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안김 재실,묘소

안산김씨 세갈(묘비명), 행장 - 김처암

by 연송 김환수 2008. 3. 30.

 

 

연성군 김정경 묘

 

 

 

 

 

 

 

 

 

 

김처암(金處巖)


1755(영조 3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安山). 자는 중려(仲礪), 호는 진헌(眞軒)으로 고조부는 증 대사헌 촌로공 성대(聲大), 증조부는 제주목사 죽헌(竹軒) 석보(錫保), 조부는 상성(相星)이고, 아버지는 진사 양직(養直)이며, 어머니는 동부승지 신의립(辛義立)의 딸이다.

 

1795년(정조 19) 응제시(應製試)에서 선발된 생원으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문과] 정조(正祖) 19년(179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2위

[생원시] 정조(正祖) 7년(17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생원 3등(三等) 13위


1806년(순조 6) 지평으로 있을 때는 시파를 공격하는 김달순(金達淳)을 엄하게 탄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순천에 유배되었다. 1809년에 풀려나 벼슬이 집의에 이르렀다.


편서(編書)로 김은부(金殷傅)이하 안산김씨들의 묘문·행장 및 사적을 모아 엮은 《안산김씨가승 安山金氏家乘》이 전한다.

 

---------------------------------------------------------------------------------

 

 

안산김씨의 원조 김은부(?-1017) 이하 역대 선조들의 유문과 유사 등을 모은 책

安山 金氏의 遠祖 金殷傅(?-1017)이하 역대 先祖들의 遺文과 遺事 등을 모은 책

 

安山世碣(奎6980의 1), 金處巖(朝鮮)編.

 

             1冊(零本) 筆寫本 26.6×16.9cm.

安山 金氏의 遠祖 金殷傅이하 역대 先祖들의 遺文과 遺事 등을 모은 책이다. 당초 金殷傅의 15대손 金處巖이 朝鮮 正祖때 편찬했으나 刊年은 未詳이다. 奎章閣所藏本은 筆寫本이며 그 경위나 연대는 未詳하다. 4卷 2冊이며, 제1책은 安山世碣, 제2책은 安山世輓이다. 권별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1} : 蓮城君威靖公金(定鄕)謚狀·墓表, 慕箕齋校理公金(珌)墓碣銘, 贈大司憲公金(聲大)墓表, 贈大司憲公金(聲玉)墓碣銘, 副摠管公金(錫命)墓碣銘, 贈兵曹判書公金(錫範)墓碣銘, 節度使公金 (錫保) 行狀, 學生公金(錫奎)墓碣銘, 知中樞公金(相斗)行狀, 刑曹正郞公金(定五) 墓碣銘, 進士公金(秀五) 墓碣銘, 生員公金(養直)行狀, 大司諫公金(養心)行狀.

 

{권2} : 安山郡建置沿革, 尙書公金(殷傅)事蹟, 麗史抄錄尙書公以下事蹟, 尙書公奉使天朝詩, 文匡公金(元祥)事蹟, 威靖公(金定鄕)事蹟, 太宗朝敎佐命功臣金定卿書, 敎佐命原從功臣書, 會盟祭告文, 健元陵神道碑陰記, 獻陵碑陰記, 佐命功臣案, 平湖公金漑事蹟, 金氏科甲錄, 安山世派圖, 安山族譜始末序, 安山族譜序, 安山族譜跋, 同宗名行講定圖, 文匡公歙谷墓所尋訪記, 歙谷墓山圖, 僉樞公 金琳楊根郡鐵碑, 慕箕齋事蹟, 潛齋公金就礪事蹟, 退溪先生與潛齋酬唱詩, 退溪集潛齋記, 潛齋上退溪問目, 贈大司憲公事蹟, 文谷先生贈大司憲公詩, 大司憲公詩, 行嚴山地許葬家奴記, 燕谷祠新建記, 節度使公事蹟, 竹醉金公贈節度使公燕行詩, 英宗朝諭慶尙左兵使金錫保書, 崔氏婦安山金氏旌閭孝行.

 

{권3} : 世輓(세만)으로 되어 있으나 輓외에 祭文, 致祭文, 哀辭등도 들어 있다.

 

安山世輓(奎6980의 2), 金處巖(朝鮮)編.

             1冊(72張) 筆寫本 26.4×16.9cm.

1635년(仁祖 13)경부터 시작하여 英祖朝에 이르기까지 安山金氏 家系 가운데 특기할만한 인물이 죽었을 때 그 죽음을 애도하여 보내온 글과 祭文을 모아 놓은 것이다. 各輓은 당시 名士들의 것이며, 祭文은 대체로 親族이 지은 것이다. 金處巖(1755∼?)이 編하였다. 그 내용은 仁祖朝의 大司憲公挽부터 시작하였는데 그 당시 金壽增, 金昌集등 34명의 弔辭와 祭文 4편이 있다. 그 다음에는 副摠管公挽, 肅廟朝致祭文, 節度使公挽·祭文, 王世子致祭文, 防禦使公挽·祭文, 通德郞公挽·祭文, 生員公挽·祭文, 大司諫公挽·祭文, 通德郞公挽·祭文 등의 순서로 실려 있고 제일 마지막 祭文이 編者가 쓴 것으로 兄 金處莘의 죽음에 대한 祭文이다.

 

 

 ---------------------------------------------------

 

경덕국사(景德國師)

고려 목종 2년(999) ~ 문종 20년(1066)

 

고려 시대의 왕사(王師). 본관은 안산(安山). 속성은 김(金), 속명은 난원(爛圓). 안산현(安山縣;현 안산시 장상동) 출신으로 아버지는 호부상서 김은부(殷傅), 형은 병부상서 충찬, 할아버지는 안산김씨 시조 상서좌복야 긍필이고 문종의 외숙부이며, 대각국사 의천의 스승이다.

 

문종 12년(1058)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왕사가 되었고, 도승통(都僧統)을 역임하였다. 문종 19년 5월 문종의 아들인 후(煦;의천, 대각국사)를 중이 되게 하였고 화엄교관(華嚴敎觀)을 가르쳤다.

