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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內系外系

안산군(연성군) 장인 왕화, 원상 사위 창원부원대군 왕우(공양왕 아우)

by 연송 김환수 2008. 10. 6.

고려 왕실의 비운이랄까

 

생몰년 : ?-1394

시대 : 고려

분야 : 왕실 > 왕족 > 왕족

왕화(王和)에 대하여


왕화(王和)

?∼1394(태조 3). 고려의 왕족. 개성왕씨(開城王氏).

 

할아버지는 순화후 유(淳化侯 유)이고, 아버지는 학성부원군 향(鶴城府院君珦)은 공양왕의 숙부이며 고려 신종의 6대손이다.

 

남평군(南平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가 주살될 때 도평의사(都評議司)의 탄핵을 받아 원지에 유배되었다.

 

조선이 개국한 뒤인 1394년(태조 3) 고려 종실들이 다시 거제도에 유배될 때 안동에 투옥되었으며, 이어 수원부에서 국문당한 뒤 주살(죄를 물어 죽임)되었다.

 

 

고려 34대 공양왕

 고려 제34대 마지막 왕(1345~1394). 이름은 요(瑤).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의 아들.

시호 : 공양대왕 恭讓大王

신종의 7대손, 양양공(襄陽公) 서(恕)의 6대손, 시안공(始安公) 인(絪)의 5대손, 서원후(西原侯) 영(瑛)의 고손자, 익양후(益陽侯) 분(昐)의 증손자, 순화후(淳化侯) 유(柔)의 손자이다.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정몽주가 살해된 후, 덕이 없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폐위되어, 귀양을 갔다가 2년 뒤에 삼척(三陟)에서 살해당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34대 475년 만에 멸망하였다. 재위 기간은 1389~1392년이다

 

왕화는 공양왕과는 사촌간이다. 사위는 이조판서를 지내고 연성군에 봉군된 안산김씨 김정경이다.

 

위정공 안산군(연성군) 김정경 묘 (경기도 하남시 감북동 57)

 

 현천의 무덤을 완성하고 나서 신씨와 노씨는 부장하였으며, 왕씨는 그 아래에 임좌로 장사 지냈다.

 

 

 

 

 

 

                                                  안산군(연성군) 부인 개성왕씨 화혜택주 묘

 

 

 

  연성군 묘소, 화혜택주 묘소,  위정각


* 옹주 및 택주 설명


조선시대 외명부(外命婦) 봉작(封爵)의 하나. 왕자군(王子君)과 종1품 종친의 처(妻)에게 이런 호칭을 붙였다. 군부인은 중국 당나라 때의 외명부제도에서 문무관 3품 이상의 모(母)와 처를 칭하던 데서 비롯되었다.


고려 공양왕 때에는 대군과 군의 처를 구별하지 않고 옹주라 하였으나, 조선 초기에 와서 대군의 처를 옹주, 군의 처를 택주(宅主)라 하여 서로를 구별하였다.

세종 때에는 종실 종1품의 적처(嫡妻)와 공신 정1품·종1품의 적처를 모군부인(某郡夫人)이라 칭하고 군부인의 앞에 읍호를 붙이도록 규정하였다 


 

위정공은 부인을 세 번 맞이하였으니, 판서 신익지,  신양군 노영, 남평군 왕화의 딸이다. 5남 1녀를 낳았다. (부인 : 평산신씨, 교하노씨, 개성왕씨)

 

별장 지는 신씨 소출이요, 상호군 관 · 별장 척은 노씨 소출이요, 판중추 좌참찬

평호공 개와 안성위 대호군 한과 사섬시 서령 안철산 처는 왕씨 소출이다.

 

* 사섬시는 사담서로 개칭되었으며 조폐관청 

저화의 제조와 외거노비의 공포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으나, 동전과 전폐의 주조사업도 관장
 

생몰년 : 미상

시대 : 고려

별칭 : 왕향(王珦)

분야 : 왕실 > 왕족 > 왕족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에 대하여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생몰년 미상. 고려의 왕족.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향(珦).

고려 신종의 6대손이며, 공양왕의 숙부이다. 처음에 학성후(鶴城侯)에 봉하여졌다가 뒤에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으로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원나라에 가서 신년을 하례하려다가 홍건적의 난으로 길이 막혀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때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복주(福州:경북 안동)에 행차하였으므로 아우 익원부원군 정(益院府院君鉦)과 함께 행재소에 가서 배알(拜謁)하였다.

 

1377년(우왕 3) 환자(宦者) 김수만(金壽萬)의 처와 전민문제(田民問題)로 다툰 일이 있었는데 학성부원군을 모해하기 위하여 우왕을 해치려 한다고 하니, 우왕이 순군(巡軍)에 명하여 집을 지키게 하고 김수만의 처를 국문하니 거짓임을 자백하였다.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31>


왕씨의 신수를 점친 사람들


1394년 1월, 문하부 참찬 박위가 순군부 옥에 갇혔습니다.


 앞서 동래현(東萊縣) 영(令) 김가행(金可行)과 염장관(鹽場官) 박중질(朴仲質) 등이 밀성(密城, 밀양)의 맹인 이흥무(李興茂)에게 나라의 안위와 왕씨의 신수를 점치게 했는데, 일이 발각되자 이흥무를 잡아다 순군부 옥에 가두고 대간과 형조로 하여금 순군만호부와 함께 조사토록 했습니다.


 이흥무는 김가행, 박중질 등이 박위의 말을 듣고 가서 점을 쳤다고 자백했습니다. 공양왕과 임금의 신수를 비교해 누가 낫겠는가, 또 왕씨 가운데서 누가 신수가 좋은 사람인가를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흥무의 점괘로는 공양왕의 사촌인 남평군(南平君) 왕화(王和)의 신수가 좋고 그 아우 영평군(鈴平君) 왕거 가 그 다음이었다고 했습니다.


 이에 박위를 가두고 순군으로 하여금 김가행과 박중질을 경상도에서 잡아 오도록 했습니다. 또 왕씨를 거제도로 옮기게 하고, 대장군 심효생을 보내 왕화, 왕거를 안동(安東) 감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임금은 사람을 보내 박위에게 술을 내려주고 수갑을 풀어주게 한 뒤 타일렀습니다.


 “경이 어찌 이런 짓을 했겠는가? 박중질, 김가행 등이 와서 밝혀지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은 사직에 관계되는 것이라 내가 개인적인 은혜를 베풀 수가 없어 경을 옥에 넣도록 지시한 것이다. 내가 딴 사람들이 큰 죄를 지었어도 모두 용서했는데, 하물며 경이겠는가? 경은 마음을 굳게 가지라.”


 김가행과 박중질 등을 잡아다가 국문했는데, 대간과 형조는 국문을 해도 쉽사리 판결할 수가 없다며 진술에 관련된 사람들을 한자리에서 심문해 그 죄를 밝히자고 청했습니다. 임금은 윤허하지 않고 박위를 용서해 복직시킨 뒤 말했습니다.


 “박위가 비록 본래 다른 마음이 있었더라도 지금 내가 높은 작위를 주어 후히 대우했는데 어찌 감히 변란을 도모했겠는가? 박위 같은 인재는 쉽게 얻을 수 없다.”


