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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연방/사찰순례

서운암 대웅전 편액 - 동곡 일타 스님

by 연송 김환수 2021. 11. 14.

부산 금련산 서운암 대웅전 편액, 주련 - 동곡 일타(東谷 日陀) 종사 스님

 

금련산 서운암은 부산 수영구 망미동 수미초등학교 정문앞에 있는 작은 사찰로 1940년 성월당 수인스님(1898-1997)이 창건한 사찰이다.

 

性月堂(성월당) 兪守仁(유수인) 大禪師(대선사)

이후 수인스님은 부산 영주암 주지(1954-1956년), 운문사 주지(1955-1965년)를 지내고 중앙종회의원, 능인학원 이사, 단일계단 비구니 증사 등을 역임하고, 세수 99, 법랍 89세로 1997년 서운암에서 입적하였다.

 

작은 규모의 서운암에 걸려있는 대웅전 편액의 글씨를 멀리 도로변에서 바라보니 날렵하고 멋진 명필이라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대웅전 편액과 주련의 글씨가 유명한 동곡당 일타스님의 작품이라 소개를 합니다.

서운암의 대웅전 편액과 주련 조성관련 기록들을 찾지는 못하였는데 수인스님이 일타스님과의 교류인연이 있어 대웅전 편액과 주련 글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여 봅니다.

 

일타(日陀) 스님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으며, 法名(법명)은 日陀(일타), 號(호)는 東谷(동곡), 三餘子(삼여자), 俗名(속명)은 金思義(김사의), 本貫(본관)은 延安(연안)이다.

해인사 주지를 지내고, 조계종 종단의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으로 수 많은 출가수행자를 이끌었다.

* 전계대화상은 조계종 승려를 양성하는 단일계단의 수계산림을 관장하며 계법을 전하는 종단 최고 계사다.


동곡당 일타대종사(東谷堂 日陀大宗師, 1929~1999)는 선사(禪師)요, 율사(律師)로 언제나 온화한 자비의 미소를 잃지 않으신 대종사(大宗師)이다.

大雄殿(대웅전) 편액 / 동곡 일타(東谷 日陀) 대종사 스님 글씨

 

대웅전 편액의 두문 글씨 

 

대웅전 편액의 일타(日陀) 동곡(東谷)  /  일타는 스님의 법명이고 동곡은 호이다.

 

서운암 대웅전 주련 - 동곡 일타(東谷 日陀) 대종사 스님의 글씨이다.

 

동곡 일타(東谷 日陀)스님 형제는 2남 2녀였다. 위로 누나와 형, 그리고 아래로 누이동생이 있었다.

형제 중에서 가장 먼저 출가한 사람은 일타보다 6살 위인 누나 응민(應敏) 스님이었다.

응민은 비구니로서 만공스님에게 ‘한 소식한 비구니’라고 인가를 받았을 정도로 걸출하게 여장부처럼 수행을 잘 하다가 1984년 입적하였다.

 

2014년 12월 13일 일타 큰스님 가계의 마지막 스님인 쾌성(快性) 스님(1932: 본명/金明喜)께서 입적하셨다.

1941년 어머니와 함께 문경 윤필암으로 들어간 쾌성스님은 외사촌인 혜유(慧柔)스님과 함께 마지막 남으셨던 분으로 대구 파동의 염화사(拈花寺)에 머물고 계셨다.

 

20세기 우리나라의 마지막 큰스님인 일타스님의 가족사를 살펴보면 그야말로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사실이다.

‘나의 가족은 친가와 외가를 모두 합하여 문지방 식구까지 41명이 승려가 되었습니다. 이 41명의 출가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일족의 출가 이후 가장 많은 숫자로 기록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41명의 출가는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인가? 아닙니다. 나의 외증조할머니인 안성이씨 평등월(平等月) 보살의 기도와 입적(入寂), 그리고 방광의 이적(異蹟)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라고 말씀 하시던 일타스님은 6대째 불교집안으로 충남 공주시 우성면 동대리에서 1929년 태어났다.

 

1942년 사의(思義;일타스님 본명)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김봉수)는 수덕사 만공선사를 찾아가 출가하였고, 일타 역시 외할아버지 추금스님의 손을 잡고 양산 통도사로 향하면서 대가족이 모두 출가의 길로 떠난 것이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불문에 귀의한 일타는 26세 때 십 만 배 후 오른 손가락 열 두 마디를 태워 연지연향 할 정도로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걷고 나서, 태백산 도솔암에서 6년 동안 장좌 불와와 동구 불출 등의 정진으로 깨달음을 이룬 선사이다.

