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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정)

진주 정씨(晋州鄭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진주 정씨(晋州鄭氏)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도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여러 계통(系統)이 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서 진주 정씨는 19파(派)가 나와 있으며, ‘전고대방(典故大方)’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5파(派)로 기록되어 있다. 진주 정씨의 본 고장인 진주(晋州ㆍ진양군 일대)에서는 ‘진양팔정(晋陽八鄭)’이란 말이 상식화되어 있어 대부분의 문헌에 8파로 기록하고 있다.

진주 정씨(晋州鄭氏)는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문헌이 없어 계대(系代)를 정확하게 상고할 수 없으며, 현존하는 진주 정씨의 대부분이 영절공(英節公) 예(藝)ㆍ호장공(戶長公) 자우(子友)ㆍ중추원사공(中樞院事公) 장(莊)ㆍ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 헌(櫶) 등의 후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므로 크게 4파로 분류한다.

 ▲ 1957년 석판본으로 간행된 진주 정씨 족보(10책)



예계(藝系)/충장공파(忠莊公派) 영절공(英節公) 예(藝)는 고려통합삼한벽상공신(高麗統合三韓壁上功臣)으로 광록대부(光錄大夫)에 올라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그 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그의 후손 문익공(文翼公) 시양(時陽)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대(系代)하고 있다.

 

 

 ▲ 영조 43년(1767년) 간행된 진주 정씨 충장공파(忠莊公派) 최초 족보인 정해보(丁亥譜). 10권 3책. 23.5X37㎝.

시양(時陽)의 7세손 수(需ㆍ시호는 문영공)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도좌랑(版圖佐郞)과 좌사간(左司諫)을 역임하고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일으켰고, 그의 후손 을보(乙輔)는 충숙왕 7년(1338년) 국자시(國子試)에 장원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과 도감제조(都監提調)를 지내고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졌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 진주 촉석루 천정에 걸린 청천군(菁川君) 정을보(鄭乙輔)의 시판(詩板).

 ▲ 정신중(鄭臣重) 부부 합장묘와 아들 정이오(鄭以吾) 부부, 손자 정분(鄭苯) 부부의 3대 묘 5기를 ‘진주 상대동 고분군’이라 부른다. 구조형태는 방형 팔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경남기념물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했던 신중(臣重)의 아들 이오(以吾ㆍ1354~1434)는 수(需)의 7세손으로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ㆍ우곡(愚谷)이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조선이 개국된 후 태종(太宗) 10년(1410년) ‘태조실록(太祖實錄)’ 수찬(修撰)에 참여, 이듬해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로서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를 겸임했다. 1413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지공거(知頁擧)를 겸했으며, 세종(世宗) 때는 찬성사(贊成事ㆍ정2품)에 이르러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날렸다. 시호는 문정(文定).

 ▲ 진주 촉석루 천정에 걸린 문정공(文定公) 정이오(鄭以吾)의 시판(詩板)과 문집 및 시문집.

 

 

 

 

이오(以吾)는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그중 장남 분(苯ㆍ?~1454)은 자는 자외(子葨), 호는 애일당(愛日堂)으로 태종 16년(1416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해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세종 3년(1421년)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1425년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고, 사인(舍人)으로 함길도 경차관(咸吉道敬差官)이 되어 수재민(水災民)을 구호했다. 1430년 집의(執義)로서 성개(成槩)의 노비사건을 계문(啓聞)하지 않은 죄로 유배되었다가 1432년 풀려나와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이어 우승지(右承旨)ㆍ충청도 관찰사ㆍ평안도 관찰사를 역임, 이듬해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종 26(1444년) 예조참판ㆍ호조판서를 지낸 후 1447년 좌참찬(左參贊)으로 숭례문(崇禮門) 건축공사를 감독했다. 1449년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거쳐 이듬해 우찬성(右贊成), 문종 1년(1451년) 좌찬성(左贊成)ㆍ판호조사(判戶曹事)를 겸임했고, 이듬해 문종이 죽을 때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仁)과 어린 세자(世子)의 보호를 부탁받았고,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단종 1년(1453년) 전라ㆍ충청ㆍ경상도 도체찰사가 되어 충주(忠州)로 향하던 중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반대파로 몰려 낙안(樂安)에 안치되어 관노(官奴)가 되었다가 사사(賜死)당했으며, 뒤에 신원(伸寃)되고 장흥(長興)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

 ▲ 경남 진주시 상대동 고분군에 자리한 문정공(文定公) 정이오(鄭以吾)의 묘.

