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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정)

청주 정씨(淸州鄭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청주 정씨(淸州鄭氏)의 연원

청주 정씨(淸州鄭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의종(毅宗)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정극경(鄭克卿)이다. ‘을미가괴서(乙未家乖序)’에 보면 “청주 한씨(淸州鄭氏)의 시초는 어느 시대로부터 일어났는지 상세히 고증할 수 없으나 중랑장부군(中郞將府君) 정극경(鄭克卿)이 고려 중엽에 벼슬하게 되어 일대조(一代祖)가 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정극경(鄭克卿) 이상의 선계(先系)는 알 수 없다.

그의 6세손 책(?)이 충숙왕(忠肅王) 때 충주목사(忠州牧使)를 역임하였고, 통헌대부(通憲大夫)ㆍ판선공사(判繕工事)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러 청하군(淸河君ㆍ청하는 청주의 옛 이름)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청주(淸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 경북 안동시 와룡면 서현리에 자리한 청주 정씨 시조로부터 9세조까지의 설단.

청주 정씨(淸州鄭氏) 분파는 7세조인 설헌(雪軒)과 설곡(雪谷)에 이르러 비로소 2파로 나누어졌으며, 그 후 자손이 번성해 다시 여러 파로 나뉘어졌다. 설헌(雪軒)의 후손은 14세조 언보(彦輔)의 후손이 북지파(北枝派)·영순파(永順派)·고성파(固城派)·연곡파(淵谷派)·고곡파(古谷派)·마암파(馬巖派)·도진파(道津派)·송정파(松亭派)·물민파(勿閔派)·죽전파(竹田派)·광평파(廣坪派)·가야파(佳野派), 수필(彦弼)의 후손이 안막파(安幕派)·두호파(斗湖派), 언좌(彦佐)의 후손이 죽관파(竹貫派)로 단파이다. 12세조 훈노(勳老)의 후손이 녹사공파(錄事公派)이고, 원노(元老)의 후손은 모산파(茅山派)·단호파(丹湖派)·노산파(鷺山派)·다야파(多也派)·삼구파(三九派)·소천파(韶川派)·고평파(高坪派)·양산파(良山派)·지산파(芝山派)·삼강파(三江派)·사상파(泗上派)·참의공파(參議公派)·흥구파(興邱派)·재방파(再坊派)로 나누어지고 10세조인 상(尙)의 후손은 원천파(元川派)로 단파이다. 설곡(雪谷)의 후손은 10세조인 효문(孝文)의 후손이 옹진파(甕津派), 효충(孝忠)의 후손이 장단파(長湍派)·제주파(濟州派)·성주파(星州派)·지촌파(枝村派)·유촌파(柳村派)·함안파(咸安派)·경산파(慶山派)·죽산파(竹山派)·오산파(梧山派)로 나누어진다. 9세조 탁(擢)의 후손은 춘곡파(春谷派), 섭(攝)의 후손은 숙천파(肅川派)로 각각 나뉘어졌다


▲ ‘고려사(高麗史)’ 121권 열전 34에 기록된 3세 정의(鄭?)의 열전.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극경(克卿)의 손자(孫子) 의(?)가 고려 고종 4년(1217년) 서경(西京)에서 최광수(崔光秀)가 스스로 고구려 부흥 병마사(高句麗復興兵馬使)ㆍ금오위섭 상장군(金吾衛攝上將軍)이라 자처하고 북계(北界)의 모든 성(城)에 격문을 돌려 대사(大事)를 일으키려 할 때, 그와 동향(同鄕)이었던 의(?)는 교위(校尉) 김억(金億) 등과 함께 도끼를 감추고 최광수(崔光秀)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다 최광수(崔光秀)와 그의 일당을 죽이고 성을 안정시켰다. 이에 섭중낭장(攝中郎將)에 올라 말과 안장을 하사받았으며,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 ‘고려사(高麗史)’ 106권 열전 19에 기록된 5세 정해(鄭?)의 열전.

