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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역사 고려시대

황제국가 고려를 위하여 천추태후

by 연송 김환수 2008. 10. 9.

헌애왕후[獻哀王后, 천추태후]

 

964(광종 15)∼1029(현종 20). 고려 제5대 경종의 비. 종실 대종(戴宗, 추존호)의 딸이며, 목종의 어머니이다. 뒤에 경종의 비가 된 헌정왕후(獻貞王后)의 언니로 성은 외가를 따라 황보(皇甫)로 하였다.

 

경종이 죽은 뒤 김치양(金致陽)과의 추문이 알려져 김치양은 성종에 의해 유배되었으며, 997년 성종이 죽은 뒤에 아들인 목종이 18세로 즉위하자 섭정을 하였다. 그리하여 외척의 발호와 왕권의 쇠미를 초래하게 되었다.

 

즉 유배되어 있던 김치양을 불러 우복야겸삼사사(右僕射兼三司使)로 삼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다. 그러나 목종이 후사를 헌정왕후의 소생인 대량원군 순(大良院君詢 : 뒤의 顯宗)으로 정하자 김치양으로 하여금 궁궐에 불을 지르게 하는 등 반역을 꾀하였다.

 

결국 이 난은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있던 강조(康兆)에 의해 평정되어,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하였다. 이 난의 실패로 헌애왕후는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황주(黃州)로 옮겨졌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황제국가 고려를 위하여

천추태후, 고려를 제후국으로 만든 유학 세력과 싸우다

▣ 이덕일 역사평론가

 

조선 국왕의 어머니는 대비(大妃)였다. 그러나 <고려사>는 “헌애(獻愛) 황태후 황보씨는 대종(戴宗)의 딸이니 목종(穆宗)을 낳았다”라면서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하였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천추태후라고 불렀다”라고 전하고 있다. 태후는 ‘황제의 어머니’란 뜻이다.

 

천추태후의 할머니는 황해도 황주에 기반을 둔 호족의 딸인 신정왕후 황보씨였는데 남편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었다. 즉, 천추태후의 할아버지는 왕건인데 부성(父姓)이 아니라 모성(母姓)을 따서 황보씨가 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녀가 모친 성을 따를 수 있게 된 것이 올해(2008년)부터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획기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헌애왕후(천추태후)와 그 동생 헌정왕후는 고려 5대 임금 경종과 혼인한다. 경종 역시 왕건의 아들인 광종의 장남이었으므로 헌애왕후, 헌정왕후와 경종은 모두 왕건의 손자녀였다. 신라 사회의 근친혼 유풍인데, 지금의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 근친혼은 권력을 배타적으로 세습하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황보씨가 혼인했을 때 경종에게는 이미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제1비는 신라 경순왕의 딸 헌숙왕후 김씨였고 제2비는 헌의왕후 유(劉)씨였다. 이들 역시 황보씨 못지않은 쟁쟁한 가문 출신들이었다.

 


△ 고려 궁궐의 터가 남아 있는 개성 만월대. 천추태후가 있었기에 고려의 전통사상들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사진/ 권태균)

수절 강요, 단호히 물리치다

광종의 장남인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부친의 정책을 부인했다. 광종의 급격 개혁으로 그 자신도 화를 입을 뻔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즉위 뒤 광종의 모든 것을 부인하는 과거사 정리를 단행했다. 즉위 직후 대사면령을 내려 부왕 때 귀양을 간 사람들과 옥에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고 관작을 빼앗긴 사람들을 복직시켰다. 심지어 경종은 복수법까지 허용해 광종 때 피화자들이 복수에 나서는 일을 합법화했다.

 

이에 따라 무수히 많은 복수전이 벌어져 태조의 두 아들 효성태자와 원녕태자까지 살해당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헌애왕후는 경종 6년(980) 네 명의 왕비 중 가장 먼저 왕자 송(誦·목종)을 낳는 데 성공했다. 경종의 유일한 왕자였다. 그러나 경종은 이듬해 재위 6년 만에 26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두 살짜리 왕자가 왕위를 이을 수는 없었기에 헌애왕후의 오빠 성종이 즉위했다. 비록 친오빠였지만 성종과 헌애왕후는 정치철학이 서로 달랐다. 성종이 중국식 유교정치 이념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면 헌애왕후는 왕건의 유지에 따라 고려의 전통을 중시하고 상무(尙武) 북벌정신을 드높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고려사>는 성종이 즉위하자마자 “팔관회(八關會)의 잡기들이 떳떳하지 못하고 번쇄하다고 생각해 이를 전부 폐지했다”고 전하고 있다. 성종은 팔관회나 연등회, 선랑(仙郞) 같은 고려의 전통 행사들을 ‘떳떳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폐지했다.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은 중국식과 다르다는 뜻이었다.

 

태조 왕건은 사왕(嗣王)들에게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팔관회는 천령(天靈)과 오악(五嶽)·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라며 이를 잘 지키라고 당부했으나 태조의 손자인 성종은 ‘이를 떳떳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하고 폐지한 것이다.

