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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역사 고려시대

기록으로 본 개성 고려 왕릉들은 가짜다.

by 연송 김환수 2013. 12. 15.

기록으로 본 개성 고려 왕릉들은 가짜다.

(Suspicious on the Goli royal tombs in kaesung)

 

개성에 허름하고 초라한 역대 고려왕들의 무덤이라는 고려왕릉은 어떻게 된것일까? 혹자들은 명색이 고려가 황제국을 자칭했는데 황제릉이 저렇게 초라 할 수 있나 하는 서지적 증거 없는 단발성 추측기사들이 주류를 이루어왔다.

 

그러나 운영자가 고려사 기록을 통람한 결과 고려초 고려의 강역이었던 동녕부 60개 성을 홍복원, 최탄, 이연령 등의 역신이 세조 쿠빌라이에게 넘기고 원나라로 도망가 몽고인이되어 고려를 호가호위하였다.

 

고려사를 보면 현종에 이르러 만주 한반도 지역을 활동무대로 하고 이도한것으로 보인다. 개성이 속한 陽廣道(양주,광주도)의 행정 지명이 현종때에 이르러 확정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사 교과서의 고려와 서경 ( 대간을 가로지르는 장성은 없다)

 

 

브리태니커에서는 요양을 동녕부로 보았다.

 

태조의 릉을 포함한 고려의 先代 왕릉은 고려 서경지역인 원 동녕부에 속한 지역에 있었음을 의미하고 그 동녕부는 현재의 요녕서부와 하북 북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비정된다.

 

왜냐하면 동녕부의 바로 서쪽에 원의 북경이 있고 대도가 있었다는 고려사 기록이 그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국사교과서에는 평양을 서경으로 보아 원나라의 점령지가 평양까지 내려와 있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최소한의 지역 비정으로 보아도 고려 선대 왕릉들은 요녕성에 있지 않으면 안된다!

 

운영자가 고려사 및 원사 근거로 비정한 동녕로 지역

 

고려사 卷二 世家 卷第二 太祖 265(943)

謚曰神聖, 廟號太祖, 葬于松嶽西麓, 陵曰顯陵

태조를 송악의 서쪽산록에 장사지내고 현릉이라고 하였다.

 

고려사 卷六十四 志 卷第十八 禮 六 흉례

壬申 葬于顯陵, 以遺命, 喪葬園陵制度, 依漢魏故事, 悉從儉約.

 

고려사 卷八世家 卷第八 文宗135(1059)

五月 乙未 盜入顯陵廟室, 下陵室侍衛大將軍 殷貞等獄, 罪之.

5월 을미 태조의 릉묘실에 도둑이 들었다, 릉실시위대장군 은정들을 하옥하고 죄를 물었다.

 

고려사 卷二十三 世家 卷第二十三 高宗 1912(1232)

是年, 移葬世祖 大祖二梓宮于新都.

세조와 태조의 재궁()을 강화로 옮기다

 

고려사 卷二十三 世家 卷第二十三 高宗 308(1243)

移葬世祖 太祖于江華 盖骨洞.

세조와 태조의 릉을 강화 개골동에 이장하다.

 

고려사 卷二十八 世家 卷第二十八 忠烈王 29(1276)

甲辰 復葬世祖梓宮于昌陵, 太祖梓宮于顯陵.

세조와 태조의 재궁()을 창릉과 현릉에 이장하다.

 

고려사 卷二十九 世家 卷第二十九 忠烈王 64(1280)

遣中郞將 池瑄于東寧府, 問發掘先代君王陵墓.

지선을 동녕부에 보내 선대 군왕의 능묘를 발굴한 일을 따져묻다.

 

심제 글.  http://cafe.daum.net/dobulwonin/MJS6/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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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릉이 있는 지명기록 추적

(Goli imperial tombs are located in near Beijing,Hebei)

 

고려왕묘가 북경근처에 있다는 전언을 현지인에게 듣는다.

