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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역사 고려시대

황제 통천관(通天冠)을 쓴 왕건의 청동 조각상

by 연송 김환수 2018. 8. 9.

1992년 10월 북한에서 고려 태조 왕건릉(현릉) 확장 공사 중에 출토된 왕건(王建)의 청동 조각상은 황제의 복식을 착용하고 황제의 관인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있다.


  

왕건동상 (王建銅像)

 

소장처 : 북한 평양특별시 조선중앙역사박물관

제작시기 : 951년(광종 2)

재질 : 청동(안료채색 및 일부 금도금)

전체 높이: 135.8㎝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 재위 918∼943)의 청동 조각상.

 

951년(광종 2)경에 제작되었다. 도읍인 개경(開京: 지금의 북한 개성시)의 봉은사(奉恩寺) 진전(眞殿)의 어좌(御座)에 안치되어, 고려가 망할 때까지 왕실 최고의 신성한 상징물로 경배되었다.

 

태조 왕건의 동상은 고려 왕실 최고의 상징물로서 국가의 정기적 제전(祭典)인 연등회(燃燈會)의 첫 날이나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에 제사를 올리는 대상이었다.

 

고려 당시에 제작된 왕건의 초상화들도 여러 점 있었지만, 왕건 동상이 가장 신성시되는 대표 상징물이었다.

 

국가적 최고의 상징물이었던 만큼 그 제사를 둘러싸고 정치적 중요 국면들에서 정파 간에 중요하고 예민한 움직임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왕건동상에 대한 제사 변천의 시기구분은 고려 정치사의 시기구분과 연결된다.

 

고려 왕조가 망하자, 왕건동상은 조선 건국세력에 의해 고려의 태묘(太廟)와 더불어 정치적으로 중요한 고려왕실 상징물 제거의 일차적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명분상 폐기가 어려워, 1392년 7월 지방으로 옮겨지고, 제례법 개정을 명분으로 1429년(세종 11)에 고려 태조의 능인 현릉(顯陵) 옆에 매장되었다.

 

1992년 10월 북한에서 현릉 확장 공사 중에 출토되었다. 발견된 후 북한에서 여러 해 동안 부장품 중의 하나로 보고 청동불상이라고 오인되어 전시되기도 하였으나, 제작부터 매장에 이르기까지 고려시대와 조선 초의 기록들을 통해 고려 왕조의 최고의 신성한 상징물이었던 왕건동상임이 밝혀졌다.

 

1. 황제의 복식

 

왕건동상은 황제의 복식을 착용한 나체상 양식이다. 왕건동상은 황제의 관인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있으며, 금제 허리띠 장식의 옥대(玉帶)를 띠고 있었다.

 

옥대는 유물로 함께 나왔으며, 착용한 옷은 부식된 조각이 동상표면에 붙어 있었다.

 

통천관은 나신의 신체상과 함께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왕건동상의 황제복식은『고려사』나 고문서 등에 보이는 고려 초부터 13세기까지의 시기 대부분에 시행된 여러 부문의 제도에서도 나타나는 고려의 황제제도를 조각상과 실물의 복식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고려의 군주는 대륙의 거란(契丹), 송(宋) 등 강대국 세력에 대해서는 외교적 마찰을 피해 왕을 칭하면서, 자체의 세력권 내에서는 황제를 칭하였다.

 

2. 실제모습에 더해진 신성함의 상징

 

왕건동상은 왕건의 모습을 그린 진영(眞影)과 함께 기본적으로 왕건의 실제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당대에도 큰 권위를 가졌지만, 사후에도 고려왕국의 시조로서 높임을 받고 숭배되었다.

그의 동상은 실제의 모습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최고의 신성함을 나타내는 형상이 가미되었다.

 

그 하나는 당시 사회적으로 일반화된 불교의 최고의 신성한 존재인 부처나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신체적 특징이라고 하는 32대인상(大人相)을 왕건상에 일부 적용한 것이다.  

그 대부분은 왕건상에 착용한 옷으로 가려진 신체부위에 표현되었다. 왕건상이 언뜻 보기에 불상이나 보살상에서 보는 느낌을 일부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당시 고려가 건국된 한반도 중북부 지방에서 고구려계승의식과도 결합되어 내려오는 뿌리 깊은 동명왕(東明王) 숭배의 신성한 상징물인 동명왕상(東明王像)의 양식, 즉 옷을 입히는 나체상 양식을 적용한 것이다.

