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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청계 안정환

천추만세, 만물정관 - 청계

by 연송 김환수 2022. 12. 10.

천추만세(千秋萬歲)

"오래 살기를 비는 말이다."  축수(祝壽)하는 말이다.

※ 祝壽(축수) : 오래 살기를 빎.

 

천추(千秋)는 길고 오랜세월(천만년)의 뜻으로 千年萬年(천년만년) 영구한 세월을 말한다.

 

漢瓦(한와) 千秋萬歲(천추만세) - 晴溪 刻(청계각)

釜山市無形文化財 第二十四號 篆刻匠  晴溪 安定煥 (부산시무형문화재 제24호  전각장 청계 안정환 각)

萬物靜觀(만물정관) - 晴溪(안청계)

모든 자연의 이치를 있는 그대로 고요히 관찰하면 스스로 진리가 터득된다.

 

萬物靜觀(만물정관) - 吳世昌(오세창)

 

정관(靜觀) 고요히 사물을 관찰함.

 

萬物靜觀皆自得 四時佳興與人同(만물정관개자득 사시가흥여인동)

만물을 정관하니 모두 스스로 터득되고, 사철마다의 좋은 흥취 누구에게나 같구나. (정호程顥)

綠水喧如怒 靑山黙似嚬 靜觀山水意 嫌我向風塵(녹수훤여로 청산묵사빈 정관산수의 혐아향풍진)

녹수는 노한 듯 콸콸 흐르고, 청산은 말없이 찡그리고 있네. 산과 물의 그 뜻을 정관하니, 속세로 향하는 나를 싫어함이라. (송시열宋時烈 부경赴京)

 

오세창(吳世昌)

출생지 서울

출생-사망 1864년 7월 15일 - 1953년 3월 3일

 

위창 오세창은 조선 말기와 근대기의 역관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예가, 서화감식가, 전각가로, 고증학과 금석학을 기반으로 한 서예 작품과 전각 작품을 제작했고, 서화미술회, 서화협회 등 미술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집안 대대로 내려온 서화 · 골동품과 자신의 수집품을 토대로 '근역서휘', '근역화휘', '근역인수', '근역서화징' 등 한국 서화사 및 전각사 자료를 편찬했다.

 

• 본명 : 자 중명(仲銘; 重明).

• 활동분야 : 서예, 한국화

• 시대 : 조선 후기~근대

• 주요작품

- 강호일취(江湖逸趣, 1942)

- 근묵 – 제자(槿墨 - 題字)

- 상형고문(象形古文, 1929)

- 제한경(題漢鏡, 1924)

- 전서육곡병(1923)

• 이명 : 호 위창(葦滄; 韙傖; 爲蒼; 渭滄; 韋倉), 한암(閒庵), 한도인(閒道人), 노위(老韋) 등, 당호 여박암(旅泊庵), 부고재(富古齋) 등.

 

생애

오세창(吳世昌)은 조선 말기와 근대기의 역관(譯官)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예가, 서화감식가, 전각가로, 그의 자는 중명(仲銘; 重明), 호는 위창(葦滄; 韙傖; 爲蒼; 渭滄; 韋倉), 한암(閒庵), 한도인(閒道人), 노위(老韋), 여박암(旅泊庵), 부고재(富古齋) 등이며,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1864년 7월 15일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역관이자 서화가인 오경석(吳慶錫)이고 모친은 김해김씨(金海金氏)이며, 오세창은 이들의 외아들이었다. 오세창의 집안은 8대에 걸쳐 역관을 지낸 중인 집안이었다. 또한 학문적으로 오세창의 조부 오응현(吳膺賢)은 실학사상을 형성하였으며 시·서·화 삼절(三絶)로 불린 인물이었고, 부친 오경석은 박제가(朴齊家)와 김정희(金正喜)의 실학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오세창도 이 같은 가학을 계승했다.

 

오세창은 1880년에 사역원(司譯院)에 급제하여 역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후원주위청영차비관(後苑駐衛淸營差備官)과 사역원 직장(直長)을 지냈다.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 인사들과 친분이 있던 오세창은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연루되기도 했다. 1886년에 그는 인쇄·출판 담당 기관인 박문국(博文局)에서 ‘한성주보’(漢城周報)의 기자 생활을 하며 관직 생활을 잠시 그만두었다. 그러나 3년 뒤에 박문국이 폐지되면서 오세창은 1888년 육품에 오르고 1890년에 역관의 신분으로 청사인예차비관(淸使引禮差備官)에 임명되는 등 다시 관직을 지냈다.

