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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성주 도씨(星州都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성주 도씨(星州都氏)의 연원

도씨(都氏)는 ‘경술보(庚戌譜)’ 수성시조(受姓始祖)편에 보면, 시조가 도계(都稽)라 하였는데, 그는 중국 여양(黎陽ㆍ지금의 직예성 대명도) 출신으로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여가(呂嘉)의 반란을 평정하여 임채후(臨蔡候)에 봉해지고, 도씨(都氏)로 수성(受姓)됨으로써 이때부터 도씨(都氏)가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동사열전(東史列傳)’, ‘동국통감(東國通鑑)’,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 문헌에는 도순(都順) 이전 인물로 도도(都刀)ㆍ도두(都頭)ㆍ도공(都功)ㆍ도비(都非)ㆍ도눌최(都訥催)ㆍ도유(都儒)ㆍ도조(都祖)ㆍ도미(都彌)ㆍ도진(都陳) 등이 등장한다. 이중 도조(都祖)는 성제(成帝ㆍ중국 전한 제11대 황제) 때 고구려(高句麗)에 건너와서 동명왕(東明王)의 맏아들 유리(琉璃)가 이복동생인 비류(沸流)ㆍ온조(溫祚)와 왕권쟁탈을 벌일 때 크게 활약하여 유리(琉璃)를 왕위(王位)에 오르게 한 공신이라고 한다.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정절사 옆에 자리한 상세조(上世祖) 도미(都彌)의 묘.

그러나 ‘전고대방(典故大方)’과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 여러 문헌에는 도씨(都氏)의 시조(始祖)가 도미(都彌)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그에 대한 야화(野話)가 전해진다.

도미(都彌)는 본래 백제(百濟) 사람으로 용모가 아름답고 정결(貞潔)하기로 소문난 아내와 함께 살았다. 마침 개루왕(蓋婁王)이 그 소문을 듣고 그의 아내를 유혹하려 하다 실패하자, 도미의 두 눈을 빼고 작은 배에 태워 한강에 띄워버렸다. 그러나 도미(都彌)의 아내는 잠자리를 강요하는 왕을 속인 뒤 남편을 뒤쫓아가 하류의 천성도(泉城島)에서 해후, 고구려에서 나물과 풀뿌리를 캐먹으며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현재 도미(都彌)의 무덤은 누구든 8월 초하룻날 제일 먼저 벌초를 하면 득남한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 매년 4월 5일 전국 일족이 모여 1세 도순(都順), 3세 도유도(都有道)ㆍ도유덕(都有德)을 제향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면 서재리 치경당(致敬堂).

일찌기 성주 고을에서 학문과 도덕의 가문으로 알려져 온 도씨(都氏)는 고려 창업에 공훈을 세웠던 도진(都陳)이 정승(政承)의 벼슬에 올라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ㆍ일명 漆谷府院君)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성주목(星州牧) 팔거(지금의 칠곡<漆谷>)에 세거(世居)하여 후손들이 성주를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상계가 정확하지 않아 성주도씨족보(星州都氏族譜)에 의하면 중시조 도순(都順) 이상의 세대(世代)는 오랜 일이어서 정확하게 밝힐 수 없어 고려 원종(元宗)때 전리상서(典理商書)를 지낸 도순(都順)으로부터 기세(起世)한다고 하였다.

도씨(都氏)의 본관(本貫)은 문헌에 성주(星州)를 비롯하여 팔거(八?ㆍ칠곡 속현)ㆍ파주(坡州)ㆍ사정(奢井ㆍ수원 지방)ㆍ청주(淸州)ㆍ전주(全州)ㆍ경주(慶州)ㆍ상주(尙州)ㆍ밀양(密陽) 등 16본(本)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오늘날에는 성주 도씨(星州都氏) 단본(單本)으로 알려졌으며, 대구파(大邱派)ㆍ평양파(平壤派)ㆍ성주파(星州派)ㆍ단삼파(丹三派)ㆍ노포파(蘆浦派)ㆍ연노파(連魯派)ㆍ용안파(龍安派)ㆍ고흥파(高興派) 등 크게 전국 8지역으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 경북 포항시 송라면 지경리 다라산(多羅山)에 자리한 2세조 도충박(都忠朴)의 묘.

