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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연원(淵源)/안산의 유래, 市史

안산의 삼국시대

by 연송 김환수 2009. 5. 9.

 

 

 

 

제2절 삼국 시대

 

1. 고고학적 측면에서의 삼국 시대 안산

 

(1) 삼국 시대 전사(前史)


안산 지역과 그 주변 지역에서 나타나는 고대 국가 성립기의 증거는 많지 않다. 안산과 시흥 지역에서 나타난 고고학 유물들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남긴 유적인 고인돌 무덤은 비교적 넓은 지역에 걸쳐 확인되고 있지만 그 수는 많지 않다. 안산시 안에서는 양상동·월피동 등지에서 고인돌 무덤이 발굴되었다. 초기 철기 시대 유적으로는 초지동에 있는 별망패총과 신포동 패총에서 이른바 김해식 토기들이 나왔지만 대규모 유적은 아니고, 뚜렷한 문화층으로 구분되지도 않았다.


사료상에 등장하는 삼한(三韓)의 국명(國名)을 통한 연구에서도 안산 지역은 위치 비정에서 제외되어 있는 형편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는 마한(馬韓)에 50여 개의 나라가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그 가운데 경기도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라들은 분명하게 그 위치를 알 수는 없으나 대개 14개국이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원양국(爰襄國)·모수국(牟水國)·상외국(桑外國)·소석색국(小石索國)·대석색국(大石索國)·우휴모탁국·신분활국·백제국(伯濟國)·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일화국(日華國)·고탄자국(古誕者國)·고리국(古離國)·노람국(奴藍國), 욕리모로국(浴離牟盧國) 등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안산 지역과 가까운 곳으로 비정되는 곳은 화성군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양국과 상외국, 그리고 수원 지역으로 비정되는 모수국이 있다11). 그러나 모수국을 양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어서 아직 확실한 것은 알 수 없고12), 안산 지역에 비정되는 나라는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2) 사료에 나타나는 삼국 시대의 안산


안산이 사료상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삼국 시대이다. 삼국 시대의 안산은 본래 백제 땅이었으나, A.D.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 정책을 펴 고구려가 한강 이남까지 점령하자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때 안산은 고구려 지명으로는 장항구(獐項口)라고 했다. 그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경덕왕 때에 이르러 장구군(獐口郡)이 되었고, 고려 때에 안산현(安山縣)으로 개칭되어 오늘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면 “장구군은 본래 고구려의 장항구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개명한 것으로 지금의 안산현이다(獐口郡 本高句麗獐項口 景德王改名 今安山縣 <「三國史記」 卷三五>).”라고 하였고, 또한 “장항구현은 다른 이름으로 고사야홀차라고 한다(獐項口縣 一云 古斯也忽次<「三國史記」 卷三七>).”라는 기록이 있다.


지명 연구 결과를 보면 장항구(獐項口)에서 장(獐)은 ‘노루’, 항(項)은 ‘목’, 구(口)는 ‘고지, 곳’이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장항구를 ‘노루목곳’으로 풀어 내고 있다. 고구려 때 장항구현의 읍치가 있었던 장곡의 지세가 노루의 입처럼 생겨 이름을 장항구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고사야홀차는 ‘곧은곳’으로 풀었다.13)


아무튼 안산은 고대 국가 초기에 백제의 영역 안에 있었다. 백제(百濟)는 마한의 소국인 백제(伯濟)가 성장하여 고대 국가로 발전한 나라였다. 고구려에서 내려온 유이민들과 토착 세력이 힘을 합하여 한강 유역에서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백제는 B.C. 18년부터 한강 유역을 점유하고 있었는데,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을 받아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는 A.D. 475년까지 493년 동안 한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시기를 한성 시대라고 한다.

 

 한성 시대의 백제 도성은 위례성(慰禮城)이었는데, 처음에는 하북 위례성에 있다가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한 사실이 사료상으로 확인되었다.


위례성의 위치, 그 중에서도 하남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었다. 정약용이 광주고읍설(廣州古邑說)14)을 주장한 이래로, 춘궁리로 주장하는 설15)이 있었고, 서울 강남 일대의 성터에 주목하여 풍납리 토성을 하남 위례성으로 보는 경우16)와 이성산성으로 보는 경우17), 그리고 몽촌토성을 지목하기도 하였다.18)


이제까지 백제의 한성 시대 도읍지로 추정되는 지역과 고고학 발굴 성과를 종합·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19)
첫 도읍지였던 하북 위례성은 중랑천 일대로 비정되며, 온조왕 4년(B.C. 5년)에 천도한 하남 위례성은 몽촌토성이 유력한 것으로 나타난다. 근초고왕 26년(A.D. 371년)에 한산(漢山)으로 천도하였는데, 한산에 대해서는 이성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위와 같은 연구 결과를 놓고 볼 때 오늘날 안산 지역은 한성 시기 백제의 도읍지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특히 근초고왕 시대 이후 백제가 중앙집권 국가로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안산 지역도 백제의 지방 조직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안산 지역이 백제의 지방 조직으로 어떻게 편입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사료상의 증거가 없어 밝혀 볼 수 없다.