 

이후 살아생전에 연지한 손에서 생사리 100여점이 나왔다는 일타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전계대화상을 지낸 대율사요, 자유자재한 언설변재로 듣는 이의 마음에 깨달음의 씨를 심어주는 대법사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가슴에는 태양을, 입가에는 언제나 미소를 띠우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기쁨을 주었고, 주옥같은 저술로써 뭇 불자들의 마음을 밝혀준 많은 저서를 우리에게 남기었다.

26살때 오른손 열두마디 연비(좌측) / 미국 하와이 금강굴에서 임종 7일전 1999년 일타스님 모습(우측)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이루려는 의지를 펼치던 중, 1999년 미국 하와이 금강굴에서 71세에 입적하는 순간까지 순수한 구도자로서의 삶을 추구해온 일생을 마치었다.

스님의 가계는 이 경이로운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들 모두가 하나같이 ‘중노릇’을 아주 열심히 한 참된 수행자였다는 점이다. 추금스님이 비록 늦게 출가하였지만 열성으로 정진하여 견성하였으며, 말년에는 태고사 조실로 추대되어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스스로 장작을 쌓고 불을 붙인 다음 올라가서 자화장을 하는 이적을 보이기도 했다.

 

靜心 (정심)

두인은 세계일화(世界一花) / 정심(靜心) 고요한 마음

법호 삼여자(三餘子) / 낙관 일타(日陀) 동곡(東谷)

* 일타스님 법호 삼여자(三餘子) 또는 동곡(東谷)

 

팔공산 은해사 천왕문(天王門)에 걸려 있는 '八公山銀海寺(팔공산은해사)' 편액 글씨는 동곡 일타(東谷日陀, 1929~1999) 스님의 작품이다. 붓이 바람을 가르면서 운필한 듯 날렵하고 멋진 필체이다.

 

은해사는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10교구 본사로 동화사와 더불어 팔공산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특히 은해사는 본존불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은해사는 809년(신라 헌덕왕 1) 적인 혜철(寂忍惠哲, 785~861)이 해안평(海眼坪)에 창건하여 해안사(海眼寺)라고 불렀다. 헌덕왕(憲德王, ?∼826)은 조카인 40대 애장왕(哀莊王, 788~809)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 그는 비명에 간 원혼을 달래고 참회하면서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 혜철국사로 하여금 해안사를 창건하게 했다. 은해사의 시초가 되는 사찰이 바로 해안사이다.

 

忍(인) 연하장

목청 김연호 작가가 소장하고 있는 忍(인)’자 연하장 일타스님이 해인사 지족암에 주석했을 때, 스님으로부터 받은 연하장이다.

매년 새해가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보내줬다는 일타스님의 연하장은 지금 보아도 스님의 훈기가 느껴질 정도로 정성과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

忍(인) 연하장 설명

연하장에 따르면 일타스님은 세계일화(世界一花)를 강조하면서 “마음을 기쁘고 즐겁게 쓰면 세계는 한송이 연꽃처럼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다.

일타스님은 또 ‘瞋是心中火(진시심중화) 能燒功德林(능소공덕림)’을 말하면서 “성을 냄은 마음속에 불꽃이라. 공덕의 숲을 불태우나니”라고 가르침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 인욕이다”라며 “마음에 여유를, 하는 일에 여유를, 시간에 여유를”이라고 끝맺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忍道 (인도)

달마도 62.5 x 44.5 cm

광명정대

如幻三昧(여환삼매)

歲在庚申(1980) 元旦 伽倻山(세재경신(1980) 원단 가야산)

원각사 성보박물관

마음을 다스리는 글

일타스님 접시 40.5cm

 

일타스님 도자기

높이 35Cm 지름33Cm 둘레103.62Cm

도봉 김윤태 작품 / 통도미술관

 

일타스님 도자기 높이 31cm, 구연부 18cm

 

 

진주 응석사(凝石寺) 관음전(觀音殿) 편액 - 일타(日陀) 스님

 

진주 응석사(凝石寺) 관음전 주련(柱聯) - 일타(日陀) 스님

 

주련은 알아보기 쉽도록 정자에 가깝게 쓰는 것이 원칙인데 일타스님의 특유의 필체로 알아보기 어렵다. 이 글의 출처는 능엄경(楞嚴經)을 전거(典據)로 하여 쓴 글씨이며 그리고 주련을 걸어놓은 순서도 고심해볼 필요가 있다.

