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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청계 안정환

부산진성 진동문, 승가정 현판 - 청계 안정환

by 연송 김환수 2022. 11. 17.

부산진성 공원(구 자성대 공원)에 있는 부산진성 진동문(鎭東門)과 승가정(勝嘉亭) 현판(편액)이 새롭게 설치되었다.

현판은 釜山市 無形文化財 篆刻匠 晴溪 安定煥 (부산시 무형문화재 전각장 청계 안정환) 선생이 세겼다.

 

鎭東門(진동문)  - 壬寅之秋節 晴溪 安定煥 (임인지추절 청계 안정환)

부산진성(釜山鎭城) 동문은 진동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1975년 복원 당시 옛 문의 이름을 알 수 없어 建春文(건춘문)이란 현판을 달고 복원이 되었다.

이후 원래 이름이 진동문임을 확인하여, 이번에 건춘문(建春文) 현판을 내리고 원래 이름인 鎭東門(진동문) 현판으로 교체를 하게 되었다. 안내문도 수정을 하고 늦기는 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1974년 부산진성 정화공사 때 기록을 보면 이름을 알 수 없어 새로 건춘문이라 명명하였다. 하지만, 이전 부산진성의 동문 현판이었던 “건춘문(建春門)”은 경복궁의 동문 이름과 같아 격이 낮은 부산진성의 동문 이름이 될 수 없다는 주장들이 있어 왔었다.

진동문이라는 근거는 1895년 "영남진지(嶺南鎭誌)"를 보면 부산진성 동문은 "진동문(鎭東門)"이라는 기록이 있고, 1643년 조선통신사 종사관 신유도 〈해사록〉에도 부산5절(絶) 중 "진동문"을 언급하고 있다.

 

勝嘉亭(승가정) - 壬寅之秋節 晴溪 安定煥 (임인지추절 청계 안정환)

승가(勝嘉)의 뜻은 좋은 땅으로 인해 아름다운 정자를 짓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승가정은 1974년 부산진성 정상에 장대를 설치하고 진남대(鎭南臺)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진남대는 부산진성 남문인 진남문에서 이름을 가져온 것으로 추정은 되지만, 부산진성에 진남대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2022년 9월 진남대 안내문을 승가정으로 수정을 하였으며, 이후  勝嘉亭(승가정) 현판(편액)을 설치하였다.

1842년 첨사 이희봉(李熙鳳)은 육우정을 짓고 승가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육우는 여섯모퉁이라는 뜻으로 여섯 개의 경치를 기록해 놓았다.

- 구봉(龜峰)의 저녁 연기가 푸르게 엉기는 것,

- 크고 작은 섬들에 아침해가 붉게 비치는 것,

- 강선대(降仙臺)의 높은 자라등,

- 절영도(絶影島)에 신기루(蜃氣樓)가 일어나는 것,

- 석추(石楸)에 파도가 울고 흰 물거품을 뿜는 것,

- 금용산(金湧山) 멧부리가 푸른 하늘에 깍아지른 듯 솟아 있는 것

 

영남진지는 승가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해놨다.

"정자(亭子)는 부산의 자성(子城)에 있다. 산이 마치 엎어놓은 가마와 같다 하여 부산(釜山)이라 한다. 그 지형을 따라 돌을 쌓은 것이 성의 형상과 같기 때문에 자성(子城)이라 한다. 그 위는 평평하고 시원하여 수천인이 앉을 만하며 바다와 산의 승경(勝景)이 다 모이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마땅히 정자나 대(臺)처럼 올라가서 경치를 바라볼 만한 곳이 있을 법하나 아직도 이것들이 없는 것은 아마도 기다림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임인년에 절제사(節制使)로서 이곳에 부임하여 작은 정자를 지었다. 기와를 덮고 여섯 모퉁이에 기둥을 세웠으며 면(面)마다 둥근 난간에 단청을 올렸으니 이로부터 자성(子城)이 갑절이나 광채를 더할 수 있었다.

