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 밭에 쓸쓸히…초라한 ‘고려 왕릉’
분단 후 첫 북쪽 왕릉 12기 최근 모습 공개
일제·한국전 거치며 도굴·파괴 흔적 그대로
북한 개성 교외 만수산 기슭 언덕에 있는 고려 8대 임금 현종의 선릉. 병풍석이 묻힌 채 민묘처럼 퇴락한 무덤을 훼손된 석물들이 쓸쓸히 지키고 서 있다. 무덤 바로 앞에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다. 장경희 교수 제공
현종을 비롯해 정종(3대), 예종(16대) 등 개성 부근에 있는 고려시대 주요 임금 12명의 왕릉 모습이 8일 공개됐다. 고려 왕릉의 최근 모습이 확인된 것은 분단 이후 처음이다.
북한 개성 도심에서 서북쪽으로 4㎞가량 떨어진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이곳 만수산 자락 언덕의 옥수수밭 안쪽에 부서진 석물 몇 개와 함께 자리한 무덤이 눈에 들어온다. 고려 8대 임금 현종(재위 1010~1031)의 무덤이다. 강감찬 장군을 시켜 거란 침입을 물리치고 왕조의 기틀을 다졌지만, 현종은 지금 너무도 초라해진 무덤에 잠들어 있다. 병풍석들은 흙에 묻히거나 부서졌고, 난간 기둥돌도 대부분 없어졌다.
이날 <한겨레>에 사진을 공개한 장경희 한서대 교수(문화재보존학)는 “2005년부터 북한 당국과 교섭해 현지에서 직접 찍은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들을 보면, 고려 왕릉 대부분의 능역이 일제 때의 도굴과 한국전쟁 때의 파괴 등을 거치며 심하게 훼손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교수는 “남북 당국간 협력을 통한 체계적인 복구·보존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천년의 눈물’…모습 드러낸 개성의 고려 왕릉
석축 파묻히고 난간석 나뒹굴고
농지개간·남벌로 민묘처럼 초라
개성시 판문군에 있는 고려 5대 임금 경종(재위 975~981)의 영릉. ‘여걸’ 천추태후는 원래 그의 다른 왕비였다. 뒷산의 숲이 모두 베어진데다, 석물들도 거의 사라져 황량한 분위기다.
장경희 한서대 교수는 북한 당국과 교섭해 2005년부터 직접 현지에서 실측조사를 하며 왕릉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개성의 남북 언저리인 옛 경기도 개풍군 일대로 협동농장 근방이거나 휴전선에 가까운 군사지역이어서 자유로이 접근할 수 없는 유적들이다.
개성시 룡흥리에 자리한 2대 혜종(재위 943~945)의 순릉. 석물이 대부분 사라지고 봉분도 깎여 고려 왕릉 중 가장 규모가 작은 편이다.
북한 개성 부근 고려 왕릉들의 모습이 분단 60여년 만에 확인됐다. 도굴과 관리 소홀 등으로 황량한 모습이지만, 10~14세기 우리 역사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적들이다.
장 교수가 공개한 사진들 가운데 왕릉은 모두 12기다. 2대 혜종에서 시작해 정종(3대), 경종(5대), 성종(6대), 현종(8대), 문종(11대), 순종(12대), 예종(16대), 신종(20대), 원종(24대), 충목왕(29대), 충정왕(30대) 등이다. 태조 왕건의 비 신성왕후, 경종의 비 헌정왕후, 신원 미상의 왕족 무덤떼인 칠릉떼 등도 소개됐다. 고려 왕릉 가운데 현재의 모습이 확인된 것은 첫 임금인 태조의 현릉과 31대 임금인 공민왕의 현·정릉 2곳뿐이다.
고려 왕릉은 통일신라 능묘의 전통을 계승해 산기슭에 3~4층 단을 쌓고 맨 윗단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 봉분을 쌓고 아래로 석등, 문·무인석, 제향각 등을 배치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집중적인 도굴 피해를 입었고, 한국전쟁 때도 막대한 석물들이 파괴·분실돼 대다수는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북한 쪽은 주요 왕릉들을 보존급 유적으로 지정했으나, 야산 곳곳을 남벌하고 농지를 개간하면서 능역이 크게 축소됐다. 혜종·성종릉의 경우 병풍석과 석축이 파묻혔고, 경종릉은 장명등·석상·망주석이 사라졌다. 신종릉은 잘못된 복원으로 깨진 난간석이 굴러다니고, 민묘처럼 왜소한 몰골로 변했다.
