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1786-1856) 인장
경기도 과천의 추사박물관에는 추사 김정희의 인장이 전시되어 있다.
추사는 인장을 새기는 전각(篆刻에 조예가 깊었고, 호는 100여개 에서 최대 503개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그에 따른 인장도 많은 것 같다.
추사의 서명은 주로 편지에 쓴 이름과 자(字), 그리고 수결(手決: 사인)이고, 편지봉투에 찍은 봉함인(封緘印)도 있다.
인장의 종류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성명인(姓名印)을 비롯하여 추사, 완당, 노과 등의 호인(號印), 자신의 서적, 서화에 찍은 수장인(收藏印), 감식을 나타낸 심정인(審定印), 유명한 시문 구절이나 명언을 새긴 명구인(名句印), 바람이나 길조를 뜻하는 길상인(吉祥印) 등이 있다.
제주도 유배시절에는 제자 박혜백이 추사의 인장을 새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 인장에 관한 용어 인장은 인(印), 신(信), 인신(印信), 도장(圖章), 새(璽), 인감(印鑑),도서(圖書)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다. 도서(圖書)와 인장(印章)의 합성어로서 도장(圖章), 또는 인(印)과 장(章)의 합성어로서 인장(印章)이라는 용어도 사용한다. 인장을 찍는 행위를 날인(捺印),압날(押捺) 또는 검인(鈐印)이라 하며, 찍혀있는 흔적에 대하여는 인영(印影), 인흔(印痕)등의 말로 표현한다.
□ 인장의 종류 인장을 구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공무에 사용하는가 아니면 사무에 사용하는 가에 따라 관인(官印)과 사인(私印)으로 구분한다. 그 중 서화에 쓰이는 인장을 사인이라 하는데 그 종류는 다음과 같다.
○ 새겨진 내용에 의한 구분 - 낙관(落款) - 성명인(姓名印) 서화 제작자의 성명을 새기며 주로 백문(白文. 음각)으로 새긴다.
- 아호인(雅號印) 서화 제작자의 호를 새기며 주로 주문(朱文. 양각)으로 새긴다. - 두인(頭印) : 수인(首印) 서화작품의 우측 머리 부분에 찍는 인장(印章)이다. 낙관인에서 두인은 서화작품의 우측부 윗부분인 작품의 머리부분에 찍는다 하여 머리두(頭)자를 사용해 두인이라 한다. 두인은 작품에 임하는 작가의 마음가짐을 의미하는 글귀로 작가의 개성을 나타냄에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 당호인(堂號印) 서화제작자의 당호(堂號)를 새기며 헌당인(軒堂印) 또는 재관인(齋館印)이라고도 한다
- 길어인(吉語印) 주로 작품의 여백에 찍게 되며 아름다운 문구를 새긴다.
- 화압인(花押印) 이름을 새기되 문자를 약간 흘려서 도형처럼 새기며 서압인(署押印)이라고도 한다. 주로 초서나 행서 등으로 써서 새긴 것인데 오늘날의 사인(signature)과 같은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관리들이 많은 문건에 일일이 수결(手決)하기가 번거로우므로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새긴 인장이 있는데 이를 수결인(手決印)이라 하며 결재 등 공무에 사용 하였다. 수결인은 화압인과 모양은 유사하나 화압인은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도는 구분이 분명하다.
- 초형인(肖形印) 사물의 모양을 새겨넣은 인장이다.
- 장서인(藏書印) 책을 획득하였을 때 소유주임을 표시하기 위하여 찍는 인장이며 수장인(收藏印)과도 거의 동일한 용도로 쓰인다.
- 감정인(鑑定印) 서화용품을 감정하였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찍는 인장이다
- 감상인(鑑賞印) 화용품을 감상하였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찍는 인장이다.
이 이외에도 여러가지 용도의 인장들이 있으나 그 사용이 흔치 않거나 서화용이 아닌 관계로 일일이 열거하지 않는다.
