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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정)

하동 정씨(河東鄭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하동 정씨(河東鄭氏)의 연원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연원(淵源)을 알 수 없는 여섯 계통으로 분류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하동 정씨의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같이 하면서 계통을 달리하는 세 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 경남 하동군 적량면 동리에 자리한 하동 정씨 밀직공파(密直公派) 시조 정도정(鄭道正)의 단비(壇碑)와 재실인 취정재.

밀직공파(密直公派) 삼한(三韓)의 말기에 하동(河東)으로 이거(移居)하여 고려 초에 호장(戶長)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오른 정도정(鄭道正)을 시조(始祖)로 하고, 그후 10여 대의 계보가 실전되어 헤아릴 수 없어 그의 후손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석숭(碩崇)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온 계통이다.

정도정(鄭道正)은 하동(河東)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 신라 제55대 경애왕 7년(927년) 후백제군이 신라를 침범할 때 하동 호장(河東戶長)으로 향병(鄕兵)을 단련하여 하동성(河東城)을 지켰다. 고려와 신라가 통합할 때는 향병을 이끌고 신라 제56대 경순왕(敬順王)을 개성(開城)까지 호위하여 호종(扈從)과 지방의 호족으로 예우를 받아 내의성 상시(內議省常侍)에 제수되었고, 이어 고려에 귀복(歸伏)하여 광평성 평장사(廣評省平章事)에 올랐다.

 

 

▲ 1800년 간행된 하동 정씨 최초의 족보인 경신대동보(庚申大同譜).

정도정(鄭道正) 후손의 분파는 다음과 같다. 9세 난(難)의 후손인 산원공파(散員公派), 침(王+冗)의 후손인 흥의공파(興義公派),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흥인(興仁)의 아들 인지(麟趾)의 후손인 문성공파(文成公派)이다. 문성공파(文成公派)는 그 아들대에서 다시 익위공파(翊衛公派), 하성위공파(河城尉公派), 장정공파(莊靖公派),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찬성공파(贊成公派)로 나누어진다. 흥안(興安)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흥도(興道)의 후손이 현감공파(縣監公派)로 나누어졌고 8세 을진(乙珍)의 후손이 소윤공파(少尹公派)로 나누어졌다. 여창(鄭汝昌), 여관(鄭汝寬)의 후손이 각각 문헌공파(文獻公派), 참봉공파(參奉公派)이고 10세 희주(希周)의 후손이 장령공파(掌令公派), 계주(繼周)의 후손이 현감공파(縣監公派)이다. 좌윤(左尹) 난연蘭衍)의 후손은 증손 지(地), 전의 대에 경열공파(景烈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국교(國僑)의 후손은 진사공파(進士公派)로 분파되었다.


 

▲ 경남 하동군 적량면 동리에 자리한 정국룡(鄭國龍)의 묘(경남도기념물 제261호).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4세조 연서(延敍)는 형제를 두었는데, 형은 문과에 급제해 좌승(左丞)을 지낸 후, 상장군(上將軍)에 올랐으며 고종조(高宗朝)에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증직된 국룡(國龍)이고, 하동군 적량면 동리 새우골(鰕谷) 뒷산인 도선산(都先山)에 자리한 그의 묘는 하동 정씨 묘 중 가장 오래된 묘로 경남도기념물 제261호로 지정되었다.

▲ 진주시 하대동에 자리한 정국룡(鄭國龍)의 아우로 진사공파의 파조인 정국교(鄭國僑)의 묘.

 

6세 국룡(國龍)이 남경 하동군(河東郡)에 터를 잡은 뒤 8세 익(翊)대에 경기도 양주군(楊州郡)으로 옮겨가 살았던 것 같다. 한편 국룡(國龍)의 아우 국교(國僑)는 고려 충렬왕 때 국자감 진사를 지냈으며, 그는 현재의 진주시 하대동에 안착하여 일가를 이루고 진사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 경남 하동군 적량면 동리에 자리한 정국룡(鄭國龍)의 장남 정지연(鄭芝衍)의 묘.

국룡(國龍)의 장자(長子) 지연(芝衍)은 중국어에 능해 통역관으로 누차 원(元)나라에 왕래하였는데, 여러 관직을 거쳐 충렬왕 5년(1279년) 좌상시 권수 동지밀직사사(左常侍 權授 同知密直司事)에 제수되었다. 그후 충선왕 1년(1309년)에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충숙왕 1년(1313년)에는 중대광 도첨의찬성사(重大匡都僉議贊成事)와 판선부사(判選部事)를 배명받고 치사(致仕)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동생인 난연(蘭衍)은 고려 충렬왕조에 과거에 올라 좌사간(左司諫)을 지내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으며, 뒤에 중경좌윤(中京左尹)에 추증되었다.

▲ 경남 하동군 적량면 동리에 자리한 정국룡(鄭國龍)의 차남 정난연(鄭蘭衍)의 묘.

*성(盛ㆍ1285~1352)은 석숭(碩崇)의 6세손으로 고려 충숙왕 17년(1330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랐으며,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하동 정씨로부터 분관(分貫)하여 성(盛)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금성(錦城)으로 하였다. 그러나 금성 정씨(錦城鄭氏)의 많은 자손들이 하동(河東)으로 환관(還貫)하여 하동 정씨 경열공파(景烈公派)를 이루고 있으며, ‘금성정씨세보(錦城鄭氏世譜)’는 충무공(忠武公) 정충신(鄭忠信)의 고조부인 정원종(鄭元宗)의 후손만으로 이루어져 왔다.

