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안김 뿌리찾기/뿌리찾기

경주김씨 은열공파 대안군 묘지석

by 연송 김환수 2013. 10. 15.

경주김씨 은열공파 대안군 묘지석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의 비판

- 성관, 가계, 인물관련 위조자료와 위서를 중심으로 - 이수건

 

 

조선시대(朝鮮時代) 신분사(身分史)관련(關聯) 자료의 비판 - 이수건

2페이지 김은열 묘지명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김은열 묘지명 그 내용을 검증해 보면 조선후기에 와서 위조된 지석이라 생각된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리고 구체적인 다른 언급은 없다.

 

 

 

그렇다면 박창화 선생의 남당유고를 살펴보자

이자료는 남당 박창화 선생이 1933~ 1942년 사이에 일본 궁내성 왕실도서관(서릉부)에 근무할 당시에 필사하신 남당유고의 일부내용이다.

 

안산김씨 고려 초기 가계도 - 安山系

 

고려사 현종 이후 22쪽부터는 安山系라 하여 현종의 국부(장인) 金殷傅(김은부)의 가계도를 그려놓았다.

풀어쓴다. 괄호안은 출생연도나 배우자명이다.

 

이곳에 김은열(金殷悅)이 김은부(金殷傅)의 형님으로 되어 있다.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김은열(金殷說)과는 한자이름이 다른 김은열(金殷悅)로 되어 있지만 동시대의 인물로 동일인물인지 동명이인인지는 연구대상이다.

 

 22page

 

안산계

 

김태부(을유)(황산(신사))[을유는 925, 신사는 921] -

  황도(을묘)(안종)[을묘는 955] -

     일궁(신사)(인위)[신사는 981] - 

           원충(갑오[994])(설낭) -

                    연흥궁(정묘)[연흥궁은 정종의 비인 용절덕비다.

                             정묘년은 1027. 연흥궁주는 1102년 몰]

 

      ... 원충(갑오)(설낭) - 숭화궁(기사)

                             [기사는 1029. 숭화궁주는 1094년 몰]

 

...황도(을묘)(안종) - 이궁(갑신)(은동)[갑신은 984] -

                                        원황(임인)[임인은 1002]

...황도(을묘)(안종) - 삼궁(기축)(현룡)[기축은 989]-

                                        원홍(무신)(준금)

                                               [무신은 1008]

                          - 삼궁(기축)(가도) -

                                        원질(을사) [을사는 1005]

 

황귀(무오)(림복) - 림숙(병자)(량고) - 림복

 

황귀(무오)(림복) - 파란(신사)(은동) -약련(정유)(현갑)

                                                 ② 약송(경자)(현세)

                                                 ③ 약운(계묘) (원황)

 

                                 약운(계묘) (원황) - 준극(계해)

                                 가도 - 선애(기축)(현섭) - 준금(정미)

 

22page

 

? - 억렴 [경순왕의 큰 아버지] -

                    신성[태조의 5비인 신성왕후?] - 안종대왕

? - - 태기 - 긍필 - 은부

                            [김은부는 ? -1017. 현종의 장인]

                      ② 태부 [925년생]

                      ③ 태교 [928년생]

 

시조

1

시조

계대

 

시조(始祖) 긍필 (肯弼,兢)

상서좌복야, 안산현개국후

2

1대손

은부 (殷傅) 호부상서, 상호군, 안산군개국후

3

2대손

충찬 (忠贊) 병부상서, 지중추원사

4

3대손

系子

원황 (元晄) 공부상서, 병부상서

※ 남당 박창화 선생의 안산계 계보가 맞다면 충찬이후 절손으로

   원황이 계대를 이었다고(系子) 볼수 있겠다.

 

    참고로 남당선생은 재야 사학자로 1962년에 세상을 떠나신 

   분으로 우리 집안과 아무런 연고도 없고 고려사 현종의 내용

    을 필사하면서 현종의 국부(장인 김은부)인 안산계 계보를

    허위로 작성할 이유는 없다.

 

    남당 선생이본 궁내성 왕실도서관(서릉부)에 근무할 당시

    에 안산계 자료를 필사하신 것이 확실하다면 신뢰도는 아주

    높은 것이다. 

 

1975년 세상에 알려진 복흥사경덕국사묘지명(1072?)에 

    의하면경덕국사 김난원(김란원. 999 - 1066.10.8)의 조부

    는 긍필, 아버지는 은부, 어머니는 경원(인천)이씨다.

 

   

23page

   

김태교(무자)(황산)[무자는 928] - 은동(신유)(기벽) [신유는 961] - 현섭(임오)(류윤)[임오는 982]

            현제(갑진)(준선) [갑진은 1004]

 

             현제(갑진)(준선) [갑진은 1004] - 한충

             현제(갑진)(준선) [갑진은 1004] -

                                            ㉠ 준달(정사)[1017]

                                            준경(경신) [1020]

                                            ㉢ 준선(계해)(현제) [1023]

 

                                     준선(계해)(현제) [1023] - 한충

 

김태교(무자)(황산)[무자는 928] - 은황(갑자)(정긴(?))[갑자는 964] - 현기 (갑 신)(선첨) [갑신은 984]- 준합

 

김태교(무자)(황산)[무자는 928] - 은평(정묘)(신소)[정묘는 967] - 현세(경인)(약 송)[990] - 준흥

 

김태교(무자)(황산)[무자는 928] - 황첨(기사)(함순)[기사는 969] - 왕석(을유)(자 라) [을유는 985]- 거복(정사) [정사는 1017]

 

김태교(진군) - 은석(임술)(라주)[임술은 962] -

                                    현갑(을유)(약련) [을유는 985]

은길(을축)(백상)[을축은 965] - 현룡(기축) [기축은 989]

진첨(기사)(가도) [기사는 969]- 선첨(무자)[무자는 988]

 

김태교(진선) -은경(기벽) - 현례(을유)(량진)[을유는 985] -

                                          원술(신유) [신유는 1021]

                   현례(을유)(류윤) - 준덕(정묘) [정묘는 1027]

   

台夔(庚辰= 920)(■■)(甲申 = 924) - 金肯弼(戊申)(秦仙)[무신은 946] - 殷悅(黃塞) 殷傅(李山)

 

殷悅(黃塞) - 玄同(丁酉)(若雲)[정유는 997] - 俊福(庚申 = 1020)

殷傅(李山) - 安山(李杉) - 公叶

元成() - 德宗, 靖宗, 仁平, 景肅

元惠() - 文宗, 平壤, 孝思

元平() - 孝敬

태기(경진= 920)(■■)(갑신 = 924) - 김긍필(무신)(진선)[무신은 946] - 은열(황색) 은부(이산)

은열(황색) - 현동(정유)(약운)[정유는 997] -

                                                                   준복(경신 = 1020)

은부(이산) - 안산(이삼) - 공협

                   ⒝ 원성() - 덕종, 정종, 인평, 경숙

                   ⒞ 원혜() - 문종, 평양, 효사

                   ⒟ 원평() - 효경

 

태기(경진)(■■)(갑신) - 상부인(문보능) - 인위, 상금, 상융

 

 24page       

 

위의 가계도를 기초로, 고려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연대표를 정리하면,

    김긍필(946년 출생)...

    김원충(994년 출생)

    용절덕비(1027년 출생)

    숭화궁주(1029년 출생)

 

이어서 24쪽 좌측부터 33쪽까지 고려의 관제에 대한 정리글이 이어진다.

33쪽 좌측부터 35쪽 우측까지는 주요관제 역대역임자들의 명단표가 그려져있다.

35쪽 좌측은 임술년부터 계해년까지의 每月朔의 일진과 대소를 적고 있다.