 박중질, 김가행, 이흥무 등은 곤장을 쳐 변방 고을에 귀양보냈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는 글을 올려 왕씨를 제거하도록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 다시 함께 글을 올려 왕강, 왕승보, 왕승귀, 박위의 처벌을 주장하며 서울에 살게 할 수 없다고 했으나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 함께 글을 올려 왕강, 왕승보, 왕승귀, 왕격을 섬으로 옮기자고 청했습니다. 임금이 대표와 간사를 불러 다시 말하지 말라고 하니,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이 무리들은 전하께서 매우 후하게 대우하셔도 은혜를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왕강은 지모가 남보다 뛰어나고 왕승보, 왕승귀는 용맹과 힘을 당할 자가 없으니, 서울에 있으면 틀림없이 불측한 변란을 선동할 것입니다. 원컨대 신들의 아뢰는 말을 윤허하셔서 훗날의 근심을 막으소서.”


 임금은 우선 가둔 것을 속히 풀어주라고 지시하고 왕강 등을 불러 지시했습니다.


 “경들은 모두 쓸 만한 인재여서 불러와 서울에 두고 가까이하면서 믿고 의심함이 없었다. 이번에 간관이 섬에 옮기기를 청했으나 내가 이미 용서했으니, 경들은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전과 같이 출입하라.”


 대간과 형조에서 다시 함께 글을 올려 왕강 등을 귀양보내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또 왕화 등을 국문하라고 글을 올려 청하니, 대간과 법관에게 지시해 박중질과 왕화 등을 잡아 수원부(水原府)에 모아 놓고 국문토록 했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는 올린 글을 윤허하지 않는다며 모두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불러다 놓고, 윤허하지 않은 것은 깊이 생각하기 위함일 뿐이니 우선 업무를 보라고 타일렀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 글을 올려 왕화, 왕거, 석능(釋能), 이흥무, 김가행, 박중질 등을 한자리에서 대질 심문하자고 청하니, 대간 형조 순군부 각 1 명씩이 양광도 관찰사와 함께 수원부에 모여 대질 심문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한편 사헌부 시사 권문의, 윤창(尹彰), 기거주 정귀진(鄭龜晉), 좌습유 최사강(崔士剛), 감찰 이복례(李復禮) 등 대간 일부가 대간과 형조의 탄핵을 받았습니다.


 3성이 모여 공양왕 3 부자와 왕우 3 부자 및 왕강, 왕승보, 왕승귀 등을 제거하려고 의논했는데, 권문의 등은 왕씨를 제거하려면 싹 없애야지 왜 왕강 등 일부만 제거하려 하느냐고 반론을 제기해 탄핵한 것이었습니다.


 산기상시 이거이, 사헌부 중승 박신, 형조 정랑 전시(田時), 순군부 지사 성부(成溥) 등을 수원부에 보내 왕화, 왕거와 중 석능, 김가행, 박중질, 이흥무 등을 데려다 국문토록 했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는 왕씨 일족을 섬으로 옮기라고 청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 또 함께 글을 올려 공양왕과 왕씨 일족을 섬에 안치해야 한다고 아뢰니, 임금이 3성 간사를 불러 타일렀습니다.


 “지난번에 이미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함께 글을 올리지 말라고 지시했는데, 왜 따르지 않는가? 이 일은 이미 잘 생각하겠다고 말했는데, 어찌 이리도 급히 서두르는가?”


 “이미 명령은 받았지만 다시 함께 글을 올린 것은 일이 중대하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하시겠다는 말씀을 듣고도 다시 아뢰는 것은 뜻밖의 변고가 있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대간과 형조에서 함께 글을 올려 왕씨와 박위의 처벌을 청했으나 임금이 보류하고 내려보내지 않았습니다. 대궐 문에 엎드려 힘써 간(諫)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 함께 글을 올려 박위의 조사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 함께 글을 지어 공양왕을 죽이도록 청했습니다. 임금이 윤허하지 않으니, 대간과 형조에서 모두 업무를 보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왕강 등을 불러 말했습니다.


 “경들은 나라에 공이 있어 다른 사람들처럼 귀양보내지 않았다. 지금 대간이 글을 올려 처벌을 청했으나 내가 따르지 않았는데, 대간이 모두 업무를 보지 않아 내가 따를 수밖에 없다. 경들은 각기 귀양지로 가라. 나 또한 경들의 공을 잊지 않겠다.”


 그러면서 술을 내려주었습니다. 왕강은 공주(公州)로, 왕격은 안변(安邊)으로, 왕승보는 영흥으로, 왕승귀는 합포(合浦, 마산)로 귀양보냈습니다. 대간과 형조에서 그제야 업무를 보았습니다.

 

장풍득수의 천하명당 개경


송악산은 개경의 상징이다. 신령한 산이라 하여 일명 숭산(崧山)과 신숭(神崇)이라 불리는 송악산은 백두산에 맞닿아 있다.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오던 백두산의 정기가 마식령산맥을 넘으며 성거산과 정분을 나누다 천마산을 낳고 오관산을 품어 송악을 낳으니 이곳이 개경이다.

한 마리의 학이 날개를 펴서 좌청룡 부흥산과 우백호 오공산을 감싸 안고 용수산을 바라보며 오천(烏川)과 백천(白川)을 얻었으니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장풍득수(藏風得水) 형국이다. 장풍득수란 물을 얻어 바람을 잘 갈무리한다는 뜻이니 천하의 명당이다.

이렇게 좋은 터에 자리 잡은 개경이 손안에 든 바람을 잘 관리하지 못하여 바람을 맞아 바람 잘 날 없으니 지력의 쇠함일까? 외성(나성)과 내성, 그리고 황성과 궁성 등 4중 성곽으로 둘러싸인 요새가 하루아침에 무너졌으니 하늘의 기운이 다함일까?

개경이 바람을 맞아도 큰 바람을 맞았다. 보통 바람이 아니라 대형 태풍급 바람이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고 475년 동안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던 왕(王)씨 왕조가 무너졌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바람을 맞아도 원상회복이 어려운데 천지조화를 받은 바람을 맞았으니 개경은 망가지는 일만 남았다.

수창궁에 들어앉은 이성계는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정도전이 신생국을 설계하고 왕자와 개국공신 그리고 그 자제들이 왕륜동에 모여 충성을 맹세해도 편하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려 유민과 고려에 충성하는 유생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사라진 고려 왕조에 연민의 정을 보내고 있는 백성들의 질시의 눈초리가 따가웠다.

모반 사건에 연루된 이첨을 합포로 귀양 보내고 반 혁명사건 관련자 왕화, 왕거, 김가행을 참수형에 처하자 개경 백성들의 저항이 더욱 거칠어졌다. 예정된 수순대로 공양군 삼부자를 삼척으로 유배 보낸 후 교살시키자 개경이 들끓었다.

 

돌파구는 있었다. 천도다. 도읍지를 옮기는 것이다. 고려의 사직과 종묘가 있는 개경을 이성계는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백성들의 눈초리가 따갑다, 개경을 떠나자

▲ 국보86호 경천사 10층 석탑. 구한말 일본인 다나까 미쓰아끼가 불법 해체하여 일본으로 밀반출하였다가 반환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로비에 세워져 있다.