▲ 정지(鄭地) 장군이 왜구를 물리칠 때 직접 착용했던 것으로 후손에 의해 전해진 정지장군환삼(鄭地將軍環衫ㆍ보물 제336호)과 위패와 영정이 보관된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경렬사(景烈祠).

 

지(地ㆍ1347~1391)는 초명은 준제(准提)로 국룡(國龍)의 후손인 금성군(錦城君) 성(盛)의 손자로 공민왕 23년(1374년) 유원정(柳爰廷)의 추천으로 중낭장 시그루치(中郞將速古赤)로서 왜구(倭寇)를 평정할 방책을 왕에게 올려 전라도 안무사(全羅都安撫使)가 되었고, 우왕 3년(1377년)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순천도 병마사(順天道兵馬使)가 되어 순천ㆍ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소탕했다. 이듬해 영광(靈光)ㆍ광주ㆍ담양ㆍ화순 등지에 들어온 왜구를 소탕하여 전라도 순문사(全羅道巡問使)에 오르고, 1380년 원수(元帥)로서 배극렴(裵克廉) 등과 함께 사근내역(沙斤乃驛)에서 왜구와 싸웠으나 패했다. 1381년 밀직(密直)으로 해도원수(海島元帥)가 되어 이듬해 남원에 쳐들어온 왜구를 격퇴하고, 1383년 남해(南海)에서 왜구를 대파한 후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해도도원수(海道都元帥)ㆍ양광 전라 경상 강릉도 도지휘처치사(楊廣全羅慶尙江陵道都指揮處置使)가 되고, 우왕 10년(1384년)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다.

 

1388년 최영(崔瑩) 등을 중심으로 요동(遼東) 정벌이 추진되자 안주도 도원수(安州道都元帥)로 출전했다가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에 동조했고, 이때 또다시 왜구가 창궐하므로 양광 전라 경상도 도절제체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節制體察使)가 되어 남원 등지에서 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공양왕 2년(1390년)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김저(金佇)ㆍ변안열(邊安烈)의 옥사(獄事) 때 사건에 연좌되어 경주(慶州)ㆍ횡천(橫川)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의 공으로 2등 공신에 봉해졌다. 1391년에는 윤이(尹彛)ㆍ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옥(淸州獄)에 갇혔으나 홍수로 석방, 광주(光州)에 물러나 있던 중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로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병사했다. 시호는 경렬(景烈).

▲ 경렬사(景烈祠) 내에 자리한 정지(鄭地) 장군의 예장석묘(禮葬石墓ㆍ광주광역시기념물 제2호).

 

 

지(地)의 아들 경(耕ㆍ1370~1421)은 자는 양여(養汝), 호는 회수(悔?)로 우왕 13년(1387년) 문과에 급제하여 의주(義州)ㆍ안동(安東) 등 7개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는데, 간 곳마다 선정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때 늙은 어머님께서 광주(光州)에 계셨으므로 전라도 관찰사를 청(請)하여 전라감사를 지냈으며, 다시 도절제사(都節制使)를 지냈다.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본래 청렴 결백하여 가세(家勢)는 저축 하나 없이 빈한해도 항상 즐겁게 살았으며 관직에 있으면서도 항상 좋은 책(성리지서-性理之書)을 곁에 두고 독서하는 것을 즐겨 하였으므로, 세종실록에 공을 평(評)하여 지략의 뛰어남은 그의 아버지(경렬공)만 못하지만 성품은 후하고 명랑하다 하였다. 공은 저술하는 것은 즐겨 하지 않아서 오로지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이 공을 위하여 지어준 시(詩) 한 수와 남원 객관가(南原客館歌)가 전해오고 있다.

▲ 정지(鄭地) 장군 묘 아래 자리한 아들 정경(鄭耕)의 묘.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 자리한 정인지(鄭麟趾)의 아버지 정흥인(鄭興仁)의 묘.

 

조선의 이름 난 학자 인지(麟趾ㆍ1396~1478)는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로 충선왕(忠宣王)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지연(芝衍)의 현손(玄孫)이며, 현감(縣監) 흥인(興仁ㆍ1363~1436)의 아들이다. 일찍이 권우(權遇)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태종(太宗) 14년(141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와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각각 장원 급제한 수재로 예조(禮曹) 및 병조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하고 뒤에 세종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와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이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승진하고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라 ‘사륜요집(絲綸要集)’ㆍ‘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을 찬진했으며, 공조 및 이조판서ㆍ좌참찬(左參贊) 등을 거치고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공을 세워 우의정(右議政)에 올랐고 정난일등공신(靖難一等功臣)으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졌다.

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에 오르고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이 되었으며, 세조 4년(1458년) 공신연(功臣宴)에서 불서(佛書)의 간행을 반대하다가 고신(告身)을 빼앗기고 부여(扶餘)에 부처(符處)되었다. 몇 달 뒤 풀려나와 다시 부원군이 되었으며, 1465년 나이 70으로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궤장(?杖)을 하사받았고, 예종 즉위년(1468년)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다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이 되었다. 성종 1년(1470년) 원상(院相)으로서 서정(庶政)을 총괄,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2등이 되었다.

