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김씨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김락석공" 묘갈 탁본입니다.
추증을 받은 병조참판은 조선시대 6조(六曹)에 두었던 종2품직으로 정2품 병조판서(判書)를 보좌하는 차관격(次官格)이었으며 오늘날 국방부 차관정도의 직책입니다.
탁본 이미지는 타 문중 어르신이 소장하시고 계시는데 부탁을 드려서 제공받았습니다. 하지만, 락석공 할아버지를 우리 안산김씨 족보에서 찾을수가 없네요.
26世 락(樂)자 항렬에서만 찾다보니 찾지를 못하는 것인지 등재가 안된 것인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다시 시간을 내어서 전수조사로 찾아볼 생각이지만 오랜시간이 걸릴듯 합니다. 물론 찾을수만 있다면 한달이 걸리더라도 찾아야 되겠지요.
아래 묘갈 탁본의 주인공이신 락석공 할아버지에 대해 아시는 분은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朝鮮 贈 嘉善大夫 兵曹參判 安山金公 諱
조선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안산김공 휘
樂奭 墓 贈 貞夫人 安東權氏 祔左
락석 묘 증 정부인 안동권씨 부좌
추가 탁본 이미지를 받아보니 아래 창암 김상채 선생님과 연관이 있는 듯 합니다.
족보상 계보
시조 상서좌복야 안산현 개국후 김긍필(金兢弼) 1세 ↓ 연성군 김정경(金定卿) 12세 좌참찬 개(漑) 13세 사재감정 맹전(孟銓) 사재정공파 파조 14세 건수(乾壽) 15세 ↓ 귀선(貴善) : 1614년생 光海6 甲寅(갑인) 19세 연준(延埈) : 1652년생 孝宗3 壬辰(임진) 20세 진해(振諧) : 1670년생 顯宗11 庚戌(경술) 21세 상빈(尙彬) : 1687년생 肅宗13丁卯(정묘) 22세 제량(悌良) : 1704년생 肅宗30 甲申(갑신) 23세 弟 석량 : 1714 肅宗40 甲午(갑오) 종범(鍾範) : 1726년생 英祖2 丙午(병오) 24세 현택 弟성택 弟윤택:1826 純祖26 丙戌(병술) 25세 l l l 동수 동완 락훈(樂薰) 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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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 및 창암집 계보 (창암집 권3 족보서)
창암 상채는 振武 7세손
5대조 석 (磶) 21세 고조 창암 상채(尙彩) 22세 (형 상질) 증조 제량(悌良) 23세
조 종범(鍾範) 24세 부 시택(始澤) 25세
락석(樂奭) 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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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집에 언급된 가족사항 부(父) 김석(金磶)과 형 상질(尙質) 미반영
* 창암집 족보서 추정된 가계도
未詳 ─未詳─┬─ 男
├─--- 尙彩
│ ║ -┬─ 濟良 ── 宗軾
│結城張氏 ├─ 忠良
│昌漢의 女 ├─ 國良
└─ 男 ├─ 喆良 夭
└─ 女 ═ 金壽完
蒼巖集(창암집) 영인간행 및 해제(解題) 작성 중
http://blog.daum.net/yescheers/8598162
한국고전번역원 : 창암집 검색
http://www.itkc.or.kr/itkc/Index.jsp
추증(追贈)
동양의 고대 봉건 국가에서 어떤 인물이 죽은 후에 생전의 공적이나 활동을 살펴 조정(朝廷)에서 그 관직을 올려주는 것이다. 추증은 원래 추은봉증(追恩封贈)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증되어 받은 관직 이름 앞에는 ‘증(贈)’자를 붙여 생전에 실제 관직을 역임한 경우와 구분할 수 있게 한다. 이를테면, 홍길동이라는 인물이 사후에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되었다면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홍길동’이 된다. 이는 묘비명이나 실록 등의 기록에서 자주 관측할 수 있다.