한양과 계룡산을 후보지에 올려놓고 검토하면서 고려에 충성하는 유생들을 흔들어 놓기 위하여 과거시험을 치렀다. 새 왕조가 마음을 열고 포용하는 의미에서 자격조건을 대폭 낮췄다. 초시를 생략하고 복시와 전시로 직행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고려 유생들이 과거시험 자체를 거부하고 두문동으로 들어 가버린 것이다. 이로 인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겼다.

피 묻은 손을 씻기 위하여 이성계는 사찰을 자주 찾았다. 현비 강씨는 잠저시절부터 자주 찾던 집근처 연복사를 좋아했지만 이성계는 경천사를 즐겨 찾았다. 현비는 연복사에 5층 석탑을 시주 공양하며 자신이 낳은 방번과 방석의 무병장수를 빌었지만 이성계는 경천사를 찾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머리를 식히고 자기 충전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론 병을 핑계 삼아 한동안 기거하기도 했으며 수창궁으로 출퇴근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천사 경내에 들어서기만 하면 왠지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대웅전 앞에 우뚝 솟아있는 10층 석탑을 바라보노라면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인간의 위대함과 그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이 어쩜 오늘의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경천사 경내를 산책하던 이성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10층 석탑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듯이 자신을 억누르는 중압감은 명나라였다. 이성계에게 있어서 명나라는 넘을 수 없는 태산이었다. 요동을 정벌하고 여진족을 쳐부수며 지리산에 침투한 왜구를 소탕하던 장수는 한낱 조선의 무장일 뿐이었다.

이성계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조선에게 명나라는 세계의 중심이었고 하늘이었으며 천자가 있는 황제의 나라였다. 거역할 수 없는 대국이었다. 이러한 명나라에서 호출령이 떨어진 것이다. '네가 우러러 본다는 황제에게 그 따위 하급 관리를 사신으로 보내지 말고 너의 장남이나 차남을 보내라'는 것이다.

명나라에 들어간 사은사 이염을 황제가 직접 매질하여 초죽음이 되어 보내고, 그래도 잘못했다고 황태자의 생신축하를 빌미삼아 사죄하러 들어가려는 조선의 천추절 사신을 요동에서 요동도사가 황제의 명이라며 아예 돌려보내는 명나라의 행태는 도를 벗어났다. 행패에 가까운 명나라의 태도는 조선에게 굴욕을 요구했다.

약소국 조선을 업신여기는 명나라의 행패는 도를 넘어가고

학자는 논한다. "고비사막을 넘나들며 원나라와 격전을 치르느라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명나라를 상대로 원나라와 연합하여 요동을 정벌했으면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고.
학자는 논한다. "오진도에 따른 군사연습은 전술일 뿐, 대명 전쟁에 대한 전략과 전쟁계획이 조선에게 있었느냐?"고.

명나라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왕자를 보내라는 것은 구실에 불과했다. 요동정벌을 주장하는 정도전에게 표적이 맞춰져 있었다. 그들은 정도전을 동이화원(東夷禍源)이라 지목해두고 있었다. 즉 정도전이 조선문제의 화의근원이고 걸림돌 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명나라는 한족 특유의 근성대로 드러내놓고 요구하지 않았다. 변죽으로 조선을 압박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알아서 기라는 것이다. 이러한 속셈을 알고 있는 이성계는 혁명동지 정도전을 사지에 보낼 수 도 없고 진퇴양난이었다.

 

 

김정경(金定卿) : 1345년(충목왕 1) ∼ 1419년(세종 1) 연성군(안산군)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산(安山)이다. 문하시중 김위(金渭)의 증손이고, 판삼사사(判三司事) 김원상(金元祥)의 손자이며, 진주목사 김성경(金星慶)의 아들이다. 고려 말에 군부사총랑(軍簿司摠郞)을 역임한 그는 새로운 왕조 창업에 찬성하고 이성계(李成桂)를 지지하였다. 조선이 개국한 뒤 그는 사문절도사를 거쳐 이조전서를 지냈는데, 인사관리를 잘하였다. 1396년(태조 5)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가 되어 전라도와 충청도의 여러 성을 수축하고 군비를 점검하였으며, 병선(兵船)의 허실을 조사하였다.

   1400년(정종 2) 방간(芳幹)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한성부윤으로서 이방원(李芳遠)에 협력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그는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정해지고 안산군(연성군蓮城君)으로 봉해졌다. 그뒤 공안부윤(恭安府尹)이 되었는데,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병을 핑계 삼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404년(태종 4)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 1408년(태종 8) 개성부 유후(開城府留後)를 역임하고, 1410년(태종 10)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김정경은 용맹하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시호는 위정(威靖)이며, 묘는 하남시 감북동에 있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 『國朝人物考』 ; 『始興郡誌』 ; 『廣州郡誌』 ; 『京畿人物誌』 ; 『서울六百年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상 부인기록 추가설명

배 부인박씨

배 황려군 부인 민씨 부(父)지(漬) 호 묵헌(默軒) 한림원직학사 조(祖)휘(輝) 금자

광록대부 문하시중 증조(曾祖) 명화(命華) 상서좌복야 외조(外祖) 신사전(申思佺) 찬성사  순간공 평산인  / 교감공 13대손 재섭 일운 황려군부인은 - -이하 생략 -

 

김원상 사위 창원부원대군 왕우 (공양왕 동생)

 

 

신종 (고려 제20대왕)

 ↓

 ↓

6대손 정원부원군 균 鈞      김원상 = 여흥민씨(황려군부인 민씨)   鈞 弟 학성부원군 향

 ↓                                          ↓                                             ↓

7대손 공양왕 요 瑤    = 瑤 弟 정양(정원)부원군                       子 왕화 (공양왕4촌)

                              창원부원대군 우 瑀 = 김원상 딸                

                                                                                            ↓

                                                                            안산(연성)군 김정경 = 왕화 딸

 

민명화(閔命華) 또는 민명신(閔命莘) 6世祖 민지묘지명 명신이라 기록됨

형부상서(刑部尙書) 민식(閔湜;상서공파 (尙書公派)중현조)의 다섯 아들중 셋째 아들, 수정승 지(漬;문인공)중현조가 공에 손자가 된다, 이름이 명신(命莘)라고도 하며, 고려에서 상서태복야(尙書太僕射), 혹은 비서소감(秘書少監)을 지냈다.