 

특히 그는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천문(天文)ㆍ역법(曆法)ㆍ아악(雅樂) 등에 능통하여 많은 책을 편찬했으며, 김종서(金宗瑞) 등과 ‘고려사(高麗史)’를 찬수(撰修)하고 성삼문(成三問)ㆍ신숙주(申叔舟) 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공을 세우는 한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다. 그는 세조(世祖)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세조가 수양대군(首陽大君) 시절에 왕위찬탈의 야망을 품고 정난(靖難)을 일으키려 할 때 그의 집을 찾아와 손을 잡고 “내가 공(公ㆍ인지)과 사돈이 되어야겠소” 하며 맹우(盟友)가 될 것을 자청했다. 시호는 문성(文成).


▲ 충북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에 자리한 학역재(學易齋) 정인지(鄭麟趾)의 묘와 재각인 문성전(文成殿).

그리하여 인지(麟趾)의 큰아들 현조(顯祖ㆍ1440~1504)가 세조(世祖)의 딸 의숙공주(懿淑公主)와 혼인하여 세조 1년(1455년) 하성위(河城尉)에 봉해지고, 1466년 의빈(儀賓)에 이어 이듬해 하성군(河城君)에 진봉되었다. 이어 온양 별시문과(別試文科)에서 을과(乙科)로 급제, 예종 즉위년(1468년)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봉해지고 성종(成宗) 2년(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으로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에 올랐다.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로 황해도 안악(安岳)으로 폄출(貶黜)되어 그해에 적소(謫所)에서 죽었으며, 2년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모든 관직을 다시 복원시켜 예장을 지내고 부조지전(不?之典)을 내렸으며 시호는 편정(?玎).

▲ 경기도 의왕시 초평동 이교산에 자리한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의 묘.

 

 

인지(麟趾)의 둘째 아들 숭조(崇祖)는 음보(陰補)로 벼슬에 올라 예종 1년(1469년) 공조참판(工曹參判), 이듬해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성종(成宗) 2년(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하남군(河南君)에 봉해졌다. 1474년 형조참판(刑曹參判), 이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서 경기도 진휼사(京畿道賑恤使)가 되고, 1486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거쳐 도총관(都摠管)을 지낸 뒤 1489년 하남부원군(河南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연산군 1년(1495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어 사섬시 제조(司贍寺提調)를 지낸 후 다시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파직되었으며, 시호는 장정(莊靖).

▲ 경기도 시흥시 광석동 취곡(수리골)에 자리한 장정공(莊靖公) 정숭조(鄭崇祖)의 묘.

 

여창(汝昌ㆍ1450~1504)은 자는 백욱(伯勖)), 호는 일두(一?)로 함길도 병마우후(咸吉道兵馬虞候) 육을(六乙)의 아들이다. 어려서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했고, 한동안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3년 동안 오경(五經)과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했다. 성종 14년(14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이 되고, 1490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소격사 참봉(昭格署參奉)이 되었다. 이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거쳐 노모 봉양을 위해 고향인 안음현감(安陰縣監)을 자원하여 학문에 전념하면서 많은 후진을 길러냈다.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종성(鍾城)에 유배, 죽은 뒤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 (上)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자리한 일두(一?) 정여창(鄭汝昌)의 생가. 현재의 건물은 그가 죽은 후인 1570년대에 건축된 것이다. (下)정여창(鄭汝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552년 함양군 수동면에 세워진 남계서원(藍溪書院)은 1556년 사액되었으며, 1868년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서원이다.

당대의 유종(儒宗)으로 이름난 그는 ‘용학주소(庸學註疏)’ㆍ‘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ㆍ‘진수잡저(進修雜著)’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부인이 모두 소각해 지금은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 속에 그의 유집(遺集)이 전할 뿐이다. 당시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 정몽주(鄭夢周)ㆍ김숙자(金叔滋)ㆍ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는 도통(道統)을 이었으며, 특히 도학(道學)에 바탕한 학문과 덕행(德行)이 높고 만인의 숭앙을 받아 사후에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과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천거되어 중종(中宗) 때 우의정에 추증(追贈), 광해군 때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나주(羅州)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鍾城)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에 자리한 일두(一?) 정여창(鄭汝昌)의 묘.

 

운룡(雲龍ㆍ1542~1593)은 자는 경우(慶遇), 호는 하곡(霞谷)으로 주부(主簿) 집(輯)의 아들로 전남 장성(長城)에서 태어났다. 기대승(奇大升)의 문인으로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이 되었으나 사퇴, 박순(朴淳)ㆍ고경명(高敬命) 등과 학문을 닦았으며, 정철(鄭澈)과 교유가 깊었다. 정여립(鄭汝立)과도 친분이 있었으나 그 사람됨을 싫어하여 절교, 선조 22년(1589년) 정여립(鄭汝立)이 반란을 꾀하다가 죽은 뒤, 그가 정여립(鄭汝立)에게 보낸 절교문(絶交文)을 읽은 선조(宣祖)의 신임을 받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1592년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을 지내고 고창현감(高敞縣監)에 이르렀다. 미질(微疾)로 잠시 신흠하다가 갑자기 죽으니 조정(朝廷)에서 치제관(致祭官)을 보내 장사지내고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추증되고, 장성(長城)의 모암서원(慕庵書院)과 고창의 월계정사(月溪精舍)에 제향되었다.

▲ (上左)정운(鄭運) 장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숙종 7년(1681년) 세워져 1985년 현 위치로 이건한 정운충신각(전남도기념물 제76호). (上右)장군의 영정이 봉안된 해남 충장사(忠壯祠). (中)장군을 제향하는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쌍충사(雙忠祠ㆍ전남도기념물 제128호)와 정충장공실기(鄭忠壯公實紀). (下)장군이 전사한 부산광역시 다대포 몰운대에 세워진 장군의 순의비각(殉義碑閣).

