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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연방/사찰순례

가야산 해인사

by 연송 김환수 2022. 10. 31.

해인사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에 있는 절이다. 사적 제504호.

 

해인사는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順應), 이정(利貞) 두 스님이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 10월16일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 되었다.

 

순천시의 송광사, 양산시의 통도사와 함께 한국의 3보 사찰이다.

3보란 불교에서 불(佛), 법(法), 승(僧)을 뜻하는데, 해인사는 법보(팔만대장경), 통도사는 불보(진신사리), 송광사는 승보(수계사찰) 사찰이기 때문이다.

더하여 부산광역시의 범어사, 구례군의 화엄사 등과 함께 5대 사찰로 불리기도 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다.

 

법보종찰 가야산 해인사

대적광전

해인사는 대한민국의 국보이자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이 보관되고 있는 곳이다.

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 역시 국보이자 세계문화유산이다. 그래서 팔만대장경을 보관 중인 곳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은 본래 강화도에 보관하던 대장경을 조선 태조 때에 옮겨오면서 장경판전이 내부에 지어졌다.

 

경판은 가로 2척 3촌(약 69.7cm), 세로 8촌(약 24.2cm), 두께 1촌 2분(약3.6cm)이며, 약3.5kg쯤 무게가 나간다.

판면은 가로 1척 5촌(약 45.5cm), 넓이 7촌5분(약 22.7cm)으로 위아래에 경계선을 그었고, 한 면에 23행씩 행마다 14자씩 앞 뒤 양면에 444자쯤 새겼다.

새긴 글자의 크기는 사방 5분(약1.5cm)쯤이다.

판의 뒷면 끝에는 새긴 경의 제목, 장수(張數), 천자문 차례에 따른 함이름을 새겼고, 경판 양쪽 끝 각목에도 같은 표시를 새겨 정리하고 찾기 쉽게 해놓고 있다.

 

해인사 성보박물관

김영환 장군 공덕비

6.25 당시 지리산과 가야산에 숨어있는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해인사 폭격을 지시한 미 군사고문단의 명령에 항명하며 우리민족의 국보인 팔만대장경을 지킨 고김영환장군의 공덕비로 해인사 입구에 세워져 있다.

6·25 전쟁 당시 하늘길을 지키기 위해 전투기에 오른 임관 5년 차 30대 조종사는 1951년 8월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납득하기 힘든 명령을 받았다.

가야산 일대에 잠복하고 있던 인민군 600여 명을 소탕하기 위해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공중에서 폭격하라는 미 군사 고문단의 지시였다.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사천기지에서 출격한 고 김영환 장군(1921~1954)은 “숲이 짙어 적을 판별할 수 없다”며 명령을 거부하고, 전시에 명령 불복종에 따른 즉결처분을 각오하며 편대원들에게 폭격이 아닌 기관총 사격 대체를 명했다.

 

지난 2010년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킨 뜻을 기려 문화훈장 중 가장 높은 금관문화훈장(1등급)으로 추서됐지만 당시에는 명령불복종 문책을 당했다.

 

김 대령은 경위 추궁 자리에서 팔만대장경을 영국이 식민지로 삼고 있는 인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셰익스피어와 비견했다.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유산인 팔만대장경을 수백 명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잿더미로 만들 수 없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미 군사 고문단의 항의를 받고 분노한 이승만 대통령은 김 대령을 포살(砲殺)하려 했지만 김 대령의 형이었던 김정렬 당시 공군참모총장으로부터 경위 보고를 받고 명을 거뒀다.

 

1949년 공군 창설 당시부터 7인 간부의 일원으로 활약해온 김 대령은 1954년 준장 신분으로 사천에서 강릉기지로 향하던 중 악천후로 전투기가 추락하면서 34세를 일기로 순직하였다.

 

성철스님 사리탑

길상탑

원경왕사 비각

가야산 해인사

백용성 조사 유적도량

용성조사의 법명 용(龍)자와 사리탑의 탑(塔)자를 택하여 용탑선원이라고 칭하고, 참선 정진하는 도량으로 건립하였다.

 

극락교 좌측에 백용성 조사 유적 도량, 우측에 독립운동 민족대표, 雲門胡餠團(운문호병단) 이라고 적힌 석주가 세워져 있다. 칠불보궁 전각 안에는 백용성 조사와 12제자가 벽면에 그려져 있다.

 

雲門胡餠團(운문호병단)이 나오는 게송(偈頌)

고암스님은 1938년 5월 용성스님에게 법을 이었다. 당시 용성스님은 “선재(善哉)라 만고풍월(萬古風月)이로다”라며 게송을 전했다.

萬古風月(만고풍월) 知音者唯(지음자유) 만고에 풍월을 듣는이 누구런가

古庵獨對(고암독대) 風月萬古(풍월만고) 고암을 홀로 대하니 풍월이 만고로다.

佛祖元不會(불조원불회) 掉頭吾不知(도두오부지) 부처와 조사도 원래 알지 못하고 머리를 흔들며 나도 또한 알지 못하며,

雲門胡餠團(운문호병단) 鎭州蘿蔔長(진주라복장) 운문의 호떡은 둥글고 진주의 무(무우)는 길기도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