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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연방/사찰순례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 - 경주

by 연송 김환수 2021. 6. 20.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斷石山 神仙寺 磨崖佛像群)

 

신선사 마애불상군내에 있는 금석문에 의하면 신선사는 7세기경 잠주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확인된다.

 

김유신이 17세때 신선사 석굴법당에서 기도중 난승도인으로 부터 신검을 받아, 삼국을 통일 하였다고 전해진다.

 

1969년 한국일보사 주관 '신라오악 조사단' 에서 금석문 분석등 신선사 마애불상군에 대하여 면밀한 조사를 시행한 결과, 불보살상의 정확한 크기와 공양상의 자세한 설명이 첨부될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신선사는 7세기경 '잠주' 라는 스님이 창건하고, 창건초기 대가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했다. 지금은 미륵전(국보 199호 신선사 마애불상군), 대웅전, 산령각, 요사채 등이 있는 작은 암자로 되어있다.

 

미륵전(국보 199호 신선사 마애불상군)은 서쪽을 출입구로하는 하나의 건물로 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석굴 위쪽 바위면에 기둥이 놓였을만한 홈이 파여있고, 석굴주변으로는 기와 파편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신선사(神仙寺)는 경북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단석산(斷石山)에 있는 사찰이다.

 

대한불교법화종에 소속된 절이다. 7세기에 활동하던 자장(慈藏)의 제자잠주(岑珠)가 창건했으며, 김유신(金庾信:595∼673)이 이 절에서 삼국통일을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절이 들어선 단석산의 산 이름은 김유신 설화에서 유래한다. 김유신이 한 노인으로부터 신검(神劍)을 얻어 이 산의 바위굴에서 검술을 닦았는데, 시험 삼아 칼로 바위를 내리치니 바위가 갈라졌다. 이에 산 이름을 단석산이라 했고 뒤에 갈라진 틈에 절을 세워 단석사라 불렀다는 것이다.

 

1969년 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신라오악(新羅五岳) 조사단이 바위에 새겨진 명문을 분석하여 석굴의 본래 이름이 신선사였음을 밝혀냈다. 석굴 바위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옛날 절 아래에 살던 한 젊은이가 이곳에 올라와 보니 노인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들이 두는 바둑을 구경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이미 백발의 노파가 되어 있었다. 50년이 지난 것이다. 그 뒤부터 이 바위를 신선이 바둑을 둔 곳으로 불렀고, 절 이름도 신선사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석굴은 작은 암자처럼 쓰이고, 50m쯤 아래에 본절이 들어서 있다. 본절의 건물로는 관음전과 산령각·요사채 등이 있다. 한편 석굴은 동남북 3면이 갈라진 바위로 둘러싸여 있으며, 옛날에는 지붕을 얹어 사용했다고 한다. 안쪽 벽에 조각된 불상과 보살상은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斷石山 神仙寺 磨崖佛像群)이라는 명칭으로 국보 제199호로 지정되었다. 불상 조성 양식으로 보아 6세기 유물로 추정된다. 불상·보살상이 8구, 인물상이 2구 있으며, 주민들은 탱바위라고 부른다.

단석산 중턱에 이르면 신선사 절 옆에 거대한 암벽이 ㄷ자 모양으로 높이 솟아 하나의 석실(石室)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인공적으로 지붕을 덮어서 석굴 법당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바위면에는 10구의 불상과 보살상이 새겨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斷石山 神仙寺 磨崖佛像群)

 

제작연도 : 7세기경

크기 : 불입상 820cm, 반가상 102~116 cm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89

문화재 지정번호 : 국보 제199호

 

신라 김유신 장군의 수도처로 알려져 온 단석산 신선사에는 높이 약 10m, 길이 18m, 너비 3m에 이르는 ‘ㄷ’ 자형의 천연석실(石室)이 있는데 명문에 의해 상인암(上人庵)이라고도 불리운다. 서쪽으로 개방된 채 이 석실 안에는 10구의 불 · 보살상과 400여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즉 북쪽에 7구의 불 · 보살상과 인물상이 있어 위쪽으로 미륵보살반가상을 포함한 4구의 불 · 보살상을 일렬로 배치하고 그 아래쪽에 공양자상 2구의 여래상 1구를 배치하였다.