○ 찍히는 위치에 의한 구분
작품을 제작한 후 기본적으로 찍는 인장은 성명인이나 아호인이다. 대개의 경우 이 인장 을 날인하고나면 제작이 마쳐지지만, 여백이 남아 그 자리에 인장을 날인하여야만 작품성 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가 있다. 이 때 당호인등 적절한 인장을 골라서 찍게 되는데 그 찍히는 위치에 따라 명칭이 달리 주어진다.
- 인수인(引首印) 주로 작품의 오른쪽 상단에 찍으며 수인(首印)이라고도 한다. 원대(元代) 이비(李泌)가 단거실(端居室)이라는 당호인(堂號印)을 찍은 것이 그 효시(嚆矢)인데 당호인 이외의 인장을 날인하는 것은 격이 높지 못하다는 주장도 있다.
- 요압각인(腰押脚印) 작품의 허리 부분에 찍히면 요압각인이다.
- 압각인(押脚印) 작품의 아래 부분에 찍히면 압각인이라 한다.
이와 같이 자유롭게 위치를 선정하여 찍을 수 있는 관계로 위의 3가지 인을 총칭하여 유인(遊印)이라 한다는 설이 있으나, 일본에서 만들어진 용어로써 학문적 품격이 높지 못하다는 견해가 일본 서예계에서도 발표된 적이 있는 용어이다. |
동해순리(東海循吏)
주역전의합정에 찍혀 있는 동해순리 인장. "동해순리"란 "동해의 선량한 관리"라는 뜻이다.
추사는 동생 김명희가 제주도로 보내준 동해순리 인장을 무척 아꼈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는 천개의 붓을 사용하고 열개의 벼루에 구멍이 날 정도로 글을 쓰고 그림도 그렸다고 한다.
실력이 있으면 도구 탓을 안한다고 하지만 추사는 종이는 물론이고, 붓이 좋지 않으면 아예잡지도 않을 정도로 까다로웠다고 한다.
추사의 붓과 벼루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서화실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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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인이란 무엇인가?
따라서 장서인은 한 개인의 장서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일 뿐만이 아니라, 한 시대 전각예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특히 장서인을 통해 한 시대 인장 문화의 일단을 살필 수도 있지만, 서적의 유통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장서인의 확인을 통해 우리는 먼저 서적의 소장자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한 개인의 장서를 재구할 수 있게 된다. 목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에는 장서인을 통해 한 개인의 장서목록을 만들 수 있고, 장서목록이 남아 있는 경우라도 장서목록에 실린 서적의 실물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낭선군 이우나 심의평의 경우 손꼽을만한 조선의 장서가였지만 그들의 장서목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일부이지만 이러한 장서인의 확인을 통해 이들의 장서목록을 만들 수 있다면 개인의 독서편력은 물론, 한 시대의 장서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동양문고에 소장된 조선본 구장자의 여러 장서들이 국내외에서 자주 확인된다는 점에서 그 활용 가치는 더욱 크다 할 것이다.
2) 고증적 활용
장서인의 확인은 장서인이 찍힌 책에 관해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해준다. 특히 필사본의 경우 장서인의 유무는 그 책의 가치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1) 고본(稿本)과 전사본(轉寫本)의 구분
동양문고본 『삼산가숙사물서몽(三山家塾事物筮蒙)』은 남형수(南衡秀, 1727~?)의 저작이다. 오사란지(烏絲欄紙)에 해정하게 필사되었으며 본문에는 청홍(靑紅)의 비점(批點)이 가득하고 서미(書眉)에도 주석이 가득하여 저자의 고본(稿本)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 표시 위쪽과 서미 부분에 홍이섭(洪履燮, 1778~?)의 인장 4과가 찍혀 있다. 이는 저자의 수고본이 아닌 홍이섭의 수택본임을 알려준다.
<山澤之臞> |
<唐城> |
<洪履燮印> |
<綏卿> |
『三山家塾事物筮蒙』 |
묘표에 따르면 김성대(金盛大, 1651~1710)는 본관이 안동(安東), 자는 호연(浩然)이다. 생부는 김수일(金壽一)인데, 김수익(金壽翼)에게 입계(入系)되었으며, 음직으로 인제 현감을 지냈다. 한편 이 책의 표제는 ‘만록(漫錄)’인데, 작은 글씨로 ‘지명당시고(知命堂詩稿)’라 하였다. 또한 표지 우측 상단에는 인재공문초(麟蹄公文抄)라 써놓았다.
