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 정씨(迎日鄭氏)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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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 정씨(迎日鄭氏)는 득성조(得姓祖)인 지백호(智伯虎)의 원손(遠孫)으로 신라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낸 종은(宗殷)을 시조(始祖)로 하고, 후손 의경(宜卿)이 영일호장(迎日戶長)을 지내고 영일현백(迎日縣伯)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이 본관을 영일(迎日)로 하였다 한다. 본관은 영일(迎日)의 옛 지명을 따라 연일(延日)로, 영일(迎日)에서도 본고장인 오천(烏川)마을 이름을 따서 오천(烏川)으로 쓰기도 했으나 근래에는 영일(迎日)로 통일해 쓰고 있다.
시조 종은(宗殷)은 신라 태종 무열왕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김유신(金庾信) 장군과 협의, 신라의 삼한통일(三韓統一)에 공을 세웠다. 그 뒤 왕에게 간언(諫言)한 것이 화가 되어 인동(仁同)의 약목현(若木縣)에 유배,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런데 그 뒤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을 고증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고려(高麗) 예종(睿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인종조(仁宗朝)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습명(襲明)을 1세조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감무(監務)를 역임한 극유(克儒)를 1세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 고려 현종 때 동비원부사를 지낸 자피(子皮)를 1세조로 하는 양숙공파(良肅公派)로 갈라져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 (상)1720년 간행된 영일정씨세보(庚子譜) 7책. (하)1649년 간행된 오천정씨족보(己丑譜) 2책. (우)1865년 간행된 영일정씨속보 14책.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 파조(派祖) 습명(襲明ㆍ?∼1151)은 호는 형양(滎陽)으로 향공진사(鄕貢進士)로 문과에 급제하여 내시(內侍)에 보임되었고, 그 뒤 기거주 지제고(起居注知制誥)를 지냈다. 인종 18년(1140년) 낭사(郎舍) 최재(崔梓), 재상(宰相) 김부식(金富軾) 등과 함께 시폐십조(時弊十條)를 올렸으나 거부당하였다. 인종 24년(1146년)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승진하여 태자(太子ㆍ의종)에게 강서(講書)하였고,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 등을 지냈다.
의종(毅宗)이 원자(元子)였을 때 습명(襲明)이 시독(侍讀)이 되었는데, 인종(仁宗)과 임후(任后ㆍ恭睿太后)는 원자(元子)가 제왕(帝王)의 그릇이 못 된다고 여겨 둘째 아들로 태자(太子)를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습명(襲明)이 진심으로 받들어서 원자(元子)를 폐하지 않았다. 그는 간관직(諫官職)에 오래 있었는데 쟁신(諍臣)의 풍모가 있어서 인종이 귀중하게 여겼다. 태자(太子)의 앞날을 부탁하였고, 임종에 다다라 의종을 불러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마땅히 습명(襲明)을 써라”고 하였다. 습명(襲明)은 선왕(先王)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의종에게 거침없이 간(諫)하다가 왕의 미움을 샀고, 또 폐신(嬖臣) 김존중(金存中)ㆍ정함(鄭鄭?) 등의 무고가 있자 왕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병이 들어 독약을 먹고 죽었다. 문명(文名)이 있어 석죽화(石竹花) 등 3편의 시와 표전(表箋)이 ‘동문선(東文選)’에 전한다.
▲ (상)1722년 읍성의 남쪽 구석에서 후손들이 묘단을 쌓고 제사를 올린 후 영조 때 포항시 대송면 남성리에 세워진 형양(滎陽) 정습명(鄭襲明)의 단소. (하)단소(壇所) 아래 세워진 재숙지소(齋宿之所)인 남성재(南城齋).
▲ 아버지는 정후감(鄭候鑑), 어머니는 정씨, 아들은 정연박(鄭淵?)으로 기록되어 있는 정습명(鄭襲明) 묘지명.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의 분파는 습명(襲明)의 10세손을 파조(派祖)로 하여 8개파로 나뉘어진다. 몽주(夢周)의 후손이 포은공파(圃隱公派), 문예(文裔)의 후손이 생원공파(生員公派), 문계(文繼)의 후손이 문계공파(文繼公派), 문손(文孫)의 후손이 문손공파(文孫公派), 문비(文備)의 후손이 사정공파(司正公派), 문욱(文彧)의 후손이 정랑공파(正郞公派), 형지(亨之)의 후손이 만호공파(萬戶公派), 희손(鄭希孫)의 후손이 도사공파(都事公派)이다.