 

그 다음부터의 행서체는 읽을 수 없어 생략하나, 39쪽 좌측을 보면,

 

28甲寅四月27甲午太子覆試李嘏等及第...로 되어 있어 문종28(1074) 갑인년 4월의 고려사 세가의 기록을 축약해놓은 것이 보인다. 

 

 

1. 金殷說 墓誌銘

典據 慶州金氏族譜(京畿 高陽, 1985)

年代 光宗 19(戊辰, 968) (推定)

 

[1] 新羅敬順王金傅第四子侍中侍郎有高麗平章事殷說卒于戊辰三月初四日己丑葬

 

[2] 于城北十里鍾岩下五龍山南麓雙龍合金壬坐之原兄則鎰次鍠次鳴鍾弟曰重錫曰

 

[3] 鍵曰鐥曰鍾子江陵君泰華

 

[參考] 慶州金氏世蹟譜, 咸興慶州金氏派譜所, 1925. 金蓮玉, 高麗時代 慶州金氏家系, 淑大史論11·12, 1982. 金龍善, 新資料 高麗 墓誌銘 十七點, 歷史學報117, 1988.

 

1. 김은열(金殷說) 묘지명

 

전거 경주김씨족보(경기 고양, 1985) 연대 광종 19(968)(추정)

 

신라(新羅)1) 경순왕(敬順王)2) 김부(金傅)3)의 네째 아들로, 시중 시랑(侍中 侍郞)이고 고려의 평장사(平章事)인 은열(殷說)4)이 무진년 3월 초4일 기축일5)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성의 북쪽 10리 되는 종암(鍾岩) 아래 오룡산(五龍山)6) 남쪽 기슭의 쌍룡(雙龍)7)이 어우러지는 북쪽[壬坐] 언덕에 장례지냈다.

 

형은 일()8)이고, 다음은 굉()이며9), 그 다음은 명종(鳴鍾)이다. 아우는 중석(重錫), (), (), ()이고, 아들은 강릉군(江陵君) 태화(泰華)이다.

 

------------------------------------------------------

 

1)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것은 935(경순 9, 고려 태조 18)이다.

 

2) 신라의 마지막 왕인 金傅의 시호. 김부가 고려 경종 3(978) 4월 사망하자, 고려 정부는 그에게 敬順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고려사2 세가 경종 34월 조).

 

3) 신라의 제56대왕이자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이름(? - 978). 金溥라고도 쓴다. 이찬 孝宗桂娥태후의 아들. 경애왕이 견훤에게 피살되자 927년 즉위하였으나, 재위 9년인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태조는 그를 政丞으로 삼고, 경주의 事審官으로 임명하였으며, 태조의 딸인 樂浪公主와 결혼시키기도 하였다.

 

4) 金殷說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등의 문헌 기록은 물론이고 다른 금석문 자료에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한 뒤 태조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와 결혼하였는데, 김은열이 이들의 소생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5) 고려 초기의 무진년을 찾아보면 광종 19(968)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광종 193월 초4일의 간지는 丁亥이며, 己丑은 초6일에 해당된다. 또한 敬順이라는 시호도 경종 3(978)에 내려지므로, 이 묘지명이 김은열이 사망한 무진년 직후에 만들어졌는가 하는 점에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개장 등의 이유로 원래의 묘지명 대신 후대에 새롭게 다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김은열이 무진년에 사망하였다면 그 연대는 광종 19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6) 김은열의 묘지는 그의 후손인 金景輔(1069-1150)의 묘지와 함께 지금의 京畿道 開城市 五龍山에서, 조선 正祖 8(1784)에 출토되었다. ⇒ 「김경보 묘지명

 

7) 풍수설에서 말하는 두 산줄기 혹은 두 물줄기.

 

8) 金鎰이라는 이름은 경주의 신라 황룡사목탑 찰주본기(872)松嶽郡太守大奈麻臣 金鎰이라는 기록, 충남 보령의 성주사 낭혜화상비문(890)菩薩戒弟子 武州都督 蘇判 鎰 ··· 王孫也라는 기록, 강원 영월의 법흥사 증효대사비(924)의 음기에 金鎰 蘇判이라는 기록에 각각 나온다. 앞의 두 기록은 연대가 너무 앞서므로 묘지명에 적힌 김일과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고, 세 번째 인물도 김일의 아버지 경순왕의 사망연대(978)를 참조해 보면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많다. 또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기로 한 결정에 끝까지 반대하다가 금강산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고 전하는 신라의 왕자, 麻衣太子가 김일인지의 여부도 알 수 없다.

 

9) 김굉 이하의 인물들에 대한 기록은 이 묘지명 이외의 다른 역사기록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참고] 慶州金氏世蹟譜, 咸興慶州金氏派譜所, 1925.

金蓮玉, 高麗時代 慶州金氏家系, 淑大史論11·12, 1982.

金龍善, 新資料 高麗 墓誌銘 十七點, 歷史學報117, 1988

---------------------------------------------------------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은 대안군(大安君)에 봉해졌다. 김은열의 아들이 강릉군(江陵君) 태화(泰華)라고 나오니, 고려 초에 봉군 받은 것은 사실이나, 일반인에 대한 봉군이 아닌 신라 왕족에 대한 봉군으로 봐야할 듯 하다.

김은열(金殷說)의 졸년은 968년으로 많이 나오나, 묘지명의 무진년은 1갑자 뒤인 1028년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
-------------------------------------------------------

대안군(大安君 諱 殷說) 소개

 

김은열(金殷說 : ?~1028) 묘지(墓誌) 소개

 

소재 : 개성에서 북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오룡산 남쪽 기슭 임좌- 조선 정조 8(1784, 갑진)에 발견, 다시 묻음

 

연대 : 광종19(무진,968으로 추정) --> 한 갑자 뒤인 현종 19년 무진(1028)일 가능성이 더 큼.

 

<참고문헌>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역사학보27 1988)

-고려묘지명집성 (1993, 김용선, 한림대)

-김연옥 고려시대 경주김씨의 가계 (숙대사론 11,121982)

-경주김씨세적보 (함흥경주김씨파보소 1925)

-경주김씨족보(경기 고양 1985)

 

묘지명과 관련한 각 참고자료 기술 내용

1)고려묘지명집성 (1993, 김용선, 한림대)

김은열(金殷說 : ?~1028) 묘지(墓誌)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의 네째 아들로, 시중 시랑(侍中 侍郞)이고 고려의 평장사(平章事)인 은설(殷說)이 무진년 3월 초4일 기축일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성의 북쪽 10리 되는 종암(鍾岩) 아래 오룡산(五龍山) 남쪽 기슭의 쌍룡(雙龍)이 어우러지는 북쪽[壬坐] 언덕에 장례지냈다. 형은 일()이고, 다음은 굉()이며, 그 다음은 명종(鳴鍾)이다. 아우는 중석(重錫), (), (), ()이고, 아들은 강릉군(江陵君) 태화(泰華)이다.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2001)

 

新羅敬順王金傅第四子 侍中侍郞 有高麗平章事 殷說 卒于戊辰三月初四日 己丑葬于城北十里 鍾岩下 五龍山南麓 雙龍合金 壬坐之原 兄則鎰 次鍠次鳴鍾 弟曰重錫 曰鍵 曰鐥 曰鍾 子江陵君泰華

 

출전:慶州金氏族譜(1985)

---------------------------------------------------

박철상, 조선 金石學史에서 柳得恭의 위상, 大東漢文學 27(2007).