 

何不自聞聞 聞非自然生 因聲有名字 旋聞與聲脫

(하불자문문 문비자연생 인성유명자 선문여성탈)

어찌하여 스스로 듣는 작용을 듣지 못하느냐?

듣는 작용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소리로 인하여 그 이름이 있게 되었네.

듣는 작용을 돌이켜 소리에서 벗어나면

 

能脫欲誰名 一根旣返源 六根成解脫 見聞如幻翳

(능탈욕수명 일근기반원 육근성해탈 견문여환예)

해탈한 작용을 무엇이라 이름하랴!

하나의 감각기관이 본원으로 돌아가면

여섯 개의 감각기관이 해탈을 이루게 되리라.

보고 들음이 허깨비에 가려진 것 같으며

 

三界若空華 聞復翳根除 塵銷覺圓淨 淨極光通達

(삼계약공화 문부예근제 진소각원정 정극광통달)

삼계가 허공의 헛꽃과 같나니

들음이 회복되면 가려진 감각기관이 없어지고

허망한 티끌이 없어지면 깨달음이 청정하리라.

 

寂照含虛空 卻來觀世間 猶如夢中事 摩登伽在夢 誰能留汝形

(적조함허공 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마등가재몽 수능류여형)

맑음이 지극하면 광명이 통달해서 고요하게 비침이 허공을 삼키니

돌아와 세간을 보건댄 마치 꿈속의 일과 같네.

마등가도 꿈속에 있거니 누가 너의 형체를 머물게 하랴.

 

위의 문장에서 견문여환예 삼계약공화(見聞如幻翳 三界若空華) 보고 듣는 것은 허환(虛幻)의 티끌이요. 삼계 또한 허공의 꽃과 같다. 라는 구절의 문장을 주련의 좌우로 걸어 두었으니 일반 사람들은 매우 알아보기 어려운 문장이며 글씨이다.

보고 듣는 것이 환예(幻翳)라고 한 것은 모두 망상(妄想)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또한 삼계(三界)가 공화(空華)라고 한 것은 모두 망경(妄境)을 가리킨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餘塵尙諸學 明極卽如來 大衆及阿難 旋汝倒聞機 反聞聞自性

(여진상제학 명극즉여래 대중급아난 선여도문기 반문문자성)

남은 티끌은 아직도 배워야 하지만

밝음이 지극하면 곧 여래이니라.

대중과 아난아! 너의 거꾸로 듣는 기관을 돌려서

듣는 작용을 돌이켜 자성을 들으면

 

性成無上道 圓通實如是 此是微塵佛 一路涅槃門

(성성무상도 원통실여시 차시미진불 일로열반문)

 

그 성품이 위없는 도를 이룰 것이니

원만하게 통함이 사실 그러하니라.

이것이 티끌 같이 많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어가신 유일한 길이라네.

 

여기에서 반문문자성 성성무상도 차시미진불 일로열반문(反聞聞自性 性成無上道 此是微塵佛 一路涅槃門)를 취하여 걸어 놓았지만 문제는 원통실여시(圓通實如是)가 어디론가 결실(缺失)되어서 이 주련은 엉터리 주련이 되고 말았다. 하여튼 이 구절을 풀어서 살펴보면 듣는 작용을 돌이켜 자성을 들으면 그 성품이 위없는 도를 이룰 것이니 (결락(缺落) 이것이 수많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어가신 유일한 길이라네. 그러나 눈 밝은 사람이 이 주련을 본다면 이는 탄식(歎息)의 대상이다.  출처 : https://cafe.naver.com/tjswotjswo/2426

 

계첩(일타스님), 1979년(기미), 법신화

발급 : 東谷一陀(동곡일타)

수급 : 고옥순 法信華

刊行年代 : 己未(1979) / 癸未生(1943)은 己未(1979)의 오기(誤記)로 보임

크기 : 21 × 35.1cm

위 자료는 1979년 일타스님이 고옥순(법신화) 불자에게 준 계첩이다. 당시에는 수계식이 사찰에서 공적으로 행해지지 않았고, 스님들이 개별적으로 불명과 계훈을 건네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佛子 癸未生(1943) 불자 계미생 法信華 법신화 고옥순

*1943년은 일타스님(1929년생)이 통도사에 출가한지 2년차이고 15살때 통도사에서 사미계 수지 받은 해인데 해인사 명의로 불자에게 계첩을 수여한다는 것은 불가하더.  癸未生(1943)은 己未年(1979년)을 오기(誤記)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조계종에서 계첩의 발급년도를 1979년으로 설명을 것으로 보인다.