의(?)의 손자 해(?ㆍ1254~1305)는 초명은 현계(玄繼), 자는 회지(晦之)로 부모를 일찍 여의었으나 학문에 힘써 문과(文科)에 급제해 비서교감(秘書校勘)ㆍ사한(史翰) 등을 거쳐, 충렬왕 초에 대상녹사(大常錄事)로서 필도치(必?赤)가 되어 왕을 시종하여 원나라에 다녀온 뒤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올랐다. 충렬왕 18년(1292년) 우승지(右承旨)ㆍ사의대부(司議大夫ㆍ문하부의 벼슬로 종3~4품)를 역임하며 전주(銓注)를 맡아 공정히 처리했다. 지신사(知申事)ㆍ부지밀직(副知密直)ㆍ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등을 지내고 우상시(右常侍)가 되었으나, 이듬해 인후(印侯) 등과 함께 한희유(韓希愈)를 무고(誣告)한 사건으로 파직, 충렬왕 29년(1303년) 밀직사사(密直司使)로 복직했다. 이듬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고, 충렬왕 31년(1305년)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라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장자윤(張子贇)ㆍ한종유(韓宗愈)ㆍ김영돈(金永旽) 등 명사들을 뽑았다. 외유내강의 성품으로 마음은 너그럽고 조용하나 일에는 민첩하고 용감하다는 평을 들었다. 시호는 장경(章敬).


 

▲ ‘고려사(高麗史)’ 106권 열전 19에 기록된 3세 문극공(文克公) 정오(鄭
敖頁)와 아우 설곡(雪谷) 정포(鄭?)의 열전.


책(?)의 아들 오(?~1359)는 자는 사겸(思謙), 호는 설헌(雪軒)으로 충숙왕 4년(1317년) 문과에 급제, 충혜왕 즉위년(1330년) 성균승(成均丞)으로서 전주(銓注)를 장악, 이어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었으나 이듬해 내인(內人) 최안계(崔安桂)의 무고를 받아 이문소(理問所)에 투옥, 장형(杖刑)을 당했다. 공민왕 1년(1352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공민왕(恭愍王)을 연경(燕京) 시절에 배종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고, 1354년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다. 후에 추충진의보리공신(推忠陳義輔理功臣)이 되었으며, 원나라의 선명(宣命)을 받아 정동행성(征東行省) 유학제거(儒學提擧)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극(文克).

오의 아우 포(?ㆍ1309~1345)는 자 중부(仲孚), 호는 설곡(雪谷)으로 충숙왕 13년(1326년) 18세로 문과(文科)에 급제, 예문관 수찬(藝文館修撰)이 되어 원나라에 표(表)를 올리러 가다가 마침 원나라에서 귀국하던 충숙왕을 배알하여 왕의 총애를 받고 그 길로 왕을 따라 귀국해 곧 좌사간(左司諫)에 발탁되었다. 충혜왕 때 전리총랑(典理摠郞)에서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었으나, 악정(惡政)을 상소했다가 면직된 뒤 무고로 울주(蔚州ㆍ蔚山)에 유배되었다. 석방된 뒤 원나라에서 벼슬할 계획으로 연경(燕京)에 가서, 그곳 승상(丞相)에 의해 황제에게 추천까지 받았으나 병사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가정(稼亭) 이곡((李穀)과의 교의(交誼)가 깊어 연경(燕京)에서의 친교(親交)는 유명하다. 시문(詩文)과 서예에 뛰어났으며, 문집 ‘설곡시고(雪谷詩藁)’가 있다.

 

▲ 설곡(雪谷) 정
포(鄭?)의 아들 문간공(文簡公) 정공권(鄭公權)이 선친의 유고를 정리해 1376년 판각한 것에서 찍은 후쇄본(後刷本)인 ‘설곡시고(雪谷詩藁ㆍ보물 제709호)’. 사가판(私家版)인 듯 판각이 조졸(粗拙)하여 인쇄가 깨끗하지 못하다.


