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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연방/불교소식

내 인생 가장 신세진 곳 - 마곡사 / 백범 김구

by 연송 김환수 2016. 4. 13.


내 인생에서 가장 인상깊고 가장 신세진 곳이다

 

백범 김구와 마곡사

데스크승인 2016.04.04 17:07:10 마곡사=이성수 기자 | soolee@ibulgyo.com

 

가장 인상 깊고 신세진 곳이 마곡사이다.” 1945년 해방 후 귀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의 말이다. 백범 김구는 1898년 마곡사에서 출가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았을 만큼 불연(佛緣)이 깊다. 4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앞두고 백범의 승려시절 자취가 깃든 공주 마곡사를 찾았다.

 

 백범의 출가도량인 마곡사는 매년 추모다례를 거행한다. 지난해 6월 추모다례에서 주지 원경

    스님이 차를 올리고 있다.

김구의 사진 등 자료를 전시한 백범당(왼쪽)과 해방후 마곡사를 참배한 백범이 심은 나무.

해방 후 마곡사를 찾은 백범(앞줄 오른쪽)이 마을 주민과 대웅보전 앞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마곡사, 백범 김구 출가한 도량

 

매년 서거일에 추모다례봉행

 

백범당, 백범길 조성해 정신 계승

 

춘마곡(春麻谷). 다른 계절도 좋지만 마곡사의 봄 경치가 빼어나 붙은 말이다. 봄을 전하는 화신(花信)이 도착한 마곡사 마당 한쪽에 자리한 백범당(白凡堂)에도 봄기운이 물씬 전해온다. 이 건물의 이름은 민족지도자 김구의 호에서 비롯됐다. 젊은 시절, 스님 생활을 한 그를 기리기 위해 마곡사에서 지었다. 백범당 옆에는 해방 후에 김구가 심었다고 전하는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67년이란 세월이 무상하게 흘렀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스님이었던 시절의 원력은 지금까지 전해온다.

 

나의 소원에서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모두 성인으로 숭배한다고 한 백범은 동학, 유교, 불교, 개신교, 가톨릭 등의 종교를 두루 섭렵했다. 물론 민족주의자 백범의 평생 화두는 독립이었다. 하지만 불제자로 지낸 마곡사에서의 생활은 백범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마곡사 앞을 흐르는 태화천은 백범이 삭발한 곳으로 백범당에서 가깝다. “머리가 섬뜩하여 내 상투가 모래 위에 뚝 떨어진다. 이미 결심한 일이건만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뚝 떨어짐을 금할 수 없다.” <백범일지>에 실린 삭발 당시의 백범 마음이다. 호덕삼(扈德三) 스님을 따라 삭발을 했던 청년 김구의 모습이 시냇물에 비치는 것 같다.

 

백범은 왜 스님이 되었을까?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9510월 명성황후가 무참히 시해되는 참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격분한 청년 백범은 황해도 치하포 나루에서 일본 헌병을 살해했다. ‘국모를 시해한 원수를 갚는다는 글을 붙여 대의명분을 분명히 했다. 몇 달 뒤 일경에 체포되어 인천감옥에 갇혔다. 사형 집행 2시간 전에 특사령이 내려져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언제 사형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18983월 극비리에 탈옥을 감행한다. 이후 산사(山寺)에 몸을 숨겼다. 여주 신륵사와 하동 쌍계사 칠불암 등을 전전했는데, 한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보다 깊은 산사를 찾아 나섰다. 공주 갑사와 동학사를 거쳐 마곡사에 도착했다. 지금은 교통이 편리해졌지만 당시 마곡사는 오지였다. 은신하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그해 가을, 백범은 정식으로 스님이 되었다. 은사는 호서지방 대강백으로 존경받는 보경(寶境)스님의 제자인 하은(荷隱)스님이었다. 동학군으로 활동할 당시 황해도 구월산 패엽사에서 설법을 들었다는 하은스님과 법명이 같다. 동명이인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같은 스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스님이 된 백범은 낮에는 울력을 하고, 밤에는 경전을 공부했다고 한다. 1947년 나온 <불교공보(佛敎公報)>에는 약 반년 동안 착실한 사미 중노릇을 하시었으니, 낮에는 장작도 패고 물도 긷고 그 밖에 하기 어려운 일까지 하였다. 어느날 물을 길어 오다 물동 하나를 깨트리고 은사 하은당에게 몹시 꾸지람을 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엄격한 수행 생활로 고단한 나날을 보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모두 내 공부를 도우심으로 알라는 뜻이라고 회고했다. 하심(下心)와 인욕(忍辱)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였을 것이다.

 

1946년 봄에 마곡사를 방문한 백범은 “48년 전에 머리에 굴갓을 쓰고 목에 염주를 걸고 출입하던 길이 예와 같거니와 대웅전에 걸린 주련도 옛날 그대로라고 기억을 떠올렸다. 굴갓은 스님들이 쓰는 모자이다. 백범이 감격스러워한 주련은 마곡사 대웅보전에 빛이 바랜 채 지금도 남아있다. ‘却來觀世間(각래관세간) 猶如夢中事(유여몽중사)’ “돌아와 세상을 보니 흡사 꿈속의 일 같구나라는 뜻이다.