부산에는 본래 영가대(永嘉臺)가 있어 이름을 온 나라에 떨쳤는데, 내 정자(亭子)가 마침 이루어져 승가(勝嘉)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영가대(永嘉臺)보다 낫게 되기를 힘쓰려 함은 아니다. 승가(勝嘉)의 뜻은 좋은 땅으로 인해 아름다운 정자를 짓는다는 데 있다. 영가대(永嘉臺)는 물가에 있고 승가정(勝嘉亭)은 산의 꼭대기에 있다. 이쪽보다 나은 것이 있고 저쪽보다 못한 것이 있는 것은 황학루(黃鶴樓)와 봉황대(鳳凰臺)의 그것과 같다. 비록 이백(李白)과 최호(崔顥)의 문장으로서도 능히 우여을 가리기 어려울 것이니, 내가 어찌 감히 옛사람이 선편(先鞭)을 잡은 것에 대해 승부를 다투려 하겠는가? 아, 이 곳은 곧 옛날의 전장(戰場)이다. 옛날에 용사(龍蛇)의 난이 있었을 때에 명(明)의 장수가 공을 비석에 새겼는데 세월이 점차 멀어지니 귀두(龜頭)는 깍여져 떨어져나가고 글자의 흔적은 인몰(湮沒)되어 지나가면서 보는 사람마다 발걸음을 멈칫하면서 탄식해 마지 않았다. 그런데 옛날의 황대(荒臺)가 이제 와서는 명구(名區)가 되었으니 이는 흥폐(興廢)에 때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 정자에 오르면 평평하고 대해(大海)를 굽어보고 대마도(對馬島)를 바로 바라볼 수 있으며, 꽃피는 아침과 달뜨는 저녁에 술을 들고 칼에 기대고 있노라면 매양 강개(慷慨)하여 옛날을 생각하는 정을 금할 수 없으며, 산수(山水)의 뛰어남과 풍물(風物)의 아름다움이 여섯기둥의 주련(柱聯)에 갖추어져 있다. 나는 무인(武人)인지라 문사(文詞)로써 울릴 수 없어, 진경(眞境)을 그려내는 것에 이르러서는 후인(後人)을 기다리려 한다. 만약에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나를 이어 그것을 고쳐 지을 것이며, 또한 내가 승지(勝地)로 해서 가정(嘉亭)을 지은 뜻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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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성釜山鎭城) 공원

 

부산진성이 있는 부산 동구의 자성대공원의 이름을 부산진성공원으로 바꾸는 절차가 동구 지명위원회 심의를 통과하여 자성대공원의 새 이름은 부산시 지명위원회 심의와 국가 지명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종 확정되었다.

당초 문화재 지정명칭은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이었으나, 2020년 1월 15일 부산진성(釜山鎭城)으로 변경되었다.

 

부산진성(釜山鎭城)은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이다. 넓이는 24,198m2이고,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부산진성의 외성(外城)이었던 것을 일본군이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일본식으로 새로 쌓은 왜성(倭城)이기도 하다.

 

유래

자성대의 유래는 부산진성을 본성 또는 모성(母城)이라는데 대해 자성대의 성을 지성 또는 자성(子城)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또 정상에 자성을 만들어 장대(將臺)로 삼았다고 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현지 안내문

부산진(釜山鎭)은 조선 태종 7년(1407) 낙동강의 동쪽지역인 경상좌도(慶尙左道) 수군의 사령부로서 휘하 11개의 수군진성과 함께 동남해안의 방어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당시 수군은 배를 타고 바다에서 근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성종 21년(1490) 병선의 정박처로서 수군과 물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둘레 2,026척(약 950m)의 부산진성(구 자성대왜성)을 증산(甑山) 아래에 쌓게 되었다.

