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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최)

수원 최씨(水原崔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수원 최씨(水原崔氏)의 연원 

수원 최씨(水原崔氏)는 최씨(崔氏)의 득성시조(得姓始祖)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경주 최씨(慶州崔氏)와 동원(同源)이며,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두 계통으로 나뉘어진다. 한 계통은 고려 때 산원동정(散員同正)을 지낸 최정(崔靖)을 시조로 하며 그의 선대에 대해서는 문헌이 없어 알 수 없으며, 또 다른 계통은 고려 제15대 예종(睿宗) 때 수주(水州ㆍ수원의 옛 이름)의 호장(戶長) 최상저(崔尙?)를 시조로 한다.

분파로는 최정(崔靖)계는 서초파(西初派)ㆍ명천파(明川派)ㆍ서인파(西仁派)ㆍ정파(貞派)로 분파되었고, 최상저(崔尙?)계는 참판공파ㆍ천민공파(天民公派)ㆍ진사공파로 분파되었다. 그리고 수원(水原)의 옛 이름이 수성(隋城)이라 수원 최씨(水原崔氏)와 수성 최씨(隋城崔氏)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수원 최씨(水原崔氏)는 원최(原崔)라 하고 수성 최씨(隋城崔氏)는 내최(來崔)라고 부른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고려 의종 때의 효자인 루백(婁伯ㆍ?~1205)이 유명하다. 그는 수원(水原)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상저(尙?)의 아들로, 나이 15세 때 아버지가 사냥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해를 당하였다. 누백(婁伯)이 호랑이를 잡으려는 것을 어머니가 말리니, “아버지의 원수를 어찌 갚지 않겠습니까” 하며 도끼를 들고 추적하자, 호랑이는 이미 그의 아버지를 먹고 배가 불러 누워 있었다. 누백이 곧장 달려가 “너가 우리 아버지를 먹었으니 나는 마땅히 너를 먹으리라” 하고 호랑이를 꾸짖어 말하니 호랑이가 꼬리를 흔들며 엎드렸다. 그러자 얼른 도끼로 찍어 죽이고 그 배를 갈라 아버지의 뼈와 살을 내고 호랑이의 고기는 독에 담아서 냇물 가운데 묻고 아버지의 해육(骸肉)을 그릇에 담아 홍법산(弘法山) 서쪽에 안장하고 3년 동안 여막(廬幕)에 살았으며, 시묘살이를 마치고 항아리에 묻어 두었던 호랑이의 고기를 꺼내어 모두 먹었다고 한다.

▲ ‘고려사(高麗史)’ 121권 열전 34권에 실린 효숙공(孝肅公) 최루백(崔婁伯) 열전과 1797년 편찬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에 실려 있는 최루백(崔婁伯)의 ‘루백포호도(婁伯捕虎圖)’와 유묵

 

 

루백(婁伯)의 효행은 ‘고려사 열전(高麗史列傳)’ㆍ‘세종실록지리지’ㆍ‘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ㆍ‘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ㆍ‘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서도 실려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후 문과에 급제하여 의종(毅宗) 때 기거사인(起居舍人)에 올라 의종 7년(1153년) 금(金)나라에 가서 용흥절(龍興節)을 축하하고 돌아왔으며, 의종 9년(1155년) 평장사(平章事) 최자영,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양원준(梁元俊) 등과 함께 국정(國政)에 관한 왕의 자문에 응하였다. 의종 12년(1158년)에는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서 국자제주(國子祭酒) 염직량(廉直凉)과 함께 생원시를 맡아보기도 했으며, 후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루백(婁伯)은 100살을 넘게 살다가 1205년 12월에 사망하였으며, 사후 효숙공(孝肅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수기리에 자리한 최루백(崔婁伯)의 효자비각. 오른쪽은 아버지이자 시조인 최상저(崔尙?) 비각.