 

유득공(柳得恭.1749-1807)의 김은열(金殷說 : ?~1028) 묘지(墓誌) 판독문

 

乙巳(1785)년간에 長湍府 사람이 산골짜기에서 돌 한 조각을 얻었는데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新羅 敬順王 金溥의 넷째 아들 侍中侍郞 高麗 平章事 殷說戊辰(968)34일에 죽었다. 己丑(989)년에 성 북쪽10리에 있는 鍾巖 아래의 五龍山 남쪽 기슭 雙龍合金의 북쪽[壬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이고 다음은, 다음은 鳴鍾이다. 아우는 重錫, , 이다. 아들은 江陵君 泰華이다. 훗날 자손 중에 昭考의 뜻이 있을까 하여 묘위로부터 정북으로 다섯 걸음 되는 곳에 지석을 둔다.’ 모두 102자인데 자체가 단정하고 돌의 빛깔은 옥과 같았으며 거의 1,000년이나 된 물건이었다. 大冢宰(이조판서)이신 金公(金思穆)殷說의 후손이므로 장단 사람으로부터 이를 구하여 탁본을 떠서 한 본을 수장하고 돌은 묻었다.

 

乙巳年間, 長湍府人, 於山谷間得石一片, 刻云, ‘新羅敬順王金溥第四子, 侍中侍郞, 有高麗平章事, 殷說, 卒于戊辰三月初四日. 己丑, 葬于城北十里鍾巖下, 五龍山南麓, 雙龍合金壬坐之原. 兄則鎰, 次湟, 次鳴鍾, 弟曰重錫, 曰鍵, 曰鎌, 曰錘. 子江陵君泰華, 後其子孫者, 或有昭考之意, 采誌於自墓上正北五步之地.’ 凡一百二字, 字體端正, 石色如玉, 近千年物也. 大冢宰金公, 爲殷說後, 從湍民得之, 搨藏一本, 埋其石.”

 

 

이 조목은 일본 천리(天理)대학교 소장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와 수경실(修更室, 박철상) 소장 영재서종(泠齋書種)중의 일부인 고운당필기에만 수록되어 있다.

 

----------------------------------------------------

이 묘지(墓誌)를 장단 사람에게서 구입한 사람은 김사목(金思穆, 17401829)이었다. 이후 후손 중 김정집(金鼎集, 18081859)이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있을 때 묘비(墓碑)를 세웠는데, 김은열의 묘지(墓誌)를 발견한 시말에 대해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김은열(金殷說 : ?~1028) 묘비(墓碑) 탁본 : 규장각 28013 해제

 

고려 초기의 인물인 金殷說墓碑銘을 탁본한 것. 1매는 “”高麗平章事輔國大安君金公殷說墓라는 題號를 탁본한 것이고 제 2매는 본문을 탁본한 것이다. 본문의 내용에 따르면 1784(정조 8)幽誌를 발견하고 改封하였으며‚ 1849(헌종 15) 후손인 김정집(金鼎集)이 개성유수(開城留守:2품 지방관)로 부임하여 묘비(墓碑)를 세웠다고 한다. (윤경진)


 
 

             

 

규장각 소장 김은열 묘지명 탁본
(규장각 도서번호-奎 28013)
============================================

김은열의 졸년 무진은 광종 19(968) 아닌 현종 19(1028) 일 수도...

 

968년에 평장사 관직이 있었나?

경순왕(敬順王)이 경순(敬順)이란 시호를 받은 것은 978.

현종은 태조의 손자, 김은열은 외손자?

경주김씨 족보에는 현종19(1028) 졸로 한 경우도 보임.

 

평장사 [平章事]

요약 : 고려시대의 정2품 관직.

본문 : 982(성종 1)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에 내사시랑(內史侍郞)평장사 ·문하시랑(門下侍郞)평장사를 둔 이래 1061(문종 15)1356(공민왕 5)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중서시랑평장사 ·문하시랑평장사 ·중서평장사 ·문하평장사를 두었는데 모두 정2품관이었으며 정원은 각각 1명씩이었다.

[출처] 평장사 [平章事 ] | 네이버 백과사전

 

현종 [顯宗, 992~1031]

태조의 여덟째 아들 안종(安宗) ()의 아들.

 

경순왕 [敬順王, ? ~ 978]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고려사절요 제2> 경종 헌화대왕(景宗獻和大王)

무인 3(978), 송 태평흥국 3요 보녕 10

여름 4월에 정승(政丞) 김부(金傅)가 졸하였다. 경순(敬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고려사 > 卷五 世家 卷第五 > 顯宗 19> 3

> 죄수들에게 관용을 베풀다 | 102834일 음력, 현종 19

三月 己亥 放輕繫.

 

102834일의 간지는 己亥이다.

묘지의 무진년 34일 기축의 기축은 일간지인가, 연간지(1049?)인가?

卒于戊辰三月初四日 己丑葬于城北十里

 

96834일의 간지는 丁亥이다.

 

=====================================================

 

김용선 (金龍善), 신자료 고려 묘지명 17(新資料 高麗 墓誌銘 17)

 

 

--------------------------------------------------------- 

<대안군 김은열 묘지명> 소개

 

1. 소재 : 개성에서 북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종암 밑 오룡산 남쪽 기슭 임좌-   

   조선정조 8년 (1784, 갑진)에 발견, 다시 묻음

2. 연대 : 광종19년 (무진, 968) ※추정

3.<참고문헌>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고려묘지명집성 (1993, 김용선, 한림대)

-김연옥 고려시대 경주김씨의 가계 (숙대사론 11,12합 1982)

-경주김씨세적보 (함흥경주김씨파보소 1925

-경주김씨족보(경기 고양 1985)

 

묘지명과 관련한 각 참고자료 기술 내용

 

1) 고려묘지명집성 (1993, 김용선, 한림대)

김은열 묘지명

신라 경순왕 김부의 넷째아들 시중시랑이며 고려때 평장사이신 휘은열로서 무진년 3월 초 4일(기축일)에 세상을 떠나시어 성 북쪽 10리 바깥 종암아래 오룡산 남쪽기슭 쌍룡합곡 임좌언덕에 안장하였으며 형님은 일과 황과 명종이요 아우는 중석과 건과 선과 종이며 아들은 강릉군 태화이다.

 

2)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이 묘지는 조선정조8년 (1784, 갑진)에 발견되었다. 그런데 명문은 매우 간략하며, 고려시대의 다른 묘지명의 일반적인 서술형태와도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이것이 실제로 주인공인 김은열이 사망한 직후, 즉 고려초기에 제작된 것인가 하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 묘지와 함께 의종4년 (1150)에 제작된 김경보(*경주김씨)의 묘지명도 함께 발견되었으므로, 이것이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단정할 만한 특별한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에 따라 명문에 나오는 김은열의 졸년, 즉 술진년을 고려 초기에서 찾아보면 광종19년 (968)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 묘지명이 작성된 연대도 일단 광종19년으로 추정해 두기로 한다.

명문에서 보듯이 김은열은 신라 경순왕의 8자중 제4자이며, 한편으로 고려태조 왕건의 외손자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전혀 나오지 않으며, 그의 자로 소개된 강릉군 김태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그의 자손들은 이후 번창해 갔는데 특히 무인정권 당시 활약하던 김봉모, 최이의 사위 김약선, 충선왕대의 재산 김혼 등을 유명한 인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김은열의 묘소에서 정북서 5보 되는 곳에서 또 하나의 묘지가 출토되었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생 략> 이 명문은 경순왕의 제2자인 김황의 묘에서 나온 것은 틀림없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김황의 생몰년대나 묘지명 작성연대를 밝혀주는 기록이 전혀 없고, 명문의 내용 또한 일반적인 묘지의 기술형식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묘지도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정도로 소개를 해두고자 한다.