 

 

 

운(運ㆍ1543~1592)은 자는 창진(昌辰)으로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 응정(應禎)의 아들로 전라도 영암(靈巖)에서 출생했다. 선조 3년(1570년) 무과에 급제하여 거산도 찰방(居山島察訪)ㆍ웅천현감(熊川縣監)을 거쳐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제주판관(濟州判官) 때 목사(牧使)와 불화하여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녹도만호(鹿島萬戶)로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출전, 옥포(玉浦)ㆍ당포(唐浦) 등의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그해 9월 부산포해전에서 선봉이 되어 대전과를 올리고 다시 추격하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1604년 병조참판에, 정조 20년(1796년)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兵曹判書兼義禁府訓鍊院事)로 추증되었으며, 영암의 충절사(忠節祠)와 흥양(興陽) 쌍충사(雙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흥인(鄭興仁)의 묘 아래 안장된 정득열(鄭得悅)의 묘와 주인 정득열(鄭得悅)의 시신을 찾아 고향까지 옮겨온 충복 백종(白從)의 묘.

 

득열(得悅ㆍ1565~1593)은 자는 군석(君錫), 장정공(莊靖公) 숭조(崇祖)의 증손으로 첨지중추부사 희영(希永)의 둘째 아들이다. 선조 21년(158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 4월에 사천(泗川)현감을 제수받고 부임한지 열흘도 안되어 그 해 4월 14일 왜구가 바다를 건너와 부산포에 상륙, 우리나라 연해(沿海)의 여러 고을을 크게 짖밟아 다 흩어져서, 적이 사천(泗川)에 침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진주판관(晋州判官 ) 김시민(金時敏)과 같이 합병(合兵)하여 고성(固城)ㆍ사천(泗川)ㆍ진해(鎭海) 등 여러 고을에 주둔하고 있던 적을 공격하니, 적의 기세가 꺾여 적군은 철군하여 진주로 숨어 들어갔다. 이에 김시민으로 하여금 성벽을 타고 올라가 적을 막아 성을 지키도록 해 놓고, 군사 3백명을 거느리고 다시 병사(兵使) 유숭인(柳崇仁)에게로 달려가 유병사와 같이 적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수가 날로 늘어나고 우리 전선은 넓어 한정된 인원으로 맞아 싸우기가 어려움을 알고 도중에 복병을 설치하여 적의 진로를 끊고 협공해 대승을 거두었다.

그 해 10월에 부산에 집결한 왜적이 대거 진주를 공격할제, 유병사와 같이 진주성밖 동쪽에 진을 구축하고 적과 대치하여 며칠을 싸우는데, 유병사가 창을 맞고 말에서 떨어지며 상처가 커서 절명하니 그는 대성일갈(大聲一喝)하며 분함을 참지 못하여 철곤(鐵棍)으로 적을 도륙(屠戮)하였다. 흩어진 병졸을 불러모아 다시 싸우고자 하였으나 이미 해가 저물어 병졸들의 사기가 떨어져 싸울 생각들이 없었는데, 공이 용기를 내어 전열을 가다듬고 활을 쏴대면서 지원하였으나 화살이 다 떨어져 한손에 쇠방망이를 들고 육박전을 하였다. 그는 백마(白馬)를 타고 싸워 적군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백마 장군이 가는 곳마다 번번이 우리가 당하니 감히 가까이 갈수가 없다고 하며, 이에 적이 많은 군사들로 하여금 우리군을 겹겹이 포위하여 총을 비오듯이 쏘아대니, 많은 병사들이 총에 맞아 죽었다. 이에 죽음을 무릅쓰고 창칼을 휘두르며 적과 충돌하여 싸웠으나 힘이 다하여 전사하니, 이때 나이 겨우 28세였다. 이마에 검은 사마귀가 있는 충성스러운 종이 있어, 그의 시신은 부여군 대방면 능산 하성부원군(興仁-정인지의 아버지)의 묘 아래에 안장되었다. 뒤에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증직되고, 그 처자에게는 선무 공복(宣武功復)의 녹이 내려졌다.

 

 

▲ 정득열(鄭得悅)의 아들 충결공(忠潔公) 정택뢰(鄭澤雷)의 묘.

 

득열(得悅)의 아들 택뢰(澤雷ㆍ1585~?)는 자는 휴길(休吉), 호는 화강(花岡)으로 아버지 득열(得悅)이 28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순직해 충남 부여 대방면 능산에 모시었기 때문에 어머님 강씨를 따라 아버님 산소에 시묘(侍墓)살이를 갔었는데, 거기서 휴암(休菴) 정홍익(鄭弘翼)에게 글을 배웠으며 오래 오래 시묘살이에 지쳐 서울집에 오고 싶었지만 친구 장유(張維)와 같이 놀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부여(扶餘) 화기산(花技山)밑에다 집을 한칸 지어서 거기서 살게 되었다. 광해군 4년(1612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광해군 9년(1617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제기된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의 부당함을 논하던 이원익(李元翼)이 유배되자, 유생 홍무적(洪茂績) 등과 함께 이이첨(李爾瞻) 일파를 죽일 것을 상소하여 어머니 강씨(姜氏)와 함께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는데, 어머니 강씨(姜氏)가 죽자 애통 끝에 실명하여 적소에서 죽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사헌부 지평(持平)에 추증되고 순조(純祖) 때 이조판서에 가증(加贈)되었으며, 부여(扶餘) 충렬사(忠裂祠)에 제향되고 또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내렸다. 순조 6년(1806년) 이조참의(吏曺參議)에 가증되고, 순조 19년(1819년) 이조판서(吏曺判書)를 가증하고, 시호(諡號)를 충결(忠潔)이라 내렸다.