조선에서는 종친(왕족), 문관, 무관 가운데 2품 이상인 관료는 그의 조상을 삼대까지 추증하여, 부모는 본인의 품계에 준하고 조부모와 증조부모는 본인의 품계에서 1품계를 강등하여 관직을 주었다. 또한 아내에게는 남편의 벼슬에 준하는 품계를 주었다. 이를 삼대 추증(三代追贈)이라 한다. 또한 왕비의 친정아버지(왕의 장인)에게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대군(大君)의 장인에게는 정1품 의정부좌의정을, 군(君)의 장인에게는 종1품 의정부우의정, 세자의 장인에게는 종1품 의정부 좌찬성 등을 각각 본인 사후에 추증하였고, 그 위의 삼대에도 그에 맞게 추증하였다. 공신의 아버지에게도 일정한 직위를 주었다. 공신의 아버지에게는 그 공신의 직책에 준하는 공신직책을 부여하고 자손의 관직에 준하는 직책을 추증하거나, 관직을 지낸 사람은 그가 살아생전에 최종적으로 지낸 관직에서 1계급을 더 추가로 추증하는 방식이었다.
가증(加贈)
동양의 봉건 왕조에서 어떤 인물이 죽은 후에 이미 추증되어 관직이 오른 사람에게 다른 사유로 그 생전의 관직을 재차 올려줄 경우 이를 가증(加贈)이라 한다. 즉, 일단 추증되거나 증직(贈職)된 관직을 다시 승진시키는 조치이다. 또한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왕족이나 왕의 조상에게 사후에 왕과 왕비의 지위를 주는 것은 추존(追尊) 또는 추봉(追封), 추숭(追崇)이라 한다. 현대사회에서도 근무중 순직자나 공적이 현저한 자에 한하여 계급을 최소 1~2계급에서 그 이상 올려주는 경우도 있다. 이는 추서(追敍)라고 한다.
증직(贈職)
증직(贈職)은 동양의 봉건 왕조에서 어떤 인물이 죽은 후에 그 생전의 관직을 올려주는 것이다. 관직이 없던 인물에게 관직을 추서하는 것을 추증(追贈)이라고 하는데, 비슷한 의미이다. 일단 추증되거나 증직된 관직을 나중에 다시 올려주는 것을 가증(加贈)이라고 한다. 특별한 호칭, 이름 대신 활용될 수도 있는 지위를 올린다는 것에서 단순히 관직, 직책을 사후에 붙이는 추증이나 증직과는 의미가 다르다.
추존(追尊)
추존(追尊)이란 동양에서 어떤 인물이 죽은 뒤에 그를 높여 부르는 특별한 호칭을 올리는 일이다. 특별히 왕 또는 황제로 추존하는 일을 추숭(追崇)이라 한다. 한편 아랫 사람이나 신하에게 높여 부르는 특별한 호칭이나 제후직을 사후 내리는 것과 군, 부원군, 대원군 등의 작위를 사후 올리는 일은 추봉(追封)이라고도 한다.
왕조에서 추존하는 대상은 대부분 왕족이나 황족, 제후 등이며, 민간에서 추존하는 대상은 조상 가운데 쇠퇴한 가문을 일으켜 세운 사람으로 중시조로 추존한다(→보첩#용어).
그밖에 죽은 승려의 불덕을 높이 사서 국사 또는 왕사 등의 호칭을 올리는 일도 추존이라 하며, 불교를 숭앙한 고려 때에 여러 고승을 왕명으로 추존하였다.
증직 (贈職)
공신(功臣)ㆍ충신(忠臣) 효자(孝子) 및 학덕(學德)이 높은 사람 등(等)에게 죽은 뒤에 벼슬을 주거나 높여 주던 일, 또는 그 벼슬
가선대부 (嘉善大夫)
조선시대 종이품(從二品)의 문관과 무관에게 주던 품계이다. 종이품의 하계(下階)로서 가정대부(嘉靖大夫)·가의대부(嘉義大夫)보다 아래 자리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후로 문무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 임금의 사위)에게도 주었다.
처(妻)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병조참판 (兵曹參判)
조선시대 병조(兵曹)에 둔 종이품(從二品) 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병조판서(兵曹判書: 正二品)가 있고, 아래로 병조참의(兵曹參議: 正三品 堂上), 병조참지(兵曹參知: 正三品), 병조정랑(兵曹正郞: 正五品), 병조좌랑(兵曹佐郞: 正六品) 등이 있다. 판서를 정경(正卿)이라고 하고, 참판은 아경(亞卿)이라고 한다.
