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김씨(安山金氏) 중시조(中始祖) 김정경(金定卿) 역사(歷史)
김갑섭(金甲燮)(전 안산김씨대종회 2,3대 회장)
고려(高麗) 말엽(末葉)의 일이다.
안산김씨(安山金氏) 외손(外孫) 인천이씨 자겸이 역적모의
(逆賊謀議)한 것이 발각(發覺)되었는데, 당시 고려법(高麗法)에는 역적모의(逆賊謀議)를 하다 걸리면 9족(九族)을 멸(滅)하게 되어 있었다. 이에 안산김씨(安山金氏)는 본거지(本居地)인 안산(安山)에서 멸족(滅族)을 당(當)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時期)에 중시조(中始祖) 정경(定卿)께서는 젖먹이 소아(小兒)였다.
위에서 언급한 외손에 대한 고증
중시조 김정경(金定卿, 1345년(충목왕 1)~1419년(세종 1)과 이자겸(李資謙,? ~1127. 1.19/ 음력 1126.12.5)은 생존시기가 200년이상 차이난다.
따라서 위에 언급한 외손은 중시조 정경의 조부인 문광공 원상(元祥) ? ~ 1339(충숙왕 복위 8)으로 봐야 한다.
기록의 내용상 인천이씨를 거론한 것은 참으로 죄송한 일이다.
문광공(文匡公)께서는 1320년(충숙왕 7) 삼사사(三司使)·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1322년 심왕 고(瀋王 暠)의 왕위 찬탈 음모를 도운 죄로 해도(海島)에 유배되었으나 원제(元帝)의 명으로 곧 풀려난 뒤 판삼사사에 이르러 돌아가시었다. 시호는 문광공(文匡公)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朴天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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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어린 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여 보물(寶物)이 많이 실린 수레에 어린 정경(定卿)을 태우고 심복(心腹) 시종(侍從, 노비?)에게 먼 타향(遠他鄕)에서 너의 자식이라 속이고 키우라는 지시를 하였고 시종은 주인의 명을 따라 타향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고려(高麗)가 망(亡)하고 이성계(李朝)가 나라를 세워(得國) 통치하던 때에 시종이 양심(良心) 있는 사람(者)이라 지난 일들(事實)을 정경(定卿) 중시조(中始祖)에게설명(說明)하여 중시조께서 안산(安山)으로 귀향(歸鄕)하시었다.
이후 조선초기(李氏朝鮮時國) 과거(科擧)에 등극(登極)하여 4대 왕조를 모시었다.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중시조 후손(本後孫)에게 불천지위(不遷之位)을 하사하여 사당(祠堂)에 불천위를 모시게 되었고 ‘살인(殺人)하지 않은 다음에는 절대로 죄를 묻지 말라.’는 어명을 내리셨다.
단종(端宗)이 영월(寧越, 三陟)로 귀양(歸鄕) 가던때에 세조(世祖)에게 상소문(上疏文)을 제소(提訴)한 것이 화(禍)가 되었다.
중시조(中始祖) 의 아들 암(巖)할아버지 3형제(三兄弟)가 세조에게 죄를 받고 암(巖)자(字), 을신(乙臣)자(字), 맹감(孟鑑) 자(字) 삼형제(三兄弟)가 의주(義州), 강진(康津), 황해도 황주{합천(陜川)?} 등지로 각각 이주하게 된 것이다.
현재 안산중학교(安山中學校) 건너편 전 안산면사무소(安山面事務所)가 있던 자리에 중시조(中始祖) 정경(定卿)이 식수(植樹)한 3그루의 은행나무중 한그루가 살아있다.
우리 여러 종친께서도 안산에 갈 기회가 있으면 들러보시라 권장하고 싶다. 그 자리에 안산김씨 중시조(中始祖) 정경(定卿)께서 식수(植樹)하였다는 간판도 있다.
서기 2012년 10월 3일
제2,3대 대종회장 갑섭(甲燮) 서(書)
참고 1. 신라김씨대종보(新羅金氏大宗譜)나 고려(高麗) 역사(歷史)를 보면 원자 상자(元字 祥字) 할아버지(祖)는 만능박사(萬能博士)라 하여 명국(明國)에서 특혜(特惠)을 내려 함경도로 귀향하였다.
강원도 통천(通川)에 돌아가시었음이 족보에 명시되어 있다.
통천김씨(通川金氏) 시조(始祖)가 원자(元字)상자(祥字)로 되어 있어 의문이 간다. 통천김씨의 DNA를 검사하고 싶다.
위 사실은 1970년 통천김씨 휘 위(渭) 이후의 실전된 조상기록을 족보에 추가하면서 우리 안산김씨의 선조이신 원상(元祥) 할아버지를 계대 편성하였으나 기록에 대한 오류로 삭제하겠다는 공식 답변을 받았다. 또한 통천김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휘 위(渭)의 기록은 안산김씨 원상(元祥)의 부(父) 휘 위(渭)할아버지와는 동시대 사람이 아닌 것으로 결론을 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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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2. 경기도 하남시 감북리(甘北里) 정경(定卿) 중시조(中始祖)의 묘소는 후손(後孫)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또한 그 밑의 후손이 어린 까닭에 묘를 실전하였다.
사위 안철산(安鐵山)이 장인 윗자리에 산소를 쓰고 비석을 쓰러뜨려 연못에 매장하였다. 그러던 중 낙자(樂字) 칠자(七字)께서 소재지에서 서당 선생으로 가장하여 교육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매가 꿩을 쫓아 연성대감 고을로 갔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조사해서 찾은 것이 약 150년 정도 된다.
위에 언급된 중시조 정경 할아버지의 사위 경기도 광주안씨(廣州安氏) 철산(鐵山)이 장인 정경의 산소 옆줄기 위에 묘를 쓴 것은 확인한 사실이다.
바로 위에 묘소를 조성한 것은 아니므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그 후손들이 중시조 정경 묘소 바로 위에 묘를 쓰고 아래에도 한 상부의 묘를 쓴 것은 상식을 벗어난 행위다.
참고로 중시조 정경의 묘소 비석을 쓰러트려 매장한 것은 사위가 한 것은 아니고 그 후손들이 땅이 욕심나서 한 행위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공신이었던 중시조 묘소 영역이 지금보다 넓었던 것은 확실한데 우리 집안의 관리 잘못으로 위정각 재실과 중시조 묘소 등 일부 영역을 제외하고는 많은 전답과 임야가 줄어 든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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