 

여러사이트에서 기쁨과 어리둥절함으로 뜬구름잡는 해석을 내어놓는다..어느곳은 심양근처.(? 원나라때 고려왕을 瀋陽王이라 했으니까?..당시 심양은 현재 요녕심양이 아닌 하북瀋州) 누구는 중국발기사를 보고 복건성장락왕묘이니 복건성 천주라고도 한다.

 

운영자가 보건데 모두 아니고 하북성 북경인근이 맞다. 그렇다면 하북성 북경근처 어디일까?

 

고려말 최충헌의 무신정권하에서 왕을 지낸 高宗,神宗,熙宗,康宗 등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 나와있지만 특히 그들이 사망()후 묘호를 정하고 장사를 지낸기록을 보면 특히 희종,강종의 경우 江華縣에 그 왕묘를 만든것으로 되어 있다.

 

실제 얼마전에는 방송에서 마져 강화도에 희종 및 강종비의 묘가 발견되었다고 하는 뉴스를 접하게 되고 덧붇여 왕릉이 발견될수도 있다는 논조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진위를 가리기에 앞서 발굴성과를 보면 칭제했던 국가의 왕이 묘지석도 없고 초라하기까지 한것은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고려의 초기 대부분의 황제들은 개경을 기준으로 하여 그 근방에 왕묘를 쓴것으로 되어 있으며 후반기의 대몽항쟁 및 무신정권의 혼란기를 겪은 대부분의 왕들은 강화도와 관련이 있다.

 

최근 문화재청의 발굴 조사를 보면 왕들의 무덤이 개성과 강화도로 규정 짓고 있는데 실제 발굴 성과를 보면 역사의 부분과 일치성을 갖고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개성을 그대로 경기도 개성으로 ,강화를 경기도 강화도로 그 유적을 규정 짓기에는 많은 의구심을 갖게한다.왜냐하면 지역의 분포와 명칭이 상당히 넓고 다양하다는데 있다, 즉 지명으로만 본다면 한반도의 중부 경기도에서 남부 전라북도 지명인 완산도까지 고려왕들의 릉을 쓴것으로 되어 있으니 말이다.이 얼마나 비논리적인 일인가?

 

고려개성은 경기도 개성으로 ,강화도를 경기 강화도로 이입한데서 나오는 해석오류인 것이다.그렇다면 북한에 있다는 고려왕묘와 경주이씨 후손이 개성근처에서 파냈다는 고려대학자 이제현의 비문(실제 사진으로 보면 발굴당시 비가 흠결이 없고 깨끗하며 색칠이 그대로 살아있었다)은 뭔데?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진실은 따로있다 아래를 보라.

 

사진 고려사원본.

 

고려사 원문해석 >

 

(상략) 내시 왕중명등이 최충헌을 주살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계묘년, 최충헌이 왕을 폐하여 江華縣(강화현)으로 옮겼다가 (자연도)로 옮겼다. 태자 仁州로 내치고, 한남공 을 보위에 앉혔다.

 

고종24, 8월 왕이 법천정사에서 훙하매, 시신을 락진궁으로 옮겼다. 계묘년 재위757세로 돌아가니 시호를 성효라하였고 묘호를 정종이라하였는데 후에 희종이라 고쳤다.

 

릉이름은 석릉이라한다.(하략)

 

강화현은 어디이고 자연도는 어디인가?

 

고려지명을 가장 잘 볼수있는 명나라지리서 독사방여기요에서 자연도는 고려의 광주이며 광주바다가 보이는 지명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있고. 한반도에서는 광주바다가 없다. 그 광주 바다앞의 육지를 자연도라하니 아래지도에 표기한 위치가 된다.