습명(襲明)의 6대손 림(林)은 판도판서(版圖判書), 그의 큰아들 인수(仁壽)는 군기감(軍器監)으로 몽주(夢周)의 증조부가 되고 둘째 아들 인언(仁彦)은 전공판서(典工判書)에 올라 충혜왕(忠惠王) 이하 3대왕을 섬긴 중신(重臣)이었다. 그리고 8대손인 유(裕)는 직장(直長)이었고, 광후(光厚)는 고려조에 문과에 올라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ㆍ상주목사(尙州牧使) 등을 역임했으나 몽주(夢周)의 순절을 보고 벼슬을 버린 뒤 영천(永川)의 천민촌(賤民村)인 전촌(錢村)에 숨었다가 뒤에 강압에 의해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제수받았다.
▲ (상)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서원골에 자리한 일성부원근(日城府院君) 정운관(鄭云瓘)의 합장묘. (하)정운관(鄭云瓘)의 제향을 모시는 재실인 계현재(啓賢齋).
고려 말의 절신(節臣)으로 조선조 500년간 유학자들의 추앙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이 빛나는 몽주(夢周ㆍ1337∼1392)는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으로 습명(襲明)의 10세손이다. 충숙왕 6년(1337년) 경북 영천(永川)에서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운관(云瓘)의 아들 4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이씨(李氏)가 그를 임신했을 때 난초꽃 화분을 안았다가 놀라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깨어나 그를 낳았다고 하여 아명(兒名)을 몽란(夢蘭)이라 했다가, 그가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용(龍)이 배나무 위에 올라가 웃고 있는 꿈을 꾸고 깜짝 놀라 깨어나 보니 몽란(夢蘭)이 배나무 위에 올라가 용처럼 웃고 있었다 하여 다시 이름을 몽룡(夢龍)이라 고쳤다. 그후 몽룡(夢龍)이 18세 되던 어느 날 아버지 운관(云瓘)이 꿈을 꾸는데 중국의 옛 현인 주공(周公)이 나타나 몽룡(夢龍)을 가리키며 “후세까지 이름을 빛나게 할 아이이니 잘 키워라” 하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이름을 주공(周公)의 ‘주(周)’자를 따서 몽주(夢周)로 고쳤다고 한다. 그는 공민왕 9년(1360년) 삼장(三場)에 연달아 장원급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공민왕 13년(1364년) 병마사(兵馬使) 이성계(李成桂)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여진(女眞)의 삼선(三善)ㆍ삼개(三介)를 화주(和州)에서 격퇴하였다. 전농사승(典農寺丞), 예조정랑(禮曹正郞), 사성(司成)을 거쳐 공민왕 21년(137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에 다녀왔다. 우왕(禑王) 때 대사성(大司成)과 삼사좌사(三司左使)를 거쳐 창왕(昌王) 때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이성계(李成桂)와 같이 공양왕(恭讓王)을 세우고 문하찬성(門下贊成) 등 여러 벼슬을 받고, 익양군(益陽君) 충의백(충義伯)에 봉해져서 좌명공신(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 (上)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영정과 공민왕 9년(1360년) 문과 장원에 뽑힌 포은(圃隱)의 답안지. (下)개성시 선죽동(善竹洞) 자남산 동쪽 기슭의 작은 개울에 있는 선죽교(善竹橋)는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가 방원(芳遠)이 보낸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쇠몽둥이로 맞아 피살된 곳으로 유명하다.
외교에도 뛰어난 수완을 보여 여러 차례 명(明)과 왜(倭)에 사신으로 가서 국가의 우호관계를 다지는데 공헌했으며, 특히 그는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원조(元祖)라 칭할 정도의 대표적 성리학자(性理學者)였다. 벼슬은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으나. 고려 왕조의 멸망과 함께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새 왕조 창업을 반대하다가 이방원(李芳遠)의 문객(門客)인 조영규(趙英珪)에게 개성 선지교(選地橋)에서 피살되었다. 그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자리에는 푸른 대나무가 솟아나 다리 이름이 선죽교(選竹橋)로 바뀌었다고 전하며, 그의 시체는 죄과(罪過)로 몰았기 때문에 내버려 두었으나 송악산(松嶽山) 중들이 염습(殮襲)하여 풍덕(豊德) 땅에 묻었다.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현리에 자리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묘(경기도지방문화재 제1호).
그가 죽은 지 3개월만에 들어선 조선의 태종(太宗)은 권근(權近)의 상소를 받아들여 그의 묘를 고향인 영천(永川)으로 이장할 것을 허락하였고, 관작을 복구시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렸으며, 자손들에게 토지와 벼슬을 내려주었다. 그의 묘(墓)를 이장할 때 면례(緬禮) 행렬이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에 이르자 앞세웠던 명정(命旌)이 바람에 날려 지금의 묘자리에 떨어졌으므로 이곳에다 이장하였다고 한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 (上)개성시 선죽동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살던 집터에 세운 숭양서원(崧陽書院). (中)정몽주를 추모하기 위해 1553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세워진 임고서원(臨皐書院). 1602년 현 위치로 옮겨 중건했으며, 1980년 보수정화하였다. (下)형양(滎陽) 정습명(鄭襲明)과 정몽주(鄭夢周)를 추모하기 위해 1588년 포항시 오천읍 원리에 세워진 오천서원(烏川書院)은 1613년 사액되었다.