 

그는 1892년에 군기시(軍器寺)에서 군사 업무를 맡았고, 1894년에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낭청총재비서관(郎廳總栽秘書官)을 지냈으며, 이후 공무아문(工務衙門) 참의(參議), 농상공부(農商工部) 참서관(參書官), 우정국(郵政國) 통신국장(通信局長)을 역임했다. 1896년에 관직 생활을 청산한 오세창은 일본 문부성(文部省)의 초청으로 1897년부터 1년간 동경 외국어학교의 조선어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오세창은 1902년에 개화당 사건으로 인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는 일본 망명 중에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천도교에 입교했다. 1906년에 손병희, 권동진(權東鎭) 등과 귀국한 오세창은 계몽 및 항일구국운동을 추진했다. 그는 귀국한 해에 ‘만세보’(萬歲報)를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했으며, 1907년에는 윤효정(尹孝定), 장지연(張志淵), 권동진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를 결성하여 부회장을 맡았고, 1909년에 대한협회 주도로 발행되는 신문인 ‘대한민보’(大韓民報)를 창간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구속된 오세창은 1921년까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서화에 관심이 많고 조예가 깊었던 오세창은 직접 서예와 전각 작품을 제작했고 조선 서화가들과 교유하며 미술단체 활동을 했으며, 선대로부터 소장해온 서화 작품과 골동품에 자신의 수집품을 더하여 이를 토대로 한국 서화사 자료를 저술하고 편찬했다. 그는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의 회원이었으며, 1913년에 서화미술회에서 개최한 '서화대전람회'(書畵大展覽會)에 고서화 수장품을 특별 출품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미술단체인 서화협회(書畵協會)가 1918년에 창립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오세창은 1916년부터 역대 서화가의 작품을 모아서 ‘근묵’(槿墨), ‘근역서휘’(槿域書彙), ‘근역화휘’(槿域畵彙) 등의 서화첩으로 엮었다. 그는 1921년 서화협회에서 ‘서화협회보’(書畵協會報)를 창간하자 ‘화가열전’ '나대편’(羅代篇)과 '여대편’(麗代篇)을 싣기도 했다. 오세창은 1927년에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완성했고, 이듬해 이를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에서 간행했다. 그는 조선 초기부터 광복 이전까지 서화가와 문인들의 인장을 수집해서 ‘근역인수’(槿域印藪)를 편찬하기도 했다.

 

서화감식에 뛰어났던 오세창은 다수의 금석문을 임모하고 그 출처와 유래, 감식, 서평 내용을 제발(題跋)로 남겼고, 하(夏)나라부터 명(明)나라까지의 중국 금석문과 삼국시대부터 고려까지의 한국 금석문을 연구하여 ‘서지청’(書之鯖)을 쓰기도 했다.

 

오세창은 1945년에 광복이 된 후, 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畵同硏會)에 고문, 매일신보와 서울신문사 명예사장, 건국준비위원회 고문, 한국민주당, 한국독립, 대한국민당 등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광복 1주년 기념일에 일본으로부터 대한제국 황제 옥새를 민족의 대표로 인수하기도 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오세창은 가족들과 대구로 피난했고, 그곳에서 1953년 4월 16일에 사망했다.

 

오세창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루어졌고, 1963년에는 정부로부터 그에게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1993년에 오세창은 국가유공자로 추서되었다.

 

작품 활동

오세창은 서예가로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그는 1922년부터 1936년까지 서화협회전람회(書畵協會展覽會)에 여러 차례 출품했다. 그는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서부(書部)에 출품하여 2등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일제가 민족성 강한 서화협회전람회를 견제하고 조선 화단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이 전람회를 창설했음을 간파한 뒤 관계를 끊었다. 그는 해방 후에 조선서화동연회에서 개최한 '해방전람회(解放展覽會)'에 출품하기도 했다.

 

고증학과 금석학에 관심이 많았던 오세창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주로 썼다. 그가 전서와 예서를 중시한 것은 서법의 근원을 예서에 두었던 김정희의 서예관으로부터의 영향이기도 하다. 오세창은 실제 금석문 유물에 바탕을 두고 진적(眞蹟)의 탁본이나 와당(瓦當), 갑골문, 비석(碑石) 등을 활용한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금석유물을 임모하고 그 유물에 대한 정보, 서평 등을 제발로 적은 작품도 제작했다.

 

오세창은 전각에도 관심이 많아서 다수의 전각 작품을 남겼다. 그는 18세부터 전각에 관심을 갖고 직접 인장을 새겼고, 일본 망명 중에 일본 전각계의 활발한 활동에 자극을 받아서 본격적인 작업과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각 역시 김정희의 전각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대의 인장을 모범으로 삼아 각을 했으며 진나라 이전의 문자를 인장 면의 내용에 많이 활용했다. 오세창은 좋은 재료를 확보하여 다양한 크기와 꼼꼼하고 치밀한 각으로 수준 높은 전각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위창인보’(葦滄印譜), ‘오씨인집’(吳氏印集) 등 여러 인보(印譜)를 남기기도 했다.

 

평가

오세창은 전각에도 관심이 많아서 다수의 전각 작품을 남겼다. 그는 18세부터 전각에 관심을 갖고 직접 인장을 새겼고, 일본 망명 중에 일본 전각계의 활발한 활동에 자극을 받아서 본격적인 작업과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각 역시 김정희의 전각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대의 인장을 모범으로 삼아 각을 했으며 진나라 이전의 문자를 인장 면의 내용에 많이 활용했다. 오세창은 좋은 재료를 확보하여 다양한 크기와 꼼꼼하고 치밀한 각으로 수준 높은 전각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위창인보’(葦滄印譜), ‘오씨인집’(吳氏印集) 등 여러 인보(印譜)를 남기기도 했다.

 

참고문헌

• 국립문화재연구소 편,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