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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정)

해주 정씨(海州鄭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해주 정씨(海州鄭氏)의 연원

해주 정씨(海州鄭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신종(神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법정랑(典法正郞)ㆍ시중평장사(侍中平章事)를 지낸 정숙(鄭肅)으로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정확히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 다만 그의 조상이 해주(海州) 수양산(首陽山) 밑에서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하던 사족(士族)으로 고려(高麗) 때에 정(鄭)씨로 사성(賜姓) 받았다고 전하며, 시조 이후 고려조에 관직을 지내면서 혈통을 이어 왔으나 계보의 실전(失傳)으로 3~4 계대(繼代)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고려 후기에 그 후손인 소부소윤(小府少尹)을 지낸 언(?)과 관(琯) 두 분 중에서 관(琯)은 후손이 없고 언(?)을 1세로 하여 2세에 윤규(允珪·貞度公派)ㆍ윤경(允卿·政堂文學公派)ㆍ윤진(允珍·判書公派)의 세 분파(分派)와 시조와의 계(系)를 명확히 밝힐 수 없는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3세 초(初ㆍ礎)의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를 더하여 4개 분파로 이어오다가 1985년 대동보(大同譜)를 발행하면서 문중 공론에 의해 높게는 5세 낮게는 10세에서 29개 분파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파(派)는 주로 인구수에 의해 문중합의로 정하는 것이 상례이므로 각 분파의 세(世)가 다르다.



▲ 해주 정씨 시조 정숙(鄭肅)과 1세 정언(鄭?), 2세 정윤규(鄭允珪) 단소.

정도공파(貞度公派)는 효준(孝俊)의 후손이 해풍군파(海豊君派ㆍ宗派)이고, 용(鎔)의 후손이 오정공파(梧亭公派), 감(鑑)의 후손이 삼옥공파(三玉公派), 유경(有慶)의 후손이 주부공파(主簿公派), 희랑(希良)의 후손이 허암공파(虛菴公派), 척(?)의 후손이 행촌공파(杏村公派), 문익(文益)의 후손이 용강공파(龍岡公派), 핍(?)의 후손이 승지공파(承旨公派), 희신(希信)의 후손이 우후공파(虞候公派), 희창(希昌)의 후손이 사과공파(司果公派), 희발(希發)의 후손이 망암공파(望菴公派), 희윤(希尹)의 후손이 세마공파(洗馬公派), 흥경(興慶)의 후손이 청도공파(淸道公派)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흔(?)의 후손이 집의공파(執義公派), 홍도(弘道)의 후손이 정랑공파(正郞公派), 변(?)의 후손이 생원공파(生員公派), 계경(繼慶)의 후손이 참봉공파(參奉公派), 기도(纘慶)의 후손이 언양공파(彦陽公派), 념(恬)의 후손이 낭천공파(狼川公派)로 나누어진다.

정당문학공파(政堂文學公派)는 기(旗)의 후손이 통예공파(通禮公派), 어(於)의 후손이 생원공파(生員公派), 여(旅)의 후손이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로, 판서공파(判書公派)에서는 창령(昌齡)의 후손이 이어오고 있다. 또 한 계통인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는 붕(鵬)의 후손이 신당공파(新堂公派), 은견(銀堅)의 후손이 생원공파(生員公派), 양견(?堅)의 후손이 한벽재공파(寒碧齋公派)로 각각 나누어졌다.

해주 정씨(海州鄭氏)는 해주(海州)의 옛 지명에 따라 대령 정씨(大寧鄭氏) 또는 수양 정씨(首陽鄭氏)라고도 불리는데, ‘병진보(丙辰譜)’ㆍ‘임술보(壬戌譜)’ 등을 편찬할 때는 수양 정씨(首陽鄭氏)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최근에 시조 정숙(鄭肅)은 경주 지씨(慶州池氏) 시조 지원부(池元夫)의 사위로 밝혀졌으며, 경주 지씨 족보에는 정숙(鄭肅)의 아들로 언(?)ㆍ초(初ㆍ礎)ㆍ관(琯)이 기록되고 있다.

