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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역사 고려시대

고려 문화재

by 연송 김환수 2008. 2. 16.

설명도 같이 있으니 도움되시길...

 

1.봉선홍경사사적갈비

 

 

 

 

종 목 국보 제7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성환읍 대홍리 320

시 대 고려시대

 

봉선홍경사는 고려 현종 12년(1021)에 창건된 절이다. 절이름 앞의 ‘봉선(奉先)’은 불교의 교리를 전하고자 절을 짓기 시작한 고려 안종이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자, 아들인 현종이 절을 완성한 후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현재 절터에는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은 이 갈비만이 남아 있다.

 

2.봉정사 극락전

 

 

종 목 국보 제15호 .20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 봉정사

지정일 1962.12.20

시 대 고려시대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신문왕 2년(682)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한다.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새를 만들어 날려 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극락전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72년 해체·수리할 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 지붕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적어도 1363년 이전인 고려 중기(12∼13세기)에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3.부석사 무량수전

 

 

종 목 국보 제18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시 대 고려시대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4.부석사 조사당

 

 

종 목 국보 제1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시 대 고려시대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5.해인사 대장경판

 

 

종 목 국보 제32호

수량/면적 81,258매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0 해인사

시 대 고려시대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6.용두사지철당간

 

 

종 목 국보 제4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48-19

시 대 고려시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다.

 

7.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종 목 국보 제45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시 대 고려시대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8.부석사 조사당벽화

 

 

종 목 국보 제46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시 대 고려시대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조사당(국보 제19호)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 유리상자에 담아 무량수전에 보관하고 있다.

 

9.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종 목 국보 제48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1 월정사

시 대 고려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월정사 안에 있는 탑으로, 그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보살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

 

고려시대가 되면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탑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0.수덕사 대웅전

 

 

종 목 국보 제4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0 수덕사

시 대 고려시대

 

 수덕사는 덕숭산에 자리잡고 있는 절로, 절에 남겨진 기록에는 백제 후기 숭제법사가 처음 짓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다시 고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11.강릉객사문

 

 

종 목 국보 제5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강원 강릉시 용강동 58-1

시 대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지은 강릉 객사의 정문으로, 현재 객사 건물은 없어지고 이 문만 남아 있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관아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

 

이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에 총 8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문루에 걸려 있는 ‘임영관’이란 현판은 공민왕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12.연곡사북부도

 

 

종 목 국보 제54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54-1 연곡사

시 대 고려시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 탑이라면, 수행이 높았던 스님의 사리를 두는 곳이 부도이다. 구성은 석탑과 비슷해서, 기단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게 된다.

 

이 부도는 연곡사 내의 북쪽 산 중턱에 네모나게 둔 바닥돌 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연곡사는 고려 초까지 스님들이 선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때문인지 이 곳에는 북부도 외에도 연곡사 동부도(국보 제53호), 연곡사 서부도(보물 제154호) 등이 더 모셔져 있다. 북부도는 그 중에서 가장 형태가 아름다운 동부도를 본떠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크기와 형태는 거의 같고, 단지 세부적인 꾸밈에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13.법천사지 광국사현묘탑비

 

 

종 목 국보 제5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강원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74-2

시 대 고려시대

 

 법천사터에 세워져 있는 지광국사(984∼1070)의 탑비로, 국사가 고려 문종 24년(1070)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현묘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놓았다. 현묘탑은 현재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탑비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14.청자사자유개향로

 

 

종 목 국보 제60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고려 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청자향로로, 높이 21.2㎝, 지름 16.3㎝이다. 향을 피우는 부분인 몸체와 사자 모양의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체는 3개의 짐승모양을 한 다리가 떠받치고 있는데, 전면에 구름무늬가 가늘게 새겨져 있다. 몸체 윗면 가장자리에도 세 곳에 구름무늬를 배치하였다.

 

15.청자비룡형주자

 

 

종 목 국보 제6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고려 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청자주전자로 높이 24.4cm, 밑지름 10.3cm이다. 용의 머리와 물고기의 몸을 가진 특이한 형태의 동물을 형상화했는데, 이런 물고기모양은 옛날부터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로 건축물에 많이 장식하였다.

 

16.광통보제선사비 : 탄동리의 영릉( 경종릉), 봉동리의 영릉(충혜왕릉), 판문리의 영릉(숙종릉) 등 3개의 영릉이 개성의 동쪽과 동남쪽에 위치하는데, 이 지역은 현재 개성공단과 배후도시 예정지에 포함되어 있어 훼손이 우려되고 있다. 아울러 개성 주변에는 조선 초의 왕릉과 왕족의 무덤도 있는데, 조선 2대 정종릉인 후릉을 비롯하여 태조 이성계의 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 이성계의 아들 방의, 방우의 묘가 있다. 주변에는 서경덕, 박지원의 묘도 있는데, 특히 박지원의 묘는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다고 한다.


