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임시정부 요인들
미군정 요인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들
3년의 군정이 끝나고, 반도의 남쪽 절반에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광복과 정부 수립, 그리고 건국
제6절 8·15 광복과 안산
1. 미군정의 실시와 안산의 사회·경제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되었다. 광복을 맞아 온 겨레는 환희와 열광에 휩싸였다. 기나긴 억압으로부터 삼천만이 한꺼번에 해방된 것이었다. 안산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우렁찬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기만 해도 솜털까지 곤두섰던 신사(神社)라는 애물은 하룻밤 만에 불질러졌고, 죄없는 사람들을 마구 짓밟았던 주재소도 때려부셔졌다. 일제로부터의 광복은 안산 주민의 정치적 앙양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광복은 우리 민족의 주체적인 힘과 주동적인 역할에 의한 것만이 아니었다. 우리 겨레가 일제의 식민통치 밑에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고난을 감내하며 싸워 왔지만, 그것은 연합동맹군이 일본 군국주의를 물리쳤기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였다. 한반도의 남북에 자본주의 진영의 맹주인 미국과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각각 진주함에 따라 한국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격전장이 될 위험에 처하였다.152)
38도선을 경계로 한 미군과 소련군의 분할 점령이 곧바로 민족의 정치적 분열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당시 우리 겨레는 38도선 획정으로 국토와 민족이 둘로 갈라지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후의 국내외 정세속에서 38도선은 겨레의 분열, 국토의 분단으로 점차 굳어졌던 것이다. 만약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진주할 당시에 우리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주동적으로 작용했다면, 이들이 애초에 내걸었던 ‘일본군의 무장해제’만으로 활동 영역을 제한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8·15 광복 직후부터 전국에서 자주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안산을 포함한 각지에서 항일인사와 지방유지들을 중심으로 치안유지회·건국준비회 등 다양한 자치조직들이 결성되어 일제 행정기관을 접수하고, 자치적으로 치안을 유지하였다.
1945년 10월 말까지 전국 13개 도, 21개 시, 215개 군에서 각급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각급 인민위원회는 지역주민과 연결되어 있는 정권 형태로서 행정과 입법이 완전히 통일되었으며,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배제한 모든 계층의 대표자를 널리 포섭하였다.153)
물론 주권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구와 활동 내용은 계급과 계층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농민·소시민 등 각각의 요구가 동일한 지표와 의식 정도 및 조직성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각계각층은 보다 중요한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곧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의 건설과 사회의 민주주의적 발전에 대한 욕구였다.
노동자들은 일제와 일본인 소유의 기업체를 접수하여 스스로 관리하였다. 농민은 일본인 지주의 토지를 접수하여 관리하는 한편, 악덕지주에 대한 소작료 불납, 한국인 지주에 대한 소작료 인하 운동 등을 벌였다.
1945년 8월 16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동맹계의 인사들이 서울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치안을 유지하는 한편 항일투사들의 석방, 물자 공급과 행정 대책 등을 강구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미군의 남한 진주를 눈앞에 둔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되었다. 이와 함께 9월에서 11월에 걸쳐 각지 건국준비위원회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방 조직도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인민위원회는 민중의 생존권 확보와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세력을 참여시키지 못하였고 정치적 구심점도 없었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였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군정 실시를 천명하였으며, 조선인민공화국과 중경임시정부 등 한국인의 정권기관을 전면 부정하고 각지의 인민위원회와 치안대 등에 해산을 명령하였다. 38선 이남 지역을 점령한 미군은 패전국에 대한 전승국의 통치형태인 군정을 실시하였다. ‘군정’이란 군사적 지배체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제에 의해 시행되었던 1910년대 ‘무단통치’를 연상시키는, 군대에 의한 점령정책 외에는 다른 것일 수 없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는 도착 즉시 일본인 경기도지사를 통해 안산을 포함한 경인지구에 오후 8시부터 오전 5시까지 통행금지를 지시하였다.154)
1945년 9월 15일에는 경기도 헌병사령관 겸 제7보병사단 헌병사령관 스튜어드에 의해 행렬 및 집회의 허가제가 발표되었다. 이때부터 행렬이나 집회를 하려면 다음의 사항, 즉 집회의 ‘① 이유와 성질, ② 장소, ③ 시작되는 시간, ④ 끝나는 시간’을 기재한 허가원을 행사 이틀 전에 미군 헌병관에 제출해야 하며, 집회가 허가된 때에는 미군 헌병의 보호를 받아야 하고, 허가없이 집회를 하면 해산시키는 동시에 책임자는 처벌받게 되어 있었다.155) 이로써 안산 주민의 자유로운 정치활동도 제한을 받았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는 일제에 빼앗겼던 우리 민족의 자주권을 되찾을 수 없었고, 사회의 민주주의적 발전에도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국토가 남과 북으로 나뉘고, 민족이 좌우로 갈라지는 새로운 비극이 보태졌던 것이다.
왜 미국은 해방된 한국을 38선으로 분할시키고, 한국의 광복과 한민족의 자주권을 무시한 채 군정을 실시하였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미 제24군단 사령부의 정보과에서 전사(戰史) 편찬의 업무를 담당했던 로빈슨(Robinson)은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었으며, 남한을 무력으로 점령하기 위해서 진주했다”고 말하면서, “미군은 조선인과 모든 조선적인 것을 매우 경멸했다.”고 썼다.156) 미군정은 “모든 농민은 공산주의자이며, 노동조직들은 파괴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친일 배경을 지닌 자들을 경찰력으로 다수 활용하여 민의에 기초해 결성된 인민위원회를 탄압하였다.
동시에 미군정의 남한 직접통치에 한국인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1945년 10월 5일 고문회의 구성원을 임명했다.157) 대부분의 고문회의 인사들은 일제 시기의 친일행각으로 평판이 나쁜 사람들이었다. 고문회의에 대한 한국 민중의 반응은 지극히 냉담하여 전혀 현실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설치한 미군정을 실망시켰다.158)
미국은 자본주의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정치세력을 지원·육성함으로써 이들을 통해 한반도에서 자신의 이해를 실현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대체로 친일 경력이 있는 자본가·지주 출신의 인사들이 군정의 행정고문이나 고위 관료로 임명되었고, 일제 시기의 관료·경찰 기구가 부활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미군정에 적극 협력하였고, 미국은 이들을 공산주의에 대한 방파제로 이용하였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하지의 정치고문 랭던(Langdon)은 이렇게 말했다.159)
“우리가 대중적인 좌익인사들을 배제시키고 부호들을 군정에 끌어들인 점에 대해서는, 사실 초기에 지나치리만큼 부호와 보수적 인사들을 많이 선발했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생면부지의 대중들 가운데서 누가 누구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현실적인 목적 때문에 우리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을 임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사실 영어란 것이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사치스러운 것이었던 만큼 이들 인사들과 그 동료들은 자연히 돈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미군정이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남한 사회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 나갔던 사실과 상관없이 다양한 정당과 사회단체가 속속 결성되었다. 이들 중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한 세력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1945년 9월 11일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다. 조선공산당은 결성 이후 당 조직 확장과 노동자·농민조직 등의 건설에 힘을 기울였으며, 지방 인민위원회와 대중 조직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민족주의자들과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11월 12일 도시 소시민·지식인·학생층을 기반으로 조선인민당을 결성하였다. 조선인민당은 각 계급과 정치세력 간의 통일을 강조하는 인민적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지주·자본가 층도 미군의 진주에 힘입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9월 16일에 송진우·김성수 중심의 한국민주당이, 11월 말에는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각각 결성되었다. 이들 조직에는 항일 인사도 있었지만 친일파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안재홍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각 계급의 단결을 강조하는 신민주주의를 내걸고 9월 24일 국민당을 결성하였다.