 

 

 

 

‘일월록(日月錄)’에 의하면 그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 음모가 무르익을 때 체찰사(體察使)로서 영남을 순회하고 충주(忠州)에 이르자,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이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을 잡아죽이려 관원을 보낼 것이라고 믿고 용안역(用安驛)을 지나가는데 관원이 달려오며 전지(傳旨)가 있다고 외쳤다. 분(苯)은 말에서 내려 재배하며 말하기를 “노상에서 형을 받는 것은 상스럽지 못하니 역관(驛館)으로 갈 수 없느냐”고 하자, 관원이 말하기를 “나는 다만 명을 받아서 공을 적소(謫所)로 압송하는 것이요” 하였다. 10여 일이 걸려 유배지인 낙안(樂安)에 내려가 항상 조상의 신주를 받들어 제사를 지냈는데, 하루 저녁은 자다가 일어나서 함께 있던 중 탄선(坦禪)에게 “네가 밥 한 그릇을 정하게 지어라 내가 우리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겠다” 하고 제사를 지낸 뒤에 신주를 모두 불에 태웠는데 조금 후에 관원이 와서 사사(賜死)하였다고 한다.

 ▲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에 대해 기록한 ‘정충장실기(鄭忠莊實記)’와 위패를 모신 장흥의 충렬사(忠烈祠).

 

 

 

 

‘장빈호찬(長貧胡撰)’에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관원이 형을 집행하려고 왔을 때 분(苯)은 목욕을 하고 관대(冠帶)를 갖추어 조상의 신주에 재배하고 신주를 태운 후 관대(冠帶)를 벗고 우장 옷을 입고 수건을 쓰고 그의 아내에게 영결(永訣)하니 아내가 붙들고 통곡을 하자, 그는 달래며 “조정의 명령이니 항거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 일은 그대가 다스리라.” 하고는 죽음에 임하여 감형관(監刑官)이 형을 집행하려고 목을 얽을 때 “죽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명분(名分)이 다르다. 내가 만일 두 마음이 있다면 죽은 뒤에 맑은 하늘이 그대로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이상이 있을 것이다” 하고 형을 받아 죽으니, 홀연히 구름이 모여 들고 비가 쏟아져서 감형관(監刑官)이 우산을 받고 성안에 들어왔다고 한다.

 ▲ 경남 진주시 상대동에 자리한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의 묘.

 

 

 

 

분(苯)의 6세손 감(瑊ㆍ?~1593)은 자는 옥경(玉磬), 호는 신재(愼齋)로 선조 21년(1588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대과에 급제키 위해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부(伯父) 현보(賢輔ㆍ1546~?)와 더불어 결사구국(決死救國)할 것을 맹세하고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 들어가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영남 각지를 순회하며 의병과 군량을 모취하였다. 이어 영호남의 전운사(轉運使)가 되어 의병청(義兵廳)을 설치하고 병정(兵丁)을 훈련시키며 군무를 감독 지휘하였을 뿐 아니라 각지에 격문을 발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민들의 사기를 높여 임전태세를 강화하였다. 1593년 6월에는 지난해 10월 진주성에서 대패하였던 왜군이 이를 보복하기 위해 연합하여 대병력을 이끌고 다시 진주성을 침입하게 되었을 때 전투대장으로 수성의 직임을 맡았는데, 역전분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니 양산숙(梁山璹)ㆍ송제민(宋濟民)과 함께 촉석루(矗石樓)에 올라가 북향사배(北向四拜)하고 남강(南江)에 투신, 순절하였다. 선조 38년(1605년)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고 통훈대부 사복시정(通訓大夫司僕寺正)으로 추증되었다. 그리고 고종 4년(1867)에는 조정으로부터 충절 정려(忠節旌閭)가 세워졌고, 1936년에는 공의 5대조 충장공(忠莊公) 분(苯)과 함께 표산사(杓山祠)에 배향되었다.