포(?)의 아들인 공권(公權)은 초명이 추(樞), 자는 공권(公權), 호는 원재(圓齋)로 뒤에 자(字)를 이름으로 썼다. 공민왕 초에 문과(文科)에 급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등용되고 좌사의대부(左司議夫)가 되었다. 공민왕 15년(1366년)에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을 탄핵했다가 살해당할 뻔했으나 이색(李穡)의 도움으로 모면,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좌천되었다. 1371년 신돈이 처형되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기용되고 이어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1374년 우왕이 즉위하자 좌대언(左代言)에 이어 첨서밀직사(簽書密直事)ㆍ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수성익조공신(輸誠翊祚功臣)이 되었다. 그에 대하여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는 “항상 권간들이 나라의 정치를 좌우하는 것을 미워하고 분개하여 마음에 불평을 가지고 있다가 등창이 나서 죽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

 

▲ ‘원각유해(圓覺類解)’는 송나라의 승려 행정(行霆)이 원각경의 내용을 8권으로 요약하여 쉽게 풀이해 놓은 책이며, 그 가운데 권3이 남아 있어 보물 제719호로 지정되었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17.5㎝×28.1㎝)으로 책 마지막장에 있는 기록을 통해 문간공(文簡公) 정공권(鄭公權)이 책을 펴냈음을 알 수 있다.


공권(公權)은 슬하의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셋째 아들 탁(擢ㆍ1363~1423)은 자는 축은(築隱), 호는 춘곡(春谷)으로 우왕 8년(1382년) 문과(文科)에 급제해 춘추수찬(春秋修撰)이 되고 사헌규정(司憲糾正)ㆍ좌정언(左正言), 호조와 병조의 좌랑(佐郞)을 역임, 공민왕 4년(1392년) 광흥창사(廣興倉吏)가 되었다. 이 해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헌,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이 되고, 이듬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ㆍ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역임, 교주강릉도 안렴부사로 나갔다. 이어 대장군(大將軍)으로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승진, 태조 5년(1396년) 정조사(正朝使)를 보낼 때 그가 지은 표문(表文)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문사(文辭)가 경박하고 모욕적이라는 꾸중을 받자, 계품사(計稟使) 하륜(河崙)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사실을 해명한 뒤에 노모(老母)를 모셨다 해서 용서받고 돌아왔다.


 

▲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에 자리한 익경공(翼景公) 정탁(鄭擢)의 묘. 경기도기념물 제173호.

이어 좌승지(左承旨)ㆍ중추원학사(中樞院學士) 등을 역임하고 1398년 도평의사사사(都評議使司使)로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졌다. 이 해 제1차 왕자의 난에 방원(芳遠)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이 되었다. 이어 첨지중추원사(簽知中樞院事)ㆍ예문춘추관 대학사(藝文春秋館大學士)ㆍ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ㆍ삼사우사(三司右使)를 역임, 태종 3년(1403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고 1405년 살인죄로 영해부(寧海府)에 유배되었다. 공신인 탓으로 뒤에 풀려 나와 개성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를 거쳐 1408년 태조가 죽자 고부청시사(告訃請諡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세자 좌빈객(世子左賓客), 1411년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었다. 이듬해 정조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15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 세종 3년(1421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우의정에 올랐다. 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는 익경(翼景).


총(摠ㆍ1358~1397)은 자는 만석(曼碩), 호는 복재(復齋), 정당문학(政堂文學) 추(樞ㆍ일명 公權)의 아들이며, 조선개국공신 탁(擢)의 형이다. 우왕 2년(1376년)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해 19세로 춘추관 검열이 되고, 우왕 11년(1385년) 사예(司藝), 공양왕 1년(1389년) 병조판서, 공양왕 3년(1391년) 이조판서를 거쳐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당시 중국에 보낸 표전문(表箋文)은 대부분 그가 지었다. 조선개국 후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에 서훈되고,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로서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여졌다. 태조 3년(1394년) 정당문학이 되고, 다시 예문춘추관 태학사(藝文春秋館大學士)가 되어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고 그 서문을 썼다. 태조 4년(1395년) 예문춘추관 대학사(藝文春秋館大學士)로서 왕의 고명(誥命) 및 인신(印信)을 줄 것을 청하러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표사(表辭)가 불손하다가 명제(明帝)에게 트집 잡혀 대리위(大理衛)에 유배 도중 죽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문집으로 ‘복재유고(復齋遺稿)’가 있다. 시호는 문민(文愍).