▲ 중종 12년(1517년) 중종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묘 중심으로 700여 정보를 사패지로 정해 경계 표시를 했으며, 산직(山直) 5인을 두어 수호케 한 문충공산소환봉수칙문안(文忠公山所環封修飭文案).
몽주(夢周)의 아들 종성(宗誠)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지냈으며, 학문이 탁월하여 세종(世宗)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던 몽주(夢周)의 손자 보(保)는 예안현감(禮安縣監)ㆍ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등 관직을 역임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쿠데타로 단종이 쫓겨나자 벼슬을 떠났다.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그들이 사형에 처하게 되자 “성삼문(成三問) 등은 의인이니 죽이면 후세에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직언을 한 것이 한명회(韓明澮)를 통해 세조(世祖)에게 알려져 친국(親鞫)을 받을 때 “나는 항상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을 성인군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좌우의 신하들이 “스스로 자백했으니 처형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에 세조는 수레로 쳐어 죽이라고 명하고 나서 묻기를 “이는 어떤 사람인가?” 하니, 좌우에서 “이는 정몽주의 손자입니다”라고 하자 급히 명하여 형벌을 그치게 하고는 “충신의 후손이니 특히 사형을 감하여 귀양보내라.”고 하였다. 그는 경남 단성(丹城)에 유배당했다가 그곳에서 죽었으며, 숙종 때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묘 왼쪽에 자리한 아들 정종성(鄭宗誠)의 합장묘((上)와 정몽주의 묘 오른쪽에 자리한 정종성(鄭宗誠)의 아들 정보(鄭保)의 묘.
종소(從韶)는 자는 사정(司貞), 호는 정헌(靖軒)으로 세종 29년(1447년)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올랐으나 세조 2년(1456년)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가 실패하여 처형되었던 사건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은거생활을 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은 그를 오천(烏川)의 정선생(鄭先生)이라 불렀다 한다.
▲ 경북 영주시 영주1동 시청내에 있는 영훈정(迎薰亭ㆍ경북도문화재자료 제414호)은 1460년경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사신을 마중하고 배웅하기 위해 세운 정자로 일제시대 이곳으로 이전했다.
종소(從韶)의 아들 이교(以僑ㆍ?~1498)는 자는 자미(子美), 호는 만취당(晩翠堂)으로 1468년에 진사(進士), 1470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지내고, 1486년에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ㆍ역전랑(歷銓郞)ㆍ한림(翰林)ㆍ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함흥으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 정세아(鄭世雅)의 장손인 해남현감 정호례(鄭好禮)가 1643년 영천시 대전동에 지은 호수종택(湖?宗宅ㆍ경북도유형문화재 제90호).
세아(世雅ㆍ1335~1612)는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호수(湖?)로 명종 13년(1558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해 대장이 되어 영천(永川)의 적을 격퇴하고 이듬해 서울이 수복되자 군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맡기고 자양(紫陽)에 들어갔다.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추천을 받아 여러 차례 기용되었으나 사양하다가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을 잠시 지내고 곧 사직, 장현광(張顯光)ㆍ조호익(曺好益)ㆍ이준(李埈)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병조판서에 추증(追贈)되고, 영천(永川)의 환고사(環皐祠)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시호(諡號)는 강의(剛義).
▲ 경북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에 자리한 환구세덕사(環丘世德祠)는 호수(湖?) 정세아(鄭世雅)와 아들 정의번(鄭宜藩)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대부분 훼철되고 충효각과 부속건물인 유사채와 고직사가 남아 있다.
세아(世雅)의 아들 의번(宜藩ㆍ1560~1592)은 자는 위보(衛甫), 호는 백암(栢巖)으로 선조 18년(158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천(永川)에서 승리하고 이어 경주(慶州)에 진격하여 싸우다가 적에게 포위당해 위기에 빠진 아버지를 구출, 혈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영조 때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고, 영천(永川)의 환고사(環皐祠)에 제향되었다.
▲ 경북 영천시 녹전동에 자리한 창대(昌臺) 정대임(鄭大任)의 종택과 그를 배향한 영천시 과전동 창대서원(昌臺書院) 및 창대공실기(昌臺公實記).