 

동아시아의 불보살상이나 유교의 조각상, 군주의 조각상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착의형 나체상양식인 왕건상은 이러한 고구려계통의 문화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의의와 평가

왕건동상은 고려시대의 지배층의 문화 속에서도 유교문화나 불교문화 이외에도, 고대부터 내려오는 토속문화의 전통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특히 왕건동상의 양식이 고구려계통의 신상양식인 것은 고려의 고구려계승의식을 문화적 바탕에서도 드러내준다. 또한 고려의 황제제도를 유물로서 실증해주는 중요한 사례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고려 태조왕건의 동상』(노명호, 지식산업사, 2012)

「고려시대 개경 봉은사의 창건과 태조진전」(한기문,『한국사학보』33, 2008)

「고려태조 왕건 동상의 유전과 문화적 배경」(노명호,『한국사론』50, 2004)

「왕건왕릉에 대하여」(안병찬,『사회과학원학보』1994년 1월호, 평양시, 1994)

「高麗時代の裸形男子倚像」(菊竹淳一,『デアルテ』21, 2005)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저자/제공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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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 노명호 지음 / 지식산업사

1992년 개성에서 발굴되어 역사학자를 혼란에 빠뜨린 등신대 나체 청동상, 남한의 역사학자가 동상의 비밀과 고려 황제제도의 고구려 문화전통 밝히는 과정이 추리소설처럼 그려져

 

1. 1992년 10월 개성, 고려 태조 왕건의 능인 현릉을 개축하려 봉분 북쪽을 파던 굴삭기 삽에 청동상이 걸려 나왔다.

13일 뒤 평양에서 온 학자들은 당황했다. 동상은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고 군데군데 찌그러져 있었다. 원래 청동박편과 금도금 파편도 붙어 있었지만 학자들이 오기 전 씻어내는 바람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놀라운 것은 등신대 청동상이 나체였던 점이었다. 좁은 어깨에 초콜렛 복근은커녕 아랫배가 볼록 튀어나온 몸매. 고추를 드러낸 나신에 어울리지 않게 양손을 얌전히 마주잡은 모습으로 근사한 관을 쓰고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다.

박물관으로 옮겨진 동상의 정체는 불상으로 여겨지다 몇 년 뒤 왕건의 동상으로 여겨져 북한 국보로 지정됐다.

 

2. 1983년 초여름 서울, 젊은 국사학자는 고려말~조선초 나주의 일지인 <금성일기>의 조선 세종 시기 기록에서 고려 2대왕 혜종의 소상이 나주에서 개성으로 옮겨졌다는 내용을 읽었다.

실마리를 좇아 <세종실록>을 보니 혜종의 소상과 함께 왕건의 조각상도 현릉 어딘가에 묻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14년 뒤인 1997년 한 신문에 실린 북한의 ‘청동불상’ 사진을 보고 왕건 동상임을 확신한 그는 2004년 ‘고려태조 왕건 동상의 유전과 문화적 배경’이란 논문을 썼다.

그리고 2005년, 남북학술토론회 일원으로 개성에 가서 실물을 확인한 그는 이듬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평양에서 온 국보들’ 전시회에 온 동상을 비로소 실측하게 됐다.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은 서울대 국사학과 노명호 교수가 왕건 동상과 30년 넘게 이어온 인연의 매듭이자, 남북 역사학자들이 합심하여 이룬 연구의 열매다.

지은이는 나체의 등신대 동상이 현대인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그 속에는 조선시대 학자들이 사대명분론적 시각으로 걸러내면서 사라지거나 잊혀진 고려의 황제제도와 늠름한 고구려 문화전통이 살아 있다고 말한다. 동상에 담긴 숨겨진 의미를 밝히고 수백년 동안 땅속에 묻힌 사연을 추적해, 추리소설처럼 읽힌다.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 전신 정면.

 

■ 근엄한 왕은 어째서 벌거벗고 있을까

본래는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게 정답. 노명호 교수는 <고려사>의 신종 6년 9월 부분 “최충헌이 봉은사에 가서 태조진전에 (모셔진 태조의 주상에) 제사하고 겉옷과 내의를 바쳤다”는 기록과 출토 당시 표면에 비단조각이 붙어 있었고 옥대가 함께 출토된 점에서 태조 동상이 나신이 아니라 옷을 입고 옥띠를 두른 상태였음을 논증한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과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 개경의 숭산신이나 동명왕, 동명왕의 성모인 유화의 신상도 옷을 입히는 양식이었음을 환기하며, 태조 동상의 조성과 숭배는 고려의 옛 고구려 지역에서 보이는 고구려 토속신앙과 맥을 같이한다고 밝힌다. 귀바퀴와 손가락 틈에 남은 연한 핑크색 안료 역시 전신 또는 노출부위를 살색으로 도색했다는 증거다.