고려조에서 도씨(都氏)의 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기세조(起世祖) 도순(都順)의 아들 충박(忠朴)은 고려 원종 때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지냈다. 3세 유도(有道)ㆍ유덕(有德) 형제도 공조전서(工曹典書)와 명경진사(明經進士)에 각각 올랐으며, 뒤를 이어 4세 효원(孝源)이 전객령(典客令), 효신(孝臣)이 판서(判書), 효안(孝安)이 동양창판관(東陽倉判官) 등을 지냈다.



특히 순(順)의 현손(玄孫)인 홍정(洪正)은 고려 말에 도씨(都氏)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동양창 판관(東陽倉判官)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고 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에 봉해진 효안(孝安)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여, 공민왕(恭愍王) 때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보국 문하시중(三重大匡輔國門下侍中)에 오르고 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 청송당(靑松堂) 도응(都膺)의 ‘청송당도선생실기’와 운봉대첩 8원수의 한 분인 아버지 도길부(都吉敷)의 신도비.

홍정(洪正)의 아들 길부(吉敷ㆍ?~1388)는 우왕 6년(1380년) 왜구(倭寇)가 경산부(京山府)를 침입하였을 때, 양광ㆍ전라ㆍ경상도 순찰사(楊廣全羅慶尙道巡察使) 이성계(李成桂)의 지휘를 받아 이들을 크게 격파해 대광보국숭록대부로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에 오르고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382년 한양천도(漢陽遷都) 때는 이인임(李仁任)ㆍ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 등과 왕의 호종(扈從)임무를 맡았는데, 이르는 곳곳마다 갖은 민폐를 끼쳐 민원(民怨)을 사기도 하였다. 그 후로도 대언(代言)을 거쳐 제조정방(提調政房)이 되었는데, 방자하게 굴다가 우왕 10년(1384년)에는 왕이 총애하는 여인 봉가이(鳳加伊)와 정을 통했다는 참소를 받고 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로 좌천되었다. 인척인 이인임의 비호 아래 다시 찬성사(贊成事ㆍ정2품)로 승진하였는데, 결국은 1388년 이인임ㆍ임견미(林堅味) 일당이 숙청될 때 함께 처형당하고 가산까지도 몰수되었다. 이 참변을 문중(門中)의 기록에 따라서는 기사화변(己巳禍變)으로 기록하는 문서도 있으나 무진화변(戊辰禍變)이라야 맞다.

 

▲ 1393년 태조가 청송당(靑松堂) 도응(都膺)에게 내린 왕지(王旨)와 녹패(祿牌).

▲ 1387년 추석 날 대구 동화사에서 청송당(靑松堂) 도응(都膺)이 비롯한 12현사 벗들과 왕건 태조의 친필 백원첩(白猿帖)을 보고 지은 연구(聯句).

 

한편 길부(吉敷)의 아들 응(膺)은 초명은 유(兪), 자는 자예(子藝), 호는 청송당(靑松堂)으로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를 지냈으며, 이성계(李成桂)와 가까운 사이였다. 기사화변(己巳禍變) 때 장인 우인열(禹仁烈)의 덕으로 화를 면하였고, 아버지가 화를 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홍주의 노은동(魯隱洞)에 은거하였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창업하고 왕위에 오른 후 옛 정을 못잊어 상장군(上將軍)에 임명한 후 두 번이나 예물을 보내 벼슬에 나설 것을 권유했으나 모두 돌려보냈으며, 그 뒤에도 다섯 차례나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지켰다. 이에 감복한 이성계(李成桂)는 ‘청송당(靑松堂)’이라는 호와 송절시(頌節詩)를 내려 그의 절의를 기렸다고 한다. 이때의 왕지(王旨) 4점과 녹패(祿牌) 1점이 보물 제724호로 지정돼 충남 연산(連山)의 보호각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두문동(杜門洞)72현(賢)의 한 분으로, 묘는1400년 전후에 설묘(設墓)한 것으로 추정하며 무학대사의 소점(所點)이라 구전(口傳)한다.