 

▲ (上)정간공(貞簡公) 정탁(鄭琢)이 임진왜란 중에 시중에 떠돌던 여러 민속신앙을 수집한 ‘약포선조유묵(藥圃先祖遺墨ㆍ보물 제494-8호)’과 임란 중 신하들이 국왕에게 올린 상소문과 외교관련문서 등을 모아 친필로 옮겨 적은 ‘용사잡록(龍蛇雜錄ㆍ보물 제494-4호)’. (中)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내린 교지와 영정(보물 제487호). (下)정간공(貞簡公)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640년 창건했으나 훼철되어 1997년 복원한 경북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도정서원(道正書院ㆍ경북문화재자료 제142호).


탁(琢ㆍ1526~1605)은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ㆍ백곡(栢谷), 이충(以忠)의 아들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명종 7년(1552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명종 13년(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66년 정언(正言)이 되고 헌납(獻納)을 거쳐 선조 1년(1568년) 교리(校理)로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직,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조좌랑(吏曹佐郞)ㆍ응교(應敎)를 지내고, 158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 지평(持平) 박광옥(朴光玉)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간원(司諫院)의 계청(啓請)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전임, 이 해 진하사(進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대사헌으로 재임되었다. 1589년 우찬성(右贊成)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좌찬성(左贊成)으로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 이듬해 영위사(迎慰使)로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영접했다.



1594년에는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중에 공을 세우게 하였으며,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몸소 전장(戰場)에 나가 사기를 돋우고자 했으나 왕이 그의 연로(年老)함을 들어 만류했다. 1599년 관직을 사퇴했다. 이듬해 좌의정으로 등용되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를 거쳐 선조 36년(1603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고,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박학다식(博學多識)하여 경서(經書)는 물론, 천문ㆍ지리ㆍ상수(象數)ㆍ병법(兵法)에 이르기까지 정통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李舜臣)ㆍ곽재우(郭再祐)ㆍ김덕령(金德齡) 등 명장을 발탁했다. 예천(醴泉)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저서로는 ‘약포집’ㆍ‘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

 

▲ 정간공(貞簡公) 정탁(鄭琢)을 추모하기 위해 손자 정시형(鄭時亨)을 중심으로 후손들이 경북 예천군 호명면 본리에 지은 재실(경북유형문화재 제315호)과 100m 거리에 있는 묘.


탁(琢)의 셋째 아들 윤목(允穆ㆍ1571~1629)은 자는 목여(穆如), 호는 청풍자(淸風子)로 유성룡(柳成龍)ㆍ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풍채가 호탕하여 보는 사람마다 맑은 바람처럼 시원하다고 하였으며, 경사(經史)에 통달해 당시의 학자들을 감탄케 했다. 예악(禮樂)ㆍ병형(兵刑)ㆍ음양(陰陽)ㆍ율력(律曆)에 이르기까지 정통,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심취했다. 글씨에도 뛰어나 그의 초서(草書)는 당시의 제1인자로 알려졌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따라 세자(光海君)를 모시고 강원도로 피난할 때 세자와 함께 먹고 자면서 매우 친하게 지냈으며, 임진왜란 후에는 고평리 불우실을 거쳐 예천군 서쪽 해압산(海鴨山) 아래 노곡(蘆谷)에 살았다. 이 때 광해군이 왕이 되자, 윤목(允穆)은 여러 차례 벼슬로 불리어졌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614년 용궁면 월오리의 장야평(長野坪)으로 옮겼다.

광해군의 부름에 마지못해 광해군 8년(1616년) 소촌도 찰방(召村道察訪)에 취임하였으며, 1618년 통훈대부(通訓大夫)에 가자(加資)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失政)에 실망을 느껴 1년만에 벼슬을 그만두고 다시 장야평(長野坪)으로 돌아왔다. 그 후 몽촌(夢村)으로 옮겼다가 풍양면 삼강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시와 글씨로 여생을 보냈다. 용궁면 무이리의 무이서당(武夷書堂)에서 기록한 원고가 남아 있고, 삼강리의 삼강강당(三江講堂)에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 뻬이징에 갔을 때 그 곳 수양사(首陽祠)에서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큰 글씨를 베껴 써와 현판에 게시하였는데, 이 현판은 지금도 남아 있다. 또 스승 정구(鄭逑)의 특별한 부탁으로 쓴 병풍 글씨가 남아 있고, 호명면 황지리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청풍자문집’이 있다.