백제 개로왕 21년(A.D.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을 받아 도읍을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으로 옮기게 되면서부터 백제 역사에 있어서 웅진 시대를 맞게 되었고, 한강 유역의 땅을 고구려에 넘겨 줌으로써 안산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고구려의 장수왕은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고, 남쪽으로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백제 도읍인 한산성을 무너뜨리고 개로왕을 잡아 죽이는 등 백제 세력을 남쪽으로 밀어냈다. 이때 고구려는 중원 지역의 죽령 일대에서부터 서쪽으로 남양만까지의 지역을 확보하였다. 장수왕 63년(A.D. 475년) 시대부터 고구려 영토로 편입된 안산 지역은 성왕 29년(A.D. 551년)에 백제가 다시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기까지 고구려 영토 안에 들어 있었다.


백제 성왕은 사비(泗;지금의 부여)로 천도하고 국가 제도를 정비하여 한강 유역의 옛 땅을 수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신라와 힘을 합해 고구려를 쳐서 한강 하류의 옛 땅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2년 뒤에는 신라와의 동맹 관계가 깨지면서 신라에게로 넘어가 신라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이 바로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내용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서해를 통해 중국과 교류를 하면서 국력을 키워 갔는데, 그 과정에서 남양만에 있는 당항성(當項城)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항성은 신라와 중국과의 교류에 있어서 중요한 거점이 되었겠지만, 또한 안산 지역과 그 인근에 있는 군자산성과 성곡동 성 등 삼국 시대 성들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지방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지방 조직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아우른 뒤 새로 편입된 지역을 합하여 9 주로 정비하였다. 신라·백제·고구려 땅에 각각 3개씩 주를 두었는데, 지방 조직에 있어서 주의 비중은 매우 컸다.


주의 장관은 군주라 했는데, 태종 무열왕 때 이를 도독으로 고쳤고, 신문왕 때에 이르러 다시 총관이라 불렀다. 9주 가운데 한산주는 광주에 치소가 있었고, 안산 지역은 한산주 관할에 들어 있었다. 주 밑에는 군과 현이 있어 군에는 태수(太守), 현에는 소수(小守) 혹은 현령(縣領)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이와 같이 신문왕 5년(A.D. 685년)에 정비된 지방 통치 조직으로 보면, 안산 지역은 한주(漢州) 소속의 장구군이었고, 장구군에는 중앙에서 군태수가 파견되었을 것이다.

 

(3) 고고학 자료로 본 삼국 시대의 안산


지금까지 안산 지역 일대에서 확인된 삼국 시대 유적·유물은 많지 않다. 사료에 나타난 대로 안산 지역은 처음에는 백제 땅이었다가 고구려에 잠시 편입된 뒤에 다시 백제, 그리고 신라에 속하게 되었으므로 당시의 유적·유물들이 증거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조사된 바로는 삼국 시대 성터가 몇 곳에서 알려졌을 뿐, 고분이나 생활 유적은 아직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고분으로 추정되는 몇몇 유적이 조사되고는 있으나 앞으로 더 정밀 조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백제와 관련된 유적·유물은 안산 주변 지역에서 조금씩 드러나고 있어 앞으로 안산 지역에서도 백제 유적이 나타날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주변 지역에서 나타난 발굴 성과를 아울러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성 시대 백제와 관련된 유적·유물로는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확인되고 있다. 먼저 무덤 양식으로 볼 때 석촌동에 남아 있는 기단식 돌무덤(석총)과 토광 무덤, 독무덤(옹관묘), 석곽무덤 들이 있는데, 돌무덤은 기단식 돌무덤과 함께 단은 없고 방추형 또는 방대형의 분구를 이루고 있다. 돌무덤은 원래 고구려의 전통 무덤이었다. 이는 압록강·혼강·독로강 유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덤 형식으로, 고구려 유이민들이 한강 유역에 이르러 백제 건국 과정에 참여하면서 백제 무덤 형식의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백제 영역안에서 확인된 돌무덤들은 남한강 유역에서 제원 양평리·도화리·교리, 그리고 평창 여만리·응암리에서 확인되었다. 북한강 유역에서는 화천 간척리, 춘성 산천리·중도 등에서 나왔고, 양평 지역으로 오면 문호리·양수리·금남리 일대에도 돌무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최근에 연천 삼곶리에서도 새로 확인되어 앞으로 돌무덤의 분포는 더 넓은 지역에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안산 지역 인근에 있는 의왕 청계리 토골에서도 돌무덤으로 생각되는 고분이 나타나 앞으로 조사 결과가 기대된다.


