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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벽루시(涵碧樓詩) - 정이오

by 연송 김환수 2025. 4. 4.

使君携客 凭江樓

樓上佳人 有莫愁

更喚玉仙 轟玉笛

公攀明月 付芳洲

鄭以吾

 

함벽루시(涵碧樓詩)

사군휴객(使君携客) 빙강루(凭江樓) : 사군이 손님과 함께 강루에 기댔으니

누상가인(樓上佳人) 유막수(有莫愁) : 함벽루 위의 미인들은 근심을 버려라

갱환옥선(更喚玉仙) 굉옥적(轟玉笛) : 선녀를 다시 불러 옥피리 불게하니

공반명월(公攀明月) 부방주(付芳洲) : 밝은 달을 함께 당겨 멋진(먹진) 강변에 부치리라

鄭以吾(정이오)

 

朝鮮王朝實錄-文定公 鄭以吾

〔조선왕조실록〕태종27권, 14년(1414갑오/명 영락(永樂)12년)6월11일(임자) 2번째기사

비 내리는 것을 점 친 전 예문관 대제학 정이오에게 쌀 20석을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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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오(鄭以吾, 1351년 ~ 1434년 8월 11일)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정을보(鄭乙輔)의 증손이자 정분(鄭苯)의 아버지이다.

 

생애

일찍이 스스로 과거를 보기 위해 항상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와 교유했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했으며, 1376년(우왕 2)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이듬해 삼사도사(三司都事), 공양왕(恭讓王)조에 공조정랑(工禮正郞), 예조정랑(禮曹正郞), 전교부령(典校副令)을 역임했다.

 

조선이 개국된 후인 1394년(태조 2) 지선주사(知善州事)로 나갔으며, 이때 야은 길재가 어렵게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어 밭을 주어 도와 주었다.(야은길재행장, 박서생 撰)

 

1398년(태조 7) 봉상시소경(奉常寺少卿)으로서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 등 5명과 함께 『사서절요 四書切要』를 찬술(撰述)해 바쳤다.

 

1400년(정종 2) 악정(樂正)으로서 회안군(懷安君)의 휘하에 있었던 진무소(鎭撫所)의 갑사(甲士) 3백 명의 혁파를 청했는데,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병조의랑(兵曹議郞), 교서감(校書監),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거쳐 사성(司成)이 되었으며, 1403년(태종 3) 대사성(大司成)으로 승진했다.

 

1405년(태종 5) 우대언(右代言) 김과(金科)와 함께 생원시(生員試)를 주관해 조서로(趙瑞老) 등 100명을 뽑았는데, 공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았다.

 

같은 해 공조우참의(工曹右參議), 1407년(태종 7) 공안부윤(恭安府尹)을 거쳤으며, 1410년(태종 11)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서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하륜(河崙),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류관(柳觀) 등과 함께 『태조실록』의 편찬을 시작했다.

 

이듬해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 1413년(태종 13)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쳤으며, 1418년(세종 즉위년)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이듬해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로 치사(致仕)했다.

 

1413태조실록편찬에 대한 노고로 예문관대제학이 되면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였다. 141872세로 치사(致仕)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가 되어 진주 각처를 다녔고, 속현인 곤명(昆明)을 태실소로 정하게 하였다. 노성(老成)한 덕이 있다 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젊어서는 이색(李穡) · 정몽주(鄭夢周)의 문인과 교유하였고 늙어서는 성석린(成石璘) · 이행(李行)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그는 시()에 재능이 뛰어났다 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교은집· 화약고기(火藥庫記)가 있다

1434년(세종 16) 졸했으며,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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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조선조(朝鮮朝) 4대왕인 세종(世宗) 2년 3월 13일 교은(郊隱)은 내일 있을 어전친시(御前親試)를 주관하는 막중한 책임에 쉽게 잠을 청하지 못하다가 새벽녘에야 잠깐 잠이 들었다가 꿈을 꾸었다.

요란한 천둥번개와 함께 폭풍우(暴風雨)가 휘몰아치고 큰 산이 무너지면서 만물이 휩쓸려 가는데, 그 가운데서 거북이 한 마리가 갑옷 입은 장군(將軍)으로 변장(變裝)한 채 유유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가했더니 이번에는 화창(和暢)한 봄날 아지랑이 아롱거리며 만물(萬物)이 소생하는 들판 한가운데서 말 한 마리가 짝을 찾는 듯 힘차게 울부짖는 것이 아닌가? 교은(郊隱)은 깜짝 놀라 잠을 깨었다.

기이(奇異)한 일이로다 하고 생각한 교은(郊隱)은 꿈에 보았던 광경을 시문(詩文)으로 적었다. 이 시(詩)가 유명(有名)한 ‘교은몽시(郊隱夢詩)’다.

 

삼급풍뢰(三級風雷) 어변갑(魚變甲)

일춘연경(一春煙景) 마희성(馬希聲)

수운대우(雖云對偶) 원상적(元相敵)

나급용문(那及龍門) 상객명(上客名)

 

교은(郊隱)은 몽시(夢詩)를 접어 관복(官服) 속에 넣고 아침 일찍 과장(科場)으로 등청(登廳)하였다. 대궐(大闕) 앞뜰은 어전대과(御前大科)에 응시하려는 선비들로 만장(滿場)이었다. 시간(時間)이 되어 과거(科擧)가 시작(始作)되었다.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도 친히 시험장(試驗場)에 납시어 교은(郊隱) 이하 시험관들을 독려(督勵)하고 옥좌(玉座)에 좌정(坐定)하였다.

 

교은(郊隱)은 세종대왕(世宗大王)에게 다가가 조용히 아뢰었다. "전하(殿下) 소신(小臣)이 간밤에 기이(奇異)한 꿈을 꾸었기에 여기에 적어왔습니다"하고 간밤에 지어온 몽시(夢詩)를 펼쳐 보였다. 왕(王)께서 시문(詩文)을 보시고 웃으시며 "참으로 기이(奇異)한 꿈이구려 다음에 해몽(解夢)을 들어봅시다"고 하셨다.

 

몇일 후에 과거시험에 급제(及第)한 이름이 발표(發表)되었다. 깜짝 놀랄 일이었다.

무과(武科)의 장원급제(壯元及第)는 어변갑(魚變甲)이었고, 문과(文科)의 장원급제(壯元及第)는 마희성(馬希聲)이었다.

이 사실(事實)을 안 사람들은 모두 놀랐고 교은(郊隱)을 도통(道通)한 사람이라고 감탄(感歎)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