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 예 방/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친필 서첩 등 고문헌 일본서 발견

by 연송 김환수 2017. 2. 28.

추사 김정희 친필 서첩 등 고문헌 일본서 발견 

 

기사입력 2017-02-27 15:55

 

노설첩·내사기 동국여지승람·경세유표 가장본 등 400여종


추사 김정희 친필 서첩 '노설첩'(舌帖)지난 12~19일 일본 교토대 서고에서 발견된 '노설첩' 표지와 내용 일부[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제공]

 

(세종=연합뉴스) 이웅 기자 = 조선 시대 대표적인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미공개 친필 서첩 등 조선 후기 문헌과 서화가 일본에서 다량 발견됐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는 지난 12~19일 일본 교토대 서고를 조사한 결과 추사의 친필 서첩인 '노설첩'(舌帖),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희귀본, 다산 정약용(1762~1836)'경세유표'(經世遺表) 새 판본 등 고문헌과 서화 400여 종 등 수천 점을 발견했다고 27일 밝혔다.

 

'노설첩'은 추사가 함경도 북청에서 유배 생활을 한 뒤 경기도 과천에서 은거하던 말년(1852~1856)에 자신의 시 '석노가'()'영백설조'(詠百舌鳥)를 행서로 쓴 서첩이다. 노설첩은 지금까지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다.

 

동국여지승람은 성종 12(1481)에 편찬된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문지리서다. 이번에 발견된 판본은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할 때 적는 기록인 내사기(內賜記)가 찍혀 있는 데다, 전체 50권 가운데 28권이 남아 있다.

현재 국내에 전해지는 동국여지승람은 여러 판본이 있지만 5권 이내다. 책을 하사한 연도가 1502년으로 표시돼 발간 연도도 이른 편이다.

 

경세유표는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의 대표적인 저서로 각종 제도개혁 방안을 담고 있다. 이번에 발견한 판본은 다산 집안에서 소장했던 가장본(家藏本)이다.

 

박영민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노설첩은 처음 발견돼 사료로서의 가치는 물론 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고, 동국여지승람은 발간 시기나 규모로 볼 때 보물급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이어 "이밖에도 상업, 서화, 문집, 금석문 등 한국학의 전 영역에 걸쳐 중요한 자료들이 다량 발견돼 향후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내사기(舌帖)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지난 12~19일 일본 교토대 서고에서 발견된 '내사기 동국여지승람'[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제공]

 

abullapia@yna.co.kr



------------------------------------------------------------------

추사 친필 시첩 등 日 교토대 서고서 발견

등록 : 2017.02.27 11:17
수정 : 2017.02.27 11:17

조선후기 서화ㆍ고문서 수천점


일본 교토대 서고에서 추사 김정희의 친필 시가 적힌 '노설첩'이 발견됐다.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제공


노설첩에서는 추사 김정희의 완숙한 행서체를 볼 수 있다.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제공

일본 교토대 서고에서 조선 후기 문화의 정수가 담긴 고문헌이 다량으로 발견됐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는 12∼19일 일본 교토대 서고를 조사해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친필 시첩과 조선후기 서화, 고문서 등 수천점을 발견했다고 27일 밝혔다. 

이번에 발견된 자료 중 ‘노설첩(노舌帖)’은 추사가 제주와 함경도 북청 유배생활을 마치고 과천에 은거하던 1852∼1856년에 쓴 것이다.


추사의 시 ‘석노시(石노詩)’와 ‘영백설조(詠百舌鳥)’를 행서로 썼다. 박영민 해외한국학자료센터 연구교수는 “이즈음 추사의 행서체가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고, ‘석노시’는 추사가 우리나라의 고고학자였음을 증명하는 시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석노시’는 도끼 등 유물을 가지고 땅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읊는 내용이다.


교토대 부속도서관 다니무라 문고에 귀중서로 분류돼 있던 ‘노설첩’이 국내에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12절(折)로 나뉜 서첩 1절은 세로 22.1㎝, 가로 12.8㎝ 크기로 전체 길이는 약 154㎝다.


추사의 작품은 흔히 진위 논쟁이 일어나곤 했지만 ‘노설첩’은 가장본(집안에 소장됐던 본)으로 소장자가 확실하다.

추사의 동생 김상희의 손자인 김문제(1846∼1931)가 소장했던 것으로 그의 호 ‘위당(韋堂)’이 인장으로 찍혀 있다

        

자료 목록에도 없던 다산 정약용의 대표저서 '경세유표' 가장본도 이번에 먼지 덮인 상자 속에서 발견됐다.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제공


이번 조사에서는 국내는 물론이고 교토대에서도 존재를 몰랐거나 목록에 이름만 올라 있던 자료가 다수 발견됐다. 자료 목록에 없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대표 저서 ‘경세유표’ 가장본 11책도 먼지 덮인 상자 속에서 발견됐다.