후에 조선 정조(正祖)가 화산(花山) 아래 수원구읍치(水原舊邑治)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신 현륭원(顯隆園)을 천장(遷葬)하면서 융릉(隆陵) 남쪽에 있던 루백(婁伯)의 비각을 서남쪽 홍범산 기슭으로 옮기고 루백(婁伯)이 태어난 마을을 효자동(孝子洞)으로, 호랑이를 잡은 뒷산의 큰 바위를 효암(孝巖)이라 명명하고 그의 자손에게 부역을 면해 주었다고 한다. 한편 루백(婁伯)은 아내인 염경애(廉瓊愛)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아내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긴 묘지명(墓誌銘)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 의종 2년(1148년) 최루백(崔婁伯)은 2년 전 죽은 아내의 묘지명을 직접 적은 염경애廉瓊愛) 묘지석. 클릭!


자성(滋盛ㆍ1065~1143)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거쳐 예종 13년(1118년) 급사중(給事中)으로 도(道)를 분담하여 군사를 선출하였고, 예종 16년(1121년) 동북면병마가 되고 인종 5년(1127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ㆍ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이듬해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다. 인종 7년(1129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 이듬해 판상서예부사(判尙書禮部事), 1131년 검교사공 중서시랑 판병부사(檢校司空中書侍郎判兵部事)가 되었다. 이듬해 평장사(平章事)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인 이부시랑 임존(林存)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였으나, 부제(賦題)를 잘못 내었다는 법사(法司)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이어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로 복직되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으나 이듬해 치사(致仕)하였다. 관리로 치적이 있었으나 이자겸(李資謙)의 난 때 그의 집에서 일 본 것을 사람들이 흠으로 여겼다. 시호는 충렬(忠烈).



▲ (上)‘고려사(高麗史)’ 98권 열전 11권 제신(諸臣)의 최자성(崔滋盛) 열전. (下)급사중(給事中)에 임명되었다는 ‘고려사’ 14권 세가 14권 예종 13년(1118년) 9월 기록 및 인종 21년(1143년) 12월 10일 졸하였다는 14권 세가 14권 기록.


 

 

자성(滋盛)의 아들 유항(袖抗ㆍ1101∼1147)은 자는 여악(汝岳)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문음(門蔭)으로 호부주사동정(戶部主事同正)에 임명되었다. 예종 16년( 1121년) 여택재생(麗澤齋生)이 되었으며 행실이 뛰어나 그 재장(齋長)에 뽑혔다. 인종 2년(1124년) 과거에 급제하여 1126년 보문각 교감(寶文閣校勘)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내시성(內侍省)에서 수년간 봉직하였다. 인종의 명으로 사부문적(四部文籍)을 검열하였을 때, 대신의 아들이며 도량이 중후하다 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뒤 왕명의 출납을 맡았으며,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ㆍ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ㆍ비서소감 병부사(秘書少監知兵部事) 등을 역임하였다.

▲ ‘고려사(高麗史)’ 94권 열전 7권 제신(諸臣)의 정숙공(貞肅公) 최사위(崔士威) 열전. 클릭!

 

 

고려 현종(顯宗) 때 현신(賢臣) 사위(士威ㆍ961~1041)는 목종(穆宗) 때 형부상서(刑部尙書)ㆍ대정문별감(大定門別監)을 지냈고, 목종 12년(1009년) 김치양(金致陽)의 난 때 궁중문을 폐쇄하고 왕을 호위하는 공을 세웠다. 이듬해 현종 1년(1010년) 통군사(統軍使)에 보직되어 강조(康兆) 등과 함께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통주(通州ㆍ지금의 평북 선천)에 나가 거란(契丹)의 침입을 방어하였으나 패하였다. 서경유수(西京留守)ㆍ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며 장연우(張延祐) 등과 합심하여 동경유수(東京留守)를 폐하고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를 두게 하는 한편,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폐하고 5도호(都護) 75도(道)에 안무사(安撫使)를 두게 했다.

1013년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뒤 1019년 추충좌리 동덕공신 청하현 개국남(推忠佐理同德功臣淸河縣開國男)에 봉해진 뒤 1021년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에 올라 이때 군현(郡縣) 이상의 관리는 호장(戶長), 그 이하 이속(吏屬)은 장(長)이라 부르도록 하였다. 1027년 태자태사(太子太師)를 겸하였고 1031년 내사령(內史令)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죽은 뒤 태사(太師)가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문종 6년(1052년) 왕이 “검교태사내사령(檢校太師內舍令) 최사위(崔士威)가 선왕조(先王朝)에 청절(淸節)과 직도(直道)로써 많은 도움이 있었고 국난(國難)을 구제하고 종사(宗社)를 편안히 보존하여 나라의 중흥을 일으켜 국가에 이익을 끼친 바 많았다” 하여 묘정(廟庭)에 배향케 하였다.