 

민휘(輝) 7世祖

상서공파(尙書公派 )중현조 민식(閔湜)형부상서(刑部尙書)의 손자, 민명화(命華)상서태복야(尙書太僕射)의 큰아들, 고려조 선증지춘주사, 문인공파 중현조 민지(閔漬)의 아버지, 金紫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부)·門下侍中(문하시중)을 역임. 천성이 청렴하고 간이하다고 일컬어졌다. 부인은 하원군대부인 전주이씨 사공경 세화(世華)의 따님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7권 京畿 驪州牧 新增 人物 本朝≫

 

민지 (閔漬)

1248(고종35) ~1326(충숙왕13)

공의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默軒)이시며 문경공의 현손이시다. 1266(원종7)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지후가 되시고, 1279(충열왕5)년 전중시사(殿中侍史)를 거쳐 예빈윤이 되셨다. 충선왕이 세자때인 1290년 정가신(鄭可臣)과 함께 세자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한림학사 조열대부 추성수정 보리공신의 벼슬을 받아 당시 사람들이 영광으로여겼다. 1258년 원나라가 두 번이나 실패한 일본 정벌을 결행하려 하자 좌부승지로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동정(東征)의 불필요함을 역설하여 전함 건조를 중지하게 하셨다. 왕이 일찍이 신하인 고여주(高汝舟)를 보내어 공으로 하여금 시를 짓게하니 공은 백주청과(白酒靑瓜)를 여주에게 주었다. 여주가 돌아와 왕에게 공의 청빈함을 고하니, 왕이 공에게 백미 100석을 하사하셨다. 동왕 24년(1298)에 집현전태학사로 첨광정원사를 겸하시고 동년 7월에 감찰대부 사림(詞林)학사 승지가 되시고 동왕 25년(1299)에 수국사(修國史)가 되시고 동왕29년(1303)에 판밀직사가 되시고 고려 충숙왕3년(1316) 여흥부원군에 봉하시고 동4년(1317)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이) 되시고 이해에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추진 하셨으며 동왕8년 다시 수정승(守政丞)이 되셨다. 1323년 가락군 허유전(許有全) 흥녕군 김거(金거)와 함께 원나라에 가셔서 충선왕의 환국을 청할 표문(表文)을 지으셨다. 이 문장은 명문으로 그 뜻이 간결하고 때로는 애통한 듯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에 머무르신지 6개월이 되어도 심왕(瀋王) 무리의 간계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충열왕이 공에게 명하여 정가신이 지은 "천추금경록(千秋今鏡錄) 7권을 권보(權보)와 교열 증수하여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라 이름하였고 또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을 편찬하셨으나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 충숙왕12년(丙寅)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79이셨다. 공의 관직을 종합하면 벽상삼한공신 삼중대광 도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여흥부원군 시호 문인공(文仁公)이시니 고려사에 전하였으며 장단 도산서원에 배향되셨다. 배위는 동한국대부인 평산신(申)씨이시니1253넌(癸丑)에 나시고 1337년(正丑)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85이시다. 아버지는 찬성사 순강공 사전(思全) 이시며 외조는 함창여공(咸昌呂公) 취(就)이시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 청량동 대덕산밑에 축좌 상하분이다. 영조 무술년에 비로소 지문(誌文)을 발견하였는데 지문은 익제 이제현(李齊賢)이 지었고 부인의 지문은 제학 백문거(白文擧)가 지었다. 문집서문은 목은 이공이 지었으나 전하여 지지않고 있다.

 

신사전(申思佺)

?∼1289(충렬왕 15). 고려 후기의 재상. 무반으로 관직에 나간 듯하며, 1260년(원종 1)에는 상장군에 올라 있었다. 1263년에 병부상서가 되었고, 이후 재추의 반열에 들었다.

1268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서 원의 사신 흑적(黑的)과 함께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 뒤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으며, 1271년에는 원에 있으면서 임연(林衍)의 원종 폐위를 사실대로 고함으로써 원종이 복위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같은 해에 삼별초가 봉기하자 전라도토적사(全羅道討賊使)가 되었으나, “이미 재상이 되었으니 더 공을 세워 무엇하겠는가!” 하고는 삼별초 진압을 태만히하다가 면직되었다. 뒤에 찬성사(贊成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여흥민씨 참고자료

0 시조 - 5世祖

 1 世

 

2 世

 

3 世

 

4 世

 

5 世

민칭도

閔稱道

세형

世衡

영모令謀

식 湜 : 상서공파(尙書公派)

공규公珪 : 정의공파(定懿公派)


  여흥민씨(驪興閔氏씨)의 시조(始祖)는 노나라의 공자(孔子)의 10 제자중의 한명인 민손(損)의 후손인 민칭도가 유력하다("여흥민씨 시조" 참고). 시조 민칭도(閔稱道)는 고려시대에 상의봉어(尙衣奉御)를 지냈고, 2세조 민세형(閔世衡)은 벼슬이 검교태자소보(檢校太子少保)에 올랐고, 3세조인 민의(閔懿)는 검교상서좌복야(檢校尙書左僕射)에 올랐다. 민칭도의 증손자인 4세조 민영모(閔令謨)가 고려 인종(仁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을 지내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왕(王)의 총애를 받았으며,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거쳐 태자 태사(太子太師)에 이르렀다. 민영모의 묘소는 충북 음성군 금왕면 사창리에 있으며, 명당으로 꼽히고 있다(경모재-민영모 묘소 참고). 4세조 민영모까지는 독자로 이어왔으나, 민영모는 2 아들을 두었다. 첫째 아들 5세조 민식(閔湜)은 고려 신종(神宗)때에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올랐고, 이 후손을 상서공파(尙書公派)라고 한다. 둘째 아들 5세조 민공규(閔公珪)는 판병부사(判兵部事)와 태자 소보(太子小保)에 올랐으며, 이 후손을 정의공파(定懿公派)라고 크게 분류한다. 이들 두 형제는 민씨 가문(家門)의 양대산맥을 이루어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으며, 여흥민씨는 고려 시대부터 4대 명문(名門)으로 지위를 굳혀온 것이다. 

 

0 5世 민식 - 14世조

 문인공파 : (4世 민영모-5世 민식)

5 世

6 世

7 世

8 世

9 世

10 世

11 世

식→

명신→

命莘

다른이름

명화

(命華)

휘→

文仁公

상정→

祥正

선 璿

안인安仁

유의由誼(중현조)

공생公生(소경공파)

도생道生

현 玹→

여익 汝翌(중현조)

상백 祥伯→

중현조

근 謹→

중립 中立

인걸→

仁傑

기→

유→

욱 →

안부→

安富

수 綏


   상서공(尙書公) 민식(閔湜)의 자손 6, 7세에서도 민명신, 민인걸, 민휘, 민뇨, 민대광, 민준, 민각 같이 높은 관직을 지낸 사람이 많다. 특히 민식의 증손인 8세 민지(漬)가 고려의 충렬왕(忠烈王)과 충선왕조(忠宣王朝)에 결쳐 원나라와의 외교에 공을 세웠고, 충숙왕(忠肅王) 때 수정승(守政丞)으로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으며 문장(文章)이 탁월하여「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와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을 저술하였다. 민지의 후손은 대부분 문인공 민지를 중시조로 하여 문인공파로 일컬어진다. 민지는 뛰어난 외교가와 역사가로서 책을 하였으며, 풍류도 좋아하여 특히 금강산을 사랑하고 이에 대한 글도 전해진다. 특히 북한산에는 민지가 즐겨 찾았던 민지암(閔漬岩)이 최근까지 전해 내려올 정도로 풍류도 좋아했던 분이다(민지암 참고).