 

17.고려성균관 : 사적 50호. 개성시 선죽동에 위치. 고려말 개혁에 앞장섰던 신진사대부들이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건물은 남북 중심축을 따라 앞에 명륜당이, 뒤에 대성전이 배치되었다. 현재 성균관이 개성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여기에는 개성 근처에서 발굴된 여러 가지 유물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으며, 뜰에는 주변의 절터에서 가져온 탑과 불상들을 모아 놓았다.


 

18.태조 현릉-왕건릉 :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에 위치. 943년(태조 26) 5월에 조성. 첫째 왕후인 신혜왕후 유씨가 함께 묻혀 있다. 현릉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몇 차례 이장된 적이 있었다. 1018년(현종 9) 거란이 침입하자 부아산 향림사로 옮겼다가 다음 해 11월 다시 환장하였으며, 1217년(고종 4) 거란족이 국경이 침입하자 태조의 재궁(관)은 다시 봉은사로 옮겨졌다. 또 1232년(고종 19)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현릉은 다시 강화로 이장되었으며, 개경으로 서울을 옮긴 1270년(원종 11)에 임시로 이판동에 옮겼다가 1276년(충렬왕 2)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현릉 자리가 처음 태조가 묻혔던 바로 그 자리인지는 알 수 없다. 이곳은 또한 1906년(광무 10) 도적들에 의해 파헤쳐진 적이 있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 중에 파괴되었으나 1954년 복구한 적이 있다. 1992년 북한에서 발굴조사 후 새로 고치고, 1993년 5월 5일 한자로 쓴 ‘고려태조왕건왕릉개건비’를 세웠다. 이때 12지신상을 새긴 본래의 병풍석들은 무덤 안쪽에 넣어 보존하고 있다. 북한에서 발굴할 때 여러 가지 유물이 나왔는데, 그중 금동불상은 등신불로서 현재 개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무덤안칸에는 벽화를 그렸는데, 동벽에 매화나무, 참대, 청룡이, 서벽에 소나무, 매화나무, 백호가, 북벽에 현무, 천장에는 8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19.나성: 사적 46호. 북쪽의 송악산(488m)으로부터 남쪽의 용수산(177m)로 연결되는 구릉의 능선을 따라 쌓은 성. 1029년 완성. 둘레 약 23km. 본래 흙으로 쌓았으며, 고려말 내성을 쌓으면서 겹치는 서쪽과 북쪽의 성벽은 돌로 쌓았다. 밑면의 너비는 토성 부분이 7~8m. 석성 부분이 6m 정도이고, 높이는 모두 3~4m 정도이다. [고려사] 지리지에서 25개의 성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중 동쪽의 숭인문과 서쪽의 선의문, 남쪽의 회빈문과 북쪽의 태화문(북성문) 동남쪽의 장패문이 중요한 문이었다. 지금 제대로 남아있는 나성의 성문은 하나도 없다. 북쪽의 북창문과 서쪽의 눌리문 등 내성(반월성)과 겹치는 부분의 일부 성문이 누각 없이 돌문만 남아 있으며, 동남쪽 문인 장패문(보정문)과 그 옆의 수구문의 터가 남아있다고 한다.

 


 

20.대흥산성 : 사적 52호. 개성의 배후산성으로 조선시기 한양의 북한산성과 같은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처음 축성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대흥산성은 천마산과 성거산의 골짜기를 끼고 축성된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10.1km이다. 이곳에는 4개의 큰 문과 사이 문이 있는데, 그중 북문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이곳에는 4개의 수구문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송도삼절의 하나인 박연폭포를 이루는 북쪽 수구문이다. 대흥산성 안에는 대흥사와 관음사가 있다. 그중 관음사는 보물급 3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곳에는 대웅전과 7층석탑이 있다. 관음사 대웅전은 조선후기 목조건축물로서 남한에서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7층석탑은 고려시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1.궁궐터(만월대) : 사적 48호. 북쪽의 송악산을 배경으로 그 남쪽의 구릉지대에 전개되어 있다.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시대 궁궐이 대체로 평지에 건설된 것과 달리 흙을 높이 돋아 석축을 한 언덕진 곳에 자리잡은 것이 만월대 궁궐의 특징. 황성의 남문인 주작문을 지나고 궁성의 남문인 승평문을 들어서면 구정이 나오고, 구정을 지나면 다시 신봉문이 나오며, 신봉문을 지나면 본대궐의 중심전각인 회경전의 문인 창합문이 나오게 되는데, 회경전은 4개의 33단 돌계단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 만월대에는 회경전 앞의 돌계단 외에는 중심전각이었던 회경전터를 비롯하여 신봉문 터, 창합문 터, 건덕전 터, 장화전 터, 중광전 터의 주춧돌만 드러나 있다. 개성역사박물관에는 만월대 궁궐의 모형이 만들어져 전시되고 있다.