장 교수는 “서울 근교 조선 왕릉들이 석물·수목·건축물까지 보존된 것과 대조된다”며 “산에 나무가 없어 큰비가 오면 봉토가 계속 유실될 수밖에 없는 만큼 종합방재대책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립고궁박물관은 장 교수의 답사 성과를 토대로 개성 왕릉 등에 대한 종합조사와 자료집 발간을 추진 중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장경희 교수 제공
6대 임금 성종(재위 981~997)의 강릉. 판문군 진봉리에 있다.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거란에게서 강동 6주를 얻어낸 왕이다. 개간된 논밭에 둘러싸여 민묘처럼 초라한 모양새다.
판문군 선적리에 있는 11대 문종(재위 1046~1083)의 경릉. 12도의 사학을 진흥시켰고 송나라와 국교를 열었던 왕이다. 능역이던 무덤 앞은 논밭으로 변했다.
즉위 석달 만에 숨진 12대 임금 순종(재위 1083)의 성릉. 판문군 진봉리에 자리하고 있다. 봉분 높이가 1.6m에 불과하며 병풍석도 사라진 상태다.
개성 부근 조선초기 왕릉도 주목해야
신의왕후릉, 태조릉에 영향
정종-왕후 쌍릉, 후대 ‘본보기’
조선 태조의 첫 왕비로 조선 건국(1392) 1년 전에 숨진 신의왕후의 제릉. 둘째 아들 방과가 2대 정종이며, 다섯째 아들 방원이 3대 태종이다. 정자각과 재실은 남았으나, 능역 앞까지 다랑논이 들어왔다.
두 무덤은 고려 왕릉처럼 산 중턱에 3, 4층 단을 축조한 뒤 병풍석, 난간석을 봉분에 두르고 망주석, 문석인, 정자각을 세웠다. 하지만 병풍석 등 조각의 정교성이나 장엄한 품격 등이 훨씬 돋보인다. 무덤을 지키는 수호 동물로 말(석마)을 추가했다는 점도 색다르다. 후릉의 경우 고려 공민왕 무덤인 현정릉에서 기본 얼개가 유래됐으나 조선 초 제릉과 건원릉의 새 형식을 반영했으며, 후대 숙종의 명릉, 경종의 의릉 등 17~18세기 왕릉의 양식적 전범이 되었다. 노형석 기자
조선 2대 임금 정종(재위 1398~1400)과 정안왕후가 나란히 묻힌 후릉의 전경. 정자각이 아래 있었으나 1970년대에 해체됐다고 전해진다. 현재 보수중이다.
개성 부근의 왕릉들 가운데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조선 태조의 첫째 왕비인 신의왕후의 ‘제릉’과 2대 정종 임금과 왕비 정안왕후의 쌍릉인 ‘후릉’이다. 제릉은 태조의 능인 건원릉에 영향을 주었고, 후릉은 조선 후기 왕릉의 주된 본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태조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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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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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943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아버지는 금성태수 융(隆) 송악(개성)에서 출생하였다. | |
제 2대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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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3~945 이름은 무(武). 자는 승건(承乾).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맏아들 젊어서부터 도량이 넓고 지용(智勇)이 뛰어났으며, 936년(태조 19)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큰 공을 세움. | |
제 3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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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5~949 이름은 요(堯). 자는 천의(天義). 태조의 둘째아들, 어머니는 충주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인 신명순성왕 태후(神明順成王太后)이다. | |
제 4대왕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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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9~975 태조의 아들이며, 모후(母后)는 신명 순성왕태후 유씨(神明順成王太后劉氏)이고, 정종의 친동생으로 정종의 선위를 받아 왕이 됨. | |
제 5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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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5~981 이름은 유, 자는 장민(長民). 광종의 장남이며,어머니는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 | |
제 6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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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1~997 이름은 치(治), 자는 온고(溫古). 태조의 손자.대종(戴宗) 욱(旭)의 둘째 아들. 12목 설치,10도제, 삼성육부의 중앙관제, 숭유억불책 | |
제 7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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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7~1009 이름은 송(訟). 자는 효신(孝伸). 경종의 큰아들로서, 어머니는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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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대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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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1031 자는 안세(安世). 태조(太祖)의 여덟째아들인 안종욱(安宗郁)의 아들 어머니는 경종의 비 효숙왕후 황보씨(孝肅王后皇甫氏) | |
제 9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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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1034 이름은 흠(欽). 자는 원량(元良). 현종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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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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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4~1046 이름은 형(亨). 자는 신조(申照). 현종의 둘째아들로 덕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김은부(金殷傅)의 딸인 원성왕후 김씨(元成王后金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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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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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6~1083 이름은 휘(徽), 자는 촉유(燭幽). 현종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원혜태후 김씨(元惠太后金氏)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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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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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3 초명은 휴(烋), 이름은 훈(勳). 자는 의공(義恭).문종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 | |
제13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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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3~1094 이름은 운(運), 초명은 증(蒸) 또는 기(祈), 자는 계천(繼天). 비(妃)는 이석(李碩)의 딸 사숙태후(思肅太后)이다. | |
제14대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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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4~1095 이름은 욱(昱). 선종의 원자(元子)로 즉위초에는 어리고 병약하였으므로 태후가 청정(聽政)하여 군국대사를 모두 처결하였다.숙종(肅宗,1054~1105) | |
제15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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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1105 초명은 희(熙), 이름은 옹, 자는 천상 (天常).문종의 3남이며 선종의 동모 제(同母弟)이다. | |