   민지는 슬하에 9세 민상정(閔詳正)과 민상백(祥伯)의 뛰어난 두 아들을 두었다. 민상정(閔詳正)은 1301년(충렬왕 27) 문과에 급제하였고, 충숙왕 때 장령(掌令)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거쳐 찬성사(贊成事)를 지냈으며,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민상정(閔詳正)의 손자이고, 찬성사 민선의 아들인 11세 민안인(閔安仁)은 공민왕(恭愍王) 때 삼사 우윤(三司右尹)을 거쳐 조선이 개국된 후 왕명(王命)으로 악기(樂器)를 정리하고 제도(制度)를 바로잡아 대례(大禮)를 완성했으며, 그의 아우 민유의(閔由誼)는 판서(判書)를 지냈다.  도평의사 민현의 아들 11세 민여익(閔汝翼)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創業)에 공(功)을 세우고 개국 3등공신에 올랐으며, 태종(太宗) 때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세종조(世宗組)에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여천부원군(驪川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중시조로 삼고 있다.  

  한편 민식(閔湜)의 5대 손으로 고려 말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던 10세 민안부(閔安富)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던 1392년 조의생, 임선미 등 72 명의 고려 충신들과 함께 이성계에게 반기를 들고 두문동(杜門洞; 경남 산청)에 은거(隱居)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민안부 참고). 72명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민안부의 후손들도 "조선 왕조 아래에서는 절대 벼슬을 해서는 안된다"는 유언에 따라서 복권된 뒤에도 후손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중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그의 충절의 영향은 후손에도 미쳐서, 민안부의 16세 손인 민용호는 명성황후가 시해되었을 때, 의병을 일으켜 수백명의 왜적을 사살하는 많은 공을 세웠다.  

    11세 민유의(由誼)-민호례-민오- 14세 민효증(閔孝曾)이 찬성에 오르고, 그의 증손 민몽룡(閔夢龍; 공목공파의 파조)이 우의정에, 민형남(閔馨男; 지애공파의 파조)이 우찬성 등에 올랐다.

 

민지 묘지명(閔漬墓誌銘)

원 고려국 추성수정보리공신 삼중대광 판첨의부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여흥부원군(有元 高麗國 推誠守正保理功臣 三重大匡 判僉議府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軍 驪興府院君)이고 추증된 시호 문인공(文仁公)인 민공(閔公) 묘지명 및 서문

추성양절공신 대광 삼사사 예문관 상호군(推誠亮節功臣 大匡 三司使 藝文館 上護軍) 이제현(李齊賢) 지음

나라가 천자의 신하가 되는 데에는 예(禮)로써 하고, 빈객을 사귀는 데에는 문(文)으로써 하니, 반드시 나이든 학자를 택하여 사명(詞命)을 가다듬는다. 고종(高宗) 때에는 이문순공(李文順公 : 李奎報)과 같은 사람이 있었고, 원종(元宗) 때에는 김문정공(金文貞公 : 金坵)과 같은 사람이 있었다. 충렬왕(忠烈王)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곧 돌아가신 재상인 여흥부원군 민공(驪興府院君 閔公)이 실로 그 임무를 담당하였다.

공의 이름은 지(漬)이고, 자는 용연(龍延)이며, 황려군(黃驪郡) 사람이다. 아버지 휘(輝)는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판이부 어사대사 태자태사(金紫光祿大夫 門下侍中 判吏部 御史臺事 太子太師)이다. 조부 명신(命莘)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이고, 증조 식(湜)은 태중대부 병부상서 보문각학사 지제고(太中大夫 兵部尙書 寶文閣學士 知制誥)이다. 고조 영모(令謨)는 금자광록대부 개부의동삼사 특진 수태자태사 상주국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집현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이부사(金紫光祿大夫 開府儀同三司 特進 守太子太師 上柱國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集賢殿太學士 監修國史 判吏部事)로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어머니는 하원군대부인 이씨(河源郡大夫人 李氏)로 조의대부 사공경 우간의대부 보문각학사 지제고(朝議大夫 司空卿 右諫議大夫 寶文閣學士 知制誥) 세화(世華)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 총명하였으며 8세 때 능히 글을 지을 줄 알았다. 글을 읽다가 빠진 글자나 잘못된 글자가 있으면 곧 보태거나 덜어내고는 하였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모두 선본(善本)을 가지고 살펴보면 과연 그와 같았으니, 모두들 놀래고 찬탄하면서 오래 묵은 습관과 같이 여겼다.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9세에 과거[春場]의 을과(乙科)에 1등으로 뽑혔다. 남경장서기(南京掌書記)가 되어 나갔는데, 낙헌 이시중(樂軒 李侍中 : 李藏用)이 유수(留守)로 있으면서 신진(新進)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통문원녹사(通文院錄事)에 제수되고 임금의 행차를 수행하여 원에 들어갔으며, 위위주부 겸 직한림(衛尉主簿 兼 直翰林)으로 옮겨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상소하니 원종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경인년(충렬왕 16, 1290)에 천자가 조서를 내려 왕세자가 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때에 도적을 피해 도읍을 옮기니 도로가 막혀서 어지러웠다. 공이 국자(國子) <결락> 로서 세자를 가르쳤는데, 밤낮으로 말을 달려 (원의) 조정에 이르니, 조정의 신하들이 바야흐로 군사를 쓸 일을 의논하였다. 교지(交趾)에서 보내온 황제의 글[旨]이 있어 고려 세자의 스승인 학자를 불러 물으니, 공이 대답하여 “수고롭게 군사를 내어 토벌하는 것은 사신을 파견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그 말이 황제의 뜻과 맞으므로 특별히 조열대부 한림직학사(朝列大夫 翰林直學士)에 임명되었다.

임진년(충렬왕 18, 1292)에 원 조정이 왜(倭)를 정벌할 전함을 수리하도록 명하자 서울과 지방이 시끄러워졌다. 충렬왕이 공주와 함께 원에 들어가니 공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수행하였는데 추밀(樞密) 홍군상(洪君祥)을 만나서 “왜인들은 <결락> 바다에 있고 <결락> 백성들은 완고하니, 비록 얻더라도 중국을 살지게 하기에는 족하지 못합니다. 한 번 이(利)를 잃으면 후회함이 어찌 미치겠습니까. <결락> 한(漢)은 주애(珠崖)를 얻었으며 <결락>”라고 하여 군상을 격앙시키니, 군상이 말하였다. “국왕의 말을 들었으니, 내가 (원에) 들어가면 천자에게 아뢰겠습니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물으니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으나 공이 은밀히 임금에게 보고하였고, 군상이 돌아가 황제에게 아뢰니 드디어 그 논의가 그치게 되었다. 얼마가 지나 이듬해가 되자 마침 유고가 생겼으므로 드디어 파하여졌다. <결락>

임금이 돌아오자 동지공거(同知貢擧)에 임명되어 선발한 사람들이 모두 명사로 알려졌으며, 뒷날 장상(將相)이나 고위 관리가 된 사람이 많았다. 이부(吏部)에 있을 때에는 청렴하고 검소함을 스스로 지켰으며, 소나무 같은 수염과 학과 같은 기골로 멀리서 바라보면 참으로 산과 못에 사는 신선 같았다. 일이 있으면 원의 조정에 알리는 것을 담당하였는데, 말로 하기 어려운 것은 모두 공이 문장으로 적어서 평탄하면서도 쉽게 밝혔다. 풍속을 급하게 고치는 일 같은 것도 우리 나라의 오래된 습관을 들면서 청하니, 원의 조정에서 모두 그 의견을 따른 것도 한두 번으로 헤아릴 일이 아니다.