 ▲ (좌)1711년 정사현(鄭思顯) 등을 제향하기 위해 고령군 우곡면 사촌리에 건립한 영연서원(靈淵書院)은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거 현재는 묘정비(廟庭碑)만 남아 있다. (우)정사현의 부인 창녕 조씨의 정려를 기리기 위하여 1809년 세워진 창녕조씨정려비(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중종(中宗) 때 15세로 향시(鄕試)에 올랐던 사현(思顯)은 판관(判官)을 지낸 기(璣)의 아들로서 명종(明宗) 때 형조(刑曹)와 병조(兵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역임했으며, 충장공(忠莊公) 분(苯)의 6세손 천경(天卿)은 임진왜란 때 아우 원경(元卿)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임천군수(林川郡守)와 전의현감(全義縣監)을 지낸 후 병조참판으로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었다.

 ▲ 문익공(文翼公) 정시양(鄭時陽)ㆍ정유(鄭裕)ㆍ정수(鄭需)ㆍ정을보(鄭乙輔)ㆍ정이오(鄭以吾)ㆍ정분(鄭苯) 등 11인을 제향하기 위해 진주시 상봉동에 세워진 문충사(文忠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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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우계(子友系)/은열공파(殷烈公派) 파조(派祖)는 고려조(高麗朝)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자우(子友)로 그의 6세손 신열(臣烈)이 고려 현종(顯宗) 때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친 후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올라 거란(契丹)의 침입을 격퇴시킨 공(功)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諡號)는 은열(殷烈)이다.

 ▲ 은열공(殷烈公) 정신열(鄭臣烈)과 공대공(恭戴公) 정척(鄭陟)의 위패를 모신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내 청계서원(淸溪書院).

 

 

 

 

첨정(僉正)을 역임한 중공(仲恭)의 4세손 천익(天益)은 공민왕(恭愍王) 때 전객령(典客令ㆍ종3품)을 지내다가 당시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서 향리로 돌아가 퇴헌정(退軒亭)을 짓고 자적하다가, 사위인 문익점(文益漸)이 원(元)나라에 서장관(書狀官)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숨겨 온 목화씨를 심어 3년 동안 연구한 끝에 성공해 종자의 보급에 힘썼다. 또 집에 머물던 호승(胡僧)을 통해 씨를 발라내는 취자거(取子車ㆍ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를 고안하여 면포(綿布) 짜는 방법을 알아내었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 정필달(鄭必達)의 교지와 청백리로 녹선된 삼계(三溪) 정밀(鄭密)의 신도비.



그외 조선 명종(明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안악군수(安岳郡守)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던 천익(天益)의 8세손 밀(密ㆍ1520~1582)과 이연경(李延慶)의 문인(門人)으로 임진왜란에 창의(倡義)하여 곤양(昆陽)에서 전공을 세웠던 중추부사(中樞府事) 대수(大壽)가 유명했으며, 인조 23년(1645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했던 필달(必達ㆍ천익의 11세손)은 현종(顯宗) 때 형조정랑(刑曹正郞)을 거쳐 단양 군수(丹陽郡守)와 울진현령을 역임하여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순절한 용(庸)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장계(莊系)/공대공파(恭戴公派) 공대공파(恭戴公派)의 파조(派祖) 장(莊ㆍ1569~1614)은 자는 거경(巨卿), 호는 일수헌(一樹軒)으로 독서에 힘쓰고 시(詩)에 능하였으나 과거(科擧)에 응하지 않았으며, 시작(詩作)을 즐겨서 세상에 전송(傳誦)하게 되고 풍수설(風水說)을 반박하여 세상 사람의 미혹을 풀었다. 세상일에 뜻을 끊고 산수(山水)를 찾아 방랑하여 시와 술로 일생을 마쳤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추증되었다.

 ▲ 진주시 신안동 석갑산(石岬山) 북사면에 자리한 정척(鄭陟)의 아버지 정설(鄭舌)과 어머니 강씨(姜氏)의 묘. 경남도기념물 제252호.