이들 돌무덤들은 조사 결과 중도·양평리·도화리의 것이 B.C. 2~3세기 경에 만든 것이고, 문호리의 것은 3세기, 석촌동에 있는 기단식 무덤은 3호와 4호가 4세기~5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20) 백제 한성 시기의 전 기간에 걸쳐 돌무덤을 만들어 썼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돌무덤의 분포 상황은 백제 초기 기록에 나타나는 대로 백제 영역이 동으로 주양(走攘;지금의 춘천), 남으로 웅천(熊川;지금의 안성천), 북으로 패하(浿河;지금의 예성강)에 걸쳐 있었다는 기록과 잘 들어맞는 것으로 나타났다.21)


돌무덤과 함께 움무덤(토광무덤)도 한성 시대 백제 무덤 양식을 대표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서울 석촌동·가락동, 청주 신봉동에서 대규모 무덤군이 조사되었는데, 이들 무덤은 땅에 움을 파고 관을 묻거나 때로는 옹관을 넣는 경우가 있었다. 석촌동의 경우에는 돌무덤과 움무덤이 함께 있어 백제 건국 세력과 토착 세력이 서로 다른 무덤을 썼던 증거로 보기도 한다.22) 청주 신봉동에서는 움무덤과 수혈식·횡혈식 석실 무덤이 함께 나왔다.23)


석실 무덤도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고 석곽무덤은 화성 백곡리에서 조사된 이후, 최근에는 화성 마하리에서 백제의 대규모 석곽 무덤이 드러나 독특한 무덤 양식과 토기·구슬 등 다양한 유물을 보여 주고 있다.
다음으로는 안산 지역과 그 인근에서 확인된 삼국 시대 유적·유물 조사 성과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양상동 토기 산포지


마을 사람들이 원후터밭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삼국 시대 토기와 기와 조각들이 채집되었다.24) 토기는 삼국 시대 회청색 경질토기가 대부분인데, 몸체에 두드린 격자무늬가 있고 입술 부분에 두 줄의 띠가 돌아갔으며, 밖으로 바라진 입술 등 기법이 다양했다. 적색토기도 1점 나왔고, 토기와 같은 질의 기와편도 한 점 보였다.

 

2) 월피동 고분


월피동의 다리피 마을 서남쪽에서 고분으로 생각되는 유적이 확인되었다.25) 봉분은 높이가 150cm이며 둘레는 타원형으로 넓은 곳이 600cm에 이르렀다. 주변에서 삼국 시대의 토기편과 기와 조각들을 채집했는데, 토기들은 그릇 바닥 부분, 입술 부분, 몸체 부분 들이 있었다. 기와는 숫기와 깨진 조각들로 두드려 찍은 격자무늬가 있었다. 봉분 위에는 잡목이 몇 그루 있었고 주위에는 돌들이 여러 개 흩어져 있었는데, 그 돌들이 고분에서 나온 것인지 주변에서 옮겨다 놓은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3) 월피동 토기 산포지


월피동 관덕산 동남 기슭에서 삼국 시대 토기편과 기와편이 40여 점 나왔다. 토기들은 그릇 두께가 4~5mm 정도로 얇은 편이었고, 바닥은 지름이 15cm쯤 되었고 편편하였다. 입술 안쪽으로 두 줄의 띠가 돌아가는 것도 있었고, 자연유가 묻어 있는 토기 입술 부분도 1점 보였다.

 

4) 고잔동 토기 산포지


적금 마을과 태봉 마을의 중간 지점인 갯머랭이 밭에서 삼국 시대 토기편이 채집되었다.26) 토기편 8점을 채집하였는데 두께 7mm 정도 되는 입술 부분은 회청색 경질토기였으며, 입 지름이 15~17cm 정도 되었다. 몸통 부분도 있었는데 두께는 3mm 정도로 얇았고 겉면에 띠줄이 보강되어 있었다.

 

5) 신포동 토기 산포지


삼국 시대 회청색 토기가 채집되었다. 두께 4~5mm의 얇은 것과 10mm 안팎의 두꺼운 것 등 여러 가지였다. 작은 토기와 큰 토기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바닥은 납작 바닥이고 입술은 밖으로 바라진 형식이었다.