이 책이 김성대의 시집인 『지명당시고』의 수고본(手稿本)임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첫 장 <호연(浩然)>이란 장서인이 남아 있다. 바로 김성대의 자를 새긴 인장이다. 이 책이 김성대가의 시집 『지명당시고』의 수고본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상황들을 고려해 볼 때 저자의 수고본일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것을 확정시켜준 것은 바로 그의 장서인이었던 것이다.
박흥수(朴興壽, 1806~?)와 박제홍(朴齊弘, 1827~?)은 부자지간이다. 두 사람 모두 필사본을 남겼는데 ‘십수매화서옥(十樹梅花書屋)’이라 새겨진 전용원고지를 사용했다. 19세기 필사본의 큰 특징의 하나는 자신의 서재이름을 새겨넣은 자신만의 전용원고지를 사용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원고지의 주인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십수매화서옥’도 그 중의 하나인데, 박흥수 부자의 장서인을 통해 그 주인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인장은 일찍부터 많은 문사들이 모각하여 사용했다.『수산집초(修山集抄)』에 보이는 <녹갑천하(鹿甲天下)>,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침사한조(沈思翰藻)>는 모두 김정희가 사용한 인장이지만, 김정희의 인장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어 모각(模刻)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평산세가(平山世家)>란 인장이 함께 있어 다른 사람의 인장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다음 장서인에서도 마찬가지다. 허목(許穆)의 장서인을 모각한 것인데, 허목의 것과는 차이가 있어 모각임을 알 수 있다. 장서인의 판독과 이용에 있어서 유의해야 하는 사례 중의 하나다.
박철상,「미수전과 낭선군의 장서인」, 『문헌과해석』 19호, 2002년 여름.
백진우, 「일본 동양문고 소장 한국 고서에 대하여」, 『열상고전연구』 36집, 열상고전연구회, 2012 중에서 中善寺 愼,「東洋文庫所藏本に押捺された藏書印について(一)~朝鮮本に押捺された朝鮮の藏書家の藏書印~」,『東洋文庫書報』 第35号, 東京, 東洋文庫, 2004.3.26.
출처 : 고려대학교 - 해외한국학자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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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장서인
내사인(內賜印)은 임금이 책을 반사(頒賜)할 때 찍는 인장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장서인은 아니지만, 내사기(內賜記)가 함께 있는 경우 장서인과 같은 기능을 하기도 한다. 특히 임란 이후의 내사본과 달리 임란 이전의 내사본은 그 전본이 드물다.
동양문고에는 내사본 『이단변정(異端辨正)』(乙亥字)과 『예문류취(藝文類聚)』(甲辰字)가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모두 <선사지기(宣賜之記)>라는 내사인과 내사기가 남아 있다. 『이단변정』은 1551년 6월에 안위(安瑋, 1491~1563)에게 내사한 것이고, 『예문류취』는 1552년에 박충원(朴忠元, 1507~1581)에게 내사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명종 6년 3월 27일)에는 『이단변정』을 중외(中外)에 인포(印布)하라는 전교가 있는데, 안위에게 내사한 책은 석 달 뒤 인쇄하여 반사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예문류취』에는 임난 당시에 약탈된 조선본 고서에 찍혀 있는 <양안원장서(養安院藏書)> 인장이 찍혀 있어 이 책이 임란 때 약탈된 책임을 방증하고 있다.