장(莊)의 증손 척(陟ㆍ1390~1475)은 자는 명지(明之), 호는 정암(整菴), 호조판서로 추증된 설(舌)의 아들이다. 태종 8년(1408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태종 14년(1414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에 보직되었으며, 여러 차례 승진하여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가 되었다. 이어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ㆍ예조정랑(禮曹正郞)ㆍ전농시 소윤(典農寺少尹)ㆍ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를 거쳐 세종 26년(1444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가 되었으며, 세종 31년(1449년)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明)에 갔다 왔으며, 이후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세조가 즉위하자 불러들여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임명하였으며, 세조 9년(1463년)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하였다. 세조 14년(1468년)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으며, 성종 2년(1471년) 부사직(副司直)으로 옮겼다.



 

그는 청렴ㆍ신중하였고, 또한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정밀ㆍ상세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부지런했다. 해자(楷字)와 전서(篆書)의 글씨가 정밀하고 교묘하여, 옥새와 관인의 글씨가 모두 그의 솜씨에서 나왔다고 한다. 또한 전례(典禮)와 고사(故事)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의 의례와 제도를 찬술한 것이 많았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워 공경(公卿)이나 오래 사귄 친구의 부음이 있을 때에는 비록 질병이 있더라도 소식(素食)을 먹었다고 한다. 한번은 세종이 병이 나서 포도를 먹고자 했으나 절기가 늦어 구할 수 없게 되자, 자기 집 마당에 있던 수정 포도를 따서 올렸다. 세종이 흡족해 하자 이때부터 해마다 포도를 진상하였다고 한다. 세조가 즉위하여 “부왕께서 정척(鄭陟)의 청렴하고 정직함을 여러 번 칭찬한 것을 들은 것이 어제처럼 또렷하다”라 하고 예우하였다. 청백리(靑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시호는 공대(恭戴)로 그의 묘는 하남시 초이동(草二洞)에 있다.

 ▲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에 자리한 공대공(恭戴公) 정척(鄭陟)의 묘와 묘갈.

 

 

척(陟)의 아들 성근(誠謹ㆍ?~1504)은 자는 이신(而信)ㆍ겸부(兼夫)로 성종 5년(147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적(典籍)ㆍ지평(持平) 등을 거쳐 1481년 경기도 경차관(京畿道敬差官)을 지내고 이듬해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1487년 시강관(詩講官)으로 대마도 선위사(對馬島宣慰使)가 되고, 이듬해 해주목사(海州牧使)를 지낸 뒤 1493년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재직중 해주목사를 지낼 때의 부정사실로 탄핵을 받고 파직, 부처(付處)되었다가 후에 다시 기용되어 승지(承旨)ㆍ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1494년 성종(成宗)이 승하하자 연산군(燕山君)의 단상법(短喪法) 시행에도 불구하고 수묘관(守墓官)으로 홀로 3년상을 치렀다가 국법을 어겼다 하여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효수(梟首)당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고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광주(廣州)의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는 충절(忠節).

 ▲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에 자리한 정주신(鄭舟臣)의 묘.

성근(誠謹)의 아들 주신(舟臣ㆍ1472~1504)은 자는 제옹(濟翁)으로 연산군 7년(1501년) 때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정자(副正子)를 거쳐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가 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아버지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애통해 하며 식음을 전폐하여 끝내 굶어 죽음으로써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세워 그의 효행을 널리 알렸다. 또한 주신(舟臣)의 아우 매신(梅臣)과 매신(梅臣)의 아들 원린(元麟)ㆍ원기(元麒), 원린(元麟)의 아들 효성(孝成)이 모두 효행이 뛰어나 4대 6명의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에 자리한 휴휴자(休休子) 정효성(鄭孝成)의 묘와 간찰.

주신(舟臣)의 손자 효성(孝成ㆍ1560∼1637)은 자는 술초(述初), 호는 휴휴자(休休子)는 유복자로 태어나 홀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었다고 한다. 일찍이 진사(進士)가 되었는데 학행(學行)이 알려져 음직(蔭職)으로 회덕현감(懷德懸監)에 발탁되고, 함흥판관(咸興判官)ㆍ은진현감(恩津縣監)을 거쳐 호조정랑(戶曹正郞)이 되었다. 광해군 말엽에 정치기강이 흐려지면서 반대세력에 의해 탄핵을 받아 좌천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복직되어 삭녕군수(朔寧郡守)ㆍ강화유수(江華留守)ㆍ청주목사(淸州牧師)를 지냈다. 인조 8년(1630년) 공청도 관찰사(公淸道觀察使)로 있으면서 농민의 부담을 줄이는 등 농촌의 복구에 힘썼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고자 분투하다가 강화도의 함락과 함께 순사하였다.