▲ 충남 예산군 응봉면 지석리에 자리한 청송당(靑松堂) 도응(都膺)의 묘(충남지정문화재 제90호).

봉차령(奉車令) 천우(千遇)의 아들 흥(興)은 공민왕(恭愍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전라도 도순문사(全羅道巡問使)가 되었으나, 왜구(倭寇)의 침입을 잘 막아 내지 못한 책임으로 한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왜구 방어에 큰 공을 세웠다. 벼슬은 상원수(上元帥)에 올랐고, 공양왕 4년(1392년) 정몽주(鄭夢周)가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李芳遠)에게 피살되자 그의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 경북 성주군 벽진면 봉학리 하작소(下作所)에 위치한 여말(麗末)에 입향조(入鄕祖) 7세 횡계(橫溪) 도윤길(都允吉)의 묘.

조선 초기에 도씨(都氏) 사람들은 여말(麗末)의 시련 때문에 출사(出仕)를 꺼려 세조 때 하(夏)가 문과에 장원 급제, 정언(正言)ㆍ교리(校理)ㆍ부사(府使)를 지냈을 뿐이다. 중ㆍ후기에 이르러서는 15명의 문과 급제자와 무과 등제자들을 배출하였다. 특히 성유(聖兪)ㆍ여유(汝兪)ㆍ응유(應兪)ㆍ경유(慶兪)ㆍ신수(愼修)ㆍ신징(愼徵)ㆍ형(衡)ㆍ균(勻) 등 이름난 학자가 많다.

▲ 행정(杏亭) 도형(都衡)의 효행을 기려 1818년 세웠으나 1946년 경북 성주군 월항면 용각1리로 이건한 효자정려와 경북 성주군 벽진면 운정리(라복실)에 자리한 도형(都衡)의 묘 및 신도비.

형(衡ㆍ1480~1548)은 자는 국전(國銓), 호는 행정(杏亭), 양진당(養眞堂) 맹녕(孟寧)의 아들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스승 김굉필(金宏弼)이 순천(順天)에 유배되고,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효수되었다는 흉보를 듣고 자손들에게 달려가 애도하였다.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합격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고, 호조좌랑(戶曹佐郞)을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전임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종 14년(1519년) 11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12월에는 조광조가 사사(賜死)되고 현량과로 관직에 오른 모든 관리들이 음해를 당하였다. 1545년에 인종이 등극하면서 특명으로 현량과가 복과(復科)되었으나 명종(明宗) 초에 권간(權奸)들이 또 폐지를 청하였으며, 이에 물러나 은거(隱居)하였다. 순조(純祖) 때 효자명정(孝子命旌)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 경북 성주군 벽진면 운정동에 자리한 행정(杏亭)도형(都衡)의 아우 운재(雲齋) 도균(都勻)의 묘.

형(衡)의 동생 균(勻ㆍ1483~1549)은 자는 사전(士銓), 호는 운재(雲齋), 17세 때 아버지의 명으로 형인 형(衡)과 함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찾아가 배알하였는데, 그의 재질과 기국(器局)이 탁월함을 보고 소학(小學) 한 권을 주면서 말하기를 “동자(童子)의 학문은 마땅히 이 책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여러 현인(賢人)들이 귀양가고 배척되는 것을 보고 옳은 뜻을 펼 수 없는 시대임을 느껴 과거를 포기하고 임천(林泉)의 초야에 묻혀 살면서 시를 지어 그 뜻을 나타냈다.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기에 사후 조봉대부(朝奉大夫童蒙敎官)을 추서받고, 성향(星鄕)의 창학지종(倡學之宗)으로 숭상(崇尙)되어 운천서원(雲川書院)에 배향되었다.