 

윗지도에 명나라 지리서 독사방여기요와 조선초사서를 종합한 지명위치다. (손에 손잡고 발췌) 

 

한남에 仁州가 있다고 하였으니 漢南은 한강 남쪽이고 그 한강은 동으로 흐른다고 기록되어있고 호타하 중류에있는 강이름으로 백마강의 지류라고 운영자가 기술한바가 있다. 현종때 고려와 거란이 전쟁시 소배압이 밀고 내려와 개경을 불사른후 청강에서 되돌아간 그 지역이다.

 

연행일기 제9> - 고구려왕묘(?)

 

어저께 관음각으로 가는 도중에서 승려가 종자(從者)에게 하는 말이,“산 아래에 고묘(古墓) 하나가 있는데, 고려왕(高麗王)이 묻혀 있다고 전해집니다 제자가 어렸을 때에 사부(師父)께서 성 서쪽 이도구(二到溝)에 가면 성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고려왕의 무덤이 있는데, 달자(?)들이 무덤을 부수고 수 길이나 깊이 파 놓았기 때문에 관틀[棺材]은 물에 잠겨 버리고, ()만이 드러나 있는데 벽돌로 쌓아 내부[]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들어가 보니까 비석이 있는데 고려왕 무덤이라고 써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전설이 있게 되었습니다.”

 

요동이 일찍이 우리나라에 속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러나 이 지역은 요동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므로 고려왕묘(高麗王墓)가 어찌하여 이곳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일찍이 우사 상국(雩沙相國 이세백(李世白))의 일기(日記)를 보니, 광녕성(廣寧城) 북쪽에 기자정(箕子井), 기자묘(箕子廟)가 있다는 말이 있었다.

 

소승은 개주(蓋州)인으로 요동은 본래가 귀국의 지방이었습니다. 개주가 또한 요동에 있으니 나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고려인입니다 5리를 지나서 광녕성(廣寧城)에 이르렀다. 지나는 곳에는 많은 분묘가 있었는데 화표(華表 망주석)와 석비들이 서로 마주 바라보고 있어 (하략)

 

위의 사서에서 고려왕묘의 위치를 찾기위한 키워드 개주를 찾아본다.광녕성 또한 개주 북동부에 있는 지명으로 요녕성이 아닌 하북성이다.

 

 

청나라 순천부총도 녕하현 고려왕묘는 이부근이고 북경동남이다.

<대명일통지>

 

개주위(蓋州衛)는 요동도사성(遼東都司城)에서 남쪽으로 240리 되는 곳에 있다. 본디는 한나라 요동군 지역이었는데, 고구려에서 개모성으로 삼았으며, 당나라 때에는 개주를 설치하였다.

 

발해 때에는 이를 그대로 답습하였고, 요나라 때에는 이 길이 진한과 통한다는 이유로 晉州로 고치고서 봉국군으로 승격시켰다. 금나라 때에는 개주로 되었고, 원나라 때에는 요양로(遼陽路)에 속하였으며, 본조 홍무(洪武) 9(1376)에는 주()를 폐지하고 위()를 두었다.

 

주필산이 창평 서남에 있고 원래의 광녕은 창평의 서북에 있다.

 

명사 지리지

 

昌平州元昌平縣?大都路

北有天壽山成祖以下陵寢鹹在東南有白浮山西南有駐?

창평주는 원나라 창평현이고 북에 천수산 (중략) 서남에 주필산이 있다. 하략

 

蓋州衛元蓋州屬遼陽路洪武四年廢五年六月復置九年十月置衛二十八年四月州復廢東北有石城山又北有平山其下有鹽場又東有駐?西濱海有連雲島上有關又東有泥河南有?東南有畢裡河

 

개주는 원나라 개주고 요양로에 속하다. (중략) 동쪽에 주필산이 있다. 동북에 석성산이 있고 북쪽에 평산이 있다. 아래에 염장이 있고 그 동에 주필산이 있다. 서쪽에 빈해가 있다. (중략).