정순공(貞順公) 정유산(鄭惟産)이 상서좌승 우간의대부(尙書左丞右諫議大夫)에 임명됐다는 ‘고려사(高麗史)’ 제8권 세가8 문종 23년(1069년) 5월 28일 기록과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임명됐다는 세가9 문종 27년(1073년) 12월 기록.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해주목(海州牧) 인물조(人物條)에 고려조의 인물로 오른 유산(惟産ㆍ?∼1091)이 있다. 그는 과거에 올라 예부상서(禮部尙書)ㆍ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후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까지 오른 인물로 신종(神宗ㆍ1144~1204) 때의 인물인 정숙(鄭肅)의 선조에 해당되겠지만, 계대(繼代)가 고려말 시기부터 이어지고 있으므로 빠지게 된 것 같다.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오계리에 자리한 정도공(貞度公) 정역(鄭易)의 묘와 서울 서초구 서초동 법원 옆에 자리한 신도비.

언(?)의 맏아들 윤규(允珪)가 정용낭장(精勇郎將)을 지냈으며, 차남 윤경(允卿)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윤규(允珪)의 아들 역(易ㆍ?∼1425)은 자는 순지(順之), 호는 백정(栢亭)으로 조선 태종(太宗)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장인이다. 우왕 9년(1383년) 이방원(李芳遠)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친밀한 사이가 되었으며, 좌정언(左正言)ㆍ교주도 안렴부사(交州道按廉副使)ㆍ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ㆍ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 11년(1411년)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정조부사(正朝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음해 대사헌이 되었다. 태종 14년(1414년)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로 나갔다가 이듬해 예조ㆍ형조의 판서를 지내고, 1416년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었다. 세종 1년(1419년)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ㆍ좌찬성(左贊成), 다음해에 호조판서를 거쳐 대제학이 되었다. 그는 사림의 중망(重望)으로 4조(朝)를 섬기는 데 한결 같았고, 내외의 자손 수십 명에 복록을 겸비하였으나 더욱 스스로 겸손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도(貞度).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오계리에 자리한 정충경(鄭忠敬)의 설단.

역(易)의 맏아들인 충경(忠敬ㆍ?~1443)은 음직(蔭職)으로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출생연대와 성장과정 및 초기관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1438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440년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이듬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역임하고 그 이듬해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임명되어 중국에 사신을 갔다 왔다. 1443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ㆍ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재임하던 중 죽었으며,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자리한 경혜공주(敬惠公主) 묘와 경혜공주의 묘가 합장묘인지 공주 혼자의 묘인지 전해지지 않아 정조(正祖) 때 그 옆에 먀련된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단소. 작은 사진은 묘로 가는 길에 서 있는 영양위신도비.

충경(忠敬)의 아들 종(悰ㆍ?~1461)은 세종 32년(1450년) 문종(文宗)의 딸인 경혜공주(敬惠公主)와 혼인해 영양위(寧陽尉)에 봉해지고 단종(端宗) 초 형조판서(刑曹判書)로서 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으나, 단종 3년(145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제거를 도모한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친교가 있었다 하여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 이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즉위, 문종(文宗)의 유일한 사위라는 점이 참작되어 양근(楊根)에 양이(量移)되었으나 세조 2년(1456년)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수원(水原)을 거쳐 통진(通津)에 안치당했다. 뒤에 광주(光州)에 안치되었다가 1461년 중 성탄(性坦) 등과 모반을 꾀했다 하여 능지처참(陵遲處斬)되었다. 영조(英祖) 때 신원되었으며, 단종묘와 공주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헌민(獻愍).