 

6) 부곡리 백제 토기 포함층 유적


신갈-안산 외곽순환도로 건설 공사 때 확인되어 발굴한 유적이다. 지표 조사를 통하여 선사 시대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는 여러 가지 토기들을 발굴·채집하였다.27) 발굴 결과 삼국 시대 백제 토기들이 들어 있는 문화층을 확인하였고, 움을 파고 만든 야외 노지 형태의 구조물이 1기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토기가 들어 있는 지층은 겉흙층 아래로, 흑갈색 사질토의 아래 부분과 그 밑에 있는 흑갈색 사질염토층에서 백제 토기들이 나왔다.28)

토기 종류는 적갈색 연질토기, 흑색 연질토기, 회청색 경질토기 등이었다. 적갈색 연질토기는 삼발형 토기로서 풍납리 토성에서 나온 바 있는 조질 유문토기와 같은 것이었고, 흑색 토기는 한강 유역의 백제 초기 유적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회청색 경질토기는 곧은 목을 가진 단지에 어깨 아래로 삿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 등 그릇꼴이 여러 가지였다. 바라진 입술이 있는 단지, 굽단지, 뚜껑 달린 단지 등이 보였다.

 

적갈색 토기 가운데는 완형토기와 소뿔형 손잡이도 보였다. 회색 연질 토기는 단지류가 대부분으로 이 유적에서 가장 많이 나온 토기였는데, 몸체에는 격자 무늬와 삿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부곡리 유적에서 나온 토기들은 대체로 한강 유역에서 나온 백제 초기 유적 출토품과 비슷한 시기의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간혹 늦은 시기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유적의 성격이 분명하지 못하고 유물이 많지 않아 정확한 성격을 밝힐 수는 없으나, 삼국 시대 백제 사람들이 남긴 것은 분명한 것으로 드러났다.

 

7) 의왕 청계리 토골 고분


청계사로 가는 토골 마을의 길가에서 돌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확인되었다.29)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성황당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돌을 쌓은 구조가 뚜렷하게 나타나 무덤으로 보고 있다. 고분의 봉분 바깥으로 막돌이 둥글게 돌아가면서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돌무덤(적석총)으로 추정되는데, 고분의 지름은 5~6m, 높이는 3~4m였다. 백제 무덤 혹은 고구려 무덤일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었다. 추후 정밀 조사로 구조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8) 성곡동 성터


안산시 성곡동 해봉산 정상부에 있는 삼국 시대 성터이다.30) 해봉산은 바닷가에 있는 해발 48m 안팎의 작은 구릉으로 게의 발처럼 생겼다고 하여 해봉산(蟹峰山)이라고 하는데, 정상부에 흙으로 쌓은 성이 있다. 해봉산은 일명 성두산이라고도 하는데, 남양만과 화성 송산에 있는 당성(唐城)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요충지이다. 현재 군부대가 있어 자유롭게 들어가 볼 수는 없으나, 산 정상부는 평탄한 대지를 이루고 있으며 경순왕을 모시던 성황당이 있었다고 한다. 성터의 흔적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일제 시대에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둘레가 약 200칸이 되는 토루(土累)의 흔적이 남아 있고, 구비(구전)에 의하면 고구려 장항현(獐項縣)의 폐지(廢址)라고 한다.”라고 하였다.31) 그리고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는 “장항구현 군서 30리(獐項口縣 郡西三十里)”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성곡동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문헌 기록과 현장에서 출토되는 유물들로 볼 때 고구려 장항구현의 치소(治所)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海雲山在府西二十里海雲山烽燧北慶安山郡吾匕耳島南應念佛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의 해운산은 해봉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해봉산은 남양부에서 서북쪽 20리에 있다. 지형 조건이나 위치로 보아 성으로서의 기능과 함께 해안으로 연결되는 봉수 기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터는 뚜렷하지 않지만 유적에서 여러 가지 토기들이 채집되었는데 삼국 시대 토기들이었다.

 

입이 바라지고 무늬가 없는 회색 경질토기·회색 연질토기(시루) 및 겉면이 흑회색이고 입술을 덧붙여 만든 흑회색 연질토기, 그리고 회청색 경질토기·흑회색 경질토기 등이 보였다. 이와 같은 삼국 시대 토기와 더불어 후대의 유물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삼국 시대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정밀 조사를 통하여 유적의 성격을 제대로 밝혀야 할 것이다.

 

9) 목내리 성터


안산시 원초동에 있는 토성으로 일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32) 이는 반월공업지구 개발 지역 안에 있는 문화유적 발굴 조사의 일환으로 1978년 9월에 이루어진 발굴 조사였다.


산성은 목내동을 중심으로 주위의 산 능선을 따라 쌓았는데, 산성 안에 마을이 있었고 그 마을을 능안이라고 불렀다. 마을 노인들의 말로는 바닷물이 능안까지 들어왔었다고 한다. 성은 목내동과 초지동 사이에 표고 40.8m, 73m, 57.8m의 산 능선과 목내동과 성곡동 사이에 표고 48m, 93.8m, 85.2m의 산 능선, 그리고 목내동 입구에 위치한 성안(표고 87m) 등 천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쌓았다. 산성 서쪽에 올라가 보면 성곡리 마을을 지나 멀리 서해안과 남쪽으로 바다가 보인다. 지형상 남쪽이 낮아 출입구처럼 보인다.


