 충렬왕 33년에 군으로 승격되었고, 이곳에 지사(知事)가 임명되어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안산이 문종의 탄생지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안산군이 지사의 다스림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고려 말까지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홍승기(편찬위원)

 

 




천년 사찰 북한산 삼천사지 베일 벗다
 
역사박물관 "삼천사지(三川寺址) –발굴에서 전시까지" 유물전시

 

 

 

 
▲     © 은평시민신문
세월 속에 묻혀있던 역사의 흔적은 어떻게 발굴되고 복원되어 지금, 현재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 그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유물전시가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2월 22일까지 열리는 발굴유물특별전 "삼천사지(三川寺址) –발굴에서 전시까지"다.
 
삼천사지 유물 전시전은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김우림)이 지난 2005년부터 2007년 말까지 북한산 증취봉 인근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 1-1번지 일원 소재) 삼천사(三川寺)지 탑비구역 일대를 발굴 조사한 성과인 유물 15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발굴과정, 유물 복원 과정 엿볼 수 있어
 
박물관은 단순 유물 전시에 만족하지 않고, 삼천사 터 탑비 구역 주축 건축물인 '탑비전'(塔碑殿)을 3차원 입체 모형으로 복원해 현장의 생생한 느낌을 살렸다. 삼천사지 터 과거의 모습을 3D 영상으로 복원하는 한편, 발굴조사 현장의 모습을 동영상 자료로 생생하게 담았다. 어떤 과정을 거쳐 유물들을 수습하고 보존 처리했는지 자세한 사진 자료도 곁들였다.
 
유물만 전시하지 않고 발굴 과정도 엿볼 수 있는데다 도자기 파편 등 발굴 유물이 어떻게 처리되어 복제, 복원되는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  녹슬고 찌그러진 청동유물을 어떻게  보존처리하여 복원하는지, 복원후 조사가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 은평시민신문
▲  유물 복원 보존처리 과정에 사용한 각종 기구들이 무엇인지도 알려준다.   © 은평시민신문
▲  청자상감유문매병.  조각조각 나 있는 발굴상태, 어떻게 접합하고 복원하는지를 볼 수 있다.    ©은평시민신문
지난 12월 27일 역사박물관 사종민 조사연구과장은 유물전시 현장에서 은평향토사학회 등 일반 관람객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갖고 "큰 바위 아래 부서진 대지국사탑비의 흔적을 찾기 위해 기계장비나 전기 등 문명의 이기를 일절 사용할 수 없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오직 인력에만 의존하여 바윗돌을 끌고 굴렸다. 3년 동안 찌는 더위, 장대비, 혹한을 견디며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며 작업했다."며 "붓으로 흙을 털어내며 하나의 파편을 찾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작업한다."고 발굴 과정을 설명했다.
 
또한 "유물 보존 처리부서가 있는 박물관은 역사박물관을 포함하여 10개가 되지 않는다. 산산조각 난 파편 조각들을 엑스레이로 찍고, 복제, 복원하고, 찌그러진 청동을 세척하며 새롭게 명문을 발견하기도 한다."며 유물 보존처리와 연구가 병행되고 있음을 설명했다.
 
▲   은평향토사학회 회원과 삼천사지 유물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한 관람객들을 위해 지난 12월 27일 하루 특별히 유물조사과정에 참여했던 사종민 역사박물관 조사연구과장이 나와 안내와 설명을 하고 있다.  © 은평시민신문
▲  열심히 메모하며, 깊은 관심을 보이는 관람객들   © 은평시민신문
천년 고찰 삼천사(三川寺) 베일을 벗다

 
삼천사지(三川寺址)는 원효대사가 창건한 이후 존속되다가 임란 이후 폐사되었다고 전해지나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 고려사>, < 동국여지승람 >, < 북한지 > 등에 극히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번 발굴조사는  255점의 명문 비편과 탑비전으로 추정되는 고려 전기 건물지를 새로 확인했다. 기록이 부족하여 베일에 쌓여있던 북한산 삼천사지 및 고려전기 법상종 승려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게 된 점이 큰 성과라고 역사박물관측은 밝혔다.
 