▲ 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 자리한 하동정씨정려각. 정득열(鄭得悅)과 아들 정택뢰(鄭澤雷), 손자 정천세, 정택뢰의 부인 동래 정씨 등 4분의 충ㆍ효ㆍ열을 기리기 위해 조선 숙종 때 건립되었다가 1960년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경흠(慶欽ㆍ1620~1678)은 자는 선숙(善叔), 호는 육오당(六吾堂), 영의정 인지(麟趾)의 후손으로 이직(以直)의 아들로 부사 이중(以重)의 양자가 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효종 1년(1650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친부와 양부의 상을 연이어 당하였다. 숙종 2년(1676년) 양부의 상을 치른 뒤 벼슬할 뜻을 버리고 충북 보은(報恩)에 은거하였다. 더욱이 남인이 집권한 뒤에는 학문에만 전념하였고 말년에는 ‘주역(周易)’에 심취하였으며, 예론(禮論)에 밝았다. 서화에도 뛰어나 인물ㆍ난초ㆍ포도ㆍ매화ㆍ대나무 등을 잘 그렸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황여도(皇輿圖)’ㆍ‘동여도(東輿圖)’를 편찬하였다.

▲ 곡구(谷口) 정유점(鄭維漸)의 간찰.

경흠(慶欽)의 아들 유점(維漸ㆍ1655~?)과 유승(維升)도 그림을 잘 그렸다. 유점(維漸)은 자는 사홍(士鴻), 호는 곡구(谷口)로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숙종 19년(1693년) 식년문과(式年文科), 숙종 23년(169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장령(掌令)ㆍ문학(文學)ㆍ필선(弼善)ㆍ보덕(輔德) 등을 거쳐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그림에도 능하여 포도ㆍ인물을 잘 그렸다. 동생 유승(維升)은 호는 취은(醉隱)으로 벼슬은 현감(縣監)을 지내고, 그림을 잘 그려 숙종 39년(1713년)에 어용도사도감(御容圖寫都監)의 감조관(監造官)이 되어 숙종의 초상화를 그렸다. 포도와 인물을 잘 그렸다.

▲ 영조 때 정상기(鄭尙驥)에 의해 제작된 동국지도는 우리나라 최초로 축척이 표시된 지도다.

 

상기(尙驥ㆍ1678~1752)는 자는 여일(汝逸), 호는 농포자(農圃子)로 영의정 인지(麟趾)의 후손이다. 이익(李瀷)과 친척으로서 깊은 교유를 하였으며, 몸이 약하여 일찍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경세론에 관심을 가지고 정치ㆍ경제ㆍ재정ㆍ국방ㆍ의약ㆍ기계ㆍ산업(농업) 등은 물론 일상생활의 전반을 실용적 측면에서 연구하고자 하였다. 특히 지도제작에 있어서 백리척(百里尺)을 사용, 축척법에 의한 세밀한 대축척지도를 제작함으로써 지도의 정확도를 높였으며, 수륙교통로와 통신망을 표현하고 시각적 효과를 고려하여 도별 채색을 하였다. 또한 오랫동안 전국을 답사, 역대 국경변천의 역사를 검토하여 군현(郡縣)의 연혁, 산천도리(山川道里), 관방(關防)의 성곽, 해로, 북간도강계(北間島疆界) 등의 역사적 변천사실을 밝혀 냈는데, 정치적 관점에서 벗어나 자연지리학적 관점에서 서술, 근대적 안목을 보여 주었다. 그가 제작한 ‘팔도도(八道圖)’는 지도사상 중요한 업적이며, 저서로 ‘인자비감(人子備鑑)’ㆍ‘향거요람(鄕居要覽)’ㆍ‘치군요람(治郡要覽)’ㆍ‘농포문답(農圃問答)’ 등이 있다. 숙종 35년(1709년) 하동 정씨(河東鄭氏) 밀직공파 최초의 족보인 기축보(己丑譜)를 수보(修譜)하였으나 발간하지는 못하였다.

항령(恒齡ㆍ1710~1770)은 자는 현로(玄老)로 상기(尙驥)의 둘째 아들이다. 영조 19년(1743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동몽교관ㆍ검열(檢閱)ㆍ지평(持平) 등을 지냈다. 1757년 장령(掌令)으로 ‘어제상훈연성(御製常訓衍成)’을 필사하였다. 1762년 장연부사(長淵府使)로 있으면서 해서 암행어사(海西暗行御史) 신익빈(申益彬)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기도 했으나 곧 재기용되었다. 그 뒤 사간(司諫)ㆍ집의(執義) 등을 지냈다. 실학자로 지리학연구에 몰두하여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를 제작하였으며, 이 지도의 상세함에 감탄한 영조(英祖)는 홍문관(弘文館)에 1부를 모사(模寫)하여 보관하게 하였다. 영조 39년(1763년) 팔조목으로 된 한문시를 골자로 하여 올린 소장(疏章)이 정성스럽게 잘 되었다고 영조가 기뻐하며, “세상 사람들을 다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장헌세자(莊獻世子)를 가르치는 상훈 팔편을 편집, 그림을 그려 절목(節目)을 상세히 하여 잘 가르치되 효를 근본으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시작하여 잘 마치고 만년에는 풍질로 죽었으며, 저서로 ‘상훈집람(常訓輯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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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 고려 초에 하동(河東) 지방의 민병(民兵)을 주관하던 사족(士族)의 후손으로 고려 고종(高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ㆍ도첨의 좌정승(都僉議左政丞)ㆍ검교 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 등을 지낸 정응(鄭膺)을 시조(始祖)로 하는 계통이다. 당시의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과 친교했다고 안동김씨세보에 전하며, 묘는 개성부 동부면 동현리(開成府 東部面 東峴理)라는 기록이 있으나 실전된지 오래이다.

