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 사 방/역사 고려시대

명문가 종친회를 찾아가다 --- 개성왕씨

by 연송 김환수 2008. 2. 16.
고려왕조의 위업 재평가 새 의미로 복원돼야

고려왕조의 위업 재평가 새 의미로 복원돼야

 

이성계의 조선개국으로 ‘멸족 참변’
田·玉·車·씨 등으로 변성하고 피신
대부분 개성王씨 환성하지 않고 玉씨만 환성

 

본지는 숭조(崇祖), 경로효친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기획 특집 면을 마련했습니다. 이 지면은 해당 성씨·본관 대종회의 요청 순서에 따라 기획·취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본관 시조와 유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재음미하고 그 성립과 발전, 인물배출 등에 대해 살펴보는 본 지면을 활용하여 각 성·본 대종회 및 종친회의 단합과 교육, 홍보효과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글·박병로 국장

 

왕씨는 천강성(天降姓), 즉 하늘에서 시조가 내려온 성씨가 아니다. 그래서 그 시조가 불분명하다. 보통 개성 일대에서 왕씨 성을 사용하며 대대로 살아왔으며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면서 왕씨 성을 개창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개성왕씨는 왕건의 4대조를 시조로 삼고 있다. 다만 개성왕씨 세대를 헤아릴 때는 태조 왕건을 1세로 간주하고 있다.


어떻게 된 까닭일까. 태조 왕건이 제왕(帝王)이기 때문이다. 즉 황제는 하늘과 같이 지엄·지고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자식이 함부로 아버지(보통의 인간)라 칭할 수 없는 이치와 같이 후손이 함부로 그를 시조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개성왕씨 파조들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개성왕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동양군파 파조인 효은태자 왕 원(王垣)은 태조의 15번째 아들로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시중공파의 파조인 시중공 왕 제(王濟)도 태조로부터 16세손인 충정왕의 맏아들로 역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인물이다.

 

안경공파의 안경공 왕 창도 10세손 고종의 둘째아들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양양공파의 왕 서(王恕)도 8세 신종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평양공파 평양공 왕 기(王基)는 3세손인 현종의 넷째 아들로 역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익히 알려진 대로 고려태조는 결혼정책으로 지방 호족들과 연대감을 유지하며 중앙집권적 권력 기반을 다졌다. 부인이 29명이었고, 성원록에 이름이 오른 아들이 모두 20명에 이른다. 이 20명의 아들들로부터 고려 왕조 476년 동안 왕씨 후손이 생산됐다면 그 인구가 얼마나 불어났을 지 짐작할만하다.

 

무신정권이 들어서는 과정에서의 격변과 원나라의 내정간섭 과정에서 권력의 부침이 있었다 해도 전체 개성왕씨는 모르긴 해도 고려말엽에 이르러 대성받이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개국과 함께 멸족의 참변을 당했다. 왕손인 왕씨가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다면 고려조 복위를 기도할 수 있으므로 후환을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왕씨들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는 이조실록 등에서 단편적으로만 찾아볼 수 있다.

 

이조실록, 국조보감, 문헌비고 등에 의하면 문종 때에 고려 태조를 위시한 몇몇의 고려조의 왕들을 제사지내지 못함을 가엾이 여겨 숭의전을 지어주고 멸족한 왕씨를 수소문하여 배향하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덕적으로 아름답지 않은 일로 여겼던지 정사에는 왕씨 멸족의 방법이나 경위가 상세하게 기록돼 있지 않다.


그런데 추강 남효온이 남긴 글에 상당히 구체적으로 왕씨의 몰살당한 이야기가 있다. 남효온에 의하면 조선조정은 왕씨들을 강화도와 거제도에서 서인으로 살게 해주겠다고 속여서 배에 태워 바다로 내보내 배를 가라앉혀 수장시켰다고 한다. ‘물재주’가 뛰어난 뱃사공들이 배에 구멍을 뚫어 침몰시키고 돌아오게 했다는 것이다.