  

하북성 옥전현에 봉황산,쌍성하,고려포가 있다. 요녕성엔 봉성(후에 봉황성)

 

세조실록 권34,

10(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 81(임오)

 

지금 요동(遼東)의 호구(戶口)에서 고려사람이 10분의 3이 살고 있어 서쪽 지방 요양(遼陽)으로부터 동쪽 지방 개주(開州)에 이르기까지 남쪽 지방 해주(海州개주(蓋州)의 여러 고을에 이르기까지 취락(聚落)이 서로 연속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국가에서 급급(汲汲)히 진려(軫慮)할 것입니다

 

성종실록 권186

17(1486 병오 / 명 성화(成化) 22) 108(기묘)

 

요동(遼東)으로부터 남쪽 해주(海州개주(蓋州)의 동쪽으로 봉황산(鳳凰山) 기슭까지 그 땅이 넓고 멀어서 수백 리에 밑돌지 않는데, 인가가 즐비하고 곡식이 들을 덮어 인구가 점점 번성합니다. 사람들은 다 중국말을 모르고 오로지 우리 나라 말을 쓰며, 우리 나라 사람을 보면 앞을 다투어 고향을 물어 그 족속에게 인도하는데, 땅이 기름지고 세를 거두는 것이 매우 적으며 요동에는 또 동녕위(東寧衛)를 두어 편안하게 위안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성종실록 권219,

19(1488 무신 / 명 홍치(弘治) 1) 824(을묘)

 

신이 동팔참(東八站) 사람들을 보니, 모두 우리 나라 말을 잘 알아서 평안도 사람과 다름이 없었으며, 신 등의 하숙(下宿)하고 있는 곳에 혹 와서는 무릎꿇고 절을 하며 영공(令公)이라 칭()하기에 그 온 줄기를 물어 보았더니 모두 평안도사람이라 하였고 혹은 조부(祖父) 때부터 혹은 증조(曾祖)부터 와서 살았다.

 

()동팔참은 하북 북경시 조양구에 위치한 동팔리점으로 보인다.천진시에도 동팔리점이라는 지명이 있다.

 

성종실록 219,

19(1488 무신 / 명 홍치(弘治) 1) 824(을묘)

 

신이 북경(北京)으로 갈 때 요동(遼東) 사람들이 끊임없이 와서 이르기를, ‘봉황산(鳳凰山) 동쪽에 성()을 쌓는다.’고 하였었는데, 돌아올 때에는 사람들의 말로는 성의 공사를 이미 마치고 1천 명으로써 지킨다 하고, 또 금년 안에 금주(金州개주(蓋州동녕(東寧) 등의 위()4천호()를 옮겨 살게 한다고 합니다. 봉황산은 의주(義州)와의 상거가 겨우 하룻길이며, 요해지(要害地)에 처하여 있어...

 

(아래 조선중후기 지도에 요녕성 의주도 하북성에서 옮겨진듯하다 명나라 초기에 명이 요녕으로 들어와 현재 봉황성을 쌓았다는 해석은 무리다)

산해관과 조선의주가 가깝게 위치하는 조선중후기 지도.

 

위의 기록을 종합적으로 볼때 운영자와 고려만주몽골의 저자 이성근박사가 지도에 표기한 위치가 드러맞는다고 볼수있다.

 

윗지도에 명나라 지리서 독사방여기요와 조선초사서를 종합한 지명위치다. (손에 손잡고 발췌) 

 

 

청나라 순천부총도 녕하현 고려왕묘는 이부근이고 북경동남이다.

  

운영자 심제 글. http://cafe.daum.net/dobulwonin/MJS6/214

 

 

심제(心濟) 이진우 박사는 재야사학계의 큰 별이다.

성균관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 연세대학교 화공학 박사

반도체 공정 기술자 30년간 종사, 현재 ()한서상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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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릉

 

태조와 신혜왕후의 합장된 왕릉인 현릉(顯陵). 개성시

 

 현릉(顯陵)

 

 현릉(顯陵)

 

현릉(顯陵)

 

태조(太祖, 877년 1월 31일 (음력 1월 14일) ~ 943년 7월 4일 (음력 5월 29일)는 후삼국 시대 후고구려의 장군이자 고려 왕조의 초대 국왕(재위기간 :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이다.