원래 사평부(司平府)에 두었던 좌사(左使)·우사(右使)를 1404년(태종 4) 3월 참판사평부사(參判司平府使)라고 개칭했다가, 1405년 1월 사평부가 호조(戶曹)에 병합될 때 육조의 의랑(議郞) 각 2원을 좌·우참의(左右參議)로 바꾸었다. 1432년(세종 14)에 참판·참의 각각 1원으로 개편되어 각 조(曹)의 판서를 보좌하는 차관으로, 예하 주요기관의 제조(提調)를 겸하였다.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이후에는 협판(協辦: 勅任官)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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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채 (金尙彩) : 생몰년 미상. 조선 영조 때의 시인.
본관은 안산(安山). 초명은 상현(尙炫). 자는 경숙(敬叔). 호는 창암(蒼巖). 중인 출신. 진무(振武)의 7세손이라고 하나 가계는 자세히 알 수 없으며, 아들 제량(濟良)이 영·정조시대에 시인으로 행세하였고, 손자인 종식(宗軾) 또한 시인 장혼(張混)과 친구로 여항의 시인이었다.
정5품의 품계인 통덕랑(通德郎)을 제수 받았으나, 어떠한 관직을 역임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가정은 비교적 윤택하였다고 전해진다. 어려서부터 큰아버지에게서 학문을 익혔고 장성해서는 장인인 장창한(張昌漢)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초기 여항문학이 대두하던 시대에 활동하였던 시인으로, 『풍요속선(風謠續選)』에 시가 실려 있다. 여항시인으로 이름 있는 엄한붕(嚴漢朋)과 가까이 지냈고, 홍우택(洪禹澤)·전만종(田萬種)·최상집(崔尙楫) 등과 어울렸다. 글씨에 능해 초서·해서를 잘하였다.
조엄(趙曮) 등 풍양조씨 일가에서 서리를 지내면서, 한편으로 유자(儒者)의 도리를 좇는 데 치중하였다. 인간이 초목금수와 구분되는 요소 8가지를 제시하여 이를 효·제·충·신·예·의·염(廉)·치(恥)라고 규정하였으며, 이들 요소를 주제로 잠언(箴言)을 짓기도 하였다.
그의 시에는 이와 같은 덕성이 반영되어 조탁을 일삼지 않고 돈박(敦樸)하며, 또한 섬세한 묘사에도 뛰어나다는 평을 얻는다. 언행이 조심스러웠고 특히 자식교육에 힘써 아들이 불민한 것은 아비가 불민해서이며, 아들이 무식하면 이 또한 아비가 무식하기 때문이라는 내용의 「계자책기(戒子責己)」라는 시를 쓰기도 하였다.
아들 제량과 손자 종식도 시로써 이름을 날려, 3대를 이어 시명을 떨쳤다. 저서로 『창암집』 3권 1책이 있다.