 

침몰하는 배에서 용케 헤엄쳐 나온 왕씨들이 있었으나 뭍에서 기다리는 관군에 붙잡혀 역시 무참하게 살해됐다고 한다. ‘추강냉화’ 별지에도 “조선조 태조 3년 갑술 여름에 모든 왕씨를 바다 가운데 잠궈 죽이고 밖으로 명령하여 크게 왕씨의 남은 겨레를 찾아서 다 죽이다”라고 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살아남은 왕씨도 물론 있었다. 전국에 방이 나붙었으나 은둔하여 보지 못한 사람이 있고, 조선 조정의 왕씨 멸족 계획을 눈치 채고 피신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살아남은 왕씨들은 이때부터 변성명을 하며 근근이 목숨을 부지했다.

 

이때 왕씨들이 변성명한 이야기는 ‘일토초가자(一土草家者)가 왕이 된다’는 기자조선시대의 고사(古事)와 중첩된다. 田씨, 全씨, 玉씨, 車씨, 申씨 등으로 임금왕자를 숨기거나 아예 다른 성씨를 사용하며 살아남았다. 왕제구 개성왕씨중앙종친회 사무국장은 “그런 설이 있다. 하지만 다 그렇다는 확신은 없다”고 한다.


그러다 문종 때 이르러 왕씨 멸족령은 해제됐다. 왕씨가 다 죽고 없어 고려태조왕을 비롯하여 전왕조의 여러 왕들을 받들어 제사지내지 못하는 것이 결국 아버지 세종대왕과 할아버지태종대왕의 위대한 업적과 높은 도덕성에 오점이 된다고 보고 숭의전을 지어 제사를 모시게 했던 것이다.

 

 

 

                                        개성에 자리한 고려태조 왕건의 무덤.


이렇게 해서 숨어 살던 왕씨가 세상에 나오게 되는데, 맨 처음 햇빛을 받은 이가 현재의 개성왕씨 대종을 이루고 있는 동양군파 중조가 되는 왕 미이다. 충주에서 외가의 성인 민씨로 살고 있던 왕 미가 밭의 경계를 다투던 중 이웃사람의 고변으로 관아에 붙잡혔으나 그때 이미 ‘방면하여 편히 살게 하라’는 명이 내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발견된 당시 왕 미는 49세였고, 나중에 조정의 서책을 담당하는 교서감의 지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 사실을 전하는 옛문헌들(‘개성왕씨세보’와 ‘숭의전사’에 관련 부분이 발췌돼 있다)에 의하면 공주에서 왕순례라는 사람이 발견돼 숭의전 부사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손이 끊겨 후일 숭의전 전감의 신분이 천첩의 소생이냐 아니냐로 의견이 분분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렇게 왕 미 대부터 개성을 본관으로 삼은 고려왕조의 성, 개성왕씨가 명맥을 잇게 됐다. 국조보감 등에 의하면 멸족령을 내린 조선왕조가 숭의전 제사를 위해 노비와 전답을 하사하고, 마전현을 군(郡)으로 승격시켜 주기도 했다.


국조보감, 이조실록 등 문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왕씨들이 그 뒤 승승장구한 것 같지는 않다. 훗날 세조는 이렇게 살아남은 왕씨 후손을 세자의 생일잔치에 불러서 전왕조의 후손이니 자신의 신하가 아니라 손님이라면서 극진히 대접하기도 했으나 세조 이하 역대 조선왕조에서 개성왕씨가 크게 중용되지는 않았다. 인구수가 절대 부족했거니와 전왕조의 성씨라는 이유로 경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왕씨 성을 사용하며 살아갈 수 있었음에도 왕씨멸족령이 내려질 당시 변성명하며 목숨을 부지한 대부분의 개성왕씨 후손들이 끝내 왕씨로 환성하지 않았다. 왕제구 사무국장은 1918년에 발행된 무오보에 옥(玉)씨 성을 쓰던 일파가 환성한 것이 유일하다고 했다.

 


 

세계사에 ‘고려’ 등장시킨 위대한 왕조


고려청자·금속활자 등 서양에 전파
정재계·학계·예술·방송계 등 포진

 

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이지만 세계에서 통용되는 국호는 고려(KOREA, COREA)다. 일설에 고구려도 ‘구리’, ‘고려’ 등으로 불렸다고 하지만 한반도 배달겨례가 세계무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은 고려 왕조 때다. 고려청자, 팔만대장경, 제지술, 금속활자 등 찬란한 우리 문화상품을 서방에 전한 것도 하고 고려 왕조 때였다.


