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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연방/사찰순례

이장희의 산사 스케치 여행 / 속리산 법주사

by 연송 김환수 2014. 5. 10.

봄꽃 내림은 훗날 미륵불의 출현을 떠올려 주듯 찬란

 

이장희의 산사 스케치 여행 28속리산 법주사

데스크승인 2014.05.04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긴 겨울의 움츠림을 벗어난 연둣빛 신록의 산길은 더 없이 사랑스럽다. 이즈음 절집을 찾게 되면 초파일을 준비하는 관등의 행렬에서부터 마음이 환해져 오는 걸 느낀다. 미래는 과거의 전조(前兆)가 있기 마련이다. 산길에 어우러진 봄꽃의 향연은 그야말로 한여름 짙은 녹음을 예고하는 것만 같다.

 

법주사를 찾은 날은 흐린 하늘빛이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 끄무레했지만, 지상에 펼쳐진 관등과 봄꽃들은 그런 하늘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앞 다투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예의 유명한 오리(2km)숲길을 지나 경내에 다다르자 담 너머 미륵대불이 올려다 보이는 금강문 앞에 섰다.

 

법주사가 있는 충북 보은의 옆 동네가 시골인 내게 이 사찰은 어릴 적부터 가끔씩 방문했던 곳이다. 많은 기억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거대한 미륵대불은 깊은 인상을 주었는지 지금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어 보인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꾸준히 변해 왔기 때문이다.

 

머리에 썼던 네모난 갓이 사라진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인 모양이나 크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색깔은 여러 번 바뀌었다. 처음 시멘트의 빛깔에서 청동으로 바뀌었고 다시 개금불사를 거쳐 지금의 황금빛까지, 옛 건물들은 그대로였지만, 미륵불만큼은 몇 번의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553년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되었다는 법주사는 776년 혜공왕 때 이르러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며 금산사와 함께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으로써 대찰 규모를 갖추었다고 전해진다. 그때 세운 금신미륵장륙상은 정유재란의 화를 피하지 못하고 소실되었고, 인조 때 다시 금동미륵삼존상을 만들었으나 흥선대원군 집정 당시 경복궁 중수를 위해 징발되어 사라져 안타깝다.

 

그 후 일제강점기 때 조각가 김복진에 의해 시멘트로 지금 같은 규모의 미륵대불 공사를 시작했는데 작가의 요절로 마무리를 짓지 못하던 것을 1960년대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시멘트 노후로 인한 안전상의 문제로 1990년에는 청동으로 바뀌었고, 2002년에는 금칠이 더해진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입멸하고 567000만년 뒤 다시 미륵불이 현생할 그날까지 이 미륵대불은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될까.

 

그래도 역시 법주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경내 한가운데를 수백 년간 지켜 온 팔상전이다. 5층 목탑으로는 국낸 유일의 이 건물은 미륵대불의 거대함에도 결코 주눅 들거나 움츠럼 없이 굳건한 깊이감으로 법주사를 법주사스럽게 만들고 있는 주인공이다.

 

또한 이를 중심으로 사방에 자리 잡은 근사한 문화재들은 전문가가 아닐지라도 찬찬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준다. 일부 문화재는 보호각에 들어가 있어 전체적인 가람 배치에서 차지했을 풍경의 맛은 다소 잃어버린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잘 보존되어 온 걸작들에 한껏 마음이 풍성해지니 더 바랄 것이 있을까.

 

나는 오랜만에 들른 법주사의 경내를 천천히 돌아보며 봄빛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들었다. 하늘에선 가냘프게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고, 드문 순례객의 발길에 경내에는 정적마저 느껴졌다. 문득 꽃나무 아래 서서 바람에 날리는 꽃들을 보니 꽃비가 떠올랐다.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설법을 할 때 하늘에서는 천 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만다라를 비롯해 여러 꽃들이 부처님 좌상과 대중 앞에 비 오듯 내렸다고 한다.