한편 1945년 11월 23일 중경임시정부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등 일행 15명이 환국하였다. 이어 12월 2일 의정원 의장 홍진, 군무부장 김원봉 등 임정요인 23명이 군산비행장을 통해 돌아왔다. 그러나 임정 요인들은 입국 후 한 달이 지나도록 정세를 관망하면서 신중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내부의 다양한 세력 편제에 따른 의견 조율을 위한 시간이 이들에게는 필요했던 것이다. 임시정부의 국가건설 방략은 ‘임정법통론’으로 요약되는데, ‘① 임시정부의 정권 수립, ② 임시정부 주도 아래 각계각층의 민족영수회의를 통한 과도정부 수립, ③ 과도정부 주도의 전국적 보통선거에 의한 정식정부 출범’이었다.
건국 주체 간의 단합을 위해 중경 임정과 인공의 합작 문제가 12월 23일 뒤늦게 제기되었지만, 이승만의 견제 속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한국 문제에 대한 결정이 국내 정국을 강타하면서 곧바로 묻혀 버렸다. 임정과 인공의 연립적 과도정권 수립은 민족 내부의 힘으로 정권 수립 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것을 살려 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대중의 정치적 진출은 다양한 대중단체 결성으로 수렴되었다. 1945년 8월 18일 김남천(金南天) 등이 서울에서 조선공산청년동맹을 결성했다가 박헌영의 지시로 중앙기구를 재편, 조선청년총동맹을 새로 결성하고 책임비서에 권오직(權五稷)을 선임했다.160)
11월 5~6일 양일간 서울에서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결성 대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광복 직후 노동자들에 의해 조직된 금속·화학·출판·섬유·토건·교통운수·식량·철도·통신·전기·광산·목재·조선·일반사무원·해운·합동 등 산업별 노동조합이 참여하였다. 대회에서는 선언과 일반 행동강령을 채택한 후, 허성택(許成澤)을 중앙위원장으로, 박세영(朴世榮)과 지한종(池漢鍾)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중앙기구를 구성했다.161)
광복 직후 각지에서 조직된 239개의 농민조합을 기반으로 1945년 12월 8~10일 서울 천도교당에서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 결성되었다. 대회는 백용희(白庸熙)를 중앙위원장으로, 이구훈(李龜勳)과 유혁(柳赫)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중앙기구를 구성하였다. 전농은 소작료 3·7제와 금납제 실시 등 토지개혁을 위한 운동을 이끌었다.162)
12월 11~13일에는 전국청년단체총동맹(청총) 결성 대회가 개최되어, 이호제를 중앙위원장으로, 왕익권(王益權)·김석준(金錫俊)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중앙기구를 구성하였다.
오랫동안 일제의 압박과 봉건사상에 억제당해 오던 여성들은 참된 광복과 진정한 노선을 찾고자 12월 21일, 대의원 158명이 모인 가운데 진보적 여성단체의 통일적 중앙기관으로 전국부녀총동맹을 결성하였다. 대회에서는 유영준(劉英俊)을 중앙위원장으로, 정칠성(丁七星)과 허하백(許河伯)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중앙기구를 구성하였다.163)
이 시기 수암·군자·대부·반월 등 안산 지역의 대중운동은 지역 특성을 반영하는 농민운동이었다. 안산 지역의 농민도 한국의 농촌 현실에 따라 전개된 농민운동에 적극 참가하였지만, 당시 대중운동이 군(郡)을 단위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하여 활발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대한적십자부녀회 시흥군지부가 10월 27일에 결성되었고, 군자면 등에서 어업 문제 및 일부 염전 문제가 제기되었다.
한편 식민지 시기에 일본어 사용과 왜곡된 역사교육을 강제받았던 학교에서는 광복과 함께 많은 교육상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새로운 학교의 설립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안산 지역에서는 수암면 장상리의 부락회관 건물에 안산고등공민학교가 설립되었고,164) 1947년 2월 1일에는 군서초등학교가 군자면 정왕리 산 139번지에서 개교하였으며, 그해 4월 30일 안산공립국민학교 화정분교가 화정국민학교로 승격하여 수암면 화정 1리 519번지에서 개교하였다.
또한 일제하에서 안양일동학원과 논곡학원을 설립하는 등 민족교육에 투신하였던 최긍렬에 의해 1950년 군자고등공민학교가 시흥시 논곡동에 개교되었다. 이는 이듬해 시흥시 장현동으로 이전하였다가 1952년 시흥시 거모동 산 58에 4개 교실을 건립하여 정착하였고, 1954년 군자중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165) 1952년 4월 22일에는 군자국민학교 장곡분교가 장곡국민학교로 승격되어 군자면 장곡리 514번지에서 개교하였고, 이듬해 9월 18일에는 군서국민학교 오이도분교가 군자면 정왕리 911번지에 설립되었다. 그리고 1954년 1월 23일에는 군자중학교가 군자면 거모리 산 58번지에서 개교하였다.
2.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 활동과 안산의 사회·경제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는 3개국 외상회의가 개최되었다. 미국의 번스(Byrnes), 영국의 베빈(Bevin), 소련의 몰로토프(Molotov)가 참가한 이 회의는 12월 27일까지 진행되었는데, 이 회의는 해방 정국의 소중한 세월을 4개월이나 헛되이 보낸 다음에 소집된 것이었다. 일정한 절차 없이 서로 탐색의 형식으로 진행된 회담에서 3개국 외상들은 몇 가지 문제에 합의하였다. 이들이 만들어 낸 ‘코리아에 관한 결정’은 남북한 모두에게 중대한 영향을 주었으나 회의의 진행 과정에서 한국 민중은 배제되었다.166)
모스크바 결정으로 한민족과 국제사회의 관계에서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은 명백해졌다. 우선 “적당한 절차를 밟아” 코리아에 독립을 부여한다는 1943년 카이로 선언의 애매모호한 내용이 보다 확실한 내용으로 대치되었다. 다른 하나는 한민족의 운명을 간섭할 강대국이 이제 미국과 소련으로 한정되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4대국에 의한 ‘신탁통치’ 혹은 ‘후견’을 말하고 있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전 협상 과정과 결정 채택은 미소공동위원회의 규정이 말해 주듯이,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한민족의 장래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외세라는 사실을 뚜렷이 하였다.