 

 성종은 나아가 고려의 정치체제를 중국식 정치체제로 바꾸었다. 당나라 제도를 모방해 고려의 중앙관제를 삼성육부제로 바꾼 것이다. 또한 성종은 역대 왕들의 신주를 모시는 중국식 태묘,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 공자에게 제사하는 문묘 등을 설치했다.

 

성종에게는 중국 것이 우월한 것이고 고려 전통의 것은 하등한 것이었다. 이는 최승로 같은 유학자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중국식 유교정치 체제란 잣대를 들이대면 고려는 제후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성종은 개국 이래 사용해오던 ‘조서’(詔書)라는 용어를 황제의 용어라며 제후의 용어인 ‘교서’(敎書)라고 개칭했다. 내부적으로 황제국을 지향했던 고려는 성종 즉위 뒤 내면까지 제후국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 경종의 무덤인 영릉. 나중에 천추태후가 되는 헌애왕후는 경종의 아들 목종을 낳았다. (사진/ 권태균)

섭정되면서 고려 전통 부활

성종은 유학정치 이념에 따라 과부가 된 젊은 여동생에게 수절을 강요했다. 그러나 경종 사망 당시 열여덟 살이던 헌애왕후는 유교 윤리에 구애받지 않는 고려 여인이었다.

 

그래서 헌애왕후는 외가 쪽 친척인 김치양(金致陽)과 별다른 망설임 없이 정을 통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성종은 김치양을 곤장 친 뒤 멀리 귀양 보냈다.

 

동생 헌정왕후도 숙부 안종(安宗) 왕욱(王郁)과 정을 통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성종은 재위 11년(992) 왕욱도 경상도 사수현(泗水縣·사천)으로 귀양 보냈다. 헌정왕후는 귀양길에 오른 왕욱을 눈물로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집 앞에서 산기(産氣)를 느끼고 버드나무 아래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가 대량원군인데 훗날 8대 현종(顯宗)이 된다. 그러나 헌정왕후는 산후조리에 실패해 그만 죽고 말았다. 헌애왕후는 헌정왕후에게 유교식 수절을 강조한 것이 이런 비극을 낳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종이 재위 16년(997) 38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성종이 왕자 없이 공주만 둘을 낳고 세상을 떠남에 따라 헌애왕후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7대 목종(穆宗·재위 997~1009)이다. 즉위 당시 목종은 이미 18살의 성인이었으나 모후 헌애왕후가 섭정했다.

 

그가 거주하던 천추궁(千秋宮)은 성종과는 다른 정책을 펴는 개혁의 핵심기관이 되었다. 고려를 제후국에서 황제국으로 환원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천추태후는 귀양 간 김치양을 불러들여 우복야 겸 삼사사에 임명했다. 목종이 추진하는 고려 전통 부활정책을 도우라는 뜻이었다. 그는 북진을 강조했던 왕건의 유훈을 실천하기 위해 목종에게 네 번이나 서경(西京·평양)에 행차하게 했다.

 

그때마다 산악과 주진(州鎭)의 핵심 지역에 제사를 지내 전통신에게 가호를 빌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진관사(眞觀寺)를 짓고, 목종을 위해 숭교사(崇敎寺)를, 김치양의 출신지 서흥에 성수사(星宿寺)를, 궁성 서북에 시왕사(十王寺)를 지었는데 이런 절들은 전통 행사 팔관회에서 모든 토속신앙이 어울렸던 것처럼 불교와 도교, 토속신앙이 함께 어울리는 장소였다.

 

천추태후에게 전통 사찰의 창건은 개인의 신앙 차원이 아니라 성종 때 억압받은 고려 전통의 부활이었다. 천추태후가 왕궁 안에 신선 신앙이 담긴 낭원정(?苑亭)이란 정자를 지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낭원정은 고려의 전통적 사상인 선랑(仙郞) 정신 회복을 위한 기지였다. 천추태후는 연등회도 부활시켰는데, 이런 고려 전통정책의 부활이 숭무정신을 되살려 왕건의 유지인 북진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였다.

 

천추태후의 이런 정책으로 성종 때 고사될 뻔한 고려의 전통사상들이 대거 회복되고 고려의 독자성이 회복됐다.

그러나 천추태후의 이런 고려 전통의 부활 정책에 대한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천추태후의 집권은 곧 성종과 중국식 유교정치 체제를 지향했던 유학자들의 실권을 의미했는데, 이들이 반대파를 형성했다. 천추태후가 있는 한 자신들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이들은 쿠데타를 계획했다.

 

천추태후의 정적들은 태후의 동생 헌정왕후가 숙부 왕욱과 사통해 낳은 대량원군을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천추태후는 이런 기미를 알고 대량원군을 숭교사(崇敎寺)로 출가시켰으나 정적들이 계속 대량원군 주변으로 모여들자 목종 9년(1006)에는 그를 남경(南京·서울)의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내려보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움직임은 그치지 않았다. 천추태후는 불쌍하게 죽어간 동생 헌정왕후가 낳은 아들을 죽일 수 없었다. 냉혹한 정치 현장에서 이런 온정주의는 큰 후환을 낳았다.