승문원(承文院)은 조선시대에 외교문서와 이문(吏文)의 교육을 담당했던 관서를 가리킨다. 『이문(吏文)』은 임란이전에 간행된 을해자 복각본인데, 여기에 찍혀있는 <승문원(承文院)>은 그런 점에서 더욱 의미 있는 장서인이다. 더욱이 임란 이전 관청의 장서인이 남아있는 책은 그 전본이 아주 드물다. <승문원>의 장서인이 확인된 것도 동양문고 소장본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이우는 자가 석경(碩卿), 호는 관란정(觀瀾亭)이며, 선조의 12번째 아들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 1604~1651)의 큰아들로 낭선군(朗善君)에 봉해졌다. 글씨에 뛰어나 왕희지의 필법을 깊이 체득하였고, 수많은 서화를 수장하였다. 세 차례에 걸친 연경 사행을 통해 각종 금석문 자료 및 서적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어릴 때부터 인장을 좋아하여 『군옥청완(群玉淸玩)』이란 인보(印譜)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가 수장했던 서적에는 이들 인장이 앞뒤로 찍혀있다. 그의 장서인이 찍힌 수택본은 국내외 공사(公私) 서가에 흩어져 있는데, 동양문고에서도 현재까지 12종이나 확인되었다. 그 서명을 들면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모재선생집(慕齋先生集)』, 『잠곡선생유고(潛谷先生遺稿)』, 『인재유고(麟齋遺稿)』, 『보한집(補閑集)』, 『남창잡고(南窓雜稿)』, 『충암집(冲庵集)』, 『서화담선생집(徐花潭先生集)』, 『익재난고(益齋亂藁)』, 『동계선생문집(桐溪先生文集)』,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다.
이 중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제외한 서적에는 <석경(碩卿)>, <낭선군장(朗善君章)>, <목릉왕손호산택상(穆陵王孫壺山宅相)>, <인흥윤사문단외파(仁興胤嗣文端外派)> 등 4과의 장서인이 찍혀있다.
심의평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자는 승여(昇如), 호는 석란(石蘭), 승재(昇齋), 연고당(淵古堂) 등이다. 초명은 노일(魯日)인데 의평으로 개명하였다. 심의평은 일찍이 봉서(鳳棲) 유신환(兪莘煥, 1801〜1859)의 문하에 출입했지만 크게 학문적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다. 벼슬은 음직으로 군수를 지냈다. 황현(黃玹, 1855〜1910)이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전군수 심의평은 평생 모은 책이 1만 4천권이나 되었지만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장서가로서 이름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필사본의 수집과 제작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가 수장했던 상당수의 필사본은 판심 하단에 ‘옥로산방(玉露山房)’이란 글자를 새긴 오사란(烏絲欄)의 전용 원고지에 직접 필사한 것이다. 또한 추사 김정희를 흠모했던 심의평은 추사가 사용했던 인장을 모각(模刻)하여 자신의 장서인으로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저서로는 1906년경에 간행된 『전운산려집(全韻散廬集)』과 필사본으로 전하는 『석란실신정예원삼매(石蘭室新訂藝苑三昧)』, 『하소정전휘주(夏小正傳彙注)』 등이 있다. 특히 심의평은 북학파 문사들의 저술을 직접 필사하여 소장한 경우가 많았다
김세균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익(公翼), 호는 만재(晩齋),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834년 진사시에 합격, 184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대사성, 대사헌, 이조판서 등 주요 관직을 거쳤으며 1873년 왕명으로 『기년아람(紀年兒覽)』의 속편을 편집하였고, 저서로는 『완염통고(琬琰通考)』가 있다. 김세균의 장서도 일찍이 흩어져 국내외 공사의 서가에 소장되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동양문고에서도 『동전고(東銓攷)』,『문헌지장(文獻指掌)』,『동경잡기(東京雜記)』,『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송계집(松溪集)』 등이 확인된다.
박철상,「미수전과 낭선군의 장서인」, 『문헌과해석』 19호, 2002년 여름.
백진우, 「일본 동양문고 소장 한국 고서에 대하여」, 『열상고전연구』 36집, 열상고전연구회, 2012 중에서 中善寺 愼,「東洋文庫所藏本に押捺された藏書印について(一)~朝鮮本に押捺された朝鮮の藏書家の藏書印~」,『東洋文庫書報』 第35号, 東京, 東洋文庫, 2004.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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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인은 원래 책이나 그림, 글씨의 소장자가 자기의 소유물이란 것을 나타내기 위해 찍는 인장 또는 그 자체를 말한다. 넓게는 장서인으로 찍은 다음에 나타나는 자국인 ‘인영’(印影)을 통틀어 부르기도 한다. 인영은 장서인기(藏書印記)라고도 하는데 화가나 서예가가 그림이나 글씨에 자기의 작품임을 나타내기 위해 찍는 인기인 낙관(落款)과 형태는 같으나 쓰는 목적이 다르다.