(1979년에 일타스님이 해인사 지족암 주석, 1984년 해인사 주지)

處染常淨 처염상정

淸淨無垢 청정무구

海印三昧 해인삼매

安心立命 안심입명

己未秋於 기미추어

伽倻山海印寺 가야산해인사

法印 東谷 법인 동곡 一陀 일타 / 日陀 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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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곡당(東谷堂) 일타 스님 연보

1929년 충청남도 공주군 우성면 동대리에서 출생

1942년 양산 통도사에서 윤고경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43년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

1949년 통도사 강원 대교과 졸업,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 수지

1950~3년 진주 응석사와 범어사, 창원 성주사 선원 등에서 금오·동산·성철스님을 모시고 정진

1953년 통도사 천화율원(千華律院) 자운율사 회상에서 율장전서 열람, 중수계법 정립

1955년 경북 봉화군 태백산 도솔암에서 6년 간 결사(結社)

1962년 해인사 하안거, 동안거 중 조계종 정화대책 중앙비상종회의원에 발탁(율장부문), 대덕법계 품수

1963년 조계종 초대 중앙종회의원 피선. 교육의원, 법규의원, 감찰위원, 역경위원, 우리말 팔만대장경 편찬위원 추대

1965~71년 해인사 퇴설당에서 안거

1976년 해인사 총림 율주 피임, 지족암에 주석하면서 법당 재건 및 요사채 등 중수함

1984~86년 해인사 주지 피임

1987년 간경화로 지족암에서 투병

1992년 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 전당 수좌 추대

1994년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추대, 10교구 본사 은해사 주지 역임

1995년 조계종 원로의원, 해인총림 수좌, 율주, 조계종 전계대화상에 추대

1996년 제10교구 본사 은해사 조실 추대

19991129(1022) 미국 하와이 와불산 금강굴에서 입적, 세수 71, 법랍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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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바라밀다심경 8폭 - 일타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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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곡당 일타대종사

 

“20년후 서양청년이 해인사에 오면 나인줄 알라”

 

친외척 가운데 41명이 출가한신심 깊은 불자가정서 태어나구도일념으로 손가락 연지공양장좌불와 등 6년간 결사 정진지계청정 수행풍토 진작 위해투철한 청정계행 실천한 율사 동곡당 일타대종사(東谷堂 日陀大宗師, 1929~1999)는 선사(禪師)요, 율사(律師)이다.

 

일생을 화두참선의 정진 일념으로 살았으며 한국불교의 청정승가 가풍을 위해 율장 연구와 정립에 진력했다.

참선수행으로 깊고 오묘한 선리(禪理)를 체득했으며 지계청정(持戒淸淨)의 수행풍토를 진작시키려 율장을 탐구하고 몸소 투철한 청정계행을 실천했다. 자운스님의 율맥을 이어받은 스님은 종단의 전계대화상으로 셀 수 없는 출가수행자를 이끌었다.

 

일타스님은 여느 출가수행인과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스님의 친·외척 41명이 출가했다. 이는 한국불교사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스님은 위법망구(爲法忘軀)의 구도일념으로 손가락을 불태운 연지공양(燃指供養)을 했다. 오른손 엄지손가락만 남기고 나머지 네 손가락을 불태웠다. 스님은 구도에 있어서는 얼음장보다 더 차갑고 비수보다 더 예리하고 독한 심정을 지녔다. 그런가하면 당신의 언행으로 인해 조그만치도 마음에 상처를 입는 불자가 있을까봐 늘 챙겼다.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자비와 배려심은 봄바람처럼 훈훈하고 따사로왔다.법상에서의 스님 설법은 변재(辯才)가 수승했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처럼 다정다감하다가도 천길 폭포처럼 우렁차기도 해 자유자재했다.

 

듣는 이들을 울리고 웃기는 건 여반장이었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것 같으나 듣고 나면 깊은 울림이 있어 큰 감동을 갖게 했다. 스님은 말년에 “나도 미국에서 죽어 그 곳에서 태어나련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수행인이 되어서 온 세계를 무대로 부처님 법을 널리 펴겠다”고 했다.