조사 당시 성의 높이는 2~3m, 너비는 위쪽이 2m, 아래쪽이 5m 안팎으로 남아 있었다. 토축 산성으로 주위의 흙을 모아 쌓았으므로, 외벽은 2~3m까지 남아 있는 곳도 있었으나 안쪽은 흔적만 남아 평평하였다. 산성을 따라 삼국 시대 토기편들이 많이 흩어져 있었다.

 

이 산성은 남양만의 해로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화성에 있는 당성과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에 있는 군자산 산성과도 가깝게 있어 삼국 시대 해안 방어의 거점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발굴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삼국 시대 토기편을 비롯해 고려 및 조선 시대의 토기·자기·청동 유물들이었다. 현재 목내리 성터는 반월공단 조성 이후 지형이 많이 변하여 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10) 군자산 성터


군자산 정상에 테뫼형으로 쌓은 석축성이다.33) 군자산 정상에는 성황당이 있는데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산 정상부에 평지가 있고 그 주변으로 돌아가면서 돌과 흙으로 쌓은 성이 남아 있다. 성안에 있던 성황당 터는 지금 흔적만 남아 있다.


해발 198.4m의 정상부에 있는 성은 둘레가 211.5m로 작은 편이며, 성으로서보다는 봉수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성 안 북쪽에 큰 구덩이가 있고 남쪽에는 문지가 있다. 군자산성에 있는 성황당은 신라 경순왕과 관련된 것이라는 전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군자산성은 삼국 시대 신라가 중국과 교류하면서 남양만을 지키는 중요한 거점으로 이용했던 성으로 여겨진다. 성 안에서 나온 유물로는 회색 연질토기, 회청색 경질토기 등이었다.

배기동(편찬위원)

 

 

2. 역사학적 측면에서의 삼국 시대 안산

 

(1) 백제 시대의 안산


오늘의 안산은 고려의 안산현에 해당하는데 「고려사(高麗史)」 지리지를 보면,34) 안산현은 수주(水州;현재의 수원)의 속현으로 나와 있다. 삼국 시대 초기에는 이 수원 일대가 백제의 영역이었으므로 안산(安山)을 포함한 수원 일대가 백제 시대에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백제(百濟)는 마한을 구성한 54개 성읍국가(城邑國家)의 하나인 백제(伯濟)가 성장하여 발전한 나라이다. 그러나 이 백제국의 기원과 그 연맹왕국으로서의 성장 과정을 단정지어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23 온조왕 본기에 실려 있는 백제의 시조 전설에 의하면, 그 시조는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의 둘째 아들 온조(溫祚)인데, 그는 부여에서 주몽의 맏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오자 형인 비류(沸流)와 함께 남쪽으로 망명하여 한강 유역에서 형제가 각기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비류가 미추홀(彌鄒忽;인천)에 나라를 세운 반면에, 온조는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을 쌓고 백제의 모태가 되는 십제(十濟)를 건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 비류가 미추홀에서 국가경영에 실패하여 죽은 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위례성에 합류하게 되자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고 고쳤다고 한다.


한편 같은 책에 시조를 비류로 잡은 별전(別傳)이 실려 있는데, 주몽은 온조의 의부(義父)이며 백제의 건국자는 온조의 형인 비류였다는 것이다. 즉 온조 형제의 생부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인 우대(優台)이며 어머니는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인데, 우대가 죽은 뒤 주몽이 졸본으로 망명해 와 고구려를 세우게 되어 소서노가 그에게 개가하였다는 것이다. 그 뒤 주몽의 맏아들이 와서 태자로 책봉되자, 비류는 온조와 그 무리를 이끌고 미추홀에 이르러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백제의 건국자와 그 출신에 대하여는 각기 다른 설이 있다. 그러나 어떻든 그 시조 설화가 고구려의 건국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어느 한 세력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였던 것이다. 백제가 세워진 연대에 대하여는 「삼국사기」에 B.C. 18년으로 나와 있다. 아마도 성읍국가로서의 백제는 이보다 앞섰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그 다음 단계인 연맹왕국(聯盟王國)으로서의 백제는 이보다 뒤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의 첫 도읍지인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 왔다. 정약용(丁若鏞)은 최초의 위례성을 서울의 북한산 동쪽 기슭으로, 그리고 거기서 천도한 하남 위례성을 남한산성 북쪽인 광주군 춘궁리(春宮里) 일대로 추정하였다.35) 또한 금서룡(今西龍)은 백제 초기부터 서울은 남한(南漢)이었다고 보았고,36) 이병도(李丙燾)는 서울시 세검동·평창동 계곡 일대에 처음 도읍하였다가37) 4세기 초 비류왕 때 서울시 동남의 풍납동·가락동·석촌동·방이동 등 잠실 지구로 천도하였다38)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홍직(李弘稙)은 처음부터 수도는 하남이었을 것으로39) 보았고, 천관우(千寬宇)도 온조왕 때 하남으로 천도하였다40)고 보았다.