이들과 마주보는 남면 바위에는 "경주상인암조상명기(慶州上人庵造像銘記)"로 시작되는 긴 명문(銘文)이 음각되었고 마멸이 심하긴 하나 보살입상 1구도 함께 새겨져 있다. 동쪽 면에도 나형(裸形)의 상체에 왼손을 들어 가슴에 대고 오른손에 보병을 쥔 보살입상이 있다. 이들과는 따로 떨어져 동북쪽 바위 모퉁이에는 독립된 바위면에 높이 8.2m의 고부조(高浮彫)로 된 거대한 여래입상이 있는데 앞서의 명문귀절로 미루어 위 보살상들과 함께 삼존형식을 취하고 있는 본존상임을 알 수 있다. 이 자연석실은 초기 석굴사원의 시원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로 당시 신앙형태, 특히 화랑도와 미륵신앙과의 관계를 밝히는 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도판에 보이는 이 거대한 미륵불입상은 앞서 말했듯이 상인암 불상군(上人庵 佛像群) 중 동북쪽 바위에 고부조로 새겨진 본존불로 얼굴에 고식(古式)의 미소를 띄고 있는데 머리에는 2단의 육계가 마치 원오리소조보살상의 결발형태를 연상케 한다. 법의는 통견으로 두터운 U자형 옷깃 사이로 드러난 가슴에 군의(裙衣) 매듭이 있고 두 손은 시무외·여원인을 하였으나 구체적인 팔의 묘사는 없다.

 

반가상

본존상 향좌 측의 북면 바위에 얕게 부조된 7구의 상 가운데 위쪽에 있는 상들이다. 반가상을 포함해 모두 4구의 불 · 보살상들을 왼쪽에서 오른쪽을 향해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가장 안쪽에 있는 반가상만이 정면상일 뿐 나머지 3구의 입상은 모두 서쪽으로 트인 'ㄷ'자형의 석실 안쪽에 있는 동면 본존상을 향하고 있으며 하나같이 왼손을 본존 쪽으로 내밀고 있어 마치 아래쪽의 두 인물상을 본존 쪽으로 인도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들 3구의 입상 중 양쪽 여래상은 우견판단의 법의를 착용하였으며 가운데 보살상은 통견의 천의를 걸치고 있다. 반가상은 삼산관 형태의 보관을 썼으며 원형의 두광이 있고 상체는 나형(裸形)이며 오른손을 턱에 대고 오른다리를 왼다리 위에 반가한 전형적인 형태이다. 모두 보주형 두광이 있고 발 아래에는 연화좌를 갖추었다.

 

공양자상

상인암 북쪽 면에 있는 반가상 바로 아래쪽에 새겨진 2구의 인물상이다. 두 구는 앞뒤로 서서 본존상을 향해 걸어가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앞 상보다 뒤쪽의 상이 약간 작아 원근감이 느껴진다. 앞 상은 양손에 자루 달린 향로를, 뒤 상은 나뭇가지를 쥐고 있어 공양상으로 추정되며 머리에는 앞쪽이 휘어진 높은 버선 형태의 관모를 쓰고 있고 상의가 길며 하의는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어 당시인의 복제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아울러 이 공양자상은 이 석굴사원의 창건과 관련된 인물로 추정되기도 한다.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안내도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斷石山神仙寺磨崖佛像群)은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乾川邑) 송선리(松仙里)에 있는 6세기경 신라시대의 마애불상군으로 1979년 5월 22일 국보 제199호로 지정되었다. 이 유적은 단석산(斷石山) 중턱에 위치하여 김유신(金庚信) 장군과 관계가 있는 화랑(花郞)의 유적으로 추정되며, 높이 30m의 거대한 암석이 ㄷ자형으로 솟아 석실을 형성하고 있다. 북쪽 바위 2개 중 구석 바위에는 거대한 여래상(如來像)을 주존(主尊)으로 하였고, 동쪽 바위에는 보살상을, 남쪽 바위에는 보살상과 명문(銘文)을 조각하여 3존(三尊)의 형식을 이루었다. 북쪽의 또 한 바위에는 위쪽에 여래와 보살 4구를, 아래에 공양상(供養像) 2구와 여래상 1구를 조각하여 도합 10구의 상을 조각하였다. 동쪽 바위에는 '경주 상인암 조상명기(慶州上人巖造像銘記)'라는 400자 가까운 명문이 음각되었고, 북쪽 바위에는 다른 여래입상 ·보살상과 함께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었다. 반가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왼손을 들어 주존 앞으로 인도하는 형상이며, 반가상은 고신라기의 마애상으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이 불상들 밑의 주존 쪽 가까이에 공양상 2구가 주존을 향하고 있으며, 암면(巖面) 하단 가까이에 작은 여래입상이 있다.