 

목종에게 후사가 없자 정적들은 목종이 남색(男色)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목종이 선정왕후 유씨 외에 다른 부인을 두지 않은 것을 이용해 이런 소문을 퍼뜨린 것이었다. 천추태후는 자신의 정책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아들이 목종의 후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목종 6년(1003)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를 목종의 후사로 삼으려고 계획했다. 그래야 자신의 정책들이 목종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쿠데타군에 쫓겨 충주로

 


△ 개성왕씨 족보 표지.

정적들은 목종의 뒤를 천추태후의 아들이 잇게 되는 현실을 방관할 수 없었다. 그들은 천추태후의 아들이 크기 전에 선수를 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목종 12년(1009) 정월 임금이 관등(觀燈)하는 사이에 천추궁에 불이 났는데, 이것이 바로 쿠데타의 시작이었다. 대량원군을 추대하려는 세력들이 일으킨 불이었다. 쿠데타군이 믿는 군사력의 핵심은 서경 도순검사 강조(康兆)였는데, 그는 쿠데타군에 호응해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으로 향했다. <고려사> ‘강조 열전’은 “천추태후는 강조가 오는 것을 꺼려 내신(內臣)을 보내 절령(?嶺)을 수비하게 하고 행인들을 차단케 했다”고 전하고 있다.

 

쿠데타 세력이 강조를 불러들이자 천추태후는 개경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절령을 방어하게 한 것이다. 그사이 개경에서는 쿠데타 세력과 천추태후 세력이 맞부딪쳐 혼란이 계속됐다. 싸움의 성패는 절령에서 강조를 막아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는데, <고려사> ‘강조 열전’은 강조가 5천 군사를 이끌고 개경에 들어왔다고 전한다.

 

쿠데타 세력이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아무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고려사> ‘강조 열전’은 “목종이 벌써 현종(대량원군)을 맞으러 사람을 보낸 것을 모르고 강조가 분사감찰 김응인(金應仁)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맞아오게 했다”고 적고 있다.

 

쿠데타 세력들은 ‘목종이 대량원군을 맞으러 사람을 보냈다’라고 대량원군을 후사로 지목한 인물이 목종인 것처럼 사실을 날조했던 것이다. 불과 서른 살의 목종이 느닷없이 대량원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하야할 아무런 이유는 없었다.

 

주도권을 장악한 쿠데타 세력들이 부족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목종이 대량원군을 후사로 삼았다’라고 사실을 날조한 것에 불과했다. 목종은 강조에 의해 폐위당하고 현종이 추대됨으로써 쿠데타는 성공했다. 강조는 김치양 부자 등 천추태후 세력 7명을 살해하고, 태후의 친척 이주정(李周楨) 등 30여 명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목종은 태후와 함께 울면서 법왕사(法王寺)로 나갔다가 다시 충주(忠州)로 향했다. <고려사> ‘목종조’는 이때 “태후가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왕이 친히 밥상을 차려드리고 태후가 말을 타려고 하면 왕이 친히 고삐를 잡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목종은 충주에 가서 모후와 여생을 보내려 했으나 이 소박한 꿈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쿠데타 세력은 목종과 천추태후가 살아 있는 한 언제든지 다시 재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조는 김광보(金光甫)를 보내 목종에게 독약을 전달했는데, 목종이 마시기를 거부하자, 강조는 중금(中禁) 안패(安覇)에게 “목종을 죽이지 못하면 멸족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안패는 목종을 살해한 뒤 자결했다고 <고려사>는 전하고 있다.

 

<고려사> ‘강조 열전’은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행위에 대해서 관리와 백성을 막론하고 통분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현종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거란이 침입해 문죄했을 때에야 이를 알게 되었다”고 모든 책임을 강조 한 사람에게 돌리고 있으나 이는 쿠데타 세력 모두가 져야 할 책임인 것이다.

 

이때 천추태후의 나이 46살이었으나 쿠데타 세력은 그를 죽이지는 못했다. 목종과 김치양 사이의 아들까지 모두 죽여 재기할 싹을 자른데다 태조의 손녀이자 선왕 경종의 부인인 그마저 살해하는 것에는 큰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목종이 죽은 뒤 그는 외가의 고향인 황주(黃州)로 이사해 21년을 더 살다가 현종 20년(1029) 정월 6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 인해 고려의 전통은 살았다

천추태후는 비록 쫓겨났지만 정적들도 그가 되살린 정책들을 모두 없애지는 못했다. 현종은 즉위 직후 낭원정을 헐어버려 천추태후의 정책을 폐기하는 듯했으나 이듬해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열었다.

 

현종이 불교와 전통사상의 토대 위에서 유학을 가미해 조화를 이루려 한 것은 천추태후의 정책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는 고려의 현실을 보여준다.