삼천사지는 폐사된 이후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의 폐허화된 상태이며, 그나마 사찰의 흔적으로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보물657호)과 대지국사탑비(大智國師塔碑)의 귀부(龜趺)와 이수 정도가 옛 삼천사의 자취를 전해주고 있었던 것.
 
김우림 역사박물관장은 법보신문 기고문에서 "문헌기록에 단편적으로 전해오는 역사적 사실을 대지국사 비문을 통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헌자료에 실려 있지 않은 새로운 자료도 다수 발견되어 사료가 부족한 고려시대사 연구에 있어 촉매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기대된다."며 "가히 고려시대 유물의 보고라 할 수 있는 삼천사지 출토유물은 그 동안 베일에 가려진 채 숨어 왔던 고려시대 삼천사를 환생시키고 공백상태에 있는 남경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종민 조사연구과장도 "고려시대 유물 특히 전기 유물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그 흔적을 찾았다는 게 의미가 있다. 대지국사탑비 발굴 규모는 삼천사지 본 사역의 1/10도 되지 않는다. 삼천사지터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면 훨씬 큰 성과가 있을 것 "이라고 말했다.
 

▲  255점 명문 비편 가운데 하나의 모습   © 은평시민신문
대지국사탑비 명문 비편과 고려시대 유물들 다수

 
대지국사 법경은 왕사에 이어 국사를 지냈고, 고려 현종(1009∼1031)대에고려 법상종의 종찰인 개경 현화사의 초대지주를 지냈으며, 고려 전반기 법상종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활동을 입증해줄 유일한 자료인 비문이 일찍이 파손되어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해왔다. 이번 조사로 총 255점(630여자)의 명문 비편이 수습되어 고려전기 불교사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는 것.
 
▲ 석조보살두 사진 출처: 역사박물관 홈페이지     ©
명문 비편이외에도 이번 조사에서는 지름 8.9cm, 높이 8.3cm의 청동사리합이 출토됐는데 사리합의 양식 및 연대로 보아 대지국사 법경과 연관된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지금껏 출토된 적이 없는 특이한 형태의 보살두가 발견돼 주목을 끌고 있다. 3.7㎝의 소형 보살두로 고려시대 유물이다. 삼불부관(三佛寶冠)에 입술 일부와 화불(化佛) 일부에 붉은 채색을 하였으며, 머리 부분에도 검은 채색을 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5불이나 7불을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석조 보살두는 특이하게도 3불을 표현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한국에서 출토된 바가 없어 불교미술사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가순궁주의 명문이 새겨진 금니목가구편도 함께 출토됐다. 목가구편의 겉면 칠기막에 금니로 ‘가순궁주왕씨’라는 문구가 남아있어, 이 가구편의 연대가 13세기경임을 알려주고 있다. 고려사에는 가순궁주가 고려 21대 희종의 4녀로서 신안공 왕전(~1261)과 혼인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은제투각칠보문장식(銀製透刻七寶文裝飾)은 은제투각칠보문구슬 3개와 청동제 16화형(花形)고리 1개, 3개의 사다리꼴 장식편으로 구성됐다. 구슬 일부에서 금색이 관찰되는데 이는 은으로 구슬을 만든 후에 표현에 금도금한 흔적으로 추정된다. 유사한 장식이 국립중앙박물관 동원기증품과 일본 동경박물관 오쿠라 컬렉션에 남아 있다. 
 
▲  은제투각칠보문장식   ©은평시민신문
사종민 조사연구과장은 “고려시대 장식문화, 궁중문화를 알 수 있으며, 일본인 오쿠라가 도굴된 유물을 값싸게 수집해 화차 두 대 분량에 이르는 많은 유물을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오쿠라 컬렉션에서 수집한 물품이 가야, 신라시대 뿐 아니라 고려시대 유물도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자칫 지루하기 쉬운 유물전시회, 북한산 증취봉 아래 삼천사지 터를 둘러보고 발굴에서 전시까지 과정을 한 눈에 들여다보는 전시를 접한다면 아이들에게는 물론 어른들도 우리 지역의 문화유적에 각별한 관심이 생기지 않을까 여겨진다.
 