모스크바 결정은 “조선을 4개국 신탁통치 아래 두기로 결정하였다.”는 내용으로, 12월 27일 서방측 통신을 통해서 남한 언론에 보도되었다. 미군정의 언론 검열을 거쳐 배달된 신문은 모스크바 결정의 주된 내용을 ‘신탁통치 실시’로 단순화하고, 그것의 주창자로 소련을 지목하였다. 회담의 경과와 실제 합의 내용을 왜곡·전달하여 ‘모스크바 결정=식민지적 신탁통치제=소련의 주장’이라는 인상을 좌절감과 함께 독자들에게 심어 주었다.
미군 현지 사령관 하지는 “만약 한국인들에게 독립을 주게 되면, 그들은 2년 내에 소련에 먹히고 말 것이다.”라고 공공연히 말하였다. 그리고 그를 비롯한 미군정 당국은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하려고 고려한 사실에 대하여 소련이 비난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한국 민중을 우롱하였다.
12월 27일 미국의 「성조기」지는 번스 장관이 신탁통치에 대한 소련의 열망과는 달리 즉각적인 독립을 촉구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고 왜곡 보도를 계속했다.167) 미군정은이러한 신탁통치 문제를 통해 민족세력 대 반민족세력의 정치 지형을 민족 내부의 좌우 대결 구도로 바꿀 수 있었다. 모스크바 3상 결정안을 신탁통치안으로 이해한 민중은 이에 격렬히 반대하였고, 김구 등은 조직적으로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한민당과 이승만은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제시하였다는 보도를 근거로 하여 이 운동을 반공·반소 운동으로 몰아갔다.
신탁통치 문제로 정국이 일대 파란을 겪던 와중에서 인공과 중경 임정의 합작 실패를 딛고, 당시 남한 정국을 주도하던 조선인민당·국민당·조선공산당·한민당 등 4대 정당 대표자들은 통일간담회를 열어 민족 통일 문제를 해결하자는 방침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1월 6일 ‘4정당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는데,168) 공동성명의 내용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한 것으로서, 당시 민중의 희망과 정서에 가장 들어맞는 원칙이었다. 1월 8일 임정 외무부장 조소앙과169)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도 4당 공동 코뮤니케가 합의한 대로 통일임시정부 수립에 모든 민족세력이 동참하고, 정부 수립 후 신탁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민족 문제 해결의 유일한 처방이라고 동조하였다. 임시정부가 4당 코뮤니케를 지지하고 나오자 그것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더욱 커졌다.
그런데 1월 7일 하오 이승만은 전례없이 강경한 어조로 ‘반탁’ 성명을 발표하였다.170) 이에 자극받아 바로 다음날 한민당은 자신의 대표가 서명한 ‘4정당 공동성명’에 대해 “신탁통치에 관한 조항은 신탁통치 반대의 정신을 몰각하였기 때문에 본당에서는 8일 긴급간부회의에서 이 조항을 승인치 않기로 결정하고 종래의 신탁통치의 반대 태도를 일관 주장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민족단합의 분위기 진작에 찬물을 끼얹었다.171) 국민당에서도 “한국인의 정신을 무시하며 기본적인 문제들을 얼버무리려 한다.”며 4당 코뮤니케를 부정하고 나섰다.
결국 4당 간의 합의는 실종되었지만172) 그 정신, 즉 ‘선(先) 임시정부 수립, 후(後) 신탁 문제의 자주적 해결 방안’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주체적으로 대응하여 먼저 민족 단합을 이룩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이어졌다. 1946년 4월 좌우 합작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그것을 주도한 여운형과 김규식 등이 가졌던 기본 인식은 바로 4당 코뮤니케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었다.
1946년 2월 1일 반탁운동을 주도하던 김구 중심의 비상정치회의와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합작하여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였다. 미군정은 비상국민회의에서 선출한 최고정무위원회를 민주의원으로 개편하고 자문기구로 삼았다.173)
민주의원은 다가오는 공위 개최를 앞두고 우익 세력의 단결을 꾀하기 위하여 하지의 고문 굿펠로가 구상한 기구였다. 미군정이 민주의원을 설립한 의도는 ① 군정 내 한국인 참여라는 외관의 부여, ② 행정위원회 구상의 연장선상에서 미래에 출범할 수도 있는 임시정부를 미군정이 지원하는 세력이 장악하도록 우익 역량을 결집, ③ 미소공위 자문 정당·단체들의 대표기관으로 삼아 미소 협상에서 미국의 입지 강화 등이었다.
한편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조선민족혁명당·천도교청우당 등 3상회의 결정안을 지지하는 단체들은 2월 15일에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대회를 개최하였다. 결성 대회에서는 민주주의정권의 수립, 경제건설과 그 부흥, 토지 문제 해결과 8시간노동제, 문화 건설 문제, 국제적 협조, 민생 문제와 식량정책 등 기본 정책을 명시한 강령과 38항에 달하는 행동 슬로건 및 21개조 민전규약을 채택하였다. 출석 대의원 492명은 조선공산당·인민당·독립동맹과 노동자·농민·청년·여성·종교·문화·재외동포 등 각 단체 대표와 지방 대표로서 ‘민주주의국가 건설에 이바지할 것을 결의’하였다. 민전 의장단으로는 허헌·여운형·박헌영·백남운·김원봉 등이 선출되었다.
이제 남한의 정치 상황은 더 이상 악화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군정은 2월 19일 포고문 제15호를 발표하여 3명 이상의 모든 정치활동에 제한을 가하였다.
중앙에서의 급격한 정치 변동과 달리 안산 지역은 비교적 평온하였다.
1946년 1월 29일, 군정청 학무국은 성인계몽운동 전개를 목적으로 각도에 강사를 파견하였다. 이 강연은 2월 6일부터 3월 22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열렸는데, 안산에서는 2월 6일부터 2월 18일까지 이덕봉(李德鳳)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이 성인계몽운동을 주최한 학무국의 기본 취지는 국민의 의무교육안과 아울러 이제껏 일본식 교육이념에 젖은 성인들을 새로운 방침으로 재교육하려는 것이었다. 성인교육이란 지향점을 잃고 확고한 신념이 없는 대중을 정신적으로 계몽함으로써 조선민족을 각성시키려는 것이다.174)
1946년 3월 8일에는 군정청법령 제55호에 의한 정당 등록 기한 연장 조치가 있었다. 이에 따라 안산 지역에서도 활동 중인 미등록 정당은 3월 16일 이내에 경기도 공보과에 등록하도록 강제되었다.175)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미소공동위원회는 3월 21일에 제1호 성명, 23일에는 제2호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이 성명에서 공동위원회는 먼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취급한다는 것과, 이 회의에는 미국·소련 측 수석대표가 협의해서 특별 초대한 각 민주주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만이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176)
미소공위의 성공을 염원하는 대중적 지지 열기는 환영군중대회 개최, 단체 정당들의 성명 발표, 대표들의 미소공동위원회 및 미소 대표단 방문, 청원서·건의문·진정서 제출 등 여러 가지 형태와 방법으로 광범하게 조직·전개되었다. 서울에서는 미소공동위원회 대표들을 환영하고, 공위의 성공적 진행과 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시민대회가 4월 11일에 열렸다.