 

천추태후가 12년 동안 추진한 정책들은 고려 백성들의 큰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천추태후가 있었기에 고려의 전통사상들은 물밀 듯이 밀려오는 중국의 사상과 체제의 홍수 속에서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헌애왕후(獻哀王后, 964년~1029년)

 

고려의 5대 왕 경종(景宗)의 세번째 비(妃)이다. 7대 왕 목종(穆宗)의 모후로, 태조의 아들인 대종과 선의태후에서 출생하였다. 천추태후(千秋太后)라고도 한다. 헌정왕후(獻貞王后)와는 자매로 같은 경종의 비이다. 외척 김치양과 음탕한 생활을 즐기고 그 사이에서 난 아들로 목종의 후사를 삼고자, 후계자 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에는 강조의 변으로 유배되었다.

생애

태조의 아들인 추존왕 대종(戴宗)의 딸로, 목종(穆宗)의 어머니이며, 성종(成宗)의 누이동생이고, 현종의 모후 헌정왕후(獻貞王后)의 언니이다. 그녀와 헌정왕후는 어머니의 성인 유씨(柳氏)가 아니라, 할머니인 태조비 신정왕태후 황보씨(神靜王太后 皇甫氏)의 성을 따른다.


981년에 경종이 죽자 아직 2살이던 헌애왕후의 아들 대신 왕후의 오빠인 성종이 즉위하게 되고, 헌애왕후는 태후가 되어 천추궁(千秋宮)에 머물렀다. 성종이 죽은 후 아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여 스스로 천추궁에서 사는 자신을 가리켜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부르게 하였다.


한편, 그녀는 경종이 죽은 후 외가의 친척인 김치양(金致陽)과 내통을 하게 되는데, 이 일을 알게 된 성종이 김치양을 유배보냈다. 헌애왕후는 섭정 이후, 유배되었던 김치양을 다시 불러 우복야삼사사에 임명시켰다. 얼마 후 둘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는데, 이 아이를 병이 든 목종의 후사로 잇기 위해, 즉위에 걸림돌이 되던 대량원군 순(훗날 현종)을 죽이고자 하나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결국, 강조의 변으로 김치양은 목숨을 잃고 동시에 목종이 폐위되며, 대량원군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현종이다. 태후는 변란 직후 유배 되었다가 곧 풀려났고, 황주에서 살다가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묘는 유릉(幽陵).

참고로, 부군(夫君)인 경종과는 사촌지간이 된다. (대종은 광종의 이복동생이며 대목왕후의 친동기임)

가족관계

  • 아버지: 대종(戴宗, ?~969)
  • 어머니: 선의태후 유씨(宣義太后 柳氏)
    • 오빠: 고려 제 6대 왕 성종(成宗, 960~997)
    • 여동생: 현종의 모후 헌정왕후(獻貞王后)
      • 조카: 제 8대 왕 현종(顯宗)
  • 남편: 고려 제 5대 왕 경종(景宗, 955~981)
    • 맏아들: 고려 제 7대 왕 목종(穆宗, 980~1009)
  • 정부(情夫): 김치양(金致陽)
    • 둘째 아들: ?

  

천추태후는 고려의 잔다르크인가? 팜므파탈인가?

대(大)고려를 꿈꾼 희대의 여걸, 천추태후
 
고려 제 7대 왕 목종의 어머니로 12년 동안 섭 정했던 왕건의 손녀 천추태후. 자주와 사대,
전 통과 화풍(華風)이란 갈림길에 서 1000년 전 그 녀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2008년 11월. KBS 대하드라마로 만나보는 천추태후.
역사 속에 숨겨진 그녀의 진실을 <한국 사 傳>에서 먼저 만나본다.
 
 
불륜녀로 낙인찍힌 헌애왕후,
    여성정치가 천추태후로 부활하다!
 
막강한 지방 호족 세력의 후손인 헌애왕후 황보씨 는 고려 5대 왕 경종의 셋째비가 되었으나,
18세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다. 이후 헌애왕후는 외척이 었던 김치양과 가까워지고,
서로 정을 통한다. 당시 고려사회는 조선과 달리 여성의 지위와 권리 가 보장되고
여성의 성이 억압되지 않은 사회였다.
그러나 유교에 심취했던 성종은 자신의 여동생인 헌애왕후에게 유교식 수절을 강요하고
김치양 마저 유배 보낸다.
997년 성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고, 헌애왕후 의 아들이 목종으로 즉위.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천추태후의 시대가 시작된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어머니에게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라는 존호를 올렸다.
태후가 섭정하고 천추전에 거처하였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천추태후라 불렀다.
<고려사>
▲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함께 발원한 "대보적경 변상도"

자주와 사대, 갈림길에 선 고려 - 천추태후의 선택.
 
고려의 6대왕 성종. 그는 유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는다.
이 과정에서 고려 전통을 폐지하고 중국식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내부적으로 황제국을 지향한 고려의 위상을 스스로
제후국으로 낮추는 결과를 가져온다.
천추태후는 성종 대 외면당했던 고려의 전통을 부활 시킨다. 또한 태조 왕건의
대고구려주의를 계승하여 북진정책의 전초지였던 서경(평양)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친다. 천추태후는 이를 위해 당시 조정의 유학자들 대신, 김치양을 위시한 예성강
이북 패서 호족들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는다. 
 