 김우림 역사박물관장의 설명 중에서

삼천사지로 가기 위해서는 은평구 진관내동의 대한불교 조계종 삼천사 주차장을 지나 삼천리골로 들어가야 한다. 삼천리골에서 문수봉 방향으로 약 10분 가량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길 왼편 산자락에 대웅전 등 삼천사의 주요 건물이 있었던 삼천사 사역(寺域)이 나타난다. 1968년 당시, 북한 무장공비의 1·21사태로 이 일대가 민간인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삼천사지 사역에 중대규모의 군대 막사가 세워지고, 연병장을 조성하면서 넓고 편평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발굴 대상지는 이 등산길에서 부왕동암문 방향으로 20분 가량 더 올라가서 증취봉 아래 산중턱에 있는 대지국사 탑비유적이다.
 
삼천리골 등산길 곳곳에는 기와편과 도기편이 발에 밟힐 정도로 많이 흩어져 있다. 또한 삼천사 주차장에서 약 30분간 올라가면 그곳에도 옛 삼천사의 건물지가 있는데, 이러한 유물과 유적의 흔적은 진관내·외동을 비롯한 북한산 일대가 고려시대 삼천사의 사역이었음을 증명한다. 

['09.1.9 은평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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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평구] 삼천사

은평구 진관외동 북한산 서쪽 기슭에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건립한것으로 알려진 삼천사(三川寺)가자리잡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산 정상 부근에있었는데 임진왜란때 불에타 지금의 자리에다시 지었고, 한국전쟁때 또절 일부가 파손돼 1960년대 들어 현재의 모습으로 고쳐 지었다.

경내에는 석종탑과 5층탑이 보존돼 있고, 대웅전 위쪽 30㎙ 지점에는 보물 제657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이 바위에새겨져 있다.

3.02m 높이의이 마애상은 고려초의 조각기법을 나타내고 있어조성연대를 11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애불로 1.5㎞가량정상 쪽으로 오르다 보면 울창한숲속에 방대하게 흩어져있는 삼천사의 옛터를볼 수 있다. 아직도 거대한 석축과 주춧돌등 당시의 석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출처 : 한국일보(2001.6.13)



 

 

 

북한산 삼천사지(三千寺地) - ①

삼각산 삼천사지
지금은 은평구 진관외동인 속칭 북한산 삼천리골에 삼천사가
세워져 있다. 이 삼천사의 원래 절터를 찾아가기로 한다.
10여 개에 달하는 북한산의 폐사지는 거의 산성(山城)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데, 삼천사지는 산성 바깥에 있으며 산내에서도
역사가 가장 오래된 사찰이기도 하다. 폐사지를 대하는
서글픔이야 어느 경우이건 마찬가지지만, 학술적인 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사지를 보노라면 더욱 큰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삼천사지 역시 그런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과연 어느 곳이 삼천사의 원래 절터였는지, 또는 삼천사의 규모는 어느정도에 달했는지
문제에 대하여 그 어떠한 결론도 내리기 어려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삼천사지마애여래입상
4백년 폐사에도 얇기만한 연구성과