한편 그의 부인 경혜공주(敬惠公主)는 순천관비(順天官婢)가 되었는데, 부사 여자신(呂自新)이 공주(公主)에게 관비의 일을 시키려 하자 공주(公主)는 “비록 귀양은 왔지만 나는 왕의 딸이다. 수령(守令)이 어찌 내게 관비의 일을 시키려 하느냐” 하므로 끝내 부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경혜공주(敬惠公主)가 적소(適所)에서 아들을 낳자,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친히 양육하고 세조가 미수(眉壽)라 이름하였다.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묘인 사릉(思陵) 제각 옆에 자리한 소평공(昭平公) 정미수(鄭眉壽)의 묘.

종(悰)의 아들 미수(眉壽ㆍ1456~1512)는 자는 기수(耆수), 호는 우재(愚齋)로 아버지가 사사(賜死)되자 어머니 경혜공주(敬惠公主)와 함께 서울로 소환, 세조가 길렀다. 잠저(潛邸) 때의 성종(成宗)을 시중하다가 성종 4년(1473년) 돈녕부 직장(敦寧府直長)ㆍ형조정랑(刑曹正郞)을 지냈으며, 죄인의 자손으로 임관되었다 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성종의 무마로 무사하였다. 1476년 중부참봉(中部參奉)을 거쳐 이듬해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1489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ㆍ사섬시 첨정(司贍寺僉正)ㆍ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ㆍ인천부사 등을 지냈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당상관으로 올라 장례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임명되고, 연산군 2년(1496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1498년 동부승지(同副承旨)ㆍ우승지ㆍ좌승지ㆍ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502년 공조참판ㆍ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ㆍ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내고, 1504년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으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하였다. 중종 1년(1506년) 우찬성(右贊成)이 되어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이 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으며,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 박경(朴耕)의 옥사에 연루되어 경상도 울진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시호는 소평(昭平).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사릉(思陵) 경내에 있는 해림군(海林君) 정승휴(鄭承休)의 묘.

승휴(承休ㆍ1488~1534)는 자는 계지(繼之)로 영양위(寧陽尉) 종(悰)의 손자이다. 재당숙인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미수(眉壽)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벼슬은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 등을 지냈다. 큰딸은 중종(中宗)과 후궁 희빈 홍씨(熙嬪洪氏) 사이에 태어난 금원군(錦原君) 이영(李岺)과 혼인하였다. 죽은 뒤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에 추증되고 해림군(海林君)에 봉해졌다.

 

 

▲ 한벽재(寒碧齋) 정
석견(鄭錫堅)이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발간한 죄로 관직을 박탈당한 기록이 실린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30권 연산군 4년(1498년) 7월 19일 기록과 유묵.


석견(錫堅ㆍ?~1500)은 자는 자건(子健), 호는 한벽재(寒碧齋)로 유공(由恭)의 아들이며, 사림파 학자인 붕(鵬)의 작은아버지이다. 성종 5년(147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언(正言)ㆍ지평(持平)ㆍ예안현감(禮安縣監)을 지냈다. 1483년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5년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다음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1489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승진하였으며, 이때 유자광(柳子光)이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로 임용되자 장악원 제조는 덕망이 있는 자라야 오를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이유로 체직을 요청하였다가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전직되었으며,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밀양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493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고, 연산군 1년(1495년)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ㆍ병조참지(兵曹參知)를 거쳐 다음해 대사간(大司諫), 1497년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이듬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하여 투옥당했으나 나이가 많아 파직에 그쳤다. 김종직ㆍ정여창(鄭汝昌) 등과 도의교(道義交)를 맺어 성리학을 강론하였고, 성종 때 유도인(有道人) 13인을 천거할 때 그 중의 한 사람에 들었다. 청빈하여 전도(前導)가 없이 다니니 ‘산자관원(山字官員)’이라는 별명을 듣기도 하였으며, 선산 경락사(景洛祠)에 제향되었다.