▲ 경북 청도군 각북면 율정리에 자리한 취애(翠崖) 도응유(都應兪)의 묘.

응유(應兪ㆍ1574~1639)는 자는 해보(諧甫), 호는 취애(翠崖)로 아버지는 원량(元亮)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선조(宣祖)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광해군 3년(1611년)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등을 배척하자 그 부당성을 지적했고, 박이립(朴而立)이 정구(鄭逑)를 모함하자 항소(抗疏)하여 스승의 억울함을 씻었다.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의병장(義兵將)이 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정경세(鄭經世)에 의해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활약했다. 저서로 ‘오현예설(五賢禮說)’이 있으며, 대구(大邱)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되었다.

▲ 도응유(都應兪)와 도경유(都慶兪) 형제를 향사해 오다 1864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을 1925년 후손들에 의해 중건된 성주도문(星州都門)에는 유일한 서원인 병암서원(屛巖書院).

경유(慶兪ㆍ?~1636)는 자는 내보(來甫), 호는 낙음(洛陰)으로 원량(元亮)의 3자이다. 인조 2년(162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호남(湖南)으로 세자를 호종(扈從)하고 난이 끝난 뒤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ㆍ평양서윤(平壤庶尹)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심연(沈演)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참여했으나, 쌍령(雙嶺)싸움에서 우영(右營)의 화약고가 폭발하여 패배한데 대한 문책으로 유배 도중에 죽었다. 그 후 화약고의 폭발은 그에게 처형당한 비장(裨將) 박충겸(朴忠謙)의 아들이 원한으로 저지른 소행임이 밝혀져 1640년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저서에 ‘낙음집(洛陰集)’이 있다.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에 자리한 낙음(洛陰) 도경유(都慶兪)의 묘.

성유(聖兪)는 자는 정언(廷彦), 호는 양직(養直)으로 한강(寒岡) 정구(鄭述)와 악재(樂齋) 서사원(徐思遠)에게 사사하여 문장과 행실이 당대에 출중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서사원(徐思遠)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군량을 조달하였으며, 광해군 때 정인홍(鄭仁弘)이 어전(御前)에서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무고하자 결연히 그들의 무죄를 변호하였다.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소모장(召募將)으로 활약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의 항복 소식을 듣고 비분하여 두문불출하다가 죽었다. 저서로 ‘성리정학집(性理正學集)’ 등이 있으며, 대구(大邱) 용호서원(龍湖書院)에 배향되었다.

▲ 경북 칠곡군 지천면 오곡리(오실)에 자리한 양직(養直) 도성유(都聖兪)의 묘.

여유(汝兪)는 호가 서재(鋤齋)로 이괄(李适) 난(亂) 때 의병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이 컸고, 병자호란(丙子胡亂) 후에는 은거하여 후진 양성을 낙으로 삼았다. 달성10현으로 추앙되었고, 그의 호를 따서 마을 이름을 서재(鋤齋)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그의 아들 신수(愼修)ㆍ신여(愼與)ㆍ신행(愼行)ㆍ신징(愼徵) 형제는 아버지와 함께 5부자가 당대의 성리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여유(汝兪)의 맏아들 신수(愼修ㆍ1598~1650)는 자는 영숙(永叔), 호는 지암(止巖), 정구(鄭逑)ㆍ서사원(徐思遠)의 문인이다. 인조 4년(1626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함흥부사(咸興府使)로 부임했을 때 억울하게 투옥된 백성을 모두 방면하자 밝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를 내렸고, 세인들은 이를 ‘설원우(雪寃雨)’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했으며, 대구(大邱) 용호서원(龍湖書院)에 배향되었다.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용호서원(龍湖書院)은 지암(止巖) 도신수(都愼修), 양직(養直) 도성유(都聖兪), 서재(鋤齋) 도여유(都汝兪)를 제향하기 위해 1704년 건립된 세덕사(世德祠)가 1708년 용호서원(龍湖書院)으로 폐격(陛格)된 것으로 1868년 훼철되어 용호서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둘째 신여(愼與)는 인조 11년(1633)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효종 2년(1651년)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창락찰방(昌樂察訪)ㆍ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ㆍ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ㆍ예조좌랑(禮曺佐郞)ㆍ용담현령(龍潭縣令)ㆍ예조정랑(禮曺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효종 7년(1656) 용담현령으로 부임하여 봉급 일부를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며, 1659년 예조정랑으로서 자의대비(慈懿大妃) 기년복(朞年服)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사직하였다. 이듬해 다시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임명되어 명경과(明經科)를 공정하게 주관하여 선비들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이 때 기년설을 반대한 소를 올렸다가 황간(黃澗)으로 유배되었다가 1675년 숙종이 즉위하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지냈으나 재임중에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한 사람의 동량을 잃었다고 아쉬워하며 영이(요즘의 영구차)까지 내렸다고 한다.