유학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조선 선비들이 가장 피해야 할 금기는 이른바 ‘아끼고 좋아하는 물건에 정신이 팔려 원대한 이상을 잃어버린다’는 완물상지(玩物喪志). 인장의 감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색적인 일은 1600년대에 이르러 조선 선비들이 인장의 감상을 넘어 직접 제작에까지 나선 것이다.
조선의 선비가 장서인으로만 사용하기 위해 인장을 마련하는 경우도 있지만 인장의 용도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 인장을 가지고 책에 찍으면 장서인, 서화의 감상용으로 찍으면 감상인(鑑賞印)이 됐다. 아울러 이를 다시 서화의 낙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이 같은 장서인은 그 형태·재료·문자·인주의 색·장서인을 찍는 위치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다. 게다가 자신들이 아끼던 서책에 장서인을 찍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장서인을 통해 서적의 유통에 관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박 연구가는 이와 관련해 “인장의 제작을 고귀한 예술과 철학의 행위로 인식하는 반전의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국립중앙도서관은 본관 6층 고전운영실에서 ‘조선과 청조 문인의 만남’ 전을 오는 12월 30일까지 열고 있다. 전시에서는 홍대용이 항주 선비들과 우정을 맺으면서 주고받은 필담과 편지를 수록한 ‘담헌서’ 등 25종 133책의 관련 고문헌을 만날 수 있다.
박철상 고문헌연구가가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린 ‘제20회 이야기로 풀어가는 고문헌강좌’에서 ‘조선시대 장서인(藏書印) 이야기’를 주제로 특강을 하고 있다(사진=국립중앙도서관).
김성곤 (skzero@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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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인 (藏書印)
왕형문공시(권27) / 홍문관장서인책이나 그림, 글씨의 소장자가 자기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찍은 도장. ≪왕형문공시≫에 찍혀 있는 장서인들.
정의
책이나 그림, 글씨의 소장자가 자기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찍은 도장.
내용
넓게는 그 장서인으로 찍은 다음에 나타는 자국, 즉 인영(印影)까지 통틀어 부르기도 하며, 인영은 장서인기(藏書印記)라고도 한다. 화가나 서예가가 그림이나 글씨에 자기의 작품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찍는 인기인 낙관(落款)과는 형태면에서는 같으나 쓰는 목적이 다르므로 구별한다.
장서인을 찍는 목적은 소장자가 자기의 소유임을 밝히기 위하여서이지만, 때로는 자기 과시나 교훈적인 목적으로 찍기도 하며, 다른 장서와 구분하고 기념적으로 찍는 경우도 있다. 대개는 잘 보이는 곳에 찍지만, 보이지 않게 은밀한 곳에 정하여 찍은 은인(隱印)도 있다.
우리 나라에는 1101년(숙종 6) 2월 27일의 기사에 숙종이 중광전(重光殿)에서 책을 보고 ‘高麗國十四葉 辛巳歲藏書大宋建中靖國元年大遼乾統元年(고려국십사엽 신사세장서대송건중정국원년대요건통원년)’이라는 장서인을 찍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찍은 것으로 보이는 인기가 있는 ≪중광회사 重廣會史≫·≪설문정자 說文正字≫·≪통전 通典≫·≪성해 姓解≫ 등의 책이 일본에 전존하고 있다.
조선시대에서는 1429년(세종 11) 3월 26일 실록기사에 “경연에 소장하고 있는 책에는 ‘經筵’이라는 장서인을 찍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인기가 찍힌 ≪서산선생진문충공문장정종 西山先生眞文忠公文章正宗≫이 규장각도서에 남아 있다. 이 밖에도 궁중의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던 책에는 소장처에 따라 ‘弘文館(홍문관)’·‘摛文院(이문원)’ 등과 같은 장서인이 남아 있는 것이 많다.