[참고문헌]
『창암집(蒼巖集)』
『삼성재유고(三省齋遺稿)』
『풍요속선(風謠續選)』
『한국평민문학사(韓國平民文學史)』(구자균, 문조사,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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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록 권3
族譜序 b_079_528a
我金之貫安山者。自麗太師忠翊公始。忠翊之子文匡公。文匡之子議政公。世爲輔佐。本朝受命。議政之子威靖公。又贊大業。四世卿相。勳德郅隆。實爲東韓之甲族。而世代寖遠。文獻殘缺。威靖之緖。纔一傳而失其譜。家乘所錄。只述振武公以下。而其上不知逸幾代。後孫之痛恨。當如何哉。然吾宗之祖忠翊者。079_528b已始於振武公。振武公之祖忠翊者。計其時。距古稍近。傳聞猶及。必有可據以爲祖者。故祖之耳。然則吾宗之祖忠翊者。庶其免於歐氏譜遠胄之謬也耶。嗟乎。空同子之言曰。子孫而不錄其先人。是悖亂之行也。此吾譜之所以作也。忠翊公則書以始祖。而序五世相傳之統。以述其所自出。振武公則書以後孫。而接宗系旣絶之後。以明其所重始。此吾譜之所以詳也。夫譜也者。所以合族也。族大矣。思所以合之。况吾宗之祖振武公者纔三派。而不越于同堂功緦之親也乎。且余於是役。尤有所悽然以悲而惕然以懼者。079_528c夫以四世卿相之家而至於失譜。則可想其中世陵替之極。而振武公以後。一向不振以至于今。然安知夫來者。又有甚於今日也哉。凡我譜中人。見先祖之起家。而知孝敬之能致位。傷中世之失譜。而知文學之能傳家。念後孫之不克負荷。而知勤儉仁厚之能獲福。則其於合族也何有。吾宗其勉之哉。其勉之哉。譜旣成。不曰族譜而曰世譜者。秖錄振武公一派故云。
聖上二十七年辛未閏夏上浣。振武公七世孫通德郞尙彩謹序
창암록 권3
족보서 b_079_528a
아금지관안산자。자려태사충익공시。충익지자문광공。문광지자의정공。세위보좌。본조수명。의정지자위정공。우찬대업。사세경상。훈덕질륭。실위동한지갑족。이세대침원。문헌잔결。위정지서。재일전이실기보。가승소록。지술진무공이하。이기상불지일기대。후손지통한。당여하재。연오종지조충익자。079_528b이시어진무공。진무공지조충익자。계기시。거고초근。전문유급。필유가거이위조자。고조지이。연칙오종지조충익자。서기면어구씨보원주지류야야。차호。공동자지언왈。자손이불록기선인。시패란지행야。차오보지소이작야。충익공칙서이시조。이서오세상전지통。이술기소자출。진무공칙서이후손。이접종계기절지후。이명기소중시。차오보지소이상야。부보야자。소이합족야。족대의。사소이합지。황오종지조진무공자재삼파。이불월우동당공시지친야호。차여어시역。우유소처연이비이척연이구자。079_528c부이사세경상지가이지어실보。칙가상기중세릉체지극。이진무공이후。일향불진이지우금。연안지부래자。우유심어금일야재。범아보중인。견선조지기가。이지효경지능치위。상중세지실보。이지문학지능전가。념후손지불극부하。이지근검인후지능획복。칙기어합족야하유。오종기면지재。기면지재。보기성。불왈족보이왈세보자。지록진무공일파고운。
성상이십칠년신미윤하상완。진무공칠세손통덕랑상채근서
忌日錄序 b_079_528d