따라서 왕씨의 위대한 인물로 태조 왕건을 비롯하여 숭의전에 배향하는 역대 왕들을 꼽을 수 있다.

 


태조 왕건은 KBS드라마에서 자세하게 묘사한 바와 같이 나면서부터 영걸의 자질을 갖고 태어났다. 도선국사가 큰 인물이 날 것으로 예언했고, 예언 그대로 궁예의 휘하에서 승승장구, 시중의 지위에 올르고 마침내는 포악한 궁예를 내쫓은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고려를 개국했다.


고려왕조는 부침을 거듭했다. 무신들이 권력을 찬탈하여 곤경에 처하기도 하고, 원나라가 침입하여 오랫동안 내정간섭의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23대 고종은 원나라의 침공에 맞서서 7번을 물리치며 결사 항전하는 영웅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당시 원나라가 중동을 거쳐 터키, 나아가 유럽까지 진출한 가공할 무력의 군세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고종의 항전은 실로 위대했다고 할 수 있다.


개성왕씨 전통에 따라 역대 왕들을 제외한 왕씨 인물을 살펴보면, 고려조는 물론이고 조선조에도 인구에 회자된 인물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것은 조선조 문헌 기록자들이 왕씨를 깎아내렸을 가능성이 있고, 고려조의 인물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 묻혔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한국 성씨총연합회에서 펴낸 ‘성씨총감’에 수록된 왕씨 역대인물은 다음과 같다.

 

■ 고려 : 동양군 왕 원, 한림학사 왕 융, 상서우복야 왕동영, 태자첨사, 호부상서 왕이보, 태자첨사 왕 유, 상서령 왕 기,중서령 왕충지, 판상서병부사 왕무숭, 중서시랑평장사 왕 석, 판도병마사 왕국모, 판삼사사 왕 가, 판호부사 왕자지, 태부소경 왕상필, 문하시중 왕 충, 덕양후 왕 식, 간의 왕세경, 내시낭중 왕준명, 동경유수 왕 해, 호부상서 왕중선, 보승낭장 왕 열, 시중 왕 제, 찬성사 왕유소, 중랑장 왕 석, 첨의평리 왕 자, 동지밀직사사 왕중귀, 양광전라경상도원수 왕복명, 순안군 왕방


■ 조선 : 교서감 왕 미, 왕 흥, 왕강, 왕안덕, 왕 화, 왕승귀, 왕승보, 계림부윤 왕 보, 의금부도사 왕방연, 홍문관부제학 왕희결, 좌승지(추증)왕의성, 왕 태 등이 있다.


■ 근현대 : 근현대의 왕씨 인물은 지면관계상 생락한다. 현재 개성왕씨 중앙종친회장 왕상은 범주해운 회장이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경제계에 동원수산 왕윤국 회장 등이 있고 학계, 예술계, 방송계 등에 다수의 왕씨가 포진하고 있다. 참고로 최근 국가대표유도선수로 개성왕씨가 발탁되기도 했다.

 


 

개성왕씨 세거지의 변천

 

12대손 왕 미 경기 시흥시 군자동에 거주
15세손 종인 등 5형제 서초동에 둥지


왕씨 세거지 변천 경로는 비교적 단순하다. 12세손 왕미가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에 거주했으며, 그 손자가 되는 15세손 종인, 종의, 종례, 종지, 종신 등의 5형제 때에는 지금의 서초동(예전의 과천)에 거주했다.

 

이들 5형제, 즉 ‘인·의·예·지·신’ 다섯 형제의 후손대부터 태인, 정읍, 남원, 천변, 문척, 인관 하동, 양주,과천, 인천, 후인, 남양, 장단, 양주, 산청, 예산, 상주, 예천, 의령, 울산, 거창 함열(무순) 등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번연하여 개성왕씨의 대종을 이루게 됐다.


또 숫자는 적지만 여러 지파 후손들이 전국에 산재하고 있다. 13세손인 왕효충의 후손들은 개성에서 많이 살았으며 강동, 신천, 장단, 덕천 춘천, 이천(伊川)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뤘다. 양양공파의 후손은 개성해주에 세거했으며 평양공파의 후손은 논산, 은진, 김제, 익산 여산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며 이어지고 있다.