 

■ 머리의 관에 담긴 의미

눈길이 가는 것은 머리의 관. 노명호 교수는 그것이 진시황이 썼던 ‘통천관’과 같은 것임을 밝혀 고려가 황제의 나라를 자처한 것과 연결시킨다. 정면의 오각형은 신성한 산을 상징하는 ‘금박산’이며 그 중앙에는 금박으로 장식한 매미문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좌우의 뿔은 내관과 외관을 연결해 고정하는 무소뿔 비녀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내관 위쪽 8개의 동그란 모양은 해와 달처럼 팔방을 비추는 황제국 고려 초대군주의 권위를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동상 조성 시기도 맞아떨어진다.

광종은 951년에 태조의 원찰인 봉은사를 창건한다. 지은이는 이때 태조의 진전(영정 또는 동상을 모신 전각)을 건축하면서 동상을 조성했다고 본다.

노비안검법, 과거제 등으로 군주권을 굳힌 광종이 태조 존숭사업을 펼친 것은 일맥상통하며 제작기법이 고려초의 불상과 흡사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 길이 ‘아기 고추’에 감춰진 비밀

노명호 교수는 마음장상(馬陰藏相), 즉 전생에 몸을 삼가 색욕을 멀리함으로써 성기가 말의 그것처럼 오므라들어 몸 안에 숨어 있는 모양을 드러낸 것이라고 설명한다.

삼국시대만 해도 군왕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성기를 강조했지만 고려에 들어 내면적 신성한 힘을 갖춘 존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볼록한 배 역시 오랜 단전호흡과 연결시키며, 발바닥이 평평하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길고 가늘며, 복숭아뼈가 밋밋한 것 등은 부처 또는 전륜성왕의 서른 두 가지 길상과 통한다고 본다.

 

■ 왜 동상은 버려지듯 묻혔을까

고려 당시 황제 동상은 태평기에는 연등회 행렬의 종착지였고, 전란시에는 강화도행 어가행렬과 함께 했던 보물이었다. 이 동상이 능 귀퉁이에 버려지다시피 묻혔던 이유는?

노명호 교수는 조선 초기의 고려왕조 말살정책을 지목한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교서에서부터 봉은사 왕건의 동상을 마전군(경기도 연천군 마산면 아미리)으로 옮기도록 명한다.

태종대까지 고려 왕실의 일족을 모조리 찾아내 죽였다. 세종대에는 고려왕의 제사 대상이 황제국처럼 8위이던 것을 바꾸어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 네 왕만을 제향토록 했다.

제후국을 자처하는 조선의 5묘제보다 격을 낮춘 것이다. 세종은 태조의 동상을 다른 왕들처럼 위판으로 교체하면서 동상을 충청도 문의현으로 옮겼다가 11년 정월에 다시 끌어올려 개성의 왕릉 구석에 파묻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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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건상 관은 황제가 쓰는 통천관


 

노명호 교수 "2㎝ 남근은 마음장상(馬陰藏相)"

 

13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막하는 '북한문화재' 특별전 출품작 중 하나인 개성 출토 고려태조 왕건상(동상)이 쓰고 있는 관은 중국 황제가 쓰던 통천관(通天冠)이며, 이에따라 고려왕조가 건국 전기와 중기에는 황제국을 표방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고려사 전공인 노명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2005년 11월 개성역사박물관 방문을 통해 북한 학자들과 왕건동상을 공동 조사한 데 이어 최근에는 북한문화재 특별전 자문위원으로서 왕건동상을 정밀 재조사한 결과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고 7일 밝혔다.

 

노 교수 분석에 의하면 왕건상이 쓴 관(冠)은 통천관이며, 이는 중국에서는 태자(太子)나 제후(諸侯), 나아가 조선시대 왕들이 착용한 원유관(遠遊冠)과는 다르다.