夫祭祀。最是人子致誠處也。盖已沒之親。不可追養。而若非祭盡其誠。則爲人子追遠之慟。無處可寓。當依家禮。以奉先祀可也。嗚呼。或世代寖遠。子孫微弱。失其世譜。忘其先忌。仍以昏昧。永喪家道者。聞多有之。後孫之痛恨。當如何哉。至於吾家。則有世系譜錄與先忌日錄。而今又幷子孫重錄。使內外諸孫。居常披閱熟知。而永垂香火之禮節。諸孫各自勉旃。謹奉先祀。毋違家法焉。噫。且余於是事。今有所悽然以悲者。家君兩外宗及余外宗,家兒外宗合四門子孫。或079_529a絶或僅存。故其世代幷職銜于其末。以憑其識。吾家後孫。其須識之。
기일록서 b_079_528d
부제사。최시인자치성처야。개이몰지친。불가추양。이약비제진기성。칙위인자추원지통。무처가우。당의가례。이봉선사가야。오호。혹세대침원。자손미약。실기세보。망기선기。잉이혼매。영상가도자。문다유지。후손지통한。당여하재。지어오가。칙유세계보록여선기일록。이금우병자손중록。사내외제손。거상피열숙지。이영수향화지례절。제손각자면전。근봉선사。무위가법언。희。차여어시사。금유소처연이비자。가군량외종급여외종,가아외종합사문자손。혹079_529a절혹근존。고기세대병직함우기말。이빙기식。오가후손。기수식지。
家錄序 b_079_529a
夫家之有錄。錄家事也。凡世之喬木之家。或有日記與家藏。皆所以載世德也。感恩數也。則吾家安敢有家錄乎。雖然。吾家之有是錄。蓋有所以而發也。嗚呼何者。不肖惸惸。早失所祜。三塊血肉。未及齠齔。悲風樹之不靜。詠蓼莪而追慕。僾然此心。常切于中。及至壯年。竆而且窶。家業冷落。立揚無地。則家蹟之可攷。涉世之甚艱。顧何從而憑也耶。余於庚戌歲。始記乙079_529b酉以後事。而乙酉乃舍伯之生歲也。裒錄吾家間聞見。隨得載筆。仍以成軸矣。每閑而無事時。披去閱來。撫躬自傷。不覺涕下。遂因爲記。以爲吾家之永傳錄也。
先塋修葺記 b_079_529b
自京東郊二十里楊州牛耳。卽余丘墓鄕。自高祖府君以下。葬以昭穆。松檟成行。而昔我先君之葬。不肖輩孤蒙。封而不樹者。于今三十有三秊。今將涓吉。玆於高曾祖王考之墓。崇其封域。樹墓前石床。前面皆079_529c刻以某官某府君之墓。先君宅兆。別立尺碣。以表其識。五代祖 先山在維楊小牛耳也。高祖兩府君。軸主並祧而埋安于同岡墓後。卽癸酉二月十七日也。嗚呼。自我先祖。世篤謙恭。至于先府君。幽光隱德。足以範後人垂來裔。鋪張鴻筆。炳耀龜趺。亦不爲侈。而顧有所不必爲者。謙恭世德。不在斯矣。毋寧遵先志之儉約。而子孫繩烈。世守兆域。則于祖先。實有光焉。凡吾先府君子孫者。各自勉旃。日誦斯文。可謂碑在口也。安用顯刻也。歲癸酉暮春。不肖子尙彩泣血謹述。
行狀
張聘君行狀 b_079_529d
公諱昌漢。字子章。結城之張。曾祖曰得賢。贈通訓大夫軍資監正。祖曰來吉。贈通政大夫掌隸院判決事行副司果。考曰碩禧。贈嘉善大夫漢城府左尹。妣順興安氏。贈嘉善大夫漢城府左尹德厚之女。公以肅廟庚申正月二十八日生。公早失所怙。而事母氏極其誠孝。有兩弟起漢,遇漢。而友愛甚篤。公氣度閒雅。而持身接物。務合古禮。自少家居。只爲菽水之供而已。若家人產業則不屑也。公於辛酉。遭先妣喪。哀毁骨立。幾至滅性。服闋。尙有餘哀。竟以丙079_530a寅十二月二十六日寢疾。終于典醫洞仲氏家。享年六十七。葬于楊州鎭官里先塋側卯向之原。嗚呼。余以己酉館甥於公門。深被恩愛。顧今日知公之言行者。宜莫如余也。公天性恭儉。積仁潔行。於一切財利。淡如也。故末年未免屢空。而公則不以爲意焉。噫。如公卓絶之姿。宏博之心。余不可復見矣。公娶彥陽陳氏。萬戶起英之女。自公遠逝。歸依余家。壬申卒。余躬視殯殮。附公之右。公無子。只有四女。長適金尙彩。卽余也。次朴世燁。次金義臣。次尹長禧。嗚呼。詩云自天申之。又云孝子錫類。以公仁孝。宜享厚祿。而卒而無079_530b嗣。天之保佑善人也。果何如耶。歲癸酉菊秋。外甥安山金尙彩謹狀