2000년 인구주택 총 조사에 의하면 현재 개성왕씨는 총 6,148가구 19,808명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농현상으로 인구수가 많지 않은 전북 지역에 왕씨가 다수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경남지역에도 다른 도 단위에 비해 인구수가 월등히 많다.

 

이들 지역은 서울의 5179명 경기 4811명 부산 1706명에 이어 4위 5위를 차지하고 있다. 광주전남이 900여명에 불과하고, 대구·울산·경북을 합해야 겨우 1000여명이다.

 


 

숭의전과 숭의전보전회


숭의전은 고려 태조묘를 봉안한 전각으로 조선 문종 때에 명명됐다. 세종 때까지 고려태조묘로 있던 것을 문종 2년 속육전에 따라 ‘숭의전’으로 한 것이다.

 

숭의전에 배향하는 위패 현황

정전에 배향하는 4왕
고려태조신성대왕, 현종원문대왕, 문종인효대왕, 원종순효대왕

 

배신청에 배향하는 16공신(본관)
복지겸(면천), 홍 유(의성), 신숭겸(평산), 유금필(평산), 배현경(경주), 서 희(이천), 강감찬(금천), 윤 관(파평), 김부식(경주), 김취려(언양), 조 충(횡성), 김방경(안동), 안 우(탐진), 이방실(함안), 김득배(상산), 정몽주(연일)

 

개성왕씨 제사일
연천 숭의전:태조, 현종, 문종, 원종(9월 3일, 3월3일) / 강화도 고종릉:9월 9일 / 고양 공양왕릉:10월 24일 / 마포 공민왕 사당:10월 23일

 


 

■ 인터뷰 - 개성왕씨 중앙종친회 왕상은 회장

 

숭의전 제향 등 포용하는 리더십으로 수행


서로 화합하는 친목 유지하는게 큰 힘
王회장 25년간 사비털어 비용 충당

 


개성왕씨 중앙종친회 왕상은 회장은 개성왕씨 동양군파 후손으로 1920년에 출생하여 어린시절을 부산에서 보냈다. 일본 동지사대학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1952년에 협성해운 사장으로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 해운업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왔으며 90세를 바라보는 현재 범주해운 회장으로 경영일선을 지키고 있다.

 

국제상공회의소위원, 대한적십자사 중앙상임위원, 제11대, 12대 국회의원, 민정당중앙위원회 의장, 헌정회 11대국회의원회장, 부산영사단 단장,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선수촌 촌장 등 사회에 봉사하는 직책을 두루 역임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왕상은 개성왕씨 중앙종친회장을 범주해운 사옥 10층 접견실에서 왕제구 사무국장이 배석한 가운데 만났다.

 

범주해운 사옥 접견실에는 개성왕씨 중앙종친회 왕제구 사무국장이 먼저 나와 있었다. 약속시간보다 20여분 앞서 도착하였으므로 개성왕씨 중앙종친회에서 왕상은 회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자연스럽게 물었다. 왕제구 사무국장은 1982년부터 지금까지 25년여를 왕상은 회장이 맡고 있다고 했다. 경제인이지만 왕 회장은 11대 국회의원선거를 통해 부산에서 국회의원이 된 정치인이기도 했다.


왕상은 회장 이전에 개성왕씨중앙종친회를 이끌었던 사람은 왕윤국 동원수산 회장이었다. 왕윤국 회장이 개성왕씨 중앙종친회를 궤도에 올려놓았다면, 왕상은 회장은 여러 분야에서 정치력을 발휘하며 고려왕조의 각종 유물, 문화재의 관리, 숭의전에서의 제사 봉향 등 굵직굵직한 사업들을 수행하는 데 제격이었다. 따라서 전임 회장이 닦아놓은 터전 위에 개성왕씨중앙종친회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각종 사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왕제구 사무국장은 왕상은 회장이 특히 포용력으로 모든 종친회 사람들을 화목하게 이끌고 있다고 했다. 반대파도 있고 집행부와 다른 의견을 내는 경우도 있지만 왕상은 회장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리더십을 발휘해 왔다고 한다.