1946년 4월 10일 경기도 경찰부는 공위 회기 중 정치적 집회와 시위행진 등 일체를 금지하였다. 이 금지령에 의하여 안산에서도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민전순회강연회가 중지되었다.177)
미국과 소련은 임시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한국 측 협의 대상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소련은 모스크바 3상 결정을 반대하는 단체와 친일파는 협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미국은 이에 반대하였다. 1946년 4월 18일, 공동성명 제5호를 발표하여 미소공동위원회 최대 논점이었던 협의 대상으로 삼을 정당·사회단체 자격 문제에 일종의 타협안을 만들었다. 비록 지난날에는 반탁을 주장했다 해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는 선언서에 서명할 경우는 협의 대상에 포함시킨다는 것이었다.178) 그런데 미소공위 제5호 성명으로 반탁 진영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였다.179)
이에 반하여 조선공산당과 민전은 5호 성명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면서 감사 결의문까지 공위에 보냈다.180)
미국과 소련은 협의 대상이 될 정당·단체의 규정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개최 7주만인 1946년 5월 6일 미소공동위원회를 휴회시켰다. 미소공동위원회의 무기 휴회 이후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후 남북한의 내부 상황은 판이하게 전개되었다. 우선 남한에서는 좌우익 간의 대립과 분열이 더욱 첨예화되어 정치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좌우합작이 진행되는 한편으로 ‘단정 수립론’이 공개적으로 외쳐졌다. 미군정은 미소공위를 통하지 않는 남한 지역만의 ‘한국화’ 계획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사태가 전변되면서 미군정은 통치권력을 표면에 내세워 직접 좌익 진영에 대한 폭압을 강화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의 ‘공식’ 결성을 위해 1946년 11월 3일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치루었으며, ‘임시헌법’도 준비해 나갔다.181) 결국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은 향후 한반도 정치지형과 프로그램을 새롭게 짜 나간 결정적 분수령이었다. 그것은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에 들어간 며칠 후인 5월 15일, 조선공산당에 의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란 것이 발표되면서 현실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사건을 빌미로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가하였으며, 5월 18일 미군정 시아이시는 공산당 본부를 습격하고, 「해방일보」를 무기 정간시켰다. 이어서 「조선인민보」·「현대일보」·「중앙신문」 등을 무기 정간시켰으며 수많은 언론인들을 체포하였다.
한편 1946년 5월 27일 한민당 간부회는 지방유세대를 조직하여 각지에 파견하였다. 경기도 안산 등지에 파견된 인물은 원세훈·박명환·최윤영·윤보선 등이었다.182) 이어 6월 30일 한민당 시흥지부가 결성되었다.
이승만은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남북 분단의 위기가 고조되었으며, 반탁운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1946년 7월 9일 탁치반대전국학생총연맹은 하기학생계몽대를 각지에 파견하였는데, 동 계몽대는 주로 지방 계몽을 통하여 “국민운동을 일으키며 건전한 민족정신을 고취하여 완전 민주국가 건설에 공헌”하고자 하였다. 계몽대는 문맹퇴치·의료·음악 등 3개 반으로 편성되었으며, 안산 지역에서도 활동하였다.183)
미소공위 휴회 직후에 제기된 좌우합작운동은 거기에 직접 끼어들었던 미군정 측의 의도와 이 운동에 주동적이며 주체적으로 참여한 민족지도자들의 판단과 계산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좌우합작을 통해 ① 미군정에 우호적인 대중적 기반의 형성, ② 과도적 입법기관 부식의 매개, ③ 좌익 세력의 분열 등을 얻고자 하였다. 이에 반해 민족지도자들의 주체적 의도는 어디까지나 이 운동은 민족통전운동으로서,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기초를 구축하는 민족 자주 운동의 전개에 있었다.
좌우합작은 몇 차례의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우익진영의 민주의원에서는 김규식을 선두로 원세훈이 대표로 나섰고, 좌익진영의 민전 측에서는 여운형과 허헌이 선두로 나서서 계속 이끌었다. 7월 22일 오후 7시 신당동에서 좌우합작 제1차 예비회담이 개최되었다. 회의에서는 좌우합작회의를 덕수궁에서 매주 2회 월요일과 금요일 정기적으로 갖기로 하고, 김규식과 여운형이 교대로 의장직을 맞도록 하였으며, 미·소 쌍방이 연락장교 한 명씩을 회의에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는 문제에도 합의를 하였다. 이 같은 합의는 7월 23일 김규식·여운형 공동명의의 성명서로 발표되었다.184)
7월 25일 덕수궁에서는 좌우합작위원회 제2차 정식 예비회담이 개최되었다. 김규식의 사회로 우측 대표 김규식·원세훈·안재홍·최동오·김붕준, 좌측 대표 여운형·성주식·이강국·정노식 및 버취 등이 출석하여 진행된 회담에서는 14개항의 의사진행원칙 규정이 통과되었다.185)
이때부터 좌우합작을 위한 회담의 주체가 좌우합작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의사규정의 가장 큰 특징은 이 회담이 임시정부 수립 촉진을 위한 것임을 밝힌 점이다. 즉 좌우합작이 지향하는 바가 임시정부 수립과 완전 독립임을 천명함으로써 운동의 앞길을 명확히 규정한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에서 결정된 안건이 민주의원과 민전에 보고되고, 쌍방의 동의를 얻은 후에야 발표되기로 한 점이다. 이는 좌우합작위원회의 성원들이 단순히 좌우익의 대표적인 명망가나 정치가가 아니라 좌우익의 조직적 대표임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김붕준과 이강국을 대변인으로 선임하고 비서국도 설치하였다.186) 제2차 예비회담 직후 즉석에서 좌우합작위원회 제1차 정식회담이 계속되었다. 회담 결과는 7월 26일 제1호 성명으로 즉각 발표되었다.187)
좌우합작이 여기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꾀하는 이승만의 방해와 민족주의자들과의 협력을 경시하던 조선공산당의 편협한 대응 때문에 결국 실패하였다.
미군정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어 각지에서 ‘쌀을 달라’고 요구하는 항의와 저항이 그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9월 총파업이 일어났다. 9월 총파업은 신전술로 전환한 조선공산당이 주도하였으며, 미군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민중이 가세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미군정 운수부는 적자 타개와 노동자 관리의 합리화라는 이유를 들어 운수부 종업원의 25%를 감원하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기로 했다. 미군정의 이러한 발표가 있자 조선공산당 지도부에서는 10월경에 단행키로 계획했던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기고자 하였다. 당시 조선공산당으로서는 중대한 국면에 있었다. 9월 6일에 좌익계 신문인 「중앙신문」 등 3개 신문이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정간을 당했다. 계속하여 조선공산당 지도부 성원인 이주하가 체포되었으며, 다음날은 박헌영의 체포령이 내려져 전국의 경찰이 비상경계에 들어갔다.