 

즉, 통천관은 중국 진나라에서 시작돼 조금씩 형태가 변화하다가 당(唐)나라 무덕(武德) 4년(621) 공포된 거복령(車服令)에서는 '24량(二十四梁) 통천관'으로 제도화하게 된다. 왕건상이 쓴 통천관이 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다만, 관에 붙은 8개 일월(日月)을 상징하는 원형 형상은 중국 황제의 통천관과는 구별되는 대목이라고 노 교수는 덧붙였다.

 

왕건동상은 화려한 옥대(옥으로 만든 허리띠), 각종 비단천 조각 등과 함께 출토됐다.

 

노 교수는 "이들 비단천 조각은 아직 정밀조사가 이뤄지지 않았으나 옥대는 중국 송나라에서도 천자나 태자가 주로 착용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왕건동상이 착용하고 있었던 복식도 황제의 복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왕건동상은 전체가 아니라 관에만 금 도금을 한 것으로 확인했다고 노 교수는 덧붙였다.

 

노 교수는 이어 왕건동상이 앉은키는 84.7cm(의자 면부터 외관 중간까지의 높이)로 성인 남자의 그것과 거의 같은 크기인 데 반해 남근은 길이가 2cm에 지나지 않는 까닭에 대한 해명도 시도했다.

 

그에 의하면 왕건동상은 발바닥을 비롯한 신체의 특징 10여 곳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32대인상에 해당하는 특징들이 발견됐다.

 

노 교수는 나아가 그런 32대인상 중 하나가 성기를 몸속에 감춤으로써 겉으로 드러난 남근은 매우 작은 형태를 하고 있는 마음장상(馬陰藏相)이므로, 태조왕건상은 이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법원주림' 이라는 6세기 중국의 불교 문헌에는 자신의 성별을 의심하는 여인들에게 부처가 법력으로 마음장상에 대해 알게 하는 서술이 있는데, 작을 때는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으나 때로는 매우 커질 수도 있다는 내용이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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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통천관


통천관은 황제가 조복을 입을 때 쓰는 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종황제의 어진(御眞)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고종황제 어진

 

착용신분

중국에서는 황제가 착용하는 관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대한제국시기에 황제로 등극한 고종과 순종이 착용했다.

 

착용상황

고종 34(1897)814일 나라의 연호를 광무(光武)’로 쓸 것을 확정하고,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쳐 같은 해 1011일 제국의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결정한 다음날 원구단에서 제사를 지낸 후 황제로 등극시 착용하였다. 조칙을 반포할 때 황제가 조복으로 착용하는 통천관을 쓰고 강사포를 입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시기에 편찬된 국가전례서인 대한예전(大韓禮典)에는 통천관(通天冠)과 통천관을 착용할 때 입는 일습인 통천관복(通天冠服)’익선관(翼善冠)과 익선관을 착용할 때 입는 일습인 '익선관복(翼善冠服)’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대한제국 시기 면복의 다음 등급으로 정해진 것이 익선관을 비롯한 일습 복식이 아니라 통천관을 비롯한 일습 복식이라는 점과 중단, 대대, 폐슬, 패옥 등 예복의 기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익선관복통천관복으로 규정이 되었어야 한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예복(禮服)에서는 황제의 면복 다음에 통천관(通天冠), 강사포(絳紗袍)’의 제도가 나온다.

 

형태

정면은 곧고 정수리 부분에서 약간 기울어져 뒷면 아래로 곧게 내리 뻗었다. 철로 양을 만들었으며 앞에는 전통(展筩)이 있고 관의 앞부분에는 얇은 금으로 만든 넓은 산모양의 장식을 더했다.

1993년 평양에서 고려 태조 왕건의 무덤인 현릉을 정비하기 위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관을 안치하는 현실(玄室)의 북쪽으로 5m 떨어진 지점의 지하에서 태조 왕건의 동상이 발견되었다. 앞에 산모양이 있는 24량의 통천관으로 당나라의 제도와 모양이 같았다. 그러나 관에 붙은 8개의 일(), ()의 형태는 중국 황제의 통천관의 제도에 없는 고려만의 특징적인 요소이다.

