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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의 재발견 팔관회, 거란 40만 대군 쳐들어오기 전날 축제 강행, 왜?

by 연송 김환수 2013. 10. 19.

거란 40만 대군 쳐들어오기 전날 축제 강행, 왜?

 

고려사의 재발견 팔관회

 

박종기 국민대 교수 j9922@kookmin.ac.kr | 제332호 | 20130721 입력

 

 

 
1010년(현종1) 10월 1일 고려는 거란의 침략 조짐을 알아차리고 강조(康兆)를 최고사령관으로 해 30만 군사를 강동 6성의 하나인 통주(通州;평북 선천)에 집결시킨다. 한편으로 그해 10월 8일 거란에 사신을 보내 화의를 요청한다. 그러나 거란은 사신을 억류하고, 고려에 침략을 통보한다. 11월 1일 고려는 다시 사신을 보내 화의를 모색한다. 하지만 거란은 “국왕 성종이 직접 고려를 공격할 것”이라고 통보한다. 고려가 두 차례 보낸 사신들은 결국 거란의 고려 침략을 통보받으러 간 꼴이 되었다. 11월 16일 거란 성종은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공격한다. 11월 24일 고려의 30만 대군은 거란군에 참패를 당하고 최고사령관 강조는 포로가 된다. 12월 거란군이 개경에 접근하자 그달 28일 현종은 남쪽으로 피란을 떠난다. 사흘 뒤인 1011년(현종2) 1월 1일 수도 개경이 점령된다. 2차 거란의 고려 침략 당시 긴박한 상황이 『고려사』에 이같이 기록돼 있다.

놀라운 사실은 40만 대군을 거느린 거란 성종이 압록강을 건너기 하루 전인 11월 15일 현종이 개경에서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한 것이다. 981년(성종 즉위년) “잡스럽고 번잡한 행사”란 이유로 폐지된 팔관회를 30년 만에 부활시킨 셈이다. 전쟁 전야의 긴박한 상황에서 현종은 왜 팔관회를 치렀을까?

팔관회 행사가 폐지된 지 10여 년이 지난 993년(성종12), 고려는 거란의 1차 침략을 받았다. 조정에선 “거란에 고려의 땅을 떼어주고 항복을 하자”는 주장이 무성했다. 그러나 문신 이지백은 ‘할지론(割地論)’을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가볍게 토지를 떼어 적국에 주기보다 선왕(先王;태조)이 강조한 연등(燃燈)·팔관(八關)·선랑(仙郞) 등의 행사를 다시 시행하고 다른 나라의 법을 본받지 않는 것이 나라의 보전과 태평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하늘에 고한 후 싸울 것인가 화해할 것인가를 임금께서 결단해야 합니다.”(『고려사』 권94 서희 열전)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전통행사를 행하여 민심을 결집시킬 것을 요구한 것이다. 현종의 팔관회 부활도 그때의 학습효과 때문일까? 현종은 30년간 중단된 팔관회를 열어 민심을 결집하고, 국가와 사회를 통합하려 했던 것이다.

고구려 동맹과 신라 화랑도 정신 계승
팔관회는 원래 불교에서 재가신도가 지켜야 할 8계(戒), 즉 살생하지 않고(不殺生), 자기 물건이 아니면 갖지 않고(不與取), 음행하지 않고(不淫), 헛된 말을 하지 않고(不妄語), 음주하지 않는(不飮酒) 등 여덟 가지 계율을 지키기 위한 법회였다. 신라 진흥왕 12년(552) 고구려에서 귀화한 승려 혜량(惠亮)법사가 전사한 군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법회를 연 것이 팔관회의 첫 기록이다. 궁예도 900년 양주(지금 서울)와 견주(지금 양주)를 정벌한 뒤 팔관회를 열었다. 당시엔 불교행사였다.