1946년 9월 15일 철도노동자들은 생활 개선을 위한 6개조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고 1주일의 시한부 총파업을 미군정 철도당국에 통고하였다. 미군정으로부터 성의 있는 대답이 없자, 23일 7천여 명의 부산 노동자들이 제네스트에 돌입하였고, 24일에는 남한 각지에서 4만의 철도노동자들이 연대투쟁에 나섰다. 철도노동자들의 요구는 주로 경제투쟁의 범주에 한정되었다.188)
조선공산당은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총파업을 조직·전개하여, 철도·전기·체신·출판과 생산공장을 일시적 마비상태에 빠뜨렸다. 그런데 이들의 요구는 정치투쟁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미군정의 온갖 폭압의 즉시 중지와 민주주의적 노동법령의 실시 등을 요구하며 촉발된 총파업에 대한 동정파업이 은행·회사·병원·미군정청까지 파급되었다. 그리하여 9월 30일 오전 4시 경무총감 장택상의 진두지휘로 파업·농성 중인 경성공장 기관구·통신구를 포위하고, 서울철도노동자들에 대한 무력 탄압을 감행했다. 그 결과 수많은 노동자가 사상(死傷)당하고, 1700여 명이 대량검거를 당하면서 파업의 기세는 한풀 꺾이는 듯하였다.189)
그러나 10월에 접어들면서 노동자들의 파업은 자연발생적 민중항쟁으로 이행하였다. 10월 1일 대구시에서 ‘쌀을 달라’고 모인 주민에 대한 경찰의 발포사건은 대구시민을 자극하여 폭력투쟁으로 궐기하게 만들었다. 민중의 격분에 따른 충동적 공격으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경북 일원과 경남·전남 등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0월항쟁’에는 전 남한의 73개 지역에서 11월 중순까지 연인원 200만이라는 엄청난 인원이 참가하였다.190)
9월 총파업과 10월항쟁으로 표출된 민중의 저항은 미군정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당시 3당합당 문제를 둘러싸고 극심하게 분열되어 있던 사회주의자들은 투쟁을 효과적으로 지도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운동은 고립·분산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전국 각지에 뿌리내렸던 민중운동 세력도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정치폭풍’이 남한 전역을 강타할 당시 안산 지역에서는 어떤 일들이 발생하였는가? 1946년 여름 콜레라가 전국에서 발생하였다. 경기도에서도 콜레라로 459명이 사망하였다.191) 콜레라의 공포에 휩싸인 주민에게 또다시 수마가 달려들었다. 10월 11일 발표된 경기도 내 수해 상황과 복구 대책은 다음과 같았다.
“경기도 농림부의 조사·발표에 의하면, 지난 여름 장마로 인한 도내 농지와 농작물 피해는 전답을 합하여 면적 419.17단보와 곡식 166,757석에 달하는데, 수리조합 관계의 농지만을 예산이 교부되는 대로 즉시 도경비로 착수할 것이며, 기타는 지주와 소작인이 협력해 복구토록 지도할 예정이다.”192)
1946년 10월 29일에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경기도 대의원 선출이 있었다. 경기도청 회의실에서 2부 21군 대표 46명이 모인 가운데 집행되어, 안산이 속한 제5구(안성·수원·평택·시흥)에서는 최명환(崔鳴煥;63세, 독촉 평택지부장, 평택군수)이 선출되었다.193)
추위가 시작되면서 안산 지역을 취재한 신문의 보도 내용도 달라졌다. 당시 군자면은 서울을 포함한 경기 지역의 김장용 소금의 주공급원이었다. 따라서 소금 배급과 관련한 기사가 자주 다뤄졌다.
“김장 때를 당하여 소금의 배급이 당국의 뜻대로 되지 않아 가정주부의 애를 태우는데, 전매국에서는 우선 1인당 2근씩의 배급을 실시하고 있다. 이렇게 배급이 원활치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경기도 내 수요는 군자를 포함하여 남동·소래·주안의 네 염전에서 생산되는 양만으로도 충분하고 여유가 있는데 배급이 원활치 못한 것은 수송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매일 15대의 트럭으로 운반을 하고 있으나 이것으로는 도저히 적당한 배급을 기할 수 없다. 그리고 애당초 서울시내의 인구를 130만으로 인정했던 것이 180만으로 격증해 이것 역시 계획의 원만을 불가능케 하고 있으며, 전매당국의 말에 의하면 서울을 빼놓고 38 이남에는 대개 배급이 완료되었다고 한다.”194)
1946년 12월 5일 한국민족대표외교후원회는 이승만의 도미(渡美)에 대한 여론 환기를 목적으로 각지에 지방유세대를 파견하였다. 안산에 파견되어 활동한 인물은 이관운과 정마리아 등이었다.195)
3. 대한민국정부의 수립과 안산의 사회·경제
민족 구성원 모두가 바라던 통일독립국가 건설이 지연되면서 사회는 급격하게 혼란에 빠져들었다. 매월 10,000여 건의 파렴치한 범죄가 발생하였으며, 이 숫자는 날이 갈수록 격증하였다. 범죄의 발생은 현실 사회의 병폐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었다.
광복 후 사회질서의 혼란과 악성 인플레로 말미암은 살인적인 물가고로 인해 대중생활은 도탄에 빠졌으며 생활에 대한 심각한 위협과 공포로 인해 많은 범죄가 발생했다. 범죄 가운데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떠나 오로지 국가사회의 행복을 희구하는 나머지 현실 법률에 저촉되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형벌을 받게 되는 소위 정치범도 상당한 숫자에 달했지만, 개인의 사욕 추구에 따른 범죄도 상당하였다. 1946년 5월부터 12월까지 8개월 동안에 총 건수 87,710건이 발생하였는데, 그 중 절도가 제일 많고, 다음으로 군정법 위반 및 폭행·강도·살인 등의 순서였다. 고소사건도 매월 200여 건에 달했는데, 대부분 적산 처리를 둘러싼 상해·사기·횡령 등이었다.196)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사업이 중단된 후에도 민중은 통일적 민주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요구를 계속했다. 한반도에 주둔한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소련군 사령관 치스티아코프 대장 간에는 미소공위사업 재개 문제로 여러 차례 서한이 교환되었고, 그 결과 쌍방의 의견차를 많이 줄일 수 있었다.197)
미소공위 재개 소식에 접한 반탁 진영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이들은 제1차 미소공위의 휴회 이래로 단독정부 수립의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이에 총력을 기울여 왔기 때문이었다.198)
미군정은 공위의 재개를 전후하여 좌익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탄압을 강화하고 각종 테러를 조장하는 한편, 자신들의 대변기관을 만들어 나갔다. 1947년 5월 7일 각 구·부·군별 인구 비례에 의한 입법의원 정원수가 결정되었다. 경기도는 29명으로 결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인천·고양·양주·수원·연백·옹진 등에서는 2명이 배정되었다.199)
제2차 미소공위는 1947년 5월 21일부터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렸다. 제2차 미소공위에서 중요한 것은 6월 11일에 발표된 ‘남북조선 제민주정당 및 사회단체와의 협의에 관한 규정’이었다. 임시정부 구성을 위한 협의 대상문제가 본격 제기되어 지난 시기 반탁을 했더라도 임시정부 협의 대상에 참가하겠다고 신청하면 협의 대상에 참가시킨다는 결정이었다. 전 12항의 규정 중 제6항에는 “공위에 참가 청원하고 또한 공위에서 승인된 민주 제정당 및 사회단체는 공동위원회가 상기한 정당 및 사회단체의 대표를 초청하여 남조선에서는 47년 6월 25일에 서울에서, 북조선에서는 47년 6월 30일에 평양에서 합동회의를 개최할 것이다”라는 대목이 포함되었다.200) 남한에서는 425개의 정당·사회단체들이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 가운데 좌익 진영은 70여 개인데 비해 반탁 우익 진영은 300개가 넘었다.