 

▲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추모하기 위해 1570년 세운 경북 구미시 선산읍 원리 금오서원(金烏書院ㆍ경북도기념물 제60호)이 소실되어 1690년 중건할 때 신당(新堂) 정붕(鄭鵬) 등을 추배하였으며,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붕(鵬ㆍ1467~1512)은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으로 현감(縣監) 철견(鐵堅)의 아들이며, 석견(錫堅)의 조카이다. 가학(家學)을 계승하였으며,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종 17년(1486년) 진사가 되고, 149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정자(正字)ㆍ지평(持平)ㆍ정언(正言)을 거쳐 연산군 10년(1504년) 교리(校理)로 있으면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다시 교리(校理)에 복직, 상경 도중 병으로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후에 정승 성희안(成希顔)의 건의에 따라 왕의 특지로 부름을 받았으나 홍경주(洪景舟) 등 간신배가 조정에 있음을 보고 낙향하자 청송부사(靑松府使)에 제수되었는데, 재임 3년만에 임지에서 죽었다. 천성이 매우 청백하여 의가 아닌 것은 행하지 않았다. 일찍이 영의정 성희안(成希顔)과 젊어서부터 친교가 있었으며, 길재(吉再)ㆍ김숙자(金叔滋)의 학통과 김굉필(金宏弼)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이황(李滉)이 일찍이 그의 학문이 깊다고 칭찬하였다. 성리학자인 박영(朴英)이 그의 문인으로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과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봉향되었다.

 ▲ (上)1900년 후손이 간행한 신당(新堂) 정붕(鄭鵬)의 실기인 ‘신당실기(新堂實記)’와 정붕의 사적과 그의 제자인 박영(朴英)의 시문 등을 수록해 1660년 간행된 ‘양현연원록(兩賢淵源錄)’. (下)정붕신도비와 유묵.

희량(希良ㆍ1469~?)은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虛庵), 철원부사 연경(延慶)의 아들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성종 23년(1492년) 생원시(生員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성종이 죽자 태학생(太學生)ㆍ재지유생(在地儒生)과 더불어 올린 소가 문제되어 해주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연산군 1년(149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1497년 대교(待敎)로 왕에게 경연(經筵)에 충실할 것과 신하들의 간언(諫言)을 받아들일 것을 상소하여 미움을 받았다. 이듬해 김전(金詮)ㆍ신용개(申用漑)ㆍ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가 될 정도로 문명이 있었으나 이해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의주(義州)에 유배, 이어 김해(金海)에 이배(移配)되었다가 1501년에 풀려나왔다. 모친상으로 고양에서 수분(守墳)하다가 연산군 8년(1502년) 산책을 나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시문에 능하였고 음양학(陰陽學)에 밝았으며, 갑자년(甲子年)에는 큰 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언했다.

▲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이 은거했던 옛 암자터로, 현재는 겨우 터전만이 확인되는 인천광역시 서구 검암동 정희량 유허지(인천시기념물 제58호)와 허암차샘[虛庵茶泉] 및 설단.

희량(希良)은 강릉 최씨로 유수(留守) 벼슬을 지낸 최진(崔璡)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뒤가 없는지라 아우인 우후(虞候) 희신(希信)이 그 제사를 맡아 왔으나, 1930년대에 그 후손들이 평안도 정주에 거주하고 있음이 알려져 족보에 실렸다.