 

 
천추태후, 실리 외교로 고려의 평화를 만들다
 
유교 이념을 받아들이면서 사대관계를 맺은 송나라와만 외교한 성종.
결국 993년 고려는 거란의 1차 침입을 받는다.
하지만 천추태후는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 속에 서 명분보다는 실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외교정 책을 추진. 송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당 시 신흥강국으로 떠오르던
거란과 외교관계를 시작해 북방을 안정시키고자 한다.
천추태후의 현실적 실리 외교는 효과를 발휘해, 태후의 섭정기간 동안 단 한 번의
외세침략이 없 는 시대를 맞이한다.
 
유학세력과의 갈등 - 기록되지 않은 천추태후의 꿈
 
천추태후의 전통부활과 친거란 정책은 명분을 중시했던 조정의 유학세력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정책이었다. 천추태후와 유학세력 간의 갈등은 점점 증폭되어 갔다.
목종 12년. 천추태후가 거처하던 천추궁에 화재가 발생한다.
이 사건 직후 국경에 최정예 부대를 이끌던 강조가 5000군사를 이끌고 궁으 로 입성.
목종을 폐위시키고 유학자들이 지지 를 받던 대량원군을 옹립한다.
아들 목종과 함께 궁 밖으로 쫓겨난 천추태후는 고향인 황주에 내려가 21년을
더 살다가 6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유학세력과의 갈등 속에 불륜한 여자, 권력욕에 눈 먼 악랄한 왕후로 기록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천추태후. 그녀는 진정 불륜과 권력욕의 화신이었을까?
아니면 할아버지 왕건의 고구려 계승을 꿈꾸던 고려 최고의 여걸이었을까?
 
 
"천추태후의 생애"
 
헌애왕후(獻哀王后, 964년~1029년)는 고려의 5대 왕 경종(景宗)의 세번째
왕비(王妃)이다. 7대 왕 목종(穆宗)의 모후로, 태조의 아들인 대종과 선의태후에서
출생하였다. 시호로는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라 하며
흔히 천추태후(千秋太后)라고도 한다.

 
태조의 아들인 추존왕 대종(戴宗)의 딸로, 목종(穆宗)의 어머니이며, 성종(成宗)의 누이동생
이고, 현종의 모후 헌정왕후(獻貞王后)의 언니이다. 헌애·헌정왕후는 부모의 성인 왕씨(王氏)나 유씨(柳氏)가 아니라, 할머니인 태조비 신정왕태후 황보씨(神靜王后 皇甫氏)의 성을 따른다.
981년에 경종이 죽자 아직 2살이던 헌애왕후의 아들 대신 왕후의 오빠인 성종이 즉위하게 되고, 헌애왕후는 태후가 되어 천추궁(千秋宮)에 머물렀다. 성종이 죽은 후 아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여 스스로 천추궁에서 사는 자신을 가리켜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부르게
하였다. 한편 그녀는 경종이 죽은 후 외가의 친척인 김치양(金致陽)을 만나 통정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공공연히 알려져 궁궐에 분란을 일으키자 왕후의 오빠 성종은 김치양을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천추태후는 섭정을 시작하자, 김치양을 다시 불러 우복야 겸 삼사사에 임명시키고
막대한 권력을 주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태후와 김치양은 둘 사이에서 아이가 출생하자,
이 아들로 하여금 병이 든 목종의 후사를 잇고자 했다. 이를 위해 즉위에 걸림돌이 되던
왕순(후일의 현종)을 죽이고자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결국, '강조의 변'이 일어나 김치양은 목숨을 잃었고, 태후는 유배를 갔으며, 목종은 폐위
되어 유폐지로 향하는 도중 강조의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한편, 강조 등은
대량원군을 왕위에 추대하였는데 이 사람이 바로 현종이다. 태후는 유배에서 풀려났고
황주에서 살다가, 현종 20년 정월에 왕궁으로 돌아와 66세를 일기로 숭덕궁에서 생을 마감했다. 묘는 유릉(幽陵). 참고로, 부왕(夫王)인 경종과는 사촌지간이 된다.
출처 ; 위키백과
 
 
 


 
천추태후는 고려의 잔다르크인가? 팜므파탈인가?
 
 
천추태후 : 근친혼의 고려 역사

 

천추태후를 알기 위해서는 고려 태조 왕건에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일단 고려 초기 계보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전국을 다스리기 위해 지방 호족 세력들과 무차별적으로 정략 결혼을 하게 됩니다. 정실 부인이 무려 29명이나 됩니다. 그 자손대에서 혜종-정종-광종이 왕위를 받게 되고 손자대에서 경종-성종-현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일당 여기까지 대략적인 것만 머리에 넣으시고 다음은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아래 그림은 왕후별로 자손들 계보를 정리한 것입니다.
 

자손이 없는 왕후들도 많고 타살된 왕자들도 많이 보입니다.
자세히 보면 중복된 왕후의 이름들이 많이 보이지요?
고려 초기에는 신라의 근친혼을 따라서 왕족간 (이복 형제간)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는 왕족의 혈통을 유지하고 외척의 정권 탐욕을 방지하여 왕실을 튼실히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입니다.