 

여래입상

보주형 두광과 단변복연좌를 지니고 있는데 연화문에는 자엽이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좌수에 걸쳐서 수하되었다. 우수는 흉상에 들어서 오지를 폈으며 좌수는 신측 밖으로 들어 또한 오지를 모두 펴고있다. 이와같은 좌수형식은 다른 두 입상과 또한 동일하여서 마치 이들이 반가사유상과 주존불인 미륵여래입상을 지칭하고 인도하고 있는 형식을 보인다.

 

(하)~최하부에 자리잡은 여래입상으로 우견편단이고 석굴내 다른불상과는 달리 다른 연대에 제작된것으로 추정.

 

삼존불

반가사유보살상(우) - 연화대좌와 원형두광을 구비하고 있다. 삼면관을 쓰고 동안을 보이며 경부에 삼도는 없고 상반 나신이다. 우수를 구부려서 우협에 대어서 사유형을 보이며 좌수는 수하된 좌족의 무릎에 얹어서 동형의 반가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광배와 대좌등을 구비한 고신라 유일의 마애석상이다.

 

여래입상(중) - 두정에는 육계가 있고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그아래로 상의의 주름이 보인다.

우수는 흉상으로 들었으며 좌수는 신측으로 나가서 굴내(주존불)을 가르킨다.

 

보살입상(좌) - 머리에는 삼각보관을 얹었으며 삼도는 없다. 천의는 양견에 걸쳤으며 복하에서 U자형을 이루고 다시 양원에 걸쳐서 신측으로 길게 수하되었다. 우수는 복부에 좌수는 좌신측 밖으로 나가서 굴내(주존불)을 가르킨다.

 

미륵여래입상

이 석굴의 주존불로서 거대한 장구형(長矩形)으로 후각(厚刻)되어있다.

상호는 둥글고 고대의 미소를 보이며 두정에는 두개의 육계형이 특이하다.

삼도는 없고 통견의로서 좌우대칭의 각법을 따랐으며 법의는 길게 수하되어 발 좌우 아래까지 이르고있다.

좌우양수는 오지를 펴서 여원시무외(與願施無畏)의 통인(通印)을 하였다.

높이는 약 칠미터로서 삼국초 마애불의 최고최대의 작품.

 

지장보살상

관세음보살상과 같이 미륵여래상의 협시상을 이루며

금석문에 보이는 두보살상중의 하나로 추정됨

양식은 관세음보살상과 유사하며 양수가 다르다

높이는 약 일곱자 또한 전각 되었으며 오랜세월의 마모가 심하여 주선을 찾기 어렵다.

 

공양상

(좌) 주존불인 미륵불을 향한 자세로 손에는 나무가지 형상을 잡고있다

(우) 자루가 달린 향로를 손에쥐고 미륵불을 향해 공양하는 입상으로서 몸의 높이는 122cm이고 석굴 창건의 발월인으로 추정. 금석문 중에는 " 보살계제자잠주 " 라는 문자가 보인다.

 

신선사 금석문(神仙寺 金石文)

경주 상인암 조상명기(慶州上人巖造像銘記)'라는 400자 가까운 명문이 음각되었다.

약 삼십행, 각행 열아홉자 / 글자크기는 대략 2~4cm정도

석굴내 남벽면에 기각된 명문은 약 30행으로서 매행 19자인데 그 중 약 2백여 자가 현재까지 판독되고 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寺名뿐 아니라 主尊名을 알 수 있었다. 사명에 대해서는 "인령허 명신선사"(因靈虛 名神仙寺)라고 명기하였고, 존명에 대해서는 "작미륵석상일구 고삼장 보살이구"(作彌勒石像一軀 高三丈 菩薩二軀)라 하였으니 주실의 봉안상 이야말로 미륵삼존으로서 고신라 최대의 조상임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명문중에 "잉어산암하 창조가람"(仍於山巖下 創造伽藍)이라 하였는데 이 가람이야말로 바로 이곳 自然石窟인 상인암 대법당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미륵삼존석굴의 조성인연에서 사명을 신선이라 한 것을 알 수 있다.이에 간여한 인명으로는 오직 "보살계 제자 잠주"(菩薩戒 弟子 岑珠)만이 알려졌을 뿐이다.