결국 백제의 위례성은 북한산이나 남한산과 가까운 오늘날의 서울시에 거의 해당하는 지역이었다는 이야기가 되며, 이것은 나아가 안산 지역이 백제의 수도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백제가 성읍국가의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시절에는 안산 지역에도 성읍국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제가 그 뒤 연맹왕국 단계로 성장해가기 시작할 무렵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비교적 먼저 안산 지역에 있었던 성읍국가가 백제의 영도를 받게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연맹왕국으로서의 백제의 성장이 3세기의 고이왕(古爾王;234~286년) 시대에 와서 이루어졌으므로, 이러한 변화는 이 무렵에 일어났을 것이다. 나아가 4세기의 근초고왕(近肖古王;346~375년)대에 이르러 백제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 그 모습을 일신하게 되면서, 안산 지역은 백제의 지방행정조직 체계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그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그는 정복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백제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다. 곧 그의 치세 24년(369)경에 남쪽 익산으로 그 중심지를 옮긴 마한(馬韓)을 멸하여 그 영토를 모두 차지하였으며, 그 26년(371년)에는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쳐들어가서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케 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현재의 경기·충청·전라 3도의 전부와, 강원·황해 두 도의 일부까지를 점유하는 큰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근초고왕은 서쪽으로 동진(東晋), 남쪽으로 왜(倭)와 통하여 국제적인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근초고왕 때부터는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계승의 전통도 세워졌다. 왕권(王權)이 그만큼 안정되고 강화되었다는 뜻이 된다. 또 진(眞)씨를 왕비로 맞아 진씨 왕비 시대가 시작된 것도 근초고왕 때의 일이었다. 그는 백제에 관한 역사책인 「서기(書記)」를 편찬하기도 하였는데, 정비된 국가의 위신을 드높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백제는 그 뒤 근구수왕(近仇首王;375∼384년)을 거쳐 침류왕(枕流王) 원년(384)에 불교를 받아들여 새로운 관념체계의 수립을 도모하였다.


이렇게 발전하는 속에서 백제의 영역이 된 안산 지방이 어떠한 행정조직체계에 있었는지, 그 위치는 어떠한 것이었는지가 궁금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궁금증은 현재로서는 풀 수 없는 의문일 뿐이다. 어쨌든 안산 지방이 영구히 백제의 일부로 남아 있지는 못하였다. 이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는 날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개로왕(蓋鹵王) 21년(475년)에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침략을 받아 수도와 국왕을 모두 잃고 웅진(熊津;공주<公州>)으로 도읍을 옮겨야 하는 비운을 맞았던 것이다. 안산 지방은 이때부터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버렸다. 백제의 지배를 받게 된 뒤로부터 약 2세기 만에 이 지역의 운명이 고구려의 손에 맡겨지게 된 셈이었다.

 

(2) 고구려 시대의 안산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는 B.C. 37년에 주몽이 이끈 부여의 일파가 압록강 중류 동가강 유역에 자리잡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지방에서는 이미 B.C. 4세기경에 고구려의 선구적인 세력이 결집되어 있었다. 예맥(濊貊)이라고 불리웠던 것이 그것이다. B.C. 2세기에 28만의 인구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예군 남여는 바로 이 지역의 군장(君長)이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성읍국가로의 시작은 B.C. 4세기보다 앞선다고 이해하여야 될 것이다.