대임(大任ㆍ1553~1594년)은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대(昌臺)로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당지산(唐旨山)에서 복병으로 적을 대파, 이어 영천(永川)에서 전공을 세우고 이듬해 돌격장(突擊將)으로 울산 태화진(蔚山太和津)에서 역전한 공으로 예천군수(醴泉郡守)가 되었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으며,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몽주(夢周)의 10세손 유성(維城ㆍ1596~1664)은 자는 덕기(德基), 호는 도촌(陶村)으로 10세 때 외할아버지 황치경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 학문을 닦은 뒤 인조 5년( 1627년) 강도(江都)에서 보인 정시문과(正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호조(戶曹)ㆍ예조(禮曹)ㆍ이조(吏曹)ㆍ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현종(顯宗) 때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으며, 청빈(淸貧)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은대일기(銀臺日記)’가 남아 전하며, 시호는 충정(忠貞).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화일리 진강산 줄기에 자리한 도촌(陶村) 정유성(鄭維城)의 묘.
▲ 한국 양명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하곡(霞谷) 정제두(鄭齋斗)의 시문집인 하곡집(霞谷集)과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에 자리한 묘(인천시기념물 제56호).
주자학 일변도이던 조선조 사상계에서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여 독특하며 강화학파의 터를 잡은 이는 유성(維城)의 손자인 제두(齊斗ㆍ1649~1736)이다. 제두(齊斗)는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이 있어 강화에 은거하며 학문연구에만 몰두, 백가(百家)에 통달하였다. 그는 관념론적인 주자(朱子)의 유교(儒敎) 경전 해석에 정면으로 도전,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 유학(儒學)을 주창한 왕양명(王陽明)의 학설을 받아 들였다. 주자학(朱子學)만이 유학의 정통으로 높여지고 그에 대한 이론이나 반박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이단시되던 풍토에서 그는 학자적 양심으로 학문의 참된 길을 찾아 생활 속에 유학을 발전시켰다. 그에 의해 우리나라의 양명학(陽明學)은 체계를 잡게 되었으며, 당시 사상계를 휩쓸어 가던 실학(實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학문과 덕행으로 명성이 있어서 숙종조 이래 조정 중신들의 30여 차례에 걸친 천거로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호조참의ㆍ대사헌ㆍ호조참판ㆍ우찬성 등을 마지못해 잠깐씩 지냈을 뿐 학문에만 힘썼다. 아들 후일(厚一)이 가학(家學)을 전하였으며, 그의 현손 문승(文升)은 고종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는데 산수화의 명인으로 꼽혔다.
▲ 양계(暘溪) 정호인(鄭好仁)을 추모하기 위해 1640년 후손들이 경북 영천시 대전동에 창건한 양계정사(暘溪精舍ㆍ경북도민속자료 제88호). 현 건물은 화재로 1700년대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안번(安藩)의 아들 호인(好仁ㆍ1597~?)은 자는 자견(子見), 호는 양계(暘溪)로 장현광(張顯光)을 사사하였으며, 문장과 재행(才行)이 탁월하였다. 광해군 10년(1618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인조 5년(162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부원사(副元師)가 되어 향병(鄕兵)을 모집하였고, 1637년 이후 1654년까지 여러 고을의 수령으로 임명되었으나 때로는 부임하지 않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학문을 닦고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으며, 대구(大邱)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 기암(企菴) 정만양(鄭萬陽)과 정규양(鄭葵陽) 형제가 후학 양성을 위해 1716년 경북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에 세운 옥간정(玉磵亭ㆍ경북도유형문화재 제270호).
만양(萬陽ㆍ1664∼1730)은 자는 경순(景醇), 호는 훈수(塤?)ㆍ기암(企菴)ㆍ정재(定齋)로 호인(好仁)의 손자이다. 종조부 시연(時衍)과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아우 규양(葵陽)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경사(經史)는 물론, 성리학ㆍ예학ㆍ천문ㆍ지리ㆍ역학ㆍ경제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옛날 정호(程顥)ㆍ정이(程?) 형제와 같다고 하였다. 경종 4년(1724년)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영조 4년(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 명을 모아 아우 규양(葵陽)을 의병장으로 삼고 규율을 모두 갖추었는데, 관군이 난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문장이 전아(典雅)하고 순수하고 진실하였으며, 글씨에도 능해 전서(篆書)를 잘 썼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으며, 영천의 횡계서원(橫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훈지문집(塤?文集)’ 62권이 있다.
▲ (좌)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가 짓기 시작하여 아들 정일찬(鄭一纘)이 완공한 것으로 전하는 매산종택(梅山宗宅). (우)매산종택 서남쪽 바위벽에 서 있는 산수정(山水亭).
중기(重器ㆍ1685~1757)는 자는 도옹(道翁), 호는 매산(梅山)으로 이형상(李衡祥)의 문인이다. 영조 3년(1727년) 생원(生員)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31년 주서(注書)가 되고, 이어 결성현감(結城縣監)으로 나가 이도(吏道)를 바로 잡고 여씨향약(呂氏鄕約)에 의거하여 향속(鄕俗)의 순화(醇化)에 노력했으며, 정언(正言)을 거쳐 영조 29년(1753년) 지평(持平)이 되고, 뒤에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다.