▲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 실종에 대해 사신이 논한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제44권 연산군 8년(1502년) 5월 14일 기록.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제44권 임술년(1502년) 5월 14일 기록에 사신(史臣)이 논하기를, “희량은 총명하고 민첩하며 널리 배워 글을 잘하였다. 유생(儒生) 때에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논하다가 해주(海州)로 귀양갔었고, 과거에 급제, 예문관(藝文館)에 뽑혀 들었는데, 성질이 온자(蘊藉)하지 못하고 자부심이 너무 강하여 남이 자기 위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복서(卜書) 보기를 좋아하여 매양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길(吉)한가 흉(凶)한가를 먼저 점쳤었다. 무오 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기 전에 일찍이 친구에게 말하기를 ‘아무 해에는 반드시 사림(士林)의 화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화가 일어나자 남쪽 고을로 귀양갔다가, 이때 마침 사면(赦免)되어 고양군(高陽郡)에서 어머니의 묘를 지켰다. 상기(喪期)가 끝나려 하자, 벽곡(?穀)하며 말도 하지 않았다. 풍덕군(?德郡)으로 이거(移居)하여서는 여러 가지 버섯과 풀들을 캐어먹으며 한 잔의 물도 마시지 않기를 열흘 또는 한 달이 되도록 하다가, 단오(端午)날 몸을 빼서 도망해 버려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그 가족이 찾아서 해변(海邊)에 이르니, 다만 신 두 짝이 물가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떤 이는, ‘갑자 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물에 빠져 죽은 것이었다.’ 하고, 어떤 이는, ‘거짓 미쳐 세상을 피하며 지금도 아직 살아 있다.’고 한다.”

 

언각(鄭彦慤)이 청송부사로 재직시 지리에 밝은 청지기가 일러준 길지(吉地)이 세운 경북 포항시 북구 가북면 오덕리 사우정고택(四友亭故宅ㆍ경북민속자료 제81호)과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에 자리한 묘.

 

언각(彦慤ㆍ1498~1556)은 자는 근부(謹夫)로 진사 희검(希儉)의 아들이다. 중종 11년(1516년) 생원(生員)이 되고, 153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1537년 박사(博士)ㆍ정언(正言)ㆍ지평(持平)ㆍ장령(掌令)ㆍ교리(校理)ㆍ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명종 1년(1546년) 사옹원정(司饔院正)ㆍ검상(檢常)ㆍ사인(舍人) 등을 지냈고, 명종 2년(1547년) 부제학(副提學)으로 재임시 전라도 양재역(良才驛)에서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 등이 권세를 자행(恣行)하여 나라가 장차 망하려고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익명의 벽서(壁書)를 발견, 이기(李?)ㆍ정순붕(鄭順朋) 등에게 알림으로써 벽서사건(壁書事件)을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잔당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여 봉성군(鳳城君ㆍ중종의 아들)ㆍ송인수(宋麟壽)ㆍ이약빙(李若氷) 등을 죽이고, 권벌(權撥)ㆍ이언적(李彦迪) 등 20여 명을 유배시킴으로써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그 권세를 빌려 온갖 횡포를 자행하였다. 그후 도승지(都承旨)ㆍ판결사(判決事)를 거쳐 1551년 전라도 관찰사로서 이열(李悅)의 노비를 약탈하여 파직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다시 등용,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경상도 관찰사ㆍ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거쳐 1556년 경기도 관찰사로 있을 때 낙마하여 비참하게 죽었다. 선조 3년(1570년) 관작이 추탈되었다.

 

▲ (上)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의 문집 ‘농포집(農圃集)’ 판본을 보관하고 있는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해주 정씨 재실의 농포집장판각(農圃集藏版閣). (下)정문부의 별장으로 1546년 세워졌다가 1685년 다시 크게 지은 경북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용계정(龍溪亭ㆍ경북유형문화재 제243호).