 

구룡산(九龍山) 복흥사(福興寺) 주지를 지냈다. 죽은 후에 복흥사에 비를 세우고 시호로 경덕(景德)을 내리고 국사(國師)로 추존하였다. 그의 묘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대 고려
연대 1072년(문종26년) 추정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용산구용산동6가 168-6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미상 / 미상 / 미상

 

 

 

 

 

 판 독 문

九龍山福興寺故 王師都僧統」
贈諡景德國師墓誌幷序」
國師諱爛圓俗姓金氏其先安山」
郡人也故尙書左僕射諱兢弼祖」
也故檢校太師上柱國諡安平公」
諱殷傅父也故安孝國大夫人李」
氏妣也故中樞使兵部尙書忠賛」
兄也故首座弘睡師也 師自削」
周羅脫身于豪戚間遭遇累朝歷」
揚緇秩纔及順耳陟爲 王師智」
慧花果自然成就賛謂人中之師」
子矣烏乎以咸雍二年丙午冬十」
月八日示化報年六十八僧夏五」
十七▨▨震悼咸▨迦文定入涅」
槃卽以其月 詔護葬事權之于」
五龍山南崗更取▨子冬十月竪」
碑塔▨九龍山福興寺軋隅尋奉」
靈骸移安于玆地順也門弟等弗」
杇是圖乃爲墓誌」
  九龍山兮山之秀」
  景德師兮師之尊」
  彼佛刹兮旣證果」
  此靈本兮且安魂」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복흥사 경덕국사묘지명 (福興寺景德國師墓誌銘)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돌아가신 왕사 도승통(王師 都僧統)이며 시호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명 및 서문

 

국사의 이름은 난원(爛圓)이고,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선조는 안산군(安山郡) 사람이다.

 

돌아가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긍필(兢弼)이 조부이고, 돌아가신 검교태사 상주국(檢校太師 上柱國)으로 시호가 안평공(安平公)인 은부(殷傅)가 아버지이며,돌아가신 안효국대부인 이씨(安孝國大夫人 李氏)가 어머니이다.

 

돌아가신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인 충찬(忠贊)이 형이고, 돌아가신 수좌(首座) 홍주(弘疇)가 은사이다.

 

국사는 머리를 깎고 호척(豪戚) 사이에서 몸을 빼어낸 이후 여러 대에 걸쳐 계속 승계(僧階)를 높여나갔다. 예순에 이르러 왕사(王師)가 되었으니, 지혜의 꽃과 과실이 스스로 무르익어 사람 중의 스승이라는 찬상을 받았다.

 

아, 함옹(咸雍) 2년 병오년(문종 20, 1066) 10월 8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68세이고, 승랍은 57세이다. 매우 슬퍼하여, 모두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신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곧 그 달에 조칙을 내려 장례일을 돌보게 하여 오룡산(五龍山) 남쪽 언덕에 임시로 모셔두었다가, 다시 임자년(壬子年? : 문종 26, 1072 ) 10월에 비와 탑을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서북쪽 모퉁이[乾隅]에 세우고, 영해(靈骸)를 받들어 이 곳으로 이장하여 모셔두었으니, 순리에 따른 것이다.

 

문하의 제자들이 위업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이에 묘지(墓誌)를 짓는다.

구룡산(九龍山), 산 중에 빼어나고 경덕국사(景德國師), 스승 중에 으뜸이시다. 저 사찰에서 이미 성불(成佛)의 진리를 깨우쳤으니

이 영혼의 터전에서 또 평안히 하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4세 김원황(金元晃) ?∼1062(문종 16).

고려시대의 대신. 본관은 안산. 예종 때 문하시중을 역임한 경용(景庸)의 아버지이다. 1057년(문종 11)에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되었으며, 1061년에 병부상서를 거쳐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이듬해 중추원사 병부상서(中樞院事兵部尙書)로 죽었다. 시호는 의경(毅敬)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黃雲龍〉

 

5세 김경용(金景庸) 1041(정종 7)∼1125(인종 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산. 아버지는 병부상서 원황(元晃)이다.

합문지후(閤門祗候)를 거쳐 광주판관(廣州判官)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어사중승(御史中丞)을 거쳐 1098년(숙종 3) 좌우유덕(左右諭德)·상서이부시랑 지어사대사(尙書吏部侍郎知御史臺事), 1101년 병부상서 동지추밀원사(兵部尙書同知樞密院事), 1103년 지추밀원사, 1105년 판상서공부사(判尙書工部事)가 되고, 예종이 즉위하자 태자태사 수사공(太子太師守司空), 1106년(예종 1)에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參知政事), 1107년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가 되고, 1109년 평장사(平章事)로서 최홍사(崔弘嗣) 등과 함께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 등의 여진정벌에 패한 책임을 들어 극론하고, 구성(九城) 환부를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실현하게 했다.

1110년 문하시랑평장사 판형부사(門下侍郎平章事判刑部事), 1112년 문하시중으로 협모위사공신(協謀衛社功臣)의 호가 더해지고 이듬해에 수태부 판상서이부사(守太傅判尙書吏部事)로서 낙랑백(樂浪伯)에 봉해졌다. 여러 차례 벼슬길에서 물러나려 하므로 왕이 특별히 좌부승선(左副承宣) 안당영(安唐潁)을 보내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얼마 후 허락했다.

1122년(예종 17)에는 광국동덕익성공신(匡國同德翊聖功臣)에 낙랑공(樂浪公)이 되었다. 예종으로부터 당시 최고의 국로(國老)대접을 받았다. 식읍 700호 (여지승람), 고려사 식읍 1,000호, 식실봉 300호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河炫綱〉

 

 

성명(姓名)  김경용(金景庸)    본관(本貫)  안산(安山)
시대(時代)
자(字)
호(號)    
이력(履歷) 김경용(金景庸)     
병부상서(兵部尙書) 원황(元晃)의 아들. 합문지후(閤門祗侯)·광주 판관(廣州判官)·어사중승(御史中丞) 등을 거쳐 1098년(숙종 3) 상서이부시·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를 지내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판상서부사(判尙書部事) 등을 역임했다. 1105년 예종이 즉위하자 태자태사(太子太師)·수사공(守司空)·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내고, 뒤에 협모위사치리공신(協謀衛社致理功臣)이 되고 수대보(守大保)·판상서리형부사(判尙書吏刑部事)로 수태사·악랑군개국후(樂浪郡開國候)에 봉해진 후 광국동덕익성공신(匡國同德翊聖功臣)이 되었다.




김경용(金景庸)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종26년, 1531)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 경상도 慶尙道 [1] > 경주부 慶州府   
상성군(商城郡) : 본래는 서형산군(西兄山郡)이었다. 동안군(東安郡) : 본래는 생서랑군(生西郞郡)이었다.
인물 김경용(金景庸) : 용모가 걸출하면서도 잘생겨 고귀하고 깨끗한 풍채가 있었다. 각문지후(閣門祗侯)로 광주 판관(廣州判官)으로 나갔는데 정사하는 것이 까다롭지 않았다. 숙종ㆍ예종 두 대에 벼슬하여 병부ㆍ호부ㆍ공부의 상서(尙書)와 문하평장사를 역임하고, 문하시중 상주국에 승진하였으며, 협모위사치리공신 판상서이형부사 낙랑군 개국백(協謀衛社致理功臣判尙書吏刑部事樂浪郡開國伯)에 가자(加資)되고, 식읍 수백 호를 받았다.