그럼 근친혼이 어느 정도였는지, 어떤 식으로 혼인이 이뤄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혜종-정종은 호족 세력과 결혼을 했고 광종때부터는 왕족만을 왕후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후 효종때부터는 그 양상이 줄어들게 됩니다.
이제 전반적인 고려 초기 왕들의 계보나 혼인 체계 같은 거시적인 그림이 정리된 것으로 보고
왕조별로 세부적인 상황을 파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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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조 (왕건, 25년)
 
왕건은 전국의 호족들을 다스리기 위해 호족의 딸들과 결혼을 많이 해서 부인들이 29명이나 됩니다.
 
 
(1) 신혜왕후 : 정주 출신 호족 유천궁의 딸로, 태조가 궁예의 휘하 장군으로 있을때 아내로 맞았다.
                     궁예 말년에 정사가 포악해지자 홍유, 배현경 등이 왕건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자
                     였으나 왕건이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 때 신혜왕후가 나와 "의로써 탐학을 물리치는 것은 예로부터 해온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군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녀자도 분발하겠거늘 하물며 대장부께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갑옷을 입혀 의거에 참여하도록 권하였다.
(2) 장화왕후 : 궁예의 부장으로 나주에 출전했을때 오씨와 혼인하였고 왕건이 즉위후 왕후가 되었다.
(3) 신명순성왕후 : 태사 내사령에 추증된 추우 유긍달의 딸이다. 고려 창건 직후에 왕비로 맞았고
                     충주는 후백제와 신라를 연결하는 교통상의 요충지이며 신라 귀족이 많이 사는
                     신라 5소경의 하나이다.
(4) 신정왕후 : 태조 즉위후 두번째 왕비로 황주는 신라시대 패강진 지역에 속하며 신라 국경수비의
                     육군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다. 요충지 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음으로써 자신의
                     지원세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선의왕후가 25세에 죽자 성종을 길렀다.         
(5) 신성왕후 : 경주 김씨로 잡간이었던 김억렴의 딸이다.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는 신라왕실과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6) 정덕왕후 : 정주 유씨로 시중 정덕영의 딸이다. 신혜왕후에게서 소생이 없자 같은 집안의 딸을
                     다시 맞아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 헌목대부인 : 7번째 부인, 경주 출신으로 좌윤 평준의 딸이다. 수명태자의 어머니고 흥덕원군의
                     할머니이다. 태조의 여러 후비들 중 유일하게 대부인 칭호를 가지고 있다.
                     평씨 성은 신라 육두품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신분적 위치는 높지 않았다.
 

2. 혜종 (왕무, 2년)
 
태조가 나주를 정벌할 때 지역 호족 딸인 오씨와 혼인하였으나 나주의 권력 기반이 약해 혜종은 왕위쟁탈전에 휘말리게 됩니다.
태조의 장남으로 박술희가 도와 태자가 되었고 태조 사후에 왕이 되었으나 이복동생 왕요, 왕소가 충주 지역 세력을 등에 없고 왕위에 도전합니다.
왕규(태조와 사돈지간)가 이를 혜종에게 알렸으나 힘이 약한 혜종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왕규는 왕을 제거하고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이런 스트레스 때문인지 재위 2년만에 병에 걸려 죽게 된다.
이어 이복동생 왕요가 군신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고 하니 혜종이 병으로 죽었는지도 확실하지만은 않다. 
 
 
(1) 의화왕후 : 진주 임씨로, 병부령 대광 임희의 딸이다. 태조가 태자비로 선택한 데는 진천의 지역적
                     위치와 임희가 장악하고 있는 막강한 군사실력자로서의 위치 때문이었다. 흥화군은
                     광종 때 역모죄로 참사당하였고, 경화군부인은 광종의 제2비로 들어간다. 이는 당시
                     혜종의 외가 세력이 약했으므로 충주 호족 세력의 역모를 잠재우기 위한 고육지책
                     이었을 것이다.
(2) 후광주원부인 :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대광 왕규의 딸이다. 왕규는 태조와도 혼인관계에 있는데
                     왕규의 학문적 능력과 군사적 지원으로 혜종의 왕위가 안정되기를 기대하였다.
                     혜종이 즉위한 뒤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위로 추대하기 위하여 혜종과
                     대립적인 위치에 서게 되고 혜종이 죽은뒤 정종과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반역을
                     꾀하였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왕규와 일당 수백명이 같이 죽임을 당하였는데
                     후광주원부인이 무사하였을지 의문이다. 살았더라도 왕비의 자리에서 밀려났을
                     것이다.
(3) 청주원부인 : 청주 김금률의 딸로 청주남원부인 (정종의 부인)과 자매지간이다. 청주는 신라 5소경
                     중 서원경이 있던 곳으로 독자적 지방세력이 구축되었던 곳이다. 고려 건국 직후부터
                     반란이 여러차례 시도되었을 정도로 반고려적 성향을 띄었고 태조가 민심수습의 노력
                     결과로 혼인이 성사되었다. 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처제를 정종과 혼인시켜
                     왕위계승 경쟁을 무마시키고자 하였다.
 