영조 시기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1682~1759)가 전국의 비문을 탁본해 편찬한 ‘금석집첩(金石集帖)’도 확인됐다. 219책으로 된 ‘금석집첩’에 들어있는 탁본은 2,300점이 넘는 방대한 양이다.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금석집첩 39책에는 없는 탁본들이다.


조선 상업사, 사회사를 볼 수 있는 고문서 3,500여 점도 나왔다. 19세기 면주를 팔던 상인들이 남긴 문서에는 면주전 상인과 왕실, 호조의 관계, 면주전 운영실태 등이 담겨있고, 서울 양반의 재산 규모를 볼 수 있는 분재기도 발견됐다.  

         

영조 시기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가 전국의 비문을 탁본해 편찬한 '금석집첩'도 확인됐다. 2,300점이 넘는 탁본, 219책으로 이뤄진 방대한 양이다.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제공


정우봉 해외한국학자료센터장은 “이번에 발견된 각종 자료들은 향후 수십 년간 한국학의 연구 소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한국학자료센터는 2008년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원을 받아 해외 소재 한국 고문헌을 국내에서도 연구할 수 있도록 원본 이미지를 고화질 디지털 자료로 만들고 상세 서지정보를 정리하고 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

  

160년전 秋史 친필 서첩, 서 찾았다

 

조종엽기자 입력 2017-02-27 03:00:00 수정 2017-02-27 11:21:26

 

말년에 쓴 담긴 노설첩등 조선후기 미공개 문헌-서화, 교토대 서고서 수천점 발견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의 최근 조사에서 확인된 추사 김정희의 친필 시첩 노설첩표지(위쪽 사진)와 시첩에 담긴 석노시의 일부. 일본 교토대 부속 도서관 다니무라 문고에 소장돼 있다.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제공

 

보물이 긴 잠에서 깼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는 1219일 일본 교토대 서고를 조사해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친필 시첩을 비롯해 조선 후기 문화의 정수가 담긴 귀중 고문헌과 서화 400여 종 등 수천 점을 발견했다. 귀중본이 이처럼 다량으로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에 발견된 자료 중 노설첩(舌帖)’은 추사가 함경도 북청 유배생활을 마치고 18521856년 과천에 은거하던 시절 자신의 시 석노시()와 영백설조(詠百舌鳥)를 행서로 쓴 것이다. 고려대를 통해 작품 일부를 확인한 대표적 추사 연구가 박철상 씨(50)추사 말년의 완숙한 글씨로 줄을 친 종이에 쓴 것으로 보아 (잘 쓰겠다고) 마음먹고 선물용으로 쓴 것이라며 실물을 봐야겠지만 첩으로 묶인 추사 글씨가 드물어 가치가 크다라고 말했다.

 

노설첩은 교토대 부속도서관 다니무라 문고에 귀중서로 분류돼 있었으며 국내에는 공개된 적이 없다. 12()로 나뉘어 있는데 1절의 크기는 세로 22.1cm, 가로 12.8cm로 전체 길이는 약 154cm.

 

시첩에 담긴 영백설조뒤에는 下潠田舍(하손전사)”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문집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하손전사는 도연명이 은거하던 자신의 거처를 지칭한 것으로 이를 빌려 추사가 과천의 거처를 표현한 것이다. 이 표현은 지금까지는 소동파 관련 글 한 군데서만 발견됐다.

 

이번 조사에서는 국내는 물론이고 교토대에서도 존재를 몰랐거나 목록에 이름만 올라 있던 자료가 상당수 발견됐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대표 저서 중 하나인 경세유표 가장본(家藏本·다산 집안에 소장됐던 본) 11(완질)도 자료 목록에는 없었으나 이번에 먼지 덮인 상자 속에서 발견됐다. 다산 저작집 연구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보름 씨는 상단 주석은 다산 본인이나 제자 등이 썼을 것으로 보이는데, 기존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지 않은 내용들이 포함돼 있어 향후 여유당전서를 보완하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다산의 저술은 다산이 오늘날의 연구책임자와 같은 역할을 맡고 제자들과 함께 썼다. 상단의 글씨도 다산이 직접 쓴 것이 아니더라도 다산이 한 말을 제자가 썼을 가능성이 있다.

 

영조 시기 전국의 비문을 탁본해 편찬된 금석집첩(金石集帖), 조선 상업사 연구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상업문서 등 고문서 3500여 점도 확인됐다.