▲ (좌)1906년 정환직(鄭煥直)ㆍ정용기(鄭鏞基) 부자가 중신이 되어 조직한 산남의진(山南義陳)에 가담해 대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 순국한 선열과 의병을 기리기 위해 영천시 창구동에 세워진 산남의진비(山南義陳碑). (우)정환직(鄭煥直)ㆍ정용기(鄭鏞基) 부자의 충효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923년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에 세운 충효재(忠孝齋).
그외 환직(煥直)은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수차에 걸쳐 전공을 세운 뒤, 적의 대부대를 만나 동대산(東大山)에서 체포되어 영천에서 총살당했으며, 용기(鏞基)는 을사조약(乙巳條約) 때 아버지 환직(煥直)의 명을 받아 의병을 일으켜 산남진대장(山南陣大將)이 되었고 영천(永川)을 중심으로 크게 기세를 떨쳤으나 뒤에 전투 중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부자(父子)의 충효대절(忠孝大節)을 추모하여 방명(坊名)을 충효동(忠孝洞)이라 하였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감무공파(監務公派) 고려 때 감무(監務)를 거쳐 현감(縣監)을 지낸 극유(克儒)를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세대(世代)를 잇고 있다. ‘임신보(壬申譜)’ 서문에 보면, 간관공(諫官公) 정종은(鄭宗殷)으로부터 20대 가량은 계통(系統)을 댈 수 없으나, 감무공(監務公) 극유(克儒) 이후 비로소 세계(世系)와 소목(昭穆)을 상고할 수 있게 되어, 감무공(監務公)을 기세조(起世祖)로 한다고 하였다. 극유(克儒)의 후손은 4세조까지는 단계로 이어졌고, 5세조 이후의 후손에서 몇 개의 파로 나뉘어졌다. 사도(思道)의 아들인 7세조 홍(洪)의 후손이 공간공파(恭簡公派)이고, 그 아들 진(鎭)의 후손이 정원공파(靖元公派), 연(淵)의 후손이 정숙공파(貞肅公派)이다. 정원공(靖元公)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세 아들의 후손이 각각 강화공파(江華公派)ㆍ원평공파(原平公派)ㆍ부마공파(駙馬公派)로 나뉘어졌다. 정숙공(貞肅公)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 후손이 각각 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ㆍ이의공파(吏議公派)ㆍ위양공파(威襄公派)ㆍ김제공파(金堤公派)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5세조 후(煦)의 후손은 남승(南升)-여해(汝諧)의 단계(單系)로 이어져 오성군파(烏城君派)로 나뉘어졌다.
▲ 기세조(起世祖) 정극유(鄭克儒)로부터 6세 정사도(鄭思道)로 이어지는 계보도.
▲ 문정공(文貞公) 정사도(鄭思道)가 경상도순무사로 임명되었다는 ‘고려사(高麗史)’ 41권 공민왕 14년(1365년) 1월 17일 기록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있을 때인 ‘고려사’ 43권 공민왕 20년(1371년) 7월 25일 기록.
사도(思道ㆍ1318~1379)는 종부령(宗簿令) 유(侑)의 아들로 충숙왕 복위 5년(1336년) 문과에 급제, 충혜왕 복위 2년(1341년) 권지전교교감(權知典校校勘)이 되었고, 후에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묘를 지켜 이를 가상히 여긴 공민왕(恭愍王)으로부터 일성군(日城君)에 봉해지고,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다.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서 합포(合浦)를 지킬 때 군사ㆍ민정(民政)에 모두 업적을 남겼으나 최영(崔瑩)의 제거를 꾀하는 신돈(辛旽)에게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그후 다시 밀직(密直)에 복직, 동북면 상원수 도순문사(東北面上元師都巡問使)를 거쳐 우왕 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ㆍ정당문학(政堂文學)ㆍ평리상의(評理商議) 등을 역임하고 오천군(烏川君)에 개봉(改封)되고 공신(功臣)이 되었다. 연일(延日)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정(文貞).
▲ 경북 포항시 연일읍 중명2리에 자리한 문정공(文貞公) 정사도(鄭思道)의 유허비.
사도(思道)의 아들 홍(洪)은 우왕 3년(1377년) 문과에 급제한 후 자헌대부(資憲大夫)를 지내고, 조선조에 들어와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ㆍ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공간(恭簡).
▲ 공간공(恭簡公) 정홍(鄭洪)이 좌우상시(左右常侍)에 임명되었다는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 2년(1390년) 3월 7일 기록과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는 46권 공양왕 3년(139년) 12월 24일 기록.