공은 일찍이 예전의 자취는 임금이 마땅히 알아야 하지만 방대하여 두루 살피기 어렵다고 하여 하나의 그림으로 만들어 바쳤는데, 무릇 왕도(王道)와 패도(覇道),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 세대의 길고 짧음, 도읍을 정하고 연호를 세운 것, 합침과 분열을 기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누런 색과 붉은 색이 검은 색과 더불어 혹은 늘어서고 혹은 무리를 이루니, 마치 그물에 벼리가 있는 것과 같고 구슬이 꿰미에 꿰어진 것과 같아서 온 세상이 <결락> 탄복하였다. <결락> 신성대왕(神聖大王 : 太祖)의 세계(世系)가 (唐) 선종(宣宗)에서 나왔으니 여러 대에 걸친 잘못을 바로 잡았다. 태위왕(太尉王 : 忠宣王)이 그것을 보물처럼 중요하게 여겨서 상을 넉넉하고 넘치게 내려주었다.

태위왕이 서쪽으로 (유배) 갔을 때에 반역배[逆豎]인 백안두사(伯顔豆思)가 독을 품고 (황제의) 위엄을 빌려서 화와 복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결락> 원의 서울에 가서 글[表]를 올려 (태위왕을) 불러 들여 귀국시켜 줄 것을 청하니, 비록 일은 중도에 그쳤지만 듣는 사람들은 의롭게 여겼다. 태정(泰定) 을축년(충숙왕 12, 1325)에 추성수정보리공신 삼중대광 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여흥군(推誠守正保理功臣 三重大匡 僉議政丞 右文館大提學 驪興君)에 제수되었고, 3년(1326)에 승진하여 판첨의부사 여흥부원군(判僉議府事 驪興府院君)에 봉해졌는데, 대개 그 충성에 따른 것이다.

12월 임신일에 병으로 집에서 돌아가시니, 나이가 79세이다. 부음을 듣고 왕이 매우 슬퍼하여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장례일을 돕게 하고, 시호를 문인공(文仁公)이라 하였다.

공의 어머니가 꿈에 별과 용이 감응하여 잉태한 지 11개월 만에 공을 낳았다. 공이 당후관(堂后官)이 되어 명령을 내리는 문서를 가지고 밤에 밀직사(密直使) 김광원(金光遠)의 집으로 갔을 때, 김광원이 막 잠자리에 들었는데 한 늙은이가 그의 베개를 밀면서 말하였다. “문 앞에 큰 손님이 와 있는데 어찌 잠을 잘 수 있단 말이오.” 이에 놀라 깨어 의관을 바로 하고 나가 보니, 바로 공이었다. 공은 어려서 병을 많이 앓아 몸에 옷을 걸치지 못할 정도 약하였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서로 공의 학문이 깊어질 것을 기대하기는 하였으나, 능히 장수할지는 알지 못하였다. 마침내 지위가 인신(人臣)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고 나이도 팔순에 이르렀으니, 작위도 누렸고 장수하였다고 할 것이다. 명성이 일찍부터 알려졌지만 절조를 지키면서도 모가 나지 않았고 기(氣)가 부족하지 하였으니, 천도(天道)로서 복과 선을 받은 것은 알려지지 않은 바탕[陰相]이 그렇게 한 바이다.

광정대부 첨의찬성사(匡靖大夫 僉議贊成事) 신사전(申思佺)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상정(祥正)으로 중정대부 밀직지신사 사헌집의 진현관제학 지제고 지선부사(中正大夫 密直知申事 司憲執義 進賢館提學 知制誥 知選部事)이고, 막내아들은 상백(祥伯)으로 통직랑 언부직랑(通直郞 讞部直郞)이다. 장녀는 관군만호 광정대부 첨의평리 상호군(管軍萬戶 匡正大夫 僉議評理 上護軍) 나익희(羅益禧)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중대광 삼사사 예문관대제학 상호군(重大匡 三司使 藝文館大提學 上護軍) 김원상(金元祥)에게 시집갔으며, 3녀는 내시(內侍)로 들어간 보승별장(保勝別將) 박윤류(朴允鏐)에게 시집갔다.

명(銘)하여 이른다.

여강(驪江) 물은 맑게 일렁이는데

<결락> 포부를 품도다.

곤륜산(崑崙山)의 한 조각 옥이고 계수나무 한 가지이니

높은 벼슬에 오르고 뛰어난 문장가가 되어 빛나고 밝은 노래를 짓도다.

구름 덮인 궁궐 문을 열고 검은 주머니[皂囊]를 차니

옥같은 목소리로 의젓하게 봉황새는 조양(朝陽)에서 울었네.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토론하며 세자[元良]를 보좌하고

조정 가운데로 높이 날며 문한(文翰)을 휘둘렀네.

황제의 조정에서 바다 건너 오랑캐[海夷, 倭]를 정벌할 것을 의논하니

한 마디 말[片言]로 두루 백성의 고통을 치료해 주었고,

충성으로 대항하며 임금을 구하는 일은 늙은 나이에도 사양하지 않고

기세로 흉악한 무리들을 꺾으니 여우와 너구리 같은 소인배들이었네.

용(龍)에 올라 타 천제가 사는 백운향(白雲鄕)으로 돌아가니

사림(士林)이 천 년 동안 그 명성과 위광을 부러워하리로다.

푸른 빛 옥[翠琰]을 갈고 다듬어 무덤에 명(銘)을 새기며

소나무와 잣나무를 자르지 않으니 팥배나무[甘棠]와 같으리.

태정(泰定) 3년 병인년(충숙왕 13, 1326) 12월 일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有元高麗國推誠守正保理功臣三重大匡判僉議府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驪興府院君 贈謚文仁閔公墓誌銘(幷序)

 