 

 

6세 김인규 (金仁揆) ?~1142

문하시중 경용(景庸)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여, 1117년(예종 12) 좌승선 (左承宣)이 되었다. 1122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지주사(知奏事)가 되고, 1124년 검교사공 ·이부상서 ·문하성지사(檢校司空吏部尙書門下省知事)를 지냈다.

사돈 이자겸(李資謙)이 실각한 뒤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복직되어 수사공좌복야참지정사(守司空左僕射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성품이 너그러우며 인물이 출중하여, 송(宋)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도경》에서 그를 칭찬하였다.

 

7세 김지우(金之祐) 1108(예종 3)∼1151(의종 5).

고려 중기의 문신. 자는 기복(基福).

조상은 신라 원성왕의 후손으로 대대로 고려 때에 고급관료를 지냈다. 아버지는 중서시랑(中書侍郎) 인규(仁揆)이며, 어머니는 좌복야참지정사(左僕射參知政事) 왕하(王嘏)의 딸이다.

관후(寬厚)한 성품이었으며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했다. 음서(蔭敍)로서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이 되었으며, 그뒤 대악서승(大樂署丞)·예빈주부(禮賓注簿)·선경부사인(善慶府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148년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안서도호부판관(安西都護府判官)으로 지방으로 나가 일을 잘 처리하였다.

청렴하고 강직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韓國金石文追補(李蘭暎編, 亞細亞文化社, 1976)

韓國金石全文―中世 上―(許興植, 亞細亞文化社, 1984). 〈秦榮一〉

 

 

 

합문지후 김군(閤門祗候 金君) 묘지명

 

     시대

고려   연대

1152년(의종6년, 금(金) 제량(帝亮) 천덕(天德) 4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閤門祗侯金君墓誌銘」

 

君諱之祐字福基其先新羅國」

元聖大王之後大王生大匡金」

禮禮生三韓功臣三重大匡仁」

允允生大子大保左僕射信雄」

雄生司徒內史侍郎平章事因」

謂謂生兵部尙書中樞使元晃」

晃生中書令樂浪公景庸庸生」

中書侍郎平章事判尙書工部」

事仁揆揆生之祐初功臣仁允」

仕大祖統合三國有功隨大祖」

入京家焉金氏之族世世衣冠」

顯達金姓自此始矣至今稱爲」

貴姓母開州郡夫人左僕射叅」

知政事王嘏之女也君爲人寬」

厚有節少好文學以祖蔭入仕」

爲良醞令同正初受寫經院判」

官遷大樂署丞遷禮賓注簿至」

善慶府舍人天德三年戊辰二」

月日超拜閤門祗侯出安西都」

護府判官爲郡淸直臨事善決」

三年以▨聞辛未年七月二十」

六日因病卒于京城享年四十」

四歲娶金氏女王大妃延壽宮」

主之兄也追封戶部尙書金」

之女也生子二人長衛尉丞同」

正忠彦一男最幼女三人長適」

禮賓主夫黃文富餘並幼壬申」

年十月十九日葬于松林縣白古」

浦銘曰天難測命靡常世素貴」

壽不長銘於石永以藏」

〔출전 : 『韓國金石全文』 中世上(1984)〕

 

 

합문지후 김군(閤門祗候 金君) 묘지명

군의 이름은 지우(之祐)이고, 자는 복기(福基)로, 선조는 신라국(新羅國) 원성대왕(元聖大王)의 후손이다. 대왕은 대광(大匡) 김예(金禮)를 낳고, 예는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인윤(仁允)을 낳고, 윤은 대자대보 좌복야(大子大保 左僕射) 신웅(信雄)을 낳고, 웅은 사도 내사시랑평장사(司徒 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를 낳고, 위는 병부상서 중추사(兵部尙書 中樞使) 원황(元晃)을 낳고, 황은 중서령(中書令) 낙랑공(樂浪公) 경용(景庸)을 낳고, 용은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공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尙書工部事) 인규(仁揆)를 낳고, 규가 지우(之祐)를 낳았다.

처음 공신 인윤이 대조(大祖, 太祖)를 섬겨 삼국을 통합하는 데 공로가 있었으므로 대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 와 가문을 일구었다. 김씨 집안이 대대로 벼슬하여 현달하였으니, 김씨 성이 이로부터 비롯하였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도 귀성(貴姓)으로 불리운다. 어머니는 개주군부인(開州郡夫人)으로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 叅知政事) 왕하(王嘏)의 딸이다.

군은 사람됨이 관대하고 너그럽고 지조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글공부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조음(祖蔭)으로 벼슬하여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이 되었다. 처음 사경원판관(寫經院判官)이 되었다가 대악서승(大樂署丞)에 오르고, 예빈주부(禮賓注簿)로 바뀌었다가 선경부사인(善慶府舍人)에 이르렀다. 천덕(天德) 3년 무진년 2월에 합문지후(閤門祗候)에 특별히 임명되면서 안서도호부판관(安西都護府判官)으로 나갔다. 군(郡)을 청렴하고 정직하게 다스리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3년이 되자 잘 다스린다는 평판이 있었다. 신미년(의종 5, 1151) 7월 26일에 병으로 서울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44세이다.

김씨 집안의 여인을 아내로 맞았는데, 왕대비(王大妃) 연수궁주(延壽宮主)의 언니이며,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추봉된 김선(金瑄)의 딸이다. 아들 둘을 낳으니, 큰아들은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충언(忠彦)이고, 다음 아들은 가장 어리다. 딸은 세 명이 있는데, 큰딸은 예빈주부(禮賓主夫) 황문부(黃文富)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임신년(의종 6, 1152) 10월 19일에 송림현 백고포(松林縣 白古浦)에 장례지냈다.

명(銘)하여 이른다.

하늘의 뜻은 헤아리기 어려워 사람의 목숨도 항상 같을 수는 없네.

대대로 본래 귀한 가문이지만 수명이 길지 못하였네.