제16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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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1122 이름은 우. 자는 세민(世民). 개성왕씨(開城王氏). 숙종의 장자로서 어머니는 명의태후 유씨(明懿太后柳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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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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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1146 1109(예종 4)∼1146(인종 24) 고려 제17대왕 재위 1123∼1146 본관은 개성(開城)휘는 해(偕).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을 격었으나 선정을 베품.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케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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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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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6~1170 이름은 현(晛), 초명은 철(徹). 자는 일승(日升).인종의 맏아들. 1134년(인종 12)에 태자가 되었으며 1146년 인종이 죽자 즉위하였다. | |
제19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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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0~1197 이름은 호(晧). 초명은 흔(昕), 자는 지단(之旦).인종의 셋째아들이며 의종의 친동생이다. | |
제20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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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7~1204 이름은 탁(晫), 초명은 민(旼), 자는 지화(至華).의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명종의 동모제이다. | |
제21대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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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1211 이름은 영, 초명은 덕(悳). 자는 불피(不陂).신종의 맏아들. 1200년(신종3)에 태자로 책봉,1204년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대관전에서 즉위하였다. | |
제22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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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1213 이름은 숙(璹)·정(貞)·오, 자는 대화(大華).명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광정태후 김씨(光靖太后金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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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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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1259 이름은 철, 초명은 진·질, 자는 대명(大命)·천우(天祐). 강종의 맏아들 1212년(강종 1) 태자에 책봉되어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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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대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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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9~1274 이름은 식, 초명은 전, 자는 일신(日新). 고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안혜태후유씨(安惠太后柳氏)이다. | |
제25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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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1308 이름은 거, 초명은 심(諶)·춘. 원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추밀부사(樞密副使) 김약선(金若先)의 딸 순경태 후(順敬太后) 김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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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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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1313 이름은 장(璋). 초명은 원, 몽고명은 이지리부카(益知禮普花). 자는 중앙(仲昻). 충렬왕의 큰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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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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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3~30,32-39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만(卍). 초명은 도(燾), 몽고식 이름은 아자 눌특실리. 자는 의효(宜孝). 충선왕의 둘째 아들 | |
제28대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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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0~32,39-44 이름은 정(禎),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普塔失里). 충숙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명덕태후 홍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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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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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1348 이름은 흔(昕), 몽고 이름은 팔사마 타아지(八思麻朶兒只). 충혜왕의 맏 아들. 어려서 볼모로 원나라에 가 있다가 1344년 충혜왕이 죽자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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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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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8~1351 이름은 저(몽고명은 迷思監朶兒只).충혜왕의 서자(庶子)이며, 어머니는 찬성(贊成) 윤계종의 딸인 희비윤씨 | |
제31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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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1~1374 이름은 전, 초명은 기(祺), 몽고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충숙왕과 명덕태후 홍씨(明德太后洪氏)사이의 둘째아들 | |
제32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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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4~1388 어릴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이며,신돈(辛旽)의 시비(侍婢)인 반야(般若)의 소생으로 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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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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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1389 이름은 창(昌). 우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시중 이림(李琳)의 딸 근비(謹妃)이다. 공양왕(恭讓,1345~13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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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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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1392 이름은 요(瑤). 신종의 7대손으로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의 아들, 어머니는 국대비 왕씨(國大妃王氏) |
고려 초기 계보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전국을 다스리기 위해 지방 호족 세력들과 무차별적으로 정략 결혼을 하게 됩니다. 정실 부인이 무려 29명이나 됩니다. 그 자손대에서 혜종-정종-광종이 왕위를 받게 되고 손자대에서 경종-성종-현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일당 여기까지 대략적인 것만 머리에 넣으시고 다음은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아래 그림은 왕후별로 자손들 계보를 정리한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중복된 왕후의 이름들이 많이 보이지요?