 ▲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에 자리한 현곡(玄谷) 정백창(鄭百昌)의 묘.

효성(孝成)의 아들 백창(百昌ㆍ1588∼1635)은 자는 덕여(德餘), 호는 현곡(玄谷)ㆍ곡구(谷口), 광해군 3년(1611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검열(檢閱)ㆍ대교(待敎) 등을 지냈다. 1613년 폐모론에 반대, 파직되었다가 대교(待敎)에 복직되었고 이어 사관(史官)으로 있었는데 사필(史筆)이 엄격하고 공정하였다. 그뒤 이이첨(李爾瞻) 일파에게 몰려 삭직, 은둔생활을 하다가 인조 1년(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부수찬(副修撰)에 재기용되어 헌납(獻納)ㆍ사인(舍人) 등을 지냈다. 162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으나, 국구(國舅)인 그의 장인 한준겸(韓浚謙) 덕분이라는 비난이 있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동부승지(同副承旨)ㆍ대사간(大司諫) 등을 거쳐 1631년 이조참판이 되었는데, 이때 이행원(李行遠)의 죄를 소홀히 다루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복직, 좌부승지(左副承旨)ㆍ도승지(都承旨)ㆍ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저서로 ‘현곡집(玄谷集)’이 있다.

 ▲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에 자리한 충경공(忠景公)정백형(鄭百亨)의 묘.

효성(孝成)의 아들이자 백창(百昌)의 동생인 백형(百亨ㆍ1590∼1637)은 자는 덕후(德後)로 인조 2년(1624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승문원 저작(承文院著作)ㆍ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ㆍ봉교(奉敎) 등을 지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호종(扈從)한 공으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 1632년 정원군(定遠君) 부(仁祖의 아버지)에 대한 원종(元宗) 추존 논의가 일자 이를 반대, 삭직되었다. 1634년 예조정랑(禮曹正郞)ㆍ장령(掌令)을 지냈고,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江華島)에 갔다가 이듬해 성이 함락되자 아버지와 함께 자결하였다. 1638년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현종(顯宗) 때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


 

 ▲ 공대공(恭戴公) 정척(鄭陟) 일가에게 절의를 포상토록 조정에 올린 글(승정원일기 제352책).



 

특히 공대공(恭戴公) 척(陟)에서부터 7세에 이르기까지 3명의 청백리(靑白吏)가 배출되었으며, 중종(中宗)ㆍ인종(仁宗)ㆍ명종대(明宗代)에 걸쳐 충(忠)ㆍ효(孝)ㆍ열(烈)로 순절한 10명에게 십정문(十旌門)을 하사했고, 숙종(肅宗)은 구묘(丘墓)의 소재지인 경시도 광주군 서부면 초이리 산24번지 일원에 십수만 평을 하사하여 현재는 면세지(免稅地)로 보존되고 있다.

한편 대유(大有)는 공대공(恭戴公) 척(陟)의 8세손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 진주성(晋州城)이 함락되자 병화(兵禍)를 피하여 80 노모를 등에 업고 하동(河東)을 거쳐 전남 광양군 골약면 마동리로 도피하였다가 골약면 중동리(中洞里)에 정착하여 가문의 뿌리를 내렸다. 천성이 중후(重厚)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당시 도관찰사(都觀察使)로부터 효자로 특별 포상을 받았으며, 인조(仁祖) 때 호조정랑(戶祖正郞)에 추증되었다.

대유(大有) 슬하의 5남 2녀와 종형제(從兄弟)간인 대훈(大訓)의 직계후손들이 현재 광양(光陽) 일대에 약 1000호가 세거하고 있으며 많은 인물과 명사를 배출하였고, 대유(大有)의 9세손 운성(運成ㆍ자는 행지, 호는 성제)이 구사곡면(舊紗谷面)에 향교(鄕校)를 설립하고 충효를 장려하면서 많은 영재를 배출시켰다.