홍(洪)의 아들 연(淵ㆍ1389~1444)은 자는 중심(仲深), 호는 송곡(松谷)으로 안평대군 용(瑢)의 장인이다. 태종 5년(140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1414년 지평(持平)에 재직 중 당시 수상(首相)이던 하륜(河崙)을 탄핵한 일로 순금사(巡禁司)에 내려져 국문을 받았으나 속죄되어 풀려났다. 도관(都官)ㆍ정랑을 거쳐 종부시 소윤(宗簿寺少尹)에 올랐다. 세종 2년(1420년) 다시 장령(掌令)이 되었을 때 상왕(上王ㆍ태종)이 철원(鐵原)에 가려는 것을 간(諫)하다가 진산(珍山)에 유배, 뒤에 풀려나와 1424년 다시 장령이 되고, 이어 선공감정(繕工監正)ㆍ집의(執義)ㆍ동부대언(同副代言)ㆍ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1430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인순부윤(仁順府尹)ㆍ중추원사(中樞院使)ㆍ병조판서를 거쳐 1442년 사은 겸 주문사(謝恩兼奏聞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44년 병으로 사직했다. 시호는 정숙(貞肅).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에 자리한 송곡(松谷) 정연(鄭淵)의 묘(경기도기념물 제139호).
홍(洪)의 손자 효전(孝全ㆍ?~1453)은 판서 진(鎭)의 아들로 태종의 딸 숙정옹주(淑貞翁主)를 아내로 맞아 세종 4년(1422년) 일성군(日城君)에 봉하여졌다. 세종 15년(1433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문종 즉위년(1450년) 진하사(進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병조판서를 거쳐 삼군도진무사(三軍都鎭撫使)에 올랐다. 단종 1년(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 등 중신(重臣)을 살해하자 병을 핑계하여 나가지 않다가 파직되었다. 이에 수양대군에 의해 파면, 집에 돌아와 의분을 참지 못하여 주먹으로 가슴을 치다가 피를 토하면서 죽었다. 이듬해 그의 죄를 추론당한 끝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성종 때 신원되었으며, 뒤에 단종묘에 배향되었다. 순조 4년(1804년) 충경(忠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충경공(忠景公) 정효전(鄭孝全)이 태종의 사위가 되었다는 ‘세종실록(世宗實錄)’ 15권 4년(1422년) 1월 18일 기록(左)과 병으로 인해 외방에 보석되어 있다 죽었다는 ‘단종실록(端宗實錄)’ 10권 2년(1454년) 3월 4일 기록.
한편 효전(孝全)의 큰 형인 효손(孝孫)은 단종 2년(1454년) 막내동생인 효전(孝全)이 화를 당하자 이에 연좌되어 장남 유석(維碩)은 거제(巨濟)에 유배되었다 죽임을 당했고, 차남 신석(臣碩)은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둘째 형인 효순(孝順)은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으며, 차남 석례(錫禮)는 첨지(僉知)를 지냈는데 이 사건에 연좌되어 가산을 몰수당했다. 셋째 형인 효강(孝康)은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냈는데, 아들과 함께 보성관(寶城官)의 노비가 되었다가 단종 2년(1454년) 부자(父子)는 교수형에 처해졌고, 처자(妻子)는 노비가 되었다.
자(滋ㆍ1515~1547)는 중종 35년(1540년) 진사(進士)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44년 정언(正言)이 되고, 명종 죽위년(1545년)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대윤(大尹)인 윤임(尹任)의 처남이라 하여 소윤(小尹)에 의해 광양(光陽)에 안치,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다시 죄가 가중되어 경원(慶源)으로 이배(移配)되던 도중에 죽었으며 선조(宣祖) 때 신원되었다. 한편 자(滋)의 동생 소(沼)는 인종 1년(1545년) 을사사화 때 형이 죄없이 화를 당한 것을 애통하게 여겨 순천(順川)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위패를 봉안한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정송강사(鄭松江祠).
