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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연방/사찰순례

불·보살 향한 간절한 염원 석굴에 아로새기다

by 연송 김환수 2014. 10. 19.

·보살 향한 간절한 염원 석굴에 아로새기다

 

월 기획 / 해외성지순례  인도 엘로라·아잔타 석굴

데스크승인 2014.10.13 17:42:05

여태동 기자 | tdyeo@ibulgyo.com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양한 형태로 형상화시킨 곳이 많다. 그 중의 하나가 석굴이다. 원래 석굴사원 형태로 시작한 석굴은 수대에 걸쳐 불교를 숭상했던 불제자들이 조성했다. 인도를 대표하는 두 개의 석굴인 엘로라와 아잔타 석굴을 소개한다.

 

인도 서북쪽 뭄바이가 속한 마하라쉬트라주 도시인 오랑가바드에서 서쪽으로 2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석굴사원이 엘로라석굴이다. 이곳은 불교와 힌두교 자이나교의 세 종교가 공존하는 인도 최대의 석굴사원군이다. 인도에는 다수의 석굴사원이 있지만, 그 중에서 엘로라는 그 규모나 건축물의 정제미, 다양성 등에 있어 단연 돋보이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와 힌두교 자이나교의 모습이 공존하는 엘로라석굴 모습.

 

# 세 종교가 공존하는 엘로라

 

엘로라석굴은 바위를 위에서 밑으로 파내려가면서 조성했다. 바위산의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에 만들어진 34개의 석굴사원은 남북 약 2km에 이르며 모두 서쪽 방향을 향하고 있다. 사원의 구조는 거의 대부분은 동일한데, 굴 중앙 한쪽 벽에 법당을 조성하고 넓은 공간 주변으로 승방을 배치했다.

 

1~10굴은 5~7세기경, 11~12굴은 8~9세기경에 만들어진 불교 사원이다. 대승불교가 쇠퇴할 무렵 조성된 것으로, 특히 제11~12굴은 불교 사원이면서도 힌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29굴은 7~9세기경의 힌두교 사원으로 풍부한 장식 조형과 신상으로 꾸며져 있으며, 힌두교 조각 예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30~34굴은 9~12세기의 자이나교 사원으로, 그 조각과 내부 장식은 힌두교 사원에 비해 약간 단조롭다.

 

 

불교와 힌두교 자이나교의 모습이 공존하는 엘로라석굴 모습.

 

오랑가바드지역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인 마우리아왕조의 제3대 왕이었던 아쇼카대왕 때로, 불교포교에 힘입었을 것으로 본다. 아쇼카왕이 통치했던 인도는 이미 로마나 중국 등지와 광범위한 교역을 하고 있었고 스님들은 전 국토를 여행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엘로라석굴은 부처님께서 활동하셨던 북동부 인도에서 아득히 먼 곳에 있다. 불교석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상에 머무셨던 때로부터 약 900년 뒤에 형성된 것이다. 스님들은 처음에 천연 바위굴에 수행처를 삼았다. 그러다가 점차 인공적으로 석굴사원을 만들어 수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엘로라석굴은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가 시기만 다를 뿐 한 장소에서 공존하고 있는 독특한 석굴사원이다. 통상적으로 보면 나중에 온 사람들은 이전에 조성된 사원을 자신들의 종교 사원으로 탈바꿈시키거나 파괴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다행히 엘로라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불교와 힌두교, 자이나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힌두교 신들은 불교를 다른 이름으로 받아들였고, 불교 역시 힌두교 신들을 받아들였다. 예를 들면 부처님은 힌두교에서 비슈누 신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받아들여졌다. 자이나교는 원래 불교와 힌두교의 융화를 통해 성립된 종교로, 두 종교의 사원이 이전부터 조성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모조리 파괴할 만큼 적대감을 갖지는 않았다. 교리와 추구하는 바가 달랐지만 이처럼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알았기 때문에 엘로라석굴은 세 종교 사원이 서로 공존할 수 있었다.

 

엘로라 사원에서 북동쪽 약 80km에 있는 석굴사원이 아잔타석굴이다. 이 석굴사원은 1819년 수렵을 위해 온 영국 군인에 의해서 우연하게 발견됐다. 데칸고원의 숲을 지나며 흐르는 아고라 강의 침식에 의해서 크게 굽어진 남쪽 벽에 미완굴까지 포함해서 크고 작은 30개의 석굴이 있다.

 

이 석굴사원도 엘로라석굴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조성되기 시작해 2세기 경에 중단되었다가 다시 5세기말부터 조성하기 시작해 대략 6세기까지 지속된 것으로 본다. 8세기에 들어 불교가 쇠퇴함에 따라 1000여년간 방치돼 있다가 우연히 발견됐다.

 

석굴은 하류의 동쪽부터 순차적으로 번호가 붙어있는데 제9, 10, 19, 26, 29의 다섯 개 석굴이 사리탑이나 불상을 모신 사원이다. 나머지는 수행자가 머물렀던 승원(僧院)형태의 석굴이다. 목조건축의 영향을 강하게 남긴 중후한 제10굴이 가장 오래됐다.

 

승원인 제8, 12, 13, 15A 굴도 같은 무렵의 것이며 기원 전후의 제1기굴은 구조도 간소하며 조각에 의한 장식도 거의 없다. 9, 10굴의 조각이나 벽화의 불상은 제2기에 부가된 것으로 5세기 말기부터 7세기에 조성돼 석굴의 구조가 정비되고 조각이나 벽화에 의해서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그 후 제16, 17 두 굴에는 5세기 말 바카타카 왕조의 하리세이나왕의 치적이 그 신하들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비문이 있다. 바카타카 왕조는 4~5세기에 인도 고전문화의 황금기를 구축한 굽타 왕조와 인척관계를 맺은 점도 있어서 제2기의 조각이나 벽화에는 굽타 문화의 영향이 반영돼 있다. 이곳에 조성된 형상에서는 각 승원굴의 본존인 불좌상과 제19, 26굴의 내외에 새겨진 불상, 19굴 외벽의 용왕부처, 16굴 광간천장 다리의 남녀의 비천이나 역사, 26굴 측벽의 장대한 열반이나 강마성도(降魔成道)’의 설화도 그려져 있다.

 

# 불교회화 최고작품 가득한 아잔타

 

아잔타석굴 제26굴의 모습으로 다양한 불·보살의 형상은 순례객들에게 환희심을 불러 일으킨다.

 

벽화의 약 절반은 석굴에 그려져 있다. 9, 10굴 측벽의 벽화는 기원 전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불교회화 최고의 작품이다. 훼손과 낙서가 심하고 숯으로 검게 되어서 확실히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그렇지만 수천년전 조성된 불·보살의 모습은 순례객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지난해 <인도성지순례>를 출간한 송강스님은 아잔타 석굴을 둘러본 뒤 아아! 이 불화를 조성한 이는 얼마나 깊은 신심이었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보살상을 조성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아니다. 이는 누가 조성한 것이 아니라 순례자를 위해 보살께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놓은 것이리라. 어쨌거나 나는 나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몇 번이나 다시 보았는지 모른다고 순례소감을 밝히고 있다.

 

아잔타석굴 전경.

 

대승투어 노우진 차장은 엘로라와 아잔타 석굴은 인도성지순례자들에게 필수코스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제자들이 오랜 기간동안 조성한 종교색 진한 불·보살상을 친견할 수 있는 성지라고 말했다.

 

[불교신문3049/201410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