 

용담스님에게는 <보각서장(普覺書狀)>을 배우던 염화실에서 뜻 깊은 하룻밤을 지냈고, 승려들은 나를 위하여 이날 밤에 불공을 드렸다.” <백범일지>에 나오는 기록이다. <보각서장>은 중국의 북송 말기에서 남송 초기에 살았던 대혜스님의 선() 수행 편지 모음집이다. 줄여 <서장>이라 하는데, 보각은 대혜스님의 법호(法號)이다. 또한 백범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보지 말고,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달을 보라는 견월망지(見月忘指)의 법문도 들었다고 했다. 참선 수행을 병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범이 남긴 친필 가운데 불교, 특히 참선과 인연이 깊은 작품도 여럿이다.

 

<서장>을 일러준 용담스님은 나뭇가지를 잡는 것 보다는 높은 벼랑에 달려 매어서 두 팔을 쫙 벌려야만 참으로 대장부라는 가르침도 전했다.

 

백범의 평생 신조로 잘 알려진 서산대사의 가르침은 지금까지 유명하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6교구본사 마곡사는 매년 6월 백범 기일에 맞춰 추모 다례를 봉행한다. 주지 원경스님은 민족의 지도자이며, 한때 출가사문으로 수행한 백범 선생의 서거일에 즈음해 추모다례를 지내는 것은 당연한 도리라면서 독립을 위해 헌신한 백범 선생, 아니 원종스님의 뜻을 잘 기려 나가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백범이 안두희의 저격을 받아 세상을 떠난 후, 마곡사는 49재일에 맞춰 천도재 겸 추도 법식(法式)’을 엄수하기도 했다. 백일장이나 사생대회와 같은 청소년축제 개최도 검토하고 있다.

 

마곡사에는 백범당(白凡堂)외에 백범 명상길을 조성해 김구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해방후 마곡사 참배 당시 “50년 전에 같이 고생하던 승려가 하나도 없어 슬프다면서 마곡사 법당 앞 사리탑을 중수하고, 그 앞다리를 백범교로 고치겠다고 발원한 백범의 향기가 그리운 계절이다.

 

  

백범이 평생 신조로 삼은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담은 친필

백범일지에 실린 득도식

 

1947년 도서출판 국사원에서 발간한 <백범일지>에는 출가 동기와 절차 등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890년대 말 당시 스님들이 삭발염의 과정도 확인 할 수 있다. 대부분 원문 그대로 옮기고, 일부만 표준말로 바꾸었다.

 

하은당은 이 절 안에 갑부인 보경대사의 상좌이니 내가 하은당의 상좌만 되면 내가 공부하기에 학비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어서 삭발하기를 권하였다. 나도 하룻밤 청정한 생활에 모든 세상 잡념이 식은 재와 같이 되었음으로 출가하기로 작정하였다.

 

얼마 후에 나는 놋칼을 든 사제 호덕삼을 따라서 냇가로 나아가 쭈그리고 앉았다. 덕삼은 삭발진언을 송알송알 부르더니 머리가 섬뜩하여 내 상투가 모래 위에 뚝 떨어진다. 이미 결심을 한 일지만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떨어짐을 금할 수 없었다.

 

법당에서는 종이 울었다. 나의 득도식을 알리는 것이었다. 산내 각 암자로부터 가사장삼한 수백 명의 승려가 모여들고 향적실에서는 공양주가 불공밥을 짓고 있었다. 나도 검은 장삼 붉은 가사를 입고 대웅보전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곁에서 덕삼이가 배불(拜佛)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은사 하은당이 내 법명을 원종이라고 명하야 불전에 고하고 수계사 용담 회상(화상의 오기인 듯)이 경문을 낭독하고 내게 오계를 준다. 예불 절차가 끝난 뒤에는 보경대사를 위시하여 산중에 많은 여러 대사들께 차례로 절을 드렸다. 그리고는 날마다 절하는 공부를 하고 진언집을 외우고 초발심자경문을 읽고 중의 여러 가지 예법과 규율을 배웠다.

 

[불교신문3191/20164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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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은 서산대사 시()

 

야설(野雪) / 서산대사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蹟)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눈 덮인 들판 걸어갈 때 (눈 덮인 들길을 걸어갈제)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 (어지러히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행적)(오늘 내가 간 이 발자국은)

훗날 뒷사람의 길이 될지어니. (반드시 뒷사람들의 이정표가 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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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凡(백범)晩年(만년)에 즐겨 揮毫(휘호)하시던 西山大師(서산대사)五言絶句(오언절구) 이 시는 서산대사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재 밝혀진 원전은 조선후기 시인인 이양연이 지었다고 합니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는 야설(野雪), 서산대사가 아닌 이양연의 한시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로 시작하는 이 유명한 한시를 지금껏 서산대사의 선시로 알고 있었는데 원전이 밝혀졌다. 