             推誠亮節功臣大匡三司使藝文館上護軍李齊賢撰

國家臣天子以禮交賓客以文必選耆儒潤色詞命在高王時有若李文順公在元王時有若金文貞公而自忠烈王時至今代則故相驪興府院君閔公實專其任公諱漬字龍延黃驪郡人也考諱輝皇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判吏部御史臺事太子太師祖諱命莘皇尙書左僕射曾祖諱湜皇太中大夫兵部尙書寶文閣學士知制誥高祖諱令謨皇金紫光祿大夫開府議同三司特進守太子太師上柱國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判吏部事謚文景公妣皇河源郡大夫人李氏皇朝議大夫司空卿右諫議大夫寶文閣直學士知制誥世華之女也公幼聰明八歲能屬文讀書有脫誤輒以意增損觀者咸取善本考之果是皆驚歎以爲宿習十七中司馬試十九擢春場乙科第一出掌南京書記樂軒李侍中爲留守不以新進待拜通文院錄事扈駕朝元遷衛尉主簿兼直翰林上䟽論時政得失元王嘉納焉歲庚寅天子詔王世子入朝時因避寇遷都道路梗艱公以國子 (缺) 傅世子晨夜兼馳以達朝廷廷臣方議用兵交趾有旨高麗世子師儒者其召問之公對以爲勞師致討不如遣使招降言稱旨特拜朝列大夫翰林直學士歲壬辰朝廷勅修征倭戰艦中外騷然忠烈王與公主入朝公以右副承旨從見樞密洪君祥曰倭民 (缺) 在海 (缺) 民頑雖得之不足以肥中國一失利悔之何及 (缺) 漢得珠崖 (缺) 以激君祥君祥曰得聞國王言吾當入白天子王問諸大臣無敢出口公密啓于王歸語君祥奏寢其議以須明年適有事故遂罷 (缺) 駕還命同知貢擧所選皆知名士後多爲將相達官其處吏部淸約自持松髥鶴骨望之眞山澤仙也事有當奏朝廷而言所難悉者公述之以文坦然易曉如風俗驅良請因土舊朝廷皆從之者難一二數也公嘗以爲前世之跡人主所宜知而浩汗難以遍閱製爲一圖上之凡王覊理亂世代修短定都立號混並分裂靡所不載黃朱與黑或列或圈若網在綱若珠在貫一世服其 (缺) 神聖系出宣宗矯累世之謬太尉王寶重之賞賚優渥太尉王之西也逆竪伯顔豆思懷毒假威禍福由口 (缺) 詣上都表請召還歸國事雖中格聞者義之泰定乙丑授推誠守正保理功臣三重大匡僉議丞政右文館大提學驪興君三年加封判僉議府事驪興府院君盖服其忠也越十二月壬申病薨于私第年七十九訃聞王震悼命有司庀葬事謚曰文仁公公大夫人薨感星龍孕十一月而生公其爲堂后官持命牒夜詣密直使金光遠宅金方寢有老叟推其枕曰門有巨賓胡睡爲乃驚

悟衣冠而出則公也公少多疾身若不勝衣故人雖以遠到相期莫知其能壽也卒乃位極人臣年至八旬旣爵而齒令聞經始非操守有方不餒其氣將天道福善所以陰相之然耶娶匡靖大夫僉議贊成事申佺之女生二男三女長曰祥正中正大夫密直知申事司憲執義進賢館提學知制敎知選部事季曰祥伯爲通直郞讞部直郞女一適管軍萬戶匡靖大夫僉議評理上護軍羅益禧一適重大匡三司使藝文館大提學上護軍金元祥一適入內侍保勝別將朴允鏐云銘曰

驪江之水淸淪 (缺) 襟期崑山片玉桂一枝高官巨筆歌緝熙披雲閶闔持皂囊鏘鏘威鳳鳴朝陽討論王覇補元良翶翔中朝翰墨場帝臣廷議征海夷片言徧藥民瘡痍抗忠救主老不辭氣挫凶竪同狐狸騎龍歸來白雲鄕士林千載歆聲光磨礱翠琰銘

幽堂勿剪松伯如甘棠              泰定三年丙寅十二月 日

 

〔출전:『驪興閔氏文仁公派譜』(1929)〕


민지처신씨묘지명(閔漬妻申氏墓誌銘)


원[皇元] 고려국(高麗國) 여흥 민문인공(驪興 閔文仁公)의 처 동한국대부인 신씨(東韓國大夫人 申氏) 묘지명 및 서문

정순대부 전 성균관대사성 보문각제학 지제교(正順大夫 前 成均館大司成 寶文閣提學 知制敎) 백문거(白文擧) 지음

원(有元) 후지원(後至元) 3년 정축년(충숙왕 복위6, 1337) <결락> 병진에 대부인(大夫人)이 돌아가시니, 민문인공(閔文仁公)의 부인이자 지금의 재상인 상정(祥正)의 어머니이다. 내가 문인공의 문생(門生)으로 의(義)가 깊어서 매우 슬퍼하였는데, 재상인 민군(閔君)이 나를 보고 소리를 내어 울면서 또한 “그대가 일찍이 선친의 문하에 있어서 우리 가문을 이미 상세하게 알고 있으니, 청컨대 묘지명을 지어주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비록 글재주가 없지만, 두터운 의리에 어긋날까 두려워 잠시 그 대략을 적고자 한다.

대부인의 성은 신씨(申氏)로 천안부(天安府) 사람이다. 아버지 사전(思佺)은 광정대부 첨의시랑찬성사 상장군 판전리사사(匡正大夫 僉議侍郞贊成事 上將軍 判典理司事)이고 시호는 순간(純簡)이다. 할아버지 선주(宣冑)는 정의대부 추밀원우승선 천우위상장군 판예빈시사(正議大夫 樞密院右承宣 千牛衛上將軍 判禮賓寺事)이고, 증조 주석(周錫)은 금자광록대부 수태보 참지정사 상장군(金紫光祿大夫 守太保 叅知政事 上將軍)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어머니 여씨(呂氏)는 곡성군대부인(谷城郡大夫人)에 봉해졌는데, 작고한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여취(呂就)공의 딸이다.

부인은 나이 14세가 되자 순간공(純簡公)이 사위를 택하여 민씨(閔氏) 집안에 시집보냈다.

부인은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상정(祥正)은 중대광 첨의찬성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판판도사사 상호군(重大匡 僉議贊成事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判版圖司事 上護軍)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언충(李彦沖)의 장녀에게 장가들어 아들 일곱 명을 낳았다. 감(瑊)은 군부총랑 예문응교 지제교(軍簿摠郞 藝文應敎 知製敎)이고, 후(珝)는 사복부정(司僕副正)이며, 숙(琡)은 대전보마배 행수낭장(大殿寶馬陪 行首郎將)이며, 의존(義存)은 출가하여 선사(禪師)가 되었으며, 선(璿)은 감찰규정(監察糾正)이고, 수(琇)와 현(玹)은 모두 별장(別將)이다. 감(瑊), 후(珝), 숙(琡), 선(璿), 순(珣)은 또한 모두 아들이 있다. 막내아들 상백(祥伯)은 중정대부 사복정 지철원부사(中正大夫 司僕正 知鐵原府事)로 민부전서(民部典書) 박홍수(朴弘秀)의 둘째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다. 석룡(釋龍)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근(瑾)은 권무(權務)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장녀는 선수 무덕장군 전 관군만호 중대광 금성군(宣授 武德將軍 前 管軍萬戶 重大匡 錦城君) 나익희(羅益禧)에게 시집가서 1남 1녀를 낳았는데, 영걸(英傑)은 관직을 이어 만호(萬戶)가 되었고, 딸은 상호군(上護軍) 최문도(崔文度)의 처이다. 차녀는 중대광 전 판삼사사 진현관대제학(重大匡 前 判三司事 進賢館大提學) 김원상(金元祥)에게 시집가서 1남 1녀를 낳으니, (딸은) 창원부원대군(昌原府院大君) 왕우(王瑀)의 부인이다. 3녀는 판도정랑(版圖正郞) 박윤류(朴允鏐)에게 시집갔다.

아, 창성하였도다. 선행을 쌓아 복의 유래가 멀고 또한 크니, 진실로 그 자손이 이와 같이 많은 것은 마땅할 것이다. 부인의 어질고 중후함은 천성에 바탕을 둔 것이니 매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부드럽고 온순하였다. 시부모를 섬기면서 공경하면서도 즐거워하였고, 자손을 기르는데 사랑하면서도 미쁘게 하였다. 부도(婦道)가 이미 갖추어져있으니 집안일이 잘 다스려졌다.