돌에 명(銘)을 새겼으니 영원토록 간직되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안산군(연성군) 김정경 신도비(金定卿 神道碑) 해석문

 

 

유명조선 좌명공신 이조전서 연성군 시위정 김공 신도비명

 

 

  

 

 

 

 

 

이 비는 1863(철종 14) 경기도 하남에 건립된 김정경신도비(金定卿神道碑)로 신석우(申錫愚)가 비문을 지었고, 홍현주(洪顯周)가 글씨를 쓰고, 아울러 전액을 하였다.김정경(金定卿 : 1345~1419)의 본관은 안산으로,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진주목사 성경(星慶)의 아들이다. 고려 말에 군부사총랑을 역임하였으며, 이성계를 지지하여 조선이 건국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개국한 이후 사문절도사, 이조전서, 판예빈시사 등을 역임하였고, 1400(정종 2) 방간의 난 당시 방원(태종)을 도와 진압하여, 좌명공신 4등에 봉해졌다. 1410(태종 10)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용맹하였고 매사에 적극적이었으며, 시호는 위정(委靖)이다.현재 탁본은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有明朝鮮佐命功臣吏曹典書蓮城君謚威靖金公神道碑銘」
推忠奮義翊戴同德佐命功臣崇政大夫行吏曹典書蓮城君謚威靖金公
神道碑銘并序」
資憲大夫禮曹判書弘文館提學 經筵日講官 申錫愚 撰」
綏祿大夫永明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 洪顯周 書并篆」
有若堂而高四尺于廣之治西玄川負亥原寔惟蓮城君金公定卿攸藏氏貫安」
山系出高麗左僕射肯弼若侍中渭判三司元祥牧使星慶爲曾祖祖稱母趙氏」
密直副使平壤千禩女生于元至正乙酉任爲延康殿直判護軍宗簿副令軍簿」
摠郞中正大夫及事我 太祖策原從功 太宗時佐戡朴苞亂策佐命勳秩視」
崇政封爵田民有券書嘗節制義興軍典吏曹再銜 命赴 朝咸著勞績寢疾」
世宗遣太醫而診內侍而訊畋而賜獐肝以病中欲嘗也公感泣 恩造恨無以」
卒萬一報是年七月十五日竟以赴 聞壽七十五即 永樂己亥輟 朝致侑」
贈謚威靖禮備哀榮公甞喜南容三復語好讀黃石素書凢立 朝處事得力爲」
多嗚呼 聖祖龍興天開一治炳幾達權如山川出雲盖多其人學問於陽村訏」
謨於厖邨質儉於夏亭皆乘運名世之材若公素負韜略戡平禍亂可以幷駕諸」
公爲 國初英豪豈不偉哉宜其順天迓休毓繁厥祉凡三娶判書申翼之新陽」
君盧瑛南平君王和女生五男一女別將沚申出護軍灌別將滌盧出判中樞平」
胡公漑安城尉澣署令安鐵山妻王出平胡之子校勘孟鋼始以科甲進孫琨瑋」
珌珌顯己卯彙征時六代孫就義七代孫沆繼登文科六代孫府使就礪七代孫」
參奉聲大 贈持平聲玉八代孫參奉始聲皆以學行稱錫命錫保以武顯九代」
孫知中樞相斗縣監定五傡罹辛丑士禍牧使相鼎十代孫防禦使養一竝參奮」
武勳養心文大諫外裔多達官顯人玄川之竁旣成申氏盧氏祔王氏葬其下壬」
坐十四代孫樂朋以陶谷李公所撰表來請神道之刻愚辭不獲謹纂次爲文而」
系之以銘 猗嗟蓮城赫閥宏器佐命翊運筮革六二旂常旣揭金帛蕃賜」
允㫌相報聿殫殄瘁秉銓銜 命績懋厥試圭無言玷石有書秘公服膺斯勳措」
于事勳烈山峙福履川至文武忠孝衍錫其類我銘牲繫永表玄隧」
崇禎紀元後四癸亥 四月 日立」

 

추충분의 익대동덕 좌명공신 숭정대부 행 이조전서 연성군 시위정 김공 신도비명병서
자헌대부 예조판서 홍문관제학 경연일강관 신석우가 글을 짓고,
수록대부 영명위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홍현주가 글씨와 함께 전액을 쓰다.

당과 같은 모습에 높이가 4척이며 광주 고을 서쪽의 현천에 해방을 등진 언덕은 곧 연성군 김공 정경의 묘소이다.

 

본관은 안산이고, 선계는 고려좌복야 긍필에서부터 나왔다. 시중 위와 판삼사 원상과 목사 성경이 공의 증조와 조부,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평양조씨로 밀직부사 천사의 딸이다. 원나라 지정 을유년(충목왕 1, 1345년)에 태어나 벼슬하여 연강전직 · 판호군종부부령 · 군부총랑 · 중정대무가 되었고, 우리 태조를 섬겨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태종때에는 박포의 반란을 평정하여 좌명공신에 책봉되어 품계가 숭정에 올랐으며, 작위를 봉하고 전호와 민호를 하사한 권서가 있다. 일찍이 의흥친군위 절제사를 지냈으며 이조를 관장하였다.

 

 두 번이나 명을 받들고 명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가서 공적이 모두 현저하였다. 병들어 눕자 세종께서 대의를 보내어 진료하게 하고, 내시를 보내어 문병하셨으며, 사냥하여 노루 간을 하사 하셨으니, 이는 병중에 먹고 싶어하기 때문이었다.

 

 공은 성은에 감읍하여 끝내 만에 하나도 갚을 수 없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7월 15일에 마침내 부음이 들렸으니 향년 75세이며, 해는 영락 기해년(세종 1, 1419년)이다. 조정의 정사를 거두고 제물과 제문을 모내어 조상하고, 위정이란 시호를 추증하여 신하의 죽음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공은 일찍이 남용이 세 번 반복했다는 ‘옥의 흠은 갈 수 있지만 말의 흠은 갈 수 없다’는 말을 좋아하였고, 황석소서를 즐겨 읽어 무릇 벼슬하여 일을 처리 할 때에 여기에서 힘을 얻은 것이 많았다.

 

오호라! 성조가 용흥하여 하늘이 한번 다스림을 열어주시어, 기미에 밝고 권형에 통달한 분들이 마치 산천에 구름이 일듯하여 그 사람이 많았다. 학문은 양촌이요, 나라를 위한 계책은 방촌이며, 질박하고 검소함은 하정이니, 모두 운을 타서 세상에 이름난 인재들이다.

 

공으로 말하자면 평소에 육도삼략을 지고 화란을 평정하여 제공들과 명예를 나란히 하여 국초에 영호가 될 수 있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그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아름다움을 맞이하고 그 복지를 육성 발전시키는 것이 당연하도다.
공은 부인을 세 번 맞이하였으니, 판서 신익지 · 신양군 노영 · 남평군 왕화의 딸이다. 5남 1녀를 낳았다.

 

별장 지는 신씨 소출이요, 호군 관 · 별장 척은 노씨 소출이요, 판중추 평호공 개와 안성위 한과 서령 안철산 처는 왕씨 소출이다.

 

 평호공의 아들 맹강은 교감 그리고 맹강의 아들 필이 비로소 과거에 1등으로 합격하여 진출하였고, 손자는 곤 · 위 · 비인데, 비는 기묘년 휘정 때에 저명했다. 6대손 취의와 7대손 항은 계속하여 문과에 올랐으며, 6대손 부사 취려와 7대손 참봉 성대 · 증지평 성옥과 8대손 참봉 시성은 모두 학행으로써 일컬어졌으며, 석명 · 석고는 무로써 드러났다.

