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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허씨(許氏)의 유래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허씨(許氏)의 유래

허씨(許氏)는 연원을 멀리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비(金首露王妃) 허황옥(許黃玉)에 두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허황후(許皇后)는 원래 인도(印度)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16세 때 배를 타고 지금의 경남 창원시 웅동면 용원리(龍院里)에 있는 부인당(夫人唐)으로 들어와 정박(碇泊)했는데, 김수로왕(金首露王)이 의장(儀仗)을 갖추어 영접한 후 왕비로 맞이했다고 한다.

▲ 김수로왕과 허황옥에 얽힌 얘기가 기록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가락국기(駕洛國記).

그 후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하루는 허황후(許皇后)가 김수로왕(金首露王)에게 말하기를, “첩(妾)은 동토(東土)의 객(客)이니 사후(死後)에 오성(吾姓)을 전하지 못함이 한이 되옵니다” 하니 왕이 감동하여 맏아들 거등(居登)은 김씨로 왕통(王統)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왕비(許王妃)의 뜻을 살려 허씨(許氏)로 사성(賜姓)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佛家)에 귀의(歸依)하여 ‘하동칠불(河東七佛)’로 성불(成佛)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허황후(許皇后)의 30세손인 선문(宣文)은 공암(孔巖ㆍ양천), 사문(士文)의 후손은 태인(泰仁), 33세손 강안(康安)의 후손은 하양(河陽), 35세손 염(琰)의 후손은 김해(金海)로 분관(分貫)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그러니까 김해 김씨는 부성(父姓), 허씨는 모성(母姓)을 각각 계승했다고 하여, 오늘날에도 두 성씨는 상혼(相婚)을 피하고 있다.

▲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자리한 수로왕비릉(사적 제74호).

이러한 허씨(許氏)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 등의 문헌에 71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양천(陽川)ㆍ하양(河陽)ㆍ김해(金海)ㆍ태인(泰仁)ㆍ함창(咸昌)ㆍ수원(水原)ㆍ양주(楊州ㆍ양산) 외에는 모두가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이며, 그중에서도 현존하는 본관(本貫)은 양천(陽川)ㆍ하양(河陽)ㆍ김해(金海)ㆍ태인(泰仁) 4본인 것으로 알려졌다.?

▲ 김해시 해은사 대왕각과 대왕각 내에 보관 중이던 김수왕로왕과 허황후의 영정. 그러나 영정은 2000년 9월 도난당했다.

허씨(許氏)는 김해 허씨(金海許氏)가 50%로 가장 많고, 양천 허씨(陽川氏許)가 40%, 하양 허씨(河陽許氏)와 태인 허씨(泰仁許氏)가 나머지를 차지한다. 허씨(許氏)는 결코 많지 않은 인구지만 조선조에서 정승 6명을 비롯, 고려와 조선 양조(兩朝)에 걸쳐 숱한 인물을 배출해 명문의 지위를 누렸다.

특히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조선조에 정승 5명을 낳았으며, 한 시대를 주름잡기도 했다.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분파(分派)는 크게 동주사공파(東州使公派)ㆍ판도좌랑공파(版圖佐郞公派)ㆍ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의 3파로 나누어지고, 각 분파(分派)가 다시 몇 개로 세분된다.

김해 허씨(金海許氏)는 고려조에 홍재(洪材ㆍ平章事)ㆍ유전(有全ㆍ政丞)ㆍ옹(邕ㆍ典理判書)ㆍ기(許麒ㆍ五隱 중 한 사람)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나,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킨 탓으로 조선조에선 크게 번영하지는 못했다. 대현(大賢)의 후손으로 된 상서공파(尙書公派), 인전(仁全)의 후손인 가락군파(駕洛君派) 등 9개 파로 나누고 있다.

하양 허씨(河陽許氏)는 세종조에 좌의정을 지낸 조(稠)와 아들 후(?ㆍ좌찬성), 손자 조(?)의 3대(代)가 모두 사육신(四六臣)과 깊은 관계를 맺어 충절의 집안으로 꼽힌다. 분파(分派)는 공간공파(恭簡公派), 정간공파(貞簡公派) 등 몇 개 파로 나눈다.

태인 허씨(泰仁許氏)의 분파(分派)는 지평공파(持平公派)ㆍ생원공파(生員公派)ㆍ직장공파(直長公派)ㆍ현감공파(縣監公派)ㆍ사평공파(司評公派)의 5개 파로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