 
3. 정종 (왕요, 4년)
 
이복동생 왕요가 혜종의 측근 박술희를 제거하고 혜종이 즉위 2년만에 병사(독살?)하자
군신들의 추대로 재위에 오르게 되고 왕식렴(왕건의 사촌동생)의 도움으로 외척 왕규를 제거합니다.
정종의 어머니는 충주 호족 유긍달의 딸로 가장 많은 자식을 낳았다.
딸인 낙랑공주는 신라 경순왕의 부인으로 들여 신라 세력을 어울렀다.
 

(1) 문공왕후 :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 (언니)로 후백제 호족에 대한 배려 차원인 듯 하다.
                     박영규의 3자매는 모두 고려 왕실과 혼인하였는데 첫째는 태조의 17비이다.
(2) 문성왕후 :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 (동생)로 경춘원군은 광종 때 역모죄로 참사되었다.
                     성명 미상의 공주는 태조의 아들인 효성태자와 혼인하였으나 후사가 없었다.
(3) 청주남원부인 : 혜종의 제3비인 청주원부인의 친동생이다
 

4. 광종 (왕소, 26년)
 
정종이 재위 4년만에 병석에 누워 사망하자 정종의 선위를 받아 동복동생인 광종이 25세 나이로 득위한다.
왕권강화를 위해 무고한 살육이 많았다 (박승위, 김긍률과, 박영규, 효은태자, 흥화군, 경춘원군).
노비안검법 제정으로 노비를 해방하였다 (호족세력 약화, 세금 늘림).
과거제도 시행 (쌍기)으로 인재 등용하였다.
권신·부호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근친결혼을 장려하고 외척의 폐를 없애려 했다.
 
 
(1) 대목왕후 : 신정왕후의 딸로 광종의 사촌동생이다. 고려시대 첫 근친혼이다. 광종이 노비안검법을
                     실시하려 하자 노비들이 그 주인을 배반하는 풍조가 성행하였으므로 이 법의 실시를
                     중지하도록 건의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종의 어머니이고 천추공주는 문원대왕
                     과 문혜왕후의 아들인 천추전군과 혼인하였다. 문혜왕후는 태조의 6번째 왕후인
                     정덕왕후 유씨의 딸로서 신혜왕후 슬하에 자식이 없자 동일한 호족인 정주에서 혼인한
                     여인이다.
                     문덕왕후는 수명태자의 아내가 되어 선정왕후를 출산하게 되나 수명태자가 죽게 되자
                     성종의 재가하게 된다. 이후 선정왕후는 목종의 왕비가 된다.
(2) 경화군부인 : 혜종 집권 당시 왕규가 정종과 광종이 반역 혐의가 있다고 참소하자 혜종은 아우에
                     대한 신뢰의 표시 및 동생들의 실력을 강화시켜주기 위한 조취로 자신의 딸을 광종에게
                     출가시켰다. 반대로, 왕족내혼을 통해 왕실에서 입지가 확고하게 된 동생 광종에게
                     자신의 딸을 출가시킴으로써 혜종 자신의 신변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빈약한 혜종의 왕권이었기 때문에 경화군부인은 왕의 공주였지만 왕후가 아닌 부인에
                     머무른 것이 아닌가 한다.
 
 
5. 경종 (왕유, 6년)
 
광종의 무고한 살육의 원한을 풀어주고자 경종은 복수법을 시행해서 복수를 허용하게 되는데,
이때 왕족인 원녕태자, 효성태자까지 복수를 당해 사망하는 일이 생기게 되자 복수법을 금지하게 된다.
관리의 봉급제도인 전시과(토지의 차등분배)를 제정하였고, 후반에는 방탕한 생활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성종의 동생인 헌애왕후(천추태후), 헌정왕후를 왕비로 맞아 들인다.
재위 6년만에 병석에 누워 성종에게 양위하고 사망하였다.
 

(1) 헌숙왕후 : 경순왕의 딸로 태조의 외손녀일 가능성이 크다 (낙랑공주?).
(2) 헌의왕후 : 문원대왕의 딸. 근친간의 혈족혼을 통해 왕실의 순수 혈통을 유지함으로써
귀족과 다른
  초월적 존재임을 과시하고 왕실내의 단결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신라시대 왕실의 
 혼인제도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계가 같더라도 모계만 다르면 생활권을 달리하는 방처혼적(訪妻婚的)인 가족구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왕실과의 동성을 
 피하기 위해 할머니의 유씨 성을 칭하였다.

(3) 헌애왕후(천추태후) :
성종의 누이 동생으로 목종의 어머니이다. 경종이 죽자 2살인 목종 대신에 왕후의 오빠인 성종이 즉위하게 되고 헌애왕후는 태후가 되어 천추궁에서 머무른다. 아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자신을 천추태후라 부르게 하였다.