 

9대손 지충추 상두와 현감 정오는 함께 신축사화에 걸렸으며, 목사 상정과 10대손 방어사 양일은 함께 분무훈에 올랐고, 양심은 문과 대간이다.

 

외손도 높은 벼슬과 현달한 사람들이 많았다. 현천의 무덤을 완성하고 나서 신씨와 노씨는 부장하였으며, 왕씨는 그 아래에 임좌로 장사 지냈다. 14대손 악붕이 도곡 이공께서 찬한 묘표를 가지고 와서 신도비를 청하니, 나는 사양 할 수 없어서 차례를 모아 비문을 짓고 이어서 명하노라.

아! 연성이여! 혁혁한 문벌에 큰 그릇이로다.
좌명으로 군운을 붙잡았으니 혁괘 육이를 점침이로다.
표창한 기를 이미 올렸고 황금과 비단도 많이 내리셨도다.
포상하신 성은을 갚으려하여 마침내 몸이 병들도록 충성을 다하였도다.

전조의 일을 맡아 왕명을 받드니 시용에 공적이 많았도다.
옥의 흠은 갈 수 있지만 말의 흠은 갈 수 없다는 것과 황석공의 소서에는 비법이 있도다.


공은 이것을 가슴에 간직하여 행동하고 일을 처리하였도다.
큰 공훈은 산처럼 솟아있고 복록은 냇물처럼 흐르도다.


문무충효는 번성하여 대대로 자손이 이어 가도다.
나는 비석에 명하여 영원히 전해지도록 표하노라.

숭정기원후 네 번째 계해년(철종 14, 1863년) 4월 일에 세우다.

 

묘비 글을 지으신 예조판서 신석우(申錫愚)에 대하여
(순조5년 1805 ∼ 고종2년 1868)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성여(聖如), 호는 해장(海藏)이다. 순조34년에 식년문과급제. 용강현감 병조참판 우승지 양주목사 홍문관제학 이조참판 경상도관찰사 예조판서 역임.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글씨와 전액을 쓰신 영명위 홍현주에 대하여

해거도인(海居道人) : 홍현주(洪顯周)의 호, 자는 세숙(世叔), 호는    해거재(海居齋), 약헌(約軒), 정조(正祖)의 딸인 숙선옹주(淑善翁主)에게 장가 들어

수록대부

영명위(永明尉)가 되었다.

풍산인(豊山人), 영의정(領議政) 낙성(樂性)의 손자이자, 우부승지(右副承旨) 인모(仁謨)의 아들이다. 형 석주(奭周)는 좌의정(左議政)을 지냈다, 순조 15년(1815)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고, 문장에 뛰어났다
*** 문관의 품계 ***

종친(宗親)은 왕의 친족 부계친(父系親)으로서 四대손까지로 하고

의빈(儀賓)은 왕과 왕세자의 사위를 말하는 것이다.

正一品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영의정),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종친이면 현록대부(縣祿大夫), 흥록대부(興祿大夫),

의빈이면 수록대부(綏祿大夫), 성록대부(成祿大夫).


고려왕씨 성원록에 나타난 남평군 왕화의 사위 김정경

 

 

 

 

 

 

왕화(王和)에 대하여

 

왕화(王和)

?∼1394(태조 3). 고려의 왕족. 개성왕씨(開城王氏).

 

할아버지는 순화후 유(淳化侯 유)이고, 아버지는 학성부원군 향(鶴城府院君珦)은 공양왕의 숙부이며 고려 신종의 6대손이다.

 

남평군(南平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가 주살될 때 도평의사(都評議司)의 탄핵을 받아 원지에 유배되었다.

 

조선이 개국한 뒤인 1394년(태조 3) 고려 종실들이 다시 거제도에 유배될 때 안동에 투옥되었으며, 이어 수원부에서 국문당한 뒤 주살(죄를 물어 죽임)되었다.

 

 

고려 34대 공양왕
 고려 제34대 마지막 왕(1345~1394). 이름은 요(瑤).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의 아들.
시호 : 공양대왕 恭讓大王
신종의 7대손, 양양공(襄陽公) 서(恕)의 6대손, 시안공(始安公) 인(絪)의 5대손, 서원후(西原侯) 영(瑛)의 고손자, 익양후(益陽侯) 분(昐)의 증손자, 순화후(淳化侯) 유(柔)의 손자이다.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정몽주가 살해된 후, 덕이 없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폐위되어, 귀양을 갔다가 2년 뒤에 삼척(三陟)에서 살해당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34대 475년 만에 멸망하였다. 재위 기간은 1389~1392년이다

 

왕화는 공양왕과는 사촌간이다. 사위는 이조판서를 지내고 연성군에 봉군된 안산김씨 김정경이다.

 

위정공 안산군(연성군) 김정경 묘 (경기도 하남시 감북동 57)

 

 

 

현천의 무덤을 완성하고 나서 평산신씨와 교하노씨는 부장하였으며, 개성왕씨는그 아래에 임좌로 장사 지냈다.

  

 

안산군(연성군) 부인 개성왕씨 화혜택주 묘

 * 옹주 및 택주 설명

 조선시대 외명부(外命婦) 봉작(封爵)의 하나. 왕자군(王子君)과 종1품 종친의 처(妻)에게 이런 호칭을 붙였다. 군부인은 중국 당나라 때의 외명부제도에서 문무관 3품 이상의 모(母)와 처를 칭하던 데서 비롯되었다.

고려 공양왕 때에는 대군과 군의 처를 구별하지 않고 옹주라 하였으나, 조선 초기에 와서 대군의 처를 옹주, 군의 처를 택주(宅主)라 하여 서로를 구별하였다.

세종 때에는 종실 종1품의 적처(嫡妻)와 공신 정1품·종1품의 적처를 모군부인(某郡夫人)이라 칭하고 군부인의 앞에 읍호를 붙이도록 규정하였다 


 

위정공은 부인을 세 번 맞이하였으니, 판서 신익지,  신양군 노영, 남평군 왕화의 딸이다. 5남 1녀를 낳았다. (부인 : 평산신씨, 교하노씨, 개성왕씨)

 

별장 지는 신씨 소출이요, 상호군 관 · 별장 척은 노씨 소출이요, 판중추 좌참찬

평호공 개와 안성위 대호군 한과 사섬시 서령 안철산 처는 왕씨 소출이다.