고려도 건국된 해(918년) 11월 첫 팔관회를 열었으며, 성종과 원 간섭기 때 중단된 적이 있지만, 고려가 망할 때까지 팔관회가 지속됐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946년)에서 “연등회는 부처를 섬기는 행사이며, 팔관회는 하늘과 명산의 신령과 대천(大川)의 용신(龍神)을 섬기는 행사”라고 했다. 즉 팔관회는 불교행사인 연등회와 달리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행사라 한 것이다. 또 왕건은 “선왕들의 제삿날을 피해 군신(君臣)이 함께 즐기는 행사가 돼야 한다”고 했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徐兢)은 당시 고려의 여러 제도와 풍습을 견문한 내용을 담은 『고려도경(高麗圖經)』(1123년)에서 “팔관회는 고구려 제천(祭天)행사인 동맹(東盟)을 계승한 것”이라 했다.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도 동맹과 같은 제천행사다. 팔관회는 이같이 고대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민심과 사회를 결집시켜 온 국민이 하나가 되는 통합의 기능을 수행한 축제행사였다. 고려 의종은 1168년(의종22) 서경에 행차하면서 왕조 중흥을 위한 교서를 내리고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선풍(仙風)을 따르고 행하라. 옛날 신라는 선풍이 크게 성행했다. 이로써 하느님과 용신(龍神)이 함께 기뻐하고 사람과 만물이 편안하게 되었다. (중략) 근래 개경과 서경의 팔관회는 날로 옛 모습과 남긴 자취가 쇠퇴하고 있다. 지금부터 양반 가운데 재산이 넉넉한 자를 선가(仙家)로 미리 선택하여, 옛 모습을 따라 행하여, 사람과 하늘이 모두 기쁘게 하라.”(『고려사』 권18)

선풍은 신라의 낭가(郎家)사상이 깃든 풍습이다. 삼국 통일의 주역인 신라 화랑도는 이런 낭가 사상의 풍토 아래 조직됐다. 의종은 “팔관회 행사는 이런 신라의 선풍(仙風)을 계승하는 것이며, 선풍의 쇠퇴는 곧 팔관회의 쇠퇴로 이어진다”고 했다.

고려 중기 문장가 이인로(李仁老) 역시 『파한집(破閑集)』에서 같은 생각을 밝혔다.
“계림(신라의 경주)의 옛 습속에 남자 가운데 아름다운 풍모를 가진 자를 골라서 아름다운 장식으로 꾸며, 화랑으로 삼아 나라 사람들이 받들었다. 받드는 무리가 많을 경우 3000명이나 된다. (중략) 무리 가운데 뛰어난 자에게 관직을 주었다. ‘사선’(四仙;영랑·술랑·남랑·안상)의 무리가 가장 뛰어났다. 고려 태조도 이를 계승하여 겨울에 팔관회를 열어 훌륭한 집안 출신 4명을 골라서 신선 옷을 입히고 궁정에서 춤을 추게 했다.”

이인로의 언급과 같이 고려 태조는 선풍을 계승한 화랑, 즉 선랑(仙郞)의 풍습을 계승하여 팔관회를 열었다. 군신동락(君臣同樂)의 팔관회는 고구려·부여·신라에서 유행하던 고대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새롭게 해석하여 새 문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했다.

 

 