 ▲ 우곡(隅谷) 정온(鄭溫)이 고향에 돌아와 조용히 지내고자 1393년 진주시 사봉면 사곡리에 지은 우곡정(隅谷亭). 그 뒤 1849년 고쳐 짓고 1976년 다시 수리해 오늘에 이른다(경남문화재자료 제65호).



 

 

 

헌계(櫶系)/우곡공파(隅谷公派) 고려 말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던 헌(櫶)의 계통에서는 그의 장손(長孫) 온(溫)이 유명했다. 호는 우곡(隅谷)으로 고려 창왕(昌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7도 감사(七道監司)와 호조전서(戶曹典書)를 거쳐 사헌대부(司憲大夫)ㆍ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으나 정계(政界)가 혼란해지자 관직을 버리고 눈뜬 장님(靑盲)을 가장하고 두문동(柱門洞)을 거쳐 지리산 청학동(智異山靑鶴洞)에 은거하였다. 조선(朝鮮)이 개국된 후 태조(太祖)가 수 차례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매서운 절개를 지켰으며, 태종(太宗)이 사람을 보내서 그 진위를 시험하기 위해 정자앞에 있던 푸른 소나무의 솔잎을 한줌 뜯어 정온의 눈을 찔러 보았다. 그러나 눈동자는 일체 움직이지 않고 피만 낭자했다 한다.

 ▲ (좌)우곡(隅谷) 정온(鄭溫)의 묘비. (우)정온이 은거했던 표식인 정온구동비(鄭溫舊洞碑).

 ▲ 현종 4년(1663년) 송시열이 찬한 정경세시장원본(鄭經世諡狀原本).

 

 

온(溫)의 아우로 고려 말에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낸 택(澤)의 10세손 경세(經世)는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일묵(一默)·하거(荷渠)로 서애(西崖) 류성룡(柳成龍)의 문인(門人)이다. 선조 15년(1582년) 진사(進士)가 되고, 1586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등용된 뒤 검열(檢閱)ㆍ봉교(奉敎)를 거쳐 선조 22년(1589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 공을 세워 수찬(修撰)이 되고, 정언(正言)ㆍ교리(校理)ㆍ정랑(正郞)ㆍ사간(司諫)에 이어 1598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고, 광해군 때 정인홍(鄭仁弘)과 사이가 좋지 못하여 삭직(肖職)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부제학(副提學)에 발탁되고 전라도 관찰사ㆍ대사헌을 거쳐 1629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겸지춘추관사(兼知春秋館事)로서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편찬을 담당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 이황(李滉)의 설에 반대하고 이이(李珥)의 설에 찬동했으며, 특히 예론(禮論)에 밝아 김장생(金長生) 등과 함께 예학파(禮學派)로 불리었다. 시문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장(文莊).

 

 ▲ 경북 상주시 공검면 부곡리에 자리한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의 묘와 신도비. 경북유형문화재 제 321호.

천계(天啓)는 자는 가신(可信), 호는 송제(松濟)로 조선조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을 지냈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추대되었다. 아내 이씨는 진주성이 함락된 후 왜적이 말 위에 끌어올리려고 해도 끝내 항거했는데 일본병사가 칼을 뽑아서 목덜미에 걸치며 협박하다가 안되니 이씨를 마디마디 잘라서 처참하게 죽였다. 그때 이씨의 딸은 나이 16세였는데 어머니가 당하는 처절함을 보다 못해 연못에 몸을 날려 빠져 죽었으며, 왜적이 건져서 어머니 시신 곁에 두고 갔다. 임진왜란 후 선조에게 일이 알려져서 정려(旌閭) 되었으며,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나오는 열녀 356명과 ‘진양지(晋陽誌)’의 <열녀조(烈女條)>에 포함되어 이름을 올렸다.

 

 ▲ 경남 사천시 금곡면 인담저수지 근처에 자리한 송제(松濟) 정천계(鄭天啓)의 묘.

그 밖의 인물로는 한말(韓末)에 와서 희면(熙冕)이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김용구(金容球)와 함께 국권회복(國權回復)을 결심하고 의병(義兵)을 모아 1907년 영광(靈光)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서 옥고(獄苦)를 겪다가 순종(純宗) 황제의 대관(戴冠)의 은전(恩典)으로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