 

* 사섬시는 사담서로 개칭되었으며 조폐관청 

저화의 제조와 외거노비의 공포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으나, 동전과 전폐의 주조사업도 관장

 

 

 

 

 

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

신대광의 안산역사이야기 15
 
 
 
 
신 대 광(원일중학교, 안산향토사연구소)
 
  조선 건국 벽두.
  나라는 건국되었지만 그 기틀이 다져지기까지 혼란한 세월이 이어진다. 고려의 풍속 역시  그대로 남아있었으며, 여러 차례 궁중의 암투도 벌어진다. 이런 혼란과 변혁의 시기에 나라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한 안산의 인물로 김정경(金定卿)이 있다. 우리는 그의 일생을 통하여 건국 초, 생생한 역사 개벽의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볼 수 있다.
  김정경은 안산 김씨로, 현재의 수암동에서 나고 자랐다.
  김정경은 고려 말에 군부사총랑(軍簿司摠郞)을 역임했는데 이는 병부의 4품 벼슬이다. 그는 고려 말에서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이성계를 도와 대업을 이루게 되는데, 무장이었던 그가 자연스럽게 이성계의 측근에서 지지 세력이 되었을 것임을 짐작키는 어렵지 않다. 그리하여 조선건국에 일조(一助) 함으로 왕조 개창 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봉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원종공신이란 누구를 이름인가? 조선시대에 공신 책봉에서 제외된 무수한 유공자들을 포상하는 것이 이른바 원종공신제도 인데, 이는 보다 직접적으로 큰 공훈을 세워 임명된 ‘정공신’ 다음 급에 해당하는, 이른바 ‘부공신’에 해당되는 모든 유공자들을 대상으로 포상한 제도로,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씩 책봉하곤 하였다. 조선 개국 공신을 책봉하였을 때의 원종공신은 1천 6백 명이 넘었으며, 임진왜란 후 책봉된 원종공신인 선무공신의 경우에는 9천여 명이 양산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원종공신은 모두 얼마나 될까?
  조선시대 원종공신의 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모두 합해 몇 만 명이 넘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이처럼 수많은 원종공신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국가적 위기 상황이나 불안 정국에서 국가와 왕실에 조금의 공이라도 있는 모든 유공자들을 포상함으로써 국가와 왕실을 안정시키고 위상을 드높이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1400년(정종 2년)에 방간의 난(일명 ‘박포의 난’ 또는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한성부윤이었던 김정경은 난을 진압하고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봉된다. 좌명공신(佐命功臣)은 형제들의 왕권 쟁탈 싸움에서 방원이 형 방간을 몰아내고 사실상 왕으로 등극하는 마지막 과정에서 그를 도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훈이다.
  또한 김정경은 1410년(태종 10년), 성절사(聖節使) ― 명나라 황제나 황후 생일에 파견하는 축하 사절 ― 로 명나라에 직접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 후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김정경은 고향인 안산에서 여생을 마치게 된다. 현재 그의 묘는 하남시 감북동에 있다.
  안산에 거처하면서 그가 지었다는 정자가 있는데, ‘망해정(望海停)’이라 불린다. 옛날에는 해수가 내륙 쪽으로 들어오는 지형이었으므로 현재의 수암동 일대에서도 바다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김정경은 그 바다를 바라보며 유유자적하며 말년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 당시에 심었다는 은행나무 세 그루 중 한 그루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는 세종 즉위 1년인 1419년에 75세의 긴 삶을 마감하는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한 셈이다. 그는 왕조가 바뀌는 역사의 현장 한복판에서 함께하였고, 공신으로 책봉되어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졌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안산 수리산(修理山) 자락에서 여생을 보내었다.
  장구(長久)한 역사 속 급변하는 왕조 교체기에서 자신의 삶을 고뇌하고, 사랑하며, 치열하게 살다간 인간 김정경의 길고도 짧은 생을 통해 굽이굽이 흘러 온 안산 역사의 한 자락을 조용히 되짚어 본다.

 

 

 

 

 

연대
유형/재질
크기
소재지
서체
찬자/서자
/각자
1727년(영조3년)
비문 / 돌
높이 206cm, 너비 74cm, 두께 46cm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해서(楷書)
김창집(金昌集) / 김창집(金昌集)
/ 미상

 

 

해석문

 

김성대묘비

 

유명조선국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행 통덕랑 제릉참봉 김공성대묘

배 증정부인수원백씨부좌

 

공의 휘는 성대이고 자는 이원이며, 본관은 안산으로 고려시대 좌복야를 지낸 김긍필의 후손이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휘 정경이 계셨는데 태종 때 좌명공신으로 숭정대부 이조전서를 지내고 연성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위정공이시다. 위정공께 막내아들 휘 개가 계셨는데 숭정대부 이조판서로 시호가 평호공인데, 이분이 공의 6대조이시다. 부호군 휘 언량과 사복시정으로 증직된 휘 태록과 좌승지로 증직된 휘 찬은, 바로 공의 증조와 조부와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로 김정삼의 따님이다.

 

공은 천계 임술년(광해군 14, 1622년) 정월 22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행의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었다. 병자년(인조 14, 1636년)에 어버이를 모시고 오랑캐를 피하여 산중으로 들어갔는데 그때에 공은 15,6세의 소년이었지만 날마다 한 가마의 쌀을 등에 짊어지시고 험한 길을 넘어 운반하셨다. 비록 난리 속이었지만 부모 공양에 빠뜨림이 없었던 것이다.

신묘년(효종 2, 1651년)에 아버지 승지공의 상을 당했는데, 병환에 계실 때부터 탕제 다리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고, 손수 분뇨를 맛보아 달고 쓴 것을 징험하였으며, 위독하시게 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올려드려 상당 기간 효험을 얻었었다.

 

갑인년(현종 15, 1674년)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자제들이 늙은 아버지께서 몹시 슬피 우셔 몸 상하심을 걱정하여 권변을 청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으니, 그 지성스런 효성이 이와 같았다. 이 정성을 미루어 여러 누이와 아우 및 조카에 이르기까지 공경과 사랑이 지극히 독실하였으니, 향당에서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공이 일찍부터 과거시험장에 출입하여 성대히 문장에 대한 명성이 있었으므로 일시의 선비들이 모두 먼저 등제하라고 사양하였다. 공도 이에 이르기를, “시험 하나도 취할만 하지 못하는데 여러 차례 향시에 입격하는군요.”라고 하였다. 그러나 끝내 성시에는 낙제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나이 72세에 비로소 진사에 급제하여 방목이 보고되니, 주상께서 관직을 제수하라는 특명이 있어 즉시 제릉참봉에 제수되니 특이한 은전이었다. 이에 공께서 감격하여 주상의 은혜를 사례하였으나 얼마 뒤에 벼슬을 버리고 출사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을해년(숙종 21, 1695년)에 병으로 돌아가시니 2월 4일이었다. 후에 아들 절도사 석명의 추은으로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아내 백씨는 정부인에 추봉되었는데 부사 대진의 따님으로, 착하고 어질어 부인의 덕이 있었고 공보다 5년 후에 돌아가셨다.