우선 삼천사와 관련한 여러 기록을 바탕으로 조사를 벌이는 가운데 삼천사의 정확한 사찰명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三川寺'와 '三千寺'라는 표기상의 혼동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단편적인 내용의 내용이지만 <고려사>와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川'자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삼천사와 관련한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삼천사 대지국사비(大智國師碑)'의 비편에서도 '川'자로 표기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이로 본다면 삼천사의 본래 이름은 '三川寺'로 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언제부터 '千'자로 표기하는 사찰명이 등장하였을까? 우리는 1745년(영조21)에 편찬된 <북한지(北漢誌)>라는 자료에서 처음으로 '千'자가 사용되었다는 점을 알아낼 수 있었따. 1711년 북한산성을 축조할 때 팔도 도총섭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던 성능(性能)스님이 지은 이 책자는 북한산성에 대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여기에 '三千寺'라는 표기가 처음 등장하고 있다. '三川寺'는 18세기 무렵부터 '三千寺'로 바뀌었고, 그것이
현재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삼천사가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폐사의 모습으로 변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오래
전부터 폐사된 것은 분명한 듯하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 모두 삼천사가 폐사로
남아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1530년부터 1745년 사이에는 폐사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삼천사의 중창과 관련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므로 적어도 4백여년 간 지금과 같은 황폐한 모습으로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4백여 년에 걸쳐  이 산을 오르내리던 수 많은 사람들이 초라한 삼천사지를 보면서 계속 지나쳐
버린 일을 생각하면 실로 안타까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근대 이후에 몇몇 학자들이 삼천사지를 주목하게 된 계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불우조의 "삼천사는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대지국사비명(大智國師碑銘)이 있다"라는 기록에 나오는 대지국사비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삼천사지를 주목했던 것이다.
그 첫번째 시도는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이루어졌는데,
일본인 학자 금서룡(今西龍)을 비롯한 조사단 일행이 근처까지 왔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나
현장답사를 단념하고 돌아갔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들은 <大正 5년도 고적조사보고>라는 책자를 통해 삼천사지의 중요성과 그 위치 등을
나름대로 정리해 놓았으며, 대지국사비의 몇몇 조각들이 <대동금석서>, <해동금석원> 등의
금석문 책자에 수록되어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동안 삼천사지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63년부터 3년 여에 걸쳐 진홍섭(秦弘燮)·
정영호(鄭永鎬)·최순우(崔淳雨) 선생 등에 의해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대지국사비의
조각편들을 다수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 때 발견된 비편들을 판독한 내용이 최순우 선생에 의해
발표된 바 있지만 이후로 최근까지 더 이상의 연구는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글/ 김상영(중앙승가대 교수), 최태선(경북대 박물관 연구원)
자료 출처 - 대중불교 149호(1995-4)

 

 

 

베일벗은 천년사찰 북한산 삼천사지 > 지난연재 > 베일벗은 천년사찰 북한산 ..
베일 벗은 북한산 삼천사지
ⓛ 흩어진 역사 파편 맞춰 옛 모습 찾은 고려 성지
기사등록일 [2007년 12월 03일 14:41 월요일]
 

서울역사박물관 김 우 림 관장 특별기고


지난 11월 5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 1-1번지 삼천사지(三千寺址) 탑비

구역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대지국사 법경 스님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명문비편 등

10~13세기 고려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삼천사는 661년 원효 스님에 의해 창건된 후 법상종의 중심사찰로 11세기

고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크게 융성했다가 임진왜란 이후 폐사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북한지』 등에 극히 간략한 언급만 남아있을 뿐

이에 관한 문헌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삼천사지가 모습을 드러낸 것. 삼천사지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서울역사박물관 김우림 관장이 상세히 소개한다.  편집자

<사진설명>삼천사지탑비구역 전경. 증취봉 능선 중단부(해발 342.4m) 일단을

정지하여 탑비전지와 대지국사탑비를 세웠다.


<사진설명>탑비전지 근경. 삼천사지 본사역을 바라보며 남서향 하고 있는 건물지로

원형주초와 고맥이석을 이용하여 건물을 축조했다. 정면 3칸, 측면 1칸 정도의 규모

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서울은 수도 개경과 더불어 3경(京)의 하나인 남경(南京)

이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길지(吉地)라 평가되어 고려시대 내내 천도(遷都)를 대비하여

궁궐과 객사 및 향교, 사찰 등 많은 도시 시설들을 계획하고 건축했다.

특별히 국교로 공인된 불교 사찰이 남경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역대 왕들의

행차가 빈번히 이루어졌다.