 

선조 25년(1592)의 임진왜란(壬辰倭亂) 첫 전투 때 부산진의 지휘관인 첨사(僉使) 정발(鄭撥)을 비롯한 군사와 백성들이 끝까지 싸웠으나 마침내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 일본군 장수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부산진성을 허물고 증산 정상에 본성(本城)인 증산왜성(倭城)을 쌓았다. 또한 동남쪽 해안가에는 본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지성支城: 원래의 성 밖에 보조로 쌓은 성, 자성대왜성(子城臺倭城))을 쌓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 40년(1607) 조선 수군은 자성대왜성으로 진영(鎭營)을 옮겨 부산진첨사영(釜山鎭僉使營)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부산진성의 규모는 둘레 1,791보 4척(약 2.4㎞)로 여첩 (女堞, 성벽 위 담장시설) 483타(垜)가 있었고, 동서남북에는 문루(門樓): 성문 위에 세운 높은 집 또는 다락를 두었는데 각각 진동문(鎭東門), 금루관(金壘關), 진남문(鎭南門), 구장루(龜藏樓)라 불렀다. 그리고 성내 정상에는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 장수 만세덕(萬世德)을 추모하는 만공단(萬公壇)이 조성되었고, 서북쪽 외성(外城) 공간에는 객사인 공진관(拱辰館)과 부속건물, 동남쪽 내성(內城) 공간에는 관아(官衙)를 비롯한 부속건물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가지 정비 계획에 따라 성을 철거하면서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는데, 1974년 부산진성 정화 공사로 동문인 건춘문(建春文,구 진동문), 서문인 금루관, 장대(將臺)인 진남대(鎭南臺)가 복원되었다. 현재는 자성대공원 내 당시 자성대(子城臺)라고 부르던 일본식 성벽과 장대(將臺)인 진남대(鎭南臺), 그리고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의 장군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이 세운‘천만리영양천공비(千萬里潁陽千公碑)’가 남아있다. 동문 서쪽에는 고려 말 왜구의 토벌에 공을 세운 최영 장군을 기리는 비각(碑閣): 비를 세우고 그 위를 덮어 지은 집이 보존되어 있다,

 

부산진성은 조선수군의 5백년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임진왜란 때 쌓은 왜성과 이후 왜성을 이용한 조선 후기 수군진성에 대한 연구 자료로서도 그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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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진성(釜山鎭城) 구조

부산진성은 자성대 왜성을 재활용하였기에 우리성의 구조와 함께 왜성의 구조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부산진성 장대인 자성대는 전형적인 왜성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성문과 여장은 조선 성곽의 특징을 따르고 있다.

 

부산진성(釜山鎭城) 사대문 가운데 동문을 진동문(鎭東門), 서문을 금루관(金壘關), 남문을 종남문(鍾南門), 북문을 구장루(龜藏樓)라 하였고, 성 안팎에는 공진관(拱辰館, 客舍)·검소루(劒嘯樓, 東軒)·제남루(濟南樓, 閉門樓)를 비롯하여 청상루(淸霜樓, 軍器所)·관청 외에 15채가 있었다.

 

성문(城門)

 

◈ 금루관(金壘關)

부산진성은 서문이 주출입구며 금루관이라 불렸다.

 

◈ 진남문(鎭南門)

부산진성 남문은 바다와 맞닿아 있었다. 일제강점기 부산진성 앞 바다가 매립되면서 남문 위치에 성남초등학교가 자리 잡았다.

 

◈ 진동문(鎭東門)

부산진성 동문은 진동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1975년 복원 당시 옛 문의 이름을 알 수 없어 건춘문 현판을 달고 복원이 되었으나. 2022년에 원래 이름인 진동문 현판을 다시 달았다.

 

◈ 구장루(龜藏樓)

부산진성 북문은 구장루(龜藏樓)라고 불렸다.

 

◈ 장대(將臺)

1974년 부산진성 정상에 장대를 설치하고 진남대(鎭南臺)라 하였으나,  2022년 9월 진남대 안내판은 승가정으로 교체됐으며 현판도 승가정으로 변경되었다.

 

◈ 영가대(永嘉臺)

1614년 광해군 6년 순찰사 권반은 못을 파고 호(濠)를 만들어서 전선(戰船)을 감추었다. 작은 언덕을 쌓아서 대(臺)를 만들었다. 1624년 인조 2년 이민구가 권반의 고향이 안동이라 안동의 옛 이름인 영가(永嘉)를 가져와 이름을 지었다.

