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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內系外系

안산김씨 원성태후, 원혜태후, 원평왕후, 효사왕후, 인평왕후

by 연송 김환수 2008. 10. 7.

김은부 가계도

 

 

       원성왕후 및 원혜왕후는 태후로 추존됨

       * 원성태후 : 덕종, 정종, 인평왕후(문종 왕비), 경숙공주

         * 원혜태후 : 문종, 평양공 왕기, 효사왕후(덕종 왕비)

         * 원평왕후 : 효경공주

 

원성태후(元成太后)


시대 고려

생몰년 ?-1028(현종19)

본관 안산김(安山金)

시호 광선(廣宣)

활동분야 왕비


원성태후(元成太后)에 대하여   원성태후(元成太后)

?∼1028(현종 19). 고려 제8대왕인 현종의 제3비.

안산김씨(安山金氏)로 시중을 지낸 은부(殷傅)의 딸이며, 어머니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이허겸(李許謙)의 딸이다.

1010년(현종 1)에 거란병이 내침하자 왕은 나주로 피난하였다가 적병이 물러가자 왕궁으로 귀환하던 중 공주에 묵게 되었다.

이때 절도사인 은부는 왕을 영접하고, 그 딸로 하여금 어의를 지어드리게 하고, 편안히 모시게 하였다. 왕은 이를 맞아들여 연경원주(延慶院主)로 삼았다. 정종을 낳은 뒤 궁주(宮主)가 되고 얼마 뒤에 왕비로 봉하여졌다.

한편, 왕비의 두 자매도 함께 맞아들여 비로 삼았다. 세 자매가 함께 한 왕의 왕비가 된 예는 이것이 처음이며, 광종 때 왕실족내혼이 이루어진 이래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이다.

현종과의 사이에 덕종·정종의 두 아들과 인평왕후(仁平王后)와 경숙공주(景肅公主)를 두었다.

시호는 원성왕후이고 명릉(明陵)에 장사하였으며 현종 묘실에 합장하였다. 덕종 즉위 후에 왕태후로 추존하였고, 뒤에 용의(容懿)·공혜(恭惠), 1056년(문종 10)에 영목(英穆), 뒤에 양덕(良德)·신절(信節)·순성(順聖), 1140

년(인종 18)에 자성(慈聖), 1253년(고종 40)에 광선(廣宣)의 시호가 거듭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 閥族에 관한 硏究(黃雲龍, 親學社, 1978). 〈鄭容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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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元城) 태후(太后) 김(金)씨는 안산 사람이니 시중 김은부(殷傅)의 딸이다. 덕종(德宗), 정종(靖宗), 인평(仁平) 왕후, 경숙(景肅) 공주를 낳았다.

 

시초에 현종이 남녘으로 피난갔다가(거란) 침략군이 퇴각한 후 돌아오는 도중에 공주(公州)에 이르렀을 때 김은부는 절도사로 있었는데 그의 딸을 시켜 왕의 의복을 지어 드리게 하였더니 이로 인하여 그를 맞아 들여 연경원주(延慶院主)라고 불렀다.

 

그가 현종 9년 7월에 정종(靖宗)을 낳으니 왕이 연경원을 연경궁으로 고치고 사절을 보내 예물을 주었다. 현종 13년 9월에 김은부에게 추충(推忠) 수절(守節) 창국(昌國) 공신(功臣) 칭호와 개부의동삼사 수 사공 관직과 상주국의 훈위를 주고 안산군(安山郡) 개국후(開國侯)의 작위와 식읍(食邑) 1천 호를 주었으며 죽은 모친에게는 안산군(安山郡) 대부인(大夫人)을 추증하였다.

 

또 이내 후(后)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정종 15년에는 또 조부 김긍필(肯弼)에게 상서(尙書), 우복야(右僕射) 벼슬과 상주국(上柱國) 훈위를 주고 안산현(安山縣) 개국후(開國侯)를 봉하고 식읍(食邑) 1천5백 호를 추증하였으며 죽은 조모에게 안산군 대부인을 추증하였고 외조부 이허겸(李許謙)에게 상서 우복야 벼슬과 상주국 훈위를 주고 소성현(邵城縣) 개국후를 봉하고 식읍 1천5백 호를 주었다.

 

정종 18년 9월에 왕후가 살던 옛집의 택호를 장경궁이라고 하였다. 그가 정종 19년(1028) 7월에 죽으니 시호를 원성 왕후라고 하였으며 명릉(明陵)에 매장하였고 현종의 사당에 합사하였다.

 

덕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태후로 추존하고 후에 용의 공혜(容懿恭惠)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문종 10년 10월에 영목(英穆)이라는 시호를 주고 후에 또 양덕(良德) 신절(信節) 순성(順聖)이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인종 18년 4월에는 자성(慈聖)이라는 시호를, 고종 10년 10월에는 광선(廣宣)이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고려사 제88권 열전1 후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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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혜태후(元惠太后)

간략정보

시대 고려

생몰년 미상

본관 안산김(安山金)

활동분야

왕비

 

원혜태후(元惠太后)에 대하여

원혜태후(元惠太后)

생몰년 미상. 고려 현종의 제4비.

안산김씨(安山金氏)로 아버지는 시중이었던 은부(殷傅)이며, 어머니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이허겸(李許謙)의 딸이다.

원성태후(元成太后)와 원평왕후(元平王后)와는 자매간이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로 피난하였던 현종이 왕궁으로 귀환도중 공주에 들렀을 때 납비되었다. 이것은 그동안 왕실내에서만 이루어지던 혼인이 귀족가문으로 확대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현종과의 사이에 문종·평양공 기(平壤公基)·효사왕후(孝思王后)를 낳았다. 문종은 고려 제11대왕이 되고, 그뒤 고려왕통은 문종의 후손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그리고 평양공 기의 후손은 대대로 왕실 공주와 계속적인 혼인관계를 맺는 집안으로 고정되었다.

처음에 안복궁주(安福宮主)라 칭하였다가 연덕(延德)으로 개칭하였고 사후에 원혜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능호는 회릉(懷陵)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閥族에 관한 硏究(黃雲龍, 親學社, 1978). 〈鄭容淑〉


1025년에 왕비로 추봉되고 1027년에 평경(平敬)의 시호를 내렸으며 문종이 즉위한 뒤에 태후로 추존되었다.


원평왕후 김씨(元平王后 金氏) 

생몰년 미상. 고려 현종의 제7비.

안산김씨(安山金氏)로 아버지는 시중을 지낸 은부(殷傅)이며, 어머니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이허겸(李許謙)의 딸이다.

현종의 제3비 원성태후(元成太后)와 제4비 원혜태후(元惠太后)와는 자매간이다.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까지 피난하였던 현종이 왕궁으로 귀환하던 도중 공주지방에 들렀을 때 납비(納妣)된 언니들을 따라 왕비가 되었다. 현종과의 사이에 효경공주(孝敬公主)를낳았다. 1028년(현종 19)에 원평왕후로 추증되었으며, 능호는 의릉(宜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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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사왕후 (孝思王后)

 

생몰년 미상. 고려 제9대 덕종의 제3비. 현종의 딸이며, 어머니는 현종의 제4비 원혜태후 김씨(元惠太后金氏)이고, 어머니의 성을 따라 김씨로 칭하였다.

 

문종 및 종실 평양공 기(平壤公基)와 친남매간이고, 외할아버지는 현종에게 3명의 딸을 왕비로 들여보낸 김은부(金殷傅)이다.

 

덕종을 낳은 현종의 제3비 원성태후(元成太后)와 원혜태후는 자매간이므로 덕종과 효사왕후는 모계로도 이종사촌에 해당된다. 친가뿐 아니라 외가까지 이처럼 지친관계의 혼인은 고려왕실에서도 아주 드문 사례에 속한다.

 

태조는 나라를 건국한 뒤 자신의 왕자와 공주를 서로 혼인시켰는데, 이는 왕족의 순수혈통을 보호하고 왕실의 단결을 강화하며, 소수 혈족을 중심으로 왕실의 특권을 향유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현종대에 와서 다시 나타난 남매간 혼인도 태조와 비슷한 의미를 가질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정변을 통하여 목종이 축출되고 현종이 즉위하는 정치적 격동을 거쳤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여 왕족의 위치를 재정립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참고문헌≫ 高麗王室族內婚硏究(정용숙, 새문社, 1988)
 

인평왕후

 

생몰년 미상. 고려 제11대 문종의 제1비. 고려 제8대왕인 현종의 딸로 어머니는 현종비인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이다. 문종의 모후인 원혜태후(元惠太后)와는 자매간이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김씨로 하였다.

이 혼인은 친계로는 남매간 혼인이며, 모계로는 이종4촌간이 된다. 고려시대에 이와같은 근친혼은 태조가 어머니를 달리하는 그의 자녀를 혼인시키면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왕실혼의 한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복남매간의 극단적 근친혼은 광종·덕종·문종의 사례가 있을 뿐 그다지 많지는 않다. 왕자들 가운데에서도 이러한 근친혼의 사례가 있으며, 그런 경우 왕실 내부의 반대를 받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문종과 인평왕후와의 혼인은 모계 4촌이라는 면에서 종래의 혼인보다도 특이한 경우이다. 이는 현종이 김은부(金殷傅)의 세 자매를 모두 왕비로 맞고 거기에서 낳은 자녀를 서로 결혼시킨 결과 나타난 현상이다. 왕실내의 단결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高麗史

≪참고문헌≫ 高麗初期 婚姻政策의 추이와 王室 族內婚의 성립(鄭容淑, 韓國學報 37, 1984)

 

고려 8대 임금 현종의 선릉

고려 11대 문종(재위 1046~1083)의 경릉

 

 

 

고려 초기 계보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전국을 다스리기 위해 지방 호족 세력들과 무차별적으로 정략 결혼을 하게 됩니다. 정실 부인이 무려 29명이나 됩니다. 그 자손대에서 혜종-정종-광종이 왕위를 받게 되고 손자대에서 경종-성종-현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일당 여기까지 대략적인 것만 머리에 넣으시고 다음은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아래 그림은 왕후별로 자손들 계보를 정리한 것입니다.
 

자손이 없는 왕후들도 많고 타살된 왕자들도 많이 보입니다.
자세히 보면 중복된 왕후의 이름들이 많이 보이지요?
고려 초기에는 신라의 근친혼을 따라서 왕족간 (이복 형제간)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는 왕족의 혈통을 유지하고 외척의 정권 탐욕을 방지하여 왕실을 튼실히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입니다.

그럼 근친혼이 어느 정도였는지, 어떤 식으로 혼인이 이뤄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혜종-정종은 호족 세력과 결혼을 했고 광종때부터는 왕족만을 왕후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후 효종때부터는 그 양상이 줄어들게 됩니다.
이제 전반적인 고려 초기 왕들의 계보나 혼인 체계 같은 거시적인 그림이 정리된 것으로 보고
왕조별로 세부적인 상황을 파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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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조 (왕건, 25년)
 
왕건은 전국의 호족들을 다스리기 위해 호족의 딸들과 결혼을 많이 해서 부인들이 29명이나 됩니다.
 
 
(1) 신혜왕후 : 정주 출신 호족 유천궁의 딸로, 태조가 궁예의 휘하 장군으로 있을때 아내로 맞았다.
                     궁예 말년에 정사가 포악해지자 홍유, 배현경 등이 왕건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왕건이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 때 신혜왕후가 나와 "의로써 탐학을 물리치는 것은 예로부터 해온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군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녀자도 분발하겠거늘 하물며 대장부께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갑옷을 입혀 의거에 참여하도록 권하였다.
(2) 장화왕후 : 궁예의 부장으로 나주에 출전했을때 오씨와 혼인하였고 왕건이 즉위후 왕후가 되었다.
(3) 신명순성왕후 : 태사 내사령에 추증된 추우 유긍달의 딸이다. 고려 창건 직후에 왕비로 맞았고
                     충주는 후백제와 신라를 연결하는 교통상의 요충지이며 신라 귀족이 많이 사는
                     신라 5소경의 하나이다.
(4) 신정왕후 : 태조 즉위후 두번째 왕비로 황주는 신라시대 패강진 지역에 속하며 신라 국경수비의
                     육군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다. 요충지 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음으로써 자신의
                     지원세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선의왕후가 25세에 죽자 성종을 길렀다.         
(5) 신성왕후 : 경주 김씨로 잡간이었던 김억렴의 딸이다.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는 신라왕실과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6) 정덕왕후 : 정주 유씨로 시중 정덕영의 딸이다. 신혜왕후에게서 소생이 없자 같은 집안의 딸을
                     다시 맞아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 헌목대부인 : 7번째 부인, 경주 출신으로 좌윤 평준의 딸이다. 수명태자의 어머니고 흥덕원군의
                     할머니이다. 태조의 여러 후비들 중 유일하게 대부인 칭호를 가지고 있다.
                     평씨 성은 신라 육두품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신분적 위치는 높지 않았다.
 

2. 혜종 (왕무, 2년)
 
태조가 나주를 정벌할 때 지역 호족 딸인 오씨와 혼인하였으나 나주의 권력 기반이 약해 혜종은 왕위쟁탈전에 휘말리게 됩니다.
태조의 장남으로 박술희가 도와 태자가 되었고 태조 사후에 왕이 되었으나 이복동생 왕요, 왕소가 충주 지역 세력을 등에 없고 왕위에 도전합니다.
왕규(태조와 사돈지간)가 이를 혜종에게 알렸으나 힘이 약한 혜종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왕규는 왕을 제거하고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이런 스트레스 때문인지 재위 2년만에 병에 걸려 죽게 된다.
이어 이복동생 왕요가 군신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고 하니 혜종이 병으로 죽었는지도 확실하지만은 않다. 
 
 
(1) 의화왕후 : 진주 임씨로, 병부령 대광 임희의 딸이다. 태조가 태자비로 선택한 데는 진천의 지역적
                     위치와 임희가 장악하고 있는 막강한 군사실력자로서의 위치 때문이었다. 흥화군은
                     광종 때 역모죄로 참사당하였고, 경화군부인은 광종의 제2비로 들어간다. 이는 당시
                     혜종의 외가 세력이 약했으므로 충주 호족 세력의 역모를 잠재우기 위한 고육지책
                     이었을 것이다.
(2) 후광주원부인 :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대광 왕규의 딸이다. 왕규는 태조와도 혼인관계에 있는데
                     왕규의 학문적 능력과 군사적 지원으로 혜종의 왕위가 안정되기를 기대하였다.
                     혜종이 즉위한 뒤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위로 추대하기 위하여 혜종과
                     대립적인 위치에 서게 되고 혜종이 죽은뒤 정종과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반역을
                     꾀하였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왕규와 일당 수백명이 같이 죽임을 당하였는데
                     후광주원부인이 무사하였을지 의문이다. 살았더라도 왕비의 자리에서 밀려났을
                     것이다.
(3) 청주원부인 : 청주 김금률의 딸로 청주남원부인 (정종의 부인)과 자매지간이다. 청주는 신라 5소경
                     중 서원경이 있던 곳으로 독자적 지방세력이 구축되었던 곳이다. 고려 건국 직후부터
                     반란이 여러차례 시도되었을 정도로 반고려적 성향을 띄었고 태조가 민심수습의 노력
                     결과로 혼인이 성사되었다. 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처제를 정종과 혼인시켜
                     왕위계승 경쟁을 무마시키고자 하였다.
 
