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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절 방/제사,축문,지방 등

방상시 (方相氏)

by 연송 김환수 2020. 6. 18.

방상시(方相氏)

 

방상시는 나자(儺者)의 하나이다. 금빛의 네 눈이 있고 방울이 달린 곰의 가죽을 들씌운 큰 탈을 쓰며, 붉은 옷에 검은 치마를 입고 창과 방패를 가졌다.

 

※ 나자(儺者)

나례(儺禮)를 거행하는 사람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초라니, 방상시(方相氏), 아이 초라니, 지군(持軍) 등이 있다.

나례(儺禮) : 궁중과 민간에서 잡귀를 쫓기 위하여 섣달 그믐날에 베풀던 의식이다.

 

방상시(方相氏)는 본래 주(周), 한(漢) 등 중국 고대 나례(儺禮)의 대표적인 신이다.

 

방상시(方相氏)는 원래 중국의 신(神)으로, 곰의 가죽을 두르고 황금사목(黃金四目)의 가면을 착용하며 손에는 창과 방패를 든 형상이다.

 

방상시는 직무에 대한 명칭으로, 그 뜻은 “제멋대로인 얼굴을 한 사람”이며 용맹하고 사나운 광부(狂夫) 네 명이 담당한다.

방상시의 지위는 매우 낮아 하급 군사에 속하며, 문이나 마차를 지키는 업무를 맡는다. 비록 무당으로 불리지는 않았지만, 그 직능은 귀신을 쫓는 무당의 모습과 같다. 중국에서 언제부터 나례를 행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춘추시대 이전부터 나례를 행한 것만은 틀림없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방상시가 들어와 장례와 구나 의식(驅儺儀式)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장례 때 행렬의 맨 앞에서 춤을 추며 잡귀를 물리치는 역할을 하고, 광중(시신을 묻는 곳)에 도착하여 네 귀퉁이를 찔러 악귀를 쫓는다.

사용한 탈은 무덤 근처에서 태워버리고 장례식 때마다 새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나무, 종이, 짚 등의 재료로 만들었는데, 나무로 된 방상시는 조정이나 규모 있는 사대부가에서 썼고, 종이로 된 방상시는 일반 양반층에서 썼으며, 짚으로 엮어서 만든 것은 일반 서민들이 사용하였다.

 

우리나라 최고의 가면유물로서 네 개의 눈(4目)을 가지고 있으며 중요민속자료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방상시는 고대 중국 주 이래로 장례 풍습에서 악귀를 몰아내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인데 우리나라에도 전하여 5,6세기경 신라시대부터는 장례와 구나 의식에 사용되어 왔다.

 

위의 유물은 창덕궁에서 발견된 것을 모작한 것으로, 조선시대의 유물로는 유일한 것이다.

 

방상시탈은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1930년대까지도 장례행렬의 선두에서 행진하며 악귀를 쫓는 역할을 맡았다. 원래 방상시의 탈은 황금사목 즉 황금색 네 눈을 갖고 있었다.

 

방상도 / 사례편람

방상시 탈

나례와 장례의식에 사용되었던 탈. 중요민속자료 제16호. 1970년 창덕궁 창고에서 장례 용구와 함께 발견되었다. 개인 소장.

 

그러나 태평광기(太平廣記)]의 견이록(甄異錄), 순자(荀子) 비상편(非常篇), 유양잡조(酉陽雜俎) 등에 두 눈을 가진 방상시 탈인 기(倛)탈이 소개된 점을 보아, 눈이 두 개인 것도 방상이라고도 하고, 기탈이라고도 불렸다.

 

유양잡조 권 13에는 "눈이 네 개인 것은 방상이라 하고, 눈이 두 개인 것은 기라고 한다."라는 기록도 보인다. 그러므로 기도 방상시의 일종이다.

 

방상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나례에서 역귀를 쫓는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방상시는 장례행렬의 선두에서 악귀를 쫓는 역할을 했다.

 

4품 이상은 눈이 4개인 방상시를 사용했고, 5품이하는 눈이 두 개인 기두를 사용했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방상시의 눈이 두 개인 경우가 많았고, 방상시를 흔히 방상제라고 불렀다.

 

나례 모습(달의 연인 보보경심려) 가운데 방상시와 그를 둘러싼 진자

진자(侲子) : 나례(儺禮)를 거행하는 나자(儺者)의 하나. 탈을 쓴 남자 아이로, 붉은 옷과 두건을 씀.

 

촬영일자 : 1997 / 촬영자/소장처 : 국립민속박물관 / 촬영장소 : 경북 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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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상시(方相氏)

 

정의

나례儺禮와 장례 행렬에서 악귀를 쫓아내는 대표적인 축귀逐鬼 대신大神.