자(滋)와 소(沼)의 동생인 철(澈ㆍ1536~1593)은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으로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유심(惟沈)의 막내아들이며,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인종(仁宗)의 후궁인 맏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유(瑜)의 부인이 된 둘째 누이 때문에 궁중에 출입, 어린 경원대군(慶源大君ㆍ명종)과 친숙해졌다. 그가 열 살 되던 때인 명종 즉위년(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계림군(桂林君)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큰 형은 귀양길에 죽고 아버지가 유배당할 때 배소(配所)에 따라다녔다. 명종 6년(1551년) 특사되어 온 가족이 고향인 전라도 창평현(昌平縣)으로 이주, 여기서 김윤제(金允悌)의 문하가 되어 성산(星山) 기슭의 송강(松江)가에서 10년 동안 수학하는 동안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등 석학(碩學)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문장을 익혔다. 이 수학기간에 그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과도 교분을 맺어 훗날 조정에서 함께 일하게 된다. 27세 되던 명종 17년(1562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가, 명종 22년(1567년)에 이이(李珥)와 같이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그 때는 이미 동서(東西)의 당쟁이 노골화하던 때였는데 철(澈)은 어느 틈에 서인(西人)의 거두가 되어 동인(東人) 이발(李潑) 일파와 맞서게 되었으며, 선조 13년(1580년) 마침내 반대당에게 밀려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아가 조용히 관동팔경을 벗하여 지냈다. 이듬해 다시 조정에 돌아왔으나 동인(東人)들의 세력이 굳어져 있어 관직을 사퇴하고 창평(昌平)에 물러가 있었다. 선조 22년(1589년) 다시 부름을 받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나 얼마 후 다시 동인(東人)에게 밀려나 명천(明川)ㆍ진주(晋州)ㆍ강계(江界) 등지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지인 강계(江界)에서 풀려났다. 57세에 사은사(謝恩使)로 명(明)에 다녀온 후 다시 반대파의 탄핵을 받자 강화로 낙향, 그곳에서 빈곤과 울분 속에서 병사했다.
▲ 정송강사(鄭松江祠) 남쪽 100m 지점에 자리한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아버지의 묘. 원래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신원리에 있었으나 송시열이 이곳에 자리를 정하고 후손들이 이장하였다.
▲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신원리 송강마을 뒷산에 자리한 강아(江娥)의 묘.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시 그를 섬긴 강아는 임진왜란시 평양성 탈환에 공헌했으며, 나중에 여승이 되었다.
사후 반대당의 참소로 벼슬이 박탈됐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상소로 관직이 복구됐으며, 숙종 10년(1684년) 문청(文淸)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는 본래 성질이 바른 말을 잘하는 데다 당화(黨禍)를 입어 거의 평생을 귀양살이로 마쳤지만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었으니,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 어린 시절을 보낸 창평(昌平) 성산(星山)을 읊은 ‘성산별곡(星山別曲)’을 비롯하여 ‘사미인곡(思美人曲)’ㆍ‘속미인곡(續美人曲)’ㆍ‘장진주사(將進酒辭)’ 및 시조 70여 수가 전한다. 철(澈)의 아들 홍명(弘溟)은 자는 자용(子容), 호는 기암(畸庵), 어려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광해군 8년(1616년) 문과에 급제한 후 수원부사(水原府使)ㆍ함양군수(咸陽郡守)를 거쳐 인조 24년(1646년)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아들 문정공(文貞公) 정홍명(鄭弘溟)의 시.
홍명(弘溟)의 형 종명(宗溟ㆍ1565~1626)은 선조(宣祖) 때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선조 23년(1590년) 진사(進士)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1594년 아버지의 죄가 추론(推論)되자 이를 항변하다가 삭출(削黜),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직강(直講)에 보직되고 보덕(輔德)을 거쳐 강릉부사(江陵府使)가 되어 임지에서 죽었다.
▲ 장암(丈巖) 정호(鄭澔)의 간찰.
호(澔ㆍ1648~1736)는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 송강(松江)의 현손이자 종명(宗溟)의 증손으로 영일 정씨(迎日鄭氏)의 후손으로는 유일하게 영의정(領議政)이 된 인물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하로 매우 촉망받았으며, 숙종 1년(1675년) 송시열이 귀양가게 되자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性理學)에 힘썼다. 그 뒤 여러 형제의 권유로 숙종 8년(1682년) 생원(生員)이 되고, 168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거쳐 정언(正言)을 지내고 1689년 기사환국(己巳還局)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출되고 송시열이 사사(賜死)당하자, 그는 파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 당했다가 경성(鏡城)에 유배되었다. 숙종 20년(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西人)이 가용될 때 풀려나와 지평(持平)ㆍ수찬(修撰)ㆍ교리(校理) 등을 역임하고, 1698년 다시 집의(執義)ㆍ사간(司諫)을 거쳐 이듬해 동래부사로 나갔다가, 1700년 신은(新銀) 12만 냥을 왜에 상매(商買)한 관계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기용되었고, 1702년 동부승지(同副承旨)ㆍ부제학(副提學)을 거쳐 1704년 함경도 관찰사에 이어 1710년 대사간ㆍ대사헌을 지냈는데, 당론을 일삼는다 하여 흥해ㆍ갑산 등지에 유배되었다. 1713년 대사성에 재임용되어 송시열의 묘정(廟庭) 배향을 건의하였다.
▲ 문경공(文敬公) 정호(鄭澔)의 영정을 모신 충북 충주시 가금면 창동마을의 장암사당(丈巖祠堂).