 
3. 정종 (왕요, 4년)
 
이복동생 왕요가 혜종의 측근 박술희를 제거하고 혜종이 즉위 2년만에 병사(독살?)하자
군신들의 추대로 재위에 오르게 되고 왕식렴(왕건의 사촌동생)의 도움으로 외척 왕규를 제거합니다.
정종의 어머니는 충주 호족 유긍달의 딸로 가장 많은 자식을 낳았다.
딸인 낙랑공주는 신라 경순왕의 부인으로 들여 신라 세력을 어울렀다.
 

(1) 문공왕후 :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 (언니)로 후백제 호족에 대한 배려 차원인 듯 하다.
                     박영규의 3자매는 모두 고려 왕실과 혼인하였는데 첫째는 태조의 17비이다.
(2) 문성왕후 :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 (동생)로 경춘원군은 광종 때 역모죄로 참사되었다.
                     성명 미상의 공주는 태조의 아들인 효성태자와 혼인하였으나 후사가 없었다.
(3) 청주남원부인 : 혜종의 제3비인 청주원부인의 친동생이다
 

4. 광종 (왕소, 26년)
 
정종이 재위 4년만에 병석에 누워 사망하자 정종의 선위를 받아 동복동생인 광종이 25세 나이로 득위한다.
왕권강화를 위해 무고한 살육이 많았다 (박승위, 김긍률과, 박영규, 효은태자, 흥화군, 경춘원군).
노비안검법 제정으로 노비를 해방하였다 (호족세력 약화, 세금 늘림).
과거제도 시행 (쌍기)으로 인재 등용하였다.
권신·부호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근친결혼을 장려하고 외척의 폐를 없애려 했다.
 
 
(1) 대목왕후 : 신정왕후의 딸로 광종의 사촌동생이다. 고려시대 첫 근친혼이다. 광종이 노비안검법을
                     실시하려 하자 노비들이 그 주인을 배반하는 풍조가 성행하였으므로 이 법의 실시를
                     중지하도록 건의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종의 어머니이고 천추공주는 문원대왕
                     과 문혜왕후의 아들인 천추전군과 혼인하였다. 문혜왕후는 태조의 6번째 왕후인
                     정덕왕후 유씨의 딸로서 신혜왕후 슬하에 자식이 없자 동일한 호족인 정주에서 혼인한
                     여인이다.
                     문덕왕후는 수명태자의 아내가 되어 선정왕후를 출산하게 되나 수명태자가 죽게 되자
                     성종의 재가하게 된다. 이후 선정왕후는 목종의 왕비가 된다.
(2) 경화군부인 : 혜종 집권 당시 왕규가 정종과 광종이 반역 혐의가 있다고 참소하자 혜종은 아우에
                     대한 신뢰의 표시 및 동생들의 실력을 강화시켜주기 위한 조취로 자신의 딸을 광종에게
                     출가시켰다. 반대로, 왕족내혼을 통해 왕실에서 입지가 확고하게 된 동생 광종에게
                     자신의 딸을 출가시킴으로써 혜종 자신의 신변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빈약한 혜종의 왕권이었기 때문에 경화군부인은 왕의 공주였지만 왕후가 아닌 부인에
                     머무른 것이 아닌가 한다.
 
 
5. 경종 (왕유, 6년)
 
광종의 무고한 살육의 원한을 풀어주고자 경종은 복수법을 시행해서 복수를 허용하게 되는데,
이때 왕족인 원녕태자, 효성태자까지 복수를 당해 사망하는 일이 생기게 되자 복수법을 금지하게 된다.
관리의 봉급제도인 전시과(토지의 차등분배)를 제정하였고, 후반에는 방탕한 생활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성종의 동생인 헌애왕후(천추태후), 헌정왕후를 왕비로 맞아 들인다.
재위 6년만에 병석에 누워 성종에게 양위하고 사망하였다.
 

(1) 헌숙왕후 : 경순왕의 딸로 태조의 외손녀일 가능성이 크다 (낙랑공주?).
(2) 헌의왕후 : 문원대왕의 딸. 근친간의 혈족혼을 통해 왕실의 순수 혈통을 유지함으로써
귀족과 다른
  초월적 존재임을 과시하고 왕실내의 단결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신라시대 왕실의 
 혼인제도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계가 같더라도 모계만 다르면 생활권을 달리하는 방처혼적(訪妻婚的)인 가족구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왕실과의 동성을 
 피하기 위해 할머니의 유씨 성을 칭하였다.

(3) 헌애왕후(천추태후) :
성종의 누이 동생으로 목종의 어머니이다. 경종이 죽자 2살인 목종 대신에 왕후의 오빠인 성종이 즉위하게 되고 헌애왕후는 태후가 되어 천추궁에서 머무른다. 아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자신을 천추태후라 부르게 하였다.

경종이 죽은후 외가 친척인 김치양을 만나 통정하게 되어 분란을 일으키자 성종은 김치양을
귀양보냈다. 천추태후가 섭정하게 되면서 김치양을 다시 불렀고 아이가 생기자 병든 목종을
대신해서 목종의 후사를 잇고자 했다. 이 즉위에 걸림돌이던 현종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한다.
결국 강조의 변이 일어나 김치양은 죽게 되고 태후는 유배를 갔으며 목종은 폐위되어 유폐지로 가는 도중 강조의 부하들에게 암살당한다. 강조는 현종을 왕으로 추대하고 태후는 유배에서
풀려나 66세에 사망했다.

(4) 헌정왕후 : 성종의 누이동생이자 헌애왕후의 친동생.
 
 
6. 성종 (왕치, 16년)
 
성종은 22세로 득위하였고 (이 때 목종은 2살이었고 경종의 사위라는 장점도 있음),
숭유억불 정책, 문물제도 정비.

중앙집권적 봉건제도 확립 (유교) - 최승로 시무 28조, 지방제도 정비를 통해 고려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거란을 물리쳐 강동6주 (서희)를 획득함.  
병이 위독하여 조카인 개령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성종의 할머니는 신정왕후 황보씨로 황주 출신 호족이며 어머니는 선의태후이다.
 
 
(1) 문덕왕후 : 광종의 딸로 경종의 여동생이다. 처음에는 수명태자와 혼인하여 선정왕후를 출산
                     하였으나 수명태자가 일찍 죽자 성종에게 재가한다. 선정왕후는 이후 목종의 아내가  된다. 성종은 광종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2) 문화왕후 : 선산 출신으로 신라 호족인 김원숭의 딸. 광종 이후에 족내혼을 하지 않은
첫 사례이나
어머니가 왕씨인 것으로 보아 왕실 외손일 가능성도 있다.

7. 목종 (왕송, 12년)
 
성종의 병세가 깊어지게 되어 성종의 선위로 목종이 18세의 나이로 득위하게 된다.
전시과를 개선하고 학문을 장려하였으나 자식이 없었고, 어머니인 헌애왕후(천추태후)가 섭정하게 되는데,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과 간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으로 삼기 위해 대량원군(현종)을 승려로 만든 뒤 죽이려고 하였다.
목종이 이를 막고자 강조에게 대량원군의 호위를 명했으나 오히려 강조에게 폐위되어
유배 도중 살해되었다.

강조는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당을 숙청하고 대량원군(현종)을 추대하였다.
 

(1) 선정왕후 : 수명태자와 문덕왕후 사이에서 출생하였고 수명태자 사망 후 문덕왕후가 성종에게
                     재가하였기 때문에 성종의 딸로서 자랐다.
                     목종은 성종의 사위의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8. 현종 (왕순, 22년)
 
천추태후의 자객에도 여러차례 살아남은 현종은 강조의 옹립으로 18세에 등극하는데,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강감찬-귀주대첩).
현종의 할머니는 신성왕후 김씨로 경순왕의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로 경순왕 사촌누이이다.
현종의 어머니는 헌정왕후로 성종과 천추태후의 동생이다.
경종의 왕후였으나 경종이 사망한 뒤 사가에 나가 홀로 지내다가 삼촌인 안종을 만나 정을 통해 임신하게 된다.
이 일로 성종은 안종을 유배보냈고, 헌정왕후는 현종을 출산하고 산고로 사망하였다.
 

(1) 원정왕후 : 성종의 딸로 문화왕후 성을 따라 김씨로 하였다. 1010년 거란이 침입하자 임신한 몸이라
                     외가가 있는 선산으로 피했고 왕은 나주로 피난했다.
(2) 원화왕후 : 성종의 딸로 낙랑군대부인 성을 따라 최씨로 하였다. 거란 침입시 나주로 피난하였다.
(3) 원성태후 : 안산 김씨로 시중을 지낸 김은부의 딸이다. 현종이 나주로 피난하였다가 귀환하던 중
                     공주에 묵게 되고 원성태후가 어의를 지어 드리고 편안히 모시었다. 김은부의 세자매가
                     (원혜태후, 원평왕후) 모두 왕비가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며 광종 때 왕실족내혼이
                     이루어진 이래 새로운 양상이다.
(4) 원혜태후 : 김은부의 딸로 이것은 왕실내에서만 이루어지던 혼인이 귀족가문으로 확대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아들 문종은 11대왕이 되고 그 뒤 고려 왕통은 문종의 후손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5) 원용왕후 : 태조의 친손자인 경장태자의 딸로 할머니 선의왕후를 따라 유씨라 하였다.
                     경장태자는 현종의 생모인 헌정왕후와는 남매간이다.
(6) 원목왕후 : 993년 거란이 침입하였을 때 이를 담판으로 물리친 서희의 손녀이며 내시령이었던
                     서눌의 딸이다. 현종은 태조 이래 가장 많은 13인의 비빈을 두었고 그 중에는
                     귀족가문의 타성도 다수 있었다. 광종 이래 새로운 혼인관계로 귀족과의 연결을 통하여
                      왕실의 고립을 막고 많은 자녀를 두어 왕족을 번성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7) 원평왕후 : 김은부의 딸
(8) 원순숙비 김씨 : 김인위의 딸로 덕종의 1비가 된 경성왕후를 낳았다.

 

 

 

 

 

아래 댓글에 대한 참고자료 입니다.

[청암서원]<69강>고려시대(10)
0. 강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제 우리는 두 명의 새로운 황제를 보게 됩니다. 바로 정종과 광종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이미 말씀드렸듯이, 두 사람은 일찍이 널리 주목을 받아 왕규조차 그를 견제하려고 하였으며, 그 후에 왕식렴도 이 두 사람을 견제하려 들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모두 "제국의 아침"에서 그렇게 묘사를 하였지요. 그렇다면 과연 정사인 < 고려사 >에서 그러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주 소생의 황후 오씨의 아들인 혜종 무(武)는 단명하였으나, 그 아래 있던 충주 소생의 유씨(柳氏) 두 아들인 요와 소, 즉 정종과 광종은 차례로 황제로 집권하여 나라를 오랫동안 지배했고 그 공적도 컸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번에 만나볼 두 사람은 고려사에서 전환기적 업적을 이룩한 흥미로운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두 황제 모두 큰 야심을 가지고 당대를 휘어잡을만 하였으며, 황실을 강대하게 만들어서 중앙집권을 강화하려고 추진한 인물들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특히 이 두 사람의 등장과 함께 고려사의 위대한 진전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1. 정종, 그는 누구인가 -- 정종에 대한 소고

정종에 대해 < 고려사 >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종 지덕(至德), 장경(章敬), 정숙(正肅), 문명(文明) 대왕의 이름은 요(堯)요, 자는 천의(天義)이니 태조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신명(神明), 순성(順聖) 왕태후 유씨이다."
( < 고려사 > 권 제2 정종세가 )

왕규의 역모를 제압하고 보위에 오른 정종. 그는 946년, 현릉(태조의 릉)에 이르러 소나무 속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듣고 크게 감복하여 재물을 헌납했다고 합니다.

"너 요야! 세민(細民, 극빈한 백성들)들을 잘 돌보아 주는 것이 임금의 가장 요긴한 정무니라."
( < 고려사 권 제2 정종세가
)

이것은 당시 왕규의 난 이래로 고려가 얼마나 피폐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러한 신화적인 내용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데, 1) 하늘의 명령을 받들고 있는 군왕으로서 그를 승인해준다는 의미2) 당시의 긴급한 정무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는 의미가 그것입니다. 왕규와 왕식렴의 집정 이래로 초기에 혼란이 가중되면서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복합적으로 폐정(廢政)이 되면서 고려 전체를 뒤흔들고 황제의 지위를 위협했기 때문에 이는 시급한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우뢰가 들리고 비가 내리여 물건을 관리하는 사람과 궁전의 서쪽 모퉁이를 벼락쳤다. 왕이 크게 놀라매 근신들이 부축하여 중광전으로 들여갔는데 그 길로 병이 들었다."
( < 고려사 > 권 제2 정종세가 )

그런데 기이하게 집권한 지 불과 2년만인 948년, 이상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병이 들고 맙니다. 그 결과 일찍 사망을 하기에 이릅니다. "제국의 아침"에는 당시 여러 명의 죽인 원혼 때문이라는 식으로 진행했지만, 그것은 알 길이 없으며 다만 이 한 줄로 그의 사망 직전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949년 3월 병진일에 왕의 병이 위독하여지므로 자기의 동복 아우 소를 불러 왕위를 넘겨주었다. 왕이 제석원으로 옮겼다가 거기서 죽었다. 재위 연수는 4년이요, 향수는 27세였다."
( < 고려사 > 권 제2 정종세가 )

2. 광종의 집권 -- 황실 vs 귀족의 대립

광종(光宗), 홍도(弘道), 선렬(宣烈), 평세(平世), 대성(大成) 대왕으로 불리는 광종은 950년, 광덕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면서 공식적으로 건원합니다. 그리고 953년 후주로부터 특진 검교 태보, 사지절 현토주도독, 충대의군사 겸 어사대부, 고려국왕으로 책봉을 받습니다. 이것이 처음 집권을 시작하던 광종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의 기록 중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백관의 관복 제도를 제정하였다."

"개경을 황도로, 서경을 서도로 각각 고치었다."

"평농서사 권신이 참소하기를,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이 역모를 꾸민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내쫓았다. 이 때부터 아첨하는 자들이 득세하여 충성있고 현량한 사람들을 모함하였으며, (중략) 왕실 일족들도 많이 잡혀 죽었고, 왕의 외아들 주까지도 역시 의심을 받아 왕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게 되니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마주 앉아서 이야기도 하지 못하였다."
( < 고려사 > 권 제2 광종세가 )

이로부터 968년까지 8년 동안, 무참히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습니다. 물론 965년, 주를 왕태자, 내사, 제군사, 내의령, 정윤으로 책봉하기는 했지만, 3년 뒤에 가서야 그 의심을 풀고 재회를 하게 되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세밀하게 다룰 필요가 있겠습니다.