 

이번 발견은 해외 한국학 자료 조사의 쾌거로 평가된다. 해외한국학자료센터장인 정우봉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각종 자료들은 향후 수십 년간 한국학의 연구 소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조선시대 학술-예술 희귀 자료수십년 연구거리 나왔다

 

조종엽기자 입력 2017-02-27 03:00:00 수정 2017-02-27 15:04:43

 

[고문헌 서 무더기 발견]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확인

다산이 직접 쓴 주석? 일본 교토대 서고에서 발견된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 가장본 표지(위쪽)와 본문 일부. 본문 상단의 주석(실선 안)은 다산 본인이나 제자, 후손이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제공

 

조사 때마다 중요 자료가 나오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놀랐죠. 한국학 전 영역을 망라하는 귀중본들이 쏟아졌으니까요.”

 

박영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최근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의 일본 교토대 조사에 참여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이 조사는 2014년 이후 3번째 진행된 것으로 가와이 문고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자료가 대상이 됐다. 가와이 문고는 가와이 히로타미(河合弘民·18731918) 박사가 수집한 것을 박사 사후 교토대가 구입한 자료다.

 

완숙한 말년 추사 글씨

 

이 도끼 이 촉이 꼭 숙신(肅愼)의 것이라면/동이(東夷)들은 대궁(大弓)에 능하단 게 상상되네”(‘석노시·)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추사 김정희의 친필 시첩인 노설첩에 담긴 석노시는 도끼 등 유물을 가지고 땅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읊는 내용으로 고고학자로서의 추사의 면모를 보여준다. 시를 쓴 뒤 秋史(추사)’ ‘金正喜印(김정희인)’이라고 인장을 찍었다. 서첩 소장자는 추사의 동생 김상희의 손자인 김문제(18461931)로 그의 호 위당(韋堂)’이 인장으로 찍혀 있다. 김문제의 손자가 김익환인데 1934년 신조선사에서 추사의 문집을 105책으로 간행할 때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추사가 석노시영백설조를 각각 쓴 예는 있으나 두 시가 한 서첩으로 묶인 것은 없다. 서첩의 제목 노설첩도 두 시의 제목에서 한 글자씩 딴 것이다.

 

이본(異本) 등장으로 새 연구 필요

 

이번에 발견된 교토대 소장 경세유표는 11책 완질본으로 책 표지, 장정, 행수와 글자수, 책 상단의 주석 등이 이른바 다산학단의 기존 가장본과 일치한다. 김보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는 책에 구멍을 뚫는 침장 방법 등은 기존 가장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갖고 있다상단의 주석에 신()이라는 글자가 없는 것 등을 고려하면 가장본 중에서도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인장을 통해 추정해 볼 때 이 책은 19세기 중후반 인물인 이겸하(李謙夏)를 통해 일본으로 건네졌고, 다시 가와이 히로타미에 의해 1919년 교토대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번 자료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 신조선사에서 다산의 전집을 간행할 때에도 참고하지 못한 자료로 추정된다. 2012년 발간된 여유당전서 정본 역시 이번 발견으로 추가 대조 작업이 필요해졌다.

 

조선 초기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묘법연화경도 확인됐다. 세로 약 27.9cm, 가로 950.6cm에 달하는 쪽빛 두루마리에 금니로 법화경을 쓴 것이다. 국내에 소장된 고려시대 감지금니묘법연화경(紺紙金泥妙法蓮華經)’ 1, 3, 4, 6, 7권 등은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다. 글자의 상하좌우에 흰색의 동그라미가 표시되어 있는 게 이번에 발견된 묘법연화경의 특징이다. 이는 평성, 거성 등 성조를 표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대 규모, 최고 수준 탁본 확인

    

국내 최대 금석문 탁본 금석집첩의 표지(위쪽)와 내용 일부. 이 책에 실린 탁본 2300여 점 중에는 지금은 사라졌거나 마모로 판독하기 어려운 비문이 상당수 담겼을 것으로 기대된다.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제공


영조 시기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16821759)가 전국의 비문을 탁본해 편찬한 금석집첩(金石集帖)의 전모도 드러났다. 이번에 확인된 금석집첩은 219책으로 탁본이 2300점이 넘고, 지금은 사라졌거나 마모돼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비문도 상당수 있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금석집첩 39책에는 없는 탁본들로 과거 국사편찬위원회의 교토대 조사에서는 존재만 알려져 있던 것이다.

 

금석집첩은 왕실 종친, 정승, 고위 관료, 스님 등으로 분류하고 망라했다. 탁본의 수준이 탁월하고, 범위로 보아 국가사업으로 진행됐을 가능성이 있다. 조사에 참여한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연구실장은 현존하는 금석문 탁본 중에 가장 방대하면서도 가장 정제돼 있고 체계적이다라고 평가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는 2008년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원으로 해외 소재 한국 고문헌 자료의 상세 서지정보를 정리하고, 원본 이미지를 고화질 디지털 자료로 만들어 학술 연구에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박영민 교수는 교토대는 자료 조사 요청에 흔쾌히 응하고 서고를 개방했을 뿐 아니라 자체 비용을 부담해 훼손 자료를 수리해 촬영하도록 하는 등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이 같은 협력은 유례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