 

역사

방상시方相氏는 원래 중국의 신神으로, 곰의 가죽을 두르고 황금사목黃金四目의 가면을 착용하며 손에는 창과 방패를 든 형상이다. 방상시는 직무에 대한 명칭으로, 그 뜻은 “제멋대로인 얼굴을 한 사람”이며 용맹하고 사나운 광부狂夫 네 명이 담당한다. 방상시의 지위는 매우 낮아 하급 군사에 속하며, 문이나 마차를 지키는 업무를 맡는다. 비록 무당으로 불리지는 않았지만, 그 직능은 귀신을 쫓는 무당의 모습과 같다. 중국에서 언제부터 나례를 행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춘추시대 이전부터 나례를 행한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나儺 의식이 은대殷代와 주대周代에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음산陰山의 바위그림에 귀면鬼面, 신면神面, 무속가면巫俗假面 등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나의식’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의식’의 갑골문은 구寇인데, 이것은 사람과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쳐 귀신을 쫓는 제사의식을 의미한다. ‘나 의식’에 사용되는 가면은 갑골문자에서 ‘기倛’로 표기하는데, 귀신을 쫓는 자가 쓰는 가면을 상징한다. 후대에 나면儺面을 기두倛頭라고 부른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원래 방상시의 탈은 황금사목, 즉 황금색의 네 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순자荀子』 「비상편非常篇」에는 “눈이 네 개인것을 방상이라 하고, 눈이 두 개인 것을 기라고 한다[四目爲方相 兩目爲倛].”라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므로 기倛는 방상시의 일종이다.

 

최근 나희儺戱 연구자들은 민족학과 민속학의 자료에 근거해, 나례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제시했는데, “나儺는 황제씨족黃帝氏族의 곰토템 숭배에서 기원한다. 나는 원래 곰씨족의 토템무였는데, 후에 일반적인 타귀도신打鬼跳神으로 변한 것이다.”라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

 

『주례周禮』 권31 하관사마夏官司馬 제4에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나례 의식이 기록되어 있다.

 

“방상시는 곰의 가죽을 덮어쓴 채, 황금의 네 눈을 갖고 있다. 검은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고, 창과 방패를 든채, 백예百隸를 거느리고 철에 따라 나儺를 행함으로써 집안을 뒤져 역귀疫鬼를 몰아냈다. 대상을 치를 때에는 상여 앞에서 가는데, 묘지에 도착하면 무덤 안으로 들어가 창으로 네 모퉁이를 찔러 방량方良을 쫓아버렸다.”

 

이처럼 주대에 행한 ‘나 의식’에서 대표적인 신이었던 방상시는 장례행렬의 앞에서 귀신을 쫓고 길을 열기도 했으며, 무덤을 팔 때 창으로 무덤 안의 네 모퉁이를 쳐서 방량方良을 몰아냈다.

 

한대漢代 이후 ‘나 의식’의 규모는 점차 커지고, 예절과 의식의 요소가 증가했다. 그래서 몇몇 문헌에서는 이를 ‘나의儺儀’ 또는 ‘나례’라고 칭하였다. 『후한서後漢書』 「예의지禮儀志」에 의하면, 후한의 나례는 방상시, 십이지신十二支神, 진자侲子들이 역귀를 쫓아내는 순수한 구역驅疫의식이었다. 이처럼 나례는 순수한 구역 의식으로서 한대 이후 흥성기에 들어섰고, 궁중 안에서 정기적으로 거행하는 하나의 완전한 의례로서 송대까지 계속되었다.

 

당대唐代 중엽 이후에는 종규鍾馗라는 새로운 축귀 대신이 창조되었다. 그래서 이전에는 네 눈을 황금으로 장식하고 창과 방패를 손에 든 방상시가 구나驅儺 의식의 주역이었지만, 당대 중엽 이후에는 종규가 구나 의식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나례의 전래를 알려주는 최초의 기록에 의하면, 나례는 1040년(고려 정종 6)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 그러나 나례가 실제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그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종 6년의 기록은 중국의 궁중 나례가 고려의 궁중에 수입된 것을 말한다. 나례의 전래와 함께 방상시도 유입되었다.