 

3) 안동김씨 익원공파보

대안군 휘은열 :은열공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이시며 벼슬은 공부시랑 평장사를 지내셨고 대안군에 봉해졌다. 고려 현종 19년 서기 1028년 3월 4일 己丑에 졸하니 묘는 개성에서 북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종암 밑 오룡산 남쪽 기슭 임좌에 모셨으나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이조영조 8년 서기 1784년 갑진에 황가 사람의 투장으로 인하여 誌石이 노출되고 많은 부장품이 현출되어 다시 치분하고 헌종 15년 기유 서기 1849년에 후손인 유수 金鼎集이 비문을 지어 비를 세우고 안동김씨와 경주김씨 두 종중에서 매년 기일에 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국토가 분단되어 성묘의 길이 없고 수백만의 후손들이 오직 마음으로 추모할 따름이다.

 

자는 태화, 계령, 숙승, 렴, 갈이다.

 

4) 규장각 소장 金殷說墓碑銘

- 奎 28013

- 金鼎集 撰, 1849년(헌종 15).

- 2매, 拓本, 92.3 x 31.5 cm.(大小不同)

고려초기의 인물인 金殷說의 墓碑銘을 탁본한 것.

제1매는 [高麗平章事輔國大安君金公殷說墓]라는 題號를 탁본한 것이고

제2매는 본문을 탁본한 것이다.

 

본문의 내용에 따르면 1784년(정조 8)에 幽誌를 발견하고 改封하였으며, 1849년(헌종 15) 후손인 鼎集이 開城留守로 부임하여 墓碑를 세웠다고 함(윤경진)

 

5) 경주김씨 홈페이지

고려평장사 보국대안군 김공은열묘지명(高麗平章事 輔國大安君 金公殷說墓誌銘)

정조임금 8년(갑진년)에 시중공(=김은열)의 지석과 평장사공(=김황) 소보공(=김경보) 두 분의 지석을 우연히 발견하였으니 대개 남의 산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지석을 파묻어 숨겼더니 지금에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으므로 여러 일가들이 모여서 그 지석의 글을 읽어보고 서로 의혹이 풀렸다고 하며 말하기를 "이 지석 때문에 족보의 미비했던 계통을 참고 할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하니 이것은 조상의 혼령의 도움으로서 자손의 다행인 것이 아니겠는가

나(=김사목)의 증고부 효간공께서 족보의 일을 시작하던 것을 부친께서 계속 물려주셨으니 내가 어찌 두려워만 하여서 사양하겠는가.

그 지석 한쪽면에 기록되어 있기를

"신라 경순왕 김부의 넷째아들 시중시랑이며 고려때 평장사이신 휘은열로서 무진년 3월 초 4일(기축일)에 세상을 떠나시어 성 북쪽 10리 바깥 종암아래 오룡산 남쪽기슭 쌍룡합곡 임좌언덕에 안장하였으며 형님은 일과 황과 명종이요 아우는 중석과 건과 선과 종이며 아들은 강릉군 태화"

라고 하였다.

 

다음에 그 자손들이 자세하게 참고 할 뜻이 있어 다시 묘소 위로부터 바로 북쪽 다섯걸음 거리에서 지석을 캐어내니 그 한쪽면에 기록되어 있기를

"고려평장사 김황을 아우 시중시랑 김은열의 묘소에 이어서 안장하였으며 경순왕의 둘째아들과 넷째아들이 고려태조의 외손이며 공신으로서 특별한 장지를 성 북쪽 10리 오룡산 남쪽기슭 30리 주위를 주었다."

고 하였다.

 

그 한쪽면에 기록되어 있기를

"신라 경순왕 김부의 7세손 검교 태자 소보 김경보로서 부친은 공부시랑 휘한공이요, 조부는 추봉공부상서 휘계삼이요, 외조부는 예부원외랑 김태기이며,

공(=김경보)의 나이 82세로 대금나라 황룡 10년(경오년) 4월 17일(계해일)에 본댁에서 세상을 떠나시어 7월 17일(을유일)로써 오룡산에 안장하였으며 아들은 유림랑 감찰어사 비어대 휘작문이요, 맏사위는 정주사 시전중 내금사 윤유연이요, 둘째 사위는 전옥서승 유면이다."

라고 하였다.

 

또는 시중공(=김은열) 바로 북쪽 다섯걸음 거리에서 지석 1개를 캐내니, 그 지문에 기록되어 있기를

"신라 경순왕 김부의 넷째아들 평장사 보국대안군 은열의 묘이니 성 북쪽 10리 바깥 오룡산 남쪽기슭 쌍룡합곡 금계포란형(금닭이 알을 안은 형국)임좌병향이다."

라고 하였으니 앞의 지석 두면의 뒤에 얻은 지석 1개로써 증거한다면 시중시랑(=김은열)이 경순왕의 아들이라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으며 그 형제 차례와 그 아들의 벼슬과 이름도 밝혀졌으며 ,

 

다음 한쪽으로 본다면 공부상서공(=김계삼)의 위와 강릉군(=김태화)의 아래에 다시 2대수가 의당 있어야 하겠는데 상서공의 휘자도 족보와는 같지 아니하며 또는 모든 지석에 작호가 족보와는 서로 어긋나니 대개 족보의 미비한 것은 의심할 수 있으되 지석의 문자는 실로 믿을 만한 일이므로 이제 바로 족보의 기록을 고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상서공 위 2대수가 증거할 문헌이 없고 경순왕과 평장사공 휘(인위)의 연대가 너무 가까운 것이 더욱 의심나는 것은 역시 모두 고칠 수 없으니 차라리 따로이 기록을 하여서 후대를 기다려야 하겠으니 여기에서는 감히 경순왕 이하 세대차례를 가로로 쓰고 아울러 그 자손을 기록하여 한가지 예규를 만들어 미비한 족보 옛날기록 아래에 붙인 다음에야 지석과 족보가 서로 증거되어 신중성이 있을 것이니 의심과 신빈성이 각각 전해지면서 중복되는 혐의가 없을 것이니 여러 일가의 중론을 따른 것이로되 다만 옛날 기록이나 또는 어떤 족보에는 시중시랑(=김은열) 성과 이름위에 삼녀라는 글자가 있고 또는 공부상서(=김계삼) 휘자 위에 자를 썼으니 이것은 옳지 않으나 아직 옛 것대로 보존하였다.

 

지금에 지석을 씻어서 그 내용을 모두 드러낸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후손 사목은 삼가 기록함.

 

시중공(=김은열) 묘소 오른쪽에 또 큼직한 하나의 무덤이 있으니 그 둘러 쌓은 담의 남아있는 흔적을 보건데 뚜렷하게 특이한 무덤으로서 한 구역내에 똑같은 형체로써 그 무덤에서 출토된 기물은 모두 부녀자의 화장기구이므로 그의 부인인 것 같으나 지석이 없으므로 확정할 수 없어서 아직 부록으로 뒤에 증거할 자료로 하였다.

 

가보를 살펴본다면 경순왕과 평장사공(=김황) 사이에 누락된 대수가 있다고 종중의 전해오는 말이 있으나 그 사이에 몇대인 것은 알 수가 없으며 지금에 청주족보에는 공부시랑 은열이 경순왕의 셋째아들로서 5대를 전하여 휘영고에 이르러서 직접 평장사로 전해 이은 차례를 삼았으니 어떤 근거에서 인지는 알 수 없으며 경순왕 이전 세대가 벌써 사기와 서로 부합되니 이 5대라는 것이 착오될 이치가 없는데 다만 의심할 곳은 경순왕이 본래에 고려태조와 같은 세대에서 경종임금 3년(무인년)에 상사났으며 평장사공(=김황)이 현종 15년(갑자년)에 벼슬을 그만 두었더니 지금의 평장사공이 벼슬 그만둔 것이 비록 70년대인 것은 확실하지 않으나 대개 벼슬 그만둔 것이 늙은 다음의 일일 것이다.

