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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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불교가 성하여 불교국가라고도 할 수 있다. 유교가 고려의 정치이념이 되어있었는데 반해 불교는 정신세계의 지도이념이 되었고, 현실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불교는 고려의 문화ㆍ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와같이 불교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왕실ㆍ귀족들의 두터운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불교가 국가나 개인의 현세생활에 행복과 이익을 준다고 믿고 열심히 숭상하였다. 고려의 불교가 현세구복적이고 호국적인 성격을 띤 것은 이 때문이다. 고려의 이러한 숭불정책은 이미 태조대부터 실시되고 있었다. 태조는 훈요십조 중 1조에서 “고려는 부처님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불교를 진흥시켜 선종과 교종의 사원을 창건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개경에 법왕사, 왕륜사, 흥국사 등 10개의 사찰을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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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불법이 국가를 비보한다는 관념으로 사원이 건립되었고 이와 더불어 각종 불교행사의 실시도 있었다. 고려에서는 정월보름달에 연등회가, 11월 15일에 팔관회가 가장 커다란 불교행사였다. 그것은 가무와 음주로 함께 즐기며, 제불과 천지신명에 제사하여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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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귀족사회의 발달로 호화로운 예술문화가 발달하였다. 귀족들은 그들의 사치생활을 충족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예술작품을 만들어 즐겼으므로 예술면에서는 상당한 발달을 가져왔다. 귀족 취향의 예술품은 독특한 무늬를 넣어 만든 상감청자와 서화, 음악 등이 있다. 또한 고려청자와 금속공예 등도 호화롭고 정교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해 건축과 조각에서는 이전시기보다 퇴보한 감이 있다. 고려 후기의 예술은 전기에 비해 다소 쇠퇴한 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풍의 변화와 원나라 예술의 영향으로 조형미술의 형태와 양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고려자기 자세히 알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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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이미 전기부터 유학이 발달함에 따라 유교적인 역사서술체가 정립되었다. 그것은 편년체인 실록편찬에서 기전체인 정사체로 완결되었다. 현종때 거란의 침입으로 많은 역사기록들이 불타버려 1145년(인종23)에 김부식에 의해 편찬된 『삼국사기』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이다. 이밖에 고종때 승려 각훈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해동고승전』과 같은 왕때 이규보가 지은 『동명왕편』, 일연의 『삼국유사』그리고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가 있다. 한편 후기에 이르면 유교적인 신흥사대부의 대두로 『삼국사기』의 전통을 이은 유교사관이 보다 발달하였다. 충렬왕때 원부를 대표로 관찬한 『고금록』과 정가신이 지은 『천추금경록』, 충숙왕때 민지가 지은 『본조편년강목』, 공민왕때 이제현이 엮은 『사략』등에 유교의 합리주의사관이 반영되고, 거기에 정통과 대의명분을 존중하는 성리학적 사관이 나타난다. |
<금속활자>
<상정고금예문> |
금속활자의 발명과 사용에 있어서 역사상 고려가 가장 앞섰다는 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12세기경 고려에서 놋쇠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썼다는 사실이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복(?’자 활자로 증명되고 있다. 이 ‘㎕?渼?개성(開城) 근처의 고려 왕릉에서 발견되어 1913년 일본인 골동품상이 구왕궁박물관에 팔아 넘긴 것으로, 그 크기는 1.1×1.0 cm 정도이며, 불균형하나 등면[背面]에 구슬 모양으로 찍은 자국이 나 있다. 