“나 죽은 뒤 20여 년 후 노랑머리에 키가 멀쭉 크고 코가 우뚝한 서양청년이 해인사 일주문 앞에서 ‘내가 왔노라’하면 그 사람이 나인줄 알아라”고 제자들에게 일렀다고 한다.

 

일평생 후학들에게 참선을 강조했고 참선한다고 하면 그렇게 좋아했던 스님. <서장(書狀)>을 1만번 읽어라. 그러면 툭 트인다고 했다. “좋은 스승은 상좌의 근기를 보아야 한다”면서 제자에게 “너는 성미가 급하니 여유를 갖고 정진하라”고 일러주었다.

 

송광사 3년결사를 끝내고 찾아온 상좌에게 ‘너는 결사를 끝냈는데 나는 그동안 투철한 정진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이런저런 사람 만나느라 나 자신을 추스를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나 이제 3·7일간 묵언정진 할테니까 니가 날 찾아오는 사람 막는 문지기 노릇해라’던 스님. 그래 놓고도 스님은 당신을 찾아왔다가 쫓겨 가는 신도들의 마음을 헤아렸다. 찾아온 신도를 제자가 쫓아 보낸 날에는 저녁공양을 하지 않았다.

걱정하는 제자에게 스님은 “너는 중생들 마음을 아프게 해놓고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 가겠냐”고 했다. 해인총림에 있을 때다. 산중 어른들이 의견을 모아 일타스님에게 주지를 맡기기로 했다. 일타스님은 그 말을 듣고는 아무에게도 말없이 걸망지고 해인사를 떠났다. 결국 나중에 주지를 맡기도 했다.

제자들에게도 ‘주지하지 말라’고 늘 말했다고 한다. 말년에 병든 몸을 시봉하는 상좌에게 ‘내가 전생에 너를 시봉했으니 금생엔 네가 내 시봉하는구나’하면서 간병하는 상좌에게 고마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스님이다.

 

제자사랑이 극진한 일타스님은 자기 앞으로 출가해 스님이 된 상좌의 장삼을 손수 바느질해 만들어 주기도 했다.

도움말 : 혜국스님(석종사 금봉선원장), 향적스님(해인사 주지), 돈관스님(은해사 주지), 혜찬스님(해인사 기획·홍보국장), 혜관스님(달성 월인사 주지).

자 료 : 일타대종사 법어집(동곡문도회 편)

 

▩ 일타스님 삶과 수행 청정승가 가풍 잇기 위해 진력한 대율사 일타스님은 1929년 9월2일(음력 8월1일) 충남 공주군 우서면 동대리 182번지에서 부친 연안 김씨 봉수와 모친 광산 김씨 상남의 2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사의(思義). 1936년 공주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스님은 1942년 졸업하고 양산 통도사로 출가했다.

스님의 출가는 막내 외삼촌의 영향이 컸다. 그는 일본 메이지대학을 다니다 입산했다. 사의는 외삼촌이 일러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도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큰 뜻을 품고 통도사로 가면서 스님은 시 한수를 읊었다. 출가시다.

 

“세속은 좁아 감옥과 같아서/ 모든 고뇌가 이로부터 생긴다/ 출가는 광활하여 허공과 같아/ 모든 즐거움이 이로부터 일어난다.”

 

1943년 윤고경스님을 은사로,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45년 통도사 보광중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 송광사 삼일암으로 가서 효봉스님 회상에서 첫 하안거를 보내고 그해 동안거는 속리산 복천암에서 지냈다.

 

1949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아 지녔다. 1950~1952년 진주 응석사 금오스님 회상, 범어사 동산스님 회상, 창원 성주사 성철스님 회상에서 안거했다.

 

1953년 3월 자운스님의 권유로 통도사 천화율원에서 석암, 지관스님과 함께 율장을 연구하고 중수계법을 정립했다. 1954년 강원도 오대산 서대에서 생식과 장좌불와로 하안거를 지냈다.

 

이때 스님은 ‘오직 중노릇 잘 하는 데만 일생을 바치겠다’는 대서원으로 혼자 적멸보궁으로 올라가 하루 3000배씩 7일 기도를 하고 손가락을 태우는 연지(燃指)를 했다.

이때 스님 나이 26세였다. 당시 스님은 대학에 가서 세속 학문을 연구할 마음도 있었고 여느 스님처럼 일본 유학에 대한 꿈도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이런저런 생각들을 단번에 다 끊었다.