▲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 하동정씨묘역에 자리한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 시조 정응(鄭膺)과 2~5세의 단소.

 

분파로는 1세부터 6세 희(熙)까지 단계(單系)로 내려오고, 그의 증손을 파조(派祖)로 하여 분파된다. 서생(瑞生)의 후손인 한림공파(翰林公派), 형(衡)의 후손인 별제공파(別提公派), 맹손(孟孫)의 후손이 주부공파(主簿公派), 운(耘)의 후손이 현령공파(縣令公派), 송(松)의 후손이 의주공파(義州公派), 직(稷)의 후손이 판관공파(判官公派), 온(穩)의 후손이 직장공파(直長公派), 목(穆)의 후손이 유수공파(留守公派), 적(積)의 후손이 장령공파(掌令公派), 육(?)의 후손이 사직공파(司直公派), 조(稠)의 아들이 선무랑공파(宣務郞公派), 세(稅)의 후손이 생원공파(生員公派)로 나누어진다.

▲ 문경공(文景公) 정초(鄭招)가 편찬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농서(農書)인 농사직설(農事直說).

 

초(招ㆍ?~1434)는 집의(執義) 희(熙)의 아들로 일찍이 당대의 명신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태종(太宗) 5년(140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고, 140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해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ㆍ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를 거쳐 우사간(右司諫)이 되고, 세종 1년(1419년) 공조참의(工曹參議)ㆍ예조참의(禮曹參議)ㆍ좌우대언(左右代言) 등을 지낸 뒤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세종 12년(1430년) 왕명으로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찬진(撰進)했다. 이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정인지(鄭麟趾)와 함께 역법(曆法)을 개정했고, ‘회례문무악장(會禮文武樂章)’ㆍ‘삼강행실도발(三綱行實圖跋)’을 편찬했다. 경사(經史)에 밝았고 역산(曆算)ㆍ복서(卜筮)에도 통달했다. 시호는 문경(文景).

▲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 하동정씨묘역에 자리한 문경공(文景公) 정초(鄭招)의 묘.

 

수충(守忠ㆍ1401~1469)은 자는 경부(敬夫)로 제(提)의 아들이다.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여 특히 환관(宦官)들을 교육하기 위해 선발되었고, 뒤에 왕명으로 영응대군 염(永膺大君 琰ㆍ세종의 8남)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세종 21년(1439년) 경창부승(慶昌府丞)이 되었고, 세종 32년(145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해 사예(司藝)를 거쳐 단종 1년(1453년) 행사용(行司勇)을 지낸 뒤 세조 1년(1455년) 세조의 등극을 도와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사성(司成), 1457년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으로서 하원군(河原君)에 봉해지고, 이해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죽자 3년간 수묘관(守墓官)을 지냈다. 이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등을 거쳐 1463년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러 중풍으로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그러나 그 해 가을 69세로 죽어 선영하에 예장을 하니 일대 10리의 논밭과 임야를 나라에서 사패지(賜牌地)로 주었다. 대구(大邱)의 청백서원(淸白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절(文節).

▲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 하동정씨묘역에 자리한 문절공(文節公) 정수충(鄭守忠)의 묘와 영정(충북도기념물 제159호).

슬하에 9형제를 두었는데 종4품 이상의 대부(大夫)가 5명, 종6품 이상 참상(參上)이 2명, 종7품 이하 참하(參下)가 2명이었다고 한다. 또한 세조 당시 공신들의 진영을 그리도록 했는데 공의 진영(眞影) 2점이 현재에도 전해온다. 한 점은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에 있는 화담사(花潭祠, 광주시기념물 제118호)있고, 다른 한 점은 충북 청원군 옥산면(충북도기념물 제159호)에 있다. 화담사의 영정은 영조 11년(1735년) 보성군수를 역임한 정화가 아버지 문절공의 영정을 모시고 있었는데 양호(兩湖) 즉 호서와 호남의 선비들이 발의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 6세 정희(鄭熙)와 아들 문경공(文景公) 정초(鄭招), 손자 문절공(文節公) 정수충(鄭守忠) 등의 위패를 모신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화담사(花潭祠).