 

내용

한국의 초기 나례는 『고려사高麗史』 권64 「지志」와 권18 「예禮」 6의 군례軍禮 조의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를 통방상도해 살펴볼 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12월에 대나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붉은 고습을 입은 진자 24명, 붉은 모자와 소창옷을 입고 채찍을 잡은 집사자 12명, 공인工人 22명, 고각군 20명이 궁중에서 악귀를 쫓아내는 의식을 거행했다. 공인 중 한 사람은 방상시로 황금색 눈이 네 개인 가면을 쓰고, 곰의 가죽을 걸치며, 검은 윗옷과 붉은 치마를 입은 채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방패를 잡는다. 다른 한 사람은 창사唱師로, 가면을 쓰고 가죽옷을 입고 몽둥이를 든다. 이 계동대나의는 『신당서新唐書』 권16 「예악지禮樂 志」의 대나大儺와 등장인물 및 구나의 내용에서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권2의 기록을 통해 조선 전기에 민간에서 행하던 나례에서도 방상시가 나오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섣달그믐에 어린아이 수십 명을 모아 진자侲子(악귀를 쫓는 데에 동원되는 아이들)로 삼아, 이들에게 붉은 옷을 입히고 붉은 두건을 씌워 궁중으로 들여보낸다. 그러면 관상감觀象監이 북과 피리를 갖추고, 새벽이 되면 방상시가 악귀를 쫓아낸다. 민간에서도 이 일을 모방했다. 비록 진자는 없었지만, 녹색 댓잎, 자색의 형지荊枝, 익모초 줄기, 도동지桃東枝를 모두 묶어 빗자루를 만든 다음 , 대문을 마구 두드리고, 북과 방울을 울리면서 문밖으로 몰아내는 흉내를 내는데, 이를 방매귀放枚鬼라 한다.”

 

이처럼 섣달그믐날의 나례에서는 궁중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방상시가 악귀를 쫓아냈다.

 

한편, 한국에서 방상시탈은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1950년대까지도 장례행렬의 선두에서 행진하며 악귀를 쫓는 역할을 맡았다. 민간에서는 방상시를 흔히 방상제라고 불렀다. 그래서 <기산풍속도箕山風俗圖>에도 ‘상여 앞에 방상제’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는 것이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4품 이상은 눈이 4개인 방상시를 사용했고, 5품 이하는 눈이 두 개인 기두를 사용했다四品以上四目爲方相 五品以下兩目爲魌頭. 이는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영향이다. 국상國喪의 경우, 장례행렬의 선두에는 방상시 수레 4량이 좌우로 배치된다. 방상시는 궁궐에서 왕릉까지 가는 행렬의 맨 앞에 서서 악귀나 잡귀를 쫓기도 하고, 왕릉에 도착해서는 관을 땅에 묻기 전에 먼저 흙을 파놓은 광에 들어가 창으로 네 귀퉁이를 쳐서 시신이 들어갈 자리의 악귀를 쫓아버렸다. <영조발인반차도英祖發靷班次圖>와 『상례보편喪禮補編』에 나오는 방상시탈은 얼굴을 덮을 정도의 크기로서 붉은색을 칠해 사용했다. 방상시 수레를 끄는 사람에 대해, 『상례보편』은 수레마다 예비 인원의 수를 합하여 13명, 『국조오례의』는 15명이라고 밝혔는데, 백의白衣를 입고 백건白巾을 쓴다고 기록했다.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16호로 지정된 방상시탈은 1970년에 창덕궁 창고에서 장례 용구와 함께 발견되었다. 이 탈은 소나무 판자에 얼굴 형상을 새기고, 그 위에 이마・눈썹・코・귀를 따로 만들어 덧붙였다. 네 눈과 입은 음각했으나 구멍을 뚫지는 않았다. 눈썹에는 녹색과 홍색을 칠한 흔적이 보인다. 가로 76.5㎝, 세로 72㎝, 귀길이 38.5㎝, 코길이 31.5㎝이다. 이렇게 크기가 큰 방상시탈은 얼굴에 착용하는 것이 아니고, 수레에 싣고 가는 것이다. 강원도 통천군수 최씨崔氏의 장례식 때 찍은 사진에는 장례행렬의 앞에 방상시탈을 쓴 사람 둘이 보이는데, 조선총독부에서 1931년 간행한 『생활상태조사─강릉군』에 수록되어 있다.

 

이규태는 「귀신 쫓는 방상시」라는 글에서 장례행렬을 이야기하며 “주로 형장에서 참수를 하는 망나니가 방상시로 선택받았던 것이다.”라고 지적했는데, 이는 장례에만 해당되는 사례일 것이다. 궁궐의 나례에서는 공인, 즉 악공들이 방상시를 맡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특징 및 의의

방상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나례에서 역귀를 쫓는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방상시는 장례행렬의 선두에서 악귀를 쫓는 역할을 했다. 4품 이상은 눈이 4개인 방상시를 사용했고, 5품이하는 눈이 두 개인 기두를 사용했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방상시의 눈이 두 개인 경우가 많았고, 방상시를 흔히 방상제라고 불렀다.

 

참고문헌

가면극과 나례(전경욱, 한국의 가면극, 열화당, 2007), 귀신 쫓는 방상시(이규태, 한국인의 생활문화1, 신원문화사, 2000), 나례와 잡희(김학주, 아세아연구6-2,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63), 한국의 가면극(이두현, 일지사,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