1715년에는 부제학으로서 유계(兪棨)의 유저(遺著)인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썼는데, 그 내용에 소론인 윤증(尹拯)이 송시열을 배반했다는 내용이 문제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노론이 승리함으로써 대사헌이 되었는데, 이 때 윤선거(尹宣擧)의 문집 ‘노서유고(魯西遺稿)’가 간행되자, 효종에게 불손한 내용으로 썼다 하여 훼판(毁板)하고 윤선거 부자의 관작도 추탈하게 하였다. 1717년 세자(世子ㆍ경종)의 대리청정(代理廳政)에서 소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를 시행하도록 했고, 예조판서를 거쳐 다음 해 이조판서에 올랐다. 경종 1년(1721년)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 ‘숙종실록(肅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다가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노론 4대신과 함께 파직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영조 1년(1725년) 노론의 재집권으로 풀려나와 우의정에 승진되어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죽은 노론 4대신의 신원(伸寃)을 누차 상소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172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죽었다. 일생을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늘 가난하게 지냈다 하며, 시문과 글씨에 모두 솜씨가 있었다. 충주의 누암서원(樓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충북 괴산군 감물면 지장리에 자리한 문경공(文敬公) 정호(鄭澔)의 묘(충남도기념물 제141호).
▲ (좌)문충공(文忠公) 정우량(鄭羽良) 영정. (우)문경공(文敬公) 정호(鄭澔) 영정.
영조조에 ‘형제정승’으로 이름을 날린 우량(羽良)과 휘량(?良)은 송강(松江)의 방손(傍孫)이다. 아버지 수기(壽期) 또한 판서를 지냈는데, 형제가 모두 문장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우량(羽良ㆍ1692∼1754)은 자는 자휘(子?), 호는 학남(鶴南)으로 경종 3년(172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1727년 정언(正言)이 되어 당시 백성들을 효유(曉諭)하는 왕의 교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각도에 반포하였다. 부수찬(副修撰)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임할 때 왕에게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문집을 인판(印版)하기를 주청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좌승지(左承旨) 때에는 공종수(孔宗洙)를 선성(先聖)의 후예로 추대하고 반궁(泮宮)에 두어 녹(祿)을 지급할 것을 소청하여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조참판 당시 민통수(閔通洙)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이천부사로 좌천되었으나, 이어 우참찬(右參贊)이 된 뒤에는 한성부(漢城府)에 있는 서북인을 등용하여 인심을 수습할 것을 주청하였다. 영조 25년(1749년)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그 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전임되었다. 글씨에 능하여 작품으로 개성계성사비문(開城啓聖祠碑文)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
▲ (좌)학남(鶴南) 정우량(鄭羽良) 유묵. (우)남애(南崖) 정휘량(鄭?良) 유묵.
휘량(?良ㆍ1706∼1762)은 우량((羽良)의 동생으로 자는 자우(子羽)ㆍ사서(士瑞), 호는 남애(南崖)로 영조 9년(173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고, 1737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한 뒤, 시독관(侍讀官)ㆍ응교(應敎)를 지냈다. 1756년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며, 그 뒤 호조ㆍ공조ㆍ이조ㆍ병조의 판서를 지내고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761년 우의정이 되고 곧 좌의정에 올랐다. 당시 왕의 탕평책을 반대하고 소론의 제거를 주장하여, 조태구(趙泰耉)ㆍ유봉휘(柳鳳輝) 등의 죄를 탄핵해 노적(奴籍)으로 떨어뜨리고 이광좌(李光佐)ㆍ최석항(崔錫恒)도 추탈(追奪)되게 한 다음, 사직하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의 한직에 전직하였다. 치달(致達)의 숙부로서 안으로 치달(致達)의 처인 화완옹주(和緩翁主)의 도움이 많았으며, 은밀히 김상로(金尙魯)ㆍ홍계희(洪啓禧)의 일당과 통하여 무진ㆍ기사 연간에 사설(辭說)을 일으켰다. 시호는 문헌(文憲)으로 저서로는 ‘남애집(南崖集)’ㆍ‘견사록(見思錄)’ 등이 있다.
한말(韓末)의 인물인 기원(岐源)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당시 강화진무사(江華鎭撫使)로 재직 중 불법으로 침입해 온 미국의 행위에 항의해 통상교섭을 거절하였고, 경원(敬源)은 한말 외세에 의지해 이른바 개화(開化)를 이룩하려 한 친일 김홍집 내각에 참여한 인물로 갑오경장(甲午更張) 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자 그 회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김홍집내각의 법부협변(法部協辨)이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낙용(洛鎔)은 갑오년 관제개편 후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ㆍ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ㆍ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등을 역임하고, 1910년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 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아 남작(男爵)이 되었다.
▲ 조선 말 순국열사 정동식(鄭東植)의 교지.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식(東植ㆍ1850~1910)과 재건(在健)은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 후 포고문(布告文)이나 토적문(討賊文)을 남기고 자결하였으며, 이 파(派)에서는 조선조에 상신(相臣) 4명과 3명의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하는 등 융성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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