 

일반학술자료 #112209

고려초 정치세력의 추이

2002년 4월 | 진승훈

 

왕위계승전에는 당시 재위하고 있는 왕과 왕위계승을 하려는 자, 그리고 이들 왕과 왕위에 도전하려는 자를 지지하는 셰력집단이 존재하였다. 혜종이 재위하고 있을 때 이에 도전한 세력은 요․소의 왕자 및 그와 결탁한 왕식렴 세력, 그리고 광주원군과 그를 왕으로 삼으려는 왕규세력이 있었으며 혜종은 박술희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에 주목해야 할 것은 왕이나 왕자를 지원하는 세력집단이다. 따라서 여기서 생각할 정치세력집단은 왕과 그의 지지세력, 왕위에 도전하는 자와 그의 지지세력의 존재형태가 될 것이다.

 

「고려사」를 보면 혜종이 소에게 장공주를 혼인시켜 소의 세력을 강하게 해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왕규가 ‘기당’을 보내 혜종을 죽이려 한 것과 또 왕규와 함께 죽은 300 여 인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때 이 300 여 인은 왕규의 친척으로만 이루어진게 아니라 아마도 그 밖에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에 혜종을 지지한 세력은 박술희였고, 광주원군은 왕규가, 요․소는 왕식렴이 도왔음을 알 수 있다.

 

사료의 기록대로라면 박술희는 혜성군인으로서 혜성군의 호족출신인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혜종의 후견인이 된 이유가 단순히 지방호족 출신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궁예 뿐 아니라 태조 아래에서 군공을 세울 수 있었던 개인의 뛰어난 군사적 실력 때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 왕규와 광주원군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 경우에는 광주원군이 왕이 되려했다기보다는 왕규가 정치적 이유로 광주원군을 왕으로 삼으려 했었던 것 같다. 왕규는 광주원군의 외조였고, 혜종의 장인도 됐다. 이에 왕의 장인이면서 자기의 외손을 왕으로 삼으려 한 왕규의 예로 사위보다는 외손이 더 가까운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요․소와 왕식렴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왕식렴은 요․소의 종숙이 된다. 또한 혜종과 광주원군과도 같은 관계에 있는 셈이었다. 그러면서도 요․소를 지지한 것이 주목된다.

 

참고문헌

1. 이종욱,<고려초 945년대의 왕위계승전과 그 정치적 성격> 《고려광종연구》

일조각, 1981

2. 황운용,《고려벌족연구》, 1989

3. 황선영,《고려초기 왕권연구》, 동아대학교출판부, 1988

4. 강희웅, <고려혜종기 왕위계승란의 신해석> 《한국학보》 7,1977, 여름

5. 엄성용,<고려초기 왕권과 지방호족의 신분변화> - ‘호족련합정권’설에 대한

검토 - 《고려사의 제문제》,1986

6. 박창희,<고려초기 ‘호족련합정권’설에 대한 검토> -‘귀부’호족의 정치적

성격을 중심으로 - 《한국사의 시각》, 영신문화사, 1984

7. 하현강, 《한국중세사론》, 1989

8. 이병도, 《고려시대의 연구》, 아세아문화사

 

인터넷 스크렙 자료

 

고려 제 1대 황제 태조

 

태조황제의 본관은 개성이고 이름은 왕건이다.

 

918년 궁예의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여 궁예에게 민심이 떠나자 태조왕건은 홍유와 배현경등 군신들의 추대로 고려제1대 황제로 즉위하면서 국호를 고려로 하고 연호를 천수라고 정하였다. 이듬해에는 도읍지를 개성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았다.

 

935년에는 투항해 온 신라의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936년에는 항복해온 후백제의 황제 견훤과 함께 후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태조황제는 칼과 무력보다는 덕으로 적을 굴복시키고 전쟁보다는 평화로 백성들을 포섭하였다. 이른바 민족융합정책으로서 발해유민을 포섭하고 이름있는 호족들과 혼인하여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왕건의 부인이 29명이나 되고 수많은 왕자들로 후에 황위쟁탈전에 불씨를 남겼으며 혜종황제부터 광종이 즉위하는 949년까지 무려 8천명이 도육을 당하는 원인을 제공한게 바로 태조왕건이라고 할수있을것이다.

 

그러므로 황실의 권위는 호족들과의 연합체로 이루어졌으며 황제의 권위를 위태로울수박에없었다.

 

 

2. 혜종(惠宗, ?~945) 왕무

재위기간 943~945

휘는 무(武). 태조의 맏아들. 대광인 왕규(王規)의 음모에 신경쓰다 병사함.

 

고려 - 왕규의 난

 

고려 혜종 때 왕규가 왕위쟁탈을 위해 일으킨 난. 943년에 태조가 죽고 혜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왕권은 극도로 불안하였다. 혜종은 태자 때부터 강력한 호족출신인 박술희(朴述熙)의 지지와 후원을 받고 있었으나, 왕권을 노리는 적대세력은 많았고, 더 강력하였다. 왕규(王規)는 혜종의 후견세력인 박술희 세력을 제압하고, 왕위를 탈취하기 위해 노골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요컨대, 혜종대의 정정(政情)불안과 왕위쟁탈전의 원인은 혜종의 세력기반이 미약한 데 있었다.

 

그는 왜 혜종을 살해하려고 하였을까? 혜종은 4명의 부인을 두고 있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의화왕후(義和王后) 임(林)씨로서 진주사람 대광 임희(曦)의 딸이다. 태조 4년 12월에 혜종을 왕위 계승자로 책봉하면서 왕비로 삼았는데, 흥화군(興化君)과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 정헌공주(貞憲公主)를 낳았다.

 

두 번째 부인은 후광주원(後廣州院)이 왕규의 딸이다. 세 번째 부인은 청주원(淸州院) 부인 김(金)씨로서 청주사람 원보(元甫) 긍률(兢律)의 딸이다. 네 번째 부인은 궁인(宮人) 애이주(哀伊主)였다. 경주사람이요 대간(大干) 연예(連乂)의 딸이며 태자 제(濟)와 명혜(明惠) 부인을 낳았다. 이 네 부인 가운데 두 번째 부인이 바로 왕규의 딸인 것이다. 그러므로 왕규는 혜종의 장인이 된다. 당시 호족과 왕실간의 혼인이란 혈연을 통한 두 세력간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왕규와 혜종은 서로 통혼을 매개로 굳게 뭉친 셈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태조 왕건은 29명의 부인과 혼인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에 제 15비인 광주원부인과 제 16비인 소광주원부인 역시 왕규의 딸이었다. 이중에서 소광주원부인은 태조의 아들인 광주원군을 낳았다. 그러니까 왕규는 자신의 두 딸을 태조에게, 또 하나의 딸을 태조의 아들인 혜종에게 출가시킨 것이다. 윤리적으로 따지면 복잡하게 보이지만, 당시의 풍습이 그럴 수도 있었다고 설핏 이해 해두는 것이 좋겠다.

 

지방의 대호족세력들과 태조 왕건과의 혼인관계란 어차피 정실에 의한 정략결혼이었으며, 혜종과의 혼인관계를 맺은 것도 세력의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왕규는 혼인을 통하여 태조왕가와 중첩적으로 혈연관계를 맺은 왕실세력인 것이다. 이런 정황을 바탕으로 추측한다면 왕규는 태조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혜종의 측근세력에 해당하는 인물로 상정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규는 혜종을 살해하려 하였다.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왕규에게 가장 직접적인 라이벌은 요와 소 두 왕자였으며, 이를 옹호하였던 문신 최지몽, 서경의 왕식렴. 그리고 왕규보다는 동생의 입장을 두둔한 혜종과 그 후견인 박술희가 있었다. 그러나 왕규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뼈 아픈 것은 혜종의 동향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사위이며 스스로 후견인으로 자처하였던 왕규는 혜종에게 반란을 경고하였지만, 혜종은 자신을 믿지 않고 오히려 정적의 편을 들었던 것이다, 혜종은 요와 소를 제거하기는커녕 소에게 자신의 공주를 시집보내 세력을 키워주었고 보호하려들었던 것이다.

 

왕규로서는 위기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로 있으면 결국 자신은 요와 소의 세력에 의해 당하고 말 것이다. 그는 혜종을 제거하고 스스로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를 기도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외손자, 태조 16비 소생의 광주원군이 있었다. 이 아이를 왕위에 올리고 권력을 잡아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자. 그것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왕규는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혜종을 시해하려는 첫 번째 거사는 조심스럽게 시작됐다. 밤에 몰래 왕의 침전에 자객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혜종은 이를 알고 일어나 쳐죽이고 말았다. 두 번째는 좀 더 과감했다. 스스로 앞장에 서서 떼거리로 몰려갔다. 그것도 공공연하게 침전의 담벼락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그러나 이미 왕은 피신한 다음이었다. 화가 난 왕규는 최지몽을 향해 네 짓이로구나 하면서 칼을 빼 들고 위협했다. 이상하리 만큼 당당하고 무모한 왕규의 행동이 아닌가. 그것은 그가 이미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었음을 반증한다. 왕규는 절망적인 상황에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미 혜종은 자신을 경원시 하고 있었고 반대세력의 포위망은 압축되어 조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왕규가 헤어날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권력의 주인이 되는 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혜종 살해를 시도하였다. 한번은 혜종의 침실에 자객을 잠입시켜 죽이려 했는데, 마침 혜종이 잠에서 깨어 자객을 한 주먹에 때려 죽여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또, 한번은 직접 무리를 이끌고 밤에 혜종의 침실을 급습했으나 혜종은 이미 다른 데로 거처를 옮긴 뒤였다. 혜종은 최지몽(崔知夢)이 무슨 변이 있을 테니 거처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몰래 중광전(重光殿)으로 피한 것이다. 왕규의 세력이 혜종의 왕권을 압도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세력기반이 약한 혜종은 그를 문책하거나 응징하지 못하였다. 당시 혜종의 후견인으로서 왕규와 대립관계에 있던 박술희 역시 자신의 신변보호에 급급하였다. 그리고 왕실 내에서도 혜종의 이복동생 요(堯 : 뒤의 定宗)는 서경(西京)의 왕식렴(王式廉)세력과 결탁,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 혜종은 주위에 항상 갑사(甲士)들을 수행시켰고, 암살 위협에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없었다. 혜종이 즉위 이래 병석에 눕게 된 것도 이러한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결국, 왕규의 모역(謀逆)은 요와 결탁한 왕식렴의 서경 군사력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만다. ≪고려사≫에는 요가 왕식렴 세력과 결탁한 것은 왕규의 모역에 대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혜종의 왕권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요의 왕위계승을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요는 945년에 서경 왕식렴의 군사력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왕규를 갑곶(甲串)에 귀양보낸 뒤 사람을 보내어 죽였으며, 그 무리 3백여 명도 죽였다. 한편, 혜종의 후견세력인 박술희도 살해하고, 그 책임을 왕규에게 전가시켰다. 박술희는 태조의 유명(遺命)까지 받은 중신(重臣)이었으므로 살해의 진상을 은폐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는 이처럼 왕위계승에 방해가 되는 적대세력을 일소한 뒤 왕위에 올랐다. 왕규의 난은 결과적으로 요의 왕위계승에 명분을 주고, 또 일을 쉽사리 성취시키는 데 기여한 셈이 되었다.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주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고려의 제 5대임금인 경종입니다.

 

자는 장민이며 21세의 나이로 즉위했습니다. 주가 왕태자로 있을때 하마터면 죽음을 당할 뻔 했습니다.

 

그때는 광종이 호족을 누르는 정책을 폈고, 역모사건으로 혜종의 아들 흥화군과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이 처형당했습니다. 광종은 태자 주도 의심했다.왕족을 등에 업고 반란을 도모하려는 호족이 있기 때문이었는데요. 태자 주에게는 동생 효화 태자가 있었으나 어린나이에 죽었습니다. 광종에게 아들이 태자밖에 없었으므로 주가 목숨을 잃지않았습니다. 주는 이렇듯 11세의 나이로 왕태자가 된 이후 공포와 불안 속에 살다가 왕이 되었습니다.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대화합을 시도했습니다.사면령을 내려 귀양 간 신하를 불러들이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 주었으며 관직을 빼앗겼던 이들에게는 관직을 되돌려주었습니다. 또 호족출신인 왕선을 집정에 임명하여 호족들에게 유화 정책을 폈습니다. 그럼으로 써 광종 때 15년 동안 계속 되었던 공포 정치가 막을 내렸는데요. 때를 만난 호족들은 복수전을 펼쳤습니다.

 

왕선이 건의한 복수법이 그 시초였는데, 이것은 광종대에 피해를 입은자들에게 복수할수있는 권한을 주는 법이었습니다. 경종은 이를 허락했습니다.호족들을 달래기 위함이었으나 정작 복수전이 펼쳐지자 경종의 대화합정책에 금이가고 나라정치는 대결로 치달았습니다.그 바람에 왕선에 의해 태조와 천안부원 부인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효성태자,태조의 열번째 부인인 숙목부인의 아들 원녕태자가 살해되었습니다.

 

종실 어른이 살해당하자, 경종은 복수법을 페하고 왕선을 귀양 보냈습니다.또 한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위해 좌우 집정제로 바꾸었습니다.

 

왕승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최지몽이 고하자 경종은 왕승뿐 아니라 여러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경종의 최지몽 등용은 정적(정치적인 적)제거의 속셈이 있었습니다.

 

피를 많이 본 경종은 정치가 싫어져서 오락과 놀이로 세월을 보내다가 1년도 못가서 병이 들더니 한달만에 죽고말았습니다. 그의 나이 27세 였습니다.

 

3. 정종(定宗, 923~949) 왕요

재위기간 945~949

왕규의 난을 평정하고 불교를 숭상함. 서경(평양)에 왕성을 쌓고 천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

 

4. 광종(光宗, 925∼975) 왕소

광종황제는 태조왕건의 넷째아들이고 제3대 정종황제의 친동생이다. 이름은 왕소이다.

비는 태조의 딸 대목황후이다. 정종황제가 병이 들어 광종에게 양위하여 광종이 즉위하였습니다. 이전황제인 혜종은 왕규와 박술희 정종은 왕식렴등 다른 강력한 호족세력을 바탕으로 황권을 부지하려고 하였으나 광종은 황권주의자로 끈기있고 정력적으로 노력하여 고려왕조 역사상 가장큰 성군으로 뽑힐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일단 그가 통치한 시기는 3기로 나눕니다.

 

즉위년~7년를 안정기

 

7년~11년를 개혁시기

 

11년~26년를 숙청기로 구분합니다.

 

첫번째 시기인 안정기에는 황권강화와 관련되는 시책은 단행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국내의 정치정세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성종황제대에 최승로는 상소문에서 “광종의 8년 동안의 다스림은 가히 삼대(하,은,주)에 견줄 만하다.”고 격찬할 정도였다.

또한, 중국 왕조와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국내외의 정책을 통해서 새 황제로서의 지위 및 그 정치적 기반을 닦아나간 것으로 추측됩니다.