포구악(抛毬樂;공 던지는 놀이)과 구장기(九張機;나무타기 놀이) 행사 모습. [김병하 화백]
건국 이후 왕조 멸망 때까지 꾸준히 개최
팔관회는 매년 개경과 서경에서 거행되는데, 개경은 11월 15일, 서경은 10월 15일에 각각 열린다. 개경의 경우 팔관회는 국왕이 거처한 궁성에서 공식적으로 이틀에 걸쳐 행해진다. 첫째 날을 소회(小會)라 한다. 이날 국왕은 먼저 왕조 건국자인 태조의 진전(眞殿;초상화)에 배례한다. 다음엔 태자·왕족·중앙 관료들이 차례로 국왕에게 절을 올린다. 과거와 현재의 국왕에 대한 배례(拜禮)는 전통 농경(農耕)의례의 조상 숭배의식이자 제천 의례를 계승하는 측면을 보여준다. 이어서 3경, 동·서 병마사, 4도호부 8목의 수령들이 표문(表文;제후가 천자에게 올리는 문서)을 올리고, 태자·왕족·중앙관료와 함께 국왕에게 조하(朝賀;조정에 나아가 왕에게 하례하는 것)와 헌수(獻壽;장수를 비는 뜻에서 술잔을 올리는 것)를 바친다. 이어 격구장에 설치된 무대에서 선랑의 무용과 가무, 포구악(抛毬樂;공 던지는 놀이)과 구장기(九張機;나무타기 놀이) 등 기악(伎樂) 공연을 한다. 국왕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차를 내리고, 함께 공연을 관람한다. 둘째 날을 대회(大會)라 하는데, 이날은 송나라와 거란·일본 상인과 동·서 여진(함경도·평안도 일대의 여진족)과 탐라 추장 등이 국왕에게 절을 올린 뒤 그들이 갖고 온 토산물을 바치는 의식이 행해진다. 나머지 행사는 첫째 날과 같다.

국왕은 황제를 상징하는 의상인 황포(黃袍)를 입고, 중앙의 왕족과 관료, 지방의 수령, 외국의 상인과 추장으로부터 헌수와 조하를 받는다. 이들은 제후 자격으로 천자인 고려 국왕에게 헌수와 조하를 올린 것이다. 표문(제후가 천자에게 제출하는 문서)을 올리는 의식과 동·서 여진을 ‘동서번(東西藩)’이라 칭한 것 등이 그 예다.

‘팔관회는 국왕은 천자이며 고려는 천자국이라는 고려 특유의 천하관을 대내외에 과시한, 고려의 개방성을 잘 보여주는 의례다. 고려는 ‘외후내제(外侯內帝)’, 즉 송과 거란에 대해선 국익을 위해 제후국으로 처신하고, 국내적으론 황제(천자)국 체제를 갖춘 독특한 천하질서를 유지했다. 이틀에 걸쳐 행해지는 공연 가운데 선랑(仙郞)이 공연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선랑을 뽑는 풍습은 고려 때 사원에서도 계승되고 있다.

“나라 풍속에 어릴 때 반드시 스님을 따라 글자를 익혔다. 그 가운데 면수(面首;용모와 행동거지가 빼어난 자)가 있는 자를 승속(僧俗)이 함께 받들어 선랑(仙郞)이라 했다. 선랑을 따르는 무리가 때론 천백(千百)이나 되었다. 이 풍습은 신라 때부터 유래했다.”(『고려사』 권108 민적 열전)

선랑으로 선택된 자는 이날 용(龍)·봉황(鳳)·말(馬)·코끼리(象)의 모습을 한 수레를 타고, 그 뒤를 사선악부(四仙樂部)가 노래와 춤을 추면서 뒤따랐다. 용과 봉황 등 네 가지 모습의 수레를 탄 것은 매년 1회 하늘의 신(神)인 선랑이 이들 짐승을 타고 세상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불가(佛家)의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팔관회가 신라의 낭가사상과 불교가 융합된 행사임을 보여준다.

고려 왕조의 팔관회는 이렇게 고대 원시 농경 의례에서 출발한 제천의식과 신라의 선풍·불교의식 등 토착적이고 고유한 의례와 풍습을 계승하고 있다.

고려 왕조에선 조선과 달리 불교·도교·유교·산신 및 조상 숭배 등 매우 다양한 사상이 공존했다. 사상과 문화에서 개방적이었던 고려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다양한 문화와 사상이 공존하는 나라에선 자칫 사회가 분열돼 국가 혼란으로 이어질 우려도 생긴다.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함으로써 민심과 사회를 통합해 이런 우려를 해소하는 기능이 팔관회 행사에 녹아들어 있다. 고려 팔관회의 역사적 의의는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