 

중이 되었으면 오로지 ‘중노릇’을 잘 하자고, 모든 욕망들을 먼지로 불살라 떨쳐버렸다. 1955년 불교정화운동의 와중에서 동안거를 서울 선학원에서 지내고 태백산 도솔암으로 향했다.

 

동구불출(洞口不出), 오후불식(午後不食), 장좌불와(長坐不臥)로 6년간 혼자 결사에 들어갔다.

1956년 3월22일 이른 아침 행선(行禪) 중 홀연히 한 생각 크게 일어 법희선열(法喜禪悅) 속에서 게송을 읊었다. 스님의 오도송이다.

 

“몰록 하룻밤을 잊고 지냈으니, 시간과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다가오고, 광명이 천지에 가득 넘치는구나(頓忘一夜過 時空何所有 開門花笑來 光明滿天地).”

 

1960년 지리산 화엄사에서 전강스님 회상에서 하안거를 보내고 1961년 해인사 퇴설당에서 지월스님, 서옹스님을 모시고 하안거와 동안거를 했다.

1962년 조계종 정화대책 중앙비상종회의원(율장부문)이 되고 대덕 법계를 품수했다. 1963년 조계종 초대 중앙종회의원에 피선됐으며 교육위원, 법규위원, 감찰위원, 역경위원, 우리말 팔만대장경 편찬위원에 추대됐다.

 

1964년 통도사 극락암 경봉스님 회상에서 하안거, 동안거를 하고 1965년 해인사 퇴설당에서 안거했다.

1972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10명의 태국 스님으로부터 전통구족계를 중수(重受)했다. 여러 경전과 어록에서 가려 뽑은 글 모음집 <법공양문>을 출간했다.

 

1973년 인도 네팔 미얀마 스리랑카 캄보디아 등 10여 개국의 불교성지를 순례했다. 1974~1975년 태백산 도솔암에서 정진했으며 1976년 해인총림 율주로 <사분율의>, <불교와 계율> 등을 번역, 저술해 출판했다. 한편 해인사 지족암에 머물면서 법당 재건과 요사채 등을 중수했다.

 

1977년 불국사 선원에서 월산스님과 하안거와 동안거, 1978년 지족암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했다. 1980년 미국 LA 고려사에서 포교하고 1981년 북남미 잉카 마야유적을 돌아보았다.

 

1982~1983년 지족암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했으며 1984년 해인사 주지로 선출되기도 했다. 1987년 간경화에 걸렸으나 수행으로 이겨냈다. 1989년 중국 불교성지순례를 했으며 1990년 지리산 칠불암 아자방에서 정진했다.

 

1991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유적 답사를, 1992년 오스트레일리아 순회포교를 했으며 출가 50주년 기념 <범망경보살계>(전5권)를 출간했다. 1993년 구족계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으로 추대됐으며 법어집 <시작하는 마음>을 출간했다.

 

1994년 원로의원으로 추대되고 은해사 주지에 취임했다. 이 해 <시작도 끝도 없는 길> <영원으로 향하는 마음> <자기를 돌아보는 마음> <늘 깨어있는 마음>을 출간하고 <법공양문>을 재출간했다.

 

1995년 원로의원과 해인총림 수좌, 율주, 전계대화상으로 추대됐으며 법어집 <기도>를 출간했다. 1996년 은해사 조실로 추대됐으며 1997년에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를 출간했다.

 

1999년 <집착을 버리면 행복이 보인다>를 출간했으며 1999년 지병이 악화돼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하다 같은해 11월29일(음력 10월22일) 미국 하와이 와불산 금강굴에서 입적했다.

세수 71세, 법랍 58세. 같은해 12월5일 은해사에서 영결식과 다비식을 봉행했으며 사리 542과를 수습했다.

 

일타스님 사리탑 - 은해사부도전 2012.12. 05

해인사 일타스님 사라탑과 텁바

일타(日陀)스님 사리탑과 탑비

“하늘에 밝은 해가 참된 마음 드러내니/ 만리에 맑은 바람 옛 거문고를 타는구나/ 생사와 열반이 일찍이 꿈이려니/ 산은 높고 바다 넓어 서로 방해롭지 않구나(一天白日露眞心 萬里淸風彈古琴 生死涅槃曾是夢 山高海闊不相侵).” 스님의 열반송이다.

 

스님은 제자들에게 이같은 글을 남겼다. “진실한 말로 내 그대들에게 전별을 고하노라. 파도가 심하면 달이 나타나기 어렵고 방이 그윽하면 등불이 더욱 빛나도다.