▲ 정숙공(貞肅公) 최사위(崔士威)의 묘지석(墓誌石). 클릭!

사위(士威)는 6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충공(忠恭)은 어사중승(御史中丞), 2남 충경(忠敬)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3남 준검(遵儉)은 사재승(司宰丞), 4남 충락(忠諾)은 내사서령사(內史書令史), 5남 충영(忠永)은 상서호부낭중(尙書戶部郞中), 6남 영언(令言)은 시합문지후(試閤門祗候)이고, 사위 김경화(金敬和)는 상서이부낭중(尙書吏部郞中)이다.

계방(繼芳ㆍ1045∼1116)은 자는 복시(復時), 사위(士威)의 증손으로 호부시랑 유서(惟恕)의 아들이다. 처음 성균시에 실패하였으나 훈(勳ㆍ順宗)의 태자부(太子府)에 입시한 뒤 줄곧 근직(近職)에 있으면서 명의태후와의 인척관계로 숙종과 예종의 총애를 받았다. 숙종 8년(1103년) 사신으로 요(遼)나라에 다녀왔으며, 예종 4년(1109년) 어사대부(御史大夫)로서 간의(諫議) 이재(李載)ㆍ김연(金緣)과 함께 여진족에 대한 윤관(尹瓘)ㆍ오연총(吳延寵)ㆍ임언(林彦)의 패사죄(敗事罪)를 다스리도록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111년 호부상서 겸 삼사사(戶部尙書兼三司使)를 거쳐 이듬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ㆍ검교사공추밀원사(檢校司空樞密院使)를 역임하였다. 1113년 수사공 병부상서 참지정사(守司空兵部尙書參知政事)가 되고 곧 상서좌복야 판삼사사 주국(尙書左僕射判三司事柱國)에 올라 치사하였다. 시호는 화순(和順).


 

▲ ‘고려사(高麗史)’ 13권 세가 13권의 화순공(和順公) 최계방(崔繼芳)이 예종 6년(1111년) 3월 9일 호부상서 겸 삼사사(戶部尙書兼三司使)에 임명되었다는 기록과 예종 8년(1113년) 12월 9일
상서좌복야 판삼사사 주국(尙書左僕射判三司事柱國)에 임명되었다는 기록 및 묘지석.

우보(祐甫ㆍ1105~1170)은 사위(士威)의 현손(玄孫)으로, 장생령(掌牲令) 은(殷)의 아들이다. 인종 13년(1135년) 임원후(任元厚)ㆍ정항(鄭沆)의 문하에서 급제하고 1145년에 완성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편찬 때 서림장판관 유림랑 상의직장동정(西林場判官儒林郎尙衣直長同正)으로 수교(?校)를 담당하였다. 의종 8년(1154년) 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에 올라 이듬해 평장사 최자영(崔子英) 등과 함께 왕에게 국정을 자문하였다. 1157년 천례(賤隷) 출신 정함(鄭?)을 불법으로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에 임명하자 사간으로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고 간쟁(諫諍)하여 왕의 미움을 사 상사봉어(尙舍奉御)에 좌천되었다. 1163년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로 동북면병마부사를 지내고 이듬해 대부소경(大府少卿)으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김모직(金謀直)ㆍ안공저(安公著) 등을 시취(試取)하였다. 1166년 형부시랑을 거쳐 이듬해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에 이르렀다.


▲ 최루백(崔婁伯)의 이름과 최우보(崔祐甫)가 의종 9년(1155년) 8월 우정언(右正言)에 임명되었다는 기록과 의종 17년(1163년) 1월 11일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로 동북면병마부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실린 ‘고려사(高麗史)’ 18권 세가 18권.


그 외 고려 때 신호위보승별장(神虎衛保勝別將)을 역임 중 조선이 개국되자 금부도사(禁府都事)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을 거부한 원(原), 조선 중종(中宗) 때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고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진 유정(有井)이 있으며, 명원(明遠)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