 

두번째 시기인 개혁시기에는 광종이 호족들을 상대로 전면적인 전쟁을 선포한 시기입니다.이시기에는 황권강화를 위한 조치를 취한 시기입니다. 956년에 노비의 안검법을 시작으로 호족들의 군사기반과 경제기반을 무너틀이고 958년에 과거제도를 시행하여 호족들의 정계진출을 아예막아버림으로서 광종황제는 전제황권을 확립하고 이후에 무소불위의 황권을 추진하게됩니다. 960년에는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조처들로 호족세력은 반발하였으나, 이에 대해 철저한 탄압을 강행하였습니다. 956년부터 황권강화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중국 후주의 쌍기의 등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고있습니다. 쌍기는 후주에서 겸험을 고려에서 노비안검이라든지 과거제도 시행을 광종에게 권한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세번째 시기는 바로 숙청기입니다.

 

이시기에는 황권강화책에 반발하거나 장애가 되는 호족세력에 대해 피의 숙청을 단행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960년에 이름바 권신의참소사건으로 평농서사 권신이 대상 준홍, 좌승 왕동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보고하자, 광종이 이들을 귀양보내게 된것부터 발발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권신과 준홍,왕동을 벌하는것으로 그첬으나 광종이 순행길에 오르는중에 평주에서 박승위가 난을 일으켜 광종이 목숨을 잃을번하자 광종은 박승위형제를 참형에 김긍률,박영규와 역모에 가담하였던 모든 군사들을 참하고 황권에 위협이 되는 효은태자와 흥화군(혜종의아들),경춘원군(정종의아들)을 제거하였으며 이때 죽은 사람이 천여명이 넘는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숙청은 왕조 초기에 어느 왕조라도 걸치는 작업으로서 광종이 황권을 강화하지 않았으면 성종이나 현종치세가 아마도 태평성대를 이루지 못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광종의 업적은 958년부터 실시된 과거제도와 독자적으로 육성한 군사력인 시위군졸은 문무 양면으로 황권을 강화하고 뒷받침하는 세력기반이 되었다.

이와 같은 기반을 배경으로 정치적 적대세력을 과감하게 숙청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호족을 비롯한 정치적 적대세력의 반발도 거세어 보다 광범위한 세력기반 구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963년에 귀법사를 창건하고, 이곳에 제위보를 설치해 각종 법회와 재회를 개설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정책을 펴나간 것은 이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귀법사의 승려 균여와 탄문 등을 통해 호족세력에 반발하는 일반민중들을 포섭하고, 개혁을 지지해주는 사회적 세력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황권강화책을 추진한 결과, 태조 이래 열세에 놓여 있던 황권을 호족세력보다 우위에 올려놓게 되었다. 그리고 ‘광덕(光德)’ ‘준풍(峻淵)’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수도인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개칭하도록 하고 서경을 서도라고 개칭하면서 제국의 기틀을 다져 놓았습니다.

 

아울러 국가체제도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히게 되었지만, 이와 동시에 황권의 한계성도 나타났다. 첫째, 중앙정부 중심으로서 황권 또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는 침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호족세력을 숙청하고 황권을 강화하였지만, 그것이 호족세력의 완전한 굴복과 황권의 일방적 승리는 아니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광종황제가 승하한 후 즉위한 경종 황제는 화합정책을 표방하여 왕선을 섭정으로 하여 복수법을 만들었다가 태조황제의 아들인 원녕태자와 효성태자를 죽여 큰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광종황제의 황권강화는 한계성을 보이지만 이것은 경종황제가 총명하지 못하였던 까닭도 있습니다.

 

광종은 황권강화책 이 외에도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밖으로는 중국의 여러 왕조와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고려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켰고, 안으로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여러가지 시책을 펴기도 하였다.

968년에는 혜거(惠居)를 국사로 삼고, 탄문을 왕사로 삼음으로써 고려의 국사와 왕사제도의 단서를 열었다. 또한, 국방대책에도 관심을 기울여 영역을 서북과 동북방면으로 더욱 확장시키는 동시에, 거란과 여진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의 치적은 뒤에 고려가 새로운 국가체제와 정치질서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여기에 그의 치적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학계에서는 영토를 통일한 것은 태조이며 정신적 통일을 이룬 황제는 광종으로 보고 있습니다.

 

의화왕후(義和王后)

생몰년 미상. 고려 제2대 왕 혜종의 제1비. 진주임씨(鎭州林氏)로 대광(大匡) 희(曦)의 딸이다. 921년(태조 4) 10세의 혜종이 태자로 책봉될 때 태자비가 되었고, 혜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태조가 어린 혜종의 배필로 비를 간택하게 된 데에는 진천의 지역적 위치와, 비의 아버지가 장악하고 있는 막강한 군사실력자로서의 위치가 참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혜종과의 사이에 흥화군(興化君)과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정헌공주(貞憲公主)의 두 공주를 두었다. 흥화군은 왕위에 나가지 못한 채 광종 때에 정치적 이유로 생명을 잃었고, 경화궁부인은 혜종 재위중에 광종의 부인이 되었다. 시호는 의화왕후이고, 장지는 순릉(順陵)이며, 혜종묘실에 합장되었다.

1002년(목종 5)에 성의(成懿), 1014년(현종 5)에 경신(景信), 1027년에 회선(懷宣), 1253년(고종 40)에 정순(靖順)의 시호가 거듭 추증되었다.

 

 

 

왕규의 난 추가자료

 

A. 국왕을 죽여라

 

'945년 한 여름 밤. 개경의 왕궁,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멈추었다. 짙은 어둠을 타
고 한 무리의 사내들이 조심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멈춘 곳은 국왕의 침전인 신덕전
(神德殿)이었다. 신덕전 안에는 혜종이 잠들어 있을 것이 틀림없다. 위풍있어 보이는 사내가
잠시 묵묵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왕의 침소를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그들은 재빨리 담벽에
달라붙어 허물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벽에는 한사람이 들어갈 만큼의 공간이 열리고 사내들
은 칼을 빼어들고 우르르 몰려들어갔다. 그러나 국왕이 누워있어야 할 침전은 텅빈 채 황촉
불 만이 인기척에 놀란 듯 펄럭이며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사내는 잠시 망연한 채 빈 침
전을 쏘아보았다. 또 실패로구나.'


무협영화의 한 장면에서나 있을 법한 상황이다. 일국의 왕이 잠들어 있는 궁궐의 침전에
왕을 시해하려는 무리들이 떼거리로 몰려들고 있다니. 더구나 그들을 이끌고 있던 사람은
바로 국왕의 장인이며 정부의 최고위에 있었던 당대의 권력자 왕규인 것이다. 그가 혜종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가병을 이끌고 국왕의 침소인 신덕전을 공격하였으나 헛탕을 치고 만
것이다.


이 일에 대한 <고려사> 반역열전 왕규전에서의 기록은 이렇다. "하루는 혜종이 몸이 불
편하여 신덕전에 있었는데, 최지몽(崔知夢)이 혜종에게 말하기를 '곧 변고가 있을 것이니 빨
리 침전을 옮기셔야 합니다' 라고 하므로 왕이 몰래 중광전(重光殿)으로 침소를 옮기었다.
왕규(王規)가 밤에 사람을 시켜 벽을 뚫고 왕의 침실에 들어오니 방은 벌써 비어있었다. 왕
규가 최지몽을 보고는 칼을 빼어 들고 위협하며 '임금의 침실을 옮긴 것은 반드시 네가 꾸
민 짓이다' 라고 하였는데, 최지몽은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최
지몽이 침묵한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는 뜻이었을 것이다. 이
번에 혜종의 목숨을 구한 것은 최지몽이 미리 대비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왕규가 혜종을 죽이려 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에 앞서 왕규는 밤에 혜종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몰래 그 도당(徒黨)을 보내어 왕의
침실 안으로 들어가서 왕을 해치려고 한 적이 있었다. 자객이 살금살금 국왕을 향해 접근했
을 때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혜종은 이 기척을 알고 벌떡 일어나 오히려 한 주먹으로 자객
을 때려 죽여버리고는 측근의 시중하는 신하를 시켜 끌어내게 하였다. 그리고는 이 일을 비
밀로 하고 다시 묻지 않았다고 한다.


혜종은 일찍이 아버지 왕건을 따라 전장터에서 많은 무공을 세웠던 강건한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사건이 신기하긴 마찬가지다. 적어도 국왕을 시해하기 위해 보낸 자
객이라면 무예가 출중한 인물을 엄격히 선발해서 파견했을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다가 일어나서 한 주먹에 쳐서 때려죽였다니? 고려사에서 묘사한 데로라면 혜종의 주먹은
참으로 놀라운 위력을 가졌으며 국왕의 무예는 매우 뛰어났음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그냥 지나치기로 하자. 놀라운 일들이 많은 것이 과거의 이야기이니
까. 우리가 보다 주목해야 할 문제는 이 일을 불문에 부친 혜종의 태도이다. 왕규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던 것을 알면서도 그를 내버려두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혜종은 자신을 암살하
려 한 사람이 왕규임을 알고 있었다. 혜종은 이 사실을 불문에 붙이고 추궁하지 않았던 것
은 물론이며 또 한번의 살해 기도를 꾀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규를 그대로 방치하였던 것이
다. 오히려 왕규는 공공연히 두 차례나 혜종을 살해하려 들었고 이를 방해하는 최지몽에게
칼을 빼어들고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왕규는 어째서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을까.
도대체 왕규는 누구이며 왜 혜종을 죽이려고 하였을까.

 

 

 

B. 왕규는 어떤 인물인가?

 

왕규에 대해서는 <고려사> 반역열전에 소개되어 있는 짧은 내용과 몇 개의 단편적인 기
록들이 흩어져 남아있을 뿐이다. 몇 줄 안 되는 산만한 기록들을 통해서 왕규라는 인물의
구체적인 면모를 살피기에는 한계가 있으나, 주변 상황을 자세히 살피면 몇 가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왕규는 경기도 광주의 유력한 지방호족출신이었다

 

지금의 경기도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남아있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도성을 수비하는 중
요한 관문이다. 그 전략적 위치와 넓고 비옥한 터전은 강력한 세력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지역은 일찍이 백제의 영토였으나 한강유역이 진흥왕에 의해
신라에 병합되면서 진흥왕 29년(568)에 신주를 설치하였다. 문무왕 12년(672)에는 토성(주장
성, 일장성)이 축성되었고, 진평왕 26년(604)에는 한산주로, 경덕왕 16년(757)에 한주로 개칭
되었다가, 고려시대에 이르러 태조 23년(940)에 광주라는 이름으로 확정되어 내려온다.


신라말에 이르면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함에 따라 각 지역의 지방세력가들이 스스로
독립하여 독자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하고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독립세력으로 성장하게 된
다. 이들을 호족세력이라고 부르는데, 왕규는 바로 광주지역을 바탕으로 성장한 호족인 것이
다. 역시 호족이었던 송악지역의 왕건은 일찍부터 경기 황해 일대의 호족세력과 긴밀한 협
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광주지역의 호족 출신인 왕규 또한 왕건의 지지세력으로 건국과
통일의 과정에서 많은 공훈을 세웠을 것이다.

 

2. 왕규는 대중국사신을 지낸 문신계열의 인물이다.

 

왕규는 태조 정유 20년(937) 형순(邢順)과 함께 진(晉) 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건국을
축하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왕규는 문신계열에 속한다. 중국에 사신으
로 파견되는 경우는 대개가 유학에 대한 이해와 중국문화에 대한 교양을 갖춘 인물을 선발
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초기의 대중국 사신은 흔히 국왕으로부터 왕씨 성을 하사 받고
王子를 칭하곤 하였다. 본래 박씨였던 박유는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되면서 왕성을 하사받고
왕유가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를 전왕자(前王子)라고 불렀던 것은 이런 까닭이다. 왕유
뿐만 아니라 왕인요 왕신일 왕융 왕긍 등 중국 사신의 경력이 있는 문신들의 경우도 대개
중국 사행의 과정에서 왕성을 하사받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왕규의 성씨도 또한
중국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에 하사받은 사성일 가능성이 크다. 그가 중국 사신의 경력이
있다는 점을 통하여 한문과 유학의 실력을 갖추고 중국의 문화에 대한 교양을 깊이 있게 갖
춘 문신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 왕규는 개국공신이며 조정의 실력자였다.

 

왕규의 관계(官階)는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고려의 관계체계는 모두 16개의 등급으로 구
성되어 있었는데 대광이란 관계는 건국 초기의 공역자들이 가질 수 있었던 가장 높은 위계
에 해당한다. 관계체계의 구조에 의하면 대광의 상위에는 1품에 해당하는 3중대광과 중대광
이 있었지만, 이 두 등급은 사후의 추증에만 사용되었던 것이라서 실제적인 최고 관계는 대
광이었다. 대광은 대부분 건국과 통일에 크게 공헌한 인물들이거나 국가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가들에게만 수여되었다. 그러므로 고려 관직사회에서 왕규가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높
은 것이다.


더욱이 왕규가 태조의 고명공신이었다는 점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즉 태조 26년(943) 5월
에 왕이 편치 못하여 정무 처리를 정지하였는데, 대신들인 염상(廉相), 왕규(王規), 박수문
(朴守文) 등이 왕을 모시고 있을 때 태조가 말하기를“한나라 문제(文帝)가 말하기를 '천하
만물이 생겨나서 죽지 않는 것이 없으니 죽음은 천지의 이치요 만물의 자연이다. 어찌 너무
슬퍼하겠느냐'고 하였으니 옛날 명철한 왕들은 마음을 이렇게 먹었던 것이다. 내가 병에 걸
린 지 벌써 20여 일이 지났다. 죽는 것을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하노니 무슨 근심이 있으랴?
한 문제의 말이 곧 나의 의사이다. 오래 동안 해결하지 못한 안팎 중요 사무들은 그대들이
태자 무와 함께 처리하고 나서 나에게 보고하라.”라고 하였다. 이때 태조로부터 부탁을 받
았던 염상, 왕규 박수문 등은 곧 혜종의 왕위계승을 받든 대신들인 셈이다.
한편 이에 앞서 태조는 박술희에게 훈요 10조를 내린바 있었다. 박술희와 왕규는 모두 태
조의 고명을 받들고 혜종을 보필할 것을 맹서한 대신이었다.

 

4. 왕규는 강력한 사병집단을 운용하고 있었다.

 

통일기의 혼란 속에서 전란을 헤쳐온 장수들과 호족들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병집단을
유지하고 있었다. 호족세력들이 귀부하여 개경에 올 때에는 자신들의 무리들을 함께 거느리
고 상경하였다. 이들이 각 정치세력가들의 군사적 배경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호족들의 사병
이 완전히 해체되는 것은 광종대의 가혹한 호족숙청을 거친 다음인 성종대에 이르러서였다.