<사진설명>청동사리합. 양식 및 연대로 보아 대지국사 것으로 추정되나 아쉽게도 내부 사리구 등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고려시대 남경의 사찰로는 승가사, 진관사,

삼천사, 중흥사, 태고사, 미타사

등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의 사찰은 개경이 아닌

남경의 북쪽 변두리 북한산을 중심으로

 한 곳에 있었다.

남경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나 외곽지역에

있었던 점이 특이하다.

고려시대 사찰은 천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중창(中創)이나 신축을 통해 가람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일부 사찰은 폐사되어 터만 남아 있거나 사찰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석물(石物) 몇 점씩만 남아있는 경우도 흔하다.

북한산의 중흥사지와 삼천사지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중흥사지는 최근 발굴조사에서 사찰의 역사와 성격이 규명되었으며,

조사과정에서 발견된 유구에 대한 보존대책을 세우고 있다.

 

고려시대 주요사찰 삼천사 발굴

그러나 삼천사지는 폐사된 이후 축대와 일부 석물 이외에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의 폐허화된 상태이며,

그나마 사찰의 흔적으로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보물657호)과

대지국사탑비(大智國師塔碑)의 귀부(龜趺)와 이수 및 지면에 노출된 일부 건물지 유구

정도가 남아 있어 옛 삼천사의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

특히 삼천사지 탑비가 있던 자리에는 당당한 귀부와 이수가 남아 있음에도

아직까지 이렇다할만한 조사가 진행되지 않고 그나마 남아있는 석물이 계속 훼손되고

있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서울시 전역에 산재하는 문화유적에 대한

지표조사를 하였다.

조사 결과 수많은 유적을 찾아내었고, 조사 내용을 토대로 서울시 문화유적 분포지도와 DB를 구축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유적의 훼손 정도가 심해 조사가 불가피한 유적을 대상으로 시·발굴조사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첫 번째 발굴 대상지로 북한산 삼천사지 탑비가 있는 구역을 선정하고,

문화재청으로부터 학술발굴조사 허가를 받아 2005년 9월 12일부터 2007년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삼천사지로 가기 위해서는 은평구 진관내동의 대한불교 조계종 삼천사 주차장을 지나

삼천리골로 들어가야 한다.

조계종 삼천사의 한문 표기는 ‘三千寺’로서, 이는 고려시대 법상종 삼천사(三川寺)와는

관련이 없는 절이다.

현재의 三千寺 경내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마애여래입상 한 구가 있는데 이 입상은

고려시대 三川寺와 연관 있는 불상이다.

 

삼천리골에서 문수봉 방향으로 약 10분 가량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길 왼편 산자락에 대웅전 등 삼천사의 주요 건물이 있었던 삼천사

사역(寺域)이 나타난다.

1968년 당시, 북한 무장공비의 1·21사태로 이 일대가 민간인출입금지구역

으로 지정되면서 삼천사지 사역에 중대규모의 군대 막사가 세워지고, 연병장을 조성

하면서 넓고 편평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발굴 대상지는 이 등산길에서 부왕동암문

방향으로 20분 가량 더 올라가서 증취봉 아래 산중턱에 있는 대지국사 탑비유적이다.

삼천리골 등산길 곳곳에는 기와편과 도기편이 발에 밟힐 정도로 많이 흩어져 있다.

또한 삼천사 주차장에서 약 30분간 올라가면 그곳에도 옛 삼천사의 건물지가 있는데,

이러한 유물과 유적의 흔적은 진관내·외동을 비롯한 북한산 일대가 고려시대 삼천사의

사역이었음을 증명한다.

 

얼핏 보아도 방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고려시대 삼천사는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고, 가람은 어떻게 배치하였을까.또 삼천사가 배출한 인물은 누구이고, 고려시대 삼천사는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던 절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갖게 될 법하다.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 매우 제한돼 있다. 우선 폐사로 말미암아 폐허가

된 상태인데다 폐사 이전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문헌 사료가 거의 없는 실정이기 때문

이다. 가장 기본적인 사료인『고려사(高麗史)』에조차 삼천사 기록은 단 두 줄뿐이다.

