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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추사 김정희

화순옹주 홍문 (김정희의 증조모)

by 연송 김환수 2015. 10. 28.

조선 21대 왕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1720∼1758)는 조선 왕실 여성 중 유일하게 남편을 따라 죽은 ‘열녀’다.


그는 남편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1720∼1758·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이 병으로 죽자 곡기를 끊고 14일 만에 따라 죽었다. 영조가 화순옹주의 집에 찾아와 미음을 먹으라고 권했지만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화순옹주의 조카인 정조는 고모의 사후 25년인 1783년 고모의 정절을 기리며 월성위 부부의 무덤이 있는 충남 예산에 열녀문(화순옹주 홍문)을 세웠다.


정조는 당시 “부부의 의리를 중히 여겨 같은 무덤에 묻히려고 결연히 뜻을 따라 죽기란 어렵지 않은가. … 어찌 우리 가문의 아름다운 법도에 빛이 나지 않겠는가. … 아! 참으로 어질도다”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그의 자살은 남편에 대한 정절보다는 불행했던 가족사 때문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김지영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원(문화인류학)이 최근 한국여성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한 논문 ‘18세기 화순옹주의 자살에 대한 생애사적 성찰: 죽음과 결핍의 가족사’에서다.

 

화순옹주의 어머니는 영조의 첫 후궁 정빈 이씨다. 정빈 이씨는 화순옹주를 낳고 이듬해 27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화순옹주는 젖먹이 때부터 어머니의 보호 없이 궁궐 생활을 견뎌야 했다. 친언니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첫돌도 안 되어 죽었기 때문에 만난 적이 없고, 한 살 터울인 친오빠 효장세자는 아홉 살에 요절했다. 게다가 효장세자는 여섯 살에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서로 떨어져 살아 화순옹주와 오누이의 정을 나눌 시간도 없었다.

아버지 영조가 딸 7명 중 화순옹주를 특히 예뻐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다른 혈육의 부재를 상쇄하긴 어려웠다는 게 김 연구원의 설명이다.

 

가뜩이나 외로웠던 왕궁에서 1730년 열 살이던 화순옹주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순정이라는 궁인이 동궁 나인으로 뽑히지 못한 것에 앙심을 품고 정빈 이씨와 효장세자를 저주하며 이들의 죽음에 깊이 간여했음이 드러난 것이다.

또 화순옹주가 홍역에 걸렸을 때 순정이 몰래 독약을 먹여 죽이려 했음이 밝혀졌다.

 

화순옹주는 2년 뒤 열두 살 나이에 동갑내기 월성위와 혼인해 남다른 부부애를 과시했다. 하지만 화순옹주의 불임으로 둘 사이엔 자식이 없었다.

조선 여성에게 불임은 어머니로서의 정체성뿐 아니라 아내와 며느리로서의 정체성마저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이 죽자 화순옹주는 가족의 결핍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죽기로 결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김 연구원의 설명이다.

 

조선 영조의 둘째 딸로서, 13세에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월성위 김한신과 결혼한 화순옹주의 열녀정문이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이기도한 김한신(1720~1758)은 벼슬이 수록대부 오휘도총관에 이르렀다.

부군이 38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하자, 옹주는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영조의 말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길을 택하였다.

영조는 옹주가 부왕의 뜻을 저버린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정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대에 정조가 내렸다. 약 200여 평의 대지 위에 낮은 담장을 두르고 출입문의 정면에 홍문을 세웠다.

건물은 정면 8탄 측면 1칸으로 중앙의 오른쪽 칸에 문을 내었고, 문의 전면에 홍살을 세우고 문 뒤에는 붉은 칠을 한 현판이 걸려 있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부왕의 뜻을 저버렸다 하여 정려를 내리지 않았으며, 뒤에 정조가 내렸다. 홍문은 묘막터 정문 위에 “烈女綏祿大夫月城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貞孝公金漢藎配和順翁主之門 上之七年 癸卯一月十二日 特命旌閭(열녀수록대부월성위겸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정효공김한신배화순옹주지문 상지7년 계묘 1월12일 특명정려)”라고 판각되었다.

 

 

 

 

묘막터는 53칸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불타 없어지고 주초(柱礎)만이 남아 있다.

 

 

월성위 김한신(月城尉 金漢藎)과 화순옹주(和順翁主)의 합장묘(合葬墓)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아들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和順翁主)의 합장묘(合葬墓)이다. 묘에는 돌담장이 둘러있고,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 장명등 등의 묘석(墓石)을 구비하였다. 비문에는 영조의 어필(御筆)이 새겨져 있다.

 

화순옹주는 김한신이라는 젊은 수재에게 시집을 가서 내외간 금슬이 아주 좋았던 모양인데, 남편이 일찍 죽자 곡기를 끊고 마흔도 안 된 나이에 뒤따라 죽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영조 자신은 팔순이 넘게 살았지만 자식들은 다 비참했다. 맏아들 효장세자는 요절했고, 둘째 아들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 갇혀 죽었으며, 12명의 딸들 역시 두세 명을 제외하고는 요절하거나 산고로 일찍 죽었다.

그런 마당에 화순옹주마저 남편을 따라 죽겠다면서 곡기를 끊어버리자 영조는 눈물로 편지를 써서 말린다. 하지만 화순옹주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끝내 죽고 말았다.

이에 예조에서는 눈치도 없이 시댁 경주김씨 집안에 열녀문을 하사하여 칭송하자고 했다. 하지만 영조는 대노하여 아비보다 먼저 죽은 불효자식이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영조 역시 남의 집 딸이 남편 따라서 죽었다고 하면 열녀문을 내려 표창했을 것이다. 열녀, 일부종사 같은 이념은 조선의 유교사회, 남성 중심의 사회를 떠받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그러나 막상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딸이 젊은 나이에 자결을 했다니, 남들이야 왕실에 열녀가 났다고 했겠지만 딸의 죽음을 목도한 친정아버지로서 그 속이 오죽했겠는가.

시댁 식구들이 다 죽는다 하더라도 내 딸만큼은 부디 목숨을 부지해 줬으면 하고 바라는 게 세상 모든 친정 아버지의 마음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