   


면류관, 왕비 칠적관


면류관(冕旒冠) : 왕의 정복인 구장복(九章服)에 갖추어 쓴 예모(禮帽) 

예모 가운데 가장 존엄한 것으로서 겉은 검고 속은 붉다. 모자 위에 직사각형의 큰 판이 있는데 이것을 연(延)이라 한다. 모자의 뒤쪽은 올라가고 앞쪽은 내려왔으며, 뒷부분은 모지고 앞부분은 둥글다. 연의 앞뒤에 구슬을 꿰어 매단 것이 있는데, 이것을 유(旒)라고 한다. 유에 구슬 12개를 꿰어다는데, 구슬 줄을 연의 앞뒤에 최고 12줄까지 늘인다. 구슬을 꿰는 끈을 굉(紘)이라고 하며 왼편으로 맨다. 굉의 끝에는 특히 작은 구슬을 다는데, 이것을 진(瑱)이라고 한다. 연의 길이는 7치, 나비는 2치인 것이 보통이며, 유의 수는 천자가 12류, 제후는 9류, 상대부는 7류, 하대부는 5류였으나 송대(宋代) 이후부터 상대부 이하는 유를 사용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에 국왕이 국가의 대제 때 면류관을 썼으며, 조선 후기에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할 때 면류관을 썼다고 한다.


적관(翟冠) : 왕비의 예복에 착용한 관모.

원래 중국의 관제(冠制)로, 한국에 들어온 것은 조선 태종(太宗) 3년(1403)이며, 명(明)나라에서 왕비 법복(法服)과 함께 칠적관(七翟冠)이 들어왔다.

 

임진왜란(1592~1598) 이후로는 착용하지 않았고, 1897년(광무 1) 관복을 제정할 때 황비 예복에 구적관(舊翟冠)을 착용하도록 한 바 있으나 시행되지는 않았다.

 

유물이 없으므로 모습이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헌에 나타난 수식(修飾)을 보면 호화 찬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적관(翟冠)은 조선시대 때 왕비의 법복(法服)에 착용하던 관(冠)이다.

 

이것이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선보인 것은 고려 후기인 1370년(공민왕 19) 5월, 명나라 태조후(太祖后)인 효자황후(孝慈皇后)가 왕비에게 적의(翟衣)와 함께 칠휘이봉관(七翬二鳳冠)을 보내오면서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03년(태종 3) 11월, 명의 사신 황엄(黃儼)이 왕의 면복(冕服)과 함께 가지고 온 왕비예복인 대삼(大衫) 가운데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이 들어 있었다.

 

이후 수차 보내온 왕비예복의 관제(冠制)는 모두 이와 같은 것이었는데, 휘(翬)나 적(翟)은 치속(稚屬)으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그저 적관으로 통하였다. 태종 때에 보내온 적관의 물목을 보면, 그 수식물로서 여러가지 모양의 진주 4, 260과(顆)가 있었다.

 

이 안에는 두양대주(頭樣大珠) 14과, 대양주(大樣珠) 47과, 일양주(一樣珠) 350과, 모란엽(牡丹葉) 36엽, 양화빈(穰花鬢) 2개, 적미(翟尾) 7개, 구권(口圈) 1부(部), 화심신(花心莘) 2부(副), 점심발산(點心撥山) 1좌(座)가 들어 있었다.

 

또 금붙이 1부(副)에는 누사금적(纍絲金翟) 1대(對), 금잠(金簪) 1대, 누사보전화(纍絲寶鈿花) 9개가 들어 있었으니 그것이 얼마나 호화찬란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선조실록』에 기록된 선조 35년 7월 인목왕비(仁穆王妃) 가례(嘉禮) 때에는 왕비 수식(首飾)을 국속(國俗)에 따라 마련하고 있다.

 

이것은 임진왜란 관계로 적관을 실진(失眞)하였기 때문이다. 이 이후로는 명나라로부터 적관을 가져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적관의 사용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어 제정한 관복 중에 황후는 구룡사봉관(九龍四鳳冠), 황비(皇妃)는 구적관이정(九翟冠二頂), 황태자비는 구휘사봉관(九翬四鳳冠)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있는 바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그 실현을 보지는 못하였다.


통천관 왕비의 (관모) 대수

익선관, 통천관

익선관(翼善冠) : 조선시대 때 왕·세자가 시무복(視務服)인 곤룡포(袞龍袍)에 쓰던 관(冠).

 

형태는 모체(帽體)가 2단으로 턱이 지고 앞보다 뒤쪽이 높으며 뒤에는 매미날개 모양의 소각(小角) 2개가 윗쪽을 향해 달려있다. 모(帽) 위에는 앞면의 청사변(靑絲辮)이 뒷면의 두 절각(折角) 사이를 얽게 되어 있다. 겉감은 자색의 사(紗) 또는 나(羅)로 만든다.

