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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재실,묘소

김기병 선생 효자 정문, 안산김씨 열녀 정려문

by 연송 김환수 2008. 12. 29.



김기병(金基炳)

 

 


-김기병선생 효자문-

 

 효자 정문 (포천시 청산면 금동리) 

 

본관은 안산이고 조선조 초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진 위정공(威靖公) 김정경의 다섯째 아들인 안성위(대호군, 시호 호평공 한) 의 15대 후손이다.

 * 안성위의 아들 참판공 휘 맹혁파(청산)라고도 합니다.

 

김흥섭(金興燮)의 아들로 포천 청산면 금동리에서 출생하였다.어려서부터 효성이 극진하고 재예(才藝)가 뛰어나서 배우면 잊지 않고 기억하였으며 어머니의 마음을 잘 받들고 아침, 저녁으로 한냉서열(寒冷暑熱)을 살펴 편안하게 하여 드렸다.

 

17세 되던 겨울 어머니가 중한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해 소생시켜 드렸다.

 

그런데 얼마 후 어머니께서 또 병환이 나자 정성을 다하여 시탕(侍湯)하였으나 별 효과를 얻지 못하여 동동촉촉(洞洞燭燭-공경하고 삼가서 매우 조심스러운 모습)하던 중 의원 말이 노루의 간(肝)이라야 약효가 있겠다 하므로

 

김기병은 산에 올라 노루를 구하고자 이 골짝, 저 산골을 헤메며 노루 한 마리만 눈에 띠도록 하여달라고 하늘에 심축(心祝)하기 여러 날 만에 노루 한 마리가 앞을 지나는 지라 김기병은 손쉽게 노루를 잡아 그 간을 어머니께 약으로 드렸더니 특효가 있어 어머니 병환이 나았다.

 

김기병은 부부가 합심하여 어머니 받들기를 더욱 더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려 그의 어머니 70세가 넘으셨다.

 

그 후 노환으로 또 위독하여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기 여러번 기적으로 회생하여 여러 날 동안 연명(延命)하다 추운 겨울에 산과(山果)를 잡숫고자 함으로 김기병은 눈이 쌓인 높은 산에 올라 사방을 헤매었으나 막연한 일이었다.

 

오직 효심에서 우러나오는 일념뿐이었다.

 

아득히 눈이 쌓인 바위 밑에 앙상한 머루덩굴이 솟아 있으므로 김기병은 쌓인 눈과 낙엽을 헤치고 보자 머루 두어 송이가 달려 있었다.

 

기쁨에 넘쳐 어머니께 바치니 병환은 완쾌되었으며 보는 사람들은 하늘이 도움이라고 찬탄치 않는 이 없었으며 탁이(卓異)한 효행이라고 군천(郡薦)으로 조정에서는 양로지자(養老之資)를 후상(厚賞)하는 은전(恩典)을 내렸고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융희(隆熙)4년 두 번째로 특상을 내렸다.김기병이 별세 후 유의지사(有意志士)의 찬양문이 많았고, 각 교화단체의 포상도 있었으며, 그 아들 김태진(金泰鎭)도 효우(孝友)가 출중하였다고 한다.

 

 

 

 



- 김기병선생 효자문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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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병선생 포창 서문-

김기병의 효자 정문(旌門)은 1884년(고종21)에 내려졌으나 당시의 정문은 없어졌고, 청산면 금동리에 김기병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旌閭)가 서 있는데 대성학원 교수 안산 김기병 효자지문(大成學院 敎授 安山 金基炳 孝子之門)이라는 현판과 포창서문(褒彰序文) 그리고 포창시(褒彰詩)가 걸려있다.
포창서문에는 자모병환시탕시(慈母病患侍湯時)에 단지(斷指) 회생지사 설중 구헌산도(回甦之事 雪中 求獻山桃) 산장자래부복지사(山獐自來俯伏之事)라고 씌어 있다.
나라에서는 대성학원 교수(大成學院 敎授)라는 직위(職位)와 하사금을 내려 효자문을 짓도록하여 기리게 했다고 한국 효열록(韓國孝烈錄)에 기록되어 있다.


 

 

 

 


                   -김기병선생 표창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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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시 산곡동 거문돌 마을

 

 

 

 

 

 

열녀 안산 김씨와 평산 신씨의 정려문

 

 

 

안산김씨 열녀 정문 자세히 보기 :  http://blog.daum.net/yescheers/6051144 

 

의정부시 산곡동 거문돌 마을입구에는 열녀 안산 김씨와 평산 신씨의 정려문이 있다.

안산 김씨와 평산 신씨는 류씨 집안에 시집온 동서지간이었다.

 

안산 김씨는 선조 때 의금부사를 지낸 류영겸의 아내이고,

평산 신씨는 류영겸의 아우 가선대부 이조참판 류영순의 아내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씨와 신씨 두 동서는 강원도 금성부 산곡간으로 피난 갔는데, 포성이 가까워지면서 왜병을 만나게 되자

 

김씨는 품고 있던 칼로, 신씨는 물속으로 뛰어들어 자결하였으니 선조 25년(1592) 6월 6일의 일이었다. 두 동서가 함께 정절을 지켰다 하여 열녀정문을 내렸다.

 

여기에는 선조25(1592)년 임진왜란 때 순절한 열녀 류영겸의 아내 안산 김씨와 류영순의 아내 평산 신씨의 쌍절정려비(雙節旌閭碑)가 함께 모셔져있다.

 

육이오(六二五) 후에 후손들이 이분들의 쌍절비(雙節碑)를 묘소에서 가져와 정려각 경내에 세웠다.

 

이 정려각에 함께 있는 충신 정려는 1637년 병자호란 때 순절한 철원도호부사 류질의 정려입니다.

철원도호부사(류질)공은 1637년 병자호란 때 순절하였는데 1639년 충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후에 이조판서로 가증(加增)되었고 현종12(1671)년에 충신정려가 내려져 정려각을 세웠다.

 

 

 

 

 

 

 

 

 

 

 

 정려문 참고자료

 

정운 충신각   전남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 정운(1543∼1592)의 정려문.

 전라남도 기념물 제76호.

 

 

정려문 참고자료 : 엄흥도 정려각

엄흥도 정려각은 단종의 능인 장릉 안에 있으며 충신 엄흥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운 것이다. 충신 엄흥도가 영월호장으로 있을 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청령포에서 머물다가 관풍헌에서 1457년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려진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그 시신이 강물에 던져지자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도받고 있다.

영조 34년(1758)에 공조판서로 추봉되었고 순조 33년(1877)에 충의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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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기환 배위 광산김씨 효열비 (基煥 配位 光山金氏 孝烈碑)

소재지 : 경남 합천군 묘산면 광산리 (慶南 陜川郡 妙山面 光山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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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따라 가버린사랑/섹스폰연주곡~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립구나
푸르던 잎 단풍으로 곱게 곱게 물들어
그 잎새에 사랑의 꿈 고이 간직 하렸더니

아아아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 낙엽따라 가버렸으니

아아아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 낙엽따라 가버렸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