고려 초기에는 신라의 근친혼을 따라서 왕족간 (이복 형제간)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는 왕족의 혈통을 유지하고 외척의 정권 탐욕을 방지하여 왕실을 튼실히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입니다.
그럼 근친혼이 어느 정도였는지, 어떤 식으로 혼인이 이뤄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후 효종때부터는 그 양상이 줄어들게 됩니다.
왕조별로 세부적인 상황을 파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태조 (왕건, 25년)
궁예 말년에 정사가 포악해지자 홍유, 배현경 등이 왕건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자
(2) 장화왕후 : 궁예의 부장으로 나주에 출전했을때 오씨와 혼인하였고 왕건이 즉위후 왕후가 되었다.
(3) 신명순성왕후 : 태사 내사령에 추증된 추우 유긍달의 딸이다. 고려 창건 직후에 왕비로 맞았고
(4) 신정왕후 : 태조 즉위후 두번째 왕비로 황주는 신라시대 패강진 지역에 속하며 신라 국경수비의
(5) 신성왕후 : 경주 김씨로 잡간이었던 김억렴의 딸이다.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는 신라왕실과
(6) 정덕왕후 : 정주 유씨로 시중 정덕영의 딸이다. 신혜왕후에게서 소생이 없자 같은 집안의 딸을
* 헌목대부인 : 7번째 부인, 경주 출신으로 좌윤 평준의 딸이다. 수명태자의 어머니고 흥덕원군의
2. 혜종 (왕무, 2년)
태조의 장남으로 박술희가 도와 태자가 되었고 태조 사후에 왕이 되었으나 이복동생 왕요, 왕소가 충주 지역 세력을 등에 없고 왕위에 도전합니다.
왕규(태조와 사돈지간)가 이를 혜종에게 알렸으나 힘이 약한 혜종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왕규는 왕을 제거하고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이런 스트레스 때문인지 재위 2년만에 병에 걸려 죽게 된다.
이어 이복동생 왕요가 군신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고 하니 혜종이 병으로 죽었는지도 확실하지만은 않다.
(2) 후광주원부인 :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대광 왕규의 딸이다. 왕규는 태조와도 혼인관계에 있는데
(3) 청주원부인 : 청주 김금률의 딸로 청주남원부인 (정종의 부인)과 자매지간이다. 청주는 신라 5소경
군신들의 추대로 재위에 오르게 되고 왕식렴(왕건의 사촌동생)의 도움으로 외척 왕규를 제거합니다.
정종의 어머니는 충주 호족 유긍달의 딸로 가장 많은 자식을 낳았다.
딸인 낙랑공주는 신라 경순왕의 부인으로 들여 신라 세력을 어울렀다.
(1) 문공왕후 :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 (언니)로 후백제 호족에 대한 배려 차원인 듯 하다.
(2) 문성왕후 :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 (동생)로 경춘원군은 광종 때 역모죄로 참사되었다.
(3) 청주남원부인 : 혜종의 제3비인 청주원부인의 친동생이다
4. 광종 (왕소, 26년)
왕권강화를 위해 무고한 살육이 많았다 (박승위, 김긍률과, 박영규, 효은태자, 흥화군, 경춘원군).
노비안검법 제정으로 노비를 해방하였다 (호족세력 약화, 세금 늘림).
과거제도 시행 (쌍기)으로 인재 등용하였다.
권신·부호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근친결혼을 장려하고 외척의 폐를 없애려 했다.
문덕왕후는 수명태자의 아내가 되어 선정왕후를 출산하게 되나 수명태자가 죽게 되자
(2) 경화군부인 : 혜종 집권 당시 왕규가 정종과 광종이 반역 혐의가 있다고 참소하자 혜종은 아우에
이때 왕족인 원녕태자, 효성태자까지 복수를 당해 사망하는 일이 생기게 되자 복수법을 금지하게 된다.