 

▲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이 후진 양성을 위해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세운 삼강강당(경북문화재자료 제204호).


곤수(?壽ㆍ1538~1602)는 자는 여인(汝仁), 호는 백곡(栢谷)ㆍ경음(慶陰)ㆍ조은(朝隱), 초명은 규(逵)로 곤수(?壽)는 선조(宣祖)가 하사한 이름이다. 대호군(大護軍) 승문(承門)의 아들로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선조 1년(1568년) 진사(進士)가 되고 천거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ㆍ경력(經歷)을 거쳐 선조 9년(1576년) 사평(司評)으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부사과(副司果)가 되고, 이어 상주목사(尙州牧使)ㆍ공주목사(公州牧使) 등을 지낸 후 선조 16년(1583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1586년 노릉(魯陵ㆍ단종의 능)에다 사묘(祠廟)를 세우고 위판(位版)을 봉안했다. 1587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대 기근을 구제하고 돌아와 서천군(西川君)을 습봉(襲封), 이어 병조와 이조의 참판(參判)과 대사간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승지(右承旨)에 올라 선조를 의주(義州)에 호종(扈從)했다.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로서 진주사(陳秦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을 움직여 구원병을 파견케 했고, 귀국해서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올랐다.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오자 영위사(迎慰使)로 그를 영접하는 한편 평양(平壤)에 있는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에게 서울의 수복을 재촉했다. 예조판서를 거쳐 1596년 좌찬성(左贊成)이 되고, 이듬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대명외교(對明外交)의 제1인자였다. 1601년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호종(扈從)의 원훈(元勳)으로 녹훈(錄勳)되었으며, 글씨를 잘 썼고 전고(典故)에 밝았다. 죽은 뒤 선조 37년(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으로 추록(追錄), 영의정에 추증(追贈)되고 성주(星州)의 유계서원(柳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초시(初諡)는 충민(忠愍), 개시(改諡)는 충익(忠翼). 저서로 ‘백곡집(栢谷集)’ 4권 4책이 규장각도서에 전한다.

 

▲ 충익공(忠翼公) 정곤수(鄭?壽)가 중국 사신으로 갔을 때 중국 화가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X레이 분석 결과 그의 사후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영정과 1675년 외증손 심역(沈?)이 편집 간행하다 중단된 것을 1710년 현손 건(鍵)과 심역의 아들이 다시 간행한 ‘백곡집(百谷集)’

구(逑ㆍ1543~1620)는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으로 김굉필(金宏弼)의 외종손이 된다. 오건(吳健)에게 수학했고, 조식(曺植)ㆍ이황(李滉)에게 성리학(性理學)을 배웠다. 선조 6년(157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이어 1578년 사포서 주부(司圃署主簿), 그 후 삼가(三嘉)ㆍ의흥(義興)ㆍ지례(知禮) 등지의 현감(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선조 13년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에 부임, 선정(善政)을 베풀어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이듬해 지평(持平)이 되고 동복현감(同福縣監)에 이어 1585년 교정청(校正廳)의 교정랑(校正郞)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를 교정(校正)했다. 그 후 통천군수(通川郡守)ㆍ우승지(右承旨)ㆍ강원도 관찰사ㆍ성천부사(成川府使)ㆍ충주목사(忠州牧使)ㆍ공조참의(工曹參議) 등을 역임, 광해군 즉위년(1608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사람을 모두 용서하라고 상소한 뒤 고향에 돌아갔다.