문부(文孚ㆍ1565~1624)는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로 부사 신(愼)의 아들이다. 선조 21년(1588년) 생원(生員)이 되고, 이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이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거쳐 사간원 정언 겸 중학교수(司諫院正言兼中學敎授)를 역임하고 1590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으며, 다음해 함경북도 병마평사가 되어 북변의 여러 진(鎭)을 순찰하였다. 1592년 행영(行營)에서 임진왜란을 당하였는데, 회령의 반민(叛民) 국경인(鞠景仁)이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金貴榮)ㆍ황정욱(黃廷彧)ㆍ황혁(黃赫) 등을 잡아 왜장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이에 격분하여 최배천(崔配天)ㆍ이붕수(李鵬壽)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고 종성부사 정현룡(鄭見龍), 경원부사 오응태(吳應台), 각 진의 수장(守將)ㆍ조사(朝士)들과 합세하여 의병을 조직하였다. 먼저 국경인(鞠景仁)ㆍ국세필(鞠世弼)을 참수(斬首)하고, 이어서 명천ㆍ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장덕산(長德山)에서 싸워 대승하고, 쌍포(雙浦)전투와 이듬해 백탑교(白塔郊)전투에서 대승하여 관북지방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1594년 영흥부사(永興府使)에 이어 온성부사(穩城府使)ㆍ길주목사(吉州牧使)ㆍ안변부사(安邊府使)ㆍ공주목사를 거쳐 1599년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ㆍ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었고, 그해 중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600년 용양위부호군(龍楊衛副護軍)에 이어 다음해 예조참판, 이어서 장단부사(長湍府使)ㆍ안주목사가 되었으며, 광해군 2년(1610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남원부사가 되고 1612년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외직을 자청하였다. 1615년 부총관(副摠管)에 임명되고 다시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북인(北人)의 난정(亂政)을 통탄하여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고, 다음해 다시 부총관(副摠管)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고 있던 중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후에 신원(伸寃)되어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경성의 창렬사(彰烈祠)와 부령의 청암사(靑巖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

▲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에 자리한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의 묘와 신도비각(경기도기념물 제37호) 및 위패를 모신 충덕사(忠德祠).

역모라는 무고로 1624년 11월 18일 옥중에서 죽음을 맞이한 정문부는 두 아들에게 벼슬할 생각은 말고 경상도 진주에 내려가 은거하며 살라는 유언을 남겼다. 진주는 정문부가 창원부사(昌原府使) 재임 중 진주에 들러 인심이 후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유언에 따라 장남 대영(大榮), 차남 대륭(大隆)과 동생 문익(文益)은 해를 넘긴 1625년 2월 양주 송산(지금의 의정부시)의 선영하에 장사를 지내고 상복을 입은 채 가족을 데리고 진주로 남하하여 비봉산 자락인 봉곡동과 옥봉동에 터를 잡았으니 오늘날 해주 정씨 농포공파(農圃公派)와 용강공파(龍岡公派)가 진주를 중심으로 세거하게 되었다.

문부(文浮)의 장자인 대영(大榮)은 자는 여경(汝慶), 호는 봉곡(鳳谷)으로 평소 품성이 곧고 도량이 넓었으며, 젊어서부터 재상의 자질이 있었다. 광해군 2년(1610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아버지 말년에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가 별세하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형제, 숙질과 더불어 진주의 봉곡(鳳谷)에 숨어 살며 일생을 보냈다. 사후 집의(執義)에 추증되었다.

▲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의 장남 봉곡(鳳谷) 정대영(鄭大榮)의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추증교지.

조(造ㆍ1559~1623)는 자는 시지(始之), 문영(文英)의 아들로 선조 23년(1590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1602년 연일현감(延日縣監)을 거쳐 1605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광해군 4년(1612년) 종부시정(宗寺正)을 거쳐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어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윤인(尹?) 등과 함께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죽이려 하였으나 박승종(朴承宗)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1617년 다시 폐모론(廢母論)을 제기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데 적극 가담하였고, 이듬해 부제학(副提學)ㆍ대사성(大司成)을 거쳐 1619년에는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621년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내고, 1622년 부제학(副提學)ㆍ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국이 역전되면서 원흉으로 지목되어 인조 1년(1623년) 동생인 준(遵)ㆍ도(道)ㆍ규(逵)와 함께 사형되었다