왕규도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을 것이다. 혜종을 시해하기 위해 두 차례나 침투시켰던 자
객들도 왕규의 사병이다. 그러면 왕규의 사병은 얼마나 큰 규모였을까? 왕규가 소위 왕규의
난이라고 불리우는 사건에서 서경의 왕식렴에 의해 제거될 때에 그 무리 300여인이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 300여인은 왕식렴의 군사들과 교전을 했거나 적어도 대적하려다가 피
살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왕규가 운용할 수 있었던 사병은 일시에 300명이 넘는 규
모라고 하겠다. 왕규가 이처럼 강력한 사병조직을 보유하고 있었던 까닭에 왕규와 대립하였
던 박술희는 100여명의 무리로 항상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다. 왕규의 전횡이 컸음에도 불구
하고 혜종이 왕규를 얼른 제거하지 못한 것이나, 통일전의 맹장으로서 용맹을 떨쳤던 박술
희까지도 스스로 신변을 보호하기에 급급했던 것은 왕규의 사병집단이 무시할 수 없는 강력
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5. 왕규는 유력한 외척세력이었다

 

그는 왜 혜종을 살해하려고 하였을까? 우리는 혜종과 왕규의 관계를 알면 더욱 미궁에 빠
지게 된다. 혜종은 4명의 부인을 두고 있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의화왕후(義和王后) 임(林)
씨로서 진주사람 대광 임희(曦)의 딸이다. 태조 4년 12월에 혜종을 왕위 계승자로 책봉하면
서 왕비로 삼았는데, 흥화군(興化君)과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 정헌공주(貞憲公主)를 낳았
다. 두 번째 부인은 후광주원(後廣州院) 부인 왕(王)씨이며 광주사람 대광(大匡) 왕규(規)의
딸이다. 세 번째 부인은 청주원(淸州院) 부인 김(金)씨로서 청주사람 원보(元甫) 긍률(兢律)
의 딸이다. 네 번째 부인은 궁인(宮人) 애이주(哀伊主)였다. 경주사람이요 대간(大干) 연예
(連乂)의 딸이며 태자 제(濟)와 명혜(明惠) 부인을 낳았다. 이 네 부인 가운데 두 번째 부인
인 후광주원부인 왕씨가 바로 왕규의 딸인 것이다. 그러므로 왕규는 혜종의 장인이 된다. 당
시 호족과 왕실간의 혼인이란 혈연을 통한 두 세력간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왕규
와 혜종은 서로 통혼을 매개로 굳게 뭉친 셈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왕규와 왕실간의 혼인은 혜종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태조 왕건은
29명의 부인과 혼인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에 제 15비인 광주원부인과 제 16비인 소광주원
부인 역시 왕규의 딸이었다. 이중에서 소광주원부인은 태조의 아들인 광주원군을 낳았다. 그
러니까 왕규는 자신의 두 딸을 태조에게, 또 하나의 딸을 태조의 아들인 혜종에게 출가시킨
것이다. 윤리적으로 따지면 복잡하게 보이지만, 당시의 풍습이 그럴 수도 있었다고 설핏 이
해 해두는 것이 좋겠다. 지방의 대호족세력들과 태조 왕건과의 혼인관계란 어차피 정실에
의한 정략결혼이었으며, 혜종과의 혼인관계를 맺은 것도 세력의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왕규는 혼인을 통하여 태조왕가와 중첩적으로 혈연관계를 맺은 왕실세력인 것이다. 이런
정황을 바탕으로 추측한다면 왕규는 태조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혜종의 측근세력에 해
당하는 인물로 상정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규는 혜종을 살해하려
하였다.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왕규는 정치적으로 경쟁적인 다른 세력들과 대결하고
있었다. 그러면 왕규와 대립관계에 있으면서 그를 압박하였던 정치세력들은 과연 누구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C. 왕규와 대립하였던 정치세력들

 

1. 왕위를 둘러싼 경쟁자 요와 소

 

혜종의 장인으로서 정계의 막강한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왕규이지만, 그는 늘 불안한 가
운데 초조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가장 큰 이유는 태조의 둘째 아들인 요와 그
동모제인 소의 도전이었다. 태조는 29명의 부인을 두었지만, 그중에서도 왕후로 불리운 사람
은 여섯 명뿐이다. 나머지 스물 여섯명은 모두 부인이란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이 6명의 왕
후는 부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력한 정치적 프리미엄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태조 이후의 국왕과 왕비가 된 사람들은 모두 이들 6명의 왕비가 낳은 아들 딸들이었
다. 아버지는 모두 같았지만 어머니가 서로 다른 형제 자매들 사이에서 근친간 혼인이 이루
어졌고 그 소생들이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이 왕실 혼인의 전통은 현종 때까지 유지되었다.
태조의 첫째 왕후인 신혜왕후 정주유씨는 자식이 없었으며, 혜종은 둘째 왕후인 장화왕후
나주오씨의 소생이다. 제 3왕후인 신명순성왕후 충주유씨는 태자 태와 정종 요, 광종 소, 문
원대왕 정, 증통국사의 5형제와 낙랑, 흥방 두 공주의 5남 2녀를 두었다. 혜종의 뒤를 이은
정종과 광종은 바로 신명순성왕후의 소생이며,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귀부하였을 때
그에게 시집을 보낸 낙랑공주 또한 유씨 소생이다. 제 4왕후인 신정왕태후 황주황보씨는 대
종과 대목왕후를 낳았다. 대목왕후는 광종의 왕비가 되었다. 제 5왕후인 신성왕태후 김씨는
신라왕실 출신으로 경순왕의 백부인 김억렴의 딸이다. 그는 안종 욱을 낳았는데 안종은 후
에 경종비 헌정왕후 황보씨와의 사통관계에서 현종을 낳게 된다. 제 6왕후 정덕왕후는 1비
와 같은 정주유씨 출신이며, 4남 2녀를 두었다. 이처럼 6명의 왕후들은 각기 왕실의 중요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태조의 둘째 아들인 요와 셋째 아들인 소는 모두 충주유씨 소생으로서 강력
한 왕위계승의 후보였다. 이들은 어머니쪽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왕권에 도전하기 위해 부
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규는 바로 이 요와 소의 두 형제를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있었다.
혜종이 왕위에 오른지 1년이 지났을 때 왕규는 혜종에게 이 두 형제를 제거할 것을 요구하
였다. 요와 소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참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혜종은 왕규의 뜻을 따르
지 않았다. 오히려 혜종은 그것이 왕규가 두 왕제를 모함하기 위해 거짓으로 구며낸 것이라
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왕규의 말을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맏딸을 소의 처로 삼아 그
세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왕규가 그들을 해칠까하여 동생들을 보호하려는 의도였다. 혜종이
왕규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혜종은 왕규를 멀리하려고 하였을까?

 

2. 왕규에 대항한 책략가 최지몽

 

왕규가 혜종 및 정종, 광종 형제에 대해 해치려고 했을 때마다 태조의 왕자들을 구원하고
왕실의 위기를 지켜낸 인물이 곧 최지몽이었다. 왕규가 요와 소를 역모로 모함하였을 때 최
지몽은 미리 혜종에게 이르기를 "유성이 자미성을 침범하였으니, 나라에 반드시 적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최지몽은 사천공봉의 직에 있었는데 사천공봉이란 천문과 지리, 점복
과 길흉의 卜巫에 관련되는 직책이었다. 최지몽은 천문에 의탁하여 왕규의 모함을 경고하였
던 것이다. 혜종이 왕규를 멀리하고 요와 소에게 은우를 더욱 두텁게 한 것이나 소에게 큰
공주를 시집보내서 세력을 키워준 것은 최지몽의 건의에 따른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최지몽은 그후 왕규가 혜종을 시해하려고 신덕전에 무리를 끌고 쳐들어갔을 때에
도 왕을 옮겨 피신케 하였으며, 그후 경종대에 이르러 왕승 등이 모반하려고 할 때에도 이
를 미리 고변하여 제거하도록 하는 등, 국가의 위태로운 위기에 왕실을 보위하는데 진력하
였던 인물인 것이다.

 

3. 혜종의 후견인 박술희

 

한편 박술희는 혜종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혜종의 어머니 장화왕후
오씨는 태조의 제2왕후이며 나주출신으로써 나주지역의 호족 다련군의 딸이었다. 그런데 오
씨는 세력이 약하였으므로 태조가 아이를 얻는 것을 원하지 않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혜종의 얼굴에 있는 돗자리처럼 얽은 자국은 태조가 방사를 회피한 것을 흡입하여 아이를
배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혜종은 아마도 얼굴에 얽은 곰보자국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런
까닭에서 덧붙여진 설화일 것이다. 그러나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인 태자 무(武)가 비록 태조
의 맏아들이었다고 하지만 순순히 왕위를 계승하기에는 그 세력이 미약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조는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을 얻었다. 이들 사이에서 25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
를 낳았는데, 이들 왕자들은 각기 자신의 어머니쪽 외가세력의 크기에 따라 자신의 세력도
비례하기 마련이었다. 태자 무가 7살이 되었을 때 태조는 다음 왕이 될 정윤을 정하려고 하
였다. 태조는 먼저 태자가 입는 예복인 적황포를 상자에 담아 오씨에게 주었고, 오씨는 박술
희를 불러 이 옷상자를 보여주었으며, 이에 박술희는 태조에게 무를 정윤으로 삼을 것을 주
청하였고, 태조는 비로소 무를 정윤에 봉하였다. 이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세력이 미약했던 나주오씨 소생의 무를 정윤으로 삼는 것이 불안했던 까닭에 박술희
로 하여금 무의 후원자가 되어줄 것을 요구하고 박술희가 이를 수락한 것을 확인한 연후에
비로소 무를 정윤으로 삼았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박술희는 혜종의 후견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끝까지 수행하였다.


왕규가 혜종을 시해하려는 불온한 움직임을 박술희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박술희라고
하여도 왕규를 제거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책은 갖지 못했었던 듯 하다. 오히려 100여명의
무인들로 하여금 호위하여야 했으리만큼 자신마저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혜종
은 병이 들고 왕규의 제거에 미온적이었다. 박술희는 정적을 제거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
는 마침내 혜종의 죽음과 함께 제거되고 만다.

 

4. 서경의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던 왕식렴

 

혜종이 즉위한 초기까지 왕식렴의 태도가 어떻했는지에 대해 뚜렷하게 밝혀줄 자료는 없
다. 그러나 어떤 증거물보다도 명확한 것은 그가 정종 요의 요구에 따라 서경의 군사를 이
끌고 내려와 왕규를 제거하였던 실질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서경에는 박수문 박수경 형
제가 웅거하고 있었으며, 태조의 가장 탁월했던 명장 유금필의 막강한 군사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을 이끄는 사람이 바로 태조 왕건의 조카인 왕식렴이었다. 개경이 정치의 중심
지로서 전국의 각 지역에서 모여든 호족출신들이 각축을 벌이며 있는데 비해 서경은 군사적
중심지를 이루며 여진족을 기미하고 북방 진출의 기지로서 왕건 휘하의 정예부대들이 집결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경의 군사력에는 또 다른 역할이 있었다. 바로 여러 호족들이 모여들

어 기반이 취약해진 개경의 왕실이 위기에 봉착하면, 배후의 서경에서 지원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왕식렴에 의해서 증명이 된 셈이지만, 그 후에 현종의 즉위를 둘러싼 김치
양의 난에서도 똑 같은 양상이 되풀이되었다. 서경의 사령관이었던 강조가 군사를 몰고 내
려와 김치양 일파를 제거한 것은 왕규의 난을 재연한 것처럼 유사한 형태였던 것이다.

 

 

 

D. 왕규가 혜종을 해치려한 이유는?

 

지금까지 왕규의 반대세력에 대해 제시해 보았다. 가장 직접적인 라이벌은 요와 소 두 왕
자였으며, 이를 옹호하였던 문신 최지몽, 서경의 왕식렴. 그리고 왕규보다는 동생의 입장을
두둔한 혜종과 그 후견인 박술희가 있었다. 그러나 왕규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뼈 아픈 것
은 혜종의 동향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사위이며 스스로 후견인으로 자처하였던 왕규는
혜종에게 반란을 경고하였지만, 혜종은 자신을 믿지 않고 오히려 정적의 편을 들었던 것이
다, 혜종은 요와 소를 제거하기는커녕 소에게 자신의 장공주를 시집보내 세력을 키워주었고
보호하려들었던 것이다.

 

왕규로서는 위기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로 있으면
결국 자신은 요와 소의 세력에 의해 당하고 말 것이다. 그는 혜종을 제거하고 스스로 권력
의 정점에 오르기를 기도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외손자, 태조 16비 소생의 광주원군이 있었
다. 이 아이를 왕위에 올리고 권력을 잡아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자. 그것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왕규는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혜종을 시해하려는 첫 번째 거사는 조심
스럽게 시작됐다. 밤에 몰래 왕의 침전에 자객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혜종은 이를 알고 일
어나 쳐죽이고 말았다. 두 번째는 좀 더 과감했다. 스스로 앞장에 서서 떼거리로 몰려갔다.
그것도 공공연하게 침전의 담벼락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그러나 이미 왕은 피신한 다음이었
다. 화가 난 왕규는 최지몽을 향해 네 짓이로구나 하면서 칼을 빼 들고 위협했다. 이상하리
만큼 당당하고 무모한 왕규의 행동이 아닌가. 그것은 그가 이미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었음
을 반증한다. 왕규는 절망적인 상황에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미 혜종은 자신을 경원시 하
고 있었고 반대세력의 포위망은 압축되어 조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왕규가 헤어날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권력의 주인이 되는 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E. 왕규의 난을 둘러싼 몇가지 수수께끼

 

먼저, 혜종은 왜 왕규가 자신을 해치려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두었을까? 하는 점이다. 혜
종은 왕규가 보낸 자객을 처치하고는 측근을 불러 시체를 치우게 하고 아무에게도 발설치
말라고 하며 불문에 부쳤다. 혜종이 왕규의 짓 인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이미 최지몽의 경
고로 왕규의 동향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두 번째 왕규의 신
덕전 침입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혜종은 왕규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혜종의 자기세력이 미약해서 왕규를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만 이해하고 넘어가기에는 석연
치가 않다. 가령 혜종이 왕명으로 구원을 요청했다면 과연 왕식렴은 움직이지 않았을까? 박
술희에게 보다 많은 병력의 지휘권을 부여할 수는 없었을까? 왕규의 제거가 어려운 일 일수
는 있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혜종의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
리는 이 의문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는 자료를 갖지 못하고 있다. 단지 의혹만을 제기할
뿐이다. 그건 역사적 상상력의 영역이 아니라 소설적 상상력의 몫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의문은 혜종이 즉위한지 2년만에 병사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혜종은 일찍이
태조를 따라 전장에서 크게 활약하고 전공을 세운 강인한 인물이었다. 왕규의 자객을 한 주
먹에 때려죽일 정도로 건장하고 용맹했던 30여세의 한창 나이의 장년이었다. 그런 그가 이
때에 이르러 갑자기 발병하여 죽었다는 것이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왕규의 해침을 당하고
두려움이 많아지고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갑자기 병사하기까지 할 정도로
나약한 인간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편 혜종을 이어 왕위에 올랐던 정종도 재위 4년
만에 죽어서 의심을 갖게 한다. 혜종과 정종이 각기 2년, 4년이라는 짧은 기간밖에 재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건장하던 청년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갑자기 병을 얻어 요
절한 것은 아무래도 의심스런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비해 광종은 26년간 왕위에 머무
른다. 광종대에 와서 왕권강화가 결실을 맺는 것은 긴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것도 하나의
조건이 된 셈이다.