 

삼국 최대의 거상을 봉안한 우리나라 초기의 석굴법당으로 추정됨에 따라서 당대의 미륵신앙과 이에 귀의하여 스스로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일컷던 화랑도와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강원대의 신종원교수는 조상명기(造像銘記) 中 앞의 "잠주"(岑珠)를 "잠탁"(岑喙)으로 판독함으로써, 기왕에 인물로 알려져 왔던 내용을 신라육부(新羅六部)중의 하나이며 中古期(중고기)에 왕비족(王妃族)으로서 기능하였던 잠탁부(岑喙部)로 읽고 신선사마애조상군 (神仙寺磨崖造像群)이 이들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지금까지의 석굴조성이 화랑집단과 관련되어서 논의되어 온 것과는 성격이 매우 다른 것이어서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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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 단석산군

 

Ⅰ. 신선사 마애불상군

 

단석산 신선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의 우징골(雨徵谷) 깊숙히 거의 산정상에 자리한 절이다. 이 유적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 산천조를 비롯하여 『동경잡기』에 소개된 바 있고, 일제시대에 일본인에 의해 답사. 소개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국내학자들에 의해 답사 및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 중 최초의 본격적인 학계의 주목은 해방 후인 1969년 5월에 이르러 한국일보사 주관인 신라 삼산조사단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졌다.이후 신선사 불상군은 고신라 최대의 불상이라는 점에서 주로 미술사분야에 한정해서 조사 및 연구가 이루어졌고, 불상의 조성연대에 대해서 황수영은 [6세기말 또는 7세기초], 문명대는 [7세기 1/4분기], 김리나는 [7세기 전반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위의 연구결과는 10여 구의 불상이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시기별로 제작되었을 가능성보다는 동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았으며, 또한 남면에 있는 조상명기에 대한 깊은 연구가 선행되지 않은 채 불상의 조각기법만으로 시대편년이 이루어진 것이어서 다소 문제가 노정 되고 있다. 여기에서 1969년 당시 조사를 했던 신라 삼산 오악조사단의 조사과정과 결과를 적기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황수영은 이 조사와 전후 3년하여 경주시내에 자리잡은 낭산유적 (狼山遺蹟)을 담당하였다. 그 중에서도 단석산 우징동(雨徵洞) 깊숙이 자리잡은 전칭상인암(傳稱上人巖)(탱바위 또는 僧像巖)에 대한 1차 조사는 이 유적 해명의 첫 착수가 되었다. 그리하여 특히 김유신 장군에 얽힌 단석산 유적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조형 유물의 수습과 정신적 내실의 파악이 오직 이 상인암을 중심으로 시도되었다.

전후 10일간의 조사는 첫째 이 상인암조상군(上人岩彫像群), 둘째 석굴사원(石窟寺院)으로서의 복원고찰(復元考察), 셋째 이곳 암벽에 보존된 고신라 유일(古新羅 唯一)의 마애석각 금석문(磨崖石刻 金石文)의 판독(判讀)이란 3점에 집중되었다. 그리하여 이를 위하여 선태(蘚苔)의 제거(除去)와 발판의 가설이 먼저 이루어 졌다. 동시에 상인암이 자리잡은 단석산뿐 아니라 이와 동서로 마주 대하는 신라의 요새 부산성 일원(富山城 一圓)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이 상인암 유적의 규명을 위하여 도움이 되었다.

첫째 『동경잡기(東京雜記)』가 "유암흘립 고백여척"(有巖屹立 高百餘尺)이라 특기(特記)한 이 상인암은, 높이 827미터의 단석산정 서남직하(斷石山頂 西南直下)에 자리잡은 자연의 사대거암(四大巨巖)을 가킨다. 이들은 동남북 3면에 병립되어서 ㄷ자형의 석실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 深山중의 자연의 석실 안에는 십여 미터 절벽에 인공을 가하여 당대 신앙의 불보살 등 대소 10구를 각 면에 새겨 놓았다. 평면 길이 약 18.2미터, 폭 약3미터로 장방형을 이룬 석실 동북우에 독립한 큰바위에는 전면 가득히 높이 약 7미터의 여래입상을 양각 하였으며, 이 거상을 중심으로 좌측과 전면에는 또한 거구의 보살입상 각 1구를 조각하여 상기한 여래상과 더불어 삼존상을 이루었다.