여기에서 갑자년으로부터 70년을 거슬러 올라 간다면 광종 67년 을묘년 병진년 간에 출생하였을 것이며 경종은 광종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경순왕의 상사난 해에 평장사공의 나이 벌써 이십사오세가 되었을 것이니 비록 소목(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차례[맨 위 첫째 중앙에 시조를 모시고 왼쪽은 소=2,4,6,8, 오른쪽 목=3,5,9])을 따져서 부자지간이거나 혹은 조손간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세대에 혹 나이 8~90세 45대 손자를 보게도 되나 여기에서 그렇지 않은 것은 족보에서 벌써 낙랑공주가 낳은 은열의 출생이 그 다음해인 정유, 무술년간 이라면 이때로부터 평장사공의 출생년도(을묘,병진년)가 불과 18,9년이니 그간에 어찌 45대가 될 수 있겠느냐

또는 족보 중에서 여러 일가의 본관의 갈리는 데에서 안산김씨에서는 이르기를 경순왕 12세손 계림군 김균의 후손으로서 비로소 안산김씨로 본을 삼았다는 것이 벌써 고려때에 있었으니 우리 김씨는 본래에 경주로 본관을 하였으면 이 안산김씨가 김균의 후손이라 한 것은 사실 증거가 없으며 12세라고 이른 것은 반드시 증거가 있은 다음에 썼을 것이니 경순왕과 평장사공 사이에 벌써 이 5세대가 있었다면 어찌 17세라고 아니하고 12세라고 하였겠느냐. 지금에 계림군 김균으로부터 평장사공에 이르까지 바로 만 12대수라고 한 것은 앞에 말한 소목과 조손이라는 말이 이에 가깝지 않느냐.

 

지금 평장사공에서 경순왕까지의 연대가 이렇게 가까운 것을 알만한데 후손들이 알지 못하고 연대가 멀다고 하며 대수가 탈락되었다는 전해 내려오는 말이 이와 같으니 문서에 증거할 것이 없어서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또는 고려가 열전을 참고하건데 명종 때에 영고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등성 김인경의 부친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연대가 어긋나므로 혹시 두사람의 이름이 같은 것이라고 의심할 만하다.

 

족보계통은 중대한 일이므로 애초에 신중하여야 하겠으되 족보에 기록된 것이 이렇게 모순되는 것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으며 나중에 족질 휘여의 가승(한 집안의 기록)을 보건데 휘순웅이 실로 평장사공의 부친이라고 하였고 그 주석에 이르기를 순웅의 아들 인위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진실로 여러 일가가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우리집에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석과 아울러 기록해 놓으니 평장사공 위에 이런 장군공의 1대수가 있다면 여기로부터 경순왕년대에 소급해보면 더욱 가까운 것이니 여기에 5대수라는 것은 아직 부록으로 하여서 후일에 다시 참고할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평장사공 23세손 덕운은 삼가 기록함.

 

임진년 족보를 살피건대 경순왕 이하 족보 탈락한 것은 다만 여러 기록에 어긋나는 말을 증거로 의문점 그대로 남겨 두었는데 정조임금 갑진년에 시중공(=김은열) 소보공(=김경보)의 지석을 발견하여 비로소 선대계통을 알았으므로 지금에 구족보의 기록을 수정하였으며 경헌공은 추가로 기록하며 구족보에서 일가 덕운이 기록한 것을 작은 글씨 두 줄로 아래에 써서 참고케 하였다.

 

 

3) 대안군 묘소 실제 위치 (2003. 10. 7. 윤만(문) 제공)

 

자료 출처 : 김녕김씨선원세계표(금녕군직계)

--大安君(대안군) 戊辰(무진) 3월 4일.

--고려 태조의 제일공주인 낙랑공주 소생 첫째 아드님으로 대안군의 봉군과 내사시랑 평장사를 지냈다.

--墓(묘)는 개성군 영남면 용흥리 화곡 오룡산 남쪽기슭인데 1784년에 공의 지석이 발견되어 공의 친족 관계가 분명해졌다.

 

 

3. 요괴승(妖怪僧) 일연의 삼국유사가

   유생들의 가짜 조상 만들기의 발원지이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의 식민지이었을 때 호적제도에 따라 성(姓)을 만들어야 했다.

일반백성들은 대부분이 고려조와 조선조에서도 성을 가질 수 없었다. 사대부와 유생들 그리고 일부 백성들이 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 들은 자신들의 출신 배경을 미화시키려고 요괴서인 삼국유사를 이용하였다. 자기 가문을 위해서는 조상도 바꾸기를 서슴치 않는 파렴치한 자들이었다. 김가 성의 대부분이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내세우고 있다.

 

【연산1년 5월28일】

충청도 도사 김일손의 상소에서“ 신이 신라 옛 도읍터에 관광을 갔더니, 무덤이 총총하여 귀천을 구별할 수 없다가 한 무덤을 지나다가 보니 잘라져 쓰러진 빗돌에 ‘태종능’이라고 쓰였기에 늠연히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두 번 절하고 물러난 적이 있으니, 이것이 역시 한 증거입니다. 이 두 일에는 예문을 들어서 써도 늦지 않다 하겠습니다.

 

【숙종36년 9월16일】

민진후(閔鎭厚)가 을묘년에 정식(定式)한 선성(先聖)·선현(先賢)의 자손(子孫)과, 칠반 천역(七般賤役) 외에는 군역(軍役)을 탈면(?免)할 수 없게 하였던 것을 거듭 밝히고, 왕씨(王氏)의 사람들도 또한 이 예에 의거하여 시행할 것을 청하자, 승지 이제(李濟)가 잇달아 말하기를, “기자(箕子)·문성공(文成公)·문익점(文益漸)의 자손(子孫)은 군역(軍役)을 면제한 구규(舊規)를 빙자하여, 그 해당된 부역(賦役)까지도 여러 가지로 계책을 내어 모면하고자 도모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자손은 병조(兵曹)의 하리(下吏)와 부동(符同)하여, 수교 문적(受敎文籍)을 도득(圖得)해 내고는 수령을 속여 중도에서 벗어나 빠졌으니,그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울러 신칙(申飭)하도록 명하였다.

 

【경종3년 6월16일】

경주(慶州)에 있는 신라왕(新羅王) 시조(始祖)의 묘호(廟號)를 ‘숭덕(崇德)’이라 걸게 하고, 이어 예관(禮官)을 보내서 고제(告祭)를 행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조태억(趙泰億)이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있을 때 상소하여 ‘숭인전(崇仁殿)이나 숭의전(崇義殿)의 예(例)에 의하여 전호(殿號)를 특별히 걸게 하고 본도(本道)로 하려금 참봉(參奉) 2명을 차출(差出)하여 향사(享祀)할 때 일을 맡아 보게 할 것’을 청하자, 비답을 내려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오랫동안 복주(覆奏)하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예조 참판 이사상(李師尙)이 아뢰기를, “신라왕의 시조 및 경순왕(敬順王)의 묘(廟)에 간혹 비를 빌면 문득 효험이 나타나는데, 다만 전호(殿號)가 없고 전수(典守)도 없으니, 진실로 조태억이 진달한 바와 같습니다. 청컨대 대신(大臣)에게 순문(詢問)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는데, 영의정(嶺議政) 조태구(趙泰耉)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다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드디어 본도(本道) 감사로 하여금 신라의 후손으로서 참봉 2명을 차출하여 예조에 보고하고 직첩(職牒)받게 하였으니 양식도 잇달아 주도록 하였다.