경종이 죽은후 외가 친척인 김치양을 만나 통정하게 되어 분란을 일으키자 성종은 김치양을
귀양보냈다. 천추태후가 섭정하게 되면서 김치양을 다시 불렀고 아이가 생기자 병든 목종을
대신해서 목종의 후사를 잇고자 했다. 이 즉위에 걸림돌이던 현종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한다.
결국 강조의 변이 일어나 김치양은 죽게 되고 태후는 유배를 갔으며 목종은 폐위되어 유폐지로 가는 도중 강조의 부하들에게 암살당한다. 강조는 현종을 왕으로 추대하고 태후는 유배에서
풀려나 66세에 사망했다.

(4) 헌정왕후 : 성종의 누이동생이자 헌애왕후의 친동생.
 
 
6. 성종 (왕치, 16년)
 
성종은 22세로 득위하였고 (이 때 목종은 2살이었고 경종의 사위라는 장점도 있음),
숭유억불 정책, 문물제도 정비.

중앙집권적 봉건제도 확립 (유교) - 최승로 시무 28조, 지방제도 정비를 통해 고려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거란을 물리쳐 강동6주 (서희)를 획득함.  
병이 위독하여 조카인 개령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성종의 할머니는 신정왕후 황보씨로 황주 출신 호족이며 어머니는 선의태후이다.
 
 
(1) 문덕왕후 : 광종의 딸로 경종의 여동생이다. 처음에는 수명태자와 혼인하여 선정왕후를 출산
                     하였으나 수명태자가 일찍 죽자 성종에게 재가한다. 선정왕후는 이후 목종의 아내가  된다. 성종은 광종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2) 문화왕후 : 선산 출신으로 신라 호족인 김원숭의 딸. 광종 이후에 족내혼을 하지 않은
첫 사례이나
어머니가 왕씨인 것으로 보아 왕실 외손일 가능성도 있다.

7. 목종 (왕송, 12년)
 
성종의 병세가 깊어지게 되어 성종의 선위로 목종이 18세의 나이로 득위하게 된다.
전시과를 개선하고 학문을 장려하였으나 자식이 없었고, 어머니인 헌애왕후(천추태후)가 섭정하게 되는데,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과 간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으로 삼기 위해 대량원군(현종)을 승려로 만든 뒤 죽이려고 하였다.
목종이 이를 막고자 강조에게 대량원군의 호위를 명했으나 오히려 강조에게 폐위되어
유배 도중 살해되었다.

강조는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당을 숙청하고 대량원군(현종)을 추대하였다.
 

(1) 선정왕후 : 수명태자와 문덕왕후 사이에서 출생하였고 수명태자 사망 후 문덕왕후가 성종에게
                     재가하였기 때문에 성종의 딸로서 자랐다.
                     목종은 성종의 사위의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8. 현종 (왕순, 22년)
 
천추태후의 자객에도 여러차례 살아남은 현종은 강조의 옹립으로 18세에 등극하는데,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강감찬-귀주대첩).
현종의 할머니는 신성왕후 김씨로 경순왕의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로 경순왕 사촌누이이다.
현종의 어머니는 헌정왕후로 성종과 천추태후의 동생이다.
경종의 왕후였으나 경종이 사망한 뒤 사가에 나가 홀로 지내다가 삼촌인 안종을 만나 정을 통해 임신하게 된다.
이 일로 성종은 안종을 유배보냈고, 헌정왕후는 현종을 출산하고 산고로 사망하였다.
 

(1) 원정왕후 : 성종의 딸로 문화왕후 성을 따라 김씨로 하였다. 1010년 거란이 침입하자 임신한 몸이라
                     외가가 있는 선산으로 피했고 왕은 나주로 피난했다.
(2) 원화왕후 : 성종의 딸로 낙랑군대부인 성을 따라 최씨로 하였다. 거란 침입시 나주로 피난하였다.
(3) 원성태후 : 안산 김씨로 시중을 지낸 김은부의 딸이다. 현종이 나주로 피난하였다가 귀환하던 중
                     공주에 묵게 되고 원성태후가 어의를 지어 드리고 편안히 모시었다. 김은부의 세자매가
                     (원혜태후, 원평왕후) 모두 왕비가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며 광종 때 왕실족내혼이
                     이루어진 이래 새로운 양상이다.
(4) 원혜태후 : 김은부의 딸로 이것은 왕실내에서만 이루어지던 혼인이 귀족가문으로 확대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아들 문종은 11대왕이 되고 그 뒤 고려 왕통은 문종의 후손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5) 원용왕후 : 태조의 친손자인 경장태자의 딸로 할머니 선의왕후를 따라 유씨라 하였다.
                     경장태자는 현종의 생모인 헌정왕후와는 남매간이다.
(6) 원목왕후 : 993년 거란이 침입하였을 때 이를 담판으로 물리친 서희의 손녀이며 내시령이었던
                     서눌의 딸이다. 현종은 태조 이래 가장 많은 13인의 비빈을 두었고 그 중에는
                     귀족가문의 타성도 다수 있었다. 광종 이래 새로운 혼인관계로 귀족과의 연결을 통하여
                      왕실의 고립을 막고 많은 자녀를 두어 왕족을 번성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7) 원평왕후 : 김은부의 딸
(8) 원순숙비 김씨 : 김인위의 딸로 덕종의 1비가 된 경성왕후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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