고구려는 중국민족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을 거듭하여 연맹왕국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소수림왕(小獸林王;371∼384년)대에 와서는 중앙귀족국가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불교가 수용되고 태학(太學)이 설립되고 율령이 반포된 것이 모두 소수림왕대에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이러한 내부의 정비를 토대로 해서 광개토왕(廣開土王;391∼413년)은 대외적인 정복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의 자랑스러운 정복 활동의 내용은, 당시 고구려의 수도이었던 국내성(國內城;만주의 통구<通溝>)에 남아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에 상세하게 적혀 있다. 이 비문에 의하면, 그의 일대에 공파한 성이 64, 촌이 1400이었다고 한다. 그는 요동을 차지하고, 동북의 숙신(肅愼)을 복속시켜 만주의 주인공이 되었다. 남쪽으로는 백제를 쳐서 임진강과 한강 어귀까지 영토를 확대하였고, 신라를 침공하는 왜를 낙동강 유역에서 섬멸하기도 하였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413~491년)은 79년 동안이나 재위하면서 부왕의 사업을 계승하여 고구려의 극성기를 가져왔다. 그는 그의 치세 15년(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고 정치·경제 등에 관한 여러 제도를 완비하였다. 그런 뒤에 그는 정복활동에 진력하였다. 그는 그의 63년(475년)에 남진(南進)하여 백제의 수도 한산성(漢山城)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백제는 이때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야 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의 영토는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확장되었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안팎으로 그 제도가 완비된 하나의 커다란 제국을 형성하여 중국과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장수왕 63년(475년)에 고구려의 영토가 된 안산 지방은, 그 뒤 백제 성왕(聖王) 29년(551년)에 백제에 의하여 탈환되고, 그 2년 뒤에 다시 신라에 귀속될 때까지 대략 70년간 고구려의 지방행정조직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여기에서 그 실상을 알아보기로 한다.


“장구군(獐口郡)은 본래 고구려의 장항구현(獐項口縣)이었는데 경덕왕 때 개명한 것으로 지금의 안산현(安山縣)이다(「삼국사기」 35 잡지 4 지리 2 장구군).”

단편적인 지적에 불과하지만 위의 기록을 통하여 안산 지방의 행정상 편제를 알 수가 있다. 즉 고구려 시대에 안산현은 장항구현으로, 안산현에는 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각 군에는 처려근지(處閭近支)나 도사(道使)라고 불리는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각 현에는 가라달(可邏達)이라고 불리는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적인 명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군현의 장관은 흔히 성주(城主)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당시 지방관의 군사적 성격을 반영해 주는 것이었다. 이들의 지배를 받는 지방민은 평상시에는 농경에 종사하다가 위급한 때가 되면 군사적 목적을 위하여 동원되었다.

 

장항구현의 지방관과 그 주민들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즉 장항구현에는 가라달이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이곳 주민들에 대한 민정(民政)과 군정(軍政)을 동시에 수행하였다고 믿어진다.
그런데 고구려에는 군과 현 위에 그것을 통괄하는 커다란 행정구역이 따로 있었다. 동서남북 내의 5부가 그것이었다. 여기의 장관은 욕살(褥薩)이라고 불렸는데, 당시의 지방장관으로서는 최고의 지위였다.

 

군과 현을 총괄하는 부의 위치는 상당히 높았다고 생각된다. 고구려가 넓은 강역을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다섯 부만을 설정했다는 것은 한 부의 관할구역이 그만큼 넓었다는 뜻이 되며, 아울러 그 장관인 욕살의 권한이 강력했음을 시사한다. 장항구현의 가라달도 이러한 욕살의 지휘 아래 놓여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다만 어느 부의 욕살의 지휘를 받았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각 부가 방향에 따라서 설치되었음이 분명하므로, 안산 지역은 남부의 소관 아래 놓여 있어 남부 욕살의 지휘를 받았을 것으로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3) 신라 시대의 안산


고구려의 지배 아래 놓여 있던 안산 지역은 고구려 양원왕 7년(551년)에 이곳의 본래의 주인이었던 백제의 수중으로 다시 넘어가게 되었다. 고구려의 침략에 쫓겨 웅진으로 천도한 바 있는 백제는 그 뒤 동성왕(東城王;479~501년)과 무령왕(武寧王;501∼523년)의 노력으로 부흥의 기운이 일어났다. 그리고 성왕(523∼554년)대에 이르러서는 다시 사비(泗;부여)로 천도하고 국가의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성왕은 한강 유역의 옛 땅을 수복할 뜻을 굳혔다. 이를 위하여 성왕은 신라의 진흥왕(眞興王)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가 내분에 휩싸여 있는 틈을 타 북진을 감행하였다. 드디어 그는 한강 하류 지역의 6군을 점령함으로써 고토(故土) 수복의 꿈을 이룰 수가 있었다.


이 6군의 지역 안에 안산 지역이 포함되었으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성왕의 기쁨은 곧 분노로 변해야만 하였다. 수복한 지 불과 2년 만에 동맹관계에 있던 신라의 침입으로 이 지역을 신라에 넘겨 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성왕은 그 이듬해(554년) 보복적으로 신라를 공격했지만 도리어 관산성(管山城;옥천) 싸움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성읍국가 사로(斯盧)로부터 출발하였다. 그 뒤 연맹왕국 단계를 거쳐서 법흥왕(法興王;514∼540년)대에 이르러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독자적 연호의 사용,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 등이 모두 법흥왕대에 이루어졌다.