이 시가 유명해진 것은, 김구 선생의 애송시로 김구 선생이 서산대사의 시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산대사의 선시로 알려진 시

 

雪野中去 (답설야중거)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때는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어지러이 걷지 말라

我行跡 (금일아행적) 오늘 나의 발자국은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뒷사람들의 이정표가 되리라.

 

이양연의 시​  /  야설(野雪)

 

穿雪野中去(천설야중거) 눈을 뚫고 들판 길을 걸어가노니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를 말자.

我行跡(금조아행적) 오늘 내가 밟고 간 이 발자국이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뒷사람이 밟고 갈 길이 될 테니.

 

(밟을) 穿(뚫을)

() (아침)  한시의 두글자는 다르지만, 같은 뜻이다.

 

두글자가 바뀐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중국의 전당시를 봐도 바뀐 글자가 많다.

외워서 전해지던 구전을 문자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생긴일이라 보면 될것이다.


한글속기록학연구소본 ' 임연백선시'야설(野雪)이란 한시가 실려있다.

    

[한글속기록학연구소 사진입니다.]

      

이 시는 조선시대 임연당(臨淵堂) 이양연의 작품이다.

서산대사의 문집인'청허집(淸虛集)'에는 실려있지 않고,

 

이양연의 시집인 '임연당별집(臨淵堂別集)'에 실려있고,

'대동시선(大東詩選)'에도 이양연의 작품으로 올라 있어,

이양연(李亮淵·1771~1853)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2013. 2. 19 , 가슴으로 읽는 한시, 안대회 교수의 글 중에서]

 

'대동시선(大東詩選) 1918년 장지연(張志淵)이 편찬한 역대 한시선집(漢詩選集) 12.

고조선에서부터 한말까지 2천여인의 각체시(各體詩)를 선집하여 만든 것으로 한시선집 중에서 가장 방대하다. 신문관(新文館)에서 신활자로 출판되었다.

 

 

서산대사 휴정(休靜) : 1520(중종 15) 3~ 1604(선조37) 1

완산최씨(完山崔氏). 이름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별호는 백화도인(白華道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풍악산인(楓岳山人두류산인(頭流山人묘향산인(妙香山人조계퇴은(曹溪退隱병로(病老) 등이고 법명은 휴정이다.

너무 잘 알려진 분이고 인터넷상 자료가 많으니 더 이상의 약력은 생략한다.

 

임연(臨淵) 이양연(李亮淵) : 1771년(영조 47) ~ 1853년(철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진숙(晋叔), 호는 임연(臨淵). 광평대군(廣平大君)이여(李璵)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이상운(李商雲)이다. 어릴 때부터 문장이 뛰어났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1830(순조 30) 음보(蔭補)로 선공감에 제수되고, 1834년에 사옹원봉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838(헌종 4)에 충청도도사에 임명되었으며, 1842년에 공조참의, 1850(철종 1) 동지중추부사로 승진, 1851년 호조참판·동지돈녕부사 겸 부총관에 임명되었다.

 

만년에 후학교육에 힘썼으며, 심경근사록으로 스승을 삼아 제자백가는 물론 역대 전장문물(典章文物성력술수(星曆術數전제군정(田制軍政)에 널리 통하였으며, 늙어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침두서(枕頭書)·석담작해(石潭酌海)·가례비요(嘉禮備要)·상제집홀(喪祭輯笏)및 시문 약간 권이 있다. 문장이 전아간고(典雅簡古)하여 후학들이 다투어 암송하였다 한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많은 책을 읽어 모르는 것이 없다는 평이 있었고, 사대부로서 농민들의 참상을 아파하는 민요시를 많이 지었다.

율곡 이이 선생의 학문을 평생 사모하였고, 수 백수의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시에 뛰어났는데 시풍이 호매격렬(豪邁激烈)했다. 만년에 후학교육에 힘썼으며, '심경''근사록'으로 스승을 삼아 제자백가는 물론 역대 전장문물(典章文物성력술수(星曆術數전제군정(田制軍政)에 널리 통하였으며, 노후에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아 많은 저서를 남겼다.

 

민요시 '촌부(村婦)' '전가(田歌)' '해계고(蟹鷄苦)' 등이 대표적이다.

저서로 '석담작해(石潭酌海)' '가례비요(家禮備要)' '상제집홀(喪祭輯笏)'이 있다고 한다.

 

임연당집(臨淵堂集)은 이양연의 시문집으로 권두에 있는 자서가 1847년에 쓰여진 것으로 보아 저자 생존시 직접 편집하여 놓은 것을 후손이 필사한 듯하다. 82. 필사본. 규장각 도서.

 

이양연은 관직을 지향하지 않고 국내의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틈나는 대로 학문적 사색과 현실 투시를 통해 실천성이 강조되는 예학 연구와 사회 비판적인 시편들을 창작하였다. 따라서 임연당집은 19세기 초엽 한국 예학의 동향과 한국 한시사를 정리하는 데에 긴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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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 http://www.magoksa.or.kr/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