광해군 5년(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상소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했고, 향리에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유생들을 가르쳤다. 경학(經學)을 비롯하여 산수(算數)ㆍ병진(兵陣)ㆍ의약(醫藥)ㆍ풍수(風水)에 이르기까지 정통했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뛰어나 예학에 관한 저술이 대부분이다. 당대의 명문장가로써 글씨도 잘 썼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성주(星州)의 회연서원(檜淵書院)과 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忠州)의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昌寧)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성천(成川)의 학령서원(鶴翎書院), 통천(通川)의 경덕사(景德祠)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는 문목(文穆).



 

▲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의 시문집인 ‘한강집(寒岡集)’과 간찰.


구(逑)의 아들 장(樟ㆍ1569∼1614)은 호는 사곡(沙谷)ㆍ만오(晩悟)로 개국공신 총(摠)의 7세손이며 곤수(?壽)의 조카이다. 곤수(?壽)가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공으로 선조(宣祖)로부터 자제 중에서 관직에 제수할 사람을 추천하도록 특명을 받자, 자신의 아들을 제쳐 두고 장(樟)을 추천하여 빙고별제(氷庫別提)가 되었다. 이어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ㆍ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ㆍ감찰ㆍ연기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4년(1612년)에 신녕현감(新寧縣監)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그 뒤 1614년에는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가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예조좌랑(禮曺佐郞) 에 임명되었다. 이어 전라도 도사 겸 춘추관기주관(全羅道都事兼春秋官記注官)이 되었으나 임기도 못 채우고 병을 이유로 사직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죽었다.



 

▲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가 인재 양성을 위해 1583년 세운 회연초당(檜淵草堂) 자리에 지방민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1627년 세운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회연서원(檜淵書院)과 묘.


사성(士誠ㆍ1545~1607)은 자는 자명(子明), 호는 지헌(芝軒)으로 7세 때 김언기(金彦璣)에게 수학하였으며, 10세 때는 구봉령(具鳳齡)에게 옮겨서 배우다가 명종 16년(1561년)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갔다. 선조 1년(156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대과(大科) 보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힘썼다. 선조 23년(1590년) 유일(遺逸)로 천거받아 태릉참봉(泰陵參奉)이 된 뒤 양구현감으로 나갔다가 낙향, 학문연구에 힘썼다. 1596년 ‘역학계몽질의(易學啓蒙質疑)’를 썼고, 이듬해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 가서 곽재우(郭再祐)와 같이 의병활동에 가담하였다. 영조 7년(1731년) 옥계서원(玉溪書院)에 제향, 그뒤 철향(撤享) 되었다가 정조 3년(1779년) 학암리사(鶴巖里祠)에 제향되었다.

 

▲ 지헌(芝軒) 정사성(鄭士誠)의 시문집인 ‘지헌집(芝軒集)’은 그의 증손 정선(鄭鐥)이 편집해 1829년 간행하였다.


사성(士誠)의 아우 사신(士信ㆍ1558~1619)은 자는 자부(子孚), 호는 매창(梅窓)ㆍ신곡(神谷)으로 선조 15년(158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저작(著作)ㆍ감찰(監察)ㆍ정언(正言) 등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지평(持平)으로서 왕을 따라 평양(平壤)으로 피란 도중 이탈하여 삭직(削職)당했다. 그 후 강원도 지방에서 토병(土兵)을 모아 많은 왜적을 무찌른 공으로 1594년 경상도도사, 1595년 선산군수(善山郡守)가 되었다. 광해군 1년(1609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선계변무(璿系辨誣)의 공으로 광국원종(光國原從)의 훈(勳)에 책록되고, 장례원 판결사ㆍ밀양부사 겸 경상도중도방어사에 이르렀다.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고, 저서로는 ‘매창집’이 있다.


옥(玉ㆍ1694~1760)은 자는 자성(子成), 호는 우천(牛川), 약포(藥圃) 탁(琢)의 5세손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석제(碩濟)의 아들이다, 정두경(鄭斗經)의 문인으로 영조 1년(1725년) 진사(進士)가 되고, 영조 3년(1727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31년 율봉도 찰방(栗峯道察訪)으로 나갔다. 마침 그 곳에 흉년이 들자 말에게 먹이는 콩과 곡식으로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고 칡을 캐어 삶아서 말을 대신 먹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봉급도 모두 내어 놓았으며, 송덕비가 세워졌다. 대간(臺諫)으로서 영조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으며, 영조 35년(1759년) 좌승지(左承旨)에 올랐다가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해 공평하고 청백하게 다스려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임지에서 죽었다.