미소공위 코뮤니케 11호에서 예고한 대로 6월 25일 오후 서울의 중앙청 회의실에서는 425명의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슈티코프의 사회로 서울 합동회의가 열렸고, 7월 1일과 2일에는 평양의 북조선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합동회의가 이어졌다.
미소공위가 열리면서 좌우합작위원회와 공위 참여파의 활동이 강화되어 반탁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반탁 세력은 상대 진영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김규식에게는 정치적 흑색선전을, 여운형에게는 테러를 강행하였다. 「동아일보」·「민중일보」·「현대일보」 등에서는 김규식을 ‘2000만 원 고리짝 사기사건’과 연루시켜, “김박사의 과도한 노망”, “적색(赤色) 원조” 등으로 보도하였다.201) 이 사건으로 김규식과 이승만은 ‘최종 결별의 갈림길’로 들어섰다. 하지는 7월 1일 이승만과 김구에게 ‘정치암살’ 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표하였으며, 이들은 이에 대한 반박 서한을 발표하였다.
7월 3일, 김규식·여운형·홍명희·안재홍 등 60여 명은 미소공위에 대처하기 위한 임시적 연합체의 성격을 갖는 시국대책협의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참가자들이 개인자격으로 참여하여 대중단체나 정당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명망가 중심의 가두조직에 머물렀다.202)
한편 사회 개혁이 지체되면서 남한의 경제 상황은 악화되었다. 일본 자본이 물러감에 따라 자본·기술·원료·기계 등을 확보하지 못한 공장들이 속속 휴·폐업하였다. 광복 후 1년 사이에 공장의 43%가, 노동자의 60%가 줄어들었다. 더욱이 해외에 강제 징용되었던 노동자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실업자는 급속히 늘어났다. 200여만 명의 노동자 중 반 이상이 실업 상태에 있었고, 또한 반봉건적 지주소작제가 잔존함으로써 70% 이상의 농민이 생계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식량 문제였다. 300여만 명에 달하는 동포들이 일시에 귀환하여 인구가 늘어난 데다 유통체계가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미군정은 쌀을 자유 판매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악덕 상인·지주들은 이를 이용하여 쌀을 매점매석하였고, 그 결과 쌀값이 폭등하였다. 이에 미군정은 급박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6년 봄 곡물수집령을 공포하였다. 곡물수집은 지주와 악덕 상인은 제외한 채 경찰을 동원하여 농민이 지닌 쌀을 강제로 수탈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미군정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어 각지에서 ‘쌀을 달라’고 요구하는 항의와 저항이 그치지 않았다.
1947년 6월 12일 군정청에서는 빈민구호용 물자를 각 지역에 배당하였다. 미국으로부터 들어온 빈민구호용 물자는 약 50화차였는데, 이 가운데 경기도가 6화차를 배당받아 그 일부를 안산 지역에도 분배하였다.203)
1947년 9월 9일 경기도 공보과는 도내 미곡반입과 출하권 담당기관을 고지하였다. 이로써 경기도 내에서는 미곡 운반과 출하의 권한을 정부로부터 부여받은 정부대행기관과 미곡수집소·식량배급소 이외에는 미곡 운반을 금지하였다. 불법 운반을 발견하는 때는 쌀을 몰수하여 경기도 식량사무소에 인계하여 수집미와 함께 일반에 배급하며, 미곡을 불법으로 운반한 화물자동차는 억류하였다가 미곡 운반에 사용하고 그 운전수는 운전면허를 취소하였다.
이에 따라 안산 지역을 포함한 도내의 각 정미소는 물론 누구든 미곡 도정을 정지당하였다. 불법 도정으로 적발되면 쌀은 몰수하고 정미소의 영업허가를 취소하였으며, 경찰에 연락하여 동력 허가를 취소하는 한편, 정미소원과 정미를 부탁한 사람을 처벌하였다.204) 그 결과 안산 지역의 중소 상공업이 크게 위축되었다.
한편 1947년 6월 15일 경기도 물가감찰서는 남북 밀교역 상태를 조사하여 발표하였다.
“소자본 상인(약 30,000원 정도)은 육로로, 대자본 상인은 연안·인천·마포항을 이용하고 있다. 이북에서 수출하는 물품은 비누·성냥·양말·비료(10관 한 포대 대금 이북 800원, 이남은 쌀 소두 세 말에 교환)·북선비단·중고양복·설탕(대련 등지에서 팔로군이 일본군 창고에서 가져온 것. 이북 시세 130~150원, 이남 시세 한 근 230~1560원) 등이다. 이남서 수출되는 물품은 식량(미국 밀과 쌀)·의료약품(미국제 약품과 염산 키니네, 사카린 등)·생필품(의복·전구 및 기타 잡화)이며, 수입품은 세탁비누·세숫비누(흥남제)·건명태·해산물·비료(흥남 암모니아)·농우·설탕 등이다.”205)
한편 미국은 1947년 9월 17일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다. 11월 5일 유엔 총회에서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자고 결의하였다. 1948년 1월 23일 북한 당국이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방문을 거부하자 미국은 남한만의 선거 실시안을 유엔에 제출하였고, 이는 2월 26일 유엔 소총회에서 통과되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이에 반대하는 민중의 투쟁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중도파 정당들은 각 정당협의회를 결성하고 유엔 결의안이 조선민족의 주권을 무시하고 자주적인 정부 수립을 제약하는 동시에 민족 분열을 초래할 것이라고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미·소 양군의 즉시 철수와 남북정당대표회의 구성을 통하여 자주적 남북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고 촉구하였다. 사태 확산을 우려한 경기도는 1948년 1월 30일, 각 정당·사회단체의 지부 집회 및 시위시 사전 허가를 고시하였다.206)
1948년 2월 민족자주연맹은 민족분단을 저지하기 위해 남북요인회담의 개최를 요구하는 서신을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냈다. 김구도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을 통해 통일된 민족자주국가 수립을 촉구하였다.207) 김구의 비장하고 단호한 결의 표명은 전체 민족에게 커다란 감명과 충격을 전해 주었다. 북한은 김구와 김규식의 제안에 대하여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남북한의 모든 사회단체 대표들이 평양에서 연석회의와 요인 회담을 갖자고 다시 제의하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의 제의를 받아들여 4월 말 입북하였다.