 

그대들에게 마음닦기를 간절히 권하노니 감로장을 기울어지게 하지 말지니라.” 스님은 저서 20여 종과 육성녹음 ‘감로법문’ ‘보살의 길’ 등을 남겼고 영상기록물로는 ‘해인삼매’ ‘마하반야의 세계’ ‘보살계법문’ ‘교수불자회 수련 법문’ ‘영가법문’ 등이 있다. [불교신문3313호/2017년7월12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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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곡당 일타 큰스님 다비식 (99,12,07 은혜사 다비장)

출처 : http://blog.daum.net/samhang61/13268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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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금련산 서운암 창건

 

성월당 수인스님(1899-1997) 1940년 부산 금련산 서운암 창건

1899년 경북 월성에서 태어났고,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운문사가 위치한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고모님 댁에서 살게 되었다.

10살 되던 해에 스님은 마을로 탁발 온 청신암 행민스님을 만났고, 이를 계기로 행민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1940년 부산 금련산 서운암 창건, 부산 영주암(1954-1956년 주지), 운문사 주지(1955-1965년 주지)와 중앙종회의원, 능인학원 이사, 단일계단 비구니 증사 등을 역임하였고, 세수 99, 법랍 89세로 1997년 부산 서운암에서 입적하였다.

성월당 수인선사 영정사진

비구도량인 운문사를 비구님총림으로 만들어 이나라 불교계의 비구니의 위상을 확고히 했으며, 운문사를 복원하여 대가람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97년 3월 12일(양력) 10시 30분 법납 90세 세수99세로 입적하셨다.

성월당 수인선사 97세 생신 / 1995년 10월 26일 / 부산 금련산 서운암

성월당 수인선사 92세 생신 / 1990년 10월 21일 / 부산 금련산 서운암

수인스님은 서운암(1940년 창건)과 영주암(1954-1956년 주지) 운영을 통해 사찰 운영과 포교 분야에서 능력이 검증된 종교지도자’였다.

 

또한 수인스님은 통도사 대교, 수의과를 졸업하였고, 20안거 이상을 성만하여 선교를 겸전하였다. 1955년 당시 수인스님의 법랍은 47년(세수 57세)으로 지역 불교계에서는 중진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 수인스님은 운문사의 주지로 발탁되었을 것이다. 1950년대는 불교정화운동이 한창이었고, 대한불교조계종의 기틀을 만들어가던 시기였다. 하지만 일제의 사찰령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던 시기여서 사찰 주지 임명에도 정부의 인가가 필요하였다.

 

1. 수인스님 출가이력

1955-1966 운문사 비구니 2·3대 주지 역임 『운문사지』에서 초대 주지 금룡스님, 2·3대 주지 수인스님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질적(實質的)인 초대주지 및 2,3대 주지를 역임했다는 기록(주장)도 존재한다. 1950년대 교단정화 이후 비구니 정금룡 스님이 1955년 초대 주지로 취임하여 제8차 보수·중창하였다.

이후 2·3대 유수인, 4대 배묘전, 5대 이태구, 6대 안혜운, 7대 위혜안 스님을 거쳐 8대부터 12대까지(1977-1998) 전명성 스님이 운문사 주지와 학장을 겸임하면서 제9차 중창불사를 이룩, 대웅보전과 요사 등 29동을 신축하고, 만세루 등 기타 전각들을 중수하는 등 명실공히 대가람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불교정화운동 중 운문사가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전환되는 과정의 첫 번째 비구니 주지에 대해 두 가지 서술, 즉 금룡(金龍)스님6)이라는 주장과 수인(守仁)스님7)이라는 두 가지 서술이 존재한다. 이 문제는 비교적 쉽게 정리할 수 있다. 연구자가 검토한 여러 자료들8)을 종합하면 행정적 관점에서 초대 주지는 금룡스님이며, 수인스님은 총무였다. 수인스님이 1973년에 직접 작성한 이력서에도 1955년 운문사 총무로 기록되어 있다.

 

초대 주지인 금룡스님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발령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주지 임명 내신에 관한 일’에는 “귀하의 내신서에 나타난 정금룡사를 운문사 주지로 발령한 사실이 없음으로 이 분은 귀도에서 위촉하신 운문사 관리인으로 사료되오니 귀도에서 사표수리와 함께 면임 처리 하시기 바라오며”라고 기록되어 총무원을 통한 공식적인 발령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9) 때문에 주지 금룡으로 기록된 운문사 서류들과 함께 초대 주지란이 빈칸으로 남겨져 있는 총무원 서류도 존재한다.