넷째 신징(愼徵ㆍ1604~1678)은 자는 휴숙(休叔), 호는 죽헌(竹軒)으로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했고 특히 예제(禮制)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현종 15년(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을 복상(服喪)에 대해 논쟁이 일어났다. 이때 대공설(大功說)로 예론(禮諭)이 기울자, 상소하여 이에 반대하고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끝내 이를 따르게 하고 당시의 예관(禮官)으로서 대공제(大功制)를 주장하던 영의정 김수흥(金壽興)ㆍ송시열(宋時烈) 등 서인(西人) 일파를 몰아냈다. 후에 남인(南人)의 천거로 숙종 1년(1675년) 강릉참봉(康陵參奉)에 이어 주부(主簿)를 거쳐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 나가 치적(治績)을 올려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다.

▲ 경북 영천군 청통면 애련리 애련산(愛蓮山)에 자리한 죽고(竹皐) 도석훈(都錫壎)의 묘와 장원급제 교지(敎旨).


이밖에 인엽(寅燁ㆍ1769~?), 석훈(錫壎), 진삼(鎭三ㆍ1863~?) 등의 학자들이 있다. 석훈(錫壎ㆍ1812~?)은 자는 화응(和應) 호는 금파(錦坡)로 고종(高宗) 6년(1869) 문과(文科) 갑과(甲科)에 장원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ㆍ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ㆍ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ㆍ어모장군(禦侮將軍) 등을 역임하다 고종(高宗) 10년(1873년)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해 학문과 예설(禮說)을 논(論)하고 덕행(德行)으로 풍화(風化)에 공헌하였다.

▲ 임진왜란을 맞아 두 아들 판관 도흥국(都興國)과 참의 도우국(都佑國) 및 아우 도맹호(都孟浩)와 더불어 경주서 창의한 임란공신 도맹교(都孟郊)의 묘.

국난을 맞아 활약한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백목원(白木員) 싸움의 현종(現宗)ㆍ흥종(興宗) 형제, 기계(杞溪)ㆍ안강(安康) 싸움에 큰 공을 세운 맹교(孟郊)ㆍ맹호(孟浩) 형제,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전공을 세운 우(遇),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도원사(都元師) 권율(權慄)을 좇아 행주산성(幸州山城)싸움에서 연신 돌격하여 왜적(倭賊) 30여 급을 참(斬)하여 권율(權慄)이 이를 크게 기리고 상(賞)을 주었던바 이 사실이 호남창의록(湖南倡義錄)에 실려 있는 판관(判官) 맹삼(孟三) 등이 있다.

▲ 전남 고흥군 동강면 탄포리(춘곡)에 자리한 15세 도맹삼(都孟三)의 묘

일제시대에는 지하활동을 하다 해방 직전에 체포되자 왜관(倭館) 낙동강(洛東江) 철교에서 투신해 순국한 병철(炳喆ㆍ1903~1945), 이상재(李商在) 등과 연계하여 조선교육협회를 조직했던 진기(鎭基), 성주(星州)에서 3ㆍ1운동을 주도한 무환(武煥) 등이 독립운동으로 가문(家門)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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