남북연석회의는 1948년 4월 19일부터 26일까지 남북한의 정당·사회·종교·문화·청년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전체 56개 참가단체 중 41개 단체가 남한에서 참가했는데, 남로당·인민공화당·신진당·사회민주당·민주한독당·근로인민당·근로대중당·농민당·한국독립당·청우당·민주독립당·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민중동맹·민족자주연맹·문화단체총연맹·여성동맹·자주여맹·농맹·민애청·전국청년회·유교연맹·재일본조선인연맹·기독교민주동맹·불교도연맹·불교청년당·조선어연구회·혁신복음당·민주구락부·민학련·반파쇼투쟁위원회·천도교학생회·민족대동회·3·1동우회·전미회·민족문제연구소·삼균청년동맹·독립운동자동맹·학병동맹·민족해방청년동맹·청년애지회·남조선신문기자회 등이었다.208)
회의에 이어 4월 27일부터 30일에 걸쳐 남북 정치지도자들 간에 요인 회담이 열렸다. 회담에 참가한 정치지도자들은 미·소군 즉시 철수, 전조선정치회의 소집,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통일조선 입법기관 선거, 남한 단독선거 결과 불인정 등을 결의하였다.209)
‘4김 지도자’들의 만남에서는 이외에도 남한에 관개용수와 전기를 다시 보내 줄 것에 대한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남한의 정치 세력은 단독선거를 저지할 만한 힘이 없었으며, 일부 합의사항을 실행에 옮기도록 사후 압력을 행사하지도 못하였다. 연석회의에서 합의되었던 단전·단수 문제는 당시 안산 지역을 포함한 여러 지역에 심대한 피해를 초래하였다. 당시의 신문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1948년 5월 29일 경기도 내 단전 피해 몽리면적이 1만 8천여 정보로 집계, ……수도기인 6월 이내에 전기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552,171석의 피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즉 경기도 내 수리조합 44개소 중 전기양수기를 사용하는 곳이 15개소로 전기 관계로 현재 배수를 못하고 있는데…… 결국 앞으로의 해결 여하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다 한다.”210)
“1948년 5월 29일, 단전으로 인천 일대 300여 공장이 마비 상태, 북조선으로부터 송전이 중지된 후 인천의 산업능률은 저하 일로를 밟고 있다. ……25일 이후부터는 아주 계획성 없는 송전이 계속되어 인천의 350여 공장은 전면적인 마비 상태에 빠졌다. 단전의 피해는 주동·주물·방직·화학·고무공업에 혹심한 타격을 주고 있어 작금에 있어서는 이 계통의 생산은 전연 없고 대한제분과 식량영단에 대한 작업 불능은 민생 문제에 큰 위협을 주고 있다. 또한 소사수리조합은 단전의 영향으로 물이 없어 이앙기를 목전에 두고 부근일대는 폐농 상태에 빠졌다.”211)
한편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공산주의자 주도의 투쟁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48년 2월 7일에는 남로당의 지도에 따라 노동자와 학생·농민이 단독선거에 반대하여 전국적인 총파업과 대규모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투쟁에서 57명이 죽고 10,584명이 검거되었다. 1948년 2월 20일 경기도 노동국은 소요사건시 도내 파업 공장 수와 인원을 발표하였다. 안산 지역의 구체적인 정황은 알 수 없지만, 도내 동양방직·조선제마를 위시하여 6개 공장이 동일 상오 7시 40분경 동요되었는데, 경찰의 제지로 8일에는 완전 복구되었다. 당시의 참가 인원은 2900여 명이었고, 그 중 30명이 체포되었다.212)
반대 운동은 5월 10일의 총선거 때까지 전국 각지에서 계속되었다. 남로당의 지도하에 파업, 동맹휴학, 시위, 경찰서·관공서와 투표소 습격 등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1948년 4월 3일 제주도 민중이 봉기하였다. 남한 단독선거 반대, 미군 철수, 극우 테러 반대 등의 구호를 내걸고 시위를 벌이던 제주도민을 극우청년단체가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봉기는 무장봉기로 확대되었다. 이 항쟁은 1년 넘게 지속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한반도가 친미·친소의 양 진영으로 분리되는 움직임과 더불어 좌우의 청년단체들이 각지에서 창립되어 서로 대립하였다. 이 단체들은 정치단체의 보조조직으로서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좌익의 청년대중조직인 전국청년단체총동맹이 1945년 말에 조직되었고, 이듬해인 1946년 말에는 조선민족청년단(족청)·서북청년회 등 다수의 우익단체가 창립되었다. 이범석이 이끄는 족청은 군정의 공식기구로서, 군정으로부터 자금 지원 및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다. 안산에서 족청 활동을 주도한 인물은 이병은이었다. 그는 이후 면의원을 거쳐 자유당에서 활동하였다.
한반도를 둘러싼 좌우의 갈등은 안산 지역에서도 극단적으로 표출되었다. 1947년 9월 말 새로운 우익단체로서 대동청년단이 창립되고, 이어 대동청년단 시흥군지부가 10월 2일 수암면에서 결성되자 대동청년단원의 좌익 가담자에 대한 폭력행위가 속출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수암면 일대에 일종의 자생적인 민족주의적 계몽단체로서 파악동인회(波嶽同人會)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김완종·유보형 등을 중심으로 독서 토론과 연극 공연 등의 계몽활동을 벌여나갔으며, 이를 통해 좌우 이념 대립을 타파하고 민족이 하나로 단결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과거 좌익 가담자를 포섭함으로써 이들을 대동청년단의 테러로부터 보호하려 노력하였다. 이후 파악동인회는 대동청년단을 견제할 만한 역량을 키우기 위해 스스로 족청에 가입하여 조선민족청년단 안양지부로 모습을 바꾸었다. 213)
1948년 3월 17일 미군정장관은 ‘법령 제175호의 부록 제1호’로 선거구를 발표하였는데, 안산 지역의 선거구는 수원군 갑선거구에 반월면이 들어갔고, 그 외 시흥군과 옹진군에 일부 배정되었다. 남한 단독선거는 1948년 5월 10일 실시되었다. 5·10선거는 좌익계는 물론 중립계와 일부 민족 진영의 불참으로 긴장된 분위기하에서 미군정청이 마련한 ‘국회의원선거법’에 따라 예정대로 치뤄졌다.
5·10선거에는 등록한 유권자의 95.5%, 자격 있는 유권자의 약 75%에 해당하는 7,487,600명이 참여하여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였다. 당선자의 소속은 무소속 후보자가 85명으로 전체 의석의 42.5%를 차지하였다. 그 밖에 독립촉성회 55명(27.5%), 한민당 29명(14.5%), 대동청년단 12명(6%), 조선민족청년단 6명(3%),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2명(1%) 등이었다.214)
5월 31일 임기 2년의 제헌국회가 마침내 개원되었고, 6월 8일 헌법·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를 구성했으며, 7월 1일에는 국회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했다. 7월 12일 ‘대한민국헌법’이 채택되어 17일 공포되었고, 7월 20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는 예상대로 이승만이 재석 196명 가운데 180표라는 압도적 지지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광복 3주년이 되는 1948년 8월 15일 서울에서 대한민국이 공식 출범했다. 같은 날 상오 0시를 기해 남한의 미군정은 폐지되었다.