다음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왕규의 난에 대해 정황을 기술한 <고려사>의 설명내
용이 수상쩍다는 점이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왕규는 일찍이 대광 박술희를 증오하다가 혜종이 죽자 정종의 명령을 위조하여 그를 죽였
다. 이에 앞서서 혜종의 병이 위독하였을 때 정종이 왕규가 반역할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
고 비밀리에 서경 대광 식렴과 사변에 대응할 계책을 상의해 두었다. 그러므로 왕규가 반란
을 꾸미려고 하였을 때 식렴이 군사를 인솔하고 서울로 와서 숙위하여 왕규가 감히 반역 행
동을 못하게 하였다. 이에 왕규를 갑곶으로 추방하고 뒤로 사람을 파견하여 목을 베었으며
그의 도당 3백여 명도 처단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혜종이 죽고 정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왕규가 왕명을 위조해서 박술희
를 죽이고, 왕규가 난을 일으키려하니 서경군이 와서 감히 반란을 못하게 하였으며, 왕규를
갑곶으로 추방한 후 300인을 처형하였다는 순서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진행과정을 따
라가 보면 앞뒤가 뒤바뀌어 도저히 요령이 없다. 특히 박술희를 살해한 허물을 왕규에게 뒤
집어 씌우려는 듯한 혐의가 짙다. 우리가 이 말을 약간 바꾸어 보자. '(정종은) 혜종이 죽자
왕식렴의 서경군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 먼저 박술희를 죽이고 이어서 왕규와 그 무리도
죽였다.' 이렇게 배열할 때 정황이 훨씬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박술희와 왕규를
제거한 것은 정종과 왕식렴이며, 따라서 왕규의 난이 아니라 정종의 쿠테타라고 생각될 여
지를 남겨두고 있다.


지금까지 앞에서 제기한 의문들을 통하여 혜종의 죽음과 왕규의 난이라는 것이 그리 명
확하게 똑 떨어지는 상황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알려진 왕
규에 대해서도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왕규란 인물에 대해서 알고 있
는 사실들은 정확한가?

 

 

 

F. 왕규에 대한 평가는 올바른가?

 

왕규의 사상과 정치적 지향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단지 그가 취했던 행동과 주변정
황을 통해 짐작을 해 볼 뿐이다.


먼저 과연 왕규는 북진정책을 추진하고 북방 개척을 통해 대고구려의 꿈을 실현하려는 야
심이 있었던 인물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이 시대의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에
서는 왕규라는 인물을 그렇게 해석하려고 모색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결
코 긍정적이지가 못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구려 옛 영토를 수복하려는 북방개척의 전
진기지는 서경이었다. 태조는 자신의 본향인 개경이 전국에서 모여든 호족들로 메워지자 가
장 충실한 군사력을 서경에 집결시켰다. 폐허로 남아 있던 옛 고구려의 도읍지에다 사람들
을 옮겨 만든 서경은 북진을 향한 고려의 의지와 고구려의 후예라는 자부심으로  새롭게 건
설된 도시였다. 그 북진정책의 책임을 담당하였던 사람은 태조의 조카인 왕식렴이다.


그러나 왕규는 서경의 왕식렴과 대립하였던 인물인 것이다. 왕규가 제거하려고 했던 정종
은 왕식렴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후 서경으로 천도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오히려 왕규와 대립적인 세력들과 북진정책은 더 밀접히 관련되어 있
다. 꿈과 이상이 같았다면 그들은 대립이 아니라 서로 협조했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왕규에
게서 북방개척의 이상을 찾는 것은 지나친 추측이 아닐까 한다.


다음으로 또 하나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왕규는 국가 건설의 기초를 담당한 제세
의 경륜가는 아니었을까? 혹시 정종과 광종이 왕위에 오른 후 반대세력이었던 왕규를 반역
자로 처단하고 모든 죄악을 뒤집어 씌운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왕규란 단지 권력의 희
생자로 역사에 오명을 뒤집어 쓴 인물일 수도 있다.


조선이 건국하였을 때의 정치적 진행과정과 고려 초기는 서로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 권
력의 재편이 생겨날 때 그 권력을 누가 담당하게 되느냐에 따라 입장이 갈라진다. 조선 초
기에 정도전이 태종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었듯이 왕규는 광종에 의해 제거된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왕권의 확립을 위해 숙청을 단행하던 태종 이방원에 대해 정도전은 신권을 대
표하는 방해물이었던 것이다. 국가를 건설하는데 주역을 담당했지만, 건설된 국가에서 국왕
권의 확립을 위해서는 희생되지 않을 수 없었던 인물이 정도전이었다. 왕규와 정도전을 비
교하는 것은 가능할까? 이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왕규의 난에 대한 <고려사>의 기술은
모순되고 불명확한 것이었다. 의혹의 여지는 충분한 셈이다.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꿈과 이상이 모이고 모여서 큰 흐름
을 이룰 때 가능한 것이다. 고려가 건국하고 후삼국의 통일을 이룩하였던 기간은 한국사의
거대한 변화를 가져온 전환기의 시대로 인식되고 있다. 신라라는 고대적 체제를 벗어나 중
세사회로 이행해 가는 소용돌이와 격랑 속에서 변화와 새 사회의 건설을 꿈꾸던 수많은 사
람들의 염원이 모여서 도도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혹시 왕규 또한 그 큰 흐름의 한 줄기는
아니었을까. 왕규 또한 전환기의 한 시점에서 건국초기의 국가와 정치를 이끌었던 주역 중
의 한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역사상의 어떤 기록을 통해서도 그의 사상이나 이념을
구체적으로 밝혀 낼 수는 없다. 그가 꿈꾸던 사회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미 정상의 위치에 도달했던 그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더 큰 권력이 필요했던
것일까. 단순한 권력에의 욕구와 생존의 경쟁 탓이었는지, 아니면 무언가 목숨을 걸고라도
이루어야할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결론을 얻기는 쉽지 않다. 왕규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하더라도 그건 역사학의 영
역에서 벗어나서 상상력의 영역에 맡겨야 할 문제이다.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서 복원할
수 있는 왕규라는 인물은 권력을 추구하여 반역을 꾀하다가 몰락한 패배자의 형상일 뿐이
다.


왕규의 전기는 반역열전에 실려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분통이 터지는 사
람이 있겠지만, 그건 맞는 말이다. 역사의 눈길은 패자에게 관심을 던질 만큼 한가하지 못하
다. 아무리 승자라 하더라도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무대의 한 중앙에 서 있는
그 순간뿐이다. 불행히도 역사가 조명을 비춘 그 시간에 왕규는 반역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왕규를 반역자로 기억한다. 누군가 왕규를 반역자가 아닌, 역
사의 수레바퀴 밑에 깔린 위대한 정신, 혹은 이루지 못한 꿈과 이상을 간직한 채 구렁텅이
로 떨어져 반역자의 낙인을 쓰고만 절세의 경륜가로 이해하고 싶다면, 나 역시 그러고 싶다.
나는 역사상의 모든 지도자들이 다 그랬기를 강하게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의 기록과 기록 사이의 그 넓고 공허한 공간에 장엄하고 아름다운 상상력의 성채를 세
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 20020408 -

출처 : http://blog.naver.com/kwjeon2000/120010254949

 

 

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 실록 ( 총 34대 918년 - 1392년  총 478년)

1대 태조 왕건(출생 877 - 사망 943년  5/25일 죽음 66세)

왕위 918 - 943  25년 29명의 부인에게서 25남 9년 생산 후고구려 태봉국 궁예의 장수  입문함 - 918년에 왕건 군대와 싸움에서 궁예가 죽고 후백제 견훤이가 아들 신검에게 쫒겨 투항함 936년 견훤의 사위 박영규가 귀순함 왕건은 936년 신검과의 전투에서 견훤이 참여함 신검이가 항복함 신라 경순왕은 스스로가 왕건에게 찾아와서 스스로 투항함 935년경- 천하통일- 훈요십조 )

2대 혜종 (태조 왕건의 첫째 아들  912년 충생 주름살 왕)

* 왕건 호족 융합정책으로 29명의 부인 25남 9녀 생산 권력투쟁 양산
* 장남은 오씨 소생  장화왕후-왕자 - 무 -  태자책봉 - 오씨 미미한 가문
* 제 3비 신명왕후 유씨가 태자 - 태 - 출산으로 왕건 고민
* 박술희 도움으로 오씨 아들 태자 책봉 - 오씨 세력 미미함
* 왕규의 달을 태자 비로 맞음   청주 유시 혼인 충주 유씨견제위해
* 서경 세력 - 평산 박씨와 왕식렴   충주 유씨 유대강화
* 태자 무 충생에얽킨 설화 - 왕건이가 오씨와 동침후 정액을 박으로 쏟음
* 이로인해 태자 무가 출생하자 얼굴에 주름이 잡혀 - 주름살임금 출신 미약하여 임신시키아니하려고 정액을 돗자리로 솓음 오씨가 이것을즉시 흡수하여 임신함 열달후 아이를 낳앗는데 낳ㄹ고보니 아이의이마에돗자리 모양이 잇어 무뇌가 새겨짐 혜종의 왕위 고의 반대 무리들이 고의적으로 만든 퍼트린 이야기
* 2년 4개월만에 죽음 재위시절 늘 고민이 많음 - 오씨 세력과 유씨 세력 다툼  왕규가 왕요 형제 역모고하나 오히려 자신의 맏딸을 왕소에게 두 번째 부인으로 줌
* 34세로 죽음  생명의 위협 - 왕규 박술희 분통
   
3대 정종 (태조 왕건의 셋째 아들- 신명왕후 유씨 제 3남 )

* 권력 암투 시작됨 - 왕위 계승 문제
* 충주 유씨 세력  - 서경파 왕요 형제 - 혜종 몰아내기위해 치열한 다툼
* 왕요 세력 - 종실 대표격인 왕식렴과 박수경 서경파 왕요의 장인 박영규
* 충주 유씨 신명왕후 왕건구도에 지대한 영향 (왕등극후 결혼) 제 3비
* 장안왕후 오씨 - 헤종 출생 - 박술희와 왕규의 힘을 얻어 오씨 부인 자녀 혜종을

  태자 책봉  
* 신명왕후는  5남 2녀 출생 - 충주 유씨 호족중에 최고의 세력
* 왕건이 죽자 충주 유씨 외손  21세 왕요 943년 - 혜종이 병얻자
* 왕건의 사촌 동생 왕식렴 종실 대표  평산 박씨 - 서경파  충주유씨 합세
* 박술희와왕규 - 개경파  
* 혜종은 개경파로 왕이됨  박술희 문무백관 통솔함 왕규 요직 등용 서경 견제
* 혜종은 양대 세력 틈에 병이나서 눕자 자연히 개경파가 힘이약해짐
* 개경파인 청주 유씨 세력은 서경파로 등 돌림
* 개경파 거두 박술희를 귀양 보내 죽임
* 혜종 죽자 무력으로 서경파가 개경파를 누르고 왕규를 귀양 보내 죽임
* 혜종은 자신의 아들을 흥화군을 후계자로 세우고자하나 반대하여 세우지 못하고 죽음
* 왕요는 개경파의 완전히 삭제후 왕위에 추대됨  - 형식적인 왕  - 정종  

4대 광종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 신명왕후 유씨 소생 4남 )

* 고려 조정 전환기 - 과감한 개혁 * 정종의 선위받아 왕에 오름
* 25세 왕 - 평산 박씨와 충주 유씨 세력 강력한 도움
* 고려의 독자 연호 - 광덕 - 고려 대외위상강화
* 다음해 후주의 연호 사용함  민심 안정  대외 정책 불교 진흥
* 노비안검법 - 노비해방법 부당하게 노비된 자 해방 - 호족 힘이약화되고 왕권 강화
* 과거제 도임 폭탄 선언 - 고려 조정 공신 중심 무인들 대부분
* 호족들 반발하여 왕권강화파로 충돌
* 광종의 과감한 개혁정책   국방 강화 - 여진족 토벌 국토 확장
* 51세로 죽음 - 호족 세력 누르고 왕권 강화 개혁정책

5대 경종  (광종의 아들)

* 약화된 호족들 재등장 * 광종때 복수 피바람
* 광종의 공포 정치로 박수경의 아들과 호족 출신 관료들 죽음 혜종의 아들흥화군과 정종

  의아들 경춘군이 역모죄로 죽음 태자  경종도 공포로 떰
* 957년 광종이 병사하자 아들 21세로 비로서 왕위에오름  고려 5대 경종임
* 즉위 즉시 대사면령 - 귀양에서 풀어줌 관직 복직
* 호족 출신 왕선이 집정 임명 - 참소 세력들 대대적 복수 피바람
* 왕선의 요구로 복수법을 허락하여 대대적인 복수극이 펼쳐짐
* 태조 왕건과 천안부원군 임씨 사이에 태어난 효성태자와 태조의 10비 숙목부인 소생

  원녕태자가 살해됨
* 토지 개혁 * 전시과 좌우집정제 * 최지몽 내의령에 임명 (귀양간)
* 최지몽(왕건때부터 인물) 역모죄 고발하여 왕에게 금디 받음
* 최지몽 점성술에 능함 - 경종은 정적 제거에 이용함
* 경종은 날마다 오락함 여색 바둑  * 정적 제거에 많은 피로 인해 마음이 상함 육체

  망가짐 병상에누워 한달만에 죽음  사촌동생 개령군을 선위함

 

 

KBS 대하드라마 제국의 아침

  [ 제 93회 ] - 1월 25일

광기 어린 광종은 역모자인 효은태자, 박승위, 승경, 승례는 물론 친인척인 흥화군, 경춘원군 등을 극형에 처한다.
어린 아들 태자 주에게까지 사약을 내리고...

양가는 김긍률과 박영규에게 광종은 마지막 술잔을 하사하고, 마지막 술의 의미를 알아차린 둘은 황도를 향해 절하고 최후의 술잔을 받는다.

만취한 최지몽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지언하고, 이에 분노한 광종은 최지몽마저 죽이려 하는데...

  [ 제 94회 ] - 1월 26일

술에 취한 광종은 광평시랑 최행귀가 신라계라는 말을 꺼내자 신라는 이미 망한 나라이니 그 말을 꺼낸 자도 역모자라하여 최행귀 마저 그 자리에서 목을 벤다.

서필은 죽어가면서까지 유언으로 태자 주 만은 살려주어 황실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마지막 충언을 남기고 광종은 고민에 빠진다.

한편, 균여가 광종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한 자들에 대한 천도제를 지내준다는 것을 알게 된 광종은 균여마저 참형으로 죽이려하는데...