雜著
倣先聖訓誡。述編八章。敎誨諸子姪。 b_079_530b
噫。詩不云乎。哀哀父母。生我劬勞。欲報之德。昊天罔極。身體髮膚。受之父母。子非父母。則不可以生矣。是以。父母愛之。喜而不忘。惡之。勞而無怨。洞洞屬屬。竭誠致敬。養志無違。常恐不及。則於事親之道。庶幾寡過矣。古人有泣竹而筍生。鑿冰而魚躍者。此豈人力之攸及。莫非誠孝之感天而然也。爲人子而養其親079_530c者。何不以是觀感而思其所以耶。必須躬幹家事。竭力經備。而甘旨之供。衣服之節。無失其時。雖父母之命。事或小害於理。則亦必下氣怡聲。委曲陳達。期於聽從可也。子曰。立身有義而孝爲本。或持身不謹。出言無章。嬉戲度日者。皆是忘父母之類也。可不懼哉。可不愼哉。况歲月如流。事親日少。爲人子者。尤當盡其誠孝。不可頃刻怠忽也。右事親
夫祭也者。子孫所以追遠感時。事死如事生之意也。蓋已沒之親。不可追養。而若非祭盡其誠。則終天之痛。無處可寓。是以孝子之於祭也。散齋致齋。專心致079_530d敬。思其居處。思其笑語。思其所樂。思其所嗜。夫然後當祭之時。如見其形。如聞其聲。此所謂誠至而神享者也。家有疾故。則量宜行祭可也。而財力有可及者。則饌品多寡。一依祭儀。貧則稱家之有無。雖菜果菲薄之饌。盡其誠敬。享以精潔。洋洋升降。庶幾俯格。此亦不愈於不祭乎。且祭之輪行非禮矣。墓祭則雖輪行。皆祭于墓上。猶或可也。而至於忌祭。則不祭于神主。而乃祭于紙榜。此甚未安矣。古人曰。盡其心者。祭之本也。盡其物者。祭之末也。今者人子之欲祭盡其誠者。宜監玆而思勉可也。右奉祭
079_531a漢書云。黃金滿籝。不如敎子一經。噫。人孰不愛子。義方之敎。亦不可得以見矣。子若稍長。則宜出就外傅。嚴勅督課。不敢少懈。必以禮法自持。而尤篤於愛親敬長。導迪之意。敎誡之言。使之服膺而勿失。然則操修旣篤。聲譽日彰。初無營求。而爵祿自至。此所謂立身揚名。以顯父母者也。爲其子責成之道。是外更何求哉。若今日不敎。明日不誨。一向委靡。幼以不學。老而無述。則雖有良能。何以知入孝之道。雖有美質。何以識出悌之義乎。而况爲父所望。非名利則雜藝。爲子所習。非豪俠則驕奢。不知廉恥之爲貴。禮義之可079_531b法。橫恣無忌。自以爲得。終未免反道悖德之歸。豈不大可惜哉。是故古人曰。至要莫如敎子。又曰。愛而不敎。是獸畜之也。可不念哉。右敎子
夫兄弟者。同受父母遺體。骨肉相屬。血脈相通。與我一身。初無彼此。如使兄飢而弟飽。弟寒而兄溫。是猶一人之體。或有便利。或有不仁者。豈能安於心乎。噫。今之人。或溺於妻子而不愛其兄弟。至有爭田而起訟。貪財而相賊。視若仇敵。如有愛父母之心。則豈不愛父母之子而反自相害乎。夫子曰。百行之本。忍之爲上。兄弟之間。雖有小失。當以義理。相規感悟。上以079_531c慰父母之心。下以全同氣之情。不失其相愛也。昔辥包與其弟分財。奴婢必取其老。田廬必取其頹。器物必取其敗者。司馬溫公事其兄伯康。保之如嬰兒。食少頃則曰得無飢乎。天少冷則衣無薄乎。人之於兄弟。處之若是。則復豈有相爭失和之理哉。故詩曰。兄及弟式相好矣。無相猶矣。右友愛
朱子曰。家貧不可因貧而廢學。家富不可恃富而怠學。貧若勤學。可以濟貧。富若勤學。可以守富。若學者常存此心。敬對方冊。專心致志。反復沈潛。而溫故知新。竆理明善。則仁義之敎。曉然在前。踐履之操。自然079_531d彌篤。以至欲罷而不能也。古聖賢所以用心行己之方。與夫善惡之所以可效可戒者。非學問。亦何以知其然乎。是以爲人之道。莫如勤學也。故學則愚者必明。柔者必強矣。四書六經。循環熟讀。使義理。尋常浹洽。通古今達事變。以長識見。則不翅若披雲見日。登高望下者矣。如其不學。則心地茅塞。義理茫昧。牛襟馬裾。恬不知媿。而終不免亡身喪家之歸。可不懼哉。是以。學者爲君子。不學者爲小人。而吾夫子亦嘗曰。博學而篤志。仁在其中矣。右勤學