한편 대한민국 수립에 산파역을 맡았던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10월 8일 유엔에 제출할 자신의 최종 보고서를 채택했다. 이 보고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이 정부의 기능은 점차 발전되어 가고 있다고 지적함과 아울러, 유엔의 모든 가맹국들의 두터운 협조 아래 한반도 전체의 독립과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방법을 권고했다. 제3차 유엔 총회에서 이 보고서는 심의되었다.
이때 미국은 유엔이 대한민국의 합법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결의안을 제출했으며, 12월 12일 유엔 총회는 찬성 48, 반대 6, 기권 1의 표결로 미국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관찰하고 협의할 수 있었고, 전체 한인의 대부분이 살고 있는 코리아의 한 부분 위에 효과적인 통치와 관할권을 갖는 합법적 정부가 수립되었다.”고 지적하면서, 대한민국이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선언하였다.215)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정권은 미군정이 유보하였던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처단과 토지 개혁 등 식민지 잔재 청산 문제에 부딪혔다. 소장 국회의원들의 발의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에 상정되었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와 특별재판부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은 처음부터 거센 압력에 부딪혔다.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은 이승만 정권의 비호하에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관제 데모와 인신공격·테러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위원회의 활동을 방해하였다.
안산 지역의 광복 이후 최대 관심사는 소작제도 개선이었다. 「조선경제연보」 1948년판에 따르면, 1945년 말 총 농가 2,065,477호 가운데 자립농가는 286,824호로 약 14%에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자작을 겸한 소작이나 순소작농이었다. 대부분의 농민은 고율의 소작료 때문에 반노예적인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사정에서 남한에 진주해 온 미군정 당국은 1945년 9월 군정법령 제9호로 ‘최고소작료결정의건’을 공포하였다. 이 법령의 주요 내용은 소작료를 총생산량의 3분의 1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소작료의 지급 형태는 현물 지급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소작료의 금납도 인정하였다.
광복과 더불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재산과 일본인 및 일본법인이 소유한 농지를 관리하도록 신한공사(新韓公社)를 설립하였다. 신한공사가 관리해 온 일반 농지는 1948년 2월 말의 경우 282,480정보로서 남한의 총 경지면적의 13%에 해당하였고, 1947년도 연간 경작료 수입은 1,356,922,822원(圓)에 달하였다. 군정법령 제173호 ‘귀속농지매각령’ 및 제174호 ‘신한공사해산령’에 의해 1948년 3월 신한공사는 중앙토지행정처로 개편되었다.
귀속농지매각령의 주요 내용은 당해 농지를 경작하고 있는 소작인에게 우선 2정보를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매각하도록 하였고, 매도가격은 1년 생산량의 3배로 하였으며, 상환 방법은 매년 생산량의 20%를 15년간 현물로 상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이 법령에 의하여 불하된 농지는 귀속농지 282,480정보 중 약 87%에 해당하는 245,554정보였다. 비교적 경지정리가 잘 되고 수리시설이 좋은 이러한 귀속농지의 처분은 그 뒤 농지개혁의 실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216)
1948년 8월 15일 미군정이 종식되고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헌법’에 의하여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법률로 정하도록 하여 농지 개혁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1948년 8월 농림부장관은 농지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조속한 단행을 선언하였다. 1948년 11월 농림부에서 농지개혁법안의 초안을 발표한 뒤 1949년 2월에 국회에 제출하였다. 한편 국회에서도 산업노동위원회에서 독자적인 농지개혁법안을 만들었다. 국회 본회의의 심의 과정에서 각종 수정안이 속출하여 광범위한 수정을 거친 끝에 보상과 상환을 각각 평년작의 15할과 12할 5푼으로 하는 농지개혁법이 1949년 6월 공포되었다.
농림부는 농지 개혁의 연내 실시를 목표로 예산 확보를 꾀하는 한편, 전국적인 농지 소유 실태 조사에 착수하였으나 예산의 부족과 농지개혁법에 대한 개정 요구로 지연되었다. 국회는 다시 정부의 의사대로 상환액도 15할로 보상액과 일치시키고, 지주에게는 기업자금으로 정부 보증하에 융자할 수 있는 지가증권을 발급하기로 한 개정안으로 통과시켰다.
1950년 3월 10일 농지개혁법의 개정안이 공포되고 그해 3월 25일에 시행령이 공포되었으며, 4월 28일에 시행규칙이 공포되었다. 농지개혁법의 제정은 헌법 제86조의 정신에 따라 농지를 농민에게 재분배하는 획기적인 농지 개혁 사업을 실현한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법의 주요 내용은 ① 매수대상 농지는 농가 아닌 자의 농지, 자경하지 않는 자의 농지, 호당 3정보 상한을 초과하는 부분의 농지 등이었고, ② 분배 면적은 호당 3정보를 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상환액은 평년작 생산물량의 15할로 하되 5년간 균등 납입하도록 하였다.
1949년 6월을 기준으로 완료된 농가 실태 조사에 따르면, 총 매수 대상 면적은 601,048정보였으며, 총 분배 예정 면적은 귀속농지 232,833정보를 포함하여 833,881정보로 총 경지면적의 40.2%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농지 개혁 대상 농지의 매수와 분배가 일단락된 1957년 12월 말 현재 농림부가 집계한 분배 농지와 수배 농가 호수는 470,022정보에 1,549,532호에 불과하였다.217)
안산시는 1914년 이후 수원군 반월면, 시흥군 수암면·군자면을 포괄하였다. 그리고 1949년 8월 15일 대통령령 제161호에 따라 수원군 반월면이 화성군 반월면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1949년 9월 26일 군자면의 유지로 양조장을 경영하던 정규창이 군자면사무소 부지로 800평의 땅을 희사하였고, 동년 10월 10일에는 수암면민들이 안산시장 설치를 진정하였다.
제7절 한국전쟁과 안산
1. 전쟁의 배경
남북한에 각기 정권이 수립되자 소련군이 먼저 북한에서 철수하였고 미군도 1949년 6월 철수하였다. 그러나 남한에는 500여 명의 미군사고문단이 남아 한국군의 인사·행정·작전·장비 등을 지휘·감독하였다. 미국은 또한 1949년 말에 남한 정부가 미국식 민주주의의 기초 위에서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도록 원조와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침을 세웠다.
이승만은 1949년부터 수십 차례에 걸쳐 북진통일을 주장하였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한편으로는 미국의 원조와 지원을 확보하여 북한의 위협과 평화통일론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의 남북협상론 및 평화통일론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1950년 5월 3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24명의 당선자밖에 내지 못한 이승만 정권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126명의 무소속 의원 중 상당수가 남북협상과 평화통일을 지지했다.
북한 정권은 남북의 정당·사회단체들로 협의회를 구성하고, 이의 주도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 정권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을 민족반역자로 규정하여 협의 대상에서 배제시켰다. 이는 사실상 이승만 정권의 붕괴를 전제로 한 통일 방안이었다.
남북한 정권이 서로를 부정하는 가운데 38선 부근에서 무력 충돌이 빈번히 일어났다. 주로 옹진반도·개성·백천·춘천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는 때때로 대대급의 대규모 전투로 확대되었으며, 38선을 기준으로 각기 4km에서 10km까지 상대 지역으로 진격해 들어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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