 

【영조22년 10월14일】

동지(同知) 김응호(金應豪)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들의 선조인 신라 경순왕의 능묘를 오래 전에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장단(長湍)에서 그 지석(誌石) 및 신도비(神道碑)가 나왔으나, 왕묘에 대한 일은 사삿집의 무덤과는 그 사례가 달라서 벌목을 금지하는 절차와 석물을 세우고 수호자를 두는 일은 조정의 지시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조정에서 사정을 참작하여 규정을 허락하여 준다면, 위로는 전대(前代)를 추념하는 성주(聖主)의 뜻을 드러낼 수 있고, 아래로는 추원 보본(追遠報本)하려는 신들의 정성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대신들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영조23년 4월20일】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묘(墓)를 수치(修治)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지금 김일호(金一豪) 등의 비지(碑誌) 인본(印本)을 보건대, 그것이 경순왕의 묘임을 의심할 것이 없다. 1천 년 가까이 된 후 오늘날에 찾게 되었으니 기이하다고 말할 만하다. 전대의 다른 능(陵)과 비교하여 사면(事面)이 더욱 중대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관심을 가지고 수치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미 치제(致祭)하였으니 비석(碑石)을 세울 때에 역군(役軍) 또한 돌보아 돕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보다 앞서 그의 자손이 진소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영조24년 1월29일】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신라 경순왕의 능도 고려의 여러 왕릉의 예에 따라 수총군(守塚軍) 5인을 두도록 명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뢴 것이었다.

 

【영조33년 3월26일】

임금이 친히 대행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행록(行錄)을 지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우리 대행 자성은 바로 우리 성고(聖考) 숙종 대왕의 계비(繼妃)로서, 성은 김씨(金氏)이고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인데, 시조는 김알지(金閼智)이니 세조(世祖)로 추존(追尊)되었다. 27대손 김부(金傅)는 고려조에서 경순왕(敬順王)으로 봉(封)하였다. ” 하였다.【승하한 지 7일 만이라는 데서부터 그 이하는 뒤에 더 보태어 지은 것이다.】

 

【영조33년 7월21일】

승지를 보내어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묘에 치제(致祭)하였다. 묘의 소재를 몰랐었는데, 후예(後裔) 김효대(金孝大) 등이 장단(長湍)에서 찾아 개봉(改封)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듣고 이런 명령이 있었다.

 

【정조4년 2월4일】

부사직 김효대(金孝大)가 상소하기를, “예전에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오·월왕(吳越王)의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수신(守臣)에게 명하여 그 무덤을 수리하게 하고 또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표충관(表忠觀)의 비문을 짓게 하였으니, 숭보(崇報)하고 표창한 것이 지극 하였습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이 의리를 중히 여겨 승국(勝國)을 위하여 숭의전(崇義殿)을 두고 신라를 위하여 숭덕전(崇德殿)을 두고 관원을 두어 수호하고 비를 세워 업적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숭덕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동천묘(東川廟)가 있는데 곧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사당입니다.

 

국가에서 숭의전·숭덕전과 마찬가지로 관원을 두어 수호하고 예(禮)로 제사하니, 신 등은 경순왕의 후손으로서 흠앙(欽仰)하고 감축(感祝)하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대저 경순왕은 임금 자리에 있다가 갑자기 물러나서 신기(神器)를 가지고 덕 있는 이에게 귀순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고려 태조가 빈례(賓禮)로 대우하고 사관(史官)이 항(降) 자를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 인조 대왕(仁祖大王) 때에 이르러 본 도의 도신(道臣)이 장청(狀請)함에 따라 왕묘(王廟)로 바꾸어 새롭게 하고 이어서 성손(姓孫)을 참봉(參奉)으로 차정(差定)하게 하셨고, 현종 대왕(顯宗大王)께서는 또 연신(筵臣)의 진달로 인하여 특별히 사액(祠額)을 내리고 유생(儒生) 90인이 거재(居齋)하게 하였으며, 수호(守護) 60명을 두었습니다. 선조(先朝) 무진년에는 장단(長湍)에서 왕의 현수(玄隧)를 찾았으므로 특별히 수졸(守卒) 5인을 주고 희생과 제물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셨으니, 국가에서 대우하는 것이 이처럼 융숭하였는데 동천묘 앞에는 오히려 계생석(繫牲石)이 없습니다. 청컨대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비문을 지어 바치게 하고 그 후손이 돌을 다듬어 새겨 세우도록 윤허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 곳에 오히려 비석이 없는 것은 흠절이라 하겠다. 더구나 선조의 고사(故事)가 있으니, 청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뒤에 대신(大臣) 김상철(金尙喆)이 연석(筵席)에서 사신이 글을 짓는 것은 일이 상격(常格)과는 다르다고 아룀에 따라 드디어 그만두었다.

 

【정조16년 4월7일】

예조가 아뢰기를, “각신 이만수의 별단(別單)의 여러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가락국의 왕릉이 김해부(金海府) 성 서쪽 2리쯤 되는 평야에 있는데, 사면이 모두 낮은 논으로 둘러 있습니다. 그런데 비록 큰 장마를 만나더라도 능 곁의 10보(步) 안에는 물이 고이지 않으니, 거주하는 백성들이 이상한 일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을 쌓은 것은 그리 높지도 넓지도 않고 사초(莎草)도 말라죽지 않았습니다.

 

설치한 물건은 혼유석(魂遊石) 1좌(坐), 향로석(香爐石) 1좌, 진생석(陳牲石) 1좌이고, 능 앞의 짤막한 비석에는 ‘수로왕릉(首露王陵)’이란 4글자를 써서 거북머리의 받침돌에 세워 놓았으니, 이는 바로 경자년에 특별 전교로 인하여 고쳐 세운 것입니다. 돌담으로 둘러쌓았는데 앞은 제각(祭閣)까지 닿았습니다. 허 왕후(許王后)의 능은 성(城) 북쪽 2리쯤 되는 구지봉(龜旨峰)의 동쪽에 있는데, 구봉(龜峰)은 바로 수로왕이 탄생한 곳입니다.

 

수로왕과 허왕후의 두 능은 서로의 거리가 또한 2리쯤 되고, 봉분 쌓은 것과 설치한 물건은 수로왕릉과 같으며, 짤막한 비석에는 ‘수로왕보주태후허씨능(首露王普州太后許氏陵)’이란 10글자를 썼습니다.

 

돌담 전면에 삼문(三門)을 설치하고 다른 각우(閣宇)는 없습니다. 제각(祭閣)은 4칸인데 정자각(丁字閣)의 제도를 사용하였고, 부엌 4칸, 재랑(齋廊) 4칸, 재실(齋室) 4칸으로 바로 옛 회로당(會老堂)입니다. 제각(祭閣)의 기둥 밖 서까래 끝에는 간간이 물이 새고 단청은 벗겨져 떨어진 곳이 많으며 부엌의 서까래는 태반이나 썩었으니, 올 여름의 장마를 지내면 쉽게 무너질 염려가 있습니다. 금번에는 이미 고유(告由)하지 못했으니 역사를 시작하기 어려운 형편이지만 추향(秋享)을 기다려 수리하는 것은 아마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제물은 한결같이 본릉(本陵)의 동지(冬至) 제사의 전례대로 장만하는데, 벼[稻]·기장[梁]·개암[榛]·밤[栗]·희생[牲]·포[?]·김치[菹]·젓갈[탛] 따위는 대략 숭덕전(崇德殿)의 제물과 같습니다. 제기(祭器)는 제상(祭床) 2개, 향상(香床) 1개, 촛대[燭臺] 2개, 보(?)와 궤(?) 각각 2개, 목기[豆] 6개, 대그릇[쮹] 10개, 술잔[爵] 6개이며, 술독이 있는 곳에 술잔이 없어 자기병[磁甁]에 제주(祭?)를 담아 놓았으므로 신이 본 부사에게 말하여 추향(秋享) 때까지 술잔[尊] 1개와 구기[勺] 1개를 새로 장만하여 격식을 차리게 하였습니다.