 

원래 중국 기원이며 단령 위에 쓰는 관모이나, 애초의 발생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부터이므로 복두(幞頭)와의 차이는 불분명하다. 정식으로는 당태종이 삭망(朔望)·시조(視朝)의 상복(常服) 관으로 제정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당제(唐制)를 차용한 통일신라시대부터 착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나 확인할 수는 없다.

 

당제의 경우는 당태종의 착수포(窄袖袍)에 육합화(六合鞾)를 신은 화상이 있으나 그 때 관모의 형상은 사모(紗帽)이다. 당시는 평건책(平巾幘)·절상두건(折上頭巾)과 통용하였다. 송대(宋代)에 와서는 절상건(折上巾)·착포(窄袍) 시사(視事)의 복으로 오사모(烏紗帽)와 통용하였다.

 

익선관과 오사모는 그 제도가 같되 황제나 왕이 쓰는 익선관은 오사모의 양대(兩帶)를 위로 치켜올린 형태인 것을 알 수 있다. 고려도 이 제도를 채용하여 왕의 상복은 오사고모(烏紗高帽), 즉 오사절상건(烏紗折上巾)에 착수(窄袖) 상포(湘袍)를 입었다. 대(帶)는 자라(紫羅) 늑백(勒帛)에 간수금벽(間繡金碧)하였다.

 

이 경우도 모대(帽帶)를 절상(折上)하였으므로 익선관이었다고 보아진다. 당시의 요제(遼制)도 상복으로 당의 제도를 따라 황제가 평건(平巾) 천집포란(穿執袍襴)을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익선관을 말하는 것 같다. 그 뒤 원대(元代)의 몽고복(蒙古服) 채용에 이어 명나라가 들어서자 당송제(唐宋制)를 복구한 의제를 따랐다.

 

명나라는 1405년(永樂 3)에 오사모·절상건으로 하였다가 다시 익선관에 황반령(黃盤領 : 窄袖이며 前後에 각각 金盤龍을 하나씩 織成하였음.)을 입고 옥대를 띠고 피화(皮鞾)를 신었다. 명나라의 황태자복은 오사절각향상건(烏紗折角向上巾)인데, 이를 익선관이라 하고, 친왕(親王)·군왕(群王)·세자도 같다고 되어 있다.

 

조선 국왕에 내린 익선관은 이등체강원칙(二等遞降原則)에 의하여 친왕복(親王服)을 보냈으므로 이 익선관이 조선 국왕의 상복관이 되었는데 아래에는 곤룡포를 입어 한말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 제도는 오사모와 같은데, 양대를 위로 꺾어 올리는 전통적인 관모이다.

 

통천관(通天冠) : 황제의 조현복(朝見服)인 강사포(絳紗袍)에 쓰던 관. 

우리나라에서는 고종황제의 어진(御眞)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1897년 새로 정한 통천관의 제양을 보면, 관은 오사(烏紗)로 쌌는데 전후를 각 12봉(縫)하였고, 그 12봉 가운데에 5채옥(采玉) 12개씩을 장식하였으며 옥잠도(玉簪導)를 꽂게 되어 있고 홍색 조영(組纓)이 달려 있다. 여기서 12봉은 12양(梁)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중국 명(明)나라의 피변을 그대로 본떠 만든 것이었다. 한편 중국에서도 원래의 통천관은 『당서(唐書)』 거복지(車服志)에 의하면 흑개책(黑介幘)에다 전후 12양을 합하여 24양을 만들고 앞양 위에는 매미[蟬] 12수(首)를 붙이고, 또 양마다에는 취주(翠珠)를 장식하였으며 관 정면에는 금박산(金博山)을 가시(加施)하였다.

 

그리고 조영에는 취옥을 꿰었고 서잠도(犀簪導)를 꽂았다. 통천관의 명칭은 『남제서(南齊書)』 여복지(輿服志)에 의하면 통천관에 박서잠도(駁犀簪導)를 꽂았는데, 이 박서는 모태(母胎)에 있는 동안에 천공(天空)의 현상에 감통(感通)하여 그 뿔에 특수한 아름다운 박리(駁理)를 발생한다는 데서 통천서(通天犀)라 하였고, 이 서각(犀角)을 잠도(簪導)로 사용한 데서 관명도 그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