 

 

 

왕규는 태조의 15비,16비의 아버지이자 혜종의 2비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고려사는 혜종이 죽기 직전까지 호위병사를 거느리고 다닌 것에 대해 이 혼란에 대한 책임을 왕규에게 전가시키고 있으며 이를 위해 몇가지 장치를 해두었습니다. 자신의 외손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자객을 시켜서 벽을 뚫고 왕의 침실 안으로 들어가 혜종을 살해하려 했다거나 자객을 보내 귀양간 박술희를 살해했다는 내용 등이 바로 그것인데요. 당시의 정황으로 봤을때 자객을 보낸 쪽은 왕요(3대정종)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이 자객에 의해 급히 살해되었을때 왕위를 이을 사람은 왕요였구요, 실제로도 왕요가 왕위를 이었습니다. 혜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왕규의 기반상실을 의미하는 거구요, 왕규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리가 없스니다. 왕규는 본래 함씨였는데 왕건의 신임을 받아 왕씨성을 하사받았습니다. 박술희와 더불어 혜종을 보필하라는 유명을 받든 몸입니다.

 

태종의 유명을 어긴다면 박술희와 등을 질수 밖에 없습니다. 왕규는 무인 출신이 아니라 군사력을 동원할 능력도 없습니다. 무력동원의 능력이 있는 박술희와 적대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되는 거죠. 혜종이 죽자 왕요일파에 의해 즉각 제거되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왕규는 오히려 혜종과 박술희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입장이죠. 혜종이 왕규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은 왕규가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가장 믿을만한 신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왕규가 자신의 외손을 왕위에 앉히려고 했다면 혜종이 왕규를 끝까지 보호할 까닭이 없습니다. 광주원군을 앞세웠다면 왕규가 제거될때 광주원군도 함께 제거되었겠죠. 하지만 실록에는 광주원군에 대해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역모사건이 일어났을때 역모자들이 추대하고자 했던 인물도 함께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는 이상한 일입니다. 광주원군은 적통도 아니고 태조에게는 차자 왕요 외에도 여섯명의 적자가 있었는데 광주원군을 왕위에 세우려 한다면 매우 무모한 발상이죠. 태조가 남긴 훈요십조에도 어긋나기도 하구요 왕후를 배출한 다른 가문들의 반발에 부딪혔을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기도 세력은 왕규를 추종하고 있었구요 이는 왕규가 그들을 자극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합니다.

 

혜종이 죽기 직전에 왕식렴의 서경군대가 개경으로 진입한 것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고려사는 왕규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할 목적이었다고 쓰고 있는데요, 이때 왕규를 체포하여 귀양보냈다가 자객을 보내 죽였다고 합니다. 왕규가 반란의 조짐을 보이고 있어서 왕식렴의 군대가 개경에 진주하였다고 쓰고 있는데 왕규가 반란을 도모했다면 왕식렴의 서경 군대가 오기 전에 도성을 먼저 장악하는 상황이 벌어졌을테고 오히려 먼 곳에 있던 서경군대가 도성을 먼저 장악했고 당시 대광벼슬에 있던 왕규는 저항 한번 못해보고 왕식렴에게 쉽게 붙잡혔습니다. 왕식렴이 반란군이었음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왕식렴의 군대는 왕요 일파의 왕위 계승에 반발하는 문무대신들과 개경백성들을 힘으로 제압하기 위해 야음을 틈타 은밀히 개경으로 진입하여 왕성을 에워쌌던 것입니다.

 

박술희가 반란의 뜻을 품고 있어 정종에 의해 유배당했다고 고려사는 쓰고 있는데요, 태조의 유명을 받든 박술희가 반란의 계획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혜종이 아닌 정종에 의해 유배당했다는 건 정종 왕요가 이미 궁중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얘기구요 혜종의 아들 흥화군이 있었음에도 정종이 왕위를 계승한 것은 왕위찬탈의 가능성을 시시해주고 있습니다.왕요가 왕규보다 박술희를 먼저 제거한 건 혜종의 무력적 기반을 제거하기 위함이었구요, 왕요가 정권을 장악한 후 왕규의 무리 300명을 처형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개경의 문무대신들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발했다는 것은 왕요의 즉위가 부당한 행위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왕요가 왕위를 계승하자 개경의 문무대신들의 반발이 일어났고 왕요 일파는 급한 마음에 이들을 역도로 몰아 모두 죽여버렸다는 것입니다. 혜종이 끝까지 왕요를 왕위 계승자로 지목하지 않은 사실과 왕요가 측근들의 추대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도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출처 : 한권으로읽는고려왕조실록 참조

 

광종 (光宗 )

자는 일화(日華)이며 휘는 소(昭)이다. 그리고 시호는 대성(大成)이며 태조 왕건(王建)의 셋째 아들이고 제3대 왕 정종(定宗)의 친동생이다. 비(妃)는 태조의 딸 대목황태후(大穆皇太后) 황보씨(皇甫氏)이다. 정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한 뒤에 그 영명(英明)한 바탕으로 많은 치적을 쌓았다.   즉위년 8월에는 국초의 공역자(功役者)를 4등급으로 나누고 쌀을 차등있게 하사함으로써 국초 이래의 호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으며,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대내외적으로 자주와 위엄을 보였으며, 2년간 사용하다가 준풍(峻豊)으로 바뀌었다. 또한 각 주·현의 공부(貢賦)를 제정해 경제제도의 정비를 단행했다.

  그리고 권호강족(權豪强族)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훈신(勳臣) ·장상(將相), 심지어 골육지친(骨肉之親)에 이르기까지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왕권강화에 반발하거나 장애가 되는 세력을 제거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960년,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한 사건이었다. 광종은 이들을 귀양보내고 이어 국초의 대표적 공신인 박수경(朴守卿)·최지몽(崔知夢) 등을 거세했다. 심지어 종실인 혜종과 정종의 아들까지도 죽이는 등의 대숙청을 단행했다.

  956년(광종 7)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만들어 노주(奴主) ·노비 간의 분쟁을 재판하여 많은 노비를 풀어주었다. 이 때 시행과정에서 상당한 동요가 일어났으나, 노비의 안검에 임하는 광종의 태도가 확고하여, 감히 간언조차 하는 자가 없었다. 그의 비인 대목왕후(大穆王后)가 간절히 간하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958년에는 중국  후주(後周)에서 고려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려에서는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958년에 처음 실시한 과거에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시·부·송·책으로써 진사시 갑과(甲科)에서 최섬(崔暹) 등 2명과 명경과에서 3명, 잡과에서 2명을 선발했다. 그뒤 광종대에만 모두 8차례의 과거를 실시하여 39명의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것은 사장(詞章) 중심의 제술업을 처음 시행했으며, 국학 출신자만 응시할 수 있었던 신라의 독서삼품과와 달리 응시자격을 전국의 군현에 개방했다.

  또한  960년 백관의 복제(服制)를 제정했는데, 당시 제정된 백관의 공복은 자(紫)·단(丹)·비(緋)·녹(綠)의 4색으로 되어 있는데 원윤(元尹) 이상은 자삼(紫衫), 중단경(中壇卿) 이상은 단삼(丹衫), 도항경(都航卿) 이상은 비삼(緋衫), 소주부(小主簿) 이상은 녹삼(綠衫)을 입게 되어 있다.  같은 해에 군제를 크게 개혁하여 병권을 집중시켰다. 국초 공이 있는 호족들의 아성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순군부(徇軍部)를 군부(軍部)로 고쳤으며, 비슷한 시기에 건국 이래 최고의 관부였던 광평성(廣評省)의 지위를 내렸다. 반면 시위군인 내군(內軍)은 장위부(掌衛部)로 고쳐 숫자를 증가시켰으며, 이에 따라 물장성(物藏省)을 보천(寶泉)으로 고쳐 시위군의 증가에 따른 군수(軍需)를 확보하고자 했다.

  수도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개칭하고 서경(西京), 즉 평양을 서도(西都)라고 하였다. 한편 불교를 독신(篤信)하였으며, 국방에 유의하여 동북계(東北界) ·서북계(西北界)에 많은 성을 쌓았다. 서북계에는 장청(長靑) ·위화(威化) ·무주(撫州) ·안삭(安朔) ·습홀(濕忽) ·송성(松城) ·낙릉(樂陵) ·운주(雲州) ·신도(信都) ·안융(安戎) 등 주로 평남 ·북지방에 축성(築城)하였고, 동북계에는 장평(長平) ·박평(博平) ·고주(高州) ·화주(和州) 등, 주로 지금의 함남 지방에 축성하였다. 만년(晩年)에는 참소를 혹신(惑信)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다. 능호(陵號)는 헌릉(憲陵)이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고려 태조 왕건의 부인 

 

제1황후 : 신혜황후 유씨
         * 정주(개성)지역 호족출신
         (후사 없음)

제2황후 : 장화황후 오씨
         * 나주지역 호족출신
         (후사 : 2대 혜종황제)

제3황후 : 신명순성황후 유씨
         * 충주지역 호족출신
         * 광종의 생모이자 경종의 친할머니
         (후사 : 태자 태, 3대 정종황제, 4대 광종황제, 문원대왕 정,
          증통국사, 경순왕의 부인 낙랑공주, 흥방공주)

제4황후 : 신정황후 황보씨
         * 황주지역 호족출신, 소황주원부인과 자매
         * 경종의 외할머니, 왕치&황보수&황보설의 부친 대종 욱의 생모
         (후사 : 대종 욱, 대목황후황보씨)

제5황후 : 신성황후 김씨
         * 신라계 호족출신
         * 황보설(헌애왕후) - 안종 욱(대종)의 아들 현종의 외할머니
         (후사 : 안종 욱)

제6황후 : 정덕황후 유씨
         * 신라계 호족 출신, 왕치&황보수&황보설의 생모 선의태후의 모후
         (후사 : 왕위군, 인애군, 원장태자, 조이군, 문혜왕후(문원대왕 비),
          선의태후, 이름없는 공주)

제7 대부인 : 헌목대부인 평씨
        * 신라계 6두품 출신 , 왕건의 부인중 유일하게 대부인칭호를 받음
            손자 흥덕원군 - 광종의 딸 문덕왕후의 소생 신정왕후가 후일에
            경종 - 헌애왕후의 소생 목종의 비로 혼인함.
         (후사 : 수명태자)

제8부인 : 정목부인 왕씨
         * 명주지역 장군 왕경(순식)의 딸
         (후사 : 순안왕대비)

제9부인 : 동양원부인 유씨
         * 삼한벽산공신 유금필의 딸
         (후사 : 효목태자, 효은태자)

제10부인 : 숙목부인 임씨   
         * 진주지역 호족출신
         (후사 : 원녕태자)    

제11부인 : 천안부원부인 임씨
         * 진주지역 호족출신
         (후사 : 효성태자 임주, 효지태자)

제12부인 : 흥복원부인 홍씨
         * 지금의 홍천지역 호족출신
         (후사 : 태자 직, 신명순성황태후의 장남 태자 태에게 출가한 공주)

제13부인 : 후대량원부인 이씨
         * 지금의 합천지방 출신 호족의 딸

제14부인 : 대명주원부인 왕씨
         * 명주지역장군 왕예의 딸

       
제15부인 : 광주원부인 왕씨
         * 혜종때 반역으로 처형당한 왕규의 딸
         * 광주지역 출신 호족
        
제16부인 : 소광주원부인 왕씨
         * 혜종때 반역으로 처형당한 왕규의 딸, 광주원부인의 동생
          (후사 : 광주원군)            

 ##  광주원군 : 고려 태조 적 20남 ##


제17부인 : 동산원부인 박씨
         * 견훤의 사위 박영규의 딸이자 승주출신 호족

제18부인 : 예화부인 왕씨
         * 춘천지역 출신 호족

제19부인 : 대서원부인 김씨
         * 황해도 서흥 출신 호족. 소서원부인과 자매
         * 태조가 두자매를 찾지않아 속세를 떠남

제20부인 : 소서원부인 김씨
         * 황해도 서흥 출신 호족

제21부인 : 서전원부인
        * 태조의 부인중 신원미상의 부인

제22부인 : 신주원부인 강씨
         * 황해도 신천출신 호족, 광종의 대모
         (후사 : 이름없는 왕자)

제23부인 : 월화원부인
         * 태조의 부인중 신원미상의 부인

제24부인 : 소황주원부인 황보씨
         * 황주지역 호족출신

제25부인 : 성무부인 박씨
         * 평산지역 호족출신
          (후사 : 왕자, 왕자, 왕자, 왕자, 경순왕의 부인이 된 공주,
           효제태자, 효명태자, 법등군, 자리군)

제26부인 : 의성부원부인 홍씨
         * 삼한벽상공신 홍유의 딸, 의성 출신의 호족
          (후사 : 6황후 정덕황후의 공주와 혼인한 의성부원대군)

제27부인 : 월경원부인 박씨
         * 삼한벽상공신 박수문의 딸, 평산 출신의 호족
 
제28부인 : 몽량원부인 박씨
         * 삼중대광 박수경의 딸, 평산출신의 호족

제29부인 : 해량원부인 선씨
         * 선산출신의 호족이자 신라출신 진골 귀족의 후예

(모두 29명의 부인을 두고 36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진천 대모산성의 메아리  
작성일: 2002/06/18      작성자: 이양훈

진천 대모산성의 메아리

조선 성종때 예조판서를 지냈고 국조오례의를 펴내는 등
유명한 학자이자 문신이었던 이승소李承召(1442~1484)는
진천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동국여지승람에
남겼다.

山勢周遭圍古邑
산 형세 돌아 옛 고을 둘러싸고

松聲蕭瑟透疎窓
쏴- 솔바람 소리 성긴 창문으로 들리네

-이승소-


진천은 역사가 오랜고읍古邑이다.
신라 김유신 장군의 출생지가 진천이듯 진천은 통일전 신라의 국경이었고
고려건국때에 진천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청주가 모반을 꾀한다고?"
918년 가을 왕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예가 각별히 챙겼던 청주사람들이 반란을 꾀했다.
"유검필과 홍유는 내려가 반란을 진압하라"
두 장군이 거느린 고려군은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청주민심을 자극할까
두려워 청주 인근의 진천에 주둔하게 된다.

그들이 주둔했던 성이 대모산성大母山城이었다.


"대모산성을 아십니까?"
"몰라."
진천입구의 도로에서 비탈을 비틀거리며 자전거를 타고오는 노인에게 물었다.
"대모산성? 몰라. 처음 듣네.
"혹시 할미성은 아십니까?"
"할미성은 바로 이거야."
그가 올라오는 비탈이 대모산성이었다.
대모산성의 이름은 진천의 일반인들에게도 생소하다.
대모는 할미이니 할미성으로 알려져 있다.


6월의 대모산성에는 싸리나무 . 참나무 . 밤나무 . 개망초
. 소나무 . 아카시아등이 분묘가 보이는 콩밭가를 따라 늘어서 있다.
산성의 길이는 4킬로미터, 폭 1킬로미터의 구릉지대이다. 가운데를 국도가 통한다.
산성길을 따라 가니 오른 쪽으로 진천읍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진천 대모산성은 동에서 서에 걸쳐 내성과 외성으로 축조되었는데
내성의 둘레는 416미터, 외성은 650미터이다.
냇가 자갈 위에 점토흙을 까는 판축판板築으로 쌓았는데
서기 1~2세기에 처음 축조된 성이다.