효준(孝俊ㆍ1577~1665)은 자는 효우(孝于), 호는 낙만(樂晩)으로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흠(欽)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시명(詩名)이 높았고, 특히 변려문(騈儷文)에 뛰어났으나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다가 만년에 이르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광해군 5년(1613년) 이이첨(李爾瞻)ㆍ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에 의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대두되었을 때, 어몽렴(魚夢濂)ㆍ정택뢰(鄭澤雷) 등과 함께 극력 항소하여 이이첨 등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두 사람은 유배당하였으나 그는 북관(北關)에 피신하여 화를 면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에 서용되어 효릉참봉(孝陵參奉)ㆍ전생서 봉사(典牲署奉事)ㆍ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 등을 거쳐 효종 3년(1652년)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올랐다. 1656년 80세의 나이로 해풍군(海豊君)에 습봉되고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가 되었다. 그 뒤 아들 다섯이 모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관계로 김수항(金壽恒)의 주청에 의하여 1663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가 되었다. 시호는 제순(齊順).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자리한 제순공(齊順公) 정효준(鄭孝俊)과 정부인(貞夫人) 전의 이씨(全義李氏) 합장묘.

효준(孝俊)의 둘째 아들인 익(?ㆍ1617~1683)은 자는 자제(子濟), 호는 욱헌(旭軒)으로 163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인조 20년(164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성균관(成均館)을 거쳐 1648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임명되었다. 이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ㆍ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1655년 연안부사(延安府使)로 나가 남대지(南大池)를 개수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효종 10년(1659년)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임명되었으나 궁가(宮家)의 사유지 불법 조성을 간언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효종(孝宗)이 죽자 고부승습청시사(告訃承襲請諡使)로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동부승지ㆍ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ㆍ병조참의(兵曹參議)를 역임하다가 1663년 풍덕부사로 나갔다. 1677년 형조참의(刑曹參議), 이듬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임명되고 1670년 하정부사(賀正副使)로 중국에 다녀와서 형조참판(刑曹參判)과 한성부윤(漢城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1674년 강화유수(江華留守), 1676년 도승지(都承旨)ㆍ병조판서(兵曹判書), 이듬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와 한성부윤(漢城府尹)ㆍ강화유수(江華留守)를 역임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자 1670년 하정부사(賀正副使)로 갔을 때의 일에 관련되어 영덕(盈德)으로 귀양을 갔다가 1682년에 풀려났다. 이 때부터 벼슬에 뜻이 없어 동대문 밖에서 한가로이 지내다 전염병으로 1683년에 세상을 떠났다.

효준(孝俊)의 아들로 익(?)의 동생인 석(晳ㆍ1619~?)은 자는 백야(白也), 호는 악남(岳南)으로 인조 27년(164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학정(學正)ㆍ정언(正言)을 거쳐 효종 5년(1654년) 지평(持平)으로 인조(仁祖)의 총희(寵姬)인 조숙원(趙淑媛)의 죄에 연루되어 영산(靈山)에 유배되었다가 1656년 복관되었다. 그후 장령(掌令)ㆍ수찬(修撰)ㆍ사간(司諫) 등에 이어 현종 10년(1669년)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고, 이듬해 왜사(倭使) 다이라(平成太)와 협의하여 왜관(倭館)을 동래부에 이설하였으나 왜인을 잘 규리(糾理)하지 못하였다 하여 파면되었다. 1672년 승지(承旨)를 지낸 후 병조참의(兵曹參議)ㆍ호조참의(戶曹參議)를 거쳐 숙종 즉위년(1674년)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숙종 2년(1676년)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변무부사(辨誣府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저서로 ‘악남집(岳南集)’ 1책이 있다.

그외 운유(運維,ㆍ1704~1772)는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있으면서 이속(吏屬)과 함께 전세(田稅)를 포탈하는 자를 응징하고 기민(饑民)을 구호하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도승지ㆍ대사헌ㆍ공조판서 등을 지내고 시호는 익정(翼靖)이다.

해주 정씨(海州鄭氏)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60명을 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