관리의 봉급제도인 전시과(토지의 차등분배)를 제정하였고, 후반에는 방탕한 생활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성종의 동생인 헌애왕후(천추태후), 헌정왕후를 왕비로 맞아 들인다.
재위 6년만에 병석에 누워 성종에게 양위하고 사망하였다.
(1) 헌숙왕후 : 경순왕의 딸로 태조의 외손녀일 가능성이 크다 (낙랑공주?).
(2) 헌의왕후 : 문원대왕의 딸. 근친간의 혈족혼을 통해 왕실의 순수 혈통을 유지함으로써
귀족과 다른 초월적 존재임을 과시하고 왕실내의 단결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신라시대 왕실의 혼인제도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계가 같더라도 모계만 다르면 생활권을 달리하는 방처혼적(訪妻婚的)인 가족구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왕실과의 동성을 피하기 위해 할머니의 유씨 성을 칭하였다.
(3) 헌애왕후(천추태후) :
자신을 천추태후라 부르게 하였다.
경종이 죽은후 외가 친척인 김치양을 만나 통정하게 되어 분란을 일으키자 성종은 김치양을
귀양보냈다. 천추태후가 섭정하게 되면서 김치양을 다시 불렀고 아이가 생기자 병든 목종을
대신해서 목종의 후사를 잇고자 했다. 이 즉위에 걸림돌이던 현종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한다.
풀려나 66세에 사망했다.
(4) 헌정왕후 : 성종의 누이동생이자 헌애왕후의 친동생.
숭유억불 정책, 문물제도 정비.
중앙집권적 봉건제도 확립 (유교) - 최승로 시무 28조, 지방제도 정비를 통해 고려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거란을 물리쳐 강동6주 (서희)를 획득함.
성종의 할머니는 신정왕후 황보씨로 황주 출신 호족이며 어머니는 선의태후이다.
(2) 문화왕후 : 선산 출신으로 신라 호족인 김원숭의 딸. 광종 이후에 족내혼을 하지 않은
첫 사례이나 어머니가 왕씨인 것으로 보아 왕실 외손일 가능성도 있다.
7. 목종 (왕송, 12년)
전시과를 개선하고 학문을 장려하였으나 자식이 없었고, 어머니인 헌애왕후(천추태후)가 섭정하게 되는데,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과 간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으로 삼기 위해 대량원군(현종)을 승려로 만든 뒤 죽이려고 하였다.
목종이 이를 막고자 강조에게 대량원군의 호위를 명했으나 오히려 강조에게 폐위되어
유배 도중 살해되었다.
강조는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당을 숙청하고 대량원군(현종)을 추대하였다.
(1) 선정왕후 : 수명태자와 문덕왕후 사이에서 출생하였고 수명태자 사망 후 문덕왕후가 성종에게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강감찬-귀주대첩).
현종의 할머니는 신성왕후 김씨로 경순왕의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로 경순왕 사촌누이이다.
현종의 어머니는 헌정왕후로 성종과 천추태후의 동생이다.
경종의 왕후였으나 경종이 사망한 뒤 사가에 나가 홀로 지내다가 삼촌인 안종을 만나 정을 통해 임신하게 된다.
이 일로 성종은 안종을 유배보냈고, 헌정왕후는 현종을 출산하고 산고로 사망하였다.
(1) 원정왕후 : 성종의 딸로 문화왕후 성을 따라 김씨로 하였다. 1010년 거란이 침입하자 임신한 몸이라
(2) 원화왕후 : 성종의 딸로 낙랑군대부인 성을 따라 최씨로 하였다. 거란 침입시 나주로 피난하였다.
(3) 원성태후 : 안산 김씨로 시중을 지낸 김은부의 딸이다. 현종이 나주로 피난하였다가 귀환하던 중
(4) 원혜태후 : 김은부의 딸로 이것은 왕실내에서만 이루어지던 혼인이 귀족가문으로 확대되는 하나의
(5) 원용왕후 : 태조의 친손자인 경장태자의 딸로 할머니 선의왕후를 따라 유씨라 하였다.
(6) 원목왕후 : 993년 거란이 침입하였을 때 이를 담판으로 물리친 서희의 손녀이며 내시령이었던
(7) 원평왕후 : 김은부의 딸
(8) 원순숙비 김씨 : 김인위의 딸로 덕종의 1비가 된 경성왕후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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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군(연성군) 장인 왕화, 원상 사위 창원부원대군 왕우(공양왕 아우) (0) | 2008.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