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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재실,묘소

조선시대 김취려(金就礪), 김말(金秣) - 김맹전

by 연송 김환수 2011. 11. 6.

 

(안산 전통인물)

 

김취려(金就礪) :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산(安山). 자는 이정(而精), 호는 잠재(潛齋)·정암(靜庵). 이조판서를 지낸 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의 6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김광오(金光澳), 아버지는 김휘(金暉)이다.

 

[활동사항] 김취려는 퇴계(退溪) 이황(李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내직으로 지평과 집의를 지냈으며,

외직으로 나아가 평산(平山), 죽산(竹山), 수원, 적성(積城)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김취려에 대해 “비록 이황의 문하에 다녔다 하나 사실은 도학(道學)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평가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에 있다.

 

사헌부 집의공 잠재 취려 지 묘

잠재공 휘 취려 유사

아래 해석문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헌부집의 (司憲府執義)

 

조선시대 사헌부(司憲府)의 종삼품(從三品) 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1401년(태종 1)에 중승(中丞)을 고친 이름으로, 중승(中丞) 또는 아장(亞長)이라고 하였으며, 대사헌(大司憲: 從二品) 이하 장령(掌令: 正四品)·지평(持平: 正五品)까지의 다른 사헌부 관원과 함께 통칭 대관(臺官)이라고 하였다.

 

학식(學識)과 덕행(德行)이 높아서 이조(吏曹)로부터 천거(薦擧)된 대관을 특히 남대(南臺)라고 하였다. 한번 이 벼슬을 지낸 사람은 아래 벼슬을 제수 받지 못하였다.

 

모든 대관은 사헌부의 청환직(淸宦職)으로, 문과 급제자 중 청렴 강직하여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바를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하므로, 승문원(承文院), 성균관(成均館), 홍문관(弘文館) 등을 거친 젊고 기개가 있는 인재들이 임명되었는데, 그만큼 직무가 막중하기 때문이었다.

 

이조의 전랑(銓郞)과 함께 전 조선시대의 사족사회(士族社會)의 틀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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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말 (金秣) : 조선시대 안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산(安山). 부사과(副司果) 김취현(金就礥)의 아들이나 큰아버지인 김취려(金就礪)에게 입양되었다.

 

[활동사항] 김말은 음직으로 사헌부감찰을 거쳐 정읍현감을 역임하였다.

 

[묘소]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에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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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김씨의 유허가 있는 안산시에는 신도시 건설로 많은 산소가 

이장을 하였지만 지금도 많은 선조님들이 안식을 하고 계시는 곳

이다. 

안산김씨 사재감정공파(안산파) 후손들의 묘소 사진들을 올려 봅니다.

 

통훈대부(정3품) 사재감정 김맹전 묘

사재정공 휘 맹전 지묘 : 연성군 김정경 손자 * 묘소 : 안산시 선부동 석수골

숙인 경주이씨 묘소 : 광주(廣州) 현천리(玄川里)

= 하남시 감북동(위정공 묘소 우측 안장),  숙인 선산김씨 묘소 사재정공 맹전 합장

 

 

선부동(仙府洞)

옛날에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던 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선부리(그 우물을 '석수골 우물'이라 함) 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대월면 선부리와 달산리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군자면 선부리로 개칭 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거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安山市 仙府洞)으로 되었다.선부동은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관내에서 최초로 장시(산대장)가 섰을

만큼적대던 곳이었다. 특히, 안산의 곽적성씨중 안산 김씨 후손중에 김맹전 (金孟銓)의 묘를 석수골에

쓴 후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안산에 안산 성씨의 뿌리를 내렸다 한다.

 

석수골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조선조 태종때 좌명공신으로

연성군에 봉해진 김정경(1345~1419)의 손자인 김맹전의 묘를 쓸 때 묘 앞에 설치할 비석을 배에 싣고 와서 석공이 돌을 깎아 석물을 세웠다

하여 석수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으로 개의 아들이다. 자는 극유로 강희안의 사위이다. 성종(世宗) 14년(1483) 춘당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감에 이르렀다.

 

안산시 원곡동에 묘가 있었으나 안산 신도시 건설로 인하여 충청도로 이장되었다.

 

본관은 안산으로 교감 맹강의 아들이다. 자는 자수, 호는 모기재로 김식의 문인이다. 중종(中宗) 14년(1519)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이 되었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처벌받았으며,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안산시 원곡동에 묘소가 있었으나 신도시 건설로 인하여 충청도로 이장되었다.

 

충좌위부사직(忠佐尉副司直) 공(公)

≪경국대전≫에 나타난 오위의 편제는 대체로 병종(兵種)과 지방 분담으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을 이루는 병종의 편제는 의흥위(義興衛)에 갑사(甲士)와 보충대(補充隊), 용양위(龍蚊衛)에 별시위(別侍衛)와 대졸(隊卒), 호분위(虎賁衛)에 족친위(族親衛)·친군위(親軍衛)·팽배(彭湃), 충좌위(忠佐衛)에 충의위(忠義衛)·충찬위(忠贊衛)·파적위(破敵衛), 충무위(忠武衛)에 충순위(忠順衛)·정병(正兵)·장용대(壯勇隊) 등이 소속되어 입직(入直)과 시위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오위는 각기 지방의 병력을 분담, 관할하였다. 의흥위는 서울의 중부와 개성부 및 경기·강원·충청·황해도의 병력을 관할하고, 용양위는 서울의 동부와 경상도를, 호분위는 서울의 서부와 평안도를, 충좌위는 서울의 남부와 전라도, 충무위는 서울의 북부와 함경도의 병력을 각각 관할하였다. 또한, 오위의 각 위는 중·좌·우·전·후의 5부(部)로 나누어 전국의 진관(鎭管)을 망라한 지방 군사를 소속시켰다. 따라서 오위체제는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즉, 중앙군을 망라한 구체적 부대 조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을 망라한 대열(大閱) 등 훈련 체제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오위의 군계급과 정원 및 품계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데, 이는 오늘날의 계급 개념과는 다른 것이었다. 즉, 상호군(上護軍, 정3품) 9인, 대호군(종3품) 14인, 호군(정4품) 12인, 부호군(종4품) 54인, 사직(司直, 정5품) 14인, 부사직(종5품) 123인, 사과(司果, 정6품) 15인, 부장(部將, 종6품) 25인, 부사과 (종6품) 176인, 사정(司正, 정7품) 5인, 부사정(종7품) 309인, 사맹(司猛, 정8품) 18인, 부사맹(종8품) 483인, 사용(司勇, 정9품) 42인, 부사용(종9품) 1,939인 등이 그것이다.

오위의 책임자는 종2품의 겸직인 장(將:오위장)이지만, 실제적인 오위의 최고 지휘관은 정3품 당하관인 상호군(上護軍)이었다.

 

                                                       平安南道 价川郡守 (평안남도 개천군수)

 

부사과 :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두었던 종육품(從六品) 서반 무관직

 

생원 (교관불사(敎官不仕 : 교관벼슬을 주어도 나서서 하지 아니함)

 

증 호조참판

호조참판 (戶曹參判)

조선시대 호조(戶曹)에 둔 종이품(從二品) 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호조판서(戶曹判書: 正二品)가 있고, 아래로 호조참의(戶曹參議: 正三品 堂上) 1원, 호조정랑(戶曹正郞: 正五品), 호조좌랑(戶曹佐郞: 正六品) 각 3원이 있다. 판서를 정경(正卿)이라고 하고, 참판은 아경(亞卿)이라고 한다

 

상서원 판관((判官) : 조선시대 종5품 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