 

◈ 진남대(鎭南臺)

1974년 부산진성 정상에 장대를 설치하고 진남대라고 이름을 지었다. 진남대는 부산진성 남문인 진남문에서 이름을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나 부산진성에 진남대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2022년 9월 진남대 안내판은 승가정으로 교체됐으며 현판도 승가정으로 변경되었다.

 

◈ 승가정(勝嘉亭)

1842년 첨사 이희봉(李熙鳳)은 육우정을 짓고 승가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육우는 여섯모퉁이라는 뜻으로 여섯 개의 경치를 기록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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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성은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조선시대 부산첨사 정발과 관련된 성곽. 석성이다.

 

『신동국여지승람』에 부산포성(富山浦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석성으로 둘레 511.8m, 높이 4m라고 했다.

 

임진왜란 때 부산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이 왜군의 선봉과 싸워 장렬하게 전사한 첫 격전지로서 1592년(선조 25) 음력 4월 13일 일본의 조선원정군 제1진 1만 8700여 명이 부산 앞바다에 쳐들어오자 정발은 부산진성을 굳게 지켰다.

 

왜적은 14일 새벽 짙은 안개를 틈타 지금의 우암동쪽으로부터 일시에 상륙하여 부산진성을 포위한 뒤 삼면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정발은 성 안의 군민과 더불어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사했으며 마침내 부산진성은 함락되었다 한다. 현재 부산진성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자성대(子城臺)라고 부르는 부산진성만이 남아 있다.

 

흔히 자성대로 부르는 부산진성은 임진왜란 때 왜적이 부산성을 헐고 성의 동남부에 일본식의 성을 쌓아 지휘소로 이용한 곳이다.

 

자성대공원은 지난 1944년 조선총독부 고시로 공원에 지정돼 일본식 성곽 표기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왜적이 물러간 뒤에는 명나라의 만세덕군이 진주한 일이 있어 만공대라고도 했었다.

 

임진왜란 뒤에 다시 수축되어 좌도수군첨절제사의 진영으로 활용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동서의 산을 따라 성벽으로 성곽을 두르고 바닷물을 끌여들여 참호를 20m쯤의 넓이로 만들어 배가 바로 성벽에 닿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성의 현재 모습은 1974년 7월 8일부터 1975년 2월 25일까지 부산시에서 정화 복원공사를 하여 동문, 서문, 장대를 신축하여 동문을 진동문, 서문을 금루관, 자성대 위의 장대를 진남대라 각각 명명하여 그 편액을 달았다.

 

이 당시 정화공사로 신축된 건춘문, 금루관, 진남대와 함께 임진왜란 때 왜적이 쌓은 2단의 일본식 성벽이 남아 있다.

 

그리고 1975년 9월 동문주변 성곽을 신축하였으며 지금 서문의 금루관은 높다란 다락이 되어 우뚝 서 있고 문의 왼쪽에는 남요인후라 새긴 돌기둥이 서 있으며, 문의 오른쪽에는 서문쇄약(서문은 꼭 잠그어야 한다)이라 새긴 돌기둥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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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懸板)과 편액(扁額의 차이

 

우리나라에서 편액(扁額과 현판(懸板)의 두 명칭을 크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으나 현판은 넓은 의미에서 편액과 기둥에 달아놓는 주련(柱聯) 등을 포함한 것이다.

 

현판은 건물에 거는 모든 목판을 지칭하며, 편액은 건물 정면의 문과 처마 사이에 거는 목판을 일컫는 것으로, 현판보다 좁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한 건물에 현판은 여러개가 있을 수 있지만, 편액은 건물 정면의 문과 처마 사이에 설치되어 건물의 명칭 등을 알려주는 건물의 대표 역할을 하고 있다.

건물의 편액은 대부분 가로로 걸기 때문에 횡액(橫額)이라고 하였으며, 글씨의 경우 세로로 쓰기도 하였다.

 

편액은 궁궐, 사찰, 서원, 관아, 사대부들의 일반 주택 등에 건물 정면 문과 처마 사이에 설치되어 건물의 명칭, 내역, 제작 방법 등을 알려주는 건물의 대표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