시간이 돼 왕상은 회장이 도착하여 첫 질문으로 개성왕씨를 이끌어가는 중앙종친회장으로서의 철학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왕 회장은 “화목이다”라며 “이사나 지회장, 회원들이 반대하거나 주장하는 이야기가 있으면 다 들어줍니다”라고 했다. 숫자가 많지 않으니 서로 화합하고 친목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는 것이다.


왕제구 사무국장도 왕 회장이 지난 25년여 동안 중앙종친회가 수행하는 사업에 소요되는 비용을 사비로 충당하며 이끌어왔다고 한다.


왕상은 회장으로부터 직접 들어보자.

 

-중앙종친회장으로서 지방의 파종회 대표들과도 자주 만나는가? 총회나 임시회의나….


“숭의전 제사를 지내기 한달 전에 보통 모인다. 봄의 경우 3월 3일의 한달 전, 가을의 9월 3일 한달 전에 모여 경과보고, 제사 봉행에 대한 의논을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왕제구 사무국장은 한번 제사를 모실 때 500여만원 정도씩 들어가는데 그비용을 왕상은 회장이 사비로 충당하며 이끌고 있다고 한다. 숭의전 제사 봉향 때는 숭의전에 배향된 고려 16공신들의 후손들이 참례하기 때문에 무척 성대하게 치러진다는 것)

 

-종친회원들은 어디어디에서 오는가?


“이사회는 돈을 내는 이사도 있지만 내든 안 내든 우리는 모두 화목하게 만난다. 강원도 삼척에서도 오고, 구례 상주, 의령, 남원 등 전국에 흩어져 있는 왕씨들이 다 만난다. 협조도 잘해주고 애종심도 투철하다.”

 

-이분들과 함께 다른 행사를 하기도 하는가?


“해군에서 왕건함을 건조했을 때 우리 종친회원들과 함께 참관하고 둘러보았다. KBS에서 고려태조왕건을 드라마로 방영할 때 방송국에서 초청해 우리 종친들과 찾아가 격려하고 유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개성은 휴전선 이북에 있다. 고려 유물과 이북에 거주하는 왕씨 생각도 할만하다.


“한때는 족보도 그쪽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젠 옛말이다. 시대가 바뀌었다. 만월대를 비롯하여 고려왕릉을 관리하는 문제도 생각해봤지만 그것은 그때 가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다만 숭의전이 있는 연천이 개성과 가까우니 그것도 의미가 있다 하겠다.

(여기서 왕상은 회장은 연천과 개성 지역에 떡을 자잘하게 잘라내는 풍습이 있다고 소개하면서 이성계의 이씨들을 자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곧 개성왕씨의 중앙종친회 사업을 수행하면서 이재형 전 국회의장의 도움을 받았다고 웃었다.)

 

-숭의전도 그렇고 강화도 고종왕릉, 고양시의 공양왕릉도 지자체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지자체가 잘 되고 있어서 우리로서는 부담이 줄었다. 강화도 같은 경우 우리한테 말도 하지 않고 왕릉을 파헤쳐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으나 결국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제사를 봉행하는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왕씨 핍박이 이제 끝났다고 보는가?


“글세… 끝났다고 본다. 다만 나쁘건 좋건 지난 과거를 지워버리고 불태워버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끝으로 고려왕조의 위업이 소홀히 평가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 중앙종친회가 앞으로 바라는 것은 고려왕조의 위업에 대한 발굴과 재평가, 의미부여가 아닐까 싶은데….


“그렇다. 세계화를 이룬 고려왕조, 고려문화와 개성왕씨가 재조명되고 새로운 의미로 우리 사회에 복원됐으면 한다.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중앙종친회의 힘은 미약하다. 데모를 할 수도 없다. 청원서를 내거나 여론을 조성하기에는 인구 3만 명은 너무 적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좋은 사람들이 나타나 그렇게 해주기를 희망한다. 좋은 사회라면 그렇게 가야하지 않겠는가.

'역 사 방 > 역사 고려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조영과 왕건의 비밀  (0) 2008.10.09
황제국가 고려를 위하여 천추태후  (0) 2008.10.09
고려의 문화  (0) 2008.02.16
고려 문화재  (0) 2008.02.16
숭의전(태조,현종,문종 등), 고려사 세가  (0) 2008.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