문인공(文仁公)은 이름이 지(漬)이고, 자는 용연(龍涎)으로, 오로지 문장(文章)으로 자부하며 나라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대위왕(大尉王 : 忠宣王)이 세자로 원에 들어갔을 때 공은 사부(師傅)로 수행하였는데, 세조(世祖) 황제가 불러보고 크게 기뻐하여 조열대부 한림직학사(朝列大夫 翰林直學士)를 제수하였다. 공은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근무하였으되 집에 들어와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편히 지내고, 재산을 모으는 일로 그 마음에 누를 끼치지 않았던 것도 실로 그 내조에 힘입은 것이다. 태정(泰定) 3년 병인년(충숙왕 13, 1326)에 공이 추성수정보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판도첨의사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여흥부원군(推誠守正保理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判都僉議使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軍 驪興府院君)으로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79세였다.

부인은 지원(至元 : 後至元) 2년 병자년(충숙왕 복위5, 1336)에 동한국대부인(東韓國大夫人)으로 봉해졌다. 올해 85세가 되었는데, 병이 들어 돌아가시자 집의 정침(正寢)에 빈소를 마련하였다. 9월 병오일에 국례(國禮)로서 송림현 대덕산(松林縣 大德山) 아래 문인공의 무덤 옆에 장례지냈다.

대개 그 처음에 잘 시작하였다고 하여 반드시 그와 같이 마치는 것은 아니다. 살아서는 영예로운 것보다 큰 것이 없고, 죽음에는 슬픔보다 큰 것이 없다. 영예로왔으니 처음이 좋았고, 슬프지만 그 끝을 온전하게 한 사람은 생각하건대 부인이 아닌가 한다. 마땅히 계승하여 명(銘)으로 삼아 단단한 돌에 새겨둘 것이다.

명(銘)하여 이른다.

오래 된 귀한 집안[華宗]에서 태어나 배필을 구하였으니

덕망 높은 집안으로 시집가서 화목하고 공손하였네.

지어미의 일을 지키고 집안을 다스려 일구었으니

61년 동안 즐겁게 해로(偕老)하였네.

자손이 불붙듯 창성하여

크게는 후상(侯相)이 되고 작게는 경사(卿士)가 되었네.

신의로서 가르쳐 또한 영원토록 지키게 하니

공경하며 살아계신 분을 봉양하였고, 예로써 돌아가신 분을 제사드렸네.

저 언덕을 살펴보니 무덤 자리로 기(氣)가 성하여

덕망 있는 사람이 머무를 곳이니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皇元高麗國驪興閔文仁公妻東韓國大夫人申氏墓誌銘(幷序)


       正順大夫前成均館大司成寶文閣提學知製敎白文擧撰

有元後至元三年丁丑(缺)戊辰大夫人卒閔文仁公之妻今宰相祥正之母也予於文仁公爲門生義切悲悼而閔相君見予號泣且曰予早在先君之門知吾家世旣詳矣請爲之誌予雖無文恐違重意姑叙其畧大夫人姓申氏天安府人也父諱思佺匡正大夫僉議侍郞贊成事上將軍判典理司事謚純簡祖諱宣冑正議大夫樞密院右承宣千牛衛上將軍判禮賓寺事曾祖諱周錫金紫光祿大夫守太保叅知政事上將軍謚文簡妣呂氏封谷城郡大夫人故金吾衛大將軍公就之女也夫人年十四純簡公擇其婿以歸閔氏夫人生二男三女長曰祥正重大匡僉議贊成事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判版圖司事上護軍娶政堂文學李彦冲之一女生七男瑊爲軍簿摠郞藝文應敎知製敎珝爲司僕副正琡爲大殿寶馬陪行首郎將義存出家爲禪師璿爲監察糾正琇玹皆爲別將瑊珝琡璿珣又皆有子季曰祥伯中正大夫司僕正知鐵原府事娶民部典書朴弘秀之二女生三男二女釋龍出家爲僧瑾爲權務餘皆幼長女適宣授武德將軍前管軍萬戶重大匡錦城君羅益禧生一男一女英傑承替爲萬戶女爲上護軍崔文度妻次女適重大匡前判三司事進賢館大提學金元祥生一男一女配昌原府院大君王瑀次女適版圖正郞朴允鏐於戱盛哉其善慶所由來遠且大寔宜子孫如此其多也夫人仁厚根於天性克勤而儉克柔而順事舅姑敬而愉撫子孫愛而周婦道旣備家政底治文仁公諱漬字龍涎專以文章自任爲國師表大尉王爲世子入朝時公以傅從之世祖皇帝召見大悅授以朝列大夫翰林直學士公之忠勤邦家入處宴安不以産業累其心實賴其內助焉泰正三年丙寅公以推誠守正保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判都僉議司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驪興府院君卒年七十九夫人於至元二女丙子封東韓國大夫人至是年八十五感疾以逝殯于其第之正寢以九月丙午國禮葬于松林縣大德山下文仁公之塋側盖有其始者未必有其終生莫大於榮死莫重於哀榮而善其

始哀而全[令?]其終惟夫人乎宜繼以銘刻于貞石銘曰

粵若華宗擇其所從歸于德門敦睦肅雍執婦之功成家之道六十一年怡然偕老有子有孫而昌而熾大而候相小而卿士敎之義方亦克永世敬而生養禮而葬祭相彼原矣鬱其佳哉德人攸止蓋歸乎來


〔출전:『驪興閔氏文仁公派譜』(1929)〕


왕우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왕족. 신종의 7대손이며 공양왕의 아우이고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의 아들이다. 처음에 정양군(定陽君)에 봉해졌으나 1389년(공양왕 1)에 정양부원군(定陽府院君)으로 다시 봉하여지고 판문하(判門下)가 되었으며, 영삼사 종부시사(領三司宗簿寺事)에 이르렀다.

공양왕이 즉위하여 우왕·창왕을 낮추어 서인(庶人)으로 삼고, 이림(李琳)·이귀생(李貴生)·유염(柳琰최렴(崔濂)·노귀산(盧貴山)·이근(李懃) 등을 유배시킬 때 왕명으로 장단에서 진을 치고 비상사태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공양왕이 사친(四親)을 추존하고 그 제사를 맡겼으며, 1391년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마전군(麻田君)·귀의군(歸義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경희(景禧)이다.≪참고문헌≫ 高麗史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였으나 그의 딸이 이성계의 아들 이방번과 결혼하였으므로  화를 면하였고 마전군(麻田君)·귀의군(歸義君)에 봉해졌으며 왕실 선조들의 제사를 맡게 되었다.
 
공양왕은 제20대 왕 신종의 6대손인 정원부원군 왕균과 그의 정실부인 왕씨 사이에서 1345년 2월 태어났으며, 이름은 요(瑤)이다. 처음에 정창부원군으로 봉해졌다가 다시 정창군으로 개봉되었으며, 1389년 11월 이성계(李成桂), 심덕부(沈德符) 등에 의하여 창왕이 폐위되자 추대 되어 고려 마지막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4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