 

기남(奇男ㆍ?~1619)은 )은 한림(翰林) 림(霖)의 7세손으로 선조 25년(1592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감찰(監察)이 되고 이어 내금위장(內禁衛將)ㆍ별군직(別軍職) 등을 지냈다. 1603년 함경도 북병사(咸鏡道北兵使) 군관으로서 여진족을 격퇴하여 변방을 지켰으며, 1606년 부령부사(富寧府使)ㆍ창성부사(昌城府使)를 지냈다. 광해군 10년(1618년) 명(明)의 요청으로 강홍립(姜弘立)이 군사를 이끌고 랴오둥(遼東)으로 출정할 때, 김응하(金應河)를 따라 좌위장(左衛將)으로 출전, 선봉에서 싸우다 잡혀 항복 권유를 받았으나 끝까지 항거하다가 살해되었다. 사후인 숙종 때 병조참판(兵曹參判)의 벼슬이 내려졌고, 충신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다시 정조 20년(1796년) 관리에게 제물과 제문을 보내 제사 지내게 하고, 선천(宣川)의 의열사(義烈祠)에 추배되었으며, 충신정문(忠臣旌門)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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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예부사공파(知禮部事公派) 고려 숙종(肅宗)과 명종조(明宗朝)에 걸쳐 다섯 왕조에 벼슬을 지냈고, 정헌대부(正憲大夫)ㆍ지예부사(知禮部事)ㆍ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역임한 후 하동백(河東伯)에 봉해진 정손위(鄭遜位)를 시조로 하는 계통이다.

가문이 대표적인 인물인 손위(遜位)의 아들 세유(世裕)는 고려 명종 14년(1184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재임하였는데, 이때 공물로 바친다는 거짓 이유를 대고 백성의 명주실과 진귀한 완구(玩具) 등의 물품을 가로채 원성을 샀다. 서북면병마사에서 돌아온 후 백성에게 수탈한 물품을 뇌물로 바쳐 왕의 환심을 사고는 아들 윤당(允當)을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郎)의 자리에 앉혔다. 명종 5년(1185년)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올라 법률의 조문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뇌물에 따라 형벌을 결정하였다. 그러자 그해 9월 참지정사(參知政事) 상장군 문장필(文章弼) 등이 그의 부정을 탄핵함으로써 남쪽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얼마 후 복직되었으나 1194년 전(前) 대정(隊正) 이금대(李金大)가 그가 아들 윤당(允當)과 숙첨(叔瞻)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밀고함으로써 다시 유배되었다.

▲ ‘고려사(高麗史)’ 100권 열전 12 제신(諸臣)에 기록된 정세유(鄭(世裕) 열전.

세유(世裕)의 두 아들인 윤당(允當)은 이부원랑(吏部員郞)을 지냈고, 숙첨(叔瞻)은 명종 25년(1195년)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거쳐 희종 7년(1211)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그리고 고종 3년(1216년) 거란(契丹)의 잔당들이 북변을 침범하자 행영중군원수(行營中軍元帥)가 되어 출전했다. 이때 숙첨(叔瞻)은 권력을 한손에 쥔 최충헌(崔忠獻)이 왕실을 몹시 쇠약하게 하여 자기가 적군을 불러놓다시피하고 이제 나를 보내어 적을 막으려느냐며 말했다.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최우(崔瑀)의 장인으로 항상 최충헌(崔忠獻)을 헐뜯다가 고종 4년(1217년) 최충헌 모살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최우(崔瑀)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고향 하동(河東)으로 유배, 그후 풀려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안(晏ㆍ?~1252)은 자는 화경(和卿), 평장사(平章事) 숙첨(叔瞻)의 아들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해 음양(陰陽)ㆍ산술(算術)ㆍ의약ㆍ음률(音律) 등에 정통했으며, 진양(晋陽)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노모의 봉양을 위해 사임하고 하동(河東)으로 돌아갔다. 뒤에 외숙(外叔)인 최우(崔瑀)의 천거로 국자 좨주(國子祭酒)가 되어 고종 28년(1241년)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했다. 최우(崔瑀)의 전권(專權)이 날로 심해지자 화가 두려워 남해(南海)로 은퇴, 불교(佛敎)를 독신(篤信)하여 사재(私財)를 희사하여 당시 간행되고 있던 ‘대장경(大藏經)’의 일부를 맡아 간행하기도 했다. 은퇴 후에도 최우(崔瑀)의 외손(外孫)을 데려다 키워 아들로 삼는 등 최우(崔瑀)와 친밀했다. 최우(崔瑀)의 아들 최항(崔沆)이 정권을 잡자 고종 38년(1251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등용된 후 참지정사(參知政事ㆍ중서문하성의 종2품 벼슬)에 올랐으나 술자리에서 최항(崔沆)이 사람을 함부로 죽인다고 비방한 것이 최항(崔沆)에게 알려져 백령도(白翎島)에 유배되어 살해당했다.

 

명종 25년(1195년) 4월 하동 고향으로 귀양을 온 세유(世裕)ㆍ윤당(允當)ㆍ숙첨(叔瞻) 3부자는 이때 고향인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대방골에 산성(山城)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때 숙첨(叔瞻)의 아들 안(晏)은 11살이었다. 안(晏)은 최우 집권 때 벼슬을 그만두고 할아버지 세유(世裕)와 아버지 숙첨(叔瞻), 백부 윤당(允當)이 산성을 쌓기 시작한 것을 안(晏)이 완성을 했는데 정안산성이라 부르며 해발 448m의 이 봉우리를 정안봉(鄭晏峰)이라 부른다. 그는 이곳에 별장을 지어 노모를 봉양하였다고 한다.