공께서는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바로 절도사요, 2남 석범은 무과로 절충을 지냈고, 3남 석규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었으며, 4남 석구는 문학에 종사하고 있고, 5남 석보는 무과 중시에 급제하여 도총부 경력을 지냈고, 딸은 사인 이제안에게 출가하였다. 상규는 석명의 소생이요, 상두 · 상진과 감찰 서명신, 사인 이탁, 이환의 처는 석범의 소생이요, 이세무의 처는 석규의 소생이요, 상태 · 상정 · 상복과 조윤적의 처는 석구의 소생이요, 상기 · 상익 · 상벽 · 상성은 석보의 소생이요, 담석과 김요경 · 정운길의 처는 이제안의 소생인데 아들은 어리다. 상규는 1남 양오를 두었고, 상두는 4남을 두었으며, 상태는 1남을 두었고, 양오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사람됨이 질박하고 입이 무겁고 말이 적어,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진실하고 꾸밈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였고, 이미 늙어서도 여전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집이 영평 백운산 밑에 있어 자못 전원으로 숲과 시내의 경치가 좋았고, 자손들이 그 집 근처에 둘러 살면서 각자 농사짓고 뽕과 삼을 심고, 혹은 출사하여 고을 수령을 지내면서 가볍고 따뜻한 옷이며 맛있는 반찬을 두루 갖추어 공을 봉양하였다. 공께서 좌우로 봉양을 받으면서 조용히 문묵을 스스로 즐기고 생산의 일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 않았다. 혹 흥이 나면 자손들을 거느리고 이웃사람들을 불러 함께 산수 사이를 거닐면서 소일하니, 사람들이 그의 청한한 복은 누구도 미치기 어렵다고 일컬었다. 아들의 고을로부터 무슨 선물이 들어오면 문득 얼굴을 찡그리고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 하시고 매양 청렴결백과 절제근검을 당부하여 경계하였다. 절도사가 여러 지방을 역임하며 간소하다는 것으로 칭찬받았으니, 그 법도를 얻음이 이와 같아서이다.

 

공을 집에서 남쪽의 도성산 아래 정좌의 언덕에 장사 지냈고 백부인을 그 왼쪽에 부장하였다. 절도군의 형제가 장차 묘 앞에다 비석을 세우고자 나 창집에게 비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진실로 글을 못하는데 어찌 영원히 전할 글의 부탁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해보니, 옛날에 나의 선군께서 백운산의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고 이곳에 사실 뜻이 있었다. 선군께서 일찍이 혼자 말을 타시고 이 산중으로 오시어 공을 만나 머무르셨으며, 시를 지어 산을 나누는 약속을 증거로 삼았었다. 내가 때때로 따라가서 가만히 보니 공은 용모가 헌걸차고 순박하여, 마음속으로 덕의가 훌륭한 분임을 알았었다. 그 후 선군께서 나에게 명하여 이씨의 낚시터 위에다 자그마한 집을 짓게 하여 후일에 거처할 계교를 삼았는데, 이곳에서 공의 집과의 거리는 몇 리였다. 내가 이로 말미암아 공의 집을 드나들면서 더욱 친하여졌다. 그러나 선군께서 마침내 그곳으로 가시지 못하고 기사년(숙종 15, 1689년)의 사화에 돌아가셨다.

 

공께서 이에 우리 모자와 형제의 궁박하고 의지할 곳이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맞아 자기 집 아래 집을 마련하고 또 힘을 다하여 옛 집을 수리하고 거처를 정하여 주셨다. 무릇 어루만져 주시고 도와주심에 극진한 은의가 있어 비록 가슴속이 불처럼 타올랐으나, 돌아보지 않으셨다. 지난날 그 어진 마음과 옳은 기개가 아니었다면, 쇠퇴한 세속에 멀리 생각하심이 어찌 여기에 미칠 수 있었겠는가? 내가 공에게 실로 종신토록 감격함이 있어 그 여러 아들들과 모두 서로 대하길 골육과 같이 지내었다. 이제 이 묘문의 부탁이 또한 이 때문이라. 어찌 차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겠는가? 드디어 감히 참람하고 망녕됨을 헤아리지 못하고 본말을 간략히 이와 같이 기록하였다. 아아! 이 어찌 공의 사행을 영원히 전하는데 족하다 하겠는가?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부 김창집 지음.

제 4남 석 달은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글씨를 쓰다.

 

비문이 이루어진 뒤 5년 을미년(숙종 41, 1715년)에 백운산 아래 구정천 기방을 뒤로 한 언덕에 이장을 하였고, 다시 그 뒤 13년만에 비로소 비석을 갖추게 되었다. 모든 자손들의 현달한 자와 어리거나 성인이 된 사람 중 미처 기록되지 못한 자를 삼가 다음에 추가로 기록한다. 석 달은 곧 석구의 고친 이름이다. 석보는 수사, 상두는 군수, 상태는 감찰, 상정 · 상기 · 상익은 급제, 상벽은 부사이다. 상두는 5남을 두었는데, 양호는 부사, 양일은 선전, 양정 · 양중은 모두 무과 급제하였고, 막내는 양검이다. 상진은 1남 1녀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며, 상태의 아들은 양록, 딸은 아직 어리다. 상정은 2남 2녀를 두었고, 상복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고, 상기의 아들은 양성이다. 상익은 3남 2녀를 두었고, 상벽은 4녀를 두었으며, 상성은 2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양오는 4남을 두었으니, 처눌 · 처밀 · 처열 · 처필이고, 양일은 3남을 두었으며, 양중은 1녀를 두었다. 처눌은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외손과 증손과 현손이 매우 많으나 생략한다.

 

숭정기원후 두 번째 정미년(영조 3, 1727년) 3월 일 세움.

 