 

허 왕후의 능은 수로왕의 능에서 거리가 다소 멀어 이미 같은 국내(局內)가 아니고 들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허 왕후의 능에는 제각(祭閣)이 없으므로 전부터 제사지낼 때 수로왕릉의 제각에 합설(合設)하였었습니다. 금번 제사를 지낼 때는 하교로 인하여 각각 진설하였으나, 이후 절향(節享)에는 다만 전례대로 합설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1. 위전(位田)에 관한 일은 신이 김해(金海)에 도착하여 본부(本府)의 아전·향임과 김씨·허씨 등 여러 사람을 상세히 조사하여 비로소 전말(顚末)을 알았습니다. 능의 위토전이라고 이름한 것은 1결(結)이 조금 넘는다고 하는데, 김희명(金熙明)이 상언(上言)하기를 조정에서 떼어준 문서도 증거할 만한 것이 없고 연조(年條)도 상세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른바 회로당(會老堂)의 위토전은 4결(結)이 조금 넘는데, 이는 바로 저지난 무인년에 고 부사(府使) 허재(許梓)가 장만한 것입니다. 대개 허재는 가락왕의 후예로서 이 고을의 원이 되어서 선조의 능을 위해 재목을 모으고 토지를 사서 제사를 지내고 건물을 수리할 수용을 구비하여 그대로 고을 사람에게 맡겼었습니다. 이것이 회로당 위토전이라 일컫게 된 원인인데, 본부(本府)에서 기사년에 결정한 입안(立案)을 상고해 보면 이는 고을 사람이 간여할 바가 아님은 다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시골 풍속이 근래에는 예전과 달라 왕릉의 동지 제사에는 다만 민가에 배정한 물건만으로 희생과 술을 마련하고 허씨의 전답에서 나온 것은 공공연히 모두 사용(私用)으로 돌렸으며 종말에는 또 회로당이 왕릉에 가까운 것을 혐의하여 당의 현판은 향청(鄕廳)으로 옮겨 걸고 전답의 이름은 고을 둔전(屯田)이라고 고쳐 기록하였으며, 처음에는 몰수한 것이라고 핑계 대었다가 결국에는 공공연히 빼앗았습니다.

 

지난번 간사한 짓을 한 고을 사람을 엄중하게 형신하고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령이 있자 먼 변방의 완악한 풍속이 거의 징계할 줄 알게 되었고, 원래의 전답도 또한 본부(本府)에서 왕릉을 수리하는 위토전으로 양안(量案)을 정리하였으니, 이후로는 명목이 비로소 바로잡히고 간사한 폐단을 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위토전이 아직까지 향임(鄕任)에 속해 있으니, 실로 오래 되면 또 폐단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김씨와 허씨 등 여러 사람들은 모두 능감(陵監)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려고 하지만 이른바 능감이 꼭 향임보다 나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금번 춘추(春秋) 절사(節祀)를 거행한 뒤에는 왕릉의 사체(事體)가 전보다 더욱 각별하니 능의 위토전과 회로당의 위토전을 막론하고 모두 본부(本府)에 소속시키고 모든 출납의 숫자와 지출의 절차를 본 부사로 하여금 주관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정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지금 실제 숫자를 조사해보면, 능의 위토전과 회로당(會老堂)의 토지에서 받는 벼가 가정하여 매년마다 42석이 되며, 능졸(陵卒) 50명에게 군역(軍役)을 면제한 대가로 받는 돈이 61냥이 되고, 각면(各面)에서 각종의 제수(祭需)를 대신하여 바치는 돈이 89냥이 되니, 합하면 1백 50냥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동지 제사의 준례에 의하여 제수를 마련하면, 두 차례 절사(節祀) 때에 들어가는 벼가 28섬이고 돈이 1백 4냥이니, 남은 숫자는 벼가 14섬이고 돈이 46냥입니다.

 

만약 숭덕전(崇德殿)의 준례에 의해 제수(祭需)를 본부(本府)에서 회감(會減)한다면, 위토전에서 나오는 것과 능졸(陵卒)에게서 군역을 면제한 대가로 받은 돈은 전량을 저축해 놓을 수 있으니, 제각(祭閣), 제수(祭需)를 수리 개조하는 등의 절목과 능감(陵監), 능직(陵直)에게 주는 봉급 따위는 모두 공비(公費)를 쓰지 않고도 넉넉히 지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사 의식은 이미 해조(該曹)로 하여금 참고하여 마련해서 내려보내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또한 본부(本府)로 하여금 사세(事勢)를 참작해 품식을 결정해서 영구히 준수할 수 있는 방도를 삼게 하소서.

 

1. 가락왕릉과 허 왕후의 능에서 1백 보(步) 안에는 일찍이 선조(先朝)의 특별한 전교로 인하여 표석(標石)을 세워 경작과 장사 지내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근래 완악한 백성들이 금지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두 능의 금지 표시 안에 침범하여 경작하는 걱정거리가 종종 있습니다. 금번 판부(判付)한 뒤에 본부사(本府使)가 조사하여 다스리고 엄하게 금지하였으므로 신이 간 뒤에 상세히 살펴보았는데, 아직까지 새로 개간한 것은 없었습니다. 침범하여 장사 지내는 것에 이르러서는 왕릉은 평지에 있기 때문에 본래 이러한 걱정이 없으나 허 왕후의 능에는 금지 구역을 침범한 곳이 한두 군데 있었는데, 여러 해가 된 것은 조사하여 규명하기가 어렵고 그중 작년에 새로 장사 지낸 것은 그대로 둘 수 없으므로 본부사(本府使)로 하여금 엄히 다스리고 기한을 정해 파서 옮기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1. 신라의 여러 왕릉 중에 12위의 왕릉은 20리 안에 있기 때문에 신이 가서 살펴보았고, 16위의 왕릉은 20리 밖에 있기 때문에 본주(本州)의 부윤(府尹)으로 하여금 살펴보고 와서 보고토록 하였는데, 모두 봉분이 완전하고 견고했으며 사초(莎草)가 잘 자라서 바라보기에 무성하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여러 왕릉은 모두 평야에 있으며, 오직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만은 거북머리 받침돌의 짤막한 비석에 능호(陵號)가 큰 글자로 적혀 있을 뿐, 그밖에는 하나의 표시도 없어 어느 무덤이 어느 왕릉이라는 것은 다만 촌 노인들의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것과 고을 아전의 구전(口傳)에 의거할 뿐입니다.

 

옛날에는 48위의 왕릉이라고 일컬었으나 지금 찾을 수 있는 것은 다만 28위의 왕릉 뿐인데 그 또한 확실하지는 못합니다. 설치한 물건은 간혹 혼유석(魂遊石)과 병풍석(屛風石) 등이 있으나 다만 형체만 있어서 옛 제도를 상고하기는 어렵습니다.