人之有子孫。猶木之有枝葉也。木有根本。然後有枝079_532a葉。人有祖先。然後有子孫。噫。三親九族。皆出一本。雖有親疎。以祖先之心視之。則均是子孫。豈有親疎哉。爲子孫者。苟能以子孫之心爲心。而視祖先之子孫。無以親疎。則吾與宗族。無物我也。無彼此也。飢寒相卹。患難相救。和氣藹然。世世雍睦。不失敦親之義。則豈不休哉。如或反目。視若路人。死喪之來。不相顧焉。憂患之際。不相救焉。則是非但情義之薄。實不體我祖先之心。今何以顔面入於家廟。他日又何以顔面歸拜祖先於地下乎。昔范文正公希文爲參知政事時。恩例俸賜。常均於族人。並置義田宅。此可以法也。079_532b凡吾宗族。無論疎近。自吾祖先視之。誰非同血共脈。知此可以知睦族之義也。右睦族
先儒曰。見人之善。而尋己之善。見人之惡。而尋己之惡。苟能見人之善而尋我之善。則其誰不善。見人之惡而尋我之惡。則其誰爲惡。故勿以惡小而爲之。勿以善小而不爲。然則積善之道。豈有佗哉。只是勿爲私欲所蔽。必充其本然之量。溫恭慈惠。公平正直。常以尊德樂道之誠。仁民愛物之意。存諸胷中。今日行一善事。明日行一善事。銖累寸積。以至於博厚之域也。日用動靜。隨事得宜。未嘗有賊仁害義之事。則善079_532c不可勝用而福祿自來。殃孼不作。是以易曰。積善之家。必有餘慶。積不善之家。必有餘殃。爲人者敢不積善而求其福。反爲積不善而罹其殃耶。噫。一念之善。景星慶雲。一念之惡。凶荒札瘥。至若利己害人之事。雖毫末。尤不可存於心也。右積善
凡齊家者。當謹守禮制。不以恩掩義。率其妻孥。分之以職。授之以業。責其成功。事無大小。使卑幼毋敢自專。必稟長者。冠昏之禮。喪祭之需。亦皆各當其可。無或踰分。則財用節而家道正。若夫貧窶而不失其所守者鮮矣。常誦古人竆視其所不爲。貧視其所不取079_532d之訓。反己省念。無有忮求。則豈不快哉。必須省其宂費。禁其奢華。深思遠慮。稍存贏餘。以備不虞可也。今之學者。外有修飭。內無操檢。夫婦之間。袵席之上。不能以禮相敬。以至於家道喪而倫常滅。是故君子之道。造端于夫婦。夫婦之道定然後。上可以安父母。下可以正子孫。而齊家之本立矣。可不愼哉。至於婢僕。代我之勞。念其飢寒。先恩後威。上下和睦。使無怨懟之心。此亦治家之一端也。右治家
識[金宗軾]
夫祖先之文墨。乃是傳家之寶。而况我祖考。文不讓於古人。筆不違於古人。齊家法度言。不愧於古079_533a人。列此八條。垂訓子孫。書之屛障。贈金公壽完氏。金公。卽我姑氏之夫。亦承此訓。傳之於高郞命昌。高郞。卽金公之壻也。噫。後其子孫。不能遵守。歸於某氏者。爲若干年。余之姊夫朴公季淳。歸其直而取之。一屛三傳爲壻者。旣非偶然。蓋此屛之訓辭謹嚴。筆法軒豁。百世之後。人皆可以爲寶。而况爲子孫者乎。是以余替糚一屛。書其八條。易是屛而藏之。歲月旣多。字畫汚漫。漸就壞破。故余懼其屛不能悠久。於是乎取其屛上親筆。改糚一帖。藏諸深笥矣。今當開印。摭其事實。付之于下。惟我後裔。079_533b世承垂誡。幷與帖而勿失。則非獨不負我終始勤勤之微意。庶可遵我祖考遺後之澤。勉旃勉旃。丙子三月上澣。小孫宗軾敬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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