생김새로 보아 찰흙을 빚은 뒤에 글자 면(面)에 구슬같이 생긴 나무 끝으로 둥글게 찍고, 반쯤 말린 다음 글자를 새겨서 흙활자를 만들어 보기자[見本字]로 하고, 해감모래 거푸집을 만들어 놋쇠를 부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방법은 해감모래 거푸집으로 해동통보(海東通寶)를 주조해 낸 방법과 같은 것이다. 문헌상 금속활자로 간행된 최초의 책으로 밝혀진 것으로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고려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이다. 이 책은 발문에 책을 찍게 된 사연을 밝히고 있는데, 몽골의 병화(兵禍)로 국도를 강화도로 옮긴 1232년(고종 19) 이전에 주자본(鑄字本)으로 찍었던 것을 39년 강화도에서 책을 뒤집어 이것으로 목판(木板)을 새긴 다음 다시 찍었다는 내용이다. 또한 책은 전하지 않으나, 이 당시의 주자본으로는 1234년경 강화도에서 찍은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 28부가 있다. 이는 강화도 시절의 재상이었던 이규보(李奎報)가 저술한 《이상국집(李相國集)》에 채록된 <신서상정예문(新序詳定禮文)>의 발문에 “고금상정예문 50권을 주자(鑄字)로 인출(印出)하여 제사(諸司)에 분장(分掌)하게 하였다”라고 적혀 있는 데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연대를 학계에서는 1234년으로 고증하였으나, ‘㎕?微?발견됨으로써 고려의 금속활자가 12세기에 이루어졌으며 32년의 강화도 천도(遷都)보다 앞선다는 사실이 확실해지게되었다. 그 후 l297∼98년경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청량답순종심요법문(淸凉答順宗心要法門)》이 고려대학 도서관에 남아 있는데, 그 한 면이 금속활자로 찍혀 있다. 이 책은 원나라의 별불화(別不花)가 자금을 대어 찍었기 때문에 이 금속활자의 인쇄술이 원나라로 흘러들어간 것이 확실해졌는데, 그것은 원나라의 왕정(王幀)이 쓴 《농서(農書)》에, “1313년경 놋쇠로 활자를 만들었으나, 실용화하지 못해 다시 목활자를 썼다”라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로 미루어 원나라 때는 서양사람들이 드나들고, 아라비아 사람들이 이를 본받아 카드를 활자로 찍었고, 그 후에 종이의 제조법과 더불어 서양으로 금속활자 인쇄술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의 구텐베르크도 놋쇠에 글자마다 거푸집을 새겨서 활자를 부어 만들었고, 인쇄에 있어서도 기계로 눌러 찍는 법이 고안되고, 금속합금(金屬合金)에서도 주석과 납을 섞은 활자쇠가 만들어져 인쇄술을 더욱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려의 금속활자가 세계 최초의 것임이 세계적으로 공인된 계기가 된 것은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말의 사주본(寺鑄本)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 공개되고서이다. 이 책은 1377년(우왕 3) 충청도 청주(淸州) 밖의 흥덕사(興德寺)에서 주자(鑄字)한 금속활자로 찍은 것임을 발문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고려에는 서적점(書籍店:書籍院)이라는 중앙관서가 있어 주자(鑄字),인서(印書) 등을 관장하였는데, 중앙관서가 아닌 한 지방의 사찰에서 이런 금속활자를 만들어 인쇄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서적점에서는 이미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이 상당히 발달하여, 지방의 사찰에까지 그 기술이 파급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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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호국불교의 성지인 해인사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인 국보 32호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국보 3점과 보물,사적,등 각종 문화 유적 23점을 보존하고 있다.
고려 시대 때, 몽고 군이 쳐들어오자 왕실과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을 가고 육지에 남은 백성들은 힘을 합하여 몽고군과 싸움을 벌였다. 몽고군의 횡포는 몹시 심하여,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재밖에 남지 않을 정도 였다. 수십만 명이 포로로 잡혀 가고, 귀중한 문화재가 불에 타 버렸다. 대구 부인사에 있던 대장경도 불에 타 버렸다. 피해가 이에 이르자, 왕실은 강화도에서 약 16년에 걸쳐 새 대장경판을 만들었다. 이는 부처님의 힘을 빌어 몽고군을 물리치려는 데 뜻이 있었다. 이것이 지금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 대장경이다. (보충설명 보기) |
<참고> 우리나라의 세계 문화유산 |
석굴암,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화성, 창경궁, 경주
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