 

헌덕왕릉(憲德王陵)에서 바라보이는 곳에 경순왕전(敬順王殿)이 있는데, 영정(影幀) 1장은 지난 무술년에 영천(永川)의 은해사(銀海寺)에서 옮겨 봉안하였으므로 신이 지나는 길에 일체 살펴보았습니다.

 

1. 숭덕전(崇德殿)과 경순왕전(敬順王殿)에는 모두 참봉(參奉)이 있는데, 숭덕전의 참봉은 바로 계하(啓下)하는 자리였습니다. 고 판서(判書) 박문수(朴文秀)가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에 다른 도(道)의 사람으로 구차하게 충원하고 임시 벼슬로 만들어서 오래도록 재실(齋室)을 비우는 때가 많았으니, 능(陵)과 전(殿)의 수호가 자연 소홀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 뒤로는 절목(節目)에 의거하여 본도(本道)에 사는 자가 아니면 차출하지 말도록 해도(該道)에 신칙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신라의 여러 왕릉에는 으레 왕릉을 수호하는 3호(戶)가 있었는데, 근래 본부(本府) 군역(軍役)에 거듭 침탈을 입은 것으로 인하여 편안하게 살지 못하고 왕왕 도피하고 있습니다.

 

신이 살펴볼 때에 간혹 능졸(陵卒)이 하나도 없는 곳도 있었으므로 본 부사(府使)로 하여금 즉시 정해서 세우도록 하였으니, 이 뒤로는 여러 능의 능졸에게 다른 역사(役事)로 침해하지 말도록 엄하게 신칙하는 것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규정을 정하도록 감사에게 분부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 계본(啓本) 전체를 등사하여 해도(該道)에 내려보내고 감사와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서로 의논하여 개정한 뒤에 고을의 장고(掌故)에 상세히 기록하게 하라. 능졸(陵卒)의 정원이 빠졌다는 말은 듣고 보니 매우 놀랍다.

 

이후로 감사는 다시 못된 습속을 따르는 자가 있는지 자주 조사해서 수령을 논죄하라. 그리고 묘당으로 하여금 본부에서 서울에 바치는 군포(軍布) 중에서 능을 지키는 호는 역호(役戶)에서 제해 주고 그들을 수호하는 부서로 이속시켜 떠나지 않는 기반을 만들게 하라. 같은 기슭에 있는 왕릉들도 또한 각각 정할 것 없이 아울러 이런 뜻으로 알려 주어라.” 하였다.

 

【정조18년 4월27일】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사당을 수리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경순왕의 사당에 지내는 제사는 입춘일과 입추일을 쓰고 있으므로 숭덕전(崇德殿)에서 2월과 8월의 상순(上旬) 가운데 좋은 날을 받아서 제사를 지내는 것과 조금 다릅니다.

 

그리고 숭덕전에는 팔변(八쮹)·팔두(八豆)를 쓰고 있고 이 사당에는 칠변(七쮹)·칠두(七豆)를 쓰고 있으며, 숭덕전에는 복호(復戶)한 것이 22결(結)이고 이 사당에는 5결뿐이며, 참봉(參奉)을 임명하는 첩문(帖文)도 이조를 거치지 않고 예조에서 만들어 보내고 있으니, 이는 대체로 사면(事面)의 존중되는 정도가 신라 시조의 사당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에 당초부터 등급을 낮추었던 것이므로 지금 갑자기 등급을 격상시키는 일을 논의할 수 없으니, 모두 그전대로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옛날 우리 선조(先朝) 때에 조경묘(肇慶廟)를 창건하고 완경과(完慶科)를 베풀었었다.

 

그후로는 사면의 존중되는 정도가 자별해졌으니, 참봉의 직첩은 이조에서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세종23년 11월6일】

우정언 이계선(李繼善)이 아뢰기를, “근자에 천후(天候)가 순조롭지 못하온데, 신 등이 못난 자격으로 언관(言官)에 있으면서 그 이유를 반복하여 생각하온즉, 이제 하삼도(下三道)의 백성을 옮겨서 동북(東北) 경계에 채움으로써, 슬퍼하고 원망하고 분하게 여겨서 울부짖는 소리가 도로에 연하였사오매, 하늘과 사람의 이치가 일반이온지라, 감통(感通)함이 간격이 없으므로 천변(天變)이 일어남은 아마 여기에 말미암인가 하옵니다. 전일에 이것으로써 천총(天聰)을 번거롭게 하였삽더니, 성상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들의 말을 아름답게 여기노라.’ 하시기에, 신 등은 물러나서 명을 기다렸더니, 이제 정부의 논의를 듣건대, 백성을 옮기는 일은 국가의 중대한 일이므로 정지할 수 없다고 하오니, 신 등이 비록 어리석고 어두울지라도 어찌 민폐(民弊)만 알고 국가의 대체를 생각지 않았겠습니까.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4진(四鎭)은 곧 요해처(要害處)이므로 백성을 옮겨서 채우는 것이 가하오나, 함흥 이남은 진실로 요해처가 아니온즉, 아직 2, 3년을 기다려서 옮겨진 백성들이 안심하고 자리를 잡은 뒤에 점차로 옮기면, 민심이 조금 안정되어, 위로 하늘의 뜻에 보답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 때에는 평안도의 평양 이북과 함길도의 영흥 이북이 모두 적의 경계가 되어 비어서 사람이 없었는데, 이에 남쪽 백성을 옮겨서 채웠으니 그때에 어찌 옳고 그름을 논의함이 없었으리요 마는, 그 뒤에 실책(失策)이라고 허물 하는 자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으며, 우리 조정에 이르러서도 남쪽 백성을 동서 양계(東西兩界)에 두 번이나 옮기게 했으나 또한 해(害)되는 일이 없었거늘, 하물며 임금이 백성의 원망을 피하기만 생각하고 장래를 생각지 아니하여 그 일에 힘쓰지 아니하고 한갓 세월만 허비한다면, 어찌 고식지계(姑息之計)가 아니겠는가. 이것도 중한 일이니 그만둘 수 없다.” 하였다.

 

 

 

==============================================================

--------------------------------------------------------------

 

김은열 묘지명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경순왕 셋째아들은 김은열, 넷째아들은 의성김씨 시조인 석(錫)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하지만, 김은열 묘지명에 셋째 아들이 명종(鳴鍾)으로 적혀있고 은열은 넷째아들로 의성김씨 시조인 석(錫)은 중석(重錫)으로 적혀있어 다섯째 아들이 되었습니다.

고려평장사보국대안군 김공은열묘지명을 아래에 올려드립니다.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의 네째 아들로, 시중 시랑(侍中 侍郞)이고 고려의 평장사(平章事)인 은열(殷說)이 무진년 3월 초 4일 기축일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성의 북쪽 10리 되는 종암(鍾岩) 아래 오룡산(五龍山) 남쪽 기슭의 쌍룡(雙龍)이 어우러지는 북쪽[壬坐] 언덕에 장례 지냈다.

형은 일(鎰)이고, 다음은 굉(鍠)이며, 그 다음은 명종(鳴鍾)이다. 아우는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鍾)이고, 아들은 강릉군(江陵君) 태화(泰華)이다.
-----------------------------------------------------
예전기록은 의성김씨 시조 김석(金錫)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이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외손으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을 의성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한편 《의성김씨족보(義城金氏族譜)》에 의하면 김석이 경순왕의 넷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김씨 2천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 등의 문헌과 《신라김씨 분파연원도(新羅金氏分派淵源圖)》에는 다섯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개국과 함께 문호를 개방한 의성김씨는 8세손 김공우(金公瑀)의 대에서 크게 번창하였는데, 장자 김용비(金龍庇)가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고, 차자 김용필(金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막내 김용주(金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