판독문

有明朝鮮國 贈嘉善大夫戶曹叅判兼」

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行通德郞」

齊陵叅奉金公聲大墓」

配 贈貞夫人水原白氏祔左」

公諱聲大字而遠安山人高麗左僕射肯弼之後入我 朝有諱定卿爲 太宗佐命功臣崇政吏」

曹典書封蓮城君謚威靖公威靖有季子諱漑崇政吏曹判書謚平胡公寔公六代祖也副護軍諱」

彦樑 贈司僕寺正諱台錄 贈左承 旨諱讚卽公曾祖祖考若考而妣安東金氏鼎三之女公」

以天啓壬戌正月二十二日生自少行誼過人丙子奉二尊人辟冠山谷中時公甫成童能日負一」

斛米越險輸致以故雖在搶攘而供養無乏辛卯遭承 旨公憂目疾時湯劑不委人手嘗糞以驗」

甛苦及其革也斮旨進血得以復甦者有間甲寅丁內艱子弟愍其老而毁泣請權變竟不聽其誠」

孝如此推以及於諸姑弟姪敬愛篤至鄕黨爲之歎服公蚤游場屋蔚有文聲一時輩流咸讓其先」

登公亦謂一第不足取而屢捷解額輒困於省試蹭蹬留落人皆嗟惜䄵七十二始中進士榜 聞」

特命除職卽授 齊陵叅奉盖異數也公感激謝 恩俄而棄不仕越二年乙亥以疾卒二月初四」

日也後以子節度使錫命推 恩贈戶曹叅判配白氏貞夫人府使大璡之女淑哲有婦德後公五」

年以卒公凡生五男一女男長卽節度使次錫範武科折衝次錫圭武科早圽次錫龜業文次錫保」

武科重試都摠府經歷女適士人李齊顔相奎錫命出相斗相軫監察徐命新士人李濯李絙妻錫」

範出李世懋妻錫圭出相兌相鼎相復曹潤迪妻錫龜出相箕相翼相壁相星錫保出聃錫金堯鏡」

鄭運吉妻李出一男幼相奎一男養吾相斗四男相兌一男養吾一男二女竝幼公爲人木訥寡言」

待人遇物眞實無矯飾少好讀書旣老猶手不釋卷家在永平白雲山下頗有田園林澗之勝子姓」

環其宅而居各自理菑畲藝桑麻或出爲州郡具輕煗甘毳以奉公公則左右受養肅然以文墨自」

娛不復問生産事興至雋子姓呼鄰竝倘佯山水間人謂其淸福不可及然見有物自子邑來輒蹙」

然曰無乃病民乎每申戒以廉白節儉節度君在弁鞈中以簡素著稱其得於義方者然也公葬于」

宅南道成山下負丁之原白夫人柎其左節度君兄弟將樹石墓前屬昌集識其隧昌集誠不文何」

足以當不杇之託獨念昔者先君子愛白雲山水有卜居之志嘗匹馬會公於山中留詩證分山之」

約昌集時從行竊公儀度豊偉氣味淳厖心知爲長德人矣其後先君子命昌集作小屋於李氏」

釣臺之上以爲異日計去公家盖數里昌集因得與公還往益親然先君子竟未能歸而有己巳之」

禍公於是哀昌集母子兄弟窮無所歸亟迎置宇下因又出力葺舊屋以定其居凡所以撫視賙救」

曲有恩意雖凶熖如火而不顧問焉向非其仁心義氣遠邁衰俗何能及此盖昌集於公實有沒身」

之感而其諸子皆相視如骨肉今茲墓文之託亦以此耳又何忍以不文辭遂敢不揆僣妄觕記其」

本末如右嗚呼此豈足以不朽公也哉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監春」

秋館事 世子傅金昌集述 苐四男錫達泣血謹書 文成後五䄵乙未移竁于白雲山下九政遷」

負己之原又後十三年碑始具凡子姓之顯若冠若丱而未及載者謹追識于左錫達卽錫龜改名」

也錫保水使相斗郡守相兌監察相鼎相箕相翼及第相壁府使相斗五男養浩府使養一宣 傳」

養正養中及第皆武次養儉相軫一男一女幼相兌男養祿女幼相鼎二男二女相復一男二女竝」

幼相箕男養性相翼三男二女相壁四女相星二男竝幼養吾四男處訥處謐處說處養一三男」

養中一女處訥一男竝幼外出曾玄甚蕃苐略焉 崇禎紀元後再丁未三月 日立」

 

묘비명을 지으신 영의정 김창집에 대하여

 

1648(인조 26)∼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광찬(光燦)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壽恒)이며, 어머니는 호조좌랑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창협(昌協)·창흡(昌翕)의 형이다. 이른바 노론 4대신으로 불린다.

 

1672년(현종 13)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675년 아버지 수항이 화를 입고 귀양가자 과거 응시를 미루었다. 1681년(숙종 7) 내시교관을 제수받았고, 1684년 공조좌랑으로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正言)·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진도의 유배지에서 사사되자, 귀향해 장례를 치르고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정국이 바뀌어 복관되고, 병조참의를 제수받았으나 사임하였다.

 

다시 동부승지·참의·대사간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철원부사를 제수받았는데, 이 때 큰 기근이 들고 도둑이 들끓어 민정이 소란하자 관군을 이끌고 토평하였다.

 

강화유수·예조참판·개성유수 등을 역임하고, 호조·이조·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1705년 지돈녕부사를 거쳐 이듬 해 한성부판윤·우의정, 이어서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1712년에는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귀국, 1717년 영의정에 올랐다.

 

노론으로서 숙종 말년 세자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았다. 숙종이 죽은 뒤 영의정으로 원상(院相 : 나이어린 왕을 보필하던 재상급의 원로 관료)이 되어 온갖 정사를 도맡았다. 경종이 즉위해 34세가 되도록 병약하고 자녀가 없자, 후계자 선정 문제로 노론·소론이 대립하였다.

 

1721년(경종 1)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해, 처음에 경종은 대소 정사를 세제에게 맡길 것을 허락했으나 소론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수개월 후 소론의 극렬한 탄핵으로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 일색의 정국이 되었다. 곧 이어 소론의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의 반역 도모를 무고해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 해 성주에서 사사되었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영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영조 때 과천에 사충서원(四忠書院)을 세워 이이명·조태채·이건명과 함께 배향했으며,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국조자경편 國朝自警編≫·≪몽와집≫ 등이 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참고문헌≫ 景宗實錄
≪참고문헌≫ 英祖實錄
≪참고문헌≫ 國朝榜目
≪참고문헌≫ 辛壬提要
≪참고문헌≫ 黨議通略
≪참고문헌≫ 夢窩集

 

조선을 뒤흔든 아버지와 아들
지은이: 이종호 | 브랜드: 역사의 아침 | 출간일: 2008-10-24
 

너희들은 마땅히

 

(사형당하는) 나를 경계 삼아 항상 겸손하게 물러나려는 뜻을 갖고 벼슬에서는 높이 드러나는 요직을 피하도록 해라. 집에 거처할 때는 공손하고 검소할 것이며, 사람을 사귐에 신중하고 의논하는 말은 간소하게 하여라. (……) 너희들은 여러 자식들을 부지런히 가르쳐서 문헌에 전하는 충효의 가르침을 잃지 않도록 하고, 가문을 지키되 반드시 과거를 보아 벼슬할 필요는 없다. 기사년 4월 초7일 문곡文谷(김수항의 호) 늙은이가 아들 창집, 창협, 창흡, 창업, 창즙에게 주노라. 그리고 여러 자손들이 자라면 역시 이 글을 보여주도록 하여라.

 

(224쪽, ‘죽어서야 깨달은 아버지의 유훈 : 김수항-김창집’ 중에서) 
 
 
 

 

 
안산김씨 묘지명.hwp
2.3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