영조 32년(1756년)에 영조가 약포(藥圃) 탁(琢)의 초상화를 보고서 그 후손 옥(玉)을 불러 임금 앞에서 임금이 손수 지은 초상화를 칭찬하는 시를 쓰게 하였는데, 그 내용은 “경연 중에 우연히 듣고 정탁(鄭琢)의 초상화를 뵈니, 그 모습이 의연하구나. 선조 임금 때의 유명한 좌의정이 죽은 지 100년 뒤에 다시 궁궐에 들어왔으니, 거룩한이라고 이름 붙임이 마땅하리라.”라고 하였다. 이 초상화(藥圃影幀)는 보물 제487호로 지정되어 예천읍 고평리의 정충사(靖忠祠)에 보관되어 있다.

 

▲ 우천(牛川) 정옥(鄭玉)의 간찰(35㎝×49㎝).


노(魯ㆍ1751~1811)는 자는 공면(公勉), 호는 창파(蒼坡), 구(逑)의 후손으로 아들 시(蓍)가 가산군수(嘉山郡守)로 있을 때 질(?)과 함께 그 곳에 머물다가 순조 11년(1811년) 홍경래(洪景來)가 반란을 일으켜 여러 고을을 점령하고 가산(嘉山)에 몰려들자 아들이 피신을 권했으나 국적을 막아야 한다고 하여 떠나지 않았다. 아들이 반란군에 죽고 자신도 관군을 독려하며 싸우다가 살해되었다. 집의(執義)에 추증(追贈), 다시 이조판서ㆍ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ㆍ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가증(加贈)되고 가산(嘉山)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 ‘가산순절록(嘉山殉節錄)’은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순절한 가산군수 정시(鄭蓍)와 아버지 정노(鄭魯) 및 아우 정질 등 세 부자의 충절한 기록과 국가에서 포상한 사적 및 여러 사람의 애도시 등을 모아 1928년 후손이 간행하였다.


노(魯)의 아들 시(蓍ㆍ1768∼1811)는 자는 덕원(德園), 호는 백우(伯友)로 정조 23년(1799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ㆍ도총부경력(都總府經歷) 등을 역임했으며, 1811년 가산군수로 임명되었다. 이 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는데, 홍경래가 통솔하는 남진군은 선봉장 홍총각(洪總角)을 필두로 그 날로 가산에 진격, 군리(郡吏)들의 내응으로 쉽게 읍내를 점령하였다. 당시 평안감사 이만수(李晩秀)의 장계에 따르면, “그 날 난리가 일어난다고 민심이 흉흉하고 군내가 떠들썩하며 백성들이 피난을 가려 하자, 그는 홀로 말을 타고 군내를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을 효유하여 피난가는 것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봉기군 50여 명이 관아에 돌입하여, 살고 싶으면 인부(印符)와 보화를 내놓고 항복문서를 쓰라고 하자, 그는 ‘내 명이 다하기 전에는 항복할 수 없다. 속히 나를 죽여라.’ 하고, 그들의 대역무도함을 꾸짖다가 칼에 맞아 죽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그대로 적의 칼을 받았다.”고 하였다.


순조(純祖)는 그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는 뜻에서 병조참판ㆍ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ㆍ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추증하고, 관(棺)을 하사하였다. 관찰사의 진상보고를 다시 접한 순조는 그 충렬을 찬탄하고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ㆍ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가증(加贈)하였다. 그리고 살아 남은 동생과 수청기생에게도 관직과 상품을 내렸다. 1813년 왕명으로 정주성(定州城) 남쪽에 사당을 세워 당시 싸우다 죽은 6인과 함께 제사를 지내도록 하니, 이를 7의사(七義士)라 한다. 정주사람들은 또 오봉산(五峰山) 밑에 사당을 세워 7의사를 모셨는데, 왕은 ‘表節’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시호는 충렬(忠烈).

청주 정씨(淸州鄭氏)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19명을 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