이들 3존 중 주존 여래가 지니는 둥근 동안(童顔)과 양손의 여원?시무외인(與願.施無畏印) 그리고 고졸한 전면위주의 각법과 통견대의(通肩大衣)의 양식 등에서 보살상과 더불어 삼국말기의 조성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그 얼굴에 나타난 미소상은 일찌기 충청남도 서산의 백제 서산마애삼존불에서도 본 바 있는 古式의 미소로서 동안(童顔)과 더불어 그 연대의 高古함과 당대의 신앙을 오늘에 보여 주고 있다.

또 다른 일군(一群)의 佛像 4구가 북암(西) 上面에 일렬로 배치되었다. 이들은 서로부터 여래와 보살의 입상이 모두 동쪽을 가리키면서 교대되었는데 東端의 1상은 이들과 달리 반가사유형의 正面한 보살좌상임은 특히 주목된다. 이러한 반가양식의 금석상(金石像)은 삼국시대(三國時代) 각국에서 모두 유행되어서 유례(類例)를 남기고 있다. 높이 약 90센티미터에 달하는 금동상(金銅像) 2구는 모두 세계의 걸작이다. 또 신라의 반가사유석상으로는 경주 송화산 금산재 원재(金山齋 原在)의 일례가 가장 일찌기 알려진 것으로서 오늘날 국립경주박물관에 이안되어 있는데 頭部가 없어 완품은 아니며 65년에 봉화 북지리에서 발견된 동양최대의 원각(圓角)된 거대한 상(現在 경북대학교박물관에 移安)도 상반신이 없고 연대도 늦은 시기이다.

그리하여 이상 양례에 비한다면 지금도 원위치를 지키면서 완전한 자태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는 오직 이곳 단석산 신선사 석굴의 마애일상 뿐이다. 이들 군상 중에서는 특히 여래상의 우견편단상이 주목되었는데, 다시 이들 밑으로는 최소의 여래상 1구와 일찌기 알려진 인물상 2구가 동향하여 각기 향로와 수지형을 잡고 있는데 그들의 의관이 또한 신라 고대의 모습을 전하여 주고 있다. 이들 2인은 이 석굴사의 조성과 인연을 맺었던 그 당시의 실재 인물로서 오실주존(奧室主尊)을 향한 공양상으로 추정된다. 이들 북암(北巖-西) 上下 합계 7상은 위의 삼존상과 비교할 때 크기에는 차이가 있으나 양식에서는 거의 동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었다.

이들 합계 10상을 3면에 지니고 서방으로 개방된 이 천연의 석실은 지면의 고저와 불상의 배치방안 등에서 전후의 양실로 구분하여 고찰할 수가 있었다. 즉, 전실은 후실에 봉안된 삼존대상에의 예배을 위한 곳이며 후실은 이 석굴의 주존인 1여래 2보살의 봉안을 위한 천성의 배안이다. 이와 같이 前後 兩室로의 구분은 인도의 초기 석굴에서 비롯하여 토함산석굴에서 더욱 정비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중간 과정인 삼국기 석굴의 사원형식을 이곳에서 볼 수가 있다. 동시에 이와 같은 방형의 석실은 중국 석굴에서뿐 아니라 삼국시대 慶州 남산삼화령 미륵삼존석굴(선덕왕대)이나 팔공산 군위의 아미타삼존석굴(統一 直後)에서 그 계보를 더듬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석실 조사에서 가장 관심을 보였던 곳은 이들 4암정상을 덮었던 거대한 목조와즙옥개(木造瓦葺屋蓋)의 확인이다. 이 목조옥개의 추정은 1968년 가을의 예비조사 때 석실 안팎의 와편 분포상태에서 짐작되는 바 있었는데 이번 석실 주위 특히 남암정부의 암반에 이르는 식굴에서 삼국부터 통일기에 이르는 각종 와류와 토기편 등이 수습할 수 되었다. 이에 따라서 불상조성과 동시에 이 자연석실을 그대로 불당으로 전용함으로써 석굴사원으로서의 면목을 갖추게 하엿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고대 석굴상과 그 봉안을 위한 목조건축의 결구(結構)는 인도에서 비롯하여 中國 특히 육조말 석굴 양식과 연결되는 동시에 그 사이 국내에서 조사된 삼국에서 신라, 고려에 이르는 적지 않은 석굴사원에서 확인되었는데, 이곳에서 다시 신라의 최고례가 확인 된 것이다.