 

과거의 일은 먼 미래를 준비하는 근거가 되듯 봄의 법주사 경내의 봄꽃 내림은 훗날 미륵불의 출현을 떠올려 주듯 찬란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그 우화(雨花)를 상상하며, 몇 번째인지도 모를 법주사 경내를 다시금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그림

 

상상속의 우화(雨花)를 맞이하며 미륵대불과 팔상전 앞에 섰다. 우뚝 솟은 팔상전도 미륵대불도 속리산 품에 요원하다. 원래 신앙의 대상이었던 탑은 불상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가장 중요한 경배의 대상이었다. 인도에서 사리를 안치했던 탑은 원형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본래 인도 전통의 화장문화를 불교가 수용한 것이라고 한다. 후에 중국을 거쳐 건축문화와 융합되어 기와지붕을 가진 목탑으로 발전하여 우리나라에 건너왔다. 중국에서의 목탑은 좋은 흙을 바탕으로 벽돌을 만들어 쌓아올린 전탑으로 변해갔지만,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벽돌을 위한 황토보다는 화강암이 많았기에 석탑이 발전한 계기가 된다. 팔상전은 목탑 형식을 간직한 보기 드문 탑인 것이다. 

그림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조각된 사천왕 석등이 대웅보전 앞을 지키고 있다. 보호각을 뒤집어쓰지 않아 대웅보전이나 팔상전에 겹쳐진 그림근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팔상전은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눈 팔상도를 모셨다고 해서 붙여졌다. 그런데 편액에는 (여덟 팔)’자가 아닌 (깨뜨릴 팔)’자를 쓰고 있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같은 글자로 획을 많게 쓰는 갖은자방식(‘대신 을 쓰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썼기 때문이다. 그 뒤로 보이는 대웅보전은 화엄사 각황전과 무량사 극락전, 마곡사 대웅전과 함께 얼마 남아 있지 않은 2층 불전이다. 정면7칸 측면 4칸의 결코 작지 않은 건물인데 팔상전의 위세에 오히려 그리 커 보이지 않는 느낌이다.

 

그림

 

법주사 쌍사자석등. 작은 사자 두 마리가 석등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앙증맞다. 갈기와 다리근육까지 섬세하게 표현해 놓았는데, 짧은 듯 보이는 팔로 석등을 받치고 가슴을 맞댄 모습이 너무 진지하고 열심이어서 자꾸만 보게 된다. 유심히 관찰해 보면 마치 두 인왕상처럼 하나는 입을 열고 하나는 다물고 있다.

 

그림

 

석련지. 연꽃을 띄워 놓는 커다란 그릇으로 사잇돌에 구름을 새겨 천상의 연못이 되었다. 상부의 화려한 난간도 멋있는데 현재 일부만 남아 있는 것을 그림 속에서나마 모두 그려 넣어 보았다.

 

 

그림

 

마애여래의좌상. 법주사 한켠에 모여 있는 커다란 바위 중 하나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된 미륵불. 연꽃 위에 걸터앉은 특이한 모습으로 유난히 잘록한 허리가 인상 깊은데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 생생하다.

 

[불교신문3007(봉축특집호)/20145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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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법주사 미륵청동대불

 

 1996. 8월 법주사 청동대불 모습

속리산 법주사 미륵청동대불 (2000년이후 금 80kg입혀 미륵금동대불임)

 

국보도, 보물도 아니지만 천년불교의 역사를 대변하며, 중생들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미륵부처님으로 33m 높이의 미륵불은 진표율사가 청동으로 주조했다고 합니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공사를 진행하면서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했습니다. 당백전을 찍기 위해 청동이 필요했던 흥선대원군은 천년문화유산을 훼손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1939년 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자로 불린 김복진 선생이 독립의 염원을 담아 시멘트로 대불을 조성하기 시작했지만 대작불사는 6.25사변으로 인해 중단됐다가 1963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조선 순종의 비 이방자 여사의 시주로 완공을 봤습니다.

 

하지만 시멘트는 부재의 성격상 100년을 넘지 못하고 1987년 시멘트 미륵대불을 그대로 본떠 청동대불을 조성했습니다. 쓰인 청동만 116톤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문화재 전문가와 서울대 비철금속 연구진이 함께 참여해 이뤄낸 성과였습니다.

 

그리고 2000년 들어 불상에 금박을 입히는 개금불사를 시작하였고 순금 80kg이 소요된 이 불사가 17개월만에 완공되면서 비로소 미륵금동대불의 원형이 완성된 것입니다.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옆에 위치한 미륵금동대불 현재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