대한제국시대에 제실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모아둔 책에는 ‘帝室圖書之章(제실도서지장)’이라는 장서인을 찍었는데, 이 책들은 거의 규장각에 전존하고 있다. 관학인 성균관의 장서는 존경각에 두고 ‘尊經閣(존경각)’이라는 장방형의 인을 찍었는데, ≪척사윤음 斥邪綸音≫에 이 인기가 남아 있다.
사찰에서는 ‘佛法僧寶(불법승보)’라는 인을 찍고, 어느 사찰의 소장인가를 밝힌 ‘○○寺藏(사장)’이라는 장서기(藏書記)를 쓴 경우도 보인다. 대한제국시대에는 서양의 영향을 받아 장서인 대신 장서표(藏書票)를 붙인 것도 나타난다.
민간의 문중이나 개인들도 장서인을 썼다. 임청각(臨淸閣)의 경우, 여러 대에 걸쳐 새로운 장서인을 조각하여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근대의 도서관에서는 책 크기에 따라 장서인을 큰 것과 작은 것 두 가지로 구별하여 찍기도 하며, 또 기념문고에서는 문고인(文庫印)을 쓰기도 한다.
장서인의 물리적 형태는 인기를 찍는 면인 인면(印面), 인의 몸통인 인체(印體), 손잡이 끈[紐]으로 나눌 수 있다. 또, 장서인을 만든 재료를 인재(印材)라 하는데, 크게 동물질·식물질·광물질, 그리고 화학물질 등 다양하다. 장서인을 찍는 위치는 관인(官印)인가 사인(私印)인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
관인의 경우 책의 변란 위나 변란 안쪽의 오른편 윗부분에 찍는 경우가 더러 있다. 사인의 경우 변란 안쪽의 오른편 아랫부분에 찍는다. 두 개의 장서인을 찍을 때에는 윗것은 본관이나 호, 아랫것은 성명을 찍는다. 나중 사람의 사인은 앞 사람의 장서인 위쪽에 찍는다.
장서인기의 모양은 대개 방형(方形)이 많으며, 원형(圓形)·잎형[葉形]·단지형[壺形]·솥형[鼎形] 등도 있다. 방형은 정방형(正方形)과 장방형(長方形)으로, 원형은 알형[卵形]과 타원형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모양은 대개 인의 변(邊)의 모양으로 나눈다. 변이 없는 문자나 도안만의 인도 있다.
인기의 새김은 양각(陽刻)이 많으며, 음각(陰刻)이나 양각과 음각을 섞어서 새긴 것도 있다. 인기의 빛깔은 붉은색 계통의 인주(印朱)로 찍은 것이 많아 붉거나 적갈색의 것이 많다. 간혹 푸른빛·초록빛과 같은 색도 있으며, 먹으로 찍은 검은빛의 인도 있다.
인기의 내용은 소장을 뜻하는 ‘장(藏)’·‘세장(世藏)’·‘세전지보(世傳之寶)’와 같은 글이 들어 있는 외에, 본관·호(號)·성(姓)·이름·자(字) 등이 있으며, 또 경구(警句)·명구(名句)·전언(傳言) 등을 넣은 것도 있다. 인기에 쓰인 글자는 한자가 대부분이나 대한제국시대에는 한글·로마자를 쓴 것도 있으며, 일제치하에는 일본문자를 쓴 경우도 있다.
또, 문자 대신 부호·신물(信物)·도안(圖案)을 넣은 것도 있어 소장자의 취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서체(書體)는 주로 갑골문(甲骨文)·대전(大篆)·소전(小篆)·팔푼(八分)·예서(隷書)·행서(行書)·초서(草書)·해서(楷書) 등이다. 장서인은 서적의 내력을 판단하고 그 가치를 판정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경우가 많다.
참고문헌
『한국서지학개론』(윤병태, 한국서지정보학회,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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