끝으로 석굴내 남벽면에 기각된 명문은 약 30행으로서 매행 19자인데 그 중 약 2백여 자가 현재까지 판독되고 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寺名뿐 아니라 主尊名을 알 수 있었다. 사명에 대해서는 "인령허 명신선사"(因靈虛 名神仙寺)라고 명기하였고, 존명에 대해서는 "작미륵석상일구 고삼장 보살이구"(作彌勒石像一軀 高三丈 菩薩二軀)라 하였으니 주실의 봉안상 이야말로 미륵삼존으로서 고신라 최대의 조상임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명문중에 "잉어산암하 창조가람"(仍於山巖下 創造伽藍)이라 하였는데 이 가람이야말로 바로 이곳 自然石窟인 상인암 대법당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미륵삼존석굴의 조성인연에서 사명을 신선이라 한 것을 알 수 있다.이에 간여한 인명으로는 오직 "보살계 제자 잠주"(菩薩戒 弟子 岑珠)만이 알려졌을 뿐이다. 삼국 최대의 거상을 봉안한 우리나라 초기의 석굴법당으로 추정됨에 따라서 당대의 미륵신앙과 이에 귀의하여 스스로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일컷던 화랑도와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강원대의 신종원교수는 조상명기(造像銘記) 中 앞의 "잠주"(岑珠)를 "잠탁"(岑喙)으로 판독함으로써,기왕에 인물로 알려져 왔던 내용을 신라육부(新羅六部)중의 하나이며 中古期에 왕비족(王妃族)으로서 기능하였던 잠탁부(岑喙部)로 읽고 신선사마애조상군 (神仙寺磨崖造像群)이 이들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지금까지의 석굴조성이 화랑집단과 관련되어서 논의되어 온 것과는 성격이 매우 다른 것이어서 주목되고 있다. 석굴내 각 암벽에 새겨진 불보살상의 양식과 크기에 대한 황수영의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다.

 

Ⅱ. 北巖(북암)

 

1. 여래입상(如來立像)(A)

석굴의 主尊으로서 거대한 장구형(長矩形) 1石 전면에 두껍게 조각되어 있다. 상호는 둥글고 고식의 미소를 보이며 머리의 정상에는 2단의 육계형이 특이하다. 삼도는 없고 내액의(內腋衣)가 엿보이는 통견의(通肩衣)로서 좌우대칭의 조각기법을 따랐으며 法衣는 길게 아래로 늘어뜨려 발좌우 아래까지 이르고 있다. 좌우 兩手는 다섯 손가락을 펴서 여원인(與願印)과 시무외인(施無畏印)의 通印을 하고 있다. 전체높이 약 7M로서 삼국기 마애불(三國期 磨崖佛)의 最古 最大의 作品이다.

 

 

2. 반가사유보살상(半跏思惟菩薩像)

정면상으로 연화대좌와 원형 두광을 구비하고 있다. 삼면관을 쓰고 동안을 보이며 경부에 삼도는 없고 상반라신이다. 오른손을 꺽어 오른쪽 뺨에 대어서 사유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왼손은 아래로 내린 외쪽발의 무릎위에 얹어서 통형 (通形)의 반가형식(半跏形式)을 나타내고 있다. 전체의 형식에서 국립중앙박물관소장의 國寶 반가사유상과 유사하다. 원위치를 지키고 광배와 대좌등을 구비한 고신라 유일의 마애석상이다. 전체높이 109cm이며 얇게 조각되어 있으나 각선은 분명하다

 

3. 여래입상(B)(如來立像)

보주형 두광이 있으나 밑의 연화좌는 분명하지 못하다. 두정에는 육계가 있고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그 아래로 상의(裳衣) 주름이 보인다. 우수는 흉상(胸上)으로 들었으며 좌수는 신측으로 나가서 굴내를 가리킨다. 정면상이며 全高 116cm이다.

 

4. 보살입상(菩薩立像)

정면상으로서 머리에는 삼각보관 (三角寶冠)을 얹었으며 三道는 없다. 天衣는 양견(兩肩)으로 걸쳤으며 복하 (腹下)에서 U자형을 이루고 다시 양완 (兩腕)에 걸쳐서 몸측으로 길게 수하(垂下)되었다. 右手는 복부에, 左手는 좌신측(左身側) 밖으로 나가서 굴내를 기리킨다. 둥근 두광과 연화좌를 지니고 있는데 身高는 102cm이다.