 

또한 초대 주지였던 금룡스님은 일반적으로 주지 임기라고 생각하는 4년을 채우지 못하고 중간에 주지 소임을 내려놓았고, 자필이력서에 따르면 당시 총무였던 수인스님은 1958년 2월 10일 주지로 피명(被命)되었다. 그리고 1958년 11월 13일에 총무원에서 공식적으로 임명을 받고 운문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주지 소임 결정 및 사의 표명 등이 당시 사찰의 문화를 고려하면 사중회의와 당사자 사이의 합의를 통해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내신서’에서도 1958년 2월 사중회의를 통해 금룡스님의 사의를 수리하고 수인스님을 주지로 선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구술에 의하면 당사자 간의 합의가 있었다.

 

□ 운문사 초대주지 관련 수인스님과 금룡스님 관련 서술 내용 정리

 

번호 연도 자료 제목 법명 주지 업적
1 1998 깨달음의 꽃 금룡스님 초대 강원 개설
수인스님 1·2·3대 전문 강원 개설, 중창불사
2 2007 한국비구니 수행담록 금룡스님 초대 강원 개설
수인스님 1·2·3대 전문 강원 개설, 중창불사
3 2009 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 (2) 금룡스님 초대 강원 개설
수인스님 1·2·3대 전문 강원 개설, 중창불사
4 2011 운문사 금룡스님 1·2대 강원 개설, 중창불사
수인스님 3대 -
5 2018 운문사지 금룡스님 초대 전문 강원 개설, 중창불사
수인스님 2·3대 강원 교육 체계 신설, 각종 불사

 

2. 수인스님은 정화 이후 팔공산 동화사 비구니 총림에서 운문사로 옮겨오면서 소임을 맡았는데, 대처승이 휩쓸고 간 운문사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1955년 스님은 운문사 주지직을 맡아 직접 후학의 도제 양성을 위해 강원 교육 체제를 신설하면서 각종 불사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대처승의 모함과 소송 제기로 법정에 세 번이나 서게 되었다

 

1955년 8월 15일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에서 수인 스님을 청도 운문사 주지로 임명하는 임명장이 하달되었다. 1950년대 초반부터 몰아닥친 비구와 대처의 갈등은 운문사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다행히 광복 후 최초의 운문사 주지로 수인 스님이 임명됨으로써 운문사는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자리 잡아갔다.

이처럼 종단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수인 스님의 포교와 불사의 원력은 끝이 없었다. 서운암 근처의 영주암 주지를 겸직하여 3년의 소임을 여일하게 살고, 범어사 주지를 역임한 조정관 스님께 무위 양도, 또 다른 포교의 당간을 세웠다. 수인 스님은 세수 58세(1955)에 운문사 초대 주지가 된 뒤 4년씩 연이어 3회를 근속하였다. 오늘날 운문사가 한국불교 최대의 비구니 총림으로 자리 잡게 되는 그 시작이 곧 수인 스님의 수행력과 땀에 있었던 것이다.

 

3. 전 주지였던 대처승 쪽에서 사찰 소유권을 빼앗으려는 소송을 벌였다. 이 소송은 대처승 쪽의 항소로 대법원까지 갔지만, 결국 불법(佛法)과 세법(世法) 모두에서 완전히 승소함으로써 운문사는 명실상부한 비구니 수행도량이 되었다. 수인스님은 운문사를 지키기 위해 법정에 선 것만도 여러 번이었다.

 

4. 운문사 주지 진산식도 치르지 못한 채 소유권 문제로 2년여 간 재판에 매달리다 보니 정작 승소 판결을 받았을 때는 사찰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5. 운문사 주지를 한 만기 살고 나서 마무리하지 못한 불사와 사원정리를 위해 두 번째로 주지 소임을 임명받았다.

 

6. 수인 스님은 1955년 8월 15일부터 1966년 12월 30일까지 만 12년간 운문사 주지 소임을 사는 동안, 당우와 전각 정비는 물론 불보살 개금 등 사찰 불사를 성취하였다. 나아가 운문사에 비구니총림을 세워 비구니 수행도량의 면모를 새롭게 일궜다.

 

출처: https://www.e-jbs.org/archive/view_article?pid=jbs-12-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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