대모산성은 삼국시대부터 고려말까지 사용되었다.
성 밖에는 백제시대 구덩이가 있고 신라 돌방무덤(석실분)이 함께 나와
그 오랜 연륜을 짐작케 한다.


진천의 고려호족은 진천임씨鎭川林氏였다.
왕건의 제10비 숙목왕후 임씨가 진천임씨 대광(大匡 정2품)
임명필林名必의 딸이었고
2대 혜종의 비 의화왕후의 아버지 대광 임 희林曦가 진천임씨였다.

왕건은 918년 쿠데타를 성공시킨 직후
한찬(韓粲 6등급) 임명필을 순군부령徇軍部令으로,
파진찬(波珍粲 4등급) 임 희를 병부령兵部令으로 삼는다.

진천임씨가 세운 고려건국의 구체적 공로가 드러나지 않지만
그들은 왕건에게 대단히 중요한 세력이었던 모양이다.
청주가 반란하자 청주 인근의 진천세력의 도움을 받은 왕건이 반란을
진압했다고 보아야 한다.

고려초에 진천은 진주鎭州라고 했는데 경기도 안성을 비롯
주변의 여러 군현을 관할했다.
원래 진천이 교통요지이자 넓은 평야를 지닌 큰 고을이었지만
건국공로로 진주로 승격된다.

진천임씨에서 난 왕건의 10비 숙목왕후는 원녕태자를 낳는데
원녕태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고려 5대 경종때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혜종과 임희의 딸 의화왕후 소생으로 흥화군興化君, 경화궁부인,
정혜공주가 있었는데 흥화군도 종친들의 왕위쟁탈전 속에 비운의 죽음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대광 임 희는 왕의 장인으로 부원군이자 상산백常山伯이 되면서
진천임씨의 시조가 되는데 전해오는 얘기로는 그의 묘가 여주에 있다고
했지만 임희의 무덤이 여주군지에 나와 있지 않다.
이후 상산은 진천의 별호가 되기도 했다.

고려초 한 때 위세를 떨쳤던 진천임씨도 고려왕실의 안정과 함께
역사 속에 사라지고 고려중기 임 연林衍 장군이 나타나 진천임씨를 부흥시킨
다.
임 연은 고려최씨 무인정권을 무너뜨린 장군이자 권신權臣으로
몽고와 대립해 고려의 자주성을 지켰다.


"많이 기다리셨지요?"
봉원용 옹(상산고적회장 . 72세)이 바쁜 일정을 무릅쓰고 진천문화원에 나왔다.
봉 옹은 자료를 주면서,
『진천에 진천임씨가 450여호 있기는 하지만 세가 약한 편』
이라 했다.
봉 옹은 문백면 구곡리에 진천임씨가 집단 세거하고 있다고 했다.


구곡리에 가서 임상설씨(전 진천임씨 대문회장)를 찾으니 없다.
구곡리 외구마을에서 만난 임재신(65세)씨가 자신이 임연장군의
22대손이라면서 안내를 자청한다.
임재신 씨는 농한기에 노동자로 전국을 다녔는데
울산의 공단에서도 일했다고 했다.
그 때 본 울산이 얼마나 변했는지 궁금해 했다.


구곡리에 임 연 장군의 사당인 장열사가 있고
임 연 장군이 축조한 것으로 전해오는 농다리(충북유형문화재 28호)가 있다.
전통징검다리와 유사하게 큰 돌로 축조한 농다리는
미호천을 건너는 다리로서 옛날 대단히 중요한 다리였다.


"덕문리 방죽이 어디입니까?"
백곡천 가 논에서 일하고 돌아오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방죽이요? 대부분 없어지고 지금 조금 남아 있는데 따라오세요."
자신을 함안조씨로 소개한 할머니는 집이 방죽터 앞에 있다고 했다.
방죽이 있는 덕문리 하덕마을은 함안조씨 집성촌이다.
조선 단종생육신 조 려趙旅를 시조로 하는 함안조씨가
여기 진천까지 진출해 있다.
자생력이 대단한 성씨가 함안조씨이다. 조 할머니는 친정집안에서는
지금도 함안에 가서 조상제사를 모신다고 했다.

하덕 방죽은 임 연의 집터라 전해 오는데
신라말과 고려시대에 걸쳐 진천의 호족들이 세거했다.
고려때 몽고병들이 쳐들어 와 이 일원에 주둔하자
임 연이 의병을 모아 이들을 무찔렀다.

하덕 방죽에서 대모산성이 바라보인다.
하덕의 진천호족들은 비상시에 대모산성에 들어가 진을 쳤다.

가로 1킬로, 세로 1킬로미터의 넓은 연못 방죽은
절반이 논이 되고 절반이 동네가 되었다.
논 수백마지기 넓이의 연못은 한 때 진천의 소문난 관광지로서
배를 타고 놀던 곳이었는데 연꽃이 피면 더욱 장관을 이루었다.


중부고속도로를 달리면 진천읍을 지나 곧 우측으로 대모산성과 농다리를 볼 수 있다.

한 때 역사의 중심 고장으로서 위세를 떨치던 진천 고을은
이제 농공단지에서 일하는 낯선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는 그런 고장이 되고 말았다.



[추기]
최근 수원백씨 세보에,
임 희의 딸인 의화왕후(혜종의 비)의 소생 정혜공주가
수원백씨 중시조 백창직白昌稷의 부인이 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향후 연구가 필요하다.

[끝]

 

고려사 [高麗史] 설명

조선 초기 김종서(金宗瑞:1390~1453) ·정인지(鄭麟趾:1396~1478) 등이 세종의 교지를 받아 만든 고려시대의 역사책.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총 139권으로 되어 있다. 1392년(태조 1) 10월 태조로부터 이전 왕조의 역사책을 만들라는 명을 받은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은 1396년 37권의 《고려국사》를 만들어 바쳤다.

 

정도전과 정총(鄭摠)이 책임을 지고 예문춘추관의 신하들이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우선 통사인 이제현(李齊賢)의 《사략》, 이인복(李仁復) ·이색(李穡)의 《금경록》,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 등의 체재를 참고하면서, 역대 고려실록과 고려 말의 사초(史草)를 기본자료로 삼았다.

 

이것은 그 내용과 서술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1414년 하륜(河崙) ·남재(南在) ·이숙번(李叔蕃) ·변계량(卞季良)에게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바로잡고, 특히 태조에 관한 내용을 충실히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1416년 대표자인 하륜이 죽자 중단되었다. 이를 잇고자 하는 논의는 세종의 즉위 후 왕 자신에 의해서 제기되고, 마침내 1419년(세종 1) 9월 유관(柳觀)과 변계량 등에게 일을 맡기니, 이들은 1421년 정월에 다 만들어 올렸다.

 

이리하여 본래의 사초와 달리 마음대로 고쳤던 곳이 바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국제관계가 고려된 부분에서는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관점이 오히려 강화되어 제칙(制勅) ·태자(太子) 등을 교(敎) ·세자(世子) 등으로 고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책도 반포되지 못하다가 1423년 12월에 다시 유관과 윤회(尹淮)로 하여금 이 부분을 실록에 따라 바로 쓰도록 하고 있다. 1424년 8월 이 일은 끝났지만, 이번에도 변계량의 반대로 발간되지 못하였다.

 

세종은 1431년에 《태종실록》이 편찬된 것을 계기로 《고려사》를 다시 쓰는 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1442년 8월에 신개(申槩) ·권제(權踶)가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바쳤다.

 

이 책은 1448년에 양성지(梁誠之)의 교감을 거쳐 일단 인쇄되었으나 편찬자 개인과 관련된 곳이나 청탁받은 곳을 제멋대로 썼기 때문에 배포가 곧 중지되었다. 세종은 다시 1449년에 김종서 ·정인지 ·이선제(李先齊) ·정창손(鄭昌孫)에게 명령을 내려 내용을 더 충실하게 하면서 이런 잘못을 고치게 하였다.

 

김종서는 드디어 1451년(문종 1) 8월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이번의 작업에서는 늘어난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기 위하여 체재를 바꾸는 일도 아울러 이루어져, 최항(崔恒) 등이 열전, 노숙동(盧叔仝) 등이 기(紀) ·지(志) ·연표, 김종서 ·정인지 등이 교감을 맡았다. 열전에서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어서 비판이 거셀 것을 우려하여, 1452년(단종 즉위)에 조금만 인쇄하여 내부에 보관하다가, 1454년 10월에 이르러 비로소 널리 인쇄, 반포되었다.

 

《고려사》에 실려 있는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에는, 본기(本紀)라 하지 않고 세가(世家)라 함으로써 명분이 중요함을 보이고, 거짓 왕인 신우(申禑) 부자를 열전에 내림으로써 분수 넘치는 것을 엄하게 처벌하고 충직하고 간사함을 명확히 구분한다 하였으며, 제도를 나누고 문물을 헤아려서 비슷한 것끼리 모음으로써 계통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연대를 헤아릴 수 있게 하며, 사적을 상세하게 하는 데 힘을 다하고, 빠지고 잘못된 것을 메우고 바르게 하려 하였다는 편찬의 방침이 제시되고 있다.

 

이 방침은 다시 범례에서 각 항목별로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있다. 먼저 세가에 관한 것을 보면, 왕기는 세가라 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고, 분수를 넘는 칭호도 그대로 써서 사실을 보존하며, 일상적인 일은 처음과 왕이 직접 참여할 때만 쓰고 나머지는 생략하며, 고려세계는 실록에 있는 3대추증 사실을 기본으로 삼는다 하였다. 또한 우왕 ·창왕을 거짓 왕조로 규정하여 열전에 강등시켰으며, 이전부터 내려오던 이제현 등의 평론을 그대로 실을 뿐, 따로 작성하지 않도록 하였다. 세가에서는 32왕의 왕기가 46권에 수록되어 전체 분량의 약 3분의 1에 해당된다.

 

서술의 방식은 《원사(元史)》를 모방하여 첫머리에 왕의 출생, 즉위에 관한 것을 쓰고 끝부분에 사망, 장례 및 성품에 관한 것을 썼다. 왕의 연대는 실제로는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었으나, 이 책에서는 즉위한 다음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다. 세가 다음에는 지(志)를 두었는데, 천문 ·역지 ·오행 ·지리 ·예 ·악 ·여복 ·선거 ·백관 ·식화 ·병 ·형법 등 총 12지 39권으로 되어 있다. 이 지(志)도 《원사》에 준하여 분류하였으며, 실록 등이 없어져서 빠진 곳은 《고금상정례》 《식목편수록》 및 여러 사람의 문집 등으로 보충하였다 한다.

 

그런데 실제 고려의 제도는 당나라 것을 기본으로 삼고 송나라 것이 덧붙여지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고유의 전통이 깔려 있었다. 예를 들면, 원구(圜丘) ·사직 등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토속적인 연등회 ·팔관회 의식이 중요시되었고, 중국의 아악(雅樂)과 당악(唐樂)을 사용하면서도 예로부터의 속악이 성행하였으며, 중국의 관제와 산관계(散官階)를 이용하였으나 또한 도병마사 ·식목도감 및 향직 등 독자적인 제도를 아울러 썼고, 당률을 채용하면서도 실제 고유의 관습법이 적용되고 있었다.

 

지의 맨 첫머리에는 편찬자의 서문이 놓여 있는데, 대개 일반론과 실제 사실에 대한 개설적인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설명의 큰 줄기는 태조 이후 문종 때까지의 고려 전기를 제도가 정비되고 국세가 번창한 시기로 보고, 무신란 이후 몽골 간섭기에 들어서는 제도가 문란하여 나라가 쇠망한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어 본문에서는 먼저 연월일이 없는 일반 기사를 쓰고 그 뒤에 연대가 있는 구체적 사실을 열거하였다. 세가 ·지 다음으로 표가 들어 있는데, 실제 본문에서는 연표라 하여 하나의 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를 따랐다. 제일 위에 간지를 쓰고 그 아래 중국과 고려의 연호를 썼으며, 고려 난에는 왕의 사망과 즉위 및 중국과의 관계 등 중요한 일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표에 이어 마지막으로 열전을 두었는데, 후비전(后妃傳) ·종실전(宗室傳) ·제신전(諸臣傳) ·양리전(良吏傳) ·충의전 ·효우전 ·열녀전 ·방기전(方技傳) ·환자전(宦者傳) ·혹리전(酷吏傳) ·폐행전(嬖幸傳) ·간신전 ·반역전(叛逆傳) 등 총 50권, 1,009명으로 되어 있다. 열전의 구성은 역시 《원사》를 모방하였지만, 그 서문은 이제현이 쓴 제비전(諸妃傳)이나 종실전의 서문처럼 이미 있던 자료를 이용하였다. 그 내용 중 반역전에 우왕 부자를 넣어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고 있고, 문신 위주, 과거 위주로 인물을 선정하여 조선 유학자의 입장이 나타나고 있으며, 흥망사관에 입각하여 개국공신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개별인물에 대한 평가는 이전부터 있던 자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비교적 공정하게 쓰려고 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여러 차례의 개찬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종래의 편년체의 역사서술에서 기전체로 편찬된

 

《고려사》는 첫째, 동양의 전통적인 왕조사 편찬방식과 같이 기본적으로 이전부터 있던 사료를 선정 채록하여 그 나름으로 재구성하였으므로 역사성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둘째, 이렇게 사실을 있는 대로 쓰려고 애썼기 때문에 객관성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주체성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셋째, 그러면서도 한편 편찬자인 유학자의 사대적인 명분론이 반영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역사관을 큰 원칙으로 하여 고려시대를 이해하고 있는데, 첫째, 흥망사관에 의해 고려 전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후기를 부정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을 긍정적으로 파악하려 하였다. 둘째, 무인(武人)을 천하게 보는 관념과 왕실의 권리를 도둑질하여 나라를 마음대로 한 데 대한 정통론의 입장에서 무신정권을 부정적으로 쓰고 있다. 셋째, 원나라를 섬긴 부분에 대하여 대명관계가 확립된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사 편찬자는 부정적으로 쓰고 있고, 그 이전 시기에 기록된 고려사 속 사신(史臣)의 견해에서는 긍정적으로 쓰여 있다.

넷째, 고려 말 개혁론자의 견해를 비판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부분에서 고려 당시의 사실과 다른 점이 생기게 되었다.

 

## 고려왕조실록을 저본으로 해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편찬되었으며, 고려왕조실록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습니다.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를 기본으로 해서 편찬된 역사서는 여사제강을 비롯하여 조선 중후기에 개인이 편찬한 역사서가 있습니다.

 

고려시대가 중심이 되고, 고려의 역사 전체를 다룬 역사책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말고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다만 통사로 편찬된 동사강목과 같은 역사서, 중국 사서의 외국열전 등에 단편적으로 고려의 역사가 등장합니다.

 

추가로, 고려시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료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고려도경"입니다.

중국인 서긍이 쓴 이 책(?)은 고려의 당시 사실을 가장 생생하게 알려주는 중요한 1차사료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만큼이나 중요한 가치를 가집니다.

 

한국학 관련책자 이미지를 보시려면 네이버 블로그 상현서림이 잘 되어 있는것 같아요.

http://blog.naver.com/minist9/10024005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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