 

22.고려첨성대 : 만월대 서북쪽에 위치. 사적 49호. 이것은 고려시기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화강암으로 다듬어 만든 축대부분만 남아 있다. 축대는 동서남북 방위와 일치하며, 그 높이는 2.8m, 한 변의 길이는 2.6m이다. 첨성대와 멀지 않은 곳에는 인종대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을 때 목숨을 던져 왕을 구한 홍관의 비가 있었다.

 


 

23.수창궁 : 개성의 중심부인 십자가 근처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 터에 학생소년궁전을 세워 놓았다. 그 근처에서 발견된 용머리 조각은 회경전 앞에 있었던 용머리 조각과 함께 현재는 성균관 대성전 뜰에 옮겨져 있다.

 

 


25.연복사종 : 동합금 주조. 높이 3.3m, 구경 지름 1.9m, 두께 23cm, 무게 약 14톤. 우리나라 5대 종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몸체는 여러 줄의 굵은 선으로 아래 위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으며, 여기에는 명문을 비롯하여 불상, 불경, 여러 가지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특히 물결 모양으로 만들어진 이 종의 구경 테두리에는 물결을 타고 움직이는 모습을 물고기·용·봉황·기린·게 등을 새겼으며, 그 위에 종을 만든 연대와 내력을 써놓았다.

 


 

26.영통사지 : 가장 많은 지정문화재를 남긴 영통사는 개성 나성밖 동북쪽인 개성시 용흥리 오관산 남쪽에 있다. 고려 초에 창건된 절로서 고려전기 화엄종단의 대표적인 절이다. 절터에는 현재 국보급으로 지정된 영통사5층탑(37), 영통사 서3층탑(38)을 비롯하여 보물급으로 지정된 영통사 동3층탑(35), 영통사대각국사비(36), 영통사당간지주(37)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3기의 석탑은 모두 고려초기의 것으로 5층탑을 가운데 놓고 좌우에 3층탑이 동서로 서있다. 또 보물급 36호로 지정된 영통사대각국사비는 1125년(인종 3)의 것으로, 김부식이 지은 비문을 통하여 화엄승려로 활동한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의 행적을 살필 수 있다. 이 비문은 본래 의천이 입적한 다음 해인 1102년 윤관이 지었는데, 김부식이 개찬한 것이다. 이 일로 윤관의 아들 윤언이와 김부식은 서로 사감을 가지게 되었다 한다. 현재 영통사지는 발굴과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영통사5층탑>

 

27.현화사지 : 개성시 월고리 영취산 아래. 현화사와 관련된 지정문화재는 국보급인 현화사비(40), 현화사7층탑(41)과 보물급인 현화사당간지주(38), 현화사석등이 있다. 이중 석등은 서울의 덕수궁에, 7층탑은 개성시 역사박물관 주변에 옮겨져 있다. 현화사는 현종이 자기 부모의 원찰로 지은 법상종 계통의 절이다. 현종은 1018년(현종 9)에 국력을 기울여 현화사를 창건하고, 많은 토지와 노비를 제공하였다. 1021년에 건립된 현화사비는 채충순이 썼는데, 여기에는 현화사의 창건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현종 때 현화사에는 토지가 2000경, 노비 100구를 비롯하여 많은 물자들이 있었으며, 학도들이 1000명이 넘었다. 현화사 창건 내력을 적은 비 앞면의 위 부분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까마귀와 토끼 조각이 있으며, 비 양 옆면에는 용이 새겨져 있다.

개성시 방직동 역사박물관 옆에 옮겨진 현화사7층석탑은 1020년에 만든 것으로 고려 초기 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화사탑에는 탑신 받침.

<현화사7층석탑>

 

28.불일사지 : 951년 광종이 자기 어머니 원찰로 세운 것. 개성시 판문군 선적리 보봉산 기슭에 위치. 국보급 35호. 1959년 발굴하였으며, 그 다음 해 불일사5층탑을 개성 역사박물관으로 옮겼다. 불일사5층탑을 옮길 때 불일사탑에는 금동9층탑, 금동5층탑, 작은 돌탑 20여 개, 작은 청자 사리단지, 불경 등 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그것들은 지금 개성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불일사5층탑>

 

29.선죽교 : 개성시 선죽동에 위치. 국보급 36호. 이곳에서 고려말 정몽주가 피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다리의 옛 이름은 선지교였는데, 정몽주가 피살된 날 밤 다리 옆에 참대가 났기 때문에 이름을 선죽교로 고쳤다고 전한다. 선죽교에는 본래 난간이 없었는데, 1780년(정조 4) 정몽주의 후손이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한석봉이 썼다고 전하는 ‘선죽교’라고 쓴 비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