 

성은 왕(王), 휘는 건(建),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약천(若天),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응운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應運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3]이다. 연호는 천수(天授)이다. (천수제)

 

고려 2대 왕 혜종 순릉. 개성시 룡홍리

 

 

고려 5대 왕 경종 영릉. 판문군(개성직할시 남부에 있는 군)

 

고려 6대 왕 성종 강릉. 판문군 진봉리

 

 

고려 8대 현종(재위 1010~1031)의 선릉. 개성 교외 만수산 기슭 언덕

 

고려 11대 문종(재위 1046~1083)의 경릉. 판문군 선적리

 

고려 12대 왕 순종 성릉. 판문군 진봉리

 

21대 희종(재위 1204-1211)의 석릉. 강화도

 

고려 22대 강종의 비인 원덕태후의 곤릉. 강화도

 

 

고려 23대 고종의 홍릉, 강화도

 

고려 제24대 원종(元宗,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 가릉.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16-2

 

7릉군 모습. 주인을 알수 없는 왕릉급 무덤 7기가 모여 있다.

명릉군 모습

 

고려 제29대 충목왕 (忠穆王 13371348 (충숙왕 복위 6충목왕 4))

이름은 흔(). 충혜왕(忠惠王)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덕녕공주(德寧公主)이다. 능은 명릉(明陵開城 소재), 시호는 현효(顯孝)

참고로 고려 8대 현종의 왕비 원성왕후의 명릉(明陵)과 같은 능호를 사용하고 있지만 충목왕의 능이다.

 

황해북도 개풍군 연릉리에 있는 고려시대 고분군으로, 공민왕릉과 왕건왕릉 사이에 위치해있으며 3개의 능이 약 25m, 50m 간격으로 나란히 하고 있다.

 

가장 서쪽에 있는 1능이 29대왕 충목왕(재위 1344~1348년, 공민왕의 조카)의 무덤이며, 무덤의 크기는 너비 8m, 높이 2.3m이다. 왕릉급 무덤인 2능, 3능도 같은 크기로 지어졌는데 심각한 도굴과 훼손으로 인해 아직 누구의 무덤인지는 해명되지 않았다.

 

명릉은 고려 제29대 임금 충목왕(忠穆王; 1337~1348, 재위 1344~48)의 능으로 개풍군 중서면 여릉리 명릉동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 초기에는 문인석만 제작했으나 후대에는 무인석도 함께 배치하기 시작하였으니 충목왕의 명릉에서 정비되어 능침 제도가 바뀌게 된다. 특이한 것은 태조릉과 공민왕릉을 비롯하여 정종 안릉, 문종 경릉, 신종 양릉, 원종 소릉, 충목왕 명릉 등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북한에 위치한 고려 왕릉들은 1956년 사회과학원 고고학 연구소가 공민왕릉 발굴한 것을 시작으로, 1982년 개성역사박물관이 문종의 경릉, 경종의 영릉을 발굴했고, 1983년에는 사회과학원 고고학 연구소가 충목왕의 명릉을 발굴했다. 1992년에 왕건왕릉, 1997년 동구릉 등 한국전쟁 이후 총 20여 기의 왕릉과 왕릉급 고분들을 발굴했다. 북한은 2003<고려무덤발굴보고>를 내는 등 의미 있는 연구와 발굴 보고서를 내고 있다.

 

공민왕릉과 노국대장공주 쌍릉. 조선시대 왕릉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고려 공양왕릉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고려 제34대 공양왕(1345~1394, 재위 1389∼1392)과 부인 순비(順妃) 노씨(盧氏)의 능.

사적 제191호. 쌍릉 형식이며 능역에는 상석 1, 장명등 1기와 두 쌍의 석인, 석호 및 묘표석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