고려 현종 정묘 18년(1027) 조에 “삼천사의 승려들이 금지된 것을 범하여 술을 빚은

쌀이 합계 360여 석이오니 청컨대 법에 따라 처단하소서 하거늘 이를 받아 들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유일한 삼천사 관련 기록이다. 삼천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지리서에서도 일부 올라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

비고(東國輿地備攷)』등에 보면 삼각산에 삼천사가 있는데, 거기에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대주국사비명(大智國師碑銘)이 있다는 정도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대지국사비명이다. 바로 삼천사의 성격을 규명할 수 있는 단서인 것이다.

 

국사(國師)는 고려시대 승직(僧職)의 최고 권위이다. 통상적으로 왕사(王師)를 거쳐

국사로 임명받는데, 이곳에 대지국사비명이 있다는 것은 삼천사와 대지국사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시 말하면 삼천사의 승려가 국가로부터

 국사로 인정받았으며, 이 승려를 기리는 비를 삼천사에 세우게 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법상종 사찰…주지는 법경 스님

<사진설명>대지국사탑비 귀부. 높이

 137.5㎝, 넓이 240㎝, 길이 270㎝크기로

 용의 머리와 흡사하며, 배면(背面)

귀갑문에 ‘王’字 문양이 새겨져 있다.

또한 1027년에 삼천사의 승려들이 술을 빚었다는 기사에서 적어도 1027년 이전에 삼천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지국사는 법경(法鏡) 스님을 일컬으며, 삼천사의 주지를 지냈다. 그는 삼천사에 있는 동안 왕사가 되었으며, 이후 국사의 자리에까지 올라가 개경 현화사(玄化寺)의 초대 주지를 지냈다는 내용이 개경 현화사비명(1021년)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처럼 소략한 문헌자료를 보충해 줌으로써 산산이 흩어진 역사의 궤적을 바로 맞출 수 있게 하는 실물 자료가 바로 명문비편(銘文碑片)이다. 언제 누가 무슨 까닭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대지국사탑비의 비신은 이미 산산이 깨어져 사방에

 흩어진 상태였다. 조선시대에 이곳을 방문했던 선비들이 지표에 드러난 비편 일부를

수습하여 소개한 적이 있고, 1960년대 국립중앙박물관이 제보를 받고 현장에 나가

비편 일부를 발견하고 이를 보고한 자료가 있지만 삼천사의 성격을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얻어낸 최대의 성과는 고려시대 거대사찰 삼천사의

성격과 법상종의 태두였던 대지국사 법경의 이력을 밝힐 수 있는

다량의 명문비편을 수습한 것이다.

<사진설명>대지국사탑비 이수. 앞뒷면에

 각각 두 마리 용을 대칭적으로 배치했으며,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는 장면을 운문과

더불어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비편의 내용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삼천사는 고려시대 법상종(法相宗)의 사찰이다. 법상종은 유식종(唯識宗) 또는 중도종(中道宗)이라고도 불리었으며, 법상종의 경전으로는 『제심밀경』, 『성유식론』, 『유가사지론』등이 있다. 우주 만유의 본체보다도, 현상을 세밀히 분류하여 설명하는 종파이다. 신라의 원측(圓測) 스님이 중국 당나라의 현장(玄奬) 스님으로부터 배워 와서 신라에 도입한 이후 경덕왕(景德王) 때인 8세기에 진표 스님이

금산사에서 이 종파를 크게 중흥시켰다고 한다.

고려시대 전기에는 대부분의 사찰이 법상종 계열이 되었을 정도로 당시 고려 최고의

종파중의 하나였다. 익히 알려진 개경 현화사도 법상종의 사찰이며, 이 절의 초대

주지였던 대지국사 법경은 두 말 할 나위 없는 법상종 승려였다.


927호 [2007년 12월 03일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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