▲ 정세유(鄭世裕)ㆍ정윤당(鄭允當)ㆍ정숙첨(鄭叔瞻) 3부자가 쌓기 시작해 정숙첨의 아들 정안(鄭晏)이 완성하였다는 정안산성은 지금은 성곽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안(晏)은 하동의 여러 기록에 마치 역적(逆賊) 같이 기록돼 있다. 그는 도술을 부려 정안봉 밑의 섬진강과 횡천강으로 운반하는 국가세곡을 빼앗고, 조선의 개국에 맞섰다고 하지만 죽은 해가 1252년으로 조선개국 140년 전에 이미 죽은 인물이라 조선과 관련된 역적론은 사실이 아니다. 안(晏)이 1252년에 무신정권에 의해 황해도 백령도에서 앞바다에 빠뜨려 죽임을 당하자 성은 폐성이 되고 말았으며, 지금도 성곽(城郭)의 흔적과 기와조각을 많이 볼 수 있다. 성안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아 살기가 좋고, 물이 나고, 4대문 외는 출입이 불가능한 깎아지른 천연요새지이고, 남해바다와 지리산, 백운산, 섬진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지상(之祥)은 누이동생의 인연으로 원나라에 자주 왕래하다가 원나라에 머물던 강릉대군(江陵大君) 기(祺ㆍ공민왕)를 시종, 공민왕 3년(1354년) 감찰지평(監察持平)에 등용되었다. 이듬해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있을 때, 고려인으로 원나라의 어향사(御香使)로 고려에 파견되어 와서 행패를 부리던 야사부카를 잡아 가두고 그 아우를 살해하여 원나라 단사관(斷事官)으로부터 국문(鞫問)을 받았다. 이듬해 기철(奇轍) 등이 제거되자 석방되어 순군 제공(巡軍提控)ㆍ호부시랑(戶部侍郞)을 역임하고, 1362년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서 고용보(高龍普)ㆍ안우(安祐) 등의 제거에 직접 관여했으며, 뒤에 판사(判事)에 이르러 죽었다. 성격이 엄혹(嚴酷)하여 중한 형벌을 다스리는 일은 반드시 맡아서 처리했다.

봉수(鳳壽ㆍ1572~1645)는 자는 상수(祥?)로 아버지는 충무위 부사과(忠武衛副司果) 양년(陽年)이다. 선조 25년(1592년) 무과에 급제,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왕을 호종(扈從)하여 부장(部將)이 되고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ㆍ감찰(監察)ㆍ영산현감(靈山縣監)을 지냈다. 선조 38년(1605년) 무안현 대장(務安縣大將)으로 흑산도 앞 바다에 침입한 왜구 6명을 참획했다.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의병장에 추대되어 4,000여 명의 의병을 모집, 출신(出身) 김종민(金宗敏)을 중군(中軍)으로 삼고 미곶첨사(彌串僉使) 장사준(張士俊)ㆍ이광립(李光立) 등과 함께 정예병을 양성하며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 때 용골산성(龍骨山城)에는 철산(鐵山)ㆍ의주 등지의 피난민이 모여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고립된 이 성을 지킬 수 없다 하여 평안도 관찰사에게 난민들을 산 속으로 피신하게 하고 전멸의 화를 입지 않게 종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봉수(鳳壽) 등이 이 성을 고수할 것을 결의하자 조정에서 그에게 당상계(堂上階)를 주어 전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그는 적에게 투항한 장사준(張士俊) 등을 참수하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였다. 용골산성(龍骨山城)에서 후금(後金)의 병사 반수 이상을 살해하고 포로가 된 수천 명의 백성을 구출, 그 공으로 철산부사(鐵山府使)가 되었다. 이어 가선계(嘉善階)에 올라 용천부사 겸 조방장(龍川府使兼助防將)이 되었으며, 곧 방어사(防禦使)와 의주부윤(義州府尹)을 겸직하고 적이 철수한 뒤 구성부사(龜城府使)ㆍ개천군수(价川郡守)ㆍ오위장(五衛將)ㆍ부총관(副摠管)을 거쳐 1630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가 되고 경상도와전라도의 병마절도사를 거쳐 1635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부총관(副摠管) 겸 훈련원 도정(訓練院都正)을 겸임했다. 철산의 충무사(忠武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봉수(鳳壽)의 동생 기수(麒壽)는 자는 영수(靈?)로 무예에 뛰어나고 경사(經史)에도 정통하였다.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 때 형 봉수(鳳壽)와 용골산성(龍骨山城)에 들어가 반장(叛將) 장사준(張士俊)을 죽이고 적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그 공으로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를 거쳐 사도시 판관(司導寺判官)이 되었으나, 영유현령(永柔縣令)으로 있을 때 관곡(官穀)을 횡령한 죄로 1634년 탄핵을 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순찰사 홍명구(洪命耉)의 협수장(協守將)이 되어 자모산성(慈母山城)에서 활동하였고, 그 뒤에 황해도 문화현령(文化縣令)과 평안도 강서현령(江西縣令)을 지내고 84세에 죽었다. 숙종 때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철산(鐵山)의 충무사(忠武祠)에 제향되었다.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정경운(鄭景雲)의 ‘고대일록(孤臺日錄)’

 

 

경운(景雲)은 자는 소성(昭聖)으로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중부(仲父) 봉수(鳳壽), 계부(季父) 인수(麟壽)와 함께 의거, 용골산성(龍骨山城)에 들어가 활약하고 그 공으로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김여기(金礪器)와 함께 웅골성(熊骨城)에서 적의 침공을 격퇴하여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으로 승진하였다. 두 차례의 호란에 참전한 동생 경문(景雯)ㆍ경방(景?)과 함께 큰 공을 세워 ‘삼영(三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