법흥왕을 이어 신라의 대외 팽창을 시도한 군주가 진흥왕(眞興王;540∼576년)이었다. 그는 12년(551년)에 백제 성왕과 공동작전으로 고구려 땅인 한강 유역을 공격하였다. 이때 백제는 한강 하류 지역의 6군을 얻었고, 신라는 그 상류 지역의 10군을 점령하였다. 그런데 그 2년 뒤, 즉 진흥왕 14년(553년)에 백제군이 차지한 한강 하류 6군마저도 이를 공격하여 차지해 버렸다. 이것은 안산 지역을 포함한 한강 유역의 전부가 이 해에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신라는 인적·물적 자원을 획득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해를 거쳐 중국과 통할 수 있는 중요한 문호도 확보할 수 있었다. 남양만의 당항성(黨項城)이 그 문호의 역할을 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에 대한 집념은 실로 강인한 것이었다. 그 뒤에도 그는 23년(562년)에 고령의 대가야를 멸하여 기름진 낙동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했으며, 동북쪽으로는 함흥 평야까지 진출하였다. 이 같은 진흥왕의 정복사업은 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에 있는 네 개의 순수비(巡狩碑)가 잘 말해 주고 있다.


한편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하던 그 해에 이곳의 한산(광주)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신주의 장관으로는 군주(軍主)가 중앙에서 파견되었는데, 그는 고구려의 남부 장관이었던 욕살이 수행하던 종래의 임무를 대신하게 된 셈이었다. 장항구현은 당연히 신주의 관할 아래로 넘어갔다. 신라의 제도로는 후방의 군에는 군사대등(郡使大等)이, 일선의 군에는 당주(幢主)가 지방관으로 파견되었고, 현에는 도사(道使)가 파견되었다. 그러므로 장항구현에는 도사가 부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도사는 신주 군주의 지휘·감독 아래 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지방제도를 새로이 정비하게 된 신문왕 5년(685년)까지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의 통일은 신라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넓은 영토를 확보하게 해 주었으며, 확대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지방조직의 정비가 필요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업을 수행한 왕이 신문왕(神文王;681∼692년)이었다. 그는 5년(685년)에 주·군·현을 기본으로 한 지방통치조직을 갖추었다. 주(州)는 통일 전에도 영토의 확장에 따라 차례로 설치되어온 것이었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뒤에 새로이 편입된 지역을 포함하여 이를 9주로 정비하였다. 그런데 이 9주를 정비하는 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는 신라·백제·고구려 3국의 주를 설치하도록 한 것이었다. 둘째는 중국의 옛날 우왕 때의 9주에서 모범을 취한 점이었다.


지방통치조직에 있어서의 주의 비중은 상당히 컸다. 원래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그 장관은 군주라고 일컬었는데, 이것은 신라의 독자적인 칭호였다. 그러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에는 이를 중국식으로 고쳐서 도독(都督)이라 불렀고, 신문왕 때에는 총관(摠管)이라 칭하였다. 명칭만으로는 확실히 단정할 수가 없으나, 이러한 중국식 명칭의 사용은 행정적인 성격이 커져가는 과정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총관은 현실적으로 진골(眞骨) 귀족들만이 임명될 수가 있었는데, 이것은 결국 주의 정치적 중요성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9주 가운데에서 신주를 대신한 것은 한산주(漢山州)였다. 광주에 치소를 마련한 한산주에는 물론 총관이 임명되어 중앙에서 내려왔다.


한편 주 밑에는 전국에 117 내지 120개의 군과 293 내지 305개의 현이 있었다. 군에는 그 장관으로 군태수(郡太守)가 임명되었고, 현에는 그 격에 따라서 소수(小守)가 임명되기도 하고 또는 현령(縣令)이 파견되기도 하였다.41) 이러한 군·현의 지방관은 모두 중앙으로부터 학식이 있는 자가 임명되었는데, 이는 군사적인 성격이 사뭇 강했던 통일 이전 지방관의 면모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신문왕 5년에 지방제도가 새로이 정비됨에 따라서 장항구현의 사정도 그 정비작업의 일환으로 변화되었다.

“장구군은 본래 고구려의 장항구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개명한 것으로 지금의 안산현이다(「삼국사기」 35 잡지 4 지리 2 장구군).”

 

장항구현은 군으로 승격되었는데, 군으로서의 지위는 신라가 망할 때까지 기본적으로 변화가 없었다. 다만 명칭상의 변화는 있었다. 경덕왕 16년(757년)에 와서 종래의 토속적인 명칭들이 대대적으로 한자풍의 다듬어진 표현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이 작업은 한화정책(漢化政策)의 일환으로 광범위하게 추진된 것으로서, 한산주는 한주(漢州)로 바뀌었고 장항구군은 장구군으로 바뀌었다. 장구군 태수는 중앙에서 파견되었을 것이고, 이 지방관은 한주 총관의 지휘·감독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홍승기(편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