 

5. 여래입상(如來立像)(C)

이 곳의 세입상중 조각이 가장 선명하다. 보주형(寶珠形) 頭光과 단판복련좌를 지니고 있는데 연화문에는 자엽(子葉)이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둥글고 큰 상호에 비해서 육계가 매우 적은 것도 특이하다. 두 눈은 부어오른 초기 석불상의 특색을 지녔으며 두귀 또한 길고 삼도는 없다. 법의 우견편단이며 왼손에 걸쳐서 아래로 내려뜨렸으며 신체하단에는 裳衣가 보인다. 오른손은 가슴위에 올려서 다섯 손가락을 폈으며 왼손은 몸밖으로 들어서 다섯 손가락을 펴고 있다. 이와같은 왼손형식은 다른 두 상과 동일하여서 마치 이들이 동쪽 끝에 있는 반가사유상과 나아가서는 굴내의 주존인 미륵여래입상을 지칭하고 인도하는 듯하다. 이 상은 이곳의 4상중 반가사유상과 더불어 주목할 만하다. 몸의 높이는 105cm이다.

 

6. 인물상(人物像)(A)

동쪽 굴내부를 향하여 공양하는 입상으로서 두 손으로 자루달린 향로(柄香爐)를 잡고 있다. 머리에는 독특한 관모를 썼으며 상하의제(上下衣制)의 구별이 주목된다. 얇게 조각되어 있으나 상호의 두 눈은 뚜렷이 표시되어 있어 偉丈夫임을 느끼게 한다.몸의 높이는 122cm이며 아마 이 석굴조성의 발원인으로 추정이 된다.명문중에는 "보살계제자잠주"(菩薩戒弟子岑珠)라는 문자가 보이고 있다.

 

7. 인물상(人物償)(B)

인물(A)에 비해 약간은 작으나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점과 자세와 복제가 동일하다. 다만 두 손으로 나뭇가지형(樹枝形)을 잡고 있는 것이 앞의 상과 다를 뿐이다. 이 인물상 역시 공양상으로 추정된다.

 

8. 여래입상(如來立像)(D)

최하단에 자리 잡은 가장작은 입상으로서 우견편단이다. 몸의 높이는 57cm이며 조각연대는 다른 상에 비하여 늦은 감이 있다.

 

Ⅲ. 東巖 (동암)

 

1. 보살입상(菩薩立像)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상으로 마멸이 심하나 대체의 윤곽을 더듬을 수 있다. 앙련대좌 위에 직립하였으며 오른손으로 보병(寶甁)을 들고 왼손은 가슴위에 올렸다. 전체 높이는 약 3m이다.

 

Ⅳ. 南巖 (남암)

 

1. 보살입상(菩薩立像)

동쪽 바위면에 있는 보살상과 같이 미륵여래입상의 협시상을 이루며 명문에 보이는 두 보살중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조각양식은 동쪽 것과 비슷한데 두 손이 다르다. 전체 높이 약 2.1m이며 얇게 조각되어 있다. 또한 오랜세월을 견더온 탓에 마멸과 손상이 심해 조각선을 찾기가 어렵다.이 석굴내에는 현재 모두 10구의 불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들 10상중의 중심은 역시 미륵삼존에 있으니, 주존등에 대하여서는 명문에도 명기되어 있으므로, 미륵삼존을 봉안한 사실과 寺名이 神仙寺임을 알 수 있다. 고신라에서 신선은 곧 미륵선화(彌勒仙花)인데 仙은 화랑의 별칭이기도 하며 國仙, 仙郞, 仙風의 선은 모두 이러한 뜻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선사가 곧 미륵사임은 사명과 주존불에서 짐작할 수가 있다.신선사는 본래 자연적인 석굴을 이용하여 석굴법당을 만들고 불보살상 10구를 봉안하였는데 이들 불상의 조성연대는 양식으로 미루어 삼국말 6세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은 특히 주존인 미륵여래입상과 반가사유 미륵보살상의 양식에서 고신라의 가장 초기작품으로 보고 있다. 동시에 명문의 문체 및 자체의 高古함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리하여 신선사의 창건이 매우 오래됨과 신라 삼산의 중앙에 자리잡은 중악(中